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파노라마
주제 :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
고린도후서는 안정(安靜)됨이나 조직(組織)성이 없는 격동(激動)의 서신이라고 말들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고린도 성도들을 소유하려는 거짓 사도와 참 사도간의 격전(激戰)의 장(場)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교회 내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복음으로 치유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후서는 “다른 복음”을 전파하려는 자들과, 복음을 보수하려는 자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격전장(激戰場)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혼란에 빠져있는 현대교회에 가장 적실성이 있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본서는 크게 세 문단(1-7장, 8-9장, 10-13장)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문단(1-7장)은 바울과 그가 개척한 고린도교회 사이가 불화 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2:1-7절 안에는, “근심”이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하면서,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2:4) 합니다.
그렇다면 불화의 원인이 무엇인가?
일차적으로는 바울이 고린도에 가기로 한 여행 일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구실일 뿐 근본적인 원인은 바울이,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3:1) 제출해야 한단 말이냐 한데서 알 수가 있듯이, “어떤” 사람들이 고린도에 내려와 바울의 사도 권을 부정하면서 이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이 불화가 바울의 눈물의 편지와 디도의 중재로 일단 수습이 되어서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에 이른 까닭이라”(7:9) 하는 것으로 첫째 문단은 마칩니다.
둘째 문단(8-9장)에서는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연보를 부탁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단순한 구제 헌금의 차원이 아니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유대를 맺어주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9:13, 15) 합니다.
그런데 셋째 문단(10-13장)에 이르러 본 서신의 특성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11:4) 합니다.
어떤 자들이 고린도교회에 침입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했고, 고린도 성도들은 이를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교회에 내려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이 본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통찰력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를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추론은 가능합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11:22-23) 한 것으로 보아 “저들”이 유대주의자들임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밖에서 교회를 대적하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일군”인 저들이 어찌하여 바울을 대적하고 있는가? 문제는,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다”(3:14)는 데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의문(儀文)이라는 수건이 마음에서 벗어지지 않고 있는 자와,
벗어진 자 간의 충돌인 것입니다.
바울은 2:14절에서 문맥을 중단하고 7:4절까지에서 수건이 마음에서 벗어진 자와 벗어지지 아니한 자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차별화를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는 여기가 심장부분이라 할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에서 수건이 벗어진 여부를 검증케 하고, 자신이 과연 새 언약의 일군 노릇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의문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지 점검하게 합니다.
이방인의 구원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모인 예루살렘 회의석상에서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15:5) 한 그런 사람들은 아직까지 수건이 마음에서 벗어지지 아니한 상태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교제를 나누다가 물러간 것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어떤 이들”(갈 2:12) 때문임을 감안할 때 이들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두려워서 물러갔다면 바울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10:4) 선언합니다.
“견고한 진”이 무엇인가?
1500년이나 내려온 왜곡된 유대주의입니다. 이는 “개혁(改革)할 때까지 맡겨 둔 것”(히 9:10)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신약시대가 도래했는데도 “견고한 진”이 되어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할례”입니다. 본서에는 할례라는 언급이 없습니다만, “의문의 직분,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3:7, 15) 하는 언급 속에 포괄적으로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마치 사활이 걸려있는 양 매달렸던 마지막 보루(堡壘)가 무엇인가? 그것이 할례였던(행 15:5)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10:5)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높아진 것”이라고 말씀하는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기”(롬 10:3)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를 파하시려고 율법에 열심이었던 바리새인 바울을 들어 쓰셨던 것입니다.
여기 풀어야할 난제가 있습니다. 유대주의라는 “견고한 진”을 파하면서, 동시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되게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한, 주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되게 하신 복음을 훼손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야고보의 제의를 받아드려 율법 준수의 표로 “결례”(행 21:17-26)를 행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대하게 됩니다. 이 하나되게 함이 본서에서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첫째와 셋째 문단 중간(8-9장)에,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8:14) 하고, 구제 헌금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너희와, 저희”가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이방 그리스도인과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전서에서도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고전 16:3) 합니다.
이점을 로마서에서는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합니다.
이제 각 장에 나타난 두 세력간의 갈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본서를 통해서 말씀하려는 중심주제요,
현대교회에 적용되는 적실성이기 때문입니다.
