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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음서와 예수님의 생애

하나님아들 2013. 6. 9. 15:38

James S. Stewart저, 문창수,김성수 역


I장. 복음서의 기록

1. 복음의 형성과정

예수는 자서전을 쓰시지 않았다. 예수는 글이라고는 아무것도 남기시지 않았다. 그저 그를 알고 사랑한 사람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자기와 자기의 가르침을 일임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복음서라 일컬어지는 작은 네 책은 우리의 제1원리가 되며 세계를 변화시켜온 생애와 말씀에 관한 유일한 정보원인 셈이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가 보다 많고 자세하게 기록되었으면 하고 바랄런지 모른다. 그러나 복음의 기록이 짧긴해도 그것으로 충분함을 우리는 아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시대 종족에게 그리스도를 주었다.

엄격히 말하면 복음은 전기가 아니다. 예수의 지상 생애는 30여년 남짓되는 기간을 망라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책들은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도 있는 짧은 것이다. 예수의 생애의 대부분은 완전히 침묵 속에 보내어졌다. 요한은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요한복음 21:25)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한편의 "언행록"(memoirs) 곧 회상록 선집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목적이 있는 선집이다.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1).각 전도자는 선생의 모습을 묘사하는 일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각자 그 나름의 각도에서 쓰고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예수의 초상화를 네개 갖고 있는 셈이다. 이점은 오늘의 우리에게 사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예수는 너무 크시고 경이로운 분이므로 어느 한 사람의 관찰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초상화가 그 나름의 특징을 갖고는 있어도 모두가 동일한 예수를 그리고 있다. 곧 그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가지신 예수인 것이다.

얼마후에 다른 "복음들"이 각기 면면을 들어내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복음서들"이 신약성경으로부터 제외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 속에는 사실과 전설이 풀수 없이 뒤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네 복음서 중 제일 일찍 기록된 것은 서기 65년내지 70년 사이에 나타났을 것 같다. 즉 예수의 지상사역이 끝난이후 35년 내지 40년 어간에 나타났던 것같다. 그 사이에 어째서 이렇게 장기간의 시일이 경과했을까? 오늘 같으면 위인이 죽을때 그 친구들이 한 세대 이상이 경과한 후 그의 "전기"를 출판해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인 것이다. 전도자들이 이 명백한 의무를 지연시킨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일까?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것은 지연이 아니었다. 이렇게 늦어진 한가지 이유는 그들과 거의 모든 초대교회는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에 너무 바빴고 그들이 활발한 활동에 너무 열중하여 여념이 없었고, 왕되신 이의 업무가 너무 급한 것이라 확신했음으로 이런 유의 문서사역은 옆으로 떠밀려져 나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대 기독교인들의 대다수는 이 세대가 속히 끝날 것을 예기하고 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라고 하시지 않았으며 다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런 기대가 책들을 써 내는 일을 별 필요 없는 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나타나신 일은 그들 대다수에게 있어 너무 생생하고 현실적이어서 처음에는 그들이 예수의 말씀고, 주께서 육신을 입으셨을 때 행하신 일로 계속 되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이런 까닭에 날이 불어서 달이 되고 달이 늘어서 해가 되었다. 그래서 한 세대가 지나간 후에야 최초의 복음이 나타나게 되었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은 전도자들이 기록하기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 예를 들어 누가는 그가 기록한 복음의 처음 몇절에서 그가 잡다한 많은 자료들을 정선해서 그 자신의 기록을 작성하는 일에 착수했다고 말해준다. 비유,이적 이야기, 교훈의 말씀들, 안식일, 혹은 금식,혹은 기도에 대한 기록들이 여기 저기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전도자들은 이 정도로 그 길이 준비된 것을 발견했다. 이 귀절들을(눅1:1-4) 용의주도 하게 읽고 연구해야 한다. 이 귀절은 성서적 "영감"의 의미와 성서적 영감이 아닌 것을 결정함에 있어 극히 중요하다. 영감 받은 성서저자들이라 해서 기타 저자들이 직면해야 했던 어려운 역사적 연구의 필요를 기적적으로 면제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가는 여기서 완전히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영감은 하나님이 인간의 지성과 기능을 마법을 써서 초월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영감은 하나님이 사람의 지성과 기능을 통해 자기의 의지를 표현하시는 것이다. 영감은 성서 저자 자신의 인격을 대신하여 그를 하나님의 기계 (도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영감은 그의 인격을 보충,강화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살아 있는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윽고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하는 충동을 강하게 느끼게 되자 여러가지 동기가 덧붙여졌다.

예를 들면 돌연히 세상에 종말이 오리라는 기대는 감퇴되었고 해가 지나감에 따라 예수를 알았고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죽어 세상을 떠남에 따라 구전과 단편적 기록 문서에 계속 의존하는 것이 극히 불확실하여 위험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전도자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을 위해서 예수의 이야기를 남겨두어야겠다는 소명감을 느꼈다. 더구나 이교에서 개심한 수많은 젊은 이들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 이후 세대에 태어나 교려할 들어온 젊은이들이 성만찬의 의미와 그 기원을 알고 싶어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것은 예수께서 배신당하시던 밤에 다락방에서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믿을만한 기록은 그들 손에 쥐어주는 일이었다. 이외에도 이단들의 위험도 있었다.이자들과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교회 안에 믿음 문제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해지자 이런 문제가 불가피하게 일어났다. 즉 예수는 실로 이것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주님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그리고 교회가 외부로부터와 교인들 중 성격과 행동과 동기가 거짓되고 해로운 대표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했을 때 세상의 눈 앞에 교회를 창설한 주님의 이야기,그들이 섬기기로 서약한 주님의 이야기를 치켜들어보이는 일 이상으로 더 좋은 변증이 있었겠는가?> 이 여러가지 방침을 따라 주님의 귀중한 이야기를 뚜렷하고 영구적인 형태로 보존할 필요가 점차 느껴졌음으로 전도자들은 이 일에 착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최초의 복음

그림설명마가복음 : 3세기 희랍어 파피루스 단편중의 막 8:10-24부분 체스티 비티 파피루스 1

최초로 나타난 것은 마가복음이었다.그런데 고래의 신빙성 있는 전통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이것은 초기 기독교 저술가의 한 사람인 파피아스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다) 곧 '마가는 베드로의 해석자'였으며, 그가 들은 베드로의 강설과 설교로부터 "기억하고 있던 것을 모두 정확히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이것은 젊은 요한.마가가 위대한 사도의 전도여행에 동반하고 다닌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다. 베드로가 시장에서 무리들에게 설교하는 동안 시장 한편에 서 있거나 집회가 끝나고 설교 내용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상담하는 베드로를 도와주는 마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입술에서 나오는 예수의 생애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 거듭 거듭 귀를 기울여 마침내 그 이야기를 전부 외우고 그 분위기 속에서 살던 마가를 보게 되며, 마침내 죽음이 그의 위대한 친구요 지도자를 데려가자 마가는 주의 이야기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최초의 복음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전해졌다. 마가복음 배후에는 주님의 가장 내밀한 친구의 하나였던 베드로의 증거가 서 있음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런 까닭에 마가복음의 역사상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마가복음 "이란 명칭은 뒤에 첨가된 말이다. 마가 자신은 아무 명칭도 붙이지 않았다. 전도자들은 문필로 명성을 날리려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저들의 열정이 자아의 온갖 생각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누구의 손에서 나왔던가를 세상이 알고 싶어한다는 것에는 그들의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이야기를 매우 정직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결코 제자들의 집단을 호감을 가지고 제시하거나 그들의 실수와 허물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도 하지 않은 사실이 이것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마가의 복음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사실은 베드로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자기의 허물을 가리우려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예수께서..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8:33).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14:50)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이야기(14:66 이하)등등이 모두 여기에 아무것도 숨김없이,아무 것도 꾸밈없이 그대로 담겨 있다. 땅 위의 명성은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만이 전부였다.

헌데, 비록 마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사도행전의 다음 귀절들을 보라. 12장 12절은 마가의 집이 만찬을 가졌던 "다락방"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흥미 있는 암시를 제공하며 이럴 경우 마가 자신이 예수를 지켜본 증인일 것은 틀림없다.12:25,13:13,15:36 이하와, 서신 중에서 골로새 4:10,디모데후서 4:11,빌레몬 24절, 베드로전서 5:13등이다. 여기서 한가지 특별히 매력 있고 매혹적인 암시,곧 본복음서의 한 곳에 저자에 대한 살짝 감취어진 암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막 14:51-52).겟세마네 동산에 이렇게 수상하게 나타난 "한 청년"은 누구였을까? 네 전도자 중 마가만이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베드로에게 들은 것일 리도 없다. 베드로는 이미 도망가고 난 뒤였으니까(14:50). 이 이야기는 '청년'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만일 이 사람이 그 이후 초대교회의 제법 걸출한 인물이 아니었다면 이것을 기록하는 것은 무의미했을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미지의 인물은 마가 자신이 아니었을까? 이 문제를 뚜렷이 결정짓는 일은 물론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 그가 누구인지 모를 것 같지는 않다.

3. 유대 기독교인들을 위한 복음

마가의 "예수의 회상록"에서 마태의 회상록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한 가지 차이점이 즉각 눈에 뜨인다. 마가의 주요 관심사는 예수의 생애의 사건에 있고 마태는 오히려 주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다. 또 다른 초대 기독교 전통은 (역시 파피아스로부터) "마태가 예수의 말씀을 히브리어로 기록했고, 각자가 이것을 할 수 있는 한 잘 해석했다"고 말해준다. 제자 마태는 일기를 썼는데 거기에 가끔 그의 대화와 교훈을 기록했던 것 같고 마가의 기록을 첨가한 이 일기가 마태복음의 토대가 되고 여기에 마태의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마태복음은 특히 유대 기독교인들을 위한 복음읻. 이와 관련해서 구약성경이 자주 인용되고 모세 율법을 중요시하고, 유대인들의 메시야에 대한 대망의 강조와 이 대망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을 주목하자. 앞서 이미 살펴 본대로 모든 전도자들의 특징이 되는 겸손을 지닌 마태는 자기 자신의 개심의 이야기를 단 한절(9:9)를 말하고 있다. 주께서 그를 깊은 타락의 구덩이에서 건져 올리신 사실을 감추려는 노력이 전혀 없다. 그는 "세관에 앉아 있던"세리였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으로 배척당하던 부류였다. 왜냐, 그는 자기 나라와 자기 양심을 팔아 먹은 자요, 틀림없이 자기 인격도 팔아 먹은 자였기 때문이다. 이 직업은 모든 충성된 유대인의 눈에는 치욕으로 낙인 찍혀 있던 직업이다. 이 얼마나 있을 법하지 장소에서 주님은 전도자들과 대사(全權大使)들을 찾아내셨던가!

4. 이방 기독교인들을 위한 복음

유대인이 아닌 전도자는 누가 뿐이다. 누가는 마가와 마태복음에 나타난 출처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외의 다른 자료들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방인 혈통과 교감은 그의 복음의 가장 인상적인 면모를 설명해 준다. 즉 누가복음은 선교적 복음이요, 본 복음서가 묘사하는 그리스도는 우선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인 것이다. 본서가 데오빌로-로마 정부의 고위 관리였던 것 같으며 아직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에게 증정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누가가 바로 시작부터 순전히 지방적인,팔레스타인의 배경을 둔이야기를 말 했고 이것을 일부러 세계 역사의 구조속에 배열하려 한점을 주목하라.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인류의 시조인 아담에까지 거슬러 밟아올라갔을 뿐 아니라(이스라엘 국가의 창건자인 아브라함으로 시작하는 마태와 대조해 보라) 예수의 오심을 세계적 사건들(예를 들어 3:1)과 관련시키고 있다. 더구나 누가에게 있어 그가 임으로 사용할 수 있던 수 많은 자료들 중에서 어떤 사건과 비유들을 예수의 회상록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는 선교의 동기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관계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감사를 표시한 문둥이 이야기(17:16,"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기타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13:29)와 ,특히 탕자 비유, 이방인 세계를대표하는 큰 아들 비유등등이 나온다. 누가복음은 특히 세계의 소망의 복음이다.

제 3 복음서와 함께 사도행전을 기록한 (행1:1) 누가는 의사였다 (골4:4).그가 처음에 바울에게 소개된 것은 그가 의사였기 때문일 것 같다. 그후 그는 바울의 전도 여행의 동료가 되었다. 누가의 의술이 위대한 기독교선교사였던 바울에게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의 건강은 미심쩍은 것이었기 때문이다(고후12:27이하).바울은 주님의 일을 하며 자주 매를 맞고 상처와 흉터를 많이 갖고 있었다(고후 11:25 이하,갈6:17,행14:19).누가의 의사수업은 복음서 중에 예수의 병 고치신 이적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그 당시 의학용어로 사용되던 어떤 전문용어들을 통해서 그때 있었떤 사건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윌렴.램시경(Sir William Ramsey)은 다음과 같은 매우 매혹적인 암시를 하고 있다. 즉 누가가 그 당시에는 소아시아에 살고 있었지만 바울은 여기서 처음 누가를 만나 그를 기독교에 개종시켰다. 그는 원래 빌립보 출신이었다는 것과 바울이 환상 가운데서 드로아에서 어떤 마게도냐 사람이 그들에게 "와서 우리를 도우라. (행16:9) 고 손짓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본 것은 그의 친구 바로 누가였다. 누가복음이 저자가 기독교를 서방 세계에 가져 오는 도구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제3복음의 정신과 그 강렬한 선교적 관심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5. 제 4 복음

그림설명 / 마태 : 이 사본은 샤를마뉴 궁정파의 최상의 작품중의 하나이다. 구도는 복잡한 수리적인 관련을 반영하고 있지만 지배적인 것은 부활한 후기 로마제국 양식과 북 이탈리아의 비잔틴 미술이다.

처음 세복음서(이 세 복음에 공통되는 관점 때문에 자주 공관복음이라 불리운다)에서 제 4복음으로 옮겨갈 때 우리는 즉각 다른 분위기 속에 들어감을 느끼게 된다. 이 차이는 초대시대부터 느껴졌다. 알렉산들이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er)가 그 이전의 저자로부터 인용한 말들은 이 점을 잘 서술하고 있다. 곧 "육적 제 사실이 이미 다른 세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요한이 영적 복음서를 썼다"라고 했다. 4복음서 저자가 그의 독자들 편에 다른 세 복음서에 대한 지식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저자는 다른 세 복음서의 내용을 보충하고, 그 자신의 영적 천재성과 신비성의 도움을 받아 예수의 인물됨과 사역의 보다 깊은 의미를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한 사람의 평생의 명상과 골똘한 생각가 영교가 제 4복음서 기록에 담겨져 있다.

요한복음이 그 앞의 복음서들과 구별되는 많은 점들 중 다음의 특징들을 말할 수 있겠다. 본 복음에는 비유가 하나도 없다. 거의 예수의 유대지방 사역에 집중하고 있으며 갈릴리 사역은 거의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그리고 개개인들과 예수 사이의 사사로운 대담, 특히 나다니엘,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인과의 일련의 대담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의 인간적 면이 강조된 어떤 장면들은 생략하고 있다. 특히 광야의 시험, 겟세마네의 고뇌, 유기되셨을 때의 십자가 위로부터의 외침 등등이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인물됨과 사역의 영원한 면들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나사렛의 목수"가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제 4복음이 다른 세 복음을 보충하는 일을 착수함에 있어 그 목적을 영광스럽게도 성취하였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였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묘사를 충분하고 완벽하고 완전하게 했다.

우리의 기록으로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우리의 모든 연구는 이 작은 네 책에 의존해야 한다. 이 책들이 우리에게 세 가지를 제공함을 기억하자. 첫째 우리에게 역사를 제공한다. 여기에 우리는 견고하고 확고한 난공 불락의 역사적 기본 사실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역사 이상의 것을 주고 있다. 계시를 주고 있는 것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들려오는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요,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하지만 역사와 계시 이상의 것을 준다.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이다. 각 페이지는 우리에게 이 도전을 새롭게 해준다. 그리고 구구절절이 이 도전을 통감하게 한다. 그 도전이란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 결국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전은 우리가 대답하기까지 우리를 계속 따라다니는 것이다.

매일 성경

 월,요한복음 1:1-14  말씀이 육신이 되심
 화,히브리서 2:1-9   예수를 봄
 수,에베소서 4:1-16  전도자의 사역
 목,마태복음 9:9-13  세리 전도자 마태
 금,사도행전 15:35-41 손해를 벌충한 요한 마가
 토,디모데후서 4:10-11,
 일,누가복음  1:1-4 의사요 선교사인 누가
    요한복음 13:23-36,사랑하시는 제자
             21:20-25
 

토론을 위한 문제

1. 1,900여년 전 사건들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떻게 해서 관련성을 가지게 되는가?

2. 네 복음서 사이에 주요 차이점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네 복음서는 조화를 이루는가?

3. 누가복음의 처음 네 절은 성서의 영감에 어떤 빚을 던져주는가?

4. 어떤 아프리카 여인이 성경에 관해서 선교사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 이 책은 읽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이 책이 나를 읽습니다." 이 말은 오늘의 복음서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 사실인가?


제 2장. 때가 차매

탄생의 준비

이곳 사람들은 세계의 중심지가 예루살렘의 성분교회-예수의 무덤 자리였다는 곳에 세워진 교회-라고 그곳에 오는 여행가들에게 말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말이 과장 같이도 들리지만 지구의 중심주가 팔레스틴이라는 것은 지리적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팔레스틴은 유럽,아시아, 아프리카 등 3대륙을 연결하는바 지중해 동해안에 교량의 위치에 있다. 3대륙의 주민들이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을 각기 한 바퀴씩 일주할때,3자가 공통적으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팔레스틴이다. 고로 이곳이 세계의 중심부라는 전설은 이 전설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인식했던 것보다 더욱 사실에 가까왔다.

베들레헴과,나사렛과, 갈보리가 기독교 신앙의 요람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가 세계 역사상 종교로서의 실현을 위해 진출한 곳이 바로 팔레스탄이며, 이곳은 세계적 종교를 시작하기에 최적한 장소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이곳이 그리스도가 나실 이상적인 처소였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시기 역시 이상적이었다. 이제 이점을 생각해 보자.[기약이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갈4:4)]라는 바울의 증언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 인류와 세계를 위한 그의 계획, 그리고 그가 예정하셨던 계시의 때가 인류 역사상에 완전히 도래했을 때에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사회적, 경제적, 도덕적,그리고 종교적인 제반 조건이 하나님의 품에 계시던 독생자 그리스도가 탄생할 모든 조건에 이르렀기 때문에 탄생하셨던 것이다. 루퍼트 부룩(Rupert Brooke)은 예수 탄생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인간에게 오신 그 시간을 우리는 감사하자. 우리의 젊음을 사로잡아 주신 그때, 우리를 잠에서 깨우쳐 주신 그 때를,

눅 2:9-14 그림 / 목자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알림

인류 역사의 모든 시간 중 하나님의 품에 계시던 독생자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강림하신 그 때보다 더 영광스러운 시간을 어느 때 대하겠는가? 그 영광의 시간과 탄생의 사건이 교차되었던 것이다. 인류사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모든 세대에 전하여진 이야기들을 얼마든지 살펴보라.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던 시대 보다 더 놀라운 시대는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예수의 출현을[인간들의 사건에는 때(밀물)가 있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볼 그리스도는 인간 세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에도 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밀물은 넘칠때, 사업의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을 때, 세게는 이 아들이 나타나기를 절규했고, 이 역사적인 밀물을 인류는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만 했고 이 조류를 타고 하나님이 인류 역사속에 모험의 걸음을 옮기셨다.

이 밀물은 받아들인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라는 찬미로 전 유럽을 진동시켰고, 죤 낙스는[신앙의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으로 스콧틀랜드를 뒤흔들었고, 웨슬레는 영국을 성화로 불붙였다. 헬라와 로마 세게에 갈릴리부터 한 사람 예수 탄생을 알리는 천군 천사의 노래와 나팔 소리가 울렸다. 바울의 말대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그때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운데 정해진 시간이었다. 모든 상태가 그의 오심을 위해 못르익은 바로 그 시점에 예수께서 오셨던 것이다.

