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인 고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사도신경은 두 가지 원본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는 옛 로마교회에서 사용하던 11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것과,
그 후에 이 신조를 기초로 해서 발전되고, 또한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도신경은 그의 대부분은 동일하나 후자의 것이 더 길고 더 자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옛 로마 교회에서 사용하던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조항은 없었으나
그 후에 형성된 신조에는 그 조항이 들어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그 조항이 빠져 있는데, 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옛 로마 교회가 사용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빼 버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칼빈이 ‘음부에 내려가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칼빈의 신학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는 한국교회이기 때문에
그 조항을 빼버렸다는 것이 더 정당한 해석인 것 같다.
사도신경에서 이 부분은 교부들의 생생한 전승에 이어진다. “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사이에 음부에서 지냈다는 신앙은
이전부터 잘 알려진 교설 중의 하나이다.
이미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그러한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는 가능성을 도외시하더라도,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이레니우스, 터툴리안과 그 이외 다른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음부로 내려가셨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했다”.
또한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며, 음부에 내려가셨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 구절이 신조다운 진술에 처음 나타난 것은 주후 359년
또는 360년에 나온 서미엄 신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이 맨 처음 사도신경에 오르게 된 것은 주후 570년의 일이다.
2) ‘장사되어’ 의미
장사되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반증하는 말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죽으면 빨리 그들은 무덤에 매장하였다.
예수님의 경우도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십자가에서 운명했을 때, 곧 그곳에서 내려져
세마포로 싸서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의 가정용으로 미리 파 놓은 새 무덤에 매장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 매장되었다고
고백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체로 위대한 인물은 죽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예수님께서도 죽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가졌던 그러한 기대는 결국 빗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질 때의 시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사건과
그의 매장은, 일반인이 걸어가는 인생여로의 마지막 단계와 같은 그러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 크게 도약할 준비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도약이란 것은, 이 매장이 있은 지 사흘 후에 부활사건이다.
십자가와 매장사건은 바로 이 부활사건의 선행사건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3) 음부로 내려가신 목적
이 음부라는 말은 구약에서 많이 사용하는 스올과 동의어로서,
대체로 죽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 일시적으로 머무를 곳이어서,
거기에서 심판을 받을 사람은 심판을, 축복을 받을 사람은 축복(연단?)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음부로 내려가셨는가?
옛날부터 이 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9-20절에 보면, 옛날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 음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성육신 하시기 전의 그리스도의 영을 제자들이 받아서 음부에 갔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신앙고백에서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성육신하신 후부터 죽을 때 까지
모든 인간이 걸어가는 행로를 그대로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음부로 내려가셨다는 말은,
그의 지배권이 전 차원에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서 거기에 있던
모든 영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존재의 구주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주가 되심을 입증했으며,
정말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깊은 음부까지 내려 가셨다는 것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준비 동작이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기에 음부와 같이 깊은 곳에 내려가셨지만
거기에서 더 강력한 힘으로 도약을 했다.
이 도약의 사건이 바로 부활사건이다.
4) 종합적 의미
사도신경의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내의 경우 카톨릭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개신교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세계적으로 보아도 어떤 나라는 이 부분이 포함되어 있고 어떤 나라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이 부분이 삽입되었다가 언제 빠졌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백한 문헌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이 음부를 지옥으로 해석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삼일 동안 지옥에 가실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명백히 지옥은 불신자가 가는 곳이요 죄인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하는 음부는 하데스라고 보아야 합당하다.
이곳이 바로 심판대가 있는 영역이다.
사도신경의 이 부분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가 많이 있다.
특히 개신교 성도들은 대부분이 사람이 죽으면 천국 아니면
바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에
신앙상에 중대한 오류를 안고 있는 셈이다.
성도가 죽었다고 해서 천국에 간다면 천국은 죄로 가득한 죄인들로 가득찬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천국은 죄가 전혀 없는 곳이요. 결코 죄를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는 거룩한 곳이다.
그런데 모든 신자가 다 죄문제를 해결하고 죄의 뿌리인 원죄
즉, 죄악성의 뿌리가 뽑혀서 없어진 상태가 죽음의 순간에
다 순식간에 이루어 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답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공의적인 측면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피흘리는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백성이 되었다고 성경은 알려주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편에서 본 시각이요 입장일 뿐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님 편에서 준비하신 객관적 은총이요,
이제 성도들 편에서는 이렇게 객관적으로 준비해 주신 보혈의 은총을 개개인은
주관적으로 적용시켜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회개를 통해 죄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본성 즉,
원죄인 죄악성이 뿌리뽑힌 성도가 아닌 이상 엄밀한 의미에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셈이다.
