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로;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엄격히 말해서 인간 예수님은 아버지를 갖지 않았다. 성령이 마리아를 상대한 것이 아니다. 성령에 의한 수태는 인간의 출생처럼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 예수님의 출생은 하나님의 고유한 기선적인 행동에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보통 인간의 생물학적 생식과는 달리 하나님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존재의 시작에 관여하신 것이다.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말은 ‘예수님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라는 뜻입니다. 역사 안에 태어났지만, 인간의 생물학적인 영역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영원한 근원으로부터 시간 안으로, 하늘로부터 이땅으로 오신 것이다. 이것이 성령에 의한 예수님 잉태의 의미이다.
동정녀 출산을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이것은 생물학적인 대상도 아니고 또한 영웅의 탄생신화와는 무관하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문제이다. 동정녀 출산은 바로 이 본질적인 증거에 봉사할 뿐이다. 세례 요한이 그 자신을 증거하지 않고 오실 자를 지시하듯이, 동정녀 출산의 교리도 말씀의 성육신, 예수님의 탄생에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창조 행위를 증거하는데 봉사한다.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동정녀 즉, 순전한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음을 선포하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출생과정과 전혀 어긋난다는 이론을 내세워 부정하기도 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의 한계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섭리를 알지 못하기에 아니 안다고 해도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태어나셔야 했던 이유를 알지못하는 이유라고 생각된다.
카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무죄성까지도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차지하고라도 우리를 구속하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죄가 없으신 분이어야 속죄제물로 가능하기에 예수님은 탄생부터 원죄를 가져서는 안되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속죄제물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기에 인간의 측면에서보면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성자 예수님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셨다면 어떻게 원죄를 가진 상태로 대속제물의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는가?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지않으면 많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믿음은 인간의 사고와 체계와 상상으로 납득가능한 부분만을 믿는다면 그 자체는 믿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보편타당한 부분은 불신자들도 다 같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역을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완전히 파악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셔야 했던 사실속에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느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방식으로 그야말로 신비로운 방법으로 죄인을 향한 구속의 역사를 전개하실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야만 했던 그 이유는 죄인들의 모습과 적어도 인성적인 면에서는 같은 모습을 띠고 오시게 함으로 분명한 구속의 증거를 보여주셨던 것이다.
만일 신비로운 방법으로 구속사를 전개하셨다면 아마 많은 그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자체를 부정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사랑이요 은혜의 절정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럴때 비로소 진정한 감사가 나올 수 있다. 막연한 구속에 대한 감사가 아니고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감사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탄생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출생되었다는 진술은 예수님의 생과 역사가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의 영원에서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말해서 아담 이후로 불순종한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향한 죄문제 해결을 위해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차원을 포기하시고 인간세상의 3차원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그것은 죄를 심판하여 궁극적으로는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다. 인간을 심판하시는 일을 유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셨다. 이 고통이란 인간이 가하는 고통이요, 동시에 인간의 죄값으로 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배척이 주는 고통을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성육신을 기독교의 성소라고 한다면 이 대속은 기독교의 지성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최고의 기적이지만, 그것은 아직도 하늘의 기쁨과 축복에서 시작하여 갈보리의 고통과 수치로 내려가는 일련의 단계 중 첫단계에 불과하다(빌2:5-8).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된 이유는 “온 세상의 죄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하며 충분한 제물, 헌물과 보속물”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롬8:32).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롬5:5-8 참조).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관용이나 인간의 호의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선물을 말하는 것이다.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한 위대한 선언, 그러나 크게 오해받고 있는 선언의 의미도 이와 같은 것이다.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8-10).
우리 죄에 대한 제사로 볼 때 십자가는 화목제물이다(롬3:25; 요일2:2, 4:10, 히2:17). 다시 말하면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시야에서 도말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수단이 된다.
이 화목제로 말미암아 우리는 불화했던 창조주와 더불어 화목, 즉 평화를 누리게 된다(롬5:9-11).
우리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가라앉힐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위하여 진노를 평화로 바꾸어 놓으신 구세주의 공로를 내세우는 일이다.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였다는 의미에서 볼 때 십자가는 구속이 된다. 즉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속박과 불행에서 구출해 내는 것이다(막10:45; 롬3:24; 엡1:7; 계5:9). 그리고 구속으로서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에서 떠나 죄 가운데 머물게 했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하려 하는 모든 적대 세력들에 대한 승리이다(골2:13-15).
