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교

[스크랩]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본 선교적 교회론

하나님아들 2013. 8. 2. 10:50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본 선교적 교회론
정통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삼위일체라는 근본적 교리, 일상적 삶, 교회의 증거 간에 실제 연계성을 거의 인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하워드 스나이더 박사의 신간 Decoding the Church의 내용을 IVP의 허락을 받고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대 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적으로 본질에 해당되지만, 실제적으로 일상과 상관이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로서 하나님과 교회의 선교적 특성 사이에 중요한 유전적인 연결 고리가 있다. 여기서 그 연결 고리들을 탐구하고자 한다.1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성령님으로 인해 살아가는 신실한 교회들은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한다. 그런 교회들은 구조를 확립함으로써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구조보다 더 깊은 차원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근본적 DNA는 교회를 표지, 전조,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구현이나 삼위일체의 반영 혹은 반향으로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선교적, 대안적, 계약적, 삼위일체적 공동체로 묘사할 수 있다.2

선교적 공동체
교회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선교적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선교로 인해 현존하는 공동체이다. 이것이 모든 교회론의 출발점이다. 교회에 대한 중대한 이해는 2,000년 기독교 왕국에서 부상한 문화적인 기독교의 전통 구조들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해에서 시작한다.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이다. 비록 선교가 실제적 선교 활동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선교는 교회의 DNA 안에 있다. 이것은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 째,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선교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선교를 소유하고 있다. 교회는 ‘공동체와 종과 메신저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의 선교에 의해 생성된 공동체이고 그 선교로 집결된다.’3 교회의 선교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원한 공동체의 일시적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삼위일체적이다.4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께 대한 교회의 선교를 지칭하는 상호 행동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 위한 교회의 소명이며 모든 것들 중에 그분의 탁월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교회의 근본적 선교는 예배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실질적으로 선교를 뒤엎는 진부한 표현이 될 수 있다. 특히 ‘예배’가 상당히 자기 중심성의 가면을 쓰고 있는 북미의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 예배는 선교로부터 동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위험은 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특권을 부여 받은 사실을 무디게 만들진 않는다. 예배가 선교를 위해 성도들을 구비하고 그 자체로 세상에 대한 증거의 형태를 띤다는 측면에서 교회의 증거를 유지하고 촉진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며’(엡 1:6),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엡 3:21)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이 영광 음악의 목적이며, 교회의 근본적 DNA에 기초한다.5
때로 교회와 선교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세 단어인 ‘케리그마’(선포나 증거), ‘디아코니아’(봉사), ‘코이노니아’(공동체)로 정의한다. 이런 정의는 유용하지만 너무 협의적이고 교회의 풍부한 유전적인 유산을 온전히 묘사하지 못한다. 우리는 예배, 공동체, 증거라는 용어들이 보다 통전적이고 성경적이라고 확신한다.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 중심의 참된 예배, 친밀하고 책임적인 공동체, 교회가 행하는 모든 것들에 온전히 나타나는 증거라는 세 요소에 근거한다.6
둘째, 복음 전도는 교회의 선교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가장 광범위하고 기본적인 의미에서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7 특히 복음 전도는 개인적 신앙,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의 결단과 거듭남 그리고 그분의 제자됨을 제시한다. 복음 전도는 제자화와 성화뿐 아니라 의인과 신생에도 관계가 있다. 복음 전도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기쁜 소식을 포함하는 모든 것들로 간주할 수 있지만, 그 영역의 중심은 ‘돌이켜 회심하라’(막 4:12 참조)는 호소이다.
선교적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신앙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려는 긴박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진실로 성령님의 역사이며, 교회의 모든 삶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증언이 돼야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모든 사람들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위임은 모든 교회들에게 주어진 유효한 위임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특히 어떤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선포돼야 하는가?
셋째,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음 전파는 교회의 특별한 우선적 과제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파하려고’ 성령님에 의해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눅 4:18). 그분께서 메시아 됨의 표지로서 ‘기쁜 소식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신다(눅 7:22). 해방 신학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우선적 선택권’(preferential option)에 대해 말한다. 존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이 ‘그들에게 전파되는 복음을 소유할 특수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8
예수님께서 희년과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이런 주장들을 하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철저히 선교적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음 전파는 가난한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치유, 가르침, 어루만지심, 설교, 왕국의 공동체들을 세우는 일들을 통해 가난한 자들 중에 기쁜 소식이 육화됨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는 사도성의 핵심 표지를 가시적으로 나타낸다.