2. 정치적 준비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위하여 준비된 사실은 무엇인가? 그의 출현하는 때를 위하여 세계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었는가?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 탄생을 위한 정치적인 준비를 살표보자.그리스도 탄생 당시의 세계의 정치적인 위치는 역사상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당시의 세계는 정치적 통일을 이룩한 시기였다. 이 정치적 통일의 주역은 로마 황제 가이사였다. 군소국가들이 제각기 자기 변방을 지키던 시대는 지나갔다. 분립,이기심,무정부주의로 산만한 국제정세,주변 국가의 국방 강화시대에서 한걸음 발전한 시대였다.

대서양에서 카스피해까지,영국에서 나일강까지, 하드리아 국경에서 유브라데에 이르는 모든 도로, 및 지역에는 로마제국의 깃발의 휘날리고 있었다. 열국의 혼돈 상태는 지나가고 강국 로마의 정치세력이 중동 전지역을 통일시켜 세게는 이른바 한 이웃이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에 있어서 세가지 크게 공헌한 사실을 들 수있다. 즉 로마 주변 국가의 평화, 교통상의 편의, 그리고 언어의 통일 등이었다.

만일 그리스도가 한세기쯤 일찌기 출현했다고 가정한다면, 주변 국가들이 각각 쇄국정책으로 문호를 폐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지로는 국가적인 장벽이 가로 놓여 있고, 수로에는 해적들의 장애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각국으로 전파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한세기쯤 후에 오셨다고 가정해보자. 복음을 전하고 듣는 모든 사람은 북쪽에서 나타난 야만족들이 이룩한 문화와 대결하기에 매우 분주했을 것이다.그러나 예수는 로마가 이미 세계 평화를 이룩한 다음에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베들레헴에서 울려 퍼진 천사의 장엄한 노래를 아무런 속박없이 자유롭게 그리고 확실하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를 더 발리 정복할 수 있었던 요소는 편리하게 개통되어 있는 로마의 공도였다. 제국의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는 넓은 도로는 로마제국의 눈부신 토목기술 발전에 힘입은 바 있다. 당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 도로 공사에 땀을 힘입은 바 있다. 당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 도로 공사에 땀을 흘린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는 환영 작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사실 그들은 이 큰 일을 위하여 일한 사람들이다. 이 발달된 교통기관을 이용하여 로마군이 어느 지방이나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도 이 길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진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복음의 불길은 곳곳에서 점화되고 있었다.이렇듯 초대교회 선교운동이 활발했던 성공의 배후에는 로마제국의 교통기관이 편리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세째로 언어의 통일을 들어보기로 하자. 초대교회 선교사들이 언어가 통일되지 않은 세계에서 활동했다면 그들의 노력은 고달프고 미약했을 것이며, 또한 범위도 매우 좁았을 것이다. 따라서 전도의 진로도 여러모로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곳으로 가든지 자기들이 사용하는 말이 통할 수 있는 언어통일 시대에 살고 있었다. 지방 방언 때문에 때로는 두가지 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대개는 헬라어를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갈라디아 거리에서나, 아덴의 모임에서 나, 로마나 스페인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헬라어만 사용하면 어느 지방이든 통할 수 있었다.

이렇듯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안정과 발달된 교통수단과 통일된 언어가 전세계로 하여금 한 이웃이 되도록 작용하였으니 이때야말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가장 적기였다.

현시대를 분석해보자,역사는 지나간 일들을 되풀이한다. 오늘이야말로 생활을 변혁시키는 가장 좋은 시기에 도달했다.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국가간의 이웃관계가 가까와졌다. 모든 나라들이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 교제상황을 볼때 거의 밀착되어 있는 실정이다. 세계의 이편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다음날에는 저편 끝에 알려져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본다. 전적인 동시에 도덕적이며 정신적인데까지 이른다. 영국이나 소련,그리고 인도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상은 순식간에 번져 전 세게를 허리띠처럼 동여 매어 버린다. 과거 어느 시대 보다도 현대의 전파력은 광범위하고 비상하며 이 사실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다.

사람의 생각도 이와 정비례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 오늘의 과학은 얼마나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는지 모른다. 이 기회를 값있게 이용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다. 한 나라, 한 교회, 일개인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불이 붙는다는 것은 전세계 인류의 모든 영혼에게 성화를 옮겨 붙이는 결가가 된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한 적은 지체인 교회가 오순절 다락방의 은헤를 다시 받게 된다면 그것은 곧 전세계에 세워진 교회들과 사회에 하늘나라를 임하게 하는 길이 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지금 넓게 열려있다. 진실로 복음의 때가 이르렀다고 하겠다.[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도다](계 3:8)

3. 경제적 준비

예수께서 오신 시기는 정치적으로만 준비가 완료된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때가 이르렀다고 본다. 고대 로마의 찬란한 문화의 그늘,그 사치와 낭만의 배후에는 생활의 빈곤이 밀물처럼 강한 도전으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괴롭혔다 로마 가도를 걸어가는 세사람 중 두 사람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생활기구이거나 또는 유동 재산의 대우를 받는 노예였으며, 때로는 이 노예들이 사회에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로마의 시인들은 지나가 버린 과거를 황금시대로 노래했고, 히브리 예언자들의 말과 같이 그들이 동경하는 시대는 행복을 약속하는 미래의 약속이 아니었다. 그들의 모든 자랑은 과거의 역사 이야기였으며 당시는 철의 시대라고도 표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가이사 왕통이 다스리는 여러 지방이 이때처럼 경제우ㅢ기에 봉착한 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수님 탄생 당시의 실정은 고달펐다. 이런 경제적 공황에서 팔레스틴 지방만 윤택이라는 이치는 없다. 계속되는 전쟁의 여파, 날로 더하여 가는 헤롯 대왕의 사치와 낭비,과중한 세금, 인구 증가 등은 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생활의 안정을 보장시킬 수 없었고 오히려 무리한 불경기만 연속되고 있었다. 고로 모든 국민의 생활은 걱정과 근심으로 불안했고 누구의 표정을 보아도 보장이 없는 내일의 염려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하여 세계는 일대 고민 투성이로 화해버리고 말았다.

이토록 암담한 시대에 갈릴리에서 한 소망의 외침이 메아리침으로 사람들은 마음에 즐거움을 얻었으니 그가 곧 예수이며 그는 임하실 적기에 출현하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자. 즉 복음의 역사를 분석해 볼때 부흥이 경제 번영시대에 더 잘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불경기에 더 잘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다,물론 경제난에 봉착하면 고민과 염려가 더 쌓이고 내일의 빵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와지기 때문에 신앙이나 종교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와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궁지에 빠졌을 때를 이용하여 자기의 일을 이루시는 기회로 만드신다. 인간의 모든 재물이 다 없어지고, 밑천이 다 달아나 버린 것은 세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준비의 기회를 준 것이다.

웰쉬(welch)는 그의 저서 The Preparationr for christ in the O.T. lesson III과 XI X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심각한 윤락의 시대가 역사적인 대부흥을 일으키는 시간이다]

우리에게 부딪치는 모든 재난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인류 역사에 맞아들이는 준비 과정이었고, 거치른 사막이었기에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공도가 되었다. 정치적인 준비 못지 않게 경제적인 준비도 있었던 것이다.

4. 도덕적 준비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당시는 도덕적으로도 그 기약이 찼다고 하겠다. 영국의 시인 스와인번(Swin bun)은 [그리스도 이후에 세게는 결코 이 분처럼 유쾌할 마음의 고향을 보여준이는 없다]고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계속된다.[예수만이 자연의 밝음과 좋은 정신을 독차지 하셨다.] 그때까지 헬라,로마는 그들의 자연 숭배오 제우스(Zeus)와 디오니수스(Diny us),아프로다일(Aprodite)을 섬기므로 행복을 찾으려고 했었는데 예수의 출현과 함께 그 모든 이교적인 신앙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오 - 창백한 갈릴리 사람이여 그래도 그대는 승리자로다 세계는 당신의 숨결 안에서 잿빛으로 변하여졌노라

위에서 말한 바 고대세계의 행복이나 순수나 유쾌나 도덕은 모두 하나의 단순한 신화를 말할 뿐이다. 역사가 고증하는 넌센스이며 사실과 상반되는 증언이었다. 만일 당신이 세게의 참된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스와인번에게서 배울 것이 아니라 로마서 1장에 기록된 대로 [오고 오는 미래를 위하여 영원토록 서있는 한 세계]곧 도덕적으로 여지없이 타락한 로마의 참상을 그려준 바울로부터 세계에 대한 바른 지식을 들을 수 있다.

독일의 역사가(고전학자)몸센은 말하기를 [세계는 낡아져간다. 제아무리 로마의 가이사라도 이것을 다시 젊어지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사실이 그렇다.세계는 이제 괴롭히는 벌래와 종기와 비애만이 남아있다. 어느 곳에 가도 우리의 고귀한 정신이 발 붙일만한 땅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귀중한 영혼들이 어느 곳에를 가든지 재난과 몰락과 항구적인 밤에로 몰아 넣는 반란적인 길을 걷는 것이었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능력의 지대하심으로 낡은 세대를 새롭게 단장하셨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으로 개인과 사회,그리고 전국가적으로 도덕적 생활의 강화를 일으키는 것이 현실에 요구되는 바가 아니겠는가?도덕관념이 해이해지고 상호에절이 파괴되고 사회질서가 문란해질 때는 이 해이와 무질서와 문란에 대한 반동이 반드시 오는 법이다. 사람의 영혼 밑바닥에 잠재해 있던 하나님의 성격이 표면적으로 나타나 반발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인망만을 위주로 하는 신조의 애착과 현대의 자유주의적 복음의 유혹이 잠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시간을 뺏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마음으로 원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언제까지나 그런 얄팍한 윤리에 짓밟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항상 탈출할 기회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예수님 탄생 배후에 잠재한 일반의 도덕적 욕구였다. 고로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때는 도덕적으로도 그 기약이 이르러 탄생의 준비가 되었다고 하겠다.

5. 종교적 준비

그리스도께서 오신 때는 종교적으로도 그 기약이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낡은 우상들은 기능을 상실하고 없었으며 이런 종교적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두 가지의 모험이 시도 되었다. 헬라의 오림프스산에 우글거리고 있다는 동양신들이 로마 종교인들의 피로에 지친 정신 세계에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였고, 다른 하나는 이같은 수입신이 아닌 국산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즉 로마황제 자신이 신의 존재로 부각하여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바쳐 그에게 무릎을 꿇고 추종하기를 요구했었다. 그러나 두가지 모험은 모두 실패했다. 상처 받은 그들에게 한마디도 들려줄 수 없었던 오림프스의 신들은 추호의 위로도 주지 못했으며 로마에 있는 만신전은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었다. 죄로 할퀸 그들의 심령에 가이사의 신성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외래신들과 국산품적인 로마의 가이사신이 인간의 깊은 요구를 채워주지 못하였을 때 인간 영혼의 기갈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절망적인 사태만은 아니었다. 참 신 하나님으로부터 한 절박한 요구가 사람들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세계 도처에서 문제를 보다 깊은 차원에서 생각하면서 도 영적교류가 항상 없는 사람들은 흑암 저 너머에서부터 붉게 단장하고 찾아오는 광명한 새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사람보다 지난 수세기 동안 선조들에게 지시되었던 메시야의 희망이 멀지 않아 그 어둔 구름을 헤치고 새아침의 광명으로 비쳐줄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중간시대(구약과 신약 사이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수많은 기록들은 이위대한 소망의 글로 계속되어 있었다.예컨대 요단강 동편에 나타난 야인 세례 요한이 이상한소리로 외치자마자 군중은 한결같이 그 이상한 사람에 대하여 [ㅇ 사람이 메시야가 아닌가?] 할 정도로 그들의 메시야 고대사상은 강렬하였다. 로마 제국 구석 구석에 산재해 있던 유대인들은 한결 같이 이 기대와 꿈속에 살았다.

열정이 극에 달한 이 기대는 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한 준비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즉 종교적인 상황으로 볼때 그가 오실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종교적으로 그 시대와 비슷한 경향이 보이고 있다. 옛날 로마 시대처럼 한편으로는 낡은 신들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 편리를 위한 신들, 존재하기에 피곤을 느낀 신들, 중고품으로 변질된 종교의 전통, 물질주의,세속주의들의 세력이 점차 안주할 땅을 잃어가고 있다. 반면에 우리 세대에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우선 구미 각국에서 출판된 최근 에수에 관한 서적들을 보라. - 기독교 세계 밖에 있었던 나라들 - 특히 인도같은 나라까지도 이제는 나사렛 예수를 우러러 보고 그의 지도를 받으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도처에서 청년들 사이에 새로운 영적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이런 사건들이 전세계를 동시에 움직이는데 이 영적 충동의 밀물은 곧 그리스도를 향한 관심인 것이다.우리 시대는 장벽을 헤치고 밀물처럼 부딪치는 교회의 세력에 불가형력일 수 밖에 없다. 고로 현시대도 로마시대처럼 그리스도의 기약이 가까와졌다고 하겠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상에 열거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준비 과정을 거쳐 세상에 임하셨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우주가 창조함을 받을 때부터 역사의 벨이 울리는 날까지 모든 사람의 기다림 속에 그가 숨어 있어야 하리라는 마련이 있었다. 그리하여 세계의 모든 사정과 사람들의 모든 마음이 예수를 맞이할 수 있는 준비가 완성 되었을 때 그가 세상에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실 때, 그는 늦게도 일찌기도 오시지 않고 적합할 때 오셨다.그날은 곧 주의 날이었다. 언제나 마음으로 예수를 왕으로 모실때 그날은 주의 날이 되는 것이다[주예 수여 오시옵소서].



제 3 장. 유년기와 소년기

1.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환영

그리스도가 오실 때가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임하실 때 세게는 처음에 그를 반기지 않는듯했다.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니라](눅2:7). 여관 주인은 그날밤, 피로하게 보이는 두 나그네를 거절해 버렸다. 이것은 그가 세상에서 당할 거절의 예고이기도 했다. 여관 주인의 거절상황을 분석해 보자.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 발표에 이 여관은 만원이 되어 상당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주인에게는 더 없는 행운이었다. 그에게는 조금의 여가도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하였다. 이처럼 분주한 사람에게 밤늦게 찾아온 두 나그네의 딱한 사정이 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만일 거절하지 않는 다면 이미 들어있는 다른사람을 내어 보내야만 했다.그들의 차림새가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돈이있는 사람처럼 보였더라면 여관 주인이 끝까지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탄생하실때 당하신 거절과 같이 오늘날도 사람들은 자기의 바쁜 수입 때문에 예수를 거절하고 있다. 지금 당장 그리스도가 오셨다해도 사람들은 다른 일을 위하여 딴 곳으로 가버릴 것이며, 자기들의 문 밖에 초라하게 서 있는 예수를 멸시하고 다른 일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이미 사도 요한이 밝힌 바 있다. [그가 자기 땅에 오나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니라](요1:11)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거절만 당하시지는 않았다. 그를 환영할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복음서가 밝혀준다.

(1) 그의 모친이 영접했다.

성경에는 모성애를 찬양하는 기사가 여러 곳에 있다. 십계명에 어머니에게 행할 이상적인 효도의 기록이나(출20:12),잠언서에 [그 자식들이 일어나서 사례하며](잠31:28) 한 귀절이나 사26:13에 [하나님의 위로는 자식을 위로하는 어머니의 위로와 같다]는 말씀과, 신구약에 기록된 유명한 어머니들,즉 한나,룻,스빔여인,엘리사벳,살로매,유니게 등 여러 어머니들의 행적을 성경은 높이 평가한다. 그 여러 어머니 중에 가장 숭구한 어머니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다.

첫째, 마리아는 경건한 여자였다. 세상의 많은 여자 중에서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시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뽑힌 여자다. 어리신 예수께서 맨 처음 기도를 이 마리아의 무릎 위에 앉아서 드리셨다.

둘째, 마리아는 고독을 참은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여자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우주적인 사업 계획을 천사로 부터 전달받은 시간부터 이 사실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였던 숭고한 의로움의 경험자였다(눅2:19).예수께서 어린 시절 지내시던 그 집을 자기의 사명 때문에 떠나시는 날도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더할 수 없는 고독의 날이었고, 더우기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 마리아가 서 있었다](요19:25)-는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외로움을 느낀 사람이 아닐까?

세째, 마리아의 고귀한 희생 정신이 우리로 하여금 그를 우러러 보게 하낟.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했다.[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워지이다](눅1:38).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칼이 그의 마음을 찌름같은 일이 있으리라](눅2:35)고 말할 때에도 마리아는 그에게 주신 하나님 아들의 아름다움과 그 거룩함에 대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2) 목자들이 그를 환영했다. 그림 : 목자들의 경배 :별을 따라 찾아온 목자들이 암굴로 된 마굿간에서 막 탄생 한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마리아와 요셉의 훌륭한 옷과 왼쪽 두 목자들의 옷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91*111cm 미국 내셔널 캘 러리 소장.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보려고 목자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주님의 환영 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이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그들의 노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편23편)와 같이 목자의 기사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뿐 아니라,예수 자신이 자기를 선한 목자라고 말했으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하나님의 목자라고 증언했다(요10:11).

주의 영광을 가장 먼저 바라본 사람들은 특수층의 사람이 아닌 평범한 베들레헴 목자들이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 영광에 가장 먼저 접했다는 것은 첫째, 자기들의 일에 충실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지키는데서 환상을 본것이며, 둘째 항상 깊이 있는 생활의 내면을 가지고 순진한 태도로 경건을 지키며, 어린 아이의 심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늘 나라의 문이 가장 쉽게 열리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덜붙임으로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를 새벽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있는 그에게 기적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눅5:8).로렌스 형제(Brother hawrence)는 어느날 시골 길을 홀로 걸어가는 도중 움을 피우는 봄을 보고 하나님을 발견했고 잔다크는 소년시절 그가 출석하는 시골 교회에서 영을 체험했고,프란시스 톰슨은 런던 거리의 소요 중에서 묵시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야곱의 사다리는 하늘과 고민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이에 놓여졌다고 말했다 (창28:12).

(3) 박사들이 환영했다.

전설에 의하면 박사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아시아인이고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예물을 가지고 아기 예수를 찾아 베들레헴까지 간 데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 복음은 모험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처럼 그들의 사랑하는 가정을 멀리 떠나[어디로 가야 할지 아직 못하는 길을 걸어 갔다](창12:4,히11:8).

둘째, 복음은 시대와 사상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박사들은 당시의 과학자요 사색가였다.

세째, 복음은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도전한다는 것이다.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시45:12). [구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시68:31). 고 노래한 바와 같이 어둠이 짙은 동양과 아프리카에 사는 각 민족이 자기들이 가진 가장 귀중한 보물들을 바쳤다. 이렇게 하여 박사들은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하는 세 가지 조건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모험을 요구하신다. 특별히 청년들에게 모험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는 사상가를 요구하신다. 이 세례를 받고 예수의 이름 아래 엎드리기를 요구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의 공헌을 요구하신다.각국 사람들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정신적 이해의 풍성을 바치기를 요구하신다.

(4) 시므온과 안나가 환영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눅2:25)고 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종교를 위하여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팔레스타인은 종교가 만연된 국가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심령에서 울어나오는 종교심보다는 외부적인 사건을 처리하는 객관적 요소에 의하여 의식으로 지키고 있었다. 서기관들은 종교를 직업화시켜서 그 속에 하나님의 성화는 무미건조한 교회주의 (교권주의)로는 사람들이었다. 단순히 타오르지 않고 세속 속으로 종교를 끌어 들이고 있었다.그들은 회의적이고 기회적이었다.

다음 세롯당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들은 종교를 민족주의에 토착시킨 사람들이다. 로마 정부에 항거하고 유대국을 회복하자는 야망에 집착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의 심령을 집착시킬 수 있는 정당은 못되었다.

