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 사도신경!! 십계명!신앙고백

[스크랩] 사도신경분해7

하나님아들 2013. 8. 22. 21:42
조직신학적인 분석


1.신론적인 측면


사도신경에서 신론적인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부분은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첫 구절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많은 속성중에서 특히 포괄적이고

가장 특징적인 전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전능성이야말로

다음에 소개되는 천지창조를 자연스럽게 뒷받침하고 있으며,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난다고 본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도

우리의 구원 섭리를 완전하고 완벽하게 시행하시는 하나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고 본다.

성도들은 무능한 막연한 어떤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고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간섭하시고

운영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다른 종교의 경우 피조물인 인간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독교만이 참된 신을 믿는 종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전능이라는 단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그의 뜻대로 행할 수 있다는 뜻에서 전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본질에 모순되거나 대립이 되지 않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둘째로 과거 인류역사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하셨다는 것을 토대로 하나님은 전능하다고 이해할 때, 가장 성경적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은 기독교 교리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중에 하나이며

동시에 현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이 바로 이 교리다.

 

그것은 현대인의 주권을 여지없이 박탈하고 인간의 모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현대과학을 그 기초부터 흔들어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일방적 선포이기 때문이다.

 

이 교리가 그 많은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래로 인간으로부터 도전도 많이 받아왔다.

몇몇 과학자들은 천지창조의 사실을 부정하면서 진화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정면으로 부정할 증거를 지금까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전능성을 강조하는 구절들(사40:26, 28, 암4:13)과

위대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자연 위에

그의 뛰어나심을 언급한 구절들(시90:2, 102:26-27, 행17:24),

창조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지혜를 언급하는 구절들(사40:12-14, 렘10:12-16, 요1:3),

창조를 하나님의 주권과 목적의 사역으로 언급하는 구절들

(고전11:9, 골1:16)을 증거로 제시 가능하다.


2. 기독론적인 측면
사도신경은 그 내용의 대부분이 기독론을 표현한 것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고 본다.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자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개시켰다는 것은

인류의 구속사역의 중심이 인간의 형상을 입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체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의 제한적인 사고한계 속에서 완전하게 이해를 할 수 없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가 가능하고

그 만큼 우리의 연약하고 의심많은 인간의 속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배려인 것이다.

이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기독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의 신분을 알 수가 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신성을 지니신 근거가 되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분이시라는 근거가 된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주가 된다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다.

 

둘째로 구속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엄격함을 엿볼 수 있다.

다시말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 분의 원칙을 반드시 성취하시면서

구속사를 이끄시는 신실하신 면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실 수 밖에 없었고 여기서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이단의 사상을 분석해 보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인정하지 아니하는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해왔다.

성자의 신성은 초대 교회 시대에 에비온파와 알로기파,

그리고 역동적인 단일신론자들과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하여 부인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소지니주의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따라서, 예수님은 단지 사람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동일한 입장이 독일의 일부 신학자들, 특히 슐라이에르마허나 리츨에 의하여,

그리고 유니테리안파, 오늘날의 현대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성을 지니셨기에 하나님의 본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예수님을 준비하시고

그 분께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을 당하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강림을 통한 교회시대의 역사는 완전한

하나님의 계획속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 재림의 사건만을 남겨놓은 싯점에 이르렀다.

여기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일면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시간표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대비해야 하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서 고백해야 할 사항이다.


3. 성령론적인 측면
사도신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세 번째 부분이 바로 성령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다.

이 성령에 대한 부분을 예수님의 승천 이후 본격적인 교회시대를 열어주신

성령의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중 제3위이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신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인류구속의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구속의 역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분으로서

성령님은 교회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성령님의 역할은 성자 예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속죄은총을 전달해 주시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하에 구원받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의 출애굽부터

완전 구원을 이룰때까지 전 기간을 성도와 함께 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성도들을 연단이라는 환경속에서 마음과 행실을 정결케 하는 성화시키는

실질적인 구원을 완성시켜 가시는 분이시다.

