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 사도신경!! 십계명!신앙고백

[스크랩] 사도신경분해1

하나님아들 2013. 8. 22. 21:46

사도신경에대한분해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배 때마다 반드시 암송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다.

이처럼 늘 암송하는 사도신경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도신경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 암송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번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본다.

 

초대교회부터 사도신경이 완성하기까지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도 불사하던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진리사수를 위해 피 흘린 흔적이 배어있는

사도신경을 그 의미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암송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의미가 있기에 사도신경 또는 신조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사도신경은 순례하는 교회가 물려받은 값지고, 빛나는 유산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신앙의 내용과 방향을 규정하고 지시하는 산 표석이고 경계석이다.

 

기독교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무엇을 믿고 선포하고 실천하는가?

기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대답을 주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도신경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보석같이 반짝이는 언어와 문장으로써 간결하게 대답한다.

 

역사적인 신앙의 공동체는 여기서 그 정체를 새롭게 확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만물의 목적과 완성을 이해하게 된다.

 

지상의 교회들은 이 사도신경 안에 스며있는 빛나는 진리를 통해서

빛과 생수가 솟아나는 신앙의 공동경험을 나눌 수 있다.

사도신경 안에는 신앙의 진수가 녹아 있다.


1.연구목적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늘 암송하는 사도신경 속에 담긴 의미를

잘 이해함으로써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오늘날 우리 모두의 진솔하고

현재적인 고백으로 표현하는데 있으며, 기계적인 암송으로부터 탈피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정립하고 이단사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특히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사도신경을 연구하고,

또한 조직신학적으로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신앙을 확고히 정립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2.연구범위
본 논문에서는 사도신경이 발생하게 된 배경 및 역사, 신조의 의미와 필요성을 살펴보고

사도신경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의 사도신경의 의미를 살펴보고,

조직신학적인 안목으로 삼위일체의 내용인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을 살펴보고,

교회론과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분석을 시도하고, 사도신경의 구조적인

특징과 각 구절마다에 담긴 의미를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또한, 논난이 되고 있는 구절인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 가셨다가’라는

구절에 대한 몇 개국의 사도신경을 살펴봄으로써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자 한다.

필자가 이 글을 전개하는데 있어 먼저 국내외에 발표된 문헌을 광범위하게 참고하였으며

개인의 의견은 종합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제시하였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3..신조의 의미와 필요성
우리가 신조라고 부르는 것의 원어을 보면 Credo, κανον τηs πιστεωs, 또는 ευνβσλσγ란 말이다. “

내가 믿는다”, “상징”, “표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creed라고 부르기도 하고confession이라고도 부른다.

신조라는 말은 이 creed라는 말에서 온 것이고,

신앙고백이라는 말은 confession이란 말에서 온 것이다. 다 같은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교회는 신앙의 내용과 인식의 문제로 갈등과 분열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문제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거짓과 참을, 어둠과 빛을 구별하는 신앙의 눈, 깬 마음이 여기서 필요하다.

사도신경을 형성하여 공동으로 고백하게 된 동기가 바로 교회의 일치에 있다.

 

교회는 이단들의 공격을 받는다.

교회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진리와 대결하고 대화하면서 복음의 빛을 드러내야 한다.

이단들의 정교한 교리를 분석하고 비판할 수 없을 때,

지상의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의 빛은 흐려지기 쉽다.

 

다른 종교의 바른 가르침과 대화하면서도, 교회는 독자적으로

어떤 진리와 말씀을 선포하고 증언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사도신경은 바로 이러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는 또한 시대를 지배하는 사조들과 맞서 신앙의 역설적인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복음은 결코 시대정신의 산물이 아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과 生命을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에게 바른 구원의 진리를 제시하고 잘못된 가르침을 비판하고

수정해야 할 사명이 있다.

 

교회는 시대마다 부딪치는 도전과 시련을 믿음의 진리로써 극복하면서

세상을 구원하고 낡은 세계를 변혁하는 자유와 생명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된다.

