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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슬람의 정체와 현황

하나님아들 2013. 8. 23. 11:36

 

 

이슬람의 정체와 현황

 

 

이슬람이란 무엇인가

 

종교와 세속을 포괄한 것이다.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며, 또 무하마드는 이슬람의 창시자가 아니다. 이런 말이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이단적인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은 교조주의적인 이슬람 학자나 이슬람 개혁자가 교의의 기본적 성격으로서 주창하는 말과 별로 유리되어 있지 않다. 즉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다. 사람들이 곡해하는 바와 같이 개인의 생활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 이슬람은 인간이 완전하게 사는 방법이고 인간 존재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세상만사에 걸친, 즉 개인 생활에서부터 사회, 물질, 도덕, 경제, 정치, 법률, 문화, 국가, 국제문제에 이르는 안내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 기술은 이슬람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으로서 다른 <고등종교>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특정 짓기 위해서 이슬람교도이건, 이슬람교도가 아니건 숱하게 거듭해서 강조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구태여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다는 따위의 말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이슬람은 종교, 세속 쌍방에 걸쳐 전적으로 합일된 생활방식이며, 신앙이 자세임과 동시에 예배의 방법이고, 거대하며 완전한 법체계이며 문화, 문명 그 자체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경제 제도이며 상업의 방법이며 정체이며 통치의 방법이다. 그것은 특수한 하나의 사회인 것이며, 가족생활의 방법임과 동시에 상속, 이혼, 의복, 식사, 위생 등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세속, 초속양면에 있어서의 정신적 전체성이고 인간의 전체성이다.

 

그 당연한 귀결로서 이슬람에 있어서는 종교와 정치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 매우 강렬한 개성을 가진 카다피대령 (리비아 혁명의 지도자)이 아무리 특이한 정책이나 견해를 세웠다 한들 그는 완전한 이슬람 정통파일 따름이며 그는 "종교적 자각과 정치적 결정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의 수상이던 즈르피칼 부토가 아무리 당돌한 정치적 결정을 단행했다 해도 그리고 성실하고 공정한 성명을 발표했다 해도 그가 "예언자 무하마드의 삶의 방식, 가르침은 우리나라 외교정책, 토지, 노동, 교육이나 그 밖의 많은 개혁의 초석이 되어 있다"고 이슬람 제국 수뇌회의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언제나 다름없이 이슬람의 상투적인 정치적 발언을 되풀이 한 데 불과하다.

 

이와 같이 전 인구의 다수가 이슬람교도인 국가에 있어서는, 정치는 바로 이슬람의 정치다. 정치를 세속의 일이라 하여 종교와 분리하는 나라는 이슬람 국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전투적 이슬람」이 오랜 역사의 과거만이 아니고 긴 장래를 가질 수 있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 장래는, 모슬렘 다수파의 나라에서 아직도 「코란」의 가르침이나 이슬람 교전에 접근해 있지 않은 나라가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되어 갈 것이다.

 

최후의 예언자 무하마드

 

이슬람은 예언자 무하마드가 일으킨 새로운 신앙은 아니다. 어떤 이슬람 개혁자가 말했던 것처럼 「이슬람이란, 무하마드가 최초로 이름을 붙인 신흥종교의 명칭은 아니다. 그러므로 무하마드가 이슬람의 창시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무하마드는 전임자들의 신앙을 되풀이하는 최후의 예언자임을 믿고 있을 뿐이다.

 

몇 개 국어로 번역된 무하마드의 삶의 방식, 가르침에 관한 문헌이 나와 있으니까 우리는 그에 대한 윤곽쯤은 알아볼 수가 있다. 무하마드는 고아로 자랐다. 30대에는 종교, 상업의 중심지인 메카에서 상인으로 일단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다. 신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무하마드에게 계시한 가르침을 전파하도록 했는데 메카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는 622년 -이슬람력으로는 이 해가 기원이 된다-소수 지지자와 함께 오아시스가 있는 도시 메디나 사람들의 초청에 응하여 메디나로 옮겨갔다. 이를 '히지라'(성천)라고 부르는데 메디나로 성천한 후 무하마드는 10년 사이에 새로운 이슬람 공동체를 조직하여 그것을 강화했다. 메카에서 적의 공격을 물리친 그는 전쟁과 외교적 수완으로 아라비아의 광범한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쥐게 된 그는 마침내 승리자, 통치자로서의 충분한 힘을 얻어 가지고 메카로 개선했다. 만년에 가서 그는 중앙 및 서부 아랍을 접하는 전 지역의, 문자 그대로 영주였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시리아, 이라크에 이르는 북방 내지 북동 방으로 군사공격을 일삼았다.