 

그저 이신론자처럼 간섭하지 않고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성령님의 조명하시는 역사속에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실질적인 역할은 교회시대에서 본격화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성령강림은 필연적인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계셨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각 사람의 심령속에 머물러 계시면서

속죄은총을 공급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육신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교회시대를 활짝 열었던 것이다.
‘성령’이라는 용어는 성자 예수님 만큼 인격성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성령의 인격성은 성자의 인격처럼 사람들 가운데에서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는 인격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성령의 인격성은 종종 의문시되어 왔으며, 따라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성령의 인격성은 초대 교회에서 단일신론자들과 성령파들에 의하여 부인되었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소지니주의자들이 그들의 부정적인 입장을 따랐다.

후대에 와서는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츨, 유니테리안파, 오늘날의 현대주의자들과

현대의 모든 사벨리우스주의자들이 성령의 인격성을 거부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증거라 너무도 많이 있다.

 

첫째로 인격성에 적절한 칭호들이 성령에게 부여되고 있다.

요16:4에 사용된 ‘에케이노스’남성대명사이고 ‘파라클레토스’라는

호칭도 성령의 인격성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 지식(요14:26, 15:26, 롬8:16), 의지(행16:7, 고전12:11),

감정(사63:10, 엡4:30)과 같은 인격의 특징들이 성령에게 돌려지고 있다.

게다가 성령은 인격성에 적합한 행동들을 실행하신다.

 

성령은 찾으시고, 말씀하시고, 증거하시고, 명령하시고, 계시하시고, 노력하시고, 창조하시고,

 간구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등의 일을 하신다

(창1:2, 6:3, 눅12:12, 요14:26, 15:26, 16:8, 행8:29, 13:2, 롬8:11, 고전 2:10-11).

 

셋째로 성령은 자신의 인격성을 의미하는 바,

다른 인격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분으로 나타난다.

성령은 사도들(행15:28)과

그리스도(요16:14),

성부와 성자(마28:19, 고후13:13, 벧전1:1-2, 유20-21)와 함께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건전한 주석은 이러한 구절등에서 성령을 인격으로 간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가에 대한 해답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은 분명히 인격성이 있으므로 성도들은 모두 인격적으로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의미에서 성령보다는 ‘성령님’이라는 호칭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성령님의 인격성은 우리와 유사하므로 우리가 쉽게 친근함을 느끼고

의지를 드리고 간청하고 대화하고 느낌으로서 이질감에 따른 거부감 보다는 보다

용이하게 이해하고 순종을 가능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성육신 사건이나 성령 강림사건은 인격성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화시키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4. 종말론적인 측면
오늘날 같이 종말론적인 측면에서 신앙고백을 드려야 하는 시기가 과연 역사상에 또 있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점진적인 계시를 통하여 그분의 섭리를 주관하고 계신다.

 

지금을 말세지말 또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음을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공평한 분이시다.

교회시대만을 생각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그 당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종말론적인 신앙은 계속 있어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공평하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시대 시대마다 재림을 바라보는 나름대로의 시각과 필연성을 제시한 점은 특이한 일이다.

종말론적인 신앙이야말로 성도들로 하여금 게으른 신앙생활을 방지하는 깨어있는

신앙을 견지하게 만든다.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적인 종말은 틀림없이 다가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단지 망각하고서 살아갈 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에 종말론적인 계시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말론적인 신앙은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는 ;

개인을 향한 종말과 또 하나는 인류전체의 종말을 이끌어가시는 양측면을 바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 시대의 상황은 인류전체의 종말을 향해 다가서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기적으로 임박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개인의 종말과 인류의 종말이라는

종합적인 분명한 신앙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하나는;결코 초대교회나 중세시대와는 종말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을 하는 주체인 성도 개인 개인 각 교회들은 이 종말론적인

신앙을 마음에 새기고 지혜롭게 대비하면서 실천적인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계적인 의미로 암송한다면 게으른 종과 같이 후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교회론적인 측면


사도신경에는 교회의 대한 개념이 두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첫째 유형적이고 보편적인 교회요

두번째는 각 성도 개개인을 지칭하는 무형적인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거룩하다고 그 성격을 명시하고 있다.

 

 왜 교회는 거룩한가?