대안 공동체
선교적 교회는 세상과 모든 사람들 중에 그 자신의 문화와 경제와 생활 방식을 구축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대안 공동체이다. 신실한 교회는 이교적 사회와 교회의 기본적 DNA와 충동을 일으키는 교회론적 기독교 왕국(Christendom) 모델들의 양자에 대해 가시적 대안이다.
그 러나 대안이라는 말은 파악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이것은 특정한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 무엇에 대한 대안인가? 그리고 왜, 어떤 원칙에 따르는가? 이것은 교회가 지배 문화와 전적으로 다른 행위, 충성, 관심,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할 때 더욱 복잡해진다.
예를 들면, 모든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다.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모두 가족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동일한 행위, 충성, 관계를 공유한다. 어떤 행위들을 어떤 문화적 상황에서 다룰 것인가?
교 회가 현상 유지에 관해 많은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그 외에 다른 것들에 관해선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실성이 걸려 있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교회는 실로 대안 공동체가 돼야 한다. 사실 이런 대안성의 일부분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지배 문화와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하면서도 생소한 현상이다.
선교적으로 교회는 대안 공동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가 명백한 상황에서만 그렇게 불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점에서 교회에 대해 ‘대항’하는 ‘문화’와 상관없이 ‘대항 문화’가 돼야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견해는 ‘언제, 어떤 의미에서 교회가 문화이고 하부 문화이며 대항 문화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교회가 DNA에 충실할 때, 핵심적인 면에서 대항 문화적 왕국 문화를 창조한다. 교회의 사명이 하나님의 왕국일 때, 실제로 교회는 대안 공동체이다. 교회의 선교는 교회를 대항 문화적으로 만들며 교회의 선교가 계약 공동체로서 존재할 때, 대안적 실제가 된다.
계약 공동체
교회는 하나님 통치의 계약 공동체이다. 계약은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비’시키기 위해(엡 4:12), 그에 따른 교회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 교회를 사역과 선교로 불러낸다. 사역과 선교에 초점을 두는 계약 공동체는 여러 가지 주안점에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 교회는 계약 공동체가 되기 위해 소규모 계약 그룹들의 형태(아마 다양한 형태)를 띠어야 한다. 초기 메도디스트의 ‘속회’, 워싱턴 DC에 있는 세이비어교회의 ‘선교 그룹들’, 현대적 셀 교회 모델과 같은 선례들은 이에 대한 실제 예들이다.9
두 번째, ‘멤버’의 성경적 의미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멤버는 전적으로 조직적 의미를 내포한다. 조직에 가입함으로써 그 조직의 멤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멤버십’이 아니라 ‘지체들’(members of the body)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10 오늘날 북미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은 ‘바디십’(bodyship)보다 멤버십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멤버의 성경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의 차이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예로, 멤버에 대한 고유의 유기체적 의미로서 ‘몸의 일부’라는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고 ‘손발’이나 ‘몸의 기관’이라는 단어들로 대체되었다. 이에 대한 주된 예외는 얄궂게도 동사인 ‘손발을 자르다 혹은 해체하다’(dismember)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선교가 ‘해체된 사람들을 다시 멤버로 만드는 것’(to remember the dismembered)이라고 말한다.
의외로 신약 성경은 ‘교회에 입교하는 것’(joining the church)에 관해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됨을 말할 때는 그 강조점을 개인의 행동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시고 그분의 지체로 만드시며 자녀로 삼으시는 그분의 행위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지체가 되면, 복음에 대한 응답의 일부로서 예배와 공동체와 증거에 ‘함께 참여한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교회에 입교한 것’은 아니다.11
세 번째, 성직자와 평신도의 분리는 개념적인 측면과 측실천적인 면에서 극복돼야 한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대부분의 북미 교회들의 의식과 실천 안에 깊게 뿌리박혀 있다. 더욱이 신약 성경은 온전한 교회가 하나님의 ‘라오스’(laos, 백성)이며,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은 ‘디아코니아’(봉사)와 다른 사역의 형태들이다. 이 진리는 우리의 실천뿐 아니라 언어의 변혁을 요청한다. 우리는 ‘성직자’(clergy)와 동등한 의미로서 ‘사역자’와 그 사역을 배타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그런 용어들이 나타내는 성경적 의미를 회복할 수 없다면 ‘평신도’(layman, laity)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개신교 종교개혁 이후 500년 만에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 대한 사역을 회복하고 선교를 위해 모든 기독교 공동체들을 구비시키는 새로운 개혁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12 이 새로운 개혁 - (여전히 전문적 사역 모델에 근거함)은 신학교 커리큘럼과 기본적인 구조의 변화를 포함해 - 은 목사들과 다른 지도자들이 동일하게 간주하며 훈련하는 방식을 재형성해야 한다.