 

무하마드 개인에 대해서 말한 자세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에 대해서 말하자면 아무래도 「신의사도」라는 가르침이 전면에 강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키는 평균적인 신장이었고 완강한 체구의 소유자였으며, 매부리코와 크고 검은 눈동자,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머리카락과 턱수염은 짙었고 입이 컸다. 그는 항상 당당했고, 걸음걸이는 내리막길을 뛰어가 듯이 급했으며 남들이 따라가기는 힘에 겨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뒤를 돌아볼 때는 얼굴이 아니고 몸 전체로 뒤를 보았다. 그는 결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빠른 어조로 빈틈없는 말을 했다. 여자나 아이들에게 다정했고 동물을 사랑했다. 향수를 좋아했고 양파나 마늘 따위 냄새를 풍기는 것에는 얼굴을 찌푸렸다. 특히 모스크에서 예배 보는 사람들의 입 냄새를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자기감정을 참고 누를 수가 있었다. 무하마드는 분명히 개인으로서의 자기와 예언자로서의 자기를 구별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오. 신이 나에게 계시한 일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나를 따라야 하지만 당신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소. 그러므로 당신들 자신에 대한 나의 견해가 당신들을 구속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그가 아브라함, 모세, 그리스도 등과 같은 예언자에 이어서 최후의 예언자로서의 위치에 놓여진 이래로 그의 지위와 그의 가르침에 의한 신앙은 유일신, 최후의 심판과 함께 이슬람교의 3가지 기본적 신앙의 하나로 되어있다. 필연적으로 개인으로서의 무하마드의 자세와 예언자로서의 역할은 동일시되고 말았다. 무하마드가 살아간 방식은,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모범으로 받아들여졌고, 신심이 깊은 이슬람교도에 있어서는 무하마드는 완전무결한 존재인 것이다. 그가 비판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고, 또 우상숭배를 금한 그의 가르침 그대로 그의 초상화가 그려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코란은 「성서」가 아니다

 

코란은 결코 무하마드에 의해서 씌어진 성전이 아니다. 「코란」이라는 말의 뜻은 「읽는다」는 것이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신이 무하마드에게 계시한 말을 그가 읽었던 것이다. 근대 이슬람 학자로서 뛰어난 사상가인 퍼즐러 라프맨은 코란에 대해서 「순수하게 신성한 말씀이며, 신이 예언자 무하마드의 마음 속 깊이 말하신 말씀이다. 그 성스러운 말씀은 예언자의 마음을 통해서 솟아난 것이지만, 예언자 자신은 한낱 인간일 따름이고 신성한 존재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코란이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 하지만 그것이 「성서」일 수는 없다. 그 말씀 자체가 신성한 것이고 신격의 일부분이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있는 이집트의 이슬람 개혁자 아브두는 「코란은 창조된 것이다」라고 그의 문헌에 써 놓았다. 동양학자 W.캔드엘 스미드는 「이슬람에 있어서의 코란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바이블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코란이 성스러운 가치를 가졌음으로 해서 가장 빛나는 아랍어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금세기까지 엄중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30년에 케말 아타튜르크가 감히 그것을 시도하여 터키어로 공식 번역하는 추진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는 아무도 그런 일을 맡아 주겠다는 사람이 없음을 알았다. 단지 문학적 견지에서 코란을 말하자면 코란은 아랍어로 된 최고의 작품이다. 코란은 갖가지 길이의 114스라 (장)로 구성된 것인데, 정신적 내용이나 언어상으로도 가지가지 뜻이 깃들어 있다.

 

무하마드는 글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자신이 붓을 들어 그것을 쓴 일은 없었다. 최종적인 집록은 그의 후계자 손으로 이뤄진 것이었는데, 무하마드의 사후 12년이 지나 제3대째의 후계자에 의해서 완성을 보았다. 그러한 시간적 지체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규범인 원전은 무하마드의 정신과 시간의 흐름을 충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코란에 관해서는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슬람 연구가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일반적으로 합의되고 있다. 즉 코란의 각 장은 거의 연대순으로 재편성된 것이고, 초기 메카 시대의 장과 후기 메디나 시대의 장 사이에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초기 것은 짧으면서 힘차고 종교적 계시로서 약동 적인 정신이 넘쳤으며 세속을 초월한 것이다. 그런데 후기의 것은 길면서 자상한 산문조의 문장이고 세속적이다. 메카 시대의 장은 경고자의 계시이고, 메디나 시대의 그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자로서의 계시이다. 무하마드가 약 70명 내지 1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메카에서 메디나로 천도한 후, 그는 자기 자신이 아주 급속히 성장된 '운마'(공동체)의 장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 때문에 메디나 시대의 계시가 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다.

 

그는 급속히 발달하는 공동체를 다스려야 했으므로 법률을 제정했다. 이때의 무하마드는 단순한 예언자는 아니었다. 그는 군인이었고-실제로 초기 전투에서는 그 자신이 얼굴에 부상을 입기도 했으며 적어도 1명의 적병을 죽였다고도 한다-, 재상이기도 했었다. 그는 전쟁도 했지만 평화도 이룩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기막히게 가정적인 남자였다고도 한다.