이렇게 자범죄를 철저한 회개를 통한 사죄의 은총을 주관적으로 적용하여 용서받고
우리의 영에 뿌리박힌 죄의 본성인 원죄를 뿌리뽑아 주시는 은총을 받은
사람을 성결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러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벽하게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성도들은 지옥에 가는가?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우리는 난관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바로 이 음부의 개념도입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음부는 다른 말로 심판대가 있는 영역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죽으면 일단 이곳으로 영혼이 들어간다.
여기서 불신자와 신자가 구분되어 각각 지옥과 천국으로 갈 준비를 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카톨릭의 연옥이나 림보의 개념과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
음부란 사람이 죽으면 일단 머무르는 영역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 이 부분의 실제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성은
사도신경에 이 부분을 포함시키느냐의 여부를 떠나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현재 가톨릭에서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이 부분은 반드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개신교의 뿌리가 구교인 카톨릭에 있고 어떤 의미에서
16세기 카톨릭의 부패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한 종교개혁 이후로 중대한
기독교 진리를 이루는 음부에 대한 사실이 부정되거나 약화되어가는 현실은
반드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인간이 죽으면 어떤 단계를 거쳐서 천국 또는 지옥을 가는가를 알 수가 있다.
바로 음부라고 하는 심판대가 있는 영역에서 신자는 이 땅에서
다 해결하지 못한 죄문제를 연단을 통해 정결함을 얻고 마침내 죄성이 뿌리뽑힌 후
천국에 들어가고 불신자는 선이 제거되고 완전히 악으로 다 익어서 지옥에 가게 된다.
왜냐하면 지옥은 선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요 질서인가를 우리는 음부를 통해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여덟번째;장사한지 삼일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1) 부활의 의미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 행동, 업적,
설교가 전적으로 옳았다는 것을 인증하신 것을 뜻한다. 곧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경건한 성전 수호자와 율법가들이 전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긍정과 하나님 자신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죽인 자들에 대한 전적인 부정과 심판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본다.
하나님은 참이 거짓을, 생명이 죽음을, 정의가 불의를, 사랑이 미움을 궁극에서
이기리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나타냈다.
이 부활의 빛에서 비로소 예수님의 삶, 가르침, 행동, 고난의 의미가 바르게 이해되었고,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연합되고
일치된 메시야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의미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우리 구원받은 죄인들을 위한
대제사장의 자격을 얻으신 것이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깊다.
그렇다면 부활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흩어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모인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교회가 유지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면에서나
교리면에서나 교회 존립의 기초가 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선교의 내용이 되었다.
복음서에도, 사도행전에도, 서신서에도 선포되는 복음선교의 핵심적 내용이 예수님의 부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이다.(고전 15:20)
2) 종말론적 신앙
기독교인은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며 언제라도
달갑게 맞이할 수 있는 확고한 종말론적 신앙을 구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활의 진리를 거듭 확인하며 그것을 고백해야 한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가리켜 ‘부활의 종교’라고 한다.
여타의 모든 종교들은 죽음에서 생의 의미를 찾지만 오직 기독교만은 부활에서 그것을 찾는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라는 입장에서 삶의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며 삶의 지혜를 얻으려 한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진리가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계사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세계를 두루 다니며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외친 것은 ‘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이었다.
2천 년 동안 이것은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가 되어 왔으며
그동안 쉴새없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론들로 기절설, 도난설, 환상설,
또는 여자들이 새벽 미명에 길을 잘못 찾아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께서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주장등 많은 맹렬한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것을 무너뜨릴 사람은 이전이나 이후에도 한 사람도 없다.
오늘도 기독교는 이 부활신앙에 의해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3) 종합적 의미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혹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은 기절하셨다든지라고 주장하지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죄의 삯은 死亡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은 죄가 없지만
대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또한 삼일은 완전히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확증해 주는 단어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사도신경이 끝난다면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삼일 만에 부활하시므로 기독교는 살아있는 신앙과 부활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타 종교에서 결코 주장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고
장래 모든 인간의 부활에 대한 예표를 시사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께서 만약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나의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라고 지적한 대로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인들만큼 불쌍한 자들도 없다.
하지만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부활에 관해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막 8:31, 9:31, 10:34, 마 16:21, 17:23, 20:19, 눅 9:22등이 있다.
또한 부활의 순서도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즉. 고린도전서 15장 23절에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부활의 순서가 제시되어 있다.
어쨌든 부활신앙이야말로 기독교가 참된 종교요
기독교인들이 타종교인들도 전도해야 하는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승천을 하시지도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뒤에 설명하겠지만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셨다는 고백은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나라는 존재가 장사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라야만 부활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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