네 번째, 건강한 계약 공동체들은 ‘복수 리더십’(plural leadership)을 가르치고 실천한다. 곧 영적 은사들을 훈련하고 이해하며,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세우기 위해 그들의 은사들을 사용한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공동체들에는 명확히 ‘장로들’(복수)이 있었지, 한 장로나 한 목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필요한 연구는 팀 리더십의 다양한 형태들이다. 어떤 특정한 형태이든 그것은 은사와 만인 제사장직과 계층적이 아닌 복수 리더십에 관한 신약 성경의 교훈들로 구성돼야 한다.
다섯 번째, 안수에 대한 신학과 실천을 재고해야 한다. 구약의 제사장직은 신약 교회에 전해지지 않았다. 신약의 사도들, 예언자들, 교사들은 직무에 대한 안수의 의미보다 은사적 재능(타고난 재능)이라는 의미로 간주된다. 에베소서 4장 11~12절과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 바울이 구비시키는 다양한 사역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이 구절들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형성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교회 리더십을 조직하신 것을 보여준다. 두 구절들에 나오는 순서(고전 12:28에 나오는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는 조직적 계층의 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몸의 유기체적 이미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여섯 번째, 교회 구조(포도주 가죽 부대)는 교회의 유기체적 특성과 일치해야 한다. 교회 구조는 선교를 위해 기능하는 것이 우선이다. 성경적으로 회중, 소그룹 형태, 은사나 타고난 재능에 기초한 리더십, 네트워킹이나 지역 공동체를 넘어서는 연계성의 형태라는 오직 네 개의 일치 가능한 구조들만이 교회의 본질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네 가지 구조들은 많은 제도적 구조들과 대비해 타문화적으로도 타당하다.13
특정한 조직적 구조들을 교회의 본질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구조는 성스러운 것이 되며 섬김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교파적이거나 다른 조직적인 구조들이 온전히 선교적으로 되기 위해선 정기적으로 갱신되거나 재형성돼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어떤 모델을 따라야 하는가? 지역 교회 구조들뿐 아니라 교회의 근본적 DNA와 일치하는 연계적 구조들은 교회 자체의 특성과 본질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유기체적이어야 한다. 즉 수직적(계층적) 제도보다 유기체적 네트워크의 모델 사용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적 공동체
마 지막으로 삼위일체와 삼위일체적 공동체로서 교회를 살펴본다. 교회는 선교적, 대안적, 계약 공동체일 뿐 아니라 근본적인 의미에서 삼위일체적 공동체이다. 교회의 삼위일체적 특성은 그것이 너무 사색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는다면,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된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에게 교회론과 기독교 선교에 대해 가르쳐준다. 교회는 -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님의 능력으로 행하시고 행하실 일에 근거해 -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에, 성육신적(incarnational)이고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다.
유기체적으로 조망된 삼위일체적 세 가지 강조점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선교적 성격을 포착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 나, 교회는 삼위일체적으로 예배하는 공동체다. 교회는 예배 중에, 대개 명시적으로 찬양 중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를 예배한다. 더욱이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에 대해 공동체가 응답할 때, 교회의 선교적 근거를 형성한다. 공동체는 예배 중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그분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에 대한 창조적 사랑과 돌봄, 인간 구원을 위해 종이 되신 아들의 자기 내어 주심,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처럼 세상으로 가라는 성령님의 부르심과 강권하심을 이해하게 된다(요 5:26; 15:9; 20:21). 참된 예배는 우리를 선교로 강권하며 나아가게 한다.