①, 1장에서,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12) 합니다. 이 말씀은 상대가, “육체의 지혜”로 행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다”(고전 2:1)는 점을 얼마나 역설하고 있는가를 전서에서 이미 살펴본 바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싸움은, “사람의 지혜 대, 하나님의 은혜”의 싸움이라는 말이 됩니다.
②, 2장에서,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17)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싸움이란 “혼잡 된 말씀 대, 순전한 말씀”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③, 3장에서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3:1) 하는 것을 봅니다. 이로 보아 저들은 천거서를 가지고 온 자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14)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싸움은, “수건이 마음에서 벗어지지 아니한 자와, 벗어진 자” 간의 싸움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④, 4장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3) 합니다. 누가 복음을 가로막는 자인가? 수건이 마음에서 벗어지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빛을 가리우려는 자와, 이를 밝히 드러내려는 자 간에는 영적인 충돌이 불가피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면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 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치 아니하고(1),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며(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16) 하고, “낙심”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복음을 보수하려는 싸움이 얼마나 고독하고 힘겨운 싸움임이 나타납니다.
⑤, 5장에서는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18상) 합니다. 이는 구원이란 100% 하나님이 해주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마치 여기에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보태야 하는 것인 양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19),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21상)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대속교리를 “도살장의 신학”이라고 조롱을 하면서 도리어 바울을 기독교를 변질시킨 자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속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이 무엇인가?
㉢ “우리로 하여금 저(그리스도)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하) 합니다. 여기 바울이 “나의 복음”이라고 말할 정도로 목숨을 걸고 증거한 복음의 핵심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칭의 교리”입니다. 구원계획에 있어서 가장 난제는
전적타락한 무능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질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만 해결이 되면 의로우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난제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졌다는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마치 사람이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는 양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싸움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자와, 인간이 무엇인가 보태야하는 양 가르치는 자 간의 싸움이라 할 것입니다.
⑥ 10장에서,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하고 드디어 선전포고를 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4-5) 합니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⑦, 11장에서는 그들의 정체를,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11:14-15) 하고 폭로합니다.
사탄은 가장(假裝)의 명수입니다.
㉠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13) 하여,
㉡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4)을 받게 하려고,
㉢ “간계로 미혹”(3)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이를 분별치 못하고,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4),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19),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20) 하고, 한탄을 합니다.
⑧, 12장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된 것은”(11-12) 하고, 사도권을 변호를 합니다. 이는 거짓 교사들이 바울을 자칭 사도라 하는 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 됨을 옹호하려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도의 권위가 무너지게 되면 바울이 전한 복음 자체가 훼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사탄이 노리는 궤계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도리어 바울을,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16) 하고 “거짓 사도”로 몰아세웠던 것입니다.
이들로부터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11:2-3)” 합니다.
어떻습니까?
상술한 두 세력이 현대교회 내에서 보수니 진보니 하고 더욱 극명하게 대립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뿐만이 아니라 복음주의자라고 말하면서도 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어서 복음보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윤리는 복음 안에 들어있어야만 합니다. 윤리를 복음에서 분리를 시키면 율법이 되어 정죄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빛을 가리우고 기쁨과 자유함과 감사와 감격을 덮어버리는 “수건”으로 둔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떠난 윤리는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를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칭의 만을 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성화도 주지를 못했습니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이를 격파하기 위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 “내가 자녀들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6:13) 합니다.
㉡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7:2) 호소합니다.
㉢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12:14-15) 합니다. 이렇게 말씀함은 거짓 교사들이 물질을 탐하는 자들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1:14상) 합니다. 지금은 바울의 심정을 “대강” 알고 있을 뿐이지만,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되는 것이라”(1:14하) 합니다.
바울은 그 날을 바라보며 저들에 대한 기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자랑과 기쁨과 소망은 오직 성도들이 주 예수의 날에 그 앞에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이 아닙니다.
“주 예수의 날에”! 한 때 사탄의 유혹에 미혹이 되어 바울을 배척했지만 그 날에는 저들이 바울을 무척이나 자랑으로 여기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에 대한 확신이기도 합니다.
형제도 그러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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