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강해 에베소서

[스크랩] [에배소서강해-2] 그는 우리의 화평 (엡 2:15-23)

하나님아들 2014. 1. 2. 10:20
[에배소서강해-2] 그는 우리의 화평 (엡 2:15-23)


2.그는 우리의 화평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眷屬)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5-23)

미국의 문화 인류학자 룻 베네딕트는 그의 저서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을 비롯한 동양인의 문화를 '수치의 문화'로 표현하고 서구의 문화를 '죄의 문화'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서양 사람은 골방에 혼자 있어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자기의 죄를 생각하지만 유교의 영향을 받은 동양 사람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체면과 수치의 면에서 죄의식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동양 사람의 죄에 대한 관념은 나에 대한 남들의 판단이 행동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소위 "남부끄러운 일만 안 하면 된다."는 죄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허물과 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말하는 <허물>(헬라어로 파라프토마)이란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잃거나 바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죄>(헬라어로 '하마르티아')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것, 화살이 과녁에 미치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이 삶의 표적을 잘못 두었거나 삶의 바른 목표에 이르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죄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하는 삶이 되지 못한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죄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부분 자신은 죄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죄의 의미를 알면 자신이 죄와 무관하다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남편 되시는 여러분은 어느 모로 보나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남편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아내에 대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있습니까? 또 아내 되시는 여러분은 아내로서 부족한 점이 전혀 없다고 자신합니까? 남편을 진실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내조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부족함이 없는 아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부모 되시는 여러분은 자녀 양육과 교육에 완벽한 부모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자녀들이 자랄수록 더욱 더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그들과 대화조차도 곤란해지고 전혀 타인과 같이 될 정도로 단절된 상태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자녀 되시는 여러분은 나름대로 부모의 자랑스런 자녀들이 되고 있습니까?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해 본 일이 있습니까?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적은 없습니까? 직장에서 여러분은 나름대로 훌륭한 직장인이 되고 있습니까? 일할 때마다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양심적으로 일했으며 해 놓은 일마다 최선을 다해 그만한 결과를 얻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모두가 다 죄인들입니다. 도둑이나 살인자, 사기꾼, 깡패 같은 사람들을 죄인들이라고 쉽게 말하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데는 쉽게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죄인이란 말을 듣게 되면 분개할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살인하는 죄나 소매치기한 죄나, <마땅히 되어져야 할 남편이 되지 못한 죄>나 그 죄의 삯은 다 사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1절)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가 가로막혀 단절된 상태를 죽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죄를 십자가로 소멸하시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그 중간에 막힌 담을 십자가의 피로 허무시므로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지 않고 사는 길이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은 영적으로 볼 때 살았으나 죽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아무 것도 할 것 없이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희생시키므로 인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율법에 대한 범죄라기 보다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운전하다 운전 부주의로 어린아이를 치어 죽게 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는 과실치사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상당 기간 동안 옥살이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선고된 벌금과 형기를 다 마치고 나면 더 이상 법률은 그 사람에게 죄를 따지지 않습니다. 적어도 법적인 문제에서는 모든 사건이 끝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어린아이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벌금을 물고 형기를 다 치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어머니에게 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또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운전자가 범한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그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범죄인 것입니다. 그 어머니와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어머니 편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자유로운 용서의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범죄한 것은 율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대해 범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시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막혔던 장벽이 무너지고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된 사람은 어느 누구와도 화평을 누릴 수 있도록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화평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마음에 큰 상처와 아픔이 있다 해도, 아니 십자가의 피를 흘리는 희생이 뒤따른다 해도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 화목을 이루는 생활을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고용주와 근로자와의 관계에 있어 허물과 죄로 가로막힌 것이 있습니까? 피차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 화평을 이루고 하나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피차에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새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며 성숙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과 용서로 하나가 되지 못한 가정과 교회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그리고 성숙되지 못한 가정과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과 우리 교회가 평안과 기쁨, 생명이 넘치는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되기 위하여 먼저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과거 이방인과 유대인은 서로 원수처럼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넘지 못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유대 총각이 이방인 처녀와 결혼하거나, 한 유대 처녀가 이방인 총각과 결혼하면 유대 총각이나 처녀의 장례식이 거행됩니다. 그만큼 유대인이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은 죽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에 오심으로 이같은 장벽은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장벽이 세워진 이유는 그들이 사는 세계관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역사란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하는 행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있어 역사란 돌고 도는 물레방아같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역사란 하나님께 가는 길이었지만, 이방인에게 있어 역사란 멸망으로 가는 길에 불과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그들을 다스리는 유일한 왕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소위 신정 정치였습니다. 기드온이 여러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백성들이 그에게 와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기드온이 한 일을 보고 백성들은 기쁘게 그를 왕으로 모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

그러나 이방인들은 민주정치나 귀족정치, 왕이나 전제군주 혹은 원로원이나 의회에 의해 통치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왕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백성이었지만, 이방인들은 단지 한 국가 사회의 시민에 불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졌지만 이방인들은 단지 한 국가의 시민권에 불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이방인들은 약속이 없는 백성에 불과 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그리스도밖에 멀리 있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중간에 막힌 담이 헐리고 멀리 있던 자들이 가까워져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이방인들도 언제나 하나님께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새로운 역사관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노예도 자유자도 없고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으며, 지식인도 야만인도 없으며, 계급과 인종 등의 장벽과 분리가 모두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어 화평을 이루게 된 것이 어떤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그의 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는 유대인만을 위한 것도, 이방인만을 위한 것도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다같이 사랑하십니다. 참으로 그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예수를 다 같이 사랑하게 될 때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되고 평화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떤 조약이나 외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을 하나되게 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민족적, 국가적 문화와 문명 등의 특성을 말살하고 성취코자 하는 통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국가의 모든 민족이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통일입니다. 인류 전체를 한 국민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예수의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인류가 사랑과 용서를 통해 하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만나 하나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화평을 이루게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교회는 결코 성숙한 교회로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로 가로막힌 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만 허물 수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은 둘 중 어느 하나가 십자가를 져야만 이루어집니다. 아니면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피 없이는 화평을 이룩할 수 없고 참된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욱 더 하나 되어 화평을 이루고 성숙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라가 평안해질 것이며 보다 성숙한 사회가 되어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생활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이웃과의 화평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고통과 손해를 볼 수도 있으며, 얼마든지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는 생활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충만한 성도의 생활로 더욱 더 성숙된 여러분과 교회, 그리고 나라 민족이 되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 동희 목사)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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