다시 말해, 교회의 위대한 삼위일체 송가들의 신학적 풍부함은, 왜 활력적인 교회들이 현대적 찬양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적 찬송을 필요로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 장의 서두에서 교회가 세상에 대한 선교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선교를 갖고 있음을 주목했다. 이런 상호간의 행동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문자적으로 ‘함께 춤을 추는 것’, 특성들을 상호 공유함)의 고전 교리에 근거한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명), 선교를 향하도록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신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요한복음 17장의 요점인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18, 23).
삼 위일체 관점에서 선교는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기 때문에 선교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교는 상호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명을 실천함으로써 실제로 우리에 앞서 가시는 성령님에 의해 세상에 선교가 확대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압도하시고 초자연적으로 변화시키셔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요 7:17; 빌 2:13; 갈 5:23).14 교회는 삼위일체적이고 교회의 선교는 삼위일체에 근거한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사명을 포함한다.
둘, 삼위일체적 공동체는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파송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본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고’(빌 2:6~7), 그분의 선교를 수행하셨다. 이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지혜의 증거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27~30).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특별하신 관심과 예수님의 명시적 선교 - 사회학이나 정치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 는 삼위일체에 근거한다. 그것은 본서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많이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위일체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최상의 유익을 구하며 돌아오는 사랑을 받는 무한한 자기 희생의 사랑이다. 교회의 선교가 이런 사랑의 충만함에서 기인하기에,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선교가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가운데 고난 받는 삼위일체가 되시며,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께서 그분의 고난 가운데 그분에 대한 특별한 긍휼을 갖는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 강조되는 ‘과부와 고아와 외지인’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의 반영이다. 따라서 그것은 교회의 선교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고통 받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만큼 단순하고, 심오한 만큼 단순하다. 삼위일체의 상호 사랑은 하나님을 강권하시므로 가난한 자들 중에 복음이 육화되기 위해 교회를 강권하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반영하시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 4:18)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교회 사역의 우선권은 삼위일체에 근거한다.
셋, 교회의 전반적인 사역은 삼위일체에 근거한다. 모든 사역은 삼위일체적 신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그 뿌리들은 조직적 계층에 근거하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은 공동체에 근거한다.
삼 위일체는 계급 제도의 반대이다.15 리더십을 포함해 교회의 사역은 계층적인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심원한 신학적 근거는 어떤 철학적 인류 평등주의가 아니라, 삼위일체 그 자체이다. 삼위일체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물질적 창조물의 본성은 우리가 기계적이고 계층적 용어들로 교회의 사역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이고 관계적인 용어들로 교회와 그 사역을 생각해야 함을 보여준다.
앞 장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복합적 유기체이지 합리적 조직이나 사회적 장치가 아니다. 교회의 삼위일체적 특성은 교회의 확실한 DNA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요 약하면,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와 운동의 공동체이다. 이것은 삼위일체로서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께서 어떻게 자신을 세상에 보이시느냐로 나타난다. 이런 풍부하고 심오한 실재를 소유하고 있는 교회는 선교적이고 대항 문화적이며, 계약적이고 삼위일체적이다. 선교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영적 DNA(만일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를 반영하기 때문에 교회의 DNA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1. 교회의 근본적인 선교 성향은 Darrell L. Guder, ed., Missional Church: a Theological Vision for the Sending Church in North America (Grand Rapids: Eerdmans, 1998)에서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이 장에서 어느 정도는 구더의 책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부터 개작되었다.
2. 영문 단어 ‘삼위일체적’(Trinitarian)을 (원문에서) 대문자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세 갈래적 분석의 형태를 뜻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자 한다.
3. Guder, Missional Church, 81~82쪽.
4. Coline E. Gunton, The Promise of Trinitarian Theology, 2nded. (Edinburgh: T. and T. Clark, 1997), 79쪽.
5. 교회의 모든 흔적에 송영적인 측면이 있다. 예를 들면 교회는 교회의 통일성, 다양성, 사도성, ‘예언성’(propheticality) 안에서 ‘그(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엡 1:6; 고전 10:31) 하기 위해 모든 것들을 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모든 교회의 근본적인 흔적(marks)을 신실하게 살아낸다면, 그 흔적은 삼위일체로서 하나님 자신의 속성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적 측면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삼위일체적 원천으로부터 교회 DNA의 선교적 축을 끌어낸다.