이러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서 바로 사도신경이 필요하다.

 

사도신경은 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내적 생활에 있어서도 필수적이다.

예를 들면 어떤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

그들의 신앙고백을 들을 때 사도신경은 기준이 되고, 자녀들에게 신앙을 교육할 때도 필요하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최근의 시대사조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흔들 만큼

이단의 정교한 도전과 새로운 시대사조가 활개를 치는 현실을 볼 때

기독교 신앙의 사수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초대교회에서 사도신경이 필요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교회에 그릇된 견해가 스며들자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확충되어져야만 했다.

5세기 중엽까지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완성된 신학적 선언이 없었다.

그 때까지는 여러 종교회의에서 때때로 나타난 이단적인 견해들을 취급했다.

 

이러한 종교회의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AD 325년의

니케야 회의와 AD 451년의 칼케돈 회의였다.

 

니케야 신조는

초대교회의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교리를 수호했다.

칼케돈 신조는, 그리스도인이 항상 믿어온 사실,

즉 그리스도가 한 인격 속에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증했다.


물론 신조의 사용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퀘이커 교도들과 유니테리안들과 이신론자들이 반대한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서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방해하고, 양심의 자유와 개인의 판단력을 약화시키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에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그러나 신조없이 자기들의 느낌과 판단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신조 이외의 어떤 다른 권위있는 글에 의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정적이고

신비적 체험에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신조가 없이 자기의 취향에 따라 제멋대로 믿은 결과

탈선해서 비성서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신앙생활을 하기보다,

일정한 신조에 따라 올바르고 규모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인간은 아담이후로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의 이성에 의한 성서의 자유로운 해석은 그 만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조는 신앙을 정의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믿고 있는 내용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이것 때문에 나는 서 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기독교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한 세계나 사람의 충성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다른 신앙들이 있는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더욱 필요하다.

 

만약 주관적인 경험에만 의존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기독교에 대한 이해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또한 신앙의 규범과 모범과 표준을 제공하기 위하여 신조가 필요하다.

체험에 대한 남용적인 권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결국 주관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모든 위험에 떨어지는 것을 뜻한다.

 

아무도 이단을 사냥하는 데 도구로 사용될 신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있지만

거기에도 필요한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조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신앙과 사상을 보편적 교회의 신앙과 사상에 의하여

검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가르침과 설교의 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신조는 필요하다.

설교는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교회의 신앙과 신념에 대한 해설이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해 주고 또 그가 만나게 되는 인간 상황의

모든 사건들에 대하여 적용해야 할 계시된 원리들을 그에게 제공해 주는

신앙의 선언과도 같은 신조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은 어떤 신조나 교리나

교리의 체계도 안내를 위한 길잡이가 되어야지 결코 붙잡아 매는

쇠사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어떤 신조도 完全할 수 없고 최종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사도신경의 기원과 구조적 이해


1,사도신경의 역사적 기원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기원은

주후 215년에 히폴리투스의 질문식 신앙고백과 주후 340년에 마르셀루스의 신앙고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그 내용들은 지금의 사도신경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주후 404년 루피누스의 신앙고백이 지금의 사도신경과 비슷한데,

루피누스는 사도신경에 대한 주석을 쓴 일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도신경의 형태는 히폴리투스, 마르셀루스, 루피누스 등과 같은

여러 교부들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5세기 말과 6세기 초에 형성되었다.

사도신조가 교회의 공인된 신조로 사용되기 전에도 교회는

간결한 여러 가지 고백문들을 갖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도신경과 비슷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준 것은 로마교회에서

사용한 ‘로마신조’였다(주후 250-400년).

 

여기에 다른 조항들이 첨가되고 보충되어 6세기 초에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부 지방 등에서

사도신경의 본문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오랫동안 정식으로 사용되지 못하다가,

칼 대제(주후 742-781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오토 1세(주후 936-937년)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로마교회의 예배시에 사용될 공식적인 신앙고백문으로 채택되었다.