 

기본적인 교의 「이슬람의 다섯 기둥」

 

무하마드는 소박하기보다는 차라리 야성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베드윈(유목민)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5가지 기본적인 종교상의 의무를 정했다. 그것을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라고 하는데,

 

①신앙의 고백

②'자카드'(의무적인 회사로 내는 세금)

③1일 5회의 예배

④단식의 달을 이행할 것

⑤'핫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메카 순례 등이다.

 

신앙의 고백은 세계의 어떤 종교의 경을 외우는 것보다도 짧고 간소하다-「신은 하나이니라. 무하마드는 신의 사도이니라.」 이런 고백의 말은 이슬람교에 귀의하려는 자 모두가 외쳐야한다. 자카드는 단순히 복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만이 아니고, 메디나 시대에 있어서 수입원이 부족했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전리품이 모아질 때까지의 아주 중요한 재원이었다. 이슬람법은 자마드를 얼마쯤 징수한다는 세세한 문제까지를 정해 놓고 있었는데 우리가 여기서 그 세액을 산출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유목민족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화로 21디나로 또는 은화로 200디르함 이상을 소유한 자는 5퍼센트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일정한 과세 평가법칙이 있었고 근년에 와서 자카드는 이슬람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일 5회의 예배는(원래는 3회였다는 증거도 있다고 한다) 예배자의 마음을 24시간 신에게 향하게 한다는 의미 이외에 실제생활 면에서도 효과가 있다. 즉 예배자는 예배 전에 정해진 청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얼굴, 손,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예배는 메카 쪽을 향해서 하는 것이데(최초에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였다는데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전통을 믿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1일 5회를 그런 예배를 하고 보면, 몇 억 명이나 되는 이슬람교도가 지구상의 동일지점을 향해서 예배를 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은 단일사회의 단일행동과 똑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상징적인 것이 1년에 1회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메카 순례인데 그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자기억제, 금욕으로서의 단식은 많은 종교에서 정신적인 미덕을 높이는 것으로 되어있다. 라마단(단식의 달) 중에는 일출에서 일몰까지의 사이에 식사, 수분의 섭취, 성교는 금지되어 있고, 최근에는 흡연도 금지된다. 더운 나라에서 라마단이 한여름에 실시될 때에는(이슬람력은 태양력보다 1년이 10일 내지 11일 적다) 물을 마시는 일이 금지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시련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으로 강제되는 것은 아니고, 야간에는 음식도 취할 수 있으며 라마단에 쓰이는 특별한 음료수와 과자가 있다. 보통 주간의 단식에서 잃은 영양분 이상의 것을 야간 식사에서 보충하는 경우도 많다. 이슬람의 단식은 유복한 자에게 굶주림의 괴로움과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슬람교도의 종교생활사의 토대는 이렇듯 간소하면서도 엄격한 이슬람의 다섯 기둥에 의해서 굳혀져 왔다. 무하마드는 또 메디나의 장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인간의 통치방법을 정했다. 그러나 코란의 전체 6천절 중 겨우 5백 내지 6백 절을 가르치는 메디나의 장만으로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슬람법의 성립

 

무하마드의 후계자들은 그의 사후 25년 이내에 탄생된 광대한 이슬람 제국의 통치를 위하여 이슬람법의 제정을 해야만 했다. 그 때문에 예언자의 의도하는 바를 더욱 깊이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을 무하마드의 친척, 친구, 초기의 지지자들의 회상록에서 찾아냈다. 이 회상을 '허디스'(전승)라고 불렀는데, 예언자가 이야기한 것과 행한 것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슨나'(예언자가 걸러온 길)라 하여 하나로 모아졌다. 예언자의 언행은 코란의 계시와는 달리 이슬람교도의 경건한 생활규범으로 간주되었다.

 

허디스는 그의 사후 약 50년 후에 기록되기 시작했는데, 본격적으로 예언자의 언동이 모아지면서부터는 다분히 의도적인 창작도 생겨났다. 따라서 여러 가지가 가미되면서, 예언자의 인물 자체 이상으로 과장되어 버렸다. 이에 대해서 9세기에는 「학식을 가진 자는 전승을 창작해서 허위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참다운 문제를 피하는 방법으로서 창작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후계자들은 7세기 초의 메카, 메디나 시대의 상황과는 다른 9세기 중엽의 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적합한 허디스를 찾아내어야 했다. 후계자들은 허디스의 이 따위 엉성한 집록을 그대로 방치해 버리지는 않았다. 870년에서 915년 사이에 사망한 몇몇 이슬람 법학자에 의해서 6종류의 허디스 선집으로 정리되었다. 그 중 붓하리와 모슬렘에 의한 두 선집은 「두 가지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며 신뢰를 받고 있다. 거기 수록된 일화나 이야기는 1명 내지 2,3명의 증언에 의해서 입증된 무하마드 자신의 언동을 바탕으로 한 문답형식으로 되어있다.