이스라엘의 참된 애국자들은 겸손하고, 조용하고 경건한 사람들로서 사두개인이나 서기관들과는 단 5분의 대화도 빈번하게 생각했으며, 지혜로운 랍비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자로 보였고, 열광적이고 떠들기를 좋아하는 세롯당을 충고할 기회조차 없었던 무명의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 가령 기도라든지,하나님 앞에서 갖추어야 할 마음의 청결같은 일에 대하여서는 전술한 모든 종교가들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앞서가는 사람들이었다.시므온과 그 동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로서 이스라엘의 누룩이 되었으며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 왔을때 시므온은 예수를 품에 안고 축복해 주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 시골 여인이 안고 온 아기가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시므온만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보는 영적 식별력과 예수를 알아보는 영안이 있었다. 그가 예수를 품에 안고 환영하는 광경을 주의해 보라.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었지만 새 시대를 받아들일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낡은 시대의 풍속을 고집한다. 해도 우리는 그를 나무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 마음은 열려 있었으며 하나님의 지선이 그에게 임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새 시대의 상승인 아기 예수를 마음껏 축복해 주었다. 마치 황혼이 깃드는 석양에 피로한 노동자가 종업을 고하는 종소리를 들은듯,또는 여명을 보고 기뻐하듯이,시므온은 그 아기를 말미암아 찾아온 새 시대에 대한 기쁨을 노래한다. [주재여 이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눅 2:29). 하나님은 이렇게 육신을 입으셨다. 그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부서진 세계를 수선하는 하나님의 사업은 서장을 올렸다. [아기가 자라며 강건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 2:40)(

2. 아버지의 일

그림 : 콜롬바의 제단화(중앙부) 19세기 중엽까지 쾰른의 콜롬바성당에 있었던 그 림으로 이 부분은 동방 박사의 경배장면이며. 이 그림의 왼편에는 수태고 지. 오른편에는 성전봉헌과 그리스도의 어린시절 이야기가 시간적인 순서로 그려져 있다. 패널.유화.138*153cm.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이전,30년 동안의 생애에 대하여는 전해 내려오는 기록이 없다. 신약 외전에는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모양의 전설로 전하고 있으나 그것은 신빙성이 없고 관심 둘만한 것이 못된다. 오직 30년 간의 생활 중에 우리에게 알려진 단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12세 때 유대인의 다른 어린이들과 동등하게 [율법의 아들]이 되어 예루살렘 성전 축하에 참석한 사실이다(눅2:42이하).(스콧틀랜드의 소년들이 교히 의식에 참석하고 성찬식 때 신앙 고백을 하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0.

예수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 성전과 그 도성에 대한 인상이 어떠했겠는가 상상해 보자. 기념식이 끝난 다음 그는 성전에서 발견되었다. [왜 나를 찾으시나이까?] 고 물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곁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 2:49). 이 말은 복음서 기자가 우리에게 전해준 예수님 최초의 말씀이다. 이 말 한마디가 그의 생활 전모를 전해 주는 약도라고 하겠다. 그의 생애의 모든 기록과 십자가의 사실까지가 이때에 하신 말씀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그때에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짊어지고 가실 십자가의 무거운 짐으로 말미암아 외롭게 살아가야 할 전조를 볼 수 있다(눅 4:23,요6:667:5).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여기에 [집]과 [일]이란 두가지 번역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여기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점이다.청년기는 그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이렇게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후의 다른 기록이 없으니 그후 18년간의 생애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이 알 수 없는 장면을 복음서 기장 중 누구가 말해 주었더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실을 그 기록으로 알 수 있었겠고, 또한 그의 소년기와 나사렛에서 지낸 청년기와 동시대 사람들의 기록이 있었다면 예수의 생애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편집한 이면에는 예수의 모친 마리이가 제공한 재료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누가마저도 이 닫힌 문을 열어 주지는 못하였다. 아마도 그것이 감ㄷ추어지는 것이 더 잘된 일인 것 같다. 감추어 둔 그 사실은 신자의 경건 수행에 유익하고 그리스도의 준비 기간의 침묵은 한 거룩한 기초라 할 수 있다.

3. 소년기의 감화

그러나 그리스도의 준비 기간에 일어난 몇 가지 사건에 대하여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내면적인 문제 보다 우선 외부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자. 그의 생애와 관계된 자연,인간성, 그리고 성경, 아버지의 일터 및 그의 가정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외부의 제반 관계를 통하여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깊고 끝없는 영교의 생활을 계속한다.

(1) 자연과의 관계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셨는가에 대하여 분명히 나타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런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전기독교 역사와 세계를 다스린 많은 스승들의 아름다운 교훈들, 즉 들의 백합화(마6:28),추수의 비유(요4:35),자라는 씨앗(막 4:28).공중의 새(마8:20),양을 기르는 일(눅15:4)등을 통하여 어느 시인 보다도 그가 자연을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농촌 출신이었고 그의 생애의 기록 여러 곳에 농부의 비유가 전개되었으며, 나사렛에서 보낸 청년 시절에 자연을 사랑했던 흔적이 자연의 묘사 자연을 통하여 들을 수 있는 음성이 보여 준다. 이런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과 대조시켜 보면 흥미 있는 일이 있다. 왜냐하면 도시 출신인 바울의 글에는 사람이 많이 사는 도회지의 광경이 여기 저기 나온다. 예를 들어 건축가(고전3:10).군장 (엡6:13),헬라의 육상경기(고전9:24)등은 모두 농촌에서는 취재할 수 없는 도시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언덕과 골짜기,그리고 봄의 곡식밭,지나가는 바람의 광경을 바라볼 수 있으리 만큼 농촌의 냄새가 풍긴다. 그리고 그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보호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증거를 보여 준다.

(2) 인간성과의 관계

그의 준비 기간이 침묵 중에 흘러갔지만 여러 면으로 보아 예수는 그 기간에 인간성을 배운 사람이다. 장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는 광경(눅 18:1),농촌에서 자란 한 청년이 도시로 뛰어나가 허랑방탕하는 광경(눅15:11),한 광부가 지방 관리에게 가서 사정하는 광경(눅18:1).회당과 거리 입구에서 기도하는 외식가들의 모습(마6:5)등, 이런 모든 것은 그가 인간성을 배운 좋은 재로들이었다고 하겠다.따라서 그는 나사렛 침묵 기간에 이런 것을 배웠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인간성을 잘 배웠다는 것을 요한이 솔직하게 소개한다.[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오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게 대하여 아무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라](요2:24).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을 심리학적으로 연구만 하는 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인생의 모든 희비곡절을 통하여 인생의 모든 약점과 장점을 통하여, 또한 그들의 범죄와 그 극복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인간을 사랑하심과 같이 그들을 사랑하셨다.

(3) 성경과 예수

예수께서 읽으신 성경은 물론 구약성경이었다. 구약은 유대인 교육의 주초였으며, 기둥이었다. 유대의 다른 어린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창세기,신명기,시편,이사야,예레미야 등의 성경을 읽으며 자라났다고 하겠다. 그가 장서한 때까지 오랜동안 성경을 읽고 반복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목표를 세우고 연구했을 것이다. 광야에서 시험을 바으실 때, 성경 말씀으로 그 모든 시험에 승리 하셨다(마4:7-10). 거룩한 영이 자기에게 임하심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가르쳐 주셨다(사61:1,눅4:18).그가 만민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될 때에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어떻게 고통받으실 것을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성취하셨다(사53).그의 영혼은 자기 백성들에 대한 구약 성경의 말씀에 몰두되어 있었다.

당시 히브리어는 죽은 문자로서 일반에게 사용되지 않고 다만 母語였다.70인역에 이미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은 되었지만 예수님은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읽고 연구하셨다. 당시 상용어는 히브리어가 아니고 셈계통의 아랍어였다. 그러나 헬라어 상용의 시대로 바뀌어 팔레스틴의 주민들은 두 가지 말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도 헬라어를 사용하실 수 있었지만 아랍어를 사용하셨다. 복음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었지만 그중에는 예수께서 아랍어를 널리 사용하신 흔적이 있다. 모두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으로서,[달리다굼](막5:41),[예바다](막 7:3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등이 그 예다.그러나 구약 성경 인용에 보면 예수님은 히브리어를 더 잘 알고 있었다.

(4) 직업 관계

예수님은 나사렛의 목수였다(막 6:3).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지상에서 보내신 생활의 대부분을 목공예로 소비했다는데 깊은 의미가 있다.[직장 기계를 제작하는 장소인 동시에 사람을 연단시키는 곳이다.]라고 헨리.드로몬드가 말한다.예수님이 하신 목공업은 그리스도의 영혼을 다듬기에 좋은 처소였다고 하겠다. 이 나사렛 사람이 그 익숙한 기술을 발휘하여 멍애와 농구와 가구들을 만들어 봉사한 것은 곧 ㅏ나님을 위한 봉사가 되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모친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 아버지의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고로 노동의 신성이 예수님의 생활에서부터 인정되었다. 직업 귀천의 차별이 그리스도에게는 없었다. 수공업이든,중노동이든, 기술직이든, 어떤 일이라고 하나님을 모시고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거룩한 일이다.

죄인이 받을 비난도
수욕의 십자가도
사랑으로 대신 짊어지셨네
나사렛 목수가 걸어가신 길
등에 지신 무거운 그 짐
모두가 다 같이 하는 일이지만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바쳤네.

나사렛 목수예수의 집 문밖에는 [내 멍에는 쉽다](마11:30)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그런 간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만드신 멍에는 나사렛 사람들이 쓰기에 가볍고 쉽고 또 꼭맞는 것이었을 것이다. 소에게 메울 멍에를 만드신 그 예수님이 또한 하늘나라 일군들을 위한 멍에를 만드셨다.

(5) 가정관계

예수님은 대가족을 가진 가정에서 자라났음을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다(마13:55,막6:3). 그 아버지 요셉의 이름은 별로 그의 전기 중에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그는 일찌기 세상을 떠났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는 맏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정의 책임과 의무를 담당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가정에서 된 일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잃어버린 동전 한푼을 찾기 위하여 온 집안을 쓸고 찾았다는 이야기 (눅15:8),가루와 누룩 이야기(마13:33), 밤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이웃집 사람을 깨워서 떡을 빌려온 이야기(눅11:5),등경 위에 둔 등불 이야기(마5:15),어린애들이 무엇을 먹고 싶어서 간청하는 이야기(마7:9)는 모두 마리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구차했던 생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일 수 있다. 예수의 가정 생활에서 윤택함을 보여 주는 귀절은 없다. 후일 무리들이 예수를 조롱할 때에 [이 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마13:55)고 한 사실로 보아 그의 가정이 당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가난한 곳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자란 곳이며 화평한 가정이었고 하나님도 이 가정에 함께 했었다. 기록되지 아니한 침묵의 기간에 이 가정에 그는 충성을 다했으며 자기의 가정을 그는 신성하게 이끌어갔다. 이 다섯 가지 관계가 그의 지상 사업을 시작하기 전의 준비 요소들이다. 30년의 생활기록이 우리 앞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혼돈한 세계를 다시 일으키고 잃어버린 인간성을 구원하는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자세하게 보여 주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이 갑자기 그에게 임하여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이 땅위에 보내어 일하게 하셨다.

매일 성경

 눅 1:26-35    주의 사자
 눅 1:46-56    마리아의 노래
 눅 2:8-19     베들레헴의 들
 마2:1-12      동방박사들
 눅 2:25-40    노년이 청년을 환영함
 눅 2:41-52    성부의 사업
 눅11:5-8      소년시절 가정에 대한 기억
 눅15:8-10           "
 

토론을 위한 문제

1.나사렛에서 예수의 "고요한 시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2.그 복음서는 예수의 구약성서 묵상에 대해 어떤 증거를 제공하며 오늘의 구약성세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하여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3.성육신이 어떤 의미에서 유년과 부녀와 가정 생활을 구했는가?

4.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매지 아니하였으나 역사는 이점에서 반복되고 있는가?



제 4 장. 소명

1. 광야의 소리

젊은 한 영혼이 자기 생애의 사업을 결정 짓기 위하여는 여러 모양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어떤 사업 운영을 위해서나 교육사업, 특히 전도사업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그날은 그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날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에 기념할만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즉 예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대 사업을 성취하시려고 부름을 받으신 사실을 생각하고자 한다. 복음서의 네 기자가 공통적으로 밝히는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의 전도 사업은 세례 요한의 선교 운동과 관계가 있으며 예수의 출현과 함께 요한의 활동은 끝나고 요한의 활동이 끝나면서 예수의 전도사업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전도사업을 연구하는 중에 광야에서 외쳤던 요한의 인물됨을 생각하고 그가 지니고 있는 신비와 능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만일 위리가 그 당시 요단강가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의 전도 활동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의 신비와 그의 능력이 어떤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말해줄 것이다. 즉,그는 인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위대한 사명을 가진 인간이었다라고,그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항상 발랄한 생기와 도덕력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생활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그는 사람이 없는 거치른 빈들에 나가서 당시 종교가들이 자랑 삼아 입는 자주빛 부드럽고 화려한 예복을 거절하고 가장 소박하고 단순한 복장으로 몸을 가렸고, 인간의 생활이 그 물질의 풍부한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메뚜기와 석청이를 먹고 살았다는 사실은(눅 12:15)의식주가 인생의 근본문제가 아니며 한 부대적인 것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생활태도는 세계로 하여금 생의 바른 태도를 깨닫게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출세하여 입신양명하는 것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인생을 바르게 설명한 최후 진술은 예수님의 말씀[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마11:7)가 잘 묘사해 준다. 사람들에게 인망을 얻고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요한에게 있어서는 허무한 것이었다. 그의 영혼은 원만주의나 편리주의를 싫어했다. 옳은 일을 위해서는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그 진실을 위하여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푸르타크 영웅전에 나오는 페리클레스가 다른 사람에게 찔림을 주지 않는 말은 해본 적이 없다고 한 것처럼 세례요한의 말이 그러했다.

당시 지도층에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로 하여금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한말이나 헤롯의 잘못을 직언으로 충고한 사실로 보아서 강직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헤롯이 처음에는 그를 두둔했고 칭찬하고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왕이었기 때문에 빈들에 사는 가난한 예언자쯤은 마음대로 심문하고 처리할 수 있었다.따라서 요한은 그 왕에게 직언을 하지 않고라도 부드러운 말로 얼마든지 어두운 눈을 뜨게 할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다. 그는 헤롯이라는 유대 왕 보다 만왕의 왕이신 다른 임금이 계심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만일 이 만왕의 왕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습니다](마14:4)라고 단도직입적인 충고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F.W.H.마이어는 세례요한의 바른 인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세례 요한, 그는 오늘날까지도
 모든 여인의 아들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사람이어라
 창조주 하나님이
 쇠로 만든 한 봉우리처럼
 언제나 지지 않고 우뚝 솟아
 붉게 빛난다.

그림 : 빈들의 세례요한 :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양(그리스도)을 가리키고 있어 보는 자의 방향을 그 쪽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그 곁에서 자라나고 있는 열대 성의 환상적인 식물은 성인에게는 적으로 악마가 오는 귀문인 육욕의 세계를 상징하는 듯하다. 패널.유화. 48.5*40cm.

그는 단순히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 사실이 많은 무리로하여금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로 몰리게 했고, 그곳에 와서 비로소 가장 완전하고 참된 종교, 즉 그 내용으로나 표현에 있어서 바른 종교가 어떤 것임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칼라일이 말한대로 [종교를 가르침에 있어서 맨처음과 맨나중에 가장 필요한 것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참종교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의 전생애와 그 태도는 하나님을 호흡하고있었다. 세례 요한의 종교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지금까지 저들은 서기관들에게서 종교를 배워왔지만 그것은 학문적인 번거로움과 복잡한 궤변, 내용이 빈약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들만 논의하여왔다. 세례 요한은 새로운 음성으로 700년전의 아모스 선지자처럼 [사자가 부르짖을 때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 냐 (암3;8)고 한것처럼 모든 사람의 심장부를 꿰뚫는 진실한 부르짖음이었다. 아모스처럼 그도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외쳤고,이것이 그로하여금 군중을 끌어들이는 힘이었으며 이렇게 불가항력적으로 놀라운 힘을 가진 그의 종교는 참 종교이며 그야말로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하나의 사명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을 위한 불타는 사명감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개인을 잃어버렸고 자신이 전하는 진리 속에 자신이 삼키워져 버렸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상부 기관의 명령으로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조사하러 나가서 누구게 하라]는 대답으로서 자신을 한번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소리 소리라고 말했다.그의 사명은 무엇인가?부드럽고 온정이 어린 것이 아니었다.[회개하라 장차 올 진노에서 피하라] 하는 한마디 속에는 무서운 긴박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열정적인 애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한이 부르짖고 외치는 말 한마디 그것은 다만 세계를 향하여 [회개하라 ]외치는 사명이었다.

2. 부흥운동

이제 우리는 이 설교자로부터 모여든 군중에기로 시선을 돌려보자.그는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들을 따라오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리들이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군인,세리,가난한 사람,슬픈 죄인 기관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여든 무리들이 어떤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유대땅에 새로운 종교를 일으키게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무리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온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호기심에 몰려나온 무리들도 물론 있었다. 예루살렘 시내에는 [당신은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말을 들은 사람이구려]라는 말이 당시 유행어가 되어버렸고, 또 아덴서에서 들은 어떤 유명한 말 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세례요한에게서 들을 수 있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처음으로 종교를 찾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호기심이 움직이지 않는 바도 아니다. 부흥운동에는 단순히 분명한 영적 이유보다는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있음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삭개오는 같은 사람은 단순히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 보고싶은 호기심에서 나온 사람이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이 되었다.

또 정치적인 이유로 나온 사람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선교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요한이 출현하기까지 약 2백여년간 예언자가 없는 침묵시대가 계속되다가 세례요한이 비로소 광야에서 외침으로서 긴 선교의 침묵을 깨뜨리었다. 이 사건은 새로운 민족운동이 발돋음하여[로마에 항거하여 우리는 일어나야 한다]는 슬로건 압박자에게 짓밟힌 이스라엘이 자유를 찾으려고 움직이던 민족운동자들이 공개된 요단강변의 부흥회에 모여 들고 있었다.

그러나 호기심이나 민족주의 동기로 보다 더 나은 동기에서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곧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려고 나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바로 세례요한이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정열적인 설교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자신들의 비밀을 고하고 싶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그 한사람 한사람을 일일히 접대하여 같이 이야기하는 중에 그들의 잠재해 있는 죄를 처리해주고, 자유와 평안과 깨끗함을 얻게 하려고 그들을 강으로 데리고 나가서 새생활의 표적으로 세례를 베풀었다.이렇게 새로운 생활의 기쁨을 맛본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 기쁨을 전하였다. 이것이 요한이 광야에서 베푼 부흥회의 결과였다.

3. 예수와 요한

이 부흥의 소식이 갈릴리 지방으로 전하여졌다. 나사렛 골목에도 알려졌다. 예수께서 일하고 게시는 그 목공소에도 이 소식은 들려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이미 이른 것과 그가 그때까지 기다리던 시간이 된 것을 아셨다. 드디어 목수의 기구를 버리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요한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어떠했으며, 요한의 부흥에 대하여 예수께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여기에 대하여 가능할 수 있는 세가지 태도를 열거해 보자.

(1) 이를 경원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건대 이는 고백과 회개의 세례이므로 예수처럼 아무 고백할 것이나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축복이므로 매우 타당하지만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2) 또한 세례요한이 하는 일을 비판하고 여기에 도전할 수도 있다. 세례요한이 외치는 복음은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너무 부족하기에 예수님께서 묵인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세례요한에게는 두가지 결점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요한의 종교가 지나치게 [무엇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종교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후에 언급하신 바대로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은 장터에 앉아서 피리를 불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무리였다. 사실 요한은 광야의 사람이요 금욕의 사람이며 자기 자신을 학대하던 사람이었고, 인생의 향락과 행복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칭찬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당신의 기도를 더욱 생각하겠습니다]라고 자기 아버지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한 스콧틀란드의 문인 루이스 스티븐슨씨의 한 구절은 요한의 경우를 생각하게 하며, 요한의 종교는[너는 그것을 말라]의 종교였다.

또 다른 방향으로 비평하자면 요한의 종교는 공포 위에 서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그는 외쳤는데 이러한 공포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적당한 무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설교했다고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애와 아버지의 성격을 설교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요한을 나쁘게 평할 수도 있었겠고 또 그를 반대할 수도 있었겠다.

앤드류,보나와 로버트.뮈레이.맥캔 두 사람은 어느날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지난 주일 설교 제목이 무엇이었던가?] 고 맥캔이 물었다.[악한 자는 지옥에 간다]라고 보나가 대답했다. 맥킨은 다시 [그 무시무시한 설교제목으로 부드러운 설교를 할 수 있던가?] 고 물었다.

세례요한의 경우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설교할 때에는 온유한 심정보다는 일층 격분과 비난의 심정이 가득 차 있었을 것이며, 예수님은 같은 목적의 설교를 유순하고 사랑에 담긴 미소로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로 요한의태도가 자기으 ㅣ태도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 거부해 버릴 수도 있었겠다.

(3)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음을 우리는 다음에서 알 수 있다. 그는 결코 요한을 반대하거나 경원하거나 비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겸손을 그 마음에 가지시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셨다. 너무나 감격에 넘친 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하고 어쩔줄 몰라했다.