 

우리는 한 가지 물음을 가질 수 있다.

사도들이 직접 본문을 쓰지 않았는데 왜 ‘사도들의 신앙고백’으로 불리우는가 하는 것이다.
루피누스(T. Rufinus)라는 초대 교회의 저술가는 전승에 의거하여

사도신경이 사도들로부터 직접 유래되었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곧 성령 강림 후 열 두 사도들이 신앙의 기본 규범들을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만들었다고 말했다.

열 두 사도가 각자의 관심을 한마디씩 간략하게 표현하여

사도신경은 열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루피누스는 다음과 같이 사도신경의 형성과정을 말한다. “

베드로가 말했다: 나는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

야곱이 말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여 마리아에게서 출생했다.

요한이 말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어 장사되었다.

도마가 말했다: 그는 삼일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

이와 같은 루피누스의 주장은 사도신경의 사도성을 강조하는 경건한 창작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사도성은 사도들이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 때문에 순교한

사도적인 신앙의 근본 내용들을 사도들이 승인하고 고백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복음의 진리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사도신경’으로 불리워지는 것이다.

이 사도신경이 가장 날카롭게 자각되고 목숨을 건 고백이 된 것은 세례 때였습니다.

사도신경의 뼈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나타난

신앙 고백들은 모두 세례와 관련되어 있다.

 

세례 베푸는 자가 수세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묻는다. “

너는 전능한 하나님을 믿느냐?

너는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

부활하시어...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너는 성령을 믿으며... 몸의 부활을 믿느냐?”

이에 대하여 수세자가 “나는 믿는다”라고 대답함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처음 교회가 형성되던 때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박해와 시련을 받을 각오를 하는 것이었다.

체포되고 처형될 수도 있었다.

세례를 받음으로 사자의 굴에 던져지기도 하고 삶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신앙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걸머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적인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그들을 통하여

이 신앙이 전승되어 왔음을 감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비싼 값을 치루었던 신앙의 증언자들과 함께 기억해야 한다.


2.사도신경의 내용과 구조


사도신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즉 구원의 주체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부분,

교회에 관한 부분, 성도의 최종적인 문제에 대답하는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째부분에서는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보혜사 성령에 대하여,

 

둘째 부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증거하며 선포하는 교회에 대하여,

 

셋째 부분은

성도들의 궁극적인 희망과 영원한 삶에 대한 신앙이 고백되어 있다.

 

좀 더 세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12조항으로 되어 있다.

이 12조항은 고백의 대상에 따라 다시 세분되어 있다.

 

제1항은 성부에 대한 고백이다.

제일 처음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었으나,

7세기 말경에 가서야 “천지를 만드신”이란 말이 첨가되었다.

 

제2항에서 7항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이 사도신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앙고백서라 함을 알 수 있다.

이 조항에 있어서도 본래는 “잉태하사”라는 말과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 “죽으사”, “

음부에 내려가사”,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들이 없었으나 나중에 첨가된 것이다.

 

이 조항 중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말은 현재 한국 개신교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누락되어 있다.

 

제8항은 성령에 관한 고백인데 매우 간단하다.

 

제9항은 교회에 관한 조항이다.

여기에도 제일 처음에는 단순히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로 되어 있었으나,

이것이 약 4 세기경에 “공회”라는 말과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라는 말이 첨가되었다.

 

제10항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조항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11항은 “

몸이 다시 사는 것과”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몸의 부활”로 되어 있다.

같은 내용이기는 하나 부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사도신경 전체가 대중성을 띠도록 번역했으므로 그 정신에 부합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제12항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로 되어 있으나 이것 역시

처음 사도신경에는 없던 것을 후에 첨가했다.

 

초기 로마교회에서는 “몸의 부활”까지만 고백했으나 후에 “

영생”의 조항을 첨가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도신경의 처음과 나중에는 초자연적인 것에 관한 항목인데 반해,

중간에 있는 조항들은 현세적이고 지상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출처 : 점촌 반석 교회
글쓴이 : 별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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