 

붓하리의 조사로는 60만 점의 허디스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7천 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학자에 의하면 신뢰도가 높은 허디스는 5백 점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숫자가 근대 이슬람 학에서는 더욱 감소해간다. 그러나 비록 수효가 적다고 하더라도 석가나 그리스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하마드의 성격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있다. 여기서 믿을 만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본다.

 

「이 세상 사람은 이방인이거나 여행자이다. 저녁에는 새벽까지 살 것을 기대하지 말고, 아침에는 저녁까지 살 것을 생각하지 말라. 질병이 그대의 건강을 망치기도 할 것이고, 죽음이 그대의 목숨을 빼앗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느냐」(이것은 그러므로 물질적인 부를 축적해서 무얼 하겠느냐의 뜻이고, 불교적인 체관론과는 다르다), 「좋은 이슬람교도가 되고자 하거든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관여하지 말라」,「메디나의 모스크에서 하는 예배는 다른 곳에서 하는 수천 번의 예배보다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메카의 예배는 그보다 더 가치가 있고 다른 장소에서 하는 예배의 10만 번에 값한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가치 있는 예배는 신만이 알고 사람이 보지 않는 집에서 다만 무심코 신을 향해서 무릎을 꿇는 일이다」,「이웃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라. 그러면 그대는 신자가 되느니라」,「그대 자신이 바라는 일을 이웃 사람에게 베풀지어다. 그러면 그대는 이슬람의 신자가 되느니라」,「지나치게 웃지 말라. 웃음이 지나친 자는 마음을 잃는 것이니」…….

 

허디스의 중요성은 그것이 전기나 역사책이기 때문이 아니고 이슬람법에 있어서 코란에 이은 중요한 법이 원천이기 때문이다. 허디스는 예언자의 언행을 상세하게 이야기한 것이며 예언자가 생각한 바를 반영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성서처럼 간주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코란과 마찬가지로 허디스는 기본적인 정신을 전하는 「말씀」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이슬람 사회의 규범

 

우리는 여기서 이슬람의 기본적 개념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이슬람은 한결 뛰어난 「법의 종교」라고 하겠는데, 코란과 허디스, 또는 슨나에 곁들여 '이쥬마'와 '캬스'도 이스라엘 사법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다. 캬스는 과거에 있었던 사례 중에서 새로운 사상과 똑같은 케이스를 비교하는 연역적 유추법이다. 그리고 이쥬마는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고방식이다. 이 말의 뜻은 미슬람 공동체=운마 전체의 합의라는 것인데, 이 원칙을 통한 이슬람식 통치는, 매우 민주주의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민중의 의식 속에 법률을 받아들이기 쉽게 함과 동시에 국가 관리의 기능으로서도 효과가 있다. 이쥬마의 사례로서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를 소개해 보겠다.

 

어떤 종교가가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마땅히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강력히 그에 반대했다. 종교가의 그런 주의주장은 공동체의 합의를 얻지 못하게 되고 그는 결국 커피를 마시는 행위를 인정해야만 했다. 무하마드가 그의 아내 하디자와 함께 시작한 이슬람 공동체의 건설에서 그는 상식과 올바른 마음에 터잡은 확고한 신앙을 쌓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말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나의 공동체는 나쁜 짓에는 합의하지 않는다.」

 

이슬람 공동체는 다수 의견에 의해서 운영되는 국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 점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역할과는 크게 다른 점이 있고, 또 그것은 아주 중요한 점이다. 이슬람의 교의를 배운 자, 라는 것은 동시에 이슬람법을 배운 자임을 뜻하는 것인데 그런 학자를 '우라마'라고 부른다. 그들 종교적 법률가는 순수한 종교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공동체의 책임자이기도 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의 공적 입장으로 보아 우라마(가장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종교인」이라는 뜻이 된다)는 목사나 승려에 가까운 존재이다. '이마무'는 단순히 모스크에서 예배를 지도하는 「도사」인데 그것은 집단예배에서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꼭 우라마가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칼리파 아루라시둠'(진실을 인도하는 칼리프)이라는 전승에 터잡은 관습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 '칼리프'라는 것은 무하마드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초대에서 제4대까지의 칼리프, 즉 초대 아브 바크르, 제2대 오마르, 제3대 오스만, 제4대 알리를 가리킨다. 이들 4명이 통치하던 기간은 632년에서 66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이 기간은 이슬람의 황금시대로서 각종 고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4명 중 2명은 암살당하고 1명은 자택에서 코란을 읽던 중에 참살 당했다. 이슬람과 아랍 세계를 지금까지도 혼미 속에 빠뜨리고 있는 종파의 분열이 이 시대부터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이슬람교가 서쪽으로는 모로코에서 동쪽으로는 인도까지 그들 세력을 확대하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불운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영예로웠던 4명의 칼리프의 언동이 전승으로서 이슬람법의 집대성에 첨가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슬람법의 성문화는 767년에서 855년 사이에 활약한 4명의 법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때 두 개의 큰 학파가 그들 손에서 탄생했는데, 하나는 터키, 중앙아시아, 인도에서 발생된 혁신적인 '하나피' 학파이고 또 하나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생겨난 전통적인 '한바리' 학파이다.