어느날 해질 무렵, 요한을 찾아온 무리가 각기 집으로 돌아간 뒤, 피곤한 몸을 쉬지 않고그대로 기도의 시간으로 바치고 있을 때, 외로운 그의 눈앞에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이 갑자기 나타나고, 그 얼굴에서 비치는 빛은 그의 전신을 뜨겁게 충격시켜 그 영광스럽게 찬란한 얼굴 앞에서 감히 머리를 들 수 없음을 느끼게 했다.그러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겸손하게도[내가 그대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겠]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어찌 이 일을 내가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주저했지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하셨다. 요한은 이 고상한 겸손에 감동되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 한 인간이 그의 주님께 세례를 베푸는 이 영광스러운 광경은 하늘의 천사들도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하신 하늘의 음성은 바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천사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일 것이다.

4. 예수 세례의 내적 의미

죄인이 받아야 할 세례를 죄 없으신 예수께서 받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신비로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흑자들은 이 광경에 대하여 지상에 있는 그의 형제들이 지은 죄에 대한 뉘우침은 예수님도 의식했기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없으리라 만큼 결백하신 분이기에 이들이 말하는 회개와 세례들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당시 세례요한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요한의 활동에 대하여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는 것같은 생각을 가지셨다.

그때까지 유대의 종교계는 침체상태에서 싸늘하리만큼 식어버린 무관심과 태만의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요한을 중심으로 신앙활동의 새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유대민중은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또한 여기에 신경을 쏟을수록 자신들의 죄 문제를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마치 시냇물을 사모하는 목마른 사슴처럼 모든 심령은 영적 은혜에 대한 기갈을 해소해 보고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국민적인 종교의 관심은 예수님 자신이 일으키려는 천국 고통에 큰 희망을 던져준 것이 사실이다. 비록 세례요한의전도 운동이 어느 면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운동이 예수님의 새로운 천국 복음운동을 위하여는 절대로 필요한 준비였다.

요한은 진실로 선구자였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자신의 사업 일부분을 요한이 먼저 했다고 인정하는 일종의 선구자에게 대한 빚을 갚는다는 심정과 그리고 요한의 활동은 하나님의 성령운동을 실제 전국적으로 일으켰다는 인정으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대답이 충분하지는 않다. 예수님은 자기의 목적인 죄인과 멀리 떨어져 게신 분이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죄인의 곁에 서있는 분임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시려고 요단강까지 세례 받으러 나가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이 받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에수님의 사랑,즉 그 위대한 구속의 행동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다음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사랑의 사실을 미리 예언자적으로 보여주셨다고 하겠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인망을 등한시 하시고 가난한 사람,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버림 받은 사람들과 한자리 하시기를 즐겨하시고, 두 강도의 사이에서 죽는 천한 죽음을 택하시고 그 일생의 모습이 언제나 죄인과 같이 행동하셨으며 또한 세례 받으시는 이 장면도 그러했다. 옛날 이사야가[범죄자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나니라](사53:12)한 예언은 예수의 지금 형편을 가장 바로 본 것이다. 그는 항상 모든 죄인의 대표자처럼 생활하셨다. 요단강에서도 그느 ㄴ죄인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죄인의 수치를 자기의 수치로 삼으시고 그들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생각하시고 그들의 차모히를 자기의 참회로, 그리고 그들의 죄짐을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 할 것으로 생각하셨다.

그 영원한 짐을 짊어지시고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리신 최초의 짐이 바로 이 세례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예수의 세례는 영원한 구속의 능력을 가진 사랑으로서 언제라도 차별대우가 없으며, 자기와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범하였을 때, 모세도 자기 자신의 결백만 주장하지 않고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도말하옵소서](출 32:32)라고 부르짖었다.

바울 역시 자기 민족의 죄를 탄식하며 [내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9:3)라고 부르짖었고,죠지,폭스는 [모든 사람이 받는 세례를 내가 받아 그들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그들의 슬픔을 내가 느껴야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일생을 나환자를 위하여 봉사하다가 그도 마침내 문둥이가 되어 생애를 마친 성 다미엔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설교할 때마다 나는 당신들처럼 "나의 형제들이여"하지 않고 나는 언제나 "우리 문둥이들은"하고 부릅니다]라고 형제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를 동정하고 또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나는 모든 선교사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환상과 소리, 이 두가지 신비의 사실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고, 비둘기와 환상이 나타나 성령이 임하심을 보여주었다. 이 환상과 소리는 그의 나사렛 [ 침묵의 생할]에 이제 종지부를 찍고 그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알림이며, 성령이 임하심을 그가 받아 거룩한 소명에 응하여 복음사업을 실현시킬 것을 의미함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내 기뻐하는 자라,] 이 하늘의 소리로 부터 메시야의 지상 사업은 시작되었다. 그 환상은 메시야 직책 받으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홍수처럼 넘치는 능력이 그 영혼의 언덕에 넘쳐 흘렀고,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그 무한의 능력이(창1;1)그에게 임하여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주의 영](시139:7) 옛날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 여호와의 신이 나에게 임하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61:1)는 말씀을 그에게서 응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물에서 올라와서 아버지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오신 증거를 친히 보여주셨다.

매일 성경

 사무엘상  3:1-10   하나님이 부르심
 누가복음 1:59-80   전구의 탄생
 요한복음 1:15-28   광야의 한 음성
 마태복음 3:1-12    부흥의 시작
 요한복음 1:29-37   보라,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탭고음 3;13-17   예수께서 세례 받으심
 마가복음 6:14-29   세례요한의 죽음
 

토론을 위한 문제

1.요한의 세례는 오늘의 기독교 세례와 어떤 점에서 달랐는가? 2.무죄하신 예수께서 어째서 죄 사하는 세례를 받으셨는가? 3.두려움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동기로써 적합한가? 4.오늘 하나님의 소명(부르심)의 참 표적은 어떤 것인가?



제 5 장. 광 야

1. 이야기의 배경

예수의 광야 40년 시험에 대하여 알아두어야 할 몇가지 예비지식이 있다. 이 시험에 대한 기사가 어떻게 4권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는가?예수님은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이 40주야를 예수님은 혼자 계셨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가 복음서에 기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는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다만 한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입으로 부터 친히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림 : 유대광야 :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 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 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 가 되게하라"(마4:13). 이것은 새벽에 촬영한 것으로 명암이 드러나 황량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막이나 산에서 위대한 지도자 들이 많이 나왔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사실을 이야기한 목적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 사실은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도록 베일에 가리워진 사실이었다. 예수님은 그 지나간 이야기를 왜 모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까? 물론 누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또한 예수님의 전기를 호화롭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한토막의 창작도 아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어떤 호의적인 사건을 제공하는 장으로 나타난 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마 4:1-11 시험받으시는 예수님

첫째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 줌으로 제자들도 그와 같은 시험을 받을 경우에 그를 본받아 그린 시험을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도 어떤 사람이 자기가 겪은 어려운 시험을 극복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 주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에게 매우 유익한 교훈이 될 수 있다. 고로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경험담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심으로 그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컸을 것이다.

둘째로는 그의 40주야 격렬했던 투쟁이 그의 영혼에 기록된 영원한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예수님으로서는 덮어둘수 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 일을 회상할 때마다 그것은 어제 있었던 일처럼 분명하게 기억될 것이다. 거치른 들판 황량한 땅에서 홀로 외롭게 바위와 돌 틈에서 괴로움을 견디는 그 몸에 낮에는 오직 작렬하는 태앙이 그 온몸을 따갑게 하고 어둠이 깃들면서 부터 차가운 공기가 쇠약한 그 몸에 생기를 더욱 잃게하고 주린 짐승들의 울부짖음이 더욱 공포와 불안과 괴로움을 더하여 주었고극도에 달한 기아 현상을 이용하여 사탄은 극히 동정적이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예수의 영혼에 유혹의 화살을 연달아 던지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를 이곳으로 인도한 천사들의 응원으로 이 시험을 이길 수 있었음은 참으로 잊어 버릴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따라서 그는 이 대사건을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이 시험에는 어떤 뜻이 포함되어 있는 가를 살펴보자.

이 시험의 사실은 한치라도 과소 평가할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사실을 강력하게 부각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험에 대하여는 하나의 문학적인 창작 기사이지 결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바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수란 인물을 높이 평가하게 하기 위하여서도 이렇게 논리를 비약 시키고 있다.[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그는 언제나 아무런 고투 없이 바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내면적인 정신적 고통 같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아무런 노력 없이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 어떤 시험이든지 마음대로 훌륭하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면도 된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떤 어려운 일을 땀과 피로써 싸워 이겼다고 하면 그것이 더욱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일 것이다. 전복음과 우리의 구원의 희망은 [모든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어떤 특수한 환경에서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시험을 우리들처럼 받으셨다(히4:15).

이 극적인 사건이 상징적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이 사건이 전혀 예수님의 내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어린이들을 위하여 그린 그림처럼). 예수님 뒤에 시꺼먼 날개를 가진 거대한 마귀의 모양이 사실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우뚝한 어느 바위 위에 머리를 숙이고 맞잡은 두손은 긴장해 있고,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여[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며 고통스러워 하시는 겟세마네 동산의 외로운 고투의 모습을 이 시험 장면에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의 장면을 무의미하게 바라 볼 수만은 없다.[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히2:18)한 말씀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당하신 고통을 생각하면서 기록한 말이다.

이제 이 시험을 받으신 시간의 문제다. 이 시험은 언제 있었는가? 그때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직후였다. 이 점이 이 사건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이 그로 하여금 광야로 나가서 시험을 받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요단강 하류의 어느 장소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심중에 부딪쳤기 때문에 그는 즉시 메시야의 능력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이 황홀한 발견을 그 몸에, 그 마음에 지닌 채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리하여 그의 앞에 전개된 이 새로운 사실은 그에게 시험하는 자를 나타나게 했다.메시야의 이 권능,새롭고도 굉장히 큰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여기에 나타난 것이 사탄의 세가지 시험이다.

2. 첫째 시험과 (영육의 대결)

빈들에서 지낸 40주야의 금식과 고독의 생활, 기도와 명상으로 정력을 소모시킨 긴 기간이 지나간 어느날,그에게도 가장 절박한 한 욕망이 그를 괴롭혔다. 시장하다는 그것이다. 이 주림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자문에의 대답으로 빠른 속도로 마귀가 그에게 제공하는 것은 [이 돌들로 떡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하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세 곳의 진지로부터 집중되는 포격이다. 첫째, 그가 처음으로 가진 메시야의 능력이라는 것이 진지가 되어 공격 당하게 되었다. 메시야의 능력이야 말로 돌로써 떡을 만드는 그까짓 일쯤은 넉넉히 할 수 있지 않은가?그러니까 한번 시험해보라, 분명히 이 능력의 비상함을 사실로 증거하기 위하여 그 능력은 상상이나 꿈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하나님의 아들! 너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자 시험에 보아라 그 능력의 효과를 나타내 보일 가장 좋은 기회가 아닌가? 자 여기 돌들이 많이 있지 않느냐" 명령해라, 그것들이 떡이 되도록] 사탄은 이렇게 유혹했다.

둘째로 그가 해야할 사업이 색다른 진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 앞으로 그가 해야 할 큰 사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는데.. 이 빈들에서 주려 죽어서야 되겠는가?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해야할 일,인류의 구원사업과 하나님의 나라를 그 위대한 사명을 위하여 우선 육체적인 수난을 피해야 할 것이 아닌가? [돌로 떡을 만들어 그 수난을 피하라]고 유혹했다.

세째로 예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입장에서 공격을 당하였다. 이 주림의 사실은 빈들에서 금식하고 있는 예수에게만 닥쳐온 사실이 아니다. 로마의 치하에 압박을 당하고 있는 약하고 가난한 유대백성 전체가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형편이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로 떡을 만들어 우리에게 나누어 주면 좋지 않겠는가? 이 기적의 요구는 예수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가 전도사업을 하는 동안 유대땅 방방곡곡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의 지상 운동은 육체를 먹이는 일까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그 육체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 예수를 떠나서는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는 줄 알기 때문에 배신자가 없을 것이 아닌가? 이렇듯 친밀한 관계로 우리들의 인망을 얻은 후에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효과가 적중하지 않겠는가?

먼저 이 땅위에 천국을 건설하고 그리고 나서 하늘의 낙원을 건설하는 것이 정당한 순거가 아닌가?[사람을 사랑하는 증거를 돌로서 떡을 만들어 먹이므로 구체적으로 보여 주라]고 사탄은 말하고 있다.

사탄은 매우 교묘한 존재였다. 그럴듯한 말로 예수를 꼬였다. 얼핏 생각하면 사탄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유혹에 속지않고 [노우]라고 거절 하셨다. 그 거절의 이유로서 우리는 다음의 두가지를 들 수 있다.

그가 만일 사탄의 권고를 수락했다고 한다면 그가 만일 육체의 요구대로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피곤한 육체가 새힘을 얻어 광야를 떠나서 활발한 기상으로 거리에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고통과 결핍의 재난으로 신음하는 우리들과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런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시고 우리의 괴로움을 함께 느끼시는 주님의 모습이 지금 보이네 그의 눈물과 안타까이 부르짖는 음성이 지금도 공중에서 들려오누나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원한 우리의 형제가 되시고 동지가 되시려고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사탄을 물리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셨고, 다른 사람의 비위나 맞추기 위해서 아첨하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물질적인 요구와 필요성, 그리고 사회적인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은 아니시다. 그는 인류사에 기록된 어떤 개혁자나 정치가 자선가 보다도 사람들의 육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신 분이시다. 육체의 조건을 몸소 느끼는 제자들 보다 오히려 더 적극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인간의 빵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신 분은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생활하기에 편리한 주택, 아름다운 환경,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화한 사회의 질서까지 해결된 사실을 본다. 이상적인 사회와 개인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부터만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문제시하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비록 이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상 천국을 몸소 이루시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 자신이 돌로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에 대하여는 단순히, 거절하셨다. 그 이유는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나오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그 육체가 느끼는 주림과 목마름 이상으로 더 깊고 더 강한 심령의 주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영혼의 주림을 채우는 길은 빵이나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자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서 우리 영혼의 주림을 채울 수 있다.

3. 둘째 시험(인망의 유혹)

둘째번 시험 역시 매우 의미심장하다.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쳤다 하여 사탄이 영원히 물러가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우리와 동일한 인간성이 뚜렷이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탄은 그의 일생에 한번만 찾아오지 않았다. 여러차례 찾아와서 현세적인 찬란하고 황홀한 광경으로 그를 매혹 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필이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다니 웬말입니까? 선생님 하는 제자 한 사람은 이렇게 간곡히 애원했다.(마16:22) 여기에서도 현세적인 아름다움과 안일로 그를 시험하였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큰소리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외치셨다.

이 시험이야 말로 모든 긴장들이 무력하게 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와같은 시험은 다시 갈보리 산상에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참을 수 없는 인간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을 때[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27:40)는 조롱이었다.

시험에 져서 물러간 사탄은 그 한번에 물러가지 않는다. 기회만 있으면 꼭같은 시험을 계속 반복한다. 그래서 누가복음 기자는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라가니라] (눅4:13)고 기록했다. 이렇듯 반복되는 시험은 사탄의 가장 유능한 무기이므로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이런 경우를 경험하고 있다.

이 둘째의 시험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주야로 그의 지상생활의 사명과 그것을 이룩할 방법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비지식으로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를 보내심을 안다. 그러나 이 맡겨주신 사명을 어떻게 잘 감당할 수 있을까?그는 자신의 설교에 대한 반응을 더듬어 보았을 것이다.

무리에게 과연 납득이 잘되겠는가? 그 말씀의 반응이 효과적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그에게는 책임감이 무거웠을 것이다. 어느 길이 보다 효과적일까? 그가 상상의 날개를 이리 저리 펴고있을때 선뜩 나타난 존재가 사탄이다. 그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예수에게 보다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호언장담하였다. 하필이면 단조롭고 심심하고 무미건조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겠는가? 보다 극적인 장면,휘황찬란하고 매력적인 장면이 있지 않겠는가? 누가 보고 들어도 모두 감탄할만한 특별한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계속적으로 속삭이면서 사탄이 그에게 제시해준 드라마틱한 방법 그것은 매우 높은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에서 뛰어 내려도 머리털 한오라기 상하지 않는 기상천외의 모험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도[노우]하고 거절하셨다. 왜냐? 그것은 마태복음에 기록된대로[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말라](마4:7)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전에서 뛰어내려 그 사실로 인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을 선회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과 강한 몸에 도전의 화살을 날리는 행위이다. 그런 행위를 예수님은 하실 수 없었던 그것이 곧 죄이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사탄의 말대로 효과적인 인망을 얻을 수 있었을까?지극히 적은 한 영혼을 구원의 자리로 인도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 일이 뛰어 내린 직후에는 굉장한 박수 갈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박수갈채가 그들의 영혼과 예수를 영원토록 맺어 주는 줄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사건에 대하여 갈채를 보내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상상할 수 있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중심인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도록 충격을 주는데 있다. 고로 뛰어 내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사람의 저급한 감정 민족이나 감상적인 인상을 주기를 즐겨 하시는 이는 결코 아닐. 갑자기 공중에서 큰소리로 그의 말씀을 전하고, 하늘의 발들을 갑자기 정지시키기도 하고 하늘에서 큰 불이 쏟아지게 하고 자연의 모습을 돌변시키는 따위의 신기한 행동을 하여 사람들의 인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조차 그런 방식으로 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종교에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와 같은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헤롯의 정신이었다(눅 23:8).

끝으로 한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는 결코 인간의지의 자유를 거스리려 하시지 않았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유의지를 현장에서 꺾어버리는 행위이다. 정상적인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 신앙고백은 이런 표적을 시도하여 강제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만일 그가 자기의 진실한 사랑과 선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었다면 사탄의 요구대로 요술을 부리고 기술이나 연기로써 구원사업을 성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 사업은 어디까지나 진실한 일이다. 이 일을 완성시키는 방법도 진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자기 의지로 결정지어서 예수님에게로 온다는 일만이 진실한 일이다. 그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리로 들어가리라](계3:20).

4. 세째 시험(타협의 길)

이 시험 역시 예수님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한면을 차지한다. 예수님의 일생의 목적은 이 넓은 하나님께로,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연결시키는 일이다. 이 대사업을 성취하는 교묘한 방법론을 사탄은 다시 제공한다. 즉 가장 쉬운 길,가장 확실성이 있는 길, 신앙의 힘을 항상 감소시켜 세상의 세력을 얻는 좋은 길이 있다고 소근거렸다.[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그렇게 하면 너의 꿈이 모두 이루어진다]고.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에도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다. 소근 거리는 그 타협을 거절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타협이라는 것은 종교의 주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는 일찍부터 주예수의 생애를 본받아 세워졌다.동방에서 일어난 종교가 대 로마에 들어오게 되자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이 예수의 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당하였다. 오시리스키벨, 또는 다른 우상의 종교들이 로마에 들어올때 그들은 모두 환영했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예수교라는 이름 없는 종교가 제국의 거리에 들어오자 마자 로마는 이 예수와 맞서 싸우려고 임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오시리스나 다른 종교는 로마인의 정신과 생활 풍습과 잘 타협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가 못박혀 죽은 일개 나사렛 청년 죄수의 이름으로 들어와서는 대 로마제국의 영광과 즐거움을 외면하고 독선의 길을 걷고 있었다. 빈들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부터 예수의 종교는 [전체냐?아니냐?] 의 양단의 태도가 있을 뿐 타협이라는 것을 몰랐다.

