마태복음 파노라마
주제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마태복음은 서두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1:1) 하고
족보로 시작됩니다.
이는 마태복음의 주제와, 기록목적을 밝혀주는 중요한 명제(命題)가 되는 말씀입니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 목적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라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의 족보를 유의해보면,
"아브라함(2)에서 다윗까지(6),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 때까지,
포로에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 하고,
14대씩, 세 부분으로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
이렇게 하고 있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족보를 통해서
,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구속사의 산맥(山脈)에 우뚝 솟은 두 거봉(巨峰)입니다.
이 산맥이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에게까지 뻗어 내려온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 22:18)
언약하시고,
다윗에게,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하고
세워주신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하여주셨음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구속사의 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언약 안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고,
다윗부터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는
다윗 언약 안에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만일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길이 있는데 죽으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는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묻는다면,
"원 복음"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1장의 족보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벨론으로 이거"(1:11-12), 즉 포로 된 기간을 하나의 분기점(分岐點)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고 다윗의 왕위가 포로 기간에도 단절되거나 중단됨이 없이 계승시켜 나오셨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요,
구약성경의 기록목적도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히 1:1)으로
그리스도의 청사진을 그려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기록된 말씀(성경)을 들어서 입증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 분명해야만 합니다.
선지서들은 한결같이
포로에서의 귀환, 즉 회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복이 바벨론으로부터의 "돌아옴"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즉 사탄의 노예에서 돌아옴과 겹쳐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방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새 영, 새 마음, 내 신"(겔 36:24-27)을 너희 속에 두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귀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포로귀환을 겹친 그림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서에는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하심이라"(마 1:22), 즉
구약성경의 성취(成就)임을 논증하는 것이 12번(1:22, 2:5, 17, 23, 3:3, 4:14, 8:17, 12:17, 13:35, 21:4, 26:56, 27:9)이나 등장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그 분기점(分岐點)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신 16:15절입니다. 이를 분기점으로 하여,
전반부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그는 왜 오셨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기사와 이적은
, "예수"가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표적이라는 관점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근 3년 가까이 훈련시키신 후에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고백을 들으신 후에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마 16:21)고 말씀합니다.
만일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예수"가 누구인가를 인식하기도 전에 죽으실 것을 말씀했다면
그들은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누구이신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왜 오셨는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다"(20:28)는 것으로
요약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점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마음입니다
.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신"주님은
그 이후로
비장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20:18-19) 하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이점을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승천(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이 어째서 중요하냐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하신 많은 교훈들을 이런 맥락과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보아야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해체시키는 설교
복음서에는 주님의 행적과, 교훈과, 기사 이적 등이 등장합니다.
이를 단편적(斷片的)으로 다룬다면
복음서의 기록목적과 주제를 이탈하게 됩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그는 왜 오셔야만 했는가?"
하는 구도(構圖)에 입각해서 증거 해야만
주제가 부각이 되고 구속 주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통일성을 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착각과 혼동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설교하면서도 이 구도와 통일성을 망각한다면
그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주님의 탄생으로 시작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증거하고 있는 한 편의 증언(설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산산조각이 난 유리조각처럼 취급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교훈과, 축복과, 기사이적"으로 둔갑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선(線)입니다.
오늘의 설교들이 성경을 구속사라는 선으로 보지 않고,
교훈적인 점으로 접근하다보니
복음을 해체(解體)시키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서에 등장하는 기사 이적과,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기사와 이적은
그 의미가 전연 다른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사 이적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표적이라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기적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에 대한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후에
,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행 3:15-16) 하고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부활하는 도 전 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행 4:2-3) 합니다.
영적 출애굽
또한 마태복음은 주님의 사역을
영적 출애굽으로 해석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기 예수가 헤롯의 음모를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간 것을,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2:15) 하고 말씀합니다.
이는 호세아 11:1절의 인용인데,
이는 구약교회의 출애굽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을 영적 모세로,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을 아기 모세를 죽이려는 바로와 결부시켜서,
주님이 애굽으로 망명하였다가 돌아온 일을
출애굽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비약이면서도,
놀라운 영감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논리는 주님을 개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교회의 머리, 대표자로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영적 출애굽 사건임을 주님께서 유월절 양이 되어 주신 데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점은 산상수훈을 배열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4:25-5:2),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말씀하는 장면을 상기하게 합니다.
주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요단 도하를 성취하셨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간 시험을 당하심으로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드리실 영적 여호수아(예수)인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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