 

'샤리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슬람법의 골격은 9세기 무렵까지 이루어졌는데 그에 의하면 코란은 신성하고 변할 수 없는 성전이라 하였고, 예언자의 언행에 터 잡은 허디스(공인된 전승)는 성전은 아니지만 변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초기 4대의 「정통 칼리프」(제4대까지는 이슬람 세계가 통일되어 있었지만, 제5대 째를 둘러싸고 무아우이아=우마이아조의 창설자를 지지하는 '수니파'와 알리의 일족을 옹립하는 '시아파'로 분열되어 피투성이가 되는 투쟁을 벌였다)의 전승은 비록 신성하다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존중해야 할 것으로 되어있다. 어떤 법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명기되어 있다-「이쥬티하드의 문은 닫혔다」. '이쥬티하드'란 「독자적 판단」이라는 말인데 그것이 닫혔다는 것은, 모든 판단을 과거의 전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으로 볼 때 '샤리아'는 서구에서 생긴 근대적인 법체계와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그것은 「법」이라기보다는「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니, 시아파의 원류

 

이슬람법이 종교와 세속의 일을 포괄하는 성격을 가졌음으로 말미암아서 이슬람 개혁자가 항상 직면해야 하는 것은 이슬람법의 전부 또는 일부를 유지해야 하느냐, 폐지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쥬티하드의 문이 닫혔다고 함으로써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된 이슬람법을, 걸핏하면 근대 이슬람 개혁자들은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들이 의도하는 바는, 이쥬마와 이쥬티하드를 방패로 1천년 전의 옛날로부터 꼭꼭 문을 닫아걸고 있는 샤리아를 두들겨 깨려는 것이다.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죽음은 다수파 수니와 소수파 시아의 분열을 초래했다. 알리 이후의 정치관, 종교관은 시아파가 계승했는데 그것은 그대로 이슬람 원시 종교관이었다. 시아파는 이마무의 위치를 신과 인간의 중개역이라는데 두었고 이마무는 동시에 반신격화된 종교 권위자였다. 그러한 이마무가 지도자로서 세속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으로 수니파는 중개자를 두지 않고 신자들 개인이 직접 신과 대치한다는 사고방식을 보이고 있다. 불교나 그리스도교에도 이와 비슷한 분열은 있다.

 

즉, 시아가 대승불교나 로마 카톨릭과 같은 입장이라면 수니는 소승불교나 프로테스탄트인 셈이다. 시아에서는 알리를 12대에 걸친 이마무의 초대로 보고 있으며 신성한 지도자로서 숭배하고 있다. 최후인 12대의 이마무, 무하마드 마하디는 940년에 돌연 세상에서 모습이 사라졌는데 그 후로 그를 계승하는 자는 없다. 시아는 1502년에 샤아(왕) 이스마일에 의해 건국된 신생 페르시아에서 정교가 분리되었다. 두 종파의 교의상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니는 법률의 근원으로서 코란과 허디스, 공동체의 합의, 「전례」등을 들고 있는데, 이에 반해서 시아는 코란, 허디스, 이마무의 합의, 그리고 이마무의 판단이라는 4가지를 법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시아는 허디스의 독자적 집록을 가졌으며, '자파리'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학파를 가지고 있다. 시아파 교도 역시 메카 순례를 하지만 종교상의 정열적인 발로에서 이라크의 나자프와 카르바라에 있는 알리의 두 아들 핫산과 후세인의 무덤을 참배하기도 한다.

 

'지하드'란 무엇인가

 

전투적 이슬람의 대표자는 이슬람의 뛰어난 점을 찬양하는 것에 너무도 정력적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슬람은 칼과 '지하드'(성전)에 의해서 세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범죄에 대해 이슬람 경제는 비현실적이다. 이슬람은 중혼을 인정하고 여성을 차별한다.」

 

이런 모든 일은 사실 코란에 의해 정해진 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정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사우디 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정부 방침이기도 하다. 지하드라는 말 그 자체는「노력」이라는 뜻을 가진 말에 지나지 않다. 초기의 혁신적 일파인 '하리지'파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5가지 기둥에 곁들인 6번째의 기둥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하마드의 우상숭배와의 싸움이 지하드였던 것이고, 지금도 그것은 의무라고 생각하는 학파가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유태교, 그리스도교 등 다른 일신교 신자를 「계전의 백성」이라 하여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으며 초기의 세력 확장 시기에서도 이슬람 국가는 세금을 내기만 하면 그들의 사회를 보호했다. 서구에 이슬람이 침입하자 서구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슬람은 침략자라는 이미지가 심어지게 되었다. 근년에 와서 가장 새로운 지하드로는 1914년에 최후의 칼리프이던 터키의 스루탄이 동맹국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던 싸움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실패로 끝났다. 아주 최근에는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지하드가 고창 되어 있지만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형벌