예수님의 이러한 결단이 있던 때부터 그의 갈보리 고난의 길은 피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비타협이 가는 길에는 언제나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그리스천들을 불태워 죽이고 동굴 속에 끌어다 감금시켜 놓고 원형극장에 끌어 내어 굶주린 사자들과 싸우게하는 잔인한 형을 내렸는가 하면 어떻게든 크리스천들이 스스로 그리스도를 비난하게 하기 위하여 되는대로 감옥에 감금시켰다. 그래도 기독교 신자들이 굴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과 더불어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그 영광의 길을 피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모습을 본받아 전 크리스천들은 로마 정부에 비타협적 태도로 맞섰던 것이다. 이 역사가 교회로 하여금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무덤 문을 깨트리고 사망에서 승리하여 승리의 길을 걷게 한 이유였다. 사탄의 시험에 타협을 거절하신 예수님의 길은 참으로 어려운 길이었다. 그것은 지루한 길이요,희생이 요구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만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이었기에 그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5. 실제적 결론 두개

이 시험은 우리에게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로, 시험을 당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사람들은 시험을 받을 때에 베드로나 요한처럼 쉽게 낙망해 버린다. 처음 예수님을 따를 때는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으나 한번 저들에게 고난이 부딪칠 때 저들 자신이 사도의 직을 가졌다는 사실조차 망각해 버리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것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시험 받으신 이야기를 들려 주신 다음부터는 그 염려의 가시는 그들 마음에서 뽑혀져 버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고 숭고한 영혼을 소유하신 예수님, 또 그의 눈앞에 닥쳐올 견딜 수 없는 시험을 겪으시는 그 노고를 짊어지신 예수님은 단한번이지만 그러나 그 시험을 이기심으로 어떤 시험에서도 승리하실 것을 믿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오느날 우리가 여러모르 시험을 받고있지만 시험을 받는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둘째로, 자기가 받으신 시험이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가를 히브리 기자가 알려준다.[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나니(히2:18). 베드로와 요한, 그 밖의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날마다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입증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저들은 세상에 대한 애정을 끊어버리고 세속적인 사라가을 지양시켜 놓고 흠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꾸어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그들도 걸어갔다. 섬광처럼 빛나는 그리스도의 폭발적인 인격에 접하여 교제하므로 그들은 세상의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승리만을 제공해 주는 그리스도의 위로는 저들의 약한 생활에 적용되어 제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기를 얻게하였다. 이 힘은 저들의 차디 찬 비인격적,비영감적인 도덕법규에 의거하지 아니하고 다만 찬란하고 화려하고 칭찬할만한 영혼의 사랑을 끝없이 계속하므로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영광의 희망이요 오직 그리스도만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었다. 이것이 어제나 오늘,그리고 영원토록 자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며, 그 심장이었다.

매일 성경

 야고보서  1:1-12   시험을 참는 자의 복
 마태복음  4:1-11   광야의 세가지 시험
 고린도 전서 10:11-21 타협의 길은 없다.
 마태복음 16:21-24  이후의 시험 26:36-41      
 베드로전서 2:19-25  무죄하신 예수
 히브리서 4:11-16    그의 형제들처럼 시험받으심
 히브리서 2:10-18    시험 받는 자들을 구하실 수 있음
 

토론을 위한 문제

1.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그가 받은 시험이 진짜 시험일 수 있을까?

2. 광야의 시험은 어떤 의미에서 잘못된 메시야관을 드러내는가?

3. 교회는 오늘날 어떤 방법으로 이런 시험에 대처해야 하는가?

4. 마귀의 존재를 믿는가?



제 6 장. 천국복음

1. 기독교의 슬로우건

역사상에 새로 등장하는 모든 사상은 하나의 뜻깊은 슬로우건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의 표어는 [하나님의 하나님,모하멧은 그의 선지자이다] 불란서 혁명의 표어는 [자유,평등,우애]이며, 민주주의 표어는 [국민의 정부,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이고 학생자원선교연합회의 표어는 [이 시대를 복음화하자]이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모든 새로운 사상은 마치 대오를 집합시킨 신병에게 군기를 표지로 삼는 것처럼 제각기 적절한 표어가 있다. 인류 역사에 전에 없었던 전연 새로운 사상은 기독교의 등장에서 비롯된다. 기독교의 사상을 가장 간단하게, 그리고 힘있게,또 장엄하게 존귀하게 나타내는 표어는 [천국 완성]이란 말이다.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독특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극광이 비치는 그린랜드의 태양처럼 밤이나 낮이나 밝게 빛나는 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석가모니는[극기의 생] 나폴레옹은 [유럽통치],루터는 [개인의 자유]등, 이렇게 모든 위대한 지도자에게는 자신에게서 끊으려해도 끊을 수 없는 주도적인 사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태어난 최고의 위인이며 위대한 지도자다. 이 위대한 지도자에게 자기 사상이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전세계를 일거에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세력의 감화력이다. 곧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복음서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100회 이상 언급되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최초의 설교 제목이 바로 이 [천국]이었다. [때가 차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그의 마지막 설교도 사도행전 1장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선교의 시종이 이렇게 하늘나라에 집중되어 있을진대 그의 선교 전체가 이 말과 관계된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이유를 상기하자.[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라]한 말이 얼마나 많은가? 제자들을 지방으로 파송할 때 부탁하신 말씀을 읽어보라.[어느 동리에 들어가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이르렀다 하라](눅10:8)고 기록되었다. 여기에서 복음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독교를 우리의 생각대로 해석하고 설명하여 중대한 이 중심말씀을 종종 떼어버리기도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바와 같이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느냐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우리가 이 중심을 어떤 말로 표현한다는 것보다 예수님이 이것을 어떠한 뜻으로 생각하고 계셨는지 알아보는 것이 보다 큰 관심사였다.

2. 유대교의 천국관

무엇보다 이 하늘나라에 대한 사상은 예수님의 창작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의 귀에는 천국이라는 말이 매우 익숙한 말이며 그들의 고대문서에는 천국을 많이 언급하였다. 다니엘서의 한 곳에는 이 말이 이렇게 기록되었다.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나라는 폐하지 아니하리라](단7:14)

이런 구약의 사상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기 위하여는 먼저 예수님 나시기 전의 유대교의 천국 사상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유대교의 천국 사상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즉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천국관과 세속적인 천국관이다. 정치적인 천국관은 외세의 통치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예컨대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의 목을 누르고 있는 것이 이 정치적 속박과 부자유로부터 해방 되는 길은 하루 빨리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희망 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 사상은 천국이 예기치 않은 때에 어느 나라도 항거할 수 없는 세력으로 갑자기 임하리라는 사상이다.

반면에 다른 한편에서는 이 천국사상이 종교적인 의미나 성격은 상실되고 다만 물질적인 호화로움과 정치세력의 팽창,그리고 세속적인 유익을 소신껏 누릴 수 있는 세계로 알려졌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이 시대에 유행하는 세속적인 천국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그 사상을 시정한 일이 있다. 즉 야고보, 요한 형제가 예수님에게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다른 사람보다 일찌기 운동을 했고(마20:20),또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이 사상을 버리지 못하여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오니까](행1:16)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지상적이고 정치적이고 비영적인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던가를 엿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천국]이라는 말은 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민족사상을 대표하는 한 슬로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역사에서 보는 바,민족주의 사상이란 것이 얼마나 강열하고 끌 수 없는 부로가 같은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태리의 마지니,중국의 손일선, 인도의 간디 등을 모두 그들의 민족주의 사상을 위하여 열렬하게 투쟁한 사람들이었다. 이 사상은 분명히 자기들의 민족을 새로이 발전시키는 혁명적인 요소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볼때,민족주의 사상이 절대적인 최선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현세적이고 감상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초월하여 그의 선민을 발전시켜 민족을 초월하여 전우주적 포용주의 사상으로 모든 백성과 민족이 다같이 사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이다.

인류사상 우리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던 유대교의 민족사상보다 더 강렬한 것을 본 일이 없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복음서 기자들이 이 대목에는 특별히 주석을 달았다.[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라](요4:9).이것은 유대교 민족주의 사상의 대표적인 일례로 손색이 없다. 그런 색체가 일체 금지되어야 할 성전에서 조차 이 사상은 강조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에 유대인들과 이방인의 바깥 마당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서 경계선을 만들었다. [이방인은 이 안으로 들어 오지 말라.누구든지 이 규칙을 위반하는 자는 죽임을 당한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은 중간시대 유대독립의 영웅 유다스마카비우스가 헬라 정권으로부터 이탈하여 유대인 자주국가를 세우던 그런 인물의 기다림이었다.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그들 역사에 지대한 세력으로 전해지는 중요한 말이기도 했으나 그들의 강조하는 바는 지상의 정치적인 강한 국가에 관심을 모았고 하나님의 뜻을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빈약하였다. 이 천국사상의 정상적인 깨달음은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의 도를 깨닫고, 세례를 받아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상의 배경에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은 오셔서 그 이름에 해당한 나라를 선포하시고 세우셨다. 그는 재래의 메시야 사상을 대폭 시정하여 그의 설교 중심을 선교에 두셨다. 예수님은 이 점을 넘칠 정도로 강조하시고 여러가지로 다양성 있게 가르치셔서 그 가르침을 간단하게 정의한다거나 단순한 문장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 분명하고 중요한 선이 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통치력과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력이다. 이제 이 두가지 점에서 천국사상을 생각해보자.

마음속의 하나님의 통치로서의 그 나라

예수님이 천국을 선포하여 복음의 초석을 놓았을 때, 그가 뜻하는 바를 세가지 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한다면 첫째, 하늘나라는 민족주의적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며, 둘째,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세째,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1) 도덕적인 성격.
천국사상은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친구들에게 어느 것이 사람의 원수인가를 모른다고 지적하신다. 그들은 자기의 땅에서 마음대로 활보하는 외국 군대 로마가 원수라고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참 원수는 로마나 그 군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을 활보하는 악마와 그의 군대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거듭 이 말씀을 강조했다. [어떻게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 강한 자를 절박한 후에라야 그집을 늑탈하리라]고 (마12:19).

여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강한 자는 누구인가? 로마의 가이사가 아니라 사탄이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시기를 [유대 온 땅을 다니면서 상한 심령을 치료하고 악마들을 축출하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가 이땅에 임하여 세상의 강자 사탄을 결박하는 것이며 사탄왕국 파괴는 하나님 나라의 왕성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는 중에서 이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말씀하신 곳은 빌라도 앞에서였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아니하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고 하셨다.

인류사상 가장 큰 모순은 이 땅위에 건설된 나라에 대하여 정치적인 야욕이 조금도 없는 예수님을 로마 정부의 대행자 빌라도가 그 로마와 싸우는 선동자라고 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일이다. 그리고 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이 지상국가가 로마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로 세워지기를 열망하였는데 예수님의 언행 중에는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어주고자 하는 뜻은 전혀 비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이 그런 일을 의식적으로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아니했다]이것이 바로 유대 민족주의 입장에서 볼 때 사형에 해당하는 발언이다.

[우리를 장차 다스리지 아니할 저런 자를 물리쳐라]고 군중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세계는 이 땅위의 어느 영토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이다. 사람의 가장 깊은 곳,즉 우리의 도덕세게를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성격을 가진다.

(2) 영적인 성격 천국사상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마음속에 바라던 나라는 오직 지상에 세워진 국가 뿐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핍과 곤고를 물리치고 저들에게 윤택한 환경, 생활의 평안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사실은 이미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생각할때 언급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일로서 자신들을 물질생활에서 여유있게 지내기를 바란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생각은 사탄이 바라는 방법이다.[먼저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그 다음 여유가 생긴 다음에 영적인 높은 문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라든지, [먼저 평안을 누린 다음에 복음을 들으라]는 방법 등은 사탄의 방법이지 예수님이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의 예수님께서는 이 방법에 대하여 단연코 [노우]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롬14;17)고 가르치셨다.

오늘날에 와서 천국 사상은 지상천국의 연장과 같이 생각하여 먼저 이 땅위의 생활에 대한 관심을 더 크게 가져야 한다는 사회주의 사상적 경향으로 복음을 합리화 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사회주의 사상이 중요시하는 물질적인 요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회가 등장하고 생활 환경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아름다운 환경을 이룬다해도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새롭게 지음을 받고 그들의 인격이 썩어져가는 죄에서 심령을 돌이켜 구원 받지 않으면 아름다운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회개하고 새로 지음 받은 사람만이 누리는 축복이다. 심령이 새로워지지 않은 사회의 유토피아는 가장 불행한 고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 문제를 무시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참종교는 언제나 사회 문제에 대하여 강한 발언권을 가지며 따라서 지도 이념을 가진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발견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불공평을 시정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며,또 그것을 자기들의 신성한 의무로 생각한다. 진실로 영적 문제에서 새로워진 사람은 사회를 개혁하는 십자군 편에 언제나 가담한다. 먼저 할 일은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다. 영적인 문제가 바로 이루어진 그곳에는 언제나 물질적인 문제도 바로 잡혀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물질세계에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다.

(3) 제적인 성격 천국사상은 또한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천국을 공상적으로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 천국이 미래의 어느 시기에나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 옛날 선조들이 바라던 그 천국이 지금와서 이 땅위에 실현되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그의 고향 나사렛 회당에 모인 무리 앞에 서서 하나님 나라의 복스러운 내림은 미래에 있을 것이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큰 음성으로 읽으셨다. 그 내용은 [마음이 상한 자는 위로를 얻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그리고 그는 책을 덮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나니라](눅4:17).

또 다른날 그는 제자들에게 조용한 음성으로 [보는 눈이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지나간 세대의 모든 왕들과 선지자들이 그들이 듣는 바를 듣고저해도 듣지 못했고 보고 싶어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찬란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게된 그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하다(눅 10;23).예수님은 거듭 거듭 저희 선조들과 그들이 이미 꿈꾸고 있던 하늘나라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들의 영적 환상이 깨끗해지기를 강조하여 권고하셨다.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의 이상이다. 꿈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스콧틀랜드 신도들이 박해를 받아 사방으로 이산 당하여 황무지와 토굴 속으로 숨어다닐 때 용감한 스칼취 맹약자 한사람은 [스콧틀랜드의 모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당신에게 그 소재를 밝혀주리라. 스콧틀랜드의 어느 깊은 산골에서 기도하는 남녀 젊은이들이 모인 곳, 그곳이 바로 스콧틀랜드의 교회다]라고 말했다.

이와같이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복음도 이렇게 대답한다.[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모시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들이는 남녀 신도가 있는 곳, 그곳이 하늘나라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 돌연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바른 설명이다. 그 나라는 이 나라와 다른 나라로서 영원한 세계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간의 표면적인 모든 생활을 초월하여 그 중심에 임하는 나라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4. 하나님의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자로서의 그 나라 통치

그리스도가 말하는 하늘 나라의 둘째 성격은 그 나라 사람의 마음만 통치할 뿐 아니라 그 세계도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서도 예수는 세가지 원리를 설명하신다. 첫째, 그 나라는 사회적이며 개인적이아니다. 둘째, 그 나라는 우주적이요 지역적인 것이 아니다. 세째, 그 나라의 완성은 최후의 결정이지 현재 완성된 것이 아니다.

(1) 사회적 성격
하나님의 나라가 사회적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라는 그 단어에 벌써 그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연대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다. 구원을 받은 영혼들이 한데 엉키어진 것이다.(종교는 항상 이런데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구원 받은 자의 사회, 인간 사회의 새로운 질서. 가족적인 교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한집(한울)이라는 뜻 외에 아무런 읨도 표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마랗는 천국의 프로그램이며 성명서이다. 고로 요한복음이 특별히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는 바대로 어떤 의견이든지 단순히 하나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있다는 개인적인 성격이 강조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종교와는 거리가 먼 종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개인주의를 강하게 고취한다거나 자아구원 중심의 편협을 장려하지 않는다. 만일 한 개인의 심령구원만을 강조하는 점이 기독교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런 점으로 해석할 것이다.

나는 나의 정신전쟁을 쉬지 않으리라
내 검을 내 손에서 녹슬게 하지 않으리라
이 영구히 푸르고 아름다운 땅에 우리 손으로 예루살렘을
건설하기 까지는.

어느 시인의 노래와 같이 기독교에서의 개인의 위치는 하늘 나라를 건설하는 한 용사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2) 우주적 성격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우주적이지 결코 지역적인 것이 아니다.[밭은 복음의 씨가 자랄 곳이다](마13:38)라고 말씀하셨다. 밭이란 사람의 마음을 가르친 말이다.신자의 책임감의 귀중성을 말하는 중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마5:13)고 표현하셨다. 무엇을 위한 소금인가?한 교회나 그들의 가정이나 어느 계급이나 어떤 당파를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같은 맛으로 스며드는 소금이라는 말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매력이 있어 전세계적으로 모여 오리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라](눅 13:29).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느티나무 그늘처럼 폭양을 피할 수 있는 단 몇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몇사람의 영혼만 뽑아 구원의 전당에서 행복스럽게 살게 하시려는 분이 아니다. 어느 특수한 사람만 골라서 안락의 항구로 인도하시려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 세계 인류를 위하여 임하였다. 그것은 결코 지방적인 것이 아니라 전우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3) 최후의 완성을 기다린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최후의 날에 주어진다.여기에 하늘 나라의 파라독스가 있다. 즉 현재를 의식하면서 미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나라에 나를 완전히 항복시킨 사람은 그 나라를 알기 때문에 현재 그 나라를 맛보고 있으며, 그 사람이 받을 영광은 미래에 준비되어 있다. [인자가 그의 영광으로 임하실 때는..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라](마25:31).예수님의 재림은 사랑이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행한 모든 행위의 상급을 받는 때로서 그 날은 하나님의 때이며 천국을 완성하시는 날이다. 우리의 현재의 이해를 초월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날이며, 선과 악의 긴 역사적인 싸움은 드디어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의 승리가 전 우주를 통치하여 그리스도의 발앞에 모든 원수들이 무릎을 꿇는 때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미래 하늘나라가 완성할 때의 광경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주신 바 세계의 영원한 소망이며 이 소망은 그의 이름과 영광으로 보증해 주신 확실한 것이다. 계시록 기자가 위대한 환상 중에서 천사의 나팔 소리가 들리고 기뻐하는 소리가 이렇게 들리리라고 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라](계11:15).

매일 성경

 미가서 4:1-8  유대인의 기대 및 대망
 누가복음 10:17-24  그 나라가 이미 도래함 17:20-21 
 마태복음 13:44-46  그 나라를 찾음
 요한복음 3:1-8    그 나라의 입문
 마태복음 13:24-33  그 나라의 성장
 마태복음 25:1-13   그 나라의 완성
 마태복음 5:1-12  그나라의 성격
 

토론을 위한 문제

1. 구약성경의 어떤 요소가 신약성경의 그나라 교리의 기초를 이루었는가?

2. 예수는 유대인의 그 나라 개념을 어떤 방법으로 변화시키셨는가?

3. 예수의 어떤 말씀은 그 나라를 현재로, 어떤 말씀은 미래에 도래할 것으로 말씀했다. 이 두가지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4.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제 7 장. 열두 제자

제자들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리스도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청년 운동으로부터 시작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생각할 때 이 점이 증명된다. 기독교사의 다른 점들에는 다소 차질이 생기는 일이 혹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청년 단체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제자들 대부분이 예수를 따를 당시 20대 청년 시기였다. 이 점에 대하여 거의 한세기쯤 후에 사도 바울이 증거하기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5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시고 그 중에 태반이 살아 있다](고전 15:6)는 기록을 남긴 사실을 보아서도 이 사실은 증명된다.

예수의 영적 승리는 특히 청년들의 관심을 끌었다. 복음서를 읽을 때 그의 설교를 주의해 보라 그는 헬라어 [테크나](teknia) 즉 [소자야]혹은 [소자들아](요13:33),그리고 [얘들아] (paidia)-모팔 박사는 이 말을 [젊은이들아]라고 번역했다-등의 말을 사용하였다.

예수는 그의 지상 사명을 수행할 때에 [새벽 이슬같은 주의 청년](시110:3,이 시는 예수님 자신과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해당한 시라고 했다). 함께 일하셨다고 하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로마 박해시대에 카타콤에 숨어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던 신도들이 예수의 초상화를 벽화로 그렸는데 이 벽화에 그려진 예수는 피곤하고 나이 많은 모습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양들을 몰고 아침 언덕길을 걸어가시는 젊고 씩씩한 모습이었다. 아이작 왓츠의 찬송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신비로운 십자가를 생각할 때 나는 그 위에서 영광스럽게 돌아가신 젊으신 왕자를 바라 보노라.

젊은이들이 지니고 있는 용기, 희망,고독,쾌활성,관대심,꿈의 대망,내적 고민과 강렬하게 부딪치는 시험 등을 진정으로 이해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밖에는 또한 공상의 잠을 자고 있는 젊은이의 심령을 일깨워서 위대한 사상을 안겨 주고 훌륭한 생활의 업적을 남기도록 지도한분 역시 예수 밖에 없다. 젊은 예수, 젊은 제자들, 이들이 한 그룹이 되어 유대 전역에 새로운 종교 운동을 일으킨 사실은 옛날 시인의 표현대로 [깊음이 서로 깊음을 부른다(시42:7)는 말과 상통한다. 피차에 허물이 없고 빈틈이 없이 감정이 서로 교차되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순결하고 또 고상하여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선망하는 마음이 젊은 제자들의 마음에서 끝없이 자라가고 있었다.