바로 공사역에 해당하는 과정도 생략한 채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당하시는 부분이 나온 것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고난을 받으신 부분이 중요하기에 성장과정이나 공사역 과정은 생략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끝내는 자기 몸을 인류를 향한 대속제물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이 탄생하셨고 죄의 흔적조차도 없으신 분이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이사야서 53장 5절에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성경 눅23:4에 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는 예수님의 무죄성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줌으로써 메시야를 죽이는 역사의 장본인이 되었다. 그 후로 그의 이름은 계속적으로 거론되게 되었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그의 아내의 꿈을 통해서도 알려지고 그에게 예수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려음에도 불구하고 민란이 발생할 것이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 주었던 그에게서 인간의 죄악된 모습, 한 치 앞도 못보고 살아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속사의 전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또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은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알고도행하지못하고 알면서도 믿지못함은 빌라도와 같은죄를범함일것이다 단지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처럼 악역을 담당하는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본디오 빌라도는 역사의 오점을 남기고 영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을 자초했다. 우리는 이러한 빌라도의 모습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아버지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공의를 실현하시고 반면에 죄인을 향한 용서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중적인 섭리는 조금은 역설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해 있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으며, 또 많은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시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교차되는 만남이요,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랑과 용서의 팔을 내미신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랑과 용서의 팔이 십자가 위에서 못박힌 손이 되고 피흘린 몸이 되어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십자가에 매다시고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과 용서를 우리 인간들, 죄와 사망가운데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과 미움이 한데 섞여져서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만이 널리 퍼지게 되는 온전한 사랑의 상징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는 예수님을 따르던 신실한 제자나 신자들이 증거한 것이 아니라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던 당사자들이나 원수들이 증거한 것이다.
빌라도가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증거했고(눅23:14-15, 요18:28, 19:4,6), 십자가에 함께 못박힌 강도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41)라고 증거했고,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가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라고 증거했고, 예수님을 처형하던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라고 증거했으며,
빌라도의 아내가 빌라도에게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주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27:19)라고 증거했다.
둘째로 매우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십자가는 극형의 죄수들을 사형하는 가장 잔인한 형틀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대신 죽으신 죽음이다. 성경에서 말한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고(롬6:23),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으니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가 죄값으로 죽는 것을 보고 계실 수가 없어서 죽어야 할 죄인을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해 내신 방법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이야말로 하나님의 죄인들을 구속하시려는 구속사의 절정이요 핵심이다.
한 마디로 죄없고 흠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의 모든 죄가 그 치욕적인 십자가상에서 용서함 받았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십자가는 주전 4, 5세기 전부터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형틀로 사용하였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가장 중한 죄를 진 사람에게 지우는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던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최고의 비천의 자리까지 나아가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님을 향한 완벽한 순종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이천년 전 십자가상에서 그 피흘림과 죽으심속에 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두 가지 은총을 끊임없이 적용시키는 회개의 생활이 병행될 때 진정한 사도신경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온 인류를 향한 대속제물이 되어서 피흘리시고 죽어주신 대속의 위대한 역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준비해 주신 보혈의 은총 즉 한번 피뿌려 준비하신 사죄의 은총과 일곱번 피뿌려 영적할례은총 즉, 성결의 은총을 준비해 주신 그 은혜를 지금 순간순간 주관적으로 적용시켜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감사의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무심코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그 십자가상에서 바로 ‘나’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님의 고난과 이 고난을 통해 준비해 주신 은총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구교에서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놓으신 빛나는 영광을 바라보는 시각이 짙다.
모두가 다 맞다고 본다. 하지만 성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먼저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고난을 무시하고 오직 영광만을 바라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십자가 고난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진정 죄인들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로 나아갈 수 있기때문이다. |
'주기도! 사도신경!! 십계명!신앙고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사도신경분해1 (0) | 2013.08.22 |
---|---|
[스크랩] 사도신경분해2 (0) | 2013.08.22 |
[스크랩] 사도신경분해4 (0) | 2013.08.22 |
[스크랩] 사도신경분해5 (0) | 2013.08.22 |
[스크랩] 사도신경분해6 (0) | 2013.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