표면상으로 보기에 교회에는 죄를 지은 죄인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거룩하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어서 교회의 기초가 되셨기 때문에

그 분의 의로움, 거룩함을 인하여 교회를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하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성도들도 거룩해져야 하며,

그 거룩함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속죄은총을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도를 미래의 입장에서 본 결과는 모두 거룩한 성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실제적으로 보더라도 흠이 있는 성도를 의롭다고 불러주는 칭의 이후에

궁극적으로 득의의 단계까지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보더라도

거룩한 교회와 성도는 미래지향적인 최종의 시각에서 내린 결론이라고 본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지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파를 너무 내세워 상대를 비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오히려 교회나 교파끼리 반목하려는 것보다 서로 부족한 면을 깨닫고 보완하는 자세가

진정한 교회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교회 또는 어느 교파에 소속되어 있느냐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를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다양성과 부패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아시기에 시대마다 믿음이

장성한 성도들을 중심축으로 교회를 세우고 교파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부정하는 단체조차도 인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사도신경과 연관하여 교회는 두가지 의미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우주적인 의미에서 본 교회는 이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며 동일한 그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오게 된 모든 사람으로 구성된다(벧전1:3, 22-25, 고전 12:13).

 

두번째는

지역적 의미에서 본 교회인데 이것은 어떠한 지방의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의 무리에 대해 쓰인 말이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에베소교회등이 그 예이다.

 

오늘날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카톨릭등과 같은 교파로 지역적인 교회의 분리의 근거를

볼 정도로 교파에 치우쳐 있다.

 

그러더 보니 교파끼리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심지어는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지역적 교회는 우주적 교회의 신실한 재현이 되어야만 한다.


6. 맺는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모임 또는 예배의 시작을 주로 사도신경을 암송함으로써 시작한다.

이처럼 사도신경을 모든 순서에 들어가게 한 이유는

그 만큼 기독교의 핵심을 잘 표현하고 있고 반드시 바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부분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배우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의미를 잘 알지도 못하고 그저 기계적인 암송으로 일관한 면이 없지는 않다고 본다.

 

만약 신앙고백의 주체가 그 자신이 고백하는 내용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 채

입술로만 암송한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모든 주체인 성도들은 각 개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과 구원의 실제적인 성취인

성육신사건, 십자가 사건, 부활, 승천, 성령강림사건,

그리고 마지막 남은 예수님의 재림에 담겨 있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비단 초대교회의 고백만이 아닌 현재 나의 진실한 고백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의 내용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진리이며,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주로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사도신경을 살펴보았다.

다른 측면에서 또다른 많은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한번을 사도신경을 암송한다 하더라도

내 자신의 고백으로 만들지 아니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별다른 유익은 없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위대한 사랑을 느껴야 하며,

많은 이단사상이 우리를 유혹할 때도 그러한 불순한 사상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현대의 사조는 무서우리 만큼 우리의 믿음을 빼앗기 위해 인간을 현혹시키고 있다.

 

그래서 믿음의 뿌리가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현혹되어 마귀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현대의 사조들이 신본주의적인 신앙에서

인본주의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려고 활개치리라 예상된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이 심히 임박한 현재의 상황은 우리 모두에게 어떠한 신앙자세가 지금

가장 지혜로운 것인가를 알려준다고 본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신실하게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의 성도들의 살아있는 신앙고백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가 사도신경을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순교정신 특히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고 뒤따르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박해와 고난을 당한 신앙의 증인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본 받으려는 결단이 요구된다고 본다.

 

신앙고백은 믿는 사람에게 절실한 대답과 진실한 응답을 요청한다.

그것은 온 마음과 영혼과 몸을 드리는 산 제사의 응답이다.

생명을 걸지 않는 신앙고백은 예언자적이며 사도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다.

초대 교회의 신도들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하여 잔인한 박해를 받아왔다.

 

오늘 우리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박해를 받으며 승리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신앙을 고백하는 그의 백성들과 교회를 전세계에 파견하고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여기에 신앙고백의 신비로운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과 합일되는 은총을 통해 영생의 길로 이끄시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출처 : 점촌 반석 교회
글쓴이 : 별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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