이런 관계로 그리스도교가 초기에 [청년운동]으로부터 출발했다는 표현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열두 제자에 대한 연구는 곧 청년에게 대한 연구이다. 그들은 최초부터 자기들의 지도자 예수의 출신성분에 대하여 확실히 알지 못했고, 또 그들이 왜 예수를 따르게 되었는지,그리고 자기들을 어느 곳으로 데리고 갈지도 모르고 그저 쉬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듯 따르기만 한다. 그들은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심령을 사로잡는 어떤 위대한 힘과 매력에 무조건 매혹되어 열렬하게 자신들을 바치고 있었다. 이러한 일종의 맹목적인 추종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비난도 받았고, 반대 세력의 모략도 받았으며, 자기들의 직업을 버리고 따라 나섰을 때에는 이중 삼중의 고민이 그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사도]라는 빛나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런고로 그들이 예수에게로 나아가 그 심령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 새 사람이 된 사실은 우리들이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성격의 다양성

제자들에게서 가장 먼저 발견되는 것은 그들의 성격이 각기 달랐다는 점이다. 그 다양한 성격, 피차 조화될 수 없는 인간성들이 어떻게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조화되었는가?하는 점을 여기에서 밝히기로 한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중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다](사11:6)는 환상이 곧 민족주의 열심당 시몬이 로마 정부의 관리인 세리 마태와 기거 생활을 같이 할 수 있었다는 사설에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가지고 연합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문제를 분석해 보건데 그것은 제자들 모두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정력과 활동력과 남다르게 성급한 성격을 지닌 베드로와 명상적이고 사색적이며 기도의 사람인 요한이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서로가 협조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의 성격은 예수로 말미암아 거리가 좁혀져 가고 있어 명랑하다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가진 안드레와 남을 의심 잘하기로 유명한 도마가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한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열두 제자의 화합은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성격을 인상 깊게 보여 주는 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런 여러가지 성격 상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소속된 교우들의 다양한 성격과 비슷하다.[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고 말씀하신 대로 그는 행하고 계신다.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자기의 사람들을 그에게로 불러 모은다. 그리스도만은 시대에 뒤떨어질 수 없다. 국가와 인종의 차별이 없이,키프링의 말과 같이 동서 양대륙이 지니고 있는 연결 불가능의 장막 조차도 그리스도 예수를 교량으로 하여 서로 통하게 되었다. 모든 성격과 기질, 계급과 단체가 모두 그리스도에게 와서 하나가 된다.

성프란체스코와 요한,번연,요한.웨슬레와 헨리.뉴만,로렌스와 아프리카의 아그레이,D.L.무디와 템플.가이드널 등이 모두 그리스도를 교량으로 만나게 되었다. 계시록이 증거한바 하나님의 성에는 여러 방향의 문이 있으며, 그 모든 문은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통로라고 했다(계21;13).

3. 주님의 두가지 목적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를 밝혀 보자. 마가복음에 뜻깊은 한 구절이 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를 하며...] (막3:14).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하다.[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이 말씀은 인간성을 가지신 예수께서 인간적인 동정과 인간의 교제를 필요로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는 고독을 경험한 여러 사람이 있다. 처녀 마리아, 친구 없는 문둥병자, 벳세다 못가에 38년된 병자,유다.빌라도,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지게 외로움을 느낀 존재는 예수님이다. 날마다 대하는 세계가 그에게 딱딱하고, 적대시하고,경멸하고, 조롱의 화살을 던지고 있으며, 비관과 무관심이 폭풍처럼 그의 면전에 나타날 때마다 그들의 비록 철없이 덤비고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있어도 그러나 스승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제자들과 함께 자기의 슬픔과 괴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자들이라](눅22:28)고 한다. 이 말씀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나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도 그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동등하게 생각하신다. 고로 [누구든지 문을 열면 들어가리라]고 하신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이다.] 이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사랑과 동정을 원하시는 뜻을 보여 주시는 뜻깊은 말씀이다. 또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친히 교제하는 중에 교훈하시려는 뜻이 있다.

날마다 예수와 함께살고, 어떤 처지든지 그를 바라보고 그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항상 듣고, 그의 꿈과 이상과 희망에 함께 발맞추어 고락을 같이하던 제자들은 예수의 명철한 영을 나누어 받고, 그의 영안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그의 놀라운 이해력으로 모든 것을 시닙롭게 깊이 이해하고 믿을만한 그의 뜨거운 정열의 불에 자신들이 뜨거워지는 이 경험이 예수와 함께 생활함으로 생겨진다. 반복하여 정리하면 예수와의 교제는 제자들로 하여금 참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 오늘날도 참된 자녀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와 접근하여 사는 생활이다. 예수와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스승가의 삶이다.

다음의 목적은 제자들에게 복음 전도의 사명을 주어 파송하는 것이다. 갈릴리에서 기치를 든 이 전도운동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기회가 매우 좋았고, 멸망하는 영혼들을 구원할 필요성을 너무도 강열하게 느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혼자서만 이 일을 다 처리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붙여 놓은 진리의 횃불을 들고 열 두 제자는 방방 곡곡을 찾아가서 그 어둠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그는 이들을 택하여 제자를 삼으셨다. 고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지만 지금 우리가 그의 손이 되어 일하고 그리스도는 발이 없지만 우리의 발이 사람들을 그에게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에게 혀가 없지만 우리의 혀가 그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리스도에게 도움이 없지만 우리의 도움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

[사도]란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런 이미의 사도가 아니고는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수 없다. 그리스도는 오늘 당신들도 자기의 제자중 한 사람으로 생각하신다. 2천년전,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청년들이 전 세계를 변화시켰다. 오늘도 그리스도는 남녀 청년을 택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변화시키신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전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시려 한다는 그 신앙을 아무도 잃어 버리지 않도록 하라.]

4. 주님의 부르심

최초의 열두 제자는 어떻게 해서 예수에게로 나아갔을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결단을 내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까지에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다만 예수를 만나는 그 시간까지가 그의 철저한 제자가 되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고로 그들의 최후 결단은 상당히 돌발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들이 완전한 제자가 되기까지에는 적어도 세 단계를 거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첫째, 처음에는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있는 자로서 자기의 집에서 가장 사업을 계속하면서 이따금 그를 접촉하고, 그를 만나 보고 또,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동안을 지냈고, 둘째로, 그들이 점차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되자 자기의 집과 자기의 직업을 하나의 장애물로 생각하고 직업에 등한시하며 한 동안을 지냈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자기 일신상의 사업을 완전히 단념하고 자기들 끼리 한 단체를 이루어 예수님곁에서 떠나지 아니하며 그와 가깝게 교제하며 그와 더불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자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는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에는 몇가지 단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린다. 가령 베드로가 부름을 받은 사실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요한복음 1:42,누가복음 5:10,마가복음 3:13-16의 세 곳인데 그 기사가 각각 다르다. 이 셋이 반드시 가랑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다른 점은 그들이 각기 자기들이 보고 들은 대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고로 이 기록들은 서로 배치되는 기사가 아니라 서로가 보충하며 더 완전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상에 밝힌 세 단체가 이 여러 복음의 기사로 잘 나타나 있다. 처음에 그는 가까이서 예수를 사귀어 보려고 했고, 다음에 그를 따랐고, 세째로 사도로서 완전히 그 사명을 맡게 되었다.

5. 열 두 사람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 두 사람에게 대하여 생각하자. 안드레는 스콧트랜드를 지키는 성자로 섬기고 있다. 안드레와 스콧트랜드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안드레를 자기들의 수호사도로서 자랑하는 것 만은 사실이다.[안드레란] 말의 헬라어 뜻은 [용감하다][사내답다]는 말로서 남자의 이름이다. 복음서에는 안드레의 이야기를 별로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는 베드로의 형제였다는 것만을 말하고, 뛰어난 다른 제자들의 그늘에서 빛을 못보는 듯한 느낌으로 평범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안드레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를 만난 사람이며, 그가 자기의 형제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를 만난 사람이며, 그가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그러니까 안드레가 아니었더라면 베드로가 그리스도교 역사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손꼽히는 네 제자(베드로,안드레,야고보,요한)의 한 사람으로 항상 한 그룹에 끼인 것을 보아서 예수님과 더가까이 지냈고 또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한 사건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예수님 곁에 있을 수 있는 그의 존재를 주목할만 하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부흥 운동에 깊이 감동을 받은 사람 중의 한 청년이었다. 요한은 자기의 신앙 운동에 참거하여 온 사람들에게 어느날 석양, 요단강변으로 걸어가시는 낯선 사람을 가리키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요1:36)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안드레와 다른 한 사람은 요한이 말한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낯선 그림자를 따라 갔다. 그리고 물었다. [랍비여,어디 계시는 분입니까?] 예수님은 [와서 보라]는 간단한 대답을 했다. 그날밤, 그들이 피차 어떤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그들이 피차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밤을 밝힌 것만은 사실이다.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요1:39).이런 점으로 보아 안드레가 사물에 대하여 주도면밀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의의 깊은 활동은 그가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중책을 이행한 일이다. 그가 밤이 깊도록 진리의 담화를 나눈 그 다음날 아침, 즉시 자기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다]고 기뻐하던 흔적이 복음서에 보이고, 그후 [자기 형제 베드로를 예수에게로 데리고 왔다]고 기록했다(요1:42)

그후, 어느날, 주린 5천의 군중이 예수를 떠나지 아니하고 늦도록 빈들에서 방황할 때,조그만 어린아이가 가져온 떡덩이를 찾아 내어 예수님에게 가지고 가서[여기 떡이 있나이다](요6:8)라고 말한 사람이 안드레다. 여기에서도 역시 어린 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그 다음 어느 날, 헬라 사람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면회하려고 벳세다 사람 빌립을 찾아서 면회하기를 간청했다. 빌립은 직접 예수에게로 데리고 가지 않고 먼저 안드레의 의견을 듣고 안드레와 같이 헬라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갔다(요12:20-22). 이런 점으로 볼때 안드레는 스콧트랜드의 성자만이 아니라 그는 모든 선교 사업을 하는 선교자들의 영원한 수호 성자라 하겠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예수에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제자들의 할 일이며 오늘도 이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지도자의 천성을 타고난듯, 그는 열두 제자를 대표하는 대변자였다. 어느날,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 가려느냐?] 고 물으셨을 때,[주여! 당신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이렇게 얼른 대답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예수가 누구냐는 문제가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 제기 되었을 때에 다른 제자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다보고 있는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한 이도 베드로였다(마16:16).

그들의 스승을 십자가상에 잃어버리고 낙망하여 앞일을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들을 할 때에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하고 앞장 서 나선 사람도 이 베드로였다. 이 말을 따라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요21:3). 용감하고 넓은 마음을,그리고 열광적이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인 베드로는 지도자의 자질을 천성적으로 타고났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성격에 결함도 있었다.[사탄아! 물러가라]하는 노여운 책망을 받은 사람도 이 베드로였다(마16:23).어느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마19:27) 하며 장한듯이 자랑한 사람도 베드로다. 조그마한 계집종을 무서워하여 예수를 부인한 일도 있다(마26:69). 얼마나 변화무쌍한 혼잡한 성격인가?베드로가 우리에게 가까운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그런 결점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새로운 이름 [베드로]를 받은 시몬은 교회사상에 바위와같이 굳건한 존재였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실수를 많이 하지만 후일에는 하나님의 가장 강한 사람이 될 미래를 보시고 그를 수제자로 삼으셨다. 그가 예수를 부인한 그 실수에서 통회하고 돌아선 그 후부터는 정말로 모래알이 변하여 바위가된듯 하였다(막16:7). [내 양을 먹이라](요21:17)는 예수님의 명령에 [주께서 아시나이다.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거듭 조아렸다. 베드로의 최후에 대하여 유명한 전설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로마성에 숨어 있다가는 아무래도 잡혀 죽을 것을 안 그는 로마성 안에서 수난 당하는 신도를 버리고 어느날 도망하여 성문을 빠져 나왔다. 이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는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고 물았다. [나는 네가 피해 오는 로마로 가서 두번 십자가에 못박히러 가노라.]이 대답에 베드로는 문득 자기의 비겁함을 깨닫고 걸음을 돌이켜 로마성으로 들어가서 꺼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자의 영광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용감한 사람]베드로는 [저편에서 들리는 하늘 나라의 소리]를 들었다.

주님의 사랑을 받던 네 제자 중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형제가 있다. 야고보에 대한 기사는 비교적 적다. 복음서에 다만 두번 나타나는데 그것도 요한과 함께 한 자리에서다. 그러나 최초의 순교자로서 영광을 차지한 제자다(행12:2).요한은 신약의 요나단이라 하겠다. 구약에 나오는 다윗의 친구 요나단은 신약에 있어서는 다윗의 아들 예수와 가까이 지낸 요한이라 하겠다.[나의 기사]는 절대 대담,절대 온순의 사람으로 맹세를 한 사람이다]라고 테네슨은 말했다.

요한에게는 남자의 대담성과 여자의 온순,이 두 가지 성격이 완전히 조화되어 있었다.예수의 최후 순간, 갈보리까지 스승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자여 보소서,아들이니이다]한 마지막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이다(요19:26).또 다른 한면의 성격으로서 허락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어떤 사람에게 대하여 분개했다는 마가복음의 기사와 (막 9:38),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마을에 불을 내리기를 요구한 기사(눅 9:54),그리고 높은 자리를 탐낸 사실을 보여주는 기사(막10:35)등이다. 그러나 그 성격중 가장 깊은 것은,그가 예수를 떠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의 정결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한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이 그를 기념하여 항상 들려진다.즉[주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말이다(요13;23).

또 한분의 제자 도마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의심이 많고, 그리고 불가지론자,회의론 자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별명은 아니다.그러나 예수님이 수난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 할 때, 다른 제자들은 [랍비여 금방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시나이까?](요11:8)하고 만류했으나 이 의심 많은 도마는 웬 일인지 큰소리로 대담하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고 말했다. 그 의심은 단순히 반항적인 의심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성격의 한 우울증이 섞여 있는 결함이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가장 아름다운 신앙 고백의 하나는 의심하던 도마가 예수를 확신한 다음의 고백이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을 때] (마9:9)부름을 받았다.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희망이 없는 수치스런 사람으로서 모든 국민의 조롱을 받는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그날 밤,가버나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큰 이야기 꺼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 보면, 후에 사도 바울이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2:7)고 증언한대로 예수님의 품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 준다. 이 관대한 대접을 받은 마태는 그날밤 연회를 베풀어 고귀한 손님을 청했다(마9:10).이 연회를 베푼 목적은 세리 마태에게 있어서는 세가지 이유에서였다고 생각된다.

첫째, 그것은 그의 영혼의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는 잔치이며,둘째, 그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고백하여 자기 생활을 결정적으로 청산하고 다시는 과거의 그런 길을 걷지 않겠다는 표현이며, 세째,그의 옛날 친구들로 하여금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 그들과도 신비스러운 영적 경험을 나누고자 함이었다. 이 연회로 말미암아 예수에게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이 유명한 칭호가 처음으로 붙게 되었다. 그러나 이 칭호가 그리스도에게는 참으로 영광스런 이름이었다.

나머지 여섯 제자에 대하여는 별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열심히 묻는 질문가(빌립 특히 요1:4314:8),열심당이며 열렬한 민족주의자 시몬,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바돌로매(요1:45),다대오라 이름하는 레빼오(레빼오란 이름은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었음: 역자 주-마10:3),유다 9예수님에게[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 하시려 하시나이까 한 사람-요14:22), 그 다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그에 대하여는 아무 기록도 없다).

그 다음 예수를 판 가롯 유다,그가 왜 이 단체에 끼어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여기서 가롯 유다에 대한 문제는 더 깊이 다루려 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처음 그를 부르실 때는 그에게도 후일 훌륭한 제자가 될 소질이 있음을 인정했으리라는 것만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다 역시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에 끌리어 그를 찾아 왔을 것이다. 서로가 이렇게 보는 바가 없었더라면 결코 사제지간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유다의 신비에 대하여는 17장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택하신 열 두 사람을 데리고 세상을 정복하려는 영적 사업을 시작하셨다. 이 출발은 대답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 모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험이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것들을 폐하러 하시나니](고전 1:27).

매일 성경

 요한복음 1:35-42  두 청년과 예수
 마가복음 3:13-19  12제자들을 택하심
 마태복음 10:5-20  제자들의 임무
 누가복음 5:1-11 사람을 낚는 어부
 마가복음 10:35-45 우뢰의 아들들
 누가복음 9:57-62  주를 따르려는 자들이 거부 당함
 마태복음 10:32-42 십자가를 짐
 

토론을 위한 문제

1."제자"와 "사도"란 말의 의미를 토론해 보라.

2.처음 12제자의 다양한 성격의 의미는 무엇인가?

3.예수의 부르심은 오늘 어떤 모양들로 오는가?

4.매일의 직업이나 직장에서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를 가장 잘 섬길 수 있는가?



제 8 장. 예수의 교육방법

1. 선생의 예수

니고데모가 조용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이신줄 아나이다](요3:2).그의말은 매우 정확한 판단이다. 예수의 교훈 비록 전세계 많은 사람이 이 교훈과 관계없이 지내고,그의 추정자들 까지도 그 교훈에 무관심하고 , 또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지만 그 교훈은 실로 세상에 어떤 선생이라도 예수님만큼 감화를 끼친 스승은 없다. 그분은 홀로 모든 선생들 중에 가장 위대하신 분이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의 생애중에 많은 시간과 정력이 교훈하는 일에 바쳐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의의가 있는 일이다.

그는 어떤 교안을 작성했는가? 그는 자기에게 교육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접촉했는가? 어떤 방법으로 그가 받고 있는 진리를 제출했는가? 그리고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런 질문들은 예수의 교육 방법 연구에 있어서 필요할 뿐 아니라 현대 교육 방법 혁신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또는 이런 내용과는 달리 그는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교육 방법을 논함에 있어서 다음 두가지 조건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방법]이란 말은 분명한 설명이나 형식화 한 어떤 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특징 있는 교육 방법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활용하시는 그것이다. 이것이 모든 규칙을 능가하는 방법이다. 둘째, 예수님은 한분의 선생이었다. 나면서부터 선생이었으며, 가장 위대한 선생이었으나 그분은 선생 이상의 존재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 전해오는 교훈만이 그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이상의 기대할 것이 그에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특별한 의의가 없는 일이요 따라서 세상은 이미 파멸의 심연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은 그 교훈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이기에 앞서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오신 이라기 보다는 전할 복음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으로서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한 테일 박사의 뜻깊은 주장이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 두가지 점을 인식하고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연구하자.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밝혀야 한다. 즉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수한 점이 무엇이었던가? 또 그 교육의 일반적인 원칙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점이다.

2.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성

그는 무엇보다 구전교육 방법을 사용했다.글로 써서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로 가르쳤다. 그는 단 한번 글씨로 쓰신 일(요8:18)이외에는 모든 경우에 친히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그가 가르치신 아름다운 금언, 명구,신앙과 도덕 등 결정적으로 규정 지은 모든 말씀 곧 [하나님의 신학] 은 모두 갈릴리 농부와 어부들의 기억을 정리하여 문자로 기록된 말들이다.

그 구전식 교육에 위험부담은 없었는가? 시간이 흘러가면 그렇게 말로만 전해들은 교육이 망각되어질 위험성은 없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안다.씨를 뿌린 농부는 그 곡식이 결실할 때까지 항상 돌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땅과 또 다른 결실을 한다. 예수님은 한번 사람의 마음 속에 뿌린 말씀은 뿌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항상 돌보아 주셨다. 그 말씀은 해가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영원히 자라는 생명이 되었다. 그의 말씀은 종이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생명을 가진 씨앗을 마음에 뿌리쳤다. 이 씨앗은 한번 마음 속에 뿌리를 박으면 세기에서 세기를 연결하여 죽지 않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노르웨이의 문호 입센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이란 작품에서 제 4세기 로마황제 줄리안의 독백을 이렇게 표현했다. 즉 [그가 지금 어디 있느냐? 골고다의 사건이 일어난 후 그는 어디서나 일하고 있느냐?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가 고통을 받고 죽고,또 세계에서 세게로 계속하여 정복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말로써 예수의 기사를 썼다.