 

코란에 규정된 형벌은 실제로는 실행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부정한 짓을 범한 남녀를 유죄로 규정하고 돌로 쳐 죽이는 형벌에 처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목격한 4명의 확실한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증인을 찾기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슬람교도가 4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4명을 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 경우(금전의 분배도 포함해서)에 한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고리대금은 금지되어 있지만 투자에 의한 경제적 수입은 인정되고 있다. 아무리 코란에 엄격한 원칙들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7세기 아라비아 세계의 상황에서만 어울리는 것이라는 사실에 이슬람 개혁자들은 이제 동의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시대착오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이슬람교도, 그리고 운마의 일원이라고 자부하고 있어서 이슬람 규범을 굳게 지켜나가고 있다. 이러한 깊숙한 이슬람의 침투성이야말로(인물백결』「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100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에서 뉴튼, 그리스도, 석가, 공자, 사도 바울보다도 무하마드가 상위에 놓여진 이유이기도 하다.

 

무하마드보다 6백 년 전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리스도는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가 세속적인 일의 모든 면에서 영향을 끼쳤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말로써 통치권(가이사)은 종교와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슬람은 통치권이 종교를 떠나서 성립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슬람교 출현배경과 신앙관

 

이슬람이란 무엇인가(2)

 

7세기 초 아라비아의 예언자 마호멧에 의해 완성된 종교. 전지전능한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멧에게 계시되었다고 하며 유대교, 그리스도교 등 유대계의 제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이다.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마호멧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로 불린다. 그리스도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이슬람교의 성립

 

성지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연안에서 약 80km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 안에 이르는 대상로의 요지인 동시에 카바 신전과 북동쪽 구릉지대는 옛날부터 유대교, 그리스도교도들의 신성한 영장(靈場)으로 되어 있어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황야에서 온 코레이시족이었으며 마호멧은 그 중의 하심가 출신이다.

 

마호멧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얼마 후 어린 마호멧을 남겨놓고 돌아가셨으므로 그는 할아버지에게 이어서 숙부에게 양육되었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그 신도의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메카에도 그 영향을 받아 신은 유일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있게 되어 그들을 하니프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여전히 옛날부터 전하는 다신교에 빠져, 돌, 천체, 샘, 수목 등을 숭배하였다. 하니프들은 이에 반대하여 세계의 종말은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때는 선한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되고, 유일신은 곧 창조주이며 인간에 대하여 선의를 갖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마호멧이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모든 아라비아 백성에게 전도할 사명을 띤 몸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것은 40대에 들어와서였다. 그리고 그 주장은 다분히 하니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마호멧은 메키 근교인 히라산동굴에서 최초로 하늘의 계시를 받은 후 맨 처음 그의 아내 하디자가 입신하였고 그후 메카의 박해시대에는 자주 남편의 힘이 되었다. 마호멧은 메카에서 포교를 시작한지 3년 만에 40명, 10년만에 겨우 100명의 신도밖에 획득하지 못하였고, 게다가 메카의 집권자인 코레이시족의 박해가 날로 심해졌으므로 이를 피하여 622년 9월 메카 북방 약 400km지점에 있는 메디나로 갔다. 신도들도 이 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 곳의 협력자들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나행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라고 하며 이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어떤 명문의 인사가 다른 유력부족의 보호를 요청하여 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헤지라라고 하며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는 풍습이다. 마호멧의 운명과 그 교의 장래는 이 헤지라에 의하여 일변하게 되었으니, 메카에서 이주한 교도와 메디나의 협력자들은 함을 합쳐 교단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이슬람교의 시초이며, 후에 점차 강화되어 이슬람교단에 의한 국가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후 마호멧은 교단을 이끌고 여러 차레 메카군과 싸워 630 년 1월에는 마침내 메카를 정복하고 카바 신전에 들어가 이것을 알라의 신전으로 바꾸어 놓았다. 얼마 후 아라비아의 태반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광대한 아라비아 지역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한 것은 실로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그의 이상은 종래의 부족단위 사회를 하나의 이슬람교단으로 바꾸어 알라의 가르침에 따라 전체 교도를 한 형제로 삼는 평화스런 사회를 만드는 데 있었으나 632년 6월 메디나의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이슬람교의 신앙

 

1. 알라와 코란

 

다신교 시대부터 알라는 메카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되어 왔으나 마호멧은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을 허위라 하여 부정하고 오직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내세웠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와 동등하거나 비교될 존재는 없다. 모든 피 창조물과는 엄격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경동맥보다도 더욱 가까이 있다. 알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것도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애에 넘쳐 잘 용서하고, 잘 들어주고, 잘 보아준다. 알라는 진리이며 빛이며 모든 곳에 존재하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 하는데 이것은 물론 마호멧이 전한 것이며 그가 죽은 후 신도들에 의하여 수집 정리된 것이다. 현행의 코란은 650년경, 제 3대 칼리프인 오스만이 명령하여 만들게 한 표준본이다.