6. Howard A. Snyder, Liberating the Church (Downers Grove, Ⅲ: InterVarsity Press, 1983), 70~93과 Radical Renewal: The Problem of Wineskins Today (Houston: Touch, 1996) 10장을 참조하라. 1장에서 언급된 8가지 흔적과 관련해 경배, 공동체, 증거는 근본적인 흔적은 아니지만 주된 기능으로 간주되며, 이를 통해 교회는 자신의 흔적을 표현한다.
7. 신약에서 ‘기쁜 소식을 설교하다’, ‘선포하다’, 기쁜 소식을 ‘말하다’(전도 즉 영어 단어 ‘evangelism’의 뿌리)라는 표현은 많은 경우에 명확하게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뜻한다(마 4:23; 9:35; 눅 4:43; 8:21; 행 8:12을 보라). 복음은 ‘모든 피조물에게 좋은 소식’(막 16:15; 눅 4:18, 7:22)이고, ‘모든 족속들을 위한 것’(눅 2:10)이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마 11:5; 눅 4:18, 7:22)이다. 복음의 내용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행 5:42; 8:35; 10:36; 17:18 참조)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되고 있음을 성경을 통해 명백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전도한다는 것(evangelize,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전도나 영혼을 구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것들을 내포한다. 개인 전도가 보편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와 그것에 대한 그들이 반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야기할 때, 그 사역은 어떤 우선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분의 나라 가운데 뜻을 품고 신뢰하는 ‘동일한 시민’과 ‘동역자’(엡 2:19; 고전 3:9; 골 4:11)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는 ‘(하나님)과 그분의 의’ 그리고 정의(마 6:33)의 모든 범위를 포함한다.
8. 설교 “Salvation by Faith”, in Frank Baker, ed., The Works of John Wesley, vol. 1, Sermons I, ed. Albert Outler (Nashville: Abingdon, 1982), 128쪽.
9. Gordon Cosby, Handbook for Mission Groups (Waco: Word, 1975); Elizabeth O'Conner, Journey Inward, Journey Outward(New York: Harper and Row, 1968); Steve Barker, et al, Good Things Come in Small Groups: The Dynamics of Good Life(Downers Grove, Ⅲ: Intervarsity Press, 1985); Richard C. Meyer, One-Anothering: Biblical Building Blocks for Small Groups (San Diego: LuraMedia, 1990); Ralph W. Neighbour, Where Do We Go from Here? A Guidebook for the Cell Group Church (Houston: Touch, 1990); William A. Beckham, The Second Reformation: Reshaping the Church for the Twenty-first Century (Houston: Touch, 1995); Joel T. Comiskey, Home Cell Group Explosion (Houston: Touch, 1998); Gareth W. Icenogle, Biblical Foundations for Small Group Ministry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1994); and Joel T. Comiskey, How to Lead a Great Cell Group Meeting (Houston: Touch, 2001)을 보라.
10. 로마서 12장 4~5절, 에베소서 3장 6절, 5장 30절, 골로새서 3장 15절에 사용된 ‘지체’(member) 와 ‘몸’(body)의 용례를 살펴보라.
11. 앞선 토의에서 분명히 명시한 봐와 같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의식적인 결단이나 믿음의 실천 혹은 그리스도 공동체에 대한 헌신의 필요성을 소홀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조직에 대한 ‘가입’이 아니라 성령님의 활동에 의한 거듭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의 한 부분이 되는 일이다.
12. Greg Ogden, The New Reformation: Returning the Ministry to the People of God (Grand Rapids: Zondervan, 1990). 교회가 이런 개혁의 첫 단계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이나 전 세계 각지에서 그 모습이 고르지 못하다.
13. Snyder, “Church and Culture”, 13장 ‘in Radical Renewal’을 보라.
14. 그렇게 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신적 ‘Perichrsis’는 교회의 삶에 반영되며,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Colin E. Gunton, “The Community: The Trinity and the Being of the Church”, chapter four in The Promise of Trinitarian Theology, rev. ed. (Edinburgh: T & T Clark, 1997)에 큰 도움이 되는 논의가 있다.
15. 특히 서구 전통에서 몇몇의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와 계급 체계를 접목하려고 시도해 왔다. 실제로 두 가지가 개념적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 그러나 계층 체계(기독교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가 삼위일체의 우위에 놓이게 되는 결과를 자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이 감춰진 것들 중에 하나로서 사역, 리더십, 성 문제(gender issues)를 성경적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무의식적 요소로 자주 나타난다.

하워드 스나이더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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