둘째로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성은 그의 교훈 대부분은 충분한 원인을 가진 사건과 현장에서 추출되어 나왔다는 점이다.다시 말하면 어떤 특수한 사건에도 미리부터 생각하고 목적한 사실을 말하고, 그 특수한 진지를 설명했다. 회당에서 반신불수를 만난 일(마12:10).길에서 만난 귀족청년과의 대화(마21:16)제자들의 돌연한 논쟁 (눅 9:46),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옮으냐,그르냐 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마22:17)등,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기가 목적하는 교훈을 주셨다.

이런 교훈은 그 적응성이 순전히 지방적이며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늘날에도 꼭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교훈을 통하여 가르쳐주신 진리는 변함이 없다. 예수의 교훈 대부분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사건에 관련하여 주신 것이지만 지금도 그 교훈은 진리이다. 교리나 철학은 가르치는 방법으로 체계를 세운 어떤 것을 말씀하셨다면 벌써 오래전에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선명하게 빛나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나고 또 그와 친히 사귄 남녀들의 가장 절박한 현실에 응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토록 확실하게 남아 있다.

사상의 체계는 시대를 따라 변한다. 그러나 곤란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눈은 유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눈물은 여전히 눈에서 흘러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세계 모든 사람들의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일정한 요구에 응하고 있다.

세째로 그의 교육 방법의 특색은 언제나 그가 가르치신 교훈은 듣는 청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데 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말씀을 듣는 청중의 입장이 되어 피교육자의 처지에서 교훈을 시작하셨다. 모세의 율법이 과연 그들에게 활동적인 종교였는가?에 의문을 가지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으로서 자기의 말씀을 전개했고, 거기서 또한 하나님의 더 좋은 율법의 높은 말씀을 전하셨다. 청중은 또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이 나라 없는 백성의 처지에서 영적 국가인 하늘 나라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언제나 그는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또 거기서부터 발전해 나갔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가 쓰시는 말씀은 단순했다. 직접적이고 단순하고 박력있는 그의 용어는 - 분명히 그가 쓰시는 용어는 그 당시 직업 종교가들의 것과는 달랐다 - 듣는이에게 쉽게 이해되었고 또 사람들이 잊어버리거나 등한시 할 수 없으리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그는 또 성급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을 결코 조급하게 만들지 않았다. 한걸음씩,한걸음씩 그들을 인도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12). 그는 거룩한 보류의 마음과 침묵으로서, 그는 그의 계시를 미리 다 말씀하시지는 않았다(예를 들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등).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까지 보류했다.

이런 실제적인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강조되어야 한다.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믿으라고 요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불완전한 신조 때문에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면에서 결점을 지니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 자기 민족들의 입장에 서서 가르치므로 주민들은 할 수 있는대로 예수에게로 모이고 있었다. 초신자들도 예수를 환영했다. 처음 만날 때는 중요시 하여 누구에게든지 제자들을 처음 가르치실 때처럼 친구로 삼고 한 걸음 두 걸음 그 자신의 깊은 신비에 까지 인도해 가며 제자로서의 안전한 영광을 누리게 했다.

그의 방법의 특색 하나는 그의 교훈에는 비유적인 요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 그의 경우, 역설이나 어떤 무엇보다도 비유를 가장 순직한 예술적 수완보다 은총의 산 계시로 그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사로서 생명, 운명,하나님등,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과 설명의 창문을 열어 자신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그 진리를 청중으로 하여금 확실히 보게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이야기가 듣는 사람의 심중에 한 그림으로 화하도록 하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상상력이나 생각하는 두뇌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도 그 말씀에서 나타나는 신비의 광경을 보게하여 [내가 본다] [나도 본다]는 부르짖음을 가지도록 했다.예수 앞에 나오기까지 인생 문제에 대하여 눈이 어둡던 사람이나 잠든 사람처럼 몽롱하여 인생의 영광스러운 문제에 한번도 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예수에게 나와서는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안이 밝아져서 생명의 원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 그에게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사람들에게 환상을 주시는 분이었다.

그리스도의 교육방법의 원칙

이제 우리는 그의 특수한 교육방법으로부터 시선을 옮겨 그 일반적인 원칙을 연구해 보자. 첫째,그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권위가 있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대로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마7:28).예수님의교훈에는 [아마]라든지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등의 불확실한 상상적인 이야기는 없다. 언제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와 같이 자신의 말슴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명확히 했다.[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는 말은 서기관들은 항상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라든지 [랍비 000는 이렇게 말했고, 율법과 예언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인용했다.

이렇듯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이름과 의견을 자신 있게 밝히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종교는 낡은 책에 의존하는 종교였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서 말하게 되는 종교였다. 서민층까지도 그 종교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온 대변이라는 것을 알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느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서기관들을 매우 멸시하고 있었다. 에머슨이 세네카(로마 철학자,B.C.54-A.D.39?)를 평가한 말이 서기관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사상을 자기 스스로 말할 수만 있었다면 대단히 훌륭한 사상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왜냐하면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릴리 나사렛 사람 예수님에게서는 새로운 말씀이 흘러나왔다. [옛 사람도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이렇게 그는 서기관들의 사상과 그 처지를 일축해 버리고 전설을 기초로 삼고 있는 그들의 사상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옮겨 놓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고, 또 놀라고, 경이롭게 바라보았지만,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권위 있는 그 태도에 결국 군중은 감격하고야 말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사실은 친히 체험 가운데서 나온 말씀이며 정말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는 분을 만났다고 믿어주고, 그분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교훈하실 수 있는 분이며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신 분인 것을 믿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교육이 지방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영원성을 지닌 것임을 재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이 정치나 사회문제 내지는 도덕과 종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옛 전통의 구습을 깨뜨리고 권위 의식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 부딪친 시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가 취하신 원칙을 외면하고서는 어떤 항해도나 나침판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정신상태와 양심에 주신 그의 교훈은 지금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예수의 교훈이 비록 권위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 교훈이 어떤 지나친 의미의 교훈이거나 교리적이거나, 또는 강제로 동의를 요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가 가르쳐야만 할 사람에게 대하여 놀랄만한 인내를 지니고 계셨다는 점이다. 강제성을 띠고 이끌기를 거절하시고,그들에게 자기의 의지대로 강요하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매우 존종하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기적의 힘을 아무렇게나 쓰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현혹을 주고 판단을 그르치게 하지 않으시려는 의도에서였다. 길지 않은 기간 훈련을 시키시고는 제자들을 지방으로 파송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실로 위태로운 일이었다. 왜 그렇게 위험 부담이 있는 모험을 시도 하셨는가?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이 얼마나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가 보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의 기본되는 말씀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리라](요15;15)였다. 만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할 때 강요의 방법을 써서 무오의 교리를 짊어지게 하여 사상적으로 질식시키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이 아니고 친구라] 그는 결코 [이것이 진리이니 이것을 받으라.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나는 진리이니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진리를 발견하리라]고 권유로 하셨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을 알리라](요7:17).그의 교훈은 참으로 권위 있었으며, 결코 강압적이거나 독단적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개인의 인격을 무한히 존경했다는 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기의 결정을 자기가 하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교육 원칙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점은 모든 교육가가 본 받아야 한다. 교육자가 이 점에 실패하면 자기의 모든 일을 실패한다. 예수님은 그의 교훈으로서 세계가 일찌기 경험한 사실을 상기하게 하고 또 의문을 가지도록 크게 자극을 시키기도 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기 보다는 세계에 문제를 제시하고 세계로 하여금 거기에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 하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언제나 직접적인 질문에 대하여 항상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지 아니하셨다.

한 교법사가[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고 물었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여리고고 내려가는데...]로 시작하여 사마리아 사람의 착한 행실을 전해주셨다(눅 10:29이하).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21:21) 라는 물음에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느때는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물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3)고 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비유는 모두 이런 방법이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 자신의 영적 통찰력과 영적 실제에 대한 지각력을 사용하도록 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다(마11:외)

예수님 교훈의 목적은 모든 인생 문제에 대하여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해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인생 문제에 대하여 미리부터 그 답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하면 안식일 문제, 종교와 정치, 주인과 고용인, 그밖의 여러 가지 문제의 해답이 대단히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단순한 입법자가 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칼로 베는듯한 규칙적이며 무미건조한 해답을 주시려고 육체를 입고 인간 사회에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해답을 주신 목적은 그가 살으신 일과 또 죽으신 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명랑하고도 힘있게 모든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새로운 상념적인 해결 방법을 주시는데 있다.바울은 [의문은 죽이고 영을 살린다](고후 3:6)고 말하낟. 이것이 곧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적 자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자신이 교훈하신대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에수님으로부터 애매하거나 추상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모가 그들의 눈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었고,사는 사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주신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에의 신앙이었다. 그가 생활에서 그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훈인가?그의 용서는 그의 마음 전체를 모두 주셔서 용서하시는 것이었다. 단순히 어떤 잘못에만 관계하여 그 부분만을 해결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기도에 대하여 교훈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사랑과 봉사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는 교육만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친히 허리를 동이시고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 주셨다. 형제라는 제목으로 웅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실망한자의 집을 찾아가서 형제요 친구라고 위로하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최고의 선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가르치신 일에 대하여는 최대의 성의를 기울여 실천하셨고, 형식이 아니라 진실로 성심을 다하여 자연스럽게 그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자신을 종교에 바치지 않은 사람의 종교운동은 사람들에게 감화력을 전하지 못하며 예수의 말씀대로 산증거가 없으면 사람을 설복시킬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서, 즉 그가 전하고 가르친대로 살아갈때, 그 종교는 가는 곳마다 감화를 끼친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더 말할 수 있는 예수의 교육방법은 자기에게 배우는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점이다.[사랑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인다]고 어거스틴이 외쳤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거룩한 선생으로써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의 사랑의 정신 때문에 그의 모든 제자들은 항상 그 심령에 뜨거운 불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가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를 단순히 법적인 것과 같이 딱딱하게 한 것이 아니고 기쁨과, 영광으로, 그리고 로맨스로 실수하는 학생들은 그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선생으로 하여금 실망케 하고,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큰 교훈에 항상 장애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이런 실수를 할찌라도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또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 서로가 얽혀져서 신앙은 항상 사랑으로 자라가고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는 그 정신은 그들 속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넉넉히 제해 주었다. 갈보리와 오순절이 다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저들이 배운 교훈이 일층 구속의 중심 사명이 가장 완전하게,그리고 확실하게 그들에게 알려졌고, 그 교훈 때문에 저들은 생의 의의를 발견했고, 그 구속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그들 전부를 바쳐 일했다.

매일 성경

 마태복음   13:10-17   비유의 의도
 마태복음    6:26-30   자연에서 교훈을
 마태복음   18:1-11    생활에서 교훈을
 누가복음    4:14-32   회당에서 가르치심
 마태복음   13:1-9     예수와 무리들
 요한복음    4:11-4    예수와 개인
 마태복음    7:24-29   주님의 권위
 

토론을 위한 문제

1.제1세기 동방에서 가르치신 가르침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유효할 수 있는가?

2.예수의 권위의 출처는 어디인가?

3.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4.교회는 가르침의 사역을 너무 등한히 해 왔는가?그러면 오늘 어떻게 해야 이 일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는가?



제 9 장. 하나님 아버지

1. 논증이 아닌 계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론으로 증거하시려고 하시지 않았다. 복음서의 서두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증거]나 [증명]이란 글자를 찾아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증명이라고 하는 일종의 논증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관계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없다. 그 방법으로 약간의 난점을 제기하기는 하지만 증명 그 자체가 환상을 가지게는 못한다. 파사의 시인 오말 카이얌(Omar Khayyam)의 시를 읽어보자.

어린 시절 나는 열심히 박사와 성자에게 대하여 몹시도 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답을 못얻고 이론의 그 문으로 도루 나왔네

옛날에는 이론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했으나 이제 그런 방법은 쓰지 않는다. 또 앞으로도 그런 식의 이론 전개로서는 하나님을 이해도 못할 뿐더러 확신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확신은 두가지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모든 논증과 이론보다는 더 깊고 높은 차원의 것이다. 즉 우리 영혼에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로서 제시로 비롯된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제시에 대한 우리 영혼의 응답 곧 신앙이다.

종교적이며 심리학적인 거룩한 글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논증을 총괄하자]든지,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등의 서두로서 시작한 글은 하나도 없다.

이런 복잡한 이론으로 전개하지 않고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로서 갑자기 들리는 북소리처럼 약간 갑작스런 인상을 주는 구절로부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역시 하나님에 대하여 논증을 요구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논증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셨다. 그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러 오셨다.

예수에게는 논증이 필요없다. 그의 말씀은 직접 듣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신앙의 결단이 있으리라고는 그는 단언하였는데 그것은 매우 정확한 견해였다. 예수님과듣는 우리들은 함께 유대인이었으며 유대인의 중심종교는 논리를 초월한 일신교였다. 그 일신교의 본질은 이러하였다.[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이미 싹터 있었으며 예수님 자신이 보기에도 이 사실은 명백하였다. 이 사상은 예수님과 그의 말을 듣는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신념이었다. 이 하나님 사상을 기초로하여 예수님은 일을 하셨다. 고로 [하나님이 계시냐?] 하는 따위의 질문은 있을 수 없었으며 다만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항상 [아버지]라고 대답한다. 복음서의 짧은 기사에 [아버지]란 말이 약 150회 이상 기록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최초로 입을 열었을 때[아버지]란 말을 사용했다.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나이까?] (눅 2:49).따라서 그리스도는 마지막 십자가상에서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아버지]란 말을 사용하셨다. 복음서로부터 시작된 기독교가 [아버지]라는 말을 하나님을 부르는 최초의 존칭으로 고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필연적인 사실이었다.

2. 그리스도의 교훈의 독창적 요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기원은 시작은 예수님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사상을 가졌으며, 또 여러 곳에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구약 사상을 예수님은 더욱 철저하게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구약에 전래해오는 아버지 사상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부성을 말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였다. [여호와의 마음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이는 하나님이 그 민족의 아버지란 뜻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은 점점 더 깊게,또한 더 인격적으로,특히 시편의 한 대목에는 [고아의 아버지](시68:5)라고 부른 곳이 있다. 또한 그의 자비로움에 대하여도 이렇게 말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라](시103:14). 고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말은 예수 이전부터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사용하심에 있어서 예수님이 생각하기는 새롭고 독특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두 가지 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수는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속에서 나그네처럼 지나가 버리던 이 사상을 이제는 아주 생의 중심으로 고정시키는데 주력하셨다. 예수 이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창조주와 피조물,주관자와 복종자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상을 별로 강조하시지 않고 가족적인 관계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로 표시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부자관계가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부자관계, 하나님의 부성을 말씀하시는 것은 옛날 구약시대 선배들이 말한 것보다 더 철저하게 참뜻을 밝혀주었다. 그뿐 아니라 일종의 혁명적인 사상으로서 이 [아버지]개념이 종교의 전모를 변화시켰다.

둘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예수의 말씀에는 새로운 길이와 내용이있으므로 이 말씀을 전혀 예수님의 독창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다만 현실사건의 중심으로만 치지 아니하고 인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리만큼 그 내용을 풍부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생활도 그러하려니와 그는 하나님 말씀 이상의 행동은 하시지 않았다. 자신의 말씀 내용인 곧 자신의 생활이었다.

역사상 예수 혼자만이 거룩하신 父性의 산 뜻을 보여주는 생활을 꾸준히, 그리고 철저하게,개선적으로 꾸려나갔다. 그리스도의 이 절대적인 효도와 순종 생활, 그리고 신자성에 아버지 하나님의 자애, 강력한 힘, 명랑성,끊임없는 신뢰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아버지]란 말에는 전대미문의 깊이가 포함되어 있다.

3. 부성의 의미

이제 우리는 이 문제의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가 뜻하신 바 실제적인 결과는 무엇일까? 여기서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복음서의 여러 사실을 들어 설명하고 예수의 부성에 대한 사상이 포함된 뜻을 살피기로 하자. 그러나 이 주제의 실제적 교훈은 복음서의 설명에 근거하여 찾는 것이 가장 좋다. 복음서만이 그리스도의 의도를 가장 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것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 자녀되는 인간의 모든 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신앙을 요구하실 때 [만일]이라든지, [그러나],또는 어떤 조건을 제시한 다음에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그리고 절대적으로 믿으라고 강조하셨다. 의식주 문제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니 염려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 맡은 일에 종사하고 착실하게 직무를 수행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 일에 함께 하신다. 그 일 배후에 계셔서 그 사람을 충심으로 사랑하시며 염려해 주시고 그를 위하여 계획하시고 기억하시고 상상외로 언제든지 선한 일을 계획하고 계신다. 이런 상황을 예수님으니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데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교훈하신 바를 실제 생활에 실천하셨다. 그의 설교는 곧 그의 생활이었다. 복음서의 기록 하나 하나는 그가 사람에게 알리고 또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정신으로 뚜렷하게 보여 주심으로서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고 섬기는 신앙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 한 예로 마가복음 4장의 기록을 들수 있다.

어느날 밤, 갈릴리 호수는 갑자기 밀어닥친 광풍으로 예수와 그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가 순식간에 물속에 침물될 위기에 있었다. 바다에 익숙한 고기잡이들이었나. 어떻게 바람이 거센지 도저히 키를 잡을 길이 없고 다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최후만을 기다리는 초조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다. 오늘 우리가 이 기사를 읽을 때, 풍랑 중에 예수께서 고기잡이 배 위에서 주무셨다는 사실은 만인이 놀랄 신앙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바다가 하나님의 바다요, 물결과 바람과 그 어둠도 모두 아버지 하나님의 장중에 바다요, 물결과 바람과그 어둠도 모두 아버지 하나님의 장중에 있어 모든 것이 아버지의 통치 아래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녀인 우리의 생활에 언제든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지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마련하신다. 인간은 다만 그 안에서 평화와 안일의 생을 항상 누릴 수 있음을 그의 교훈과 그의 생활이 우리에게 여실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처럼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공포와 염려를 물리칠 수 있으며 영광스러운 자유와 하늘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히 의뢰함으로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야 참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마5:3). 그는 신약에서 말하는 [세상을 이긴다]는 사실을 친히 체험하게 된다 그가 움직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의 곁에서 친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십령하나 하나를 아시고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그 자녀에 대한 사랑은 평면적 사랑이 아니다. 자녀 하나의 사정을 살펴 베푸시는 특수한 사랑,곧 입체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모드 헤아리고 계신다(마10:30).[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요3:16)함은 그의 사랑의 한 면이며,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나니라](눅 15:10) 하심도 또 다른 면이다. 참목자는 아혼 아홉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한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눅 15:4-7).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은 그의 행동으로써 개인의 심령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신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실상 개인 각자의 영혼이 인격적으로 그에게 뜨거운 애정이 그를 향하는 것이며 결코 집단적인 열성이란 있을 수 없다. 벳세다못가에 수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었으나 가장 불쌍한 병자,38년 동안 신음하면서 절망에 잠기게 한 영혼을 돌아보셨다(요5:2). 나인성문을 지나실 때, 그는 특별히 외아들을 잃고 울고 가는 한 여인의 정경을 불쌍히 여겨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셨다(눅7:11).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이 혼잡한 중에서도 그는 다만 한번만이라도 만져주기를 애원하는 여인의 떨고 섰는 심령을 불쌍히 여겨 그의 혈루증을 고쳐주셨다(막 5:25).복음서 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화는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나눈자애 넘치는 말씀이다(요4:7).그는 또 어느날 밤,니고데모의 어두운 심령에 한걸음 두걸음 가까이 나아가셨다(요3:1).그는 여리고의 환영군중 가운데서 삭개오라는 세리의 집에서 하룻밤을 쉬셨다(눅19:1).예수를 바라보면 어거스틴의 고백이 생각난다. [그는 우리 중에 사랑할 사람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다는 듯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남달리 사랑합니다.]

(3)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섬김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버지라는 가족적인 개념은 종교의 딱딱한 형식적인 면을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은 오로지 화려한 의식만을 만족하게 여기시는줄로 생각한다(마5:523:23). 그러나 그것은 세상 육신의 아버지로 아들에게 요구하는 방법이 아닌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을 주실리가 없다. 그렇다고 불경스러워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자유로운 마음, 눌리고 강제 당하는 매인 마음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유롭게 그에게 나갈 수 있는 그 심정이 우리에게는 축복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의 의식을 모두 거절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그는 곧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마27:51).의식적인 명문 구성이 아니라도 애원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일정한 기도 형식을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장려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시고 너희가 그 자녀일진대 너희는 무슨 요구든지 그의 앞에 제출할 자격이 있다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7:7이하에 가르치셨다. 만일 하나님께 어떤 일 아뢰기를 꺼린다면 그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바른관계가 유산된 상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신앙의 자연스러움을 나타낼 수 있다. 아버지 앞에서 주저하게 된다면 그는 그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으로 예수는 우리의 종교에 새로운 자유와 어린아이의 직접성과 단순성을 가르쳐 주셨다.