 

이 경전은 이슬람의 교의, 제도, 마호멧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근본적인 문헌이며, 무슬림들은 이것을 독송할 때마다 법열의 경지에 빠져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힘과 미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가는 아랍어로 된 원전에 의하지 않고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들다. 또 코란은 마호멧에 계시된 바를 해설이 없이 모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후세의 학자들이 서술한 많은 주석서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법학, 신학의 최고 근원은 역시 코란에 있는 것이다.

 

2. 이슬람의 근본신조

 

이 가르침의 정식 명칭은 '알 알이슬람'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유일절대의 신,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는 말이며 귀의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 가르침은 모두 명확한 아랍어로 계시되었으며 마호멧도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였다는 점이 중시되고 있다. '알라이외에 신은 없다'는 것이 이슬람교의 근본신조이며, 후에 '마호멧은 알라의 사자(라수르)이니라'가 추가되었다. 이 성구를 외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로 되어있다. 알라의 가르침을 모은 코란에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여 '믿음이란 그대들의 얼굴을 동으로 또는 서로 돌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알라와, 최후의 날(최후 심판의 날)과, 천사들과, 여러 성전과, 예언자들을 믿는 사람이다.' 라고 적혀 있어 이 모든 사항을 맏는 것을 '이만'이라고 한다. 또 오로지 알라만을 믿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고, 예배, 희사, 재계 등의 근행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만이 알라에 귀의하는 길이라 하여 이것을 '이슬람'이라 칭한다.

 

3. 이슬람신앙의 요소

 

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셋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지(知)'로 이것은 알라의 계시를 잘 이해함을 말한다. 둘 때는 '언(言)'으로, 마음에서 알고 또한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이다. 셋째는 '행(行)'이며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를 열심히 실행하는 일이다.

 

4. 오주 (五柱)

 

무슬림에게는 실행하여야 할 중요한 의무 다섯 가지가 있다. 이것을 이슬람의 오주라 하며 이들 의무를 다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하는 일을 '이바다'라고 한다. 코란에는 희사 (喜사)와 단식을 중요한 봉사로 들고 있으나, 후세에 이르러 다음의 다섯 가지를 이르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1) 증언 또는 고백

 

'나는 알라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마호멧이 알라의 사자임을 증언합니다.'하고 입으로 왼다. 신도는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증언을 행하게 되어 있다.

 

2) 예배

 

일정한 시각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를 말하며, 개인적으로 수시에 행하는 기도는 '두아'라고 부른다. 예비는 하루에 다섯 번을 행한다. 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의 다섯 면이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 예배를 행한다. 또한 예배를 할 때는 메카쪽을 향하여 행한다.

 

3) 희사 또는 천과 (天課)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며 비이슬람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데 필요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4) 단식

 

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월간, 주간에 음식, 흡연, 향료, 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한다. 단 음식은 흰 실과 검은 실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라마단 월간이 끝나고 다음 새 달이 하늘에 떠오르면 단식 완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군중들이 거리고 쏟아져 나와 서로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5) 순례

 

모든 무슬림은 매년 하즈달 (12월)에 카바 신전부근 또는 메카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능력이 없는 자는 순례를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해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 현재도 매년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즈에 참가하고 있다.

 

6) 교도의 일상생활

 

이슬람세계는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고 있어 그들은 각각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사회의 요소는 지극히 복잡하고 또한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수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은 취하고 있다. 그것은 샤리아 (이슬람법)로써 공통되어 있기 때문이며 사리아는 코란과 하디스에 입각하여 제정된 이슬람법이다. 무릇, 무슬림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샤리아에 따라 생활할 것이 요구된다. 인간의 행위는 5가지로 크게 나누어진다.

 

1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을 하면 보상되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2 가상(可賞)할 행위로 이것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 받지 않는다.

 

3 허용된 행위로 이것을 행하여도 보상받지 못하고 벌도 받지 않는다.

 

4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을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으나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5 금지된 것으로 이것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다. (하람)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이다. 그러나 후자에 대하여는 시대에 따라 또는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이래 모스크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있었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후로부터는 오로지 예배의 장소가 되었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의하여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이단파와 수피즘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코란'이지만 마호멧이 죽은 후에는 그것만으로 교의상의 판단이 안 되는 경우가 많게 되어 그러한 때는 순나(마호멧의 언행)에 의해 보완되었다. 그리고 이 순나를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수니파라하여 이것이 이슬람교의 정통파로 지목되고, 이슬람교도의 대부분이 수니파로 이루어진다. 아라비아의 원시이슬람은 다른 여러 민족을 정복함에 따라 많은 종교와 사상에 부닥쳐, 이들을 받아들이거나 동화시키는 과정에서 몇 개의 이단적 유파가 생겼다.

 

페르시아만 연안의 뱃사람이나 장사군을 그 주력으로 하는 하리지파가 그 최초의 것으로,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으나 현재는 오만,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등에 약간 잔존할 뿐이다. 예언자 마호멕의 혈통은 딸 파티마와 제 4대 칼리프인 그의 조카 알리와의 사이에 태어난 하산과 후세인의 두 남아계층에 의하여 전해졌으며, 이 중에서 특히 후세인의 계열을 교주로 추대하는 시아피는 후에 이란의 종교사상을 받아들여 최초의 이단적 종파가 되었다.

 

마호멧은 '이슬람의 교리는 70개로 분열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하는데, 확실히 시아파는 많은 지파로 분열 되어 극단파를 낳게 되고 그 가운데는 이미 이슬람교로는 간주할 수 없게 된 것까지 있다. 이와 같이 이단파는 상당한 수가 있으나 신도수는 전체의 10%에도 미달된다. 이슬람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 수피즘은 원래 원시 이슬람 사회 안에서 금욕고행을 주의로 삼는 일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그리스 사상과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등의 신비주의까지 받아들여 사상계의 일대조류로 발전하였다. 이 수피즘은 이슬람 신앙의 형식주의, 행위의 표면만을 보고 심판하는 이슬람법 등에 대한 반동으로 발전한 것이며, 이슬람교가 세계적 대종교로 발전한 것은 실은 이 수피즘의 힘입은바가 크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반면 이슬람 사상 속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배격하려는 자도 있다.

 

이슬람세계의 발전

 

1. 이슬람권의 확대

 

마호멧의 사후, 교단은 신도의 장로들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을 개시하여 633년에서 644년까지 시리아, 이라크, 북부메소포타이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하여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스페인)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 하에 두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추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포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강의 싸움에서 중국의 당나라 군을 괴멸시키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조의 초기 100년간은 칼리프정권의 전성기였으나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의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튀니스, 중앙아시아, 이란 동부,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프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중류의 불가르족이, 이어서 960년이래 텐산남북로의 투르크족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 들였다. 그 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계가즈나왕조의 마흐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과가 확고한 기반에 놓여졌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니제르 강변의 서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왕국에까지 이슬람의 물결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찬틴군을 격파하였다. 이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과,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운동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 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의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어 아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셀주크조와 교체된 오스만조는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교도는 이 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의 포교를 행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의 세력

 

현재의 이슬람교도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인 10억 전후라고 유엔통계조사국에서 밝힌 바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와 이란에 이른 소위 중동지역과 동부소련, 터키, 아프가니스단, 파키스탄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기타 한국, 일본 등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남,북미지역과 유럽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수백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수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 역사, 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거니와 또한 수준에 있어서도 높다.

 

한국에서의 전래와 현황

 

불교와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민에게 생소한 이슬람교가 그 두터운 벽을 뚫고 한국에 전래된 것은 1955년이다. 이슬람교의 한국 전파는 1955년 9월, 6.25동란 때 유엔군으로 참전하였던 터키 부대의 압둘 라흐만 중군이맘(성직자)과 주베르코취 종군이맘에게 한국 포교를 위하여 지도와 협조를 요청한 고 김진규와 윤두영에 의하여 포교가 시작되었다.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한국 이슬람교 협회를 발족, 초대회장 김진규, 부회장 겸 사무국장 윤두영과 신도 70여명으로 시작되었다. 초창기 10여년 간에 포교운영의 고난을 극복하고 65년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로 재발족, 67년 3월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로 인가되어 신도 7,500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76년5월 현재의 용산구 한남동에 중앙성원을 건립하고 (사우디 아라비아, 기타 6개국의 원조로) 80년 항도 부산에 제2 성원, 81년 경기도 광주에 제 3서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해외교포를 위하여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인도네시아에 지회가 설립되어 국내의 신도수 약 32,000의 교세를 가지게 되었다. 80년 5월 최규하 대통령의 사우디 아라비아 방문시 고 칼리드왕과의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 이슬람 대학교 설립 공사비 일체의 제공을 확약 받았으며 경기도 용인에 13만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한국 이슬람교는 70년대의 중동 붐을 타고 두드러지게 교세가 확장되어 근래에 매년 중동 각국에서 무슬림이 되어 귀국한 1,700여 명의 기능근로자 신도들을 핵으로 삼아 신도 배가 운동을 펴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이슬람교는 한국인의 습성 및 기호와의 차이점을 비롯하여 예배의식의 용어 및 교리의 토착화 등 숱한 난제를 안고 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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