(4)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받는 고통도 의미 있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신다. 옛날에는 (구약을 예로 본다면)사람들은 저들이 받는 고통, 시험,비애 등, 모든 종류의 인간고를 하나님의 진노에서온 형벌,저들의 죄를 책하시는 벌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사실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죄와 실수로 말미암아 실상은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고가 그런 정도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 전율할만큼 끔찍한 생각을 물리치셨다.그는 인간고의 문제를 율법적인 인과보응의 사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에게는 새로운 의미의 고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고통을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어떤 영혼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랑의 한 특수 방법으로 고통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고통을 겪게 하여 그 영혼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이다(이 고통의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자).

고통을 이렇게 해석하거나 가르치시기에만 그치지 않으시고 그 자신이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은 그 아들조차 아끼지 아니하셨다](롬 8:32).왜 그는 아끼지 아니하셨는가? 그것은 예수의 고통으로 말미암아서만 이루실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영광스러운 목적 때문에 예수님은 골고다로 향한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하나님은 그 독생자도 이렇게 대우하셨는데 우리들인들 예외가 되겠는가? 우리의 인간고도 하나님의 어떤 목적을 이루시려는 수단임을 알아야 한다.[나를 인하여 너희가 핍박을 받으면 수단임을 알아야 한다.[나를 인하여 너희가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나니] (마5:11).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7).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고통 문제 해결에 있어서 또 하나 다른 면이 있음을 우리는 배운다. 즉 우리가 받는 그 고통에 하나님께서도 동참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며, 우리가 그의 자녀일진대 이 세상에서 받는 어떤 모양의 고통이라도 그것은 다만 우리의 고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며 너를 해치는 그 무엇은 또한 하나님을 해치는 것이며(그는 참아버지이기 때문에),또 우리가 겪어야 할 어떤 시련의 뜨거운 가마 속에도 그 뜨거움이 비록 일곱배가 더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풀무에 같이 하신다(단3:25).[그들의 환난에 동참하신다](사63:9). 하나님이 인간고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의 최고 실례는 갈보리 십자가이다. 저들이 세운 푸른 언덕 위 십자가를 볼때, 실상 비참한 고통을 겪으신 하나님의 십자가가 하늘에 계신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심중에 있었음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5)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죄와 용서는 새로운 빛 아래 놓여진다. 한편으로 죄는 점점 더 어두워진다. 우주 배후의 힘이 어떤 비인격 법칙민이라면 우리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은 그 법칙을 가지고 위반하는 조가 될 것이며,만일 우주 배후의 힘이 예수님께서 계시하신대로[아버지]라고 하면 우리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은 그의 사랑을 배반하는 죄가 된다. 불변의 냉엄한 법칙을 깨뜨림이 죄라면 사람을 반역하여 깨뜨림은 더 큰 죄가 될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한 자기 죄를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법이다. 나의 죄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기록은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모른다 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법칙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죽음을 당하심만이 아니다.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십자가 상에서 고통을 느끼신다. 정작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니 죄의 뜻은 더욱 심각해진다. 그러므로 이런 견딜 수 없는 죄에 대하여 참으시고 죄를 죄대로 갚지 않으신 것이 곧 용서다. 하나님도 용서하실 수 있을까? 사람들은 예수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었고, 또 거기에 대한 대답이란 항상 시원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예수님의 가르치신대로 부르게 되자 [하나님이 어찌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로 문제는 바뀌어졌다.

탕자의 아버지는 타락한 아들이 돌아올 때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그 아들이 찾아와 머리를 숙이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맨발로 뛰어나가 그 남루한 옷을 입은 걸인생활로 더러워진 때묻은 그의 몸을 곧 껴안았다. 용서하실까?않으실까를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이 허둥지둥 찾아온 그 아들을 곧 맞아주는 이것이 용서이다.

(6)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같이 한 형제라고 예수님은 가르친다.

예수께서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말을 사용한바 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형제사상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형제애를 부르짖던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이 점을 등한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이 신앙이 없이는 형제애를 바르게 주장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에다 하나님의 부성을 심어 주심은 그것으로서 형제애를 법칙으로 세우시려는 것이 아니라 형제애를 부르짖을 수 있는 동기와 힘을 주시려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을 가리켜 [저 사람도 나와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그도 하나님의 자녀다]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적대감정을 버릴 수 있다. [동양인은 동양인이고,서양인은 서양인이다]라는 식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세계에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모든 사람의 차별이 없어지고 우월감이 소멸되는 길,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데에만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만 교회주의란 것이 없어지고 영적 음악을 망치는 모든 부조리가 없어지고, 민족과 민족의 차별이 없어지고, 국제 연합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고상한 이상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거기에서만 달성될 수 있다.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해 주신 이 예수의 교훈을 받아 이 땅의 조호가 다시 이루어질 수 있다. 비로소 하늘로부터 오는 새 예루살렘의 환상이 그 신부 되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부에게 실현될 것이다.

매일 성경

 이사야 63:9-16    선지자의 비견
 마태복음 11:25-30 아버지와 아들
 마가복음 4:35-41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신앙
 마태복음 7:7-11   주께서 주시리라
 누가복음 15:11-24 잃어버린 자에 대한 아버지와 사랑
 마태복음 23:1-12  하나님의 부성과 인간의 형제성
 마태복음 6:9-15   가정기
 

토론을 위한 문제

1.하나님의 부성을 처음으로 가르친 것은 예수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2.하나님의 부성과 무죄한 자들의 고통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3.신약성경은 사람들이 "입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다른가?

4.우리의 사회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부성의 도전을 논하라.



제 10 장 죄와 그 해결

1. 구주 예수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마1:22).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파괴된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여 아주 새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자기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복음서는 한결같이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세계는 심한 상처를 입고 더럽혀진 세계였다. 예수가 바라보는 곳마다 거기에는 악마의 무서운 세력이 움직이며, 그가 관계를 유지해야 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대로 버려둔다면 사람들은 그 악의 힘에 붙잡혀 인간성은 훼손받고 한 강한 원수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버릴 뿐이었다. 그 원수가 무엇인가?그것이 바로 죄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아니될 일이 이곳 저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땅 위에서의 그의 일은 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진 부자관계를 회복함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과제는 현재 두가지다. 첫째, 예수님이 인류의 불치병인 죄에 대하여 어떤 말을 했으며, 또는 어떤 태도를 가지셨는가 하는 점과, 둘째, 이 질병에 대하여 어떤 처방을 가지고 치료하셨던가? 곧 죄를 용서하심으로 처방을 내렸던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그 말의 단수로서 표시되지 않고 복수로 표시되었다. 꼲 [Sin]이 아니라 [Sins]였다는 점을 특히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죄를 설명했으며, 사변적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죄를 다루었다. 가령 죄의 기원 같은 교회적인 문제를 그다지 중요시 하지 않았다. 현대인은 환경 유전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짓게 된다는 사상을 지니고 있지만 복음서에는 그런 기색이 없다. 생명의 파괴를 결코 그 어떤 사건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은 같은 형제로서 서로 도와야 하고 각자의 개인적인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 죄가 어디서 왔는가? 또는 이런 죄를 왜 우주에 용납하고 죄가 어디서 왔는가?또는 이런 죄를 왜 우주에 용납하고 계시느냐?등의 문제를 그는 죄관에서 별로 다루시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고 고심하신 문제의 초점은 그런 이론이나 설명 이상의 큰 문제였다. 즉 더 실제적인 문제로서 죄로 말미암아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멀리 방황하는 아들이 어떻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더욱 중대시했다.

2. 예수님의 죄관

죄의 실존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아버리는 모든 장애물이라고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생각하신 예수님의 뜻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죄는 어떤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유대 교법사들이 가르치는 이상의 것이다. 저들은 말하기를 율법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이 율법에 대한 위반이 곧 죄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깊은 의미에서 말씀하셨다. 그는 랍비들과 같이 의식적인 의를 생각하시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생각하셨다. 이렇게 생각하시므로 예수는 누구보다도 먼저 죄의 내재성(Inwardness of sin)을 말씀하셨다. 산상보훈에서 그는 서기관들과는 달리 죄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생각과 욕심으로 범한다고,또 죄는 육체에 있음과 같이 마음과 정신에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5:2127).

바리새인들은 언제든지 죄를 외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겉으로만 깨긋하고 보기에만 아름답고 율법의 조문에나 맞춰 행동하면 된다는 천박한 생각을 그들은 품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적,정신적인 죄를 가장 큰 죄로 말씀하셨고 이 내재적인 죄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장 엄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죄를 말씀하심에 있어서 문제보다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 마음 곧 그 인격의 중심이 어떠한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을 저 중요시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히나니라](마15:18). 사람의 깊은 중심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다. 죄는 이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둘째, 죄는 사랑하는 마음을 손상하는 것이다. 위에서 마음의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 죄라고 지적했지만 그것은 결국 상대적으로는 옳다 하겠다. 어떤 의미로서는 [너는 율법을 파괴할 수 없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네가 깨뜨림을 받을 수는 있다. 이 경위를 깨닫는 것인 예수님이 보신 바 죄에 대한 진리에 보다 더 가까이 이르는 첫 걸음이다.

죄는 도덕 질서를 손상하지 않는다. 이런 비인격적인 것은 고충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는 사랑을 상해하며 사랑은 죄 때문에 무섭게 고통을 당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함이 몇번이냐?그러나 너는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탕자의 이야기를 상기해보라. 가장 심각한 것은 객지에 유리 걸식하며 방황하는 그 아들의 슬픔이 아니라 그 아들을 내어 보낸 날부터 걱정하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받는 고통이다(눅 15:11).예수님의 가르침은 소요리 문답서에 [하나님의 율법과의 일치성을 겸한 것이다. 율법을 거스림이 죄다]라고 정의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우주의 움직이지 않는 법칙에 대하여 인간의 두뇌로서의 위법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에다 주먹질을 하는 행위이며 사랑의 십자가에 또 한번 주님을 못박는 일이다. 즉 사랑하는 마음에다 상처를 주는 것이 죄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죄를 에누리 한다거나 슬쩍 눈감아 버릴 수는 없다. 예수님 시대의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너무 약하다고 공박도 했다. 그를 [죄인의 친구]라고 한 그 일이 오늘에 와서는 그의 영광이 되었지만 그 때에는 그를 비웃고 비난하는 말이 되었었다. 즉 예수께서 모든 종류의 죄인들과 가까이 접촉하며 지내는 그 태도가 비평가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태도를 보고 비평가들은 죄에 대한 그의 태도가 너무 약하다고 비난했다. 또 이 태도를 예수님 성격의 한 결점이라고도 생각했다(마11:19).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이 상한 사람들을 애무하는 동시에 그는 한편으로 그들을 아프게 하는 모든 악을 몹시 미워하신 사실을 그들은 잊어버렸고,또 분명히 그 마음을 무시했었다.

그는 어그스틴처럼 [아름다운 죄들]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밀톤의 사람은 마술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예수님은 죄를 마술로도 생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시고 인간을 이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죄는 으례히 준엄하게 다루어야 하며 모든 죄는 반드시 그 정체가 들어나고야 말 것이다.하이네는 [물론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실 것이다.왜냐하면 이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라는 노래를 했다. 예수님은 절대로 죄를 가볍게 보시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사랑하지 못하는 행동과 그 모든 부정한 생각을 예수님이 미워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복음서에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불꽃 같은](계1:14) 그리스도의 눈이 죄를 가볍게 보실리 만무하다.가볍게 보셨다면 예수의 도덕의 준엄한 모습을 어디서 찾아볼 것이냐?그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마8:11,눅15:4824),또는 [멸망하는 존재](마 18:14.요3:16)라는 의미로서 말씀하셨다.

결국 그가 죄인인 우리 대신에 죽으신 십자가 죽음이란 참담한 행동으로써 죄에 대한 그의 무자비한 적의를 나타내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가 죄에 대하여 가장 심각하고 준엄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죄의 결과

이제 죄의 결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먼저 죄는 표면으로 나타나는 징계를 받게 된다. 죄와 고통의 문제는 종교 생활에 있어서 가장 영구적인 문제이며 예수는 또한 이 문제에 대한 학설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든지 사람의 말에 주의하시고, 사람의 죄는 반드시 보응을 받는다고 경고하셨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 세계는 도덕적인 세계요 그 중심에는 정의가 좌정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죄의 결과로 벌을 받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영국의 소설가 찰스.킹슬레는[기계의 바퀴가 그 고장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멈추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치신 병자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기 위해](요5:1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오는 이런 외부적인 형벌은 그들의 내적인 결정으로 말미암아 감소될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우선 양심의 결정에 대하여 말해보자.[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 15:21). 이는 그 약한 아들의 양심이 이 고백을 하게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요8:9) 할때에 그 악한 군중에게도 양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더 가해하지 아니하고 모두 흩어졌다. 베드로로 하여금 대성통곡케한 것도 이 양심이었다(마26:75).가롯 유다는 자살로서 그 범죄의 형벌을 덜어 보고저 했으니 이는 양심의 가책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또 죄의 결과는 우리를 노예화시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의 선교의 중심 목적은 [사로 잡힌 자에게 해방을 준다](눅4:18)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되느니라](요8:34).사람이 한번 범죄하게 되면 그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기보다 그 죄의 걸음을 그냥 계속하려 하여 [노우]하기 보다는 의지적으로 그의 종이 되기가 쉽다. 마카스 아우헤리우스는 인간 의지의 노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은 무엇이든지 당신 마음에 간직한 색깔로 그려진다. 마음은 그 기름으로 물들여진다.]

죄인은 비록 그가 노력하기는 할지라도 그 노력으로서 그 죄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죄는 그를 그 죄의 길로 돌아가는 채찍이 되어버린다. 즉 그의 의지는 필경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또 죄의 결과는 그 마음을 굳어지게 한다 .예수님이 헤롯 앞에서 서 계실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눅23:9,빌라도 앞에 섰을 때와 비교하라 요19:33). 그의 침묵을 하나님 아들의 면전에 앉은 헤롯의 정신적 기능위축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굳어짐이라고 한다. 어떤 영혼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된 사실이 아니다. 인간을 어떤 암흑 속으로 몰아 넣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없으리 만큼 죄의 길로 달려간다.

죄는 판단력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며, 계시의 빛을 막아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주 무시하리만치 그 마음이 굳어져 버리는 것이 바로 죄의 보응이다. 미국의 시인 휫티어의 시 한귀를 들어보자.

영원히 자비의 자리에 사랑의 밝은 빛이 비치지만 습관에 매인 너의 발은 이 좋은 자리에 오려해도 올 수 없으리라.

너의 눈이 보기를 거절하고 너의 귀가 하늘의 환영을 못듣나니 너는 하나의 매인 사람 너 자신 어두운 감방에서 신음하누나

죄의 결과는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어지게 한다. 모든 축복 중 가장 귀한 축복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죄는 이 교제를 언제나 방해한다. 그 아버지 집에서 탕자가 받을 흡족한 사랑이 있고, 또 풍성한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아들이 멀리 있는 동안에는 그 아버지 집의 풍성한 축복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어졌기때문이다(눅 15;13).

하나님을 보는 자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다(마5:8).그러나 죄는 이 청결을 짓밟고 그 환상을 끊어 버린다. 죄 지은 사람의 가장 서글픈 운명은 그의 고독이다(눅 15:4). 그 고독이 가장 불행하다는 것은 그의 형제나 집을 떠난 사실보다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이 더 무서운 결과를 그에게 가져왔다는데서 알 수 있다.

또 죄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심는대로 거두리라](갈6:7)한 말씀은 심는 사람만 거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타인은 좋은 일에만 관여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슬픔과 고통과 눈물도 함께 나누게 된다. 한사람의 탐욕으로 가난한 사람은 눈물을 흘리게 되고(눅 20:47),아들의 타락은 반드시 그 아버지에게 고통을 준다(눅 15:11). 때로는 남의 실수 때문에 애매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경우가 있다(마18:6),이것을 우리는 인간 생활의 연대성이라고 말한다.

[우리 하는 일 하나 하나가 다른 사람 마음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 고 테니슨은 노래했다. 타락한 아들은 자기의 비참한 구걸의 생활이 자기 혼자만의 문제이고 다른 사람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먼 지방에 가서 허랑방탕한 그 생활의 악영향은 다른 사람에게도 미치게 되었다고 하겠다. 자기도 그 실수의 값을 받고 또 다른 사람도 받게 된다. 누구보다도 그의 아버지는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세익스피어는 리차드로 하여금 이렇게 부르짖게 했다. [오! 하나님,나의 간곡한 기도가 당신의 진노를 진정시킬 수 없사오면 당신은 그 진노를 내게만 베푸소서,다만 내 한몸에만 당신의 노여움을 나타내소서.]

그러나 그럴수는 없다. 죄의 비극은 항상 다른 사람을 울린다. 그리스도가 시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하나님 자신은 누구 보다도 비통을 겪었음을 우리는 안다. 죄악의 최종적인 결과는 심판을 받는 것이다. 예수의 교훈에서 죄인의 영벌을 선고하는 최후 심판에 대한 것을 될 수 있는대로 빼어 버리려는 노력을 하는 이도 있으나 이런 노력은 그리스도의 생각에 반대되는 것이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중에 강하게 주장되어 있다(마25:,눅 12:). 예수의 종교에서 이런 사상을 빼어 버리는 것은 복음서에 대하여 몰지각한 행동이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항상 회하적으로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그가 이 제목을 말씀하실 때는 언제든지 현세의 심판은 받지 않게 되는 수가 있을지라도 내세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받게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4. 죄를 치료하는 길

예수님은 질병을 다만 진단 하시는데 그치지 않고 그 치료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제 우리는 그 치료에 대한 말을 해보다 그 치료 방법은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목,깨뜨려진 관계의 회복,곧 용서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물론 이는 죄의 형벌을 경감해 주려 함은 아니다.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도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 예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눅 23:43) 하신 말씀은 그 죄를 완전히 지워 버리셨다는 말씀이지만 그는 그 죄 때문에 사형은 받아야 했다. 죄의 값으로 육신의 죽음을 맛보기 전에는 용서 받는 길이 없었다. 용서와 이런 외적인 형벌을 분리할 수는 없다. 용서는 그 용서 받은 사람의 모든 생활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변화는 은총의 결과다. 도대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기만 하면 죄의 결과로의 형벌쯤은 매우 적은 사건이다.그러므로 용서란 것은 본질적으로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용서는 어떠한 것인가? 그는 용서의 영광스러운 현실성을 강조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를 등한시 한다. 어떻게 과거의 사태가 꼭 그대로 회복될 수 있겠느냐고 죄는 두 사이의 관계를 비참하게도 끊어 버렸다. 전날의 화친은 그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탕자의 말을 들어보자. 즉 [나는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소서](눅15:18]했다. 사람들은 빚진자와 같이 자기의 짊어진 채무에 대하여 영원히 또 완전히, 갚을 수 없는 것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그 채무를 이행치 낳아 그 빚 청산이 되는 수도 있다(마18:23이하.눅 7:41이하) 그런 낙망자에게 그리스도는 완전하고도 결정적은 회복의 영광스러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즉 그 탕자가 이제는 [품군]의 하나만으로도 족하다는 심정을 품었지만은 그 아버지는 전날의 그 애정으로 아들을 맞아 들었다(눅 15:20). 채권자는 그 빚진자의 의무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눅 7:42).집행 유예의 기간도 없애 버리고 다만 즉시로 두려움이 가득찬 심연으로 부터 영원한 사랑의 품으로 들어올려 기쁨을 회복하게 하고 몹시 상심하고 떨고 안타까워 못견디는 심령으로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눅 23:43) 이 사죄의 은혜가 깨뜨려진 부자 관계를 회복 시킴에 있어서 사람이 주동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동이시다. 죄인의 편에서 용서의 은헤가 올리가 없고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편으로부터 오는 은사라야 한다. 사람이 서두른다 하여 될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셔야만 비로소 용서의 대은을 받게 되는 법이다. 브라우닝은 [요하네스 아그리콜라]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하나님이 오실 길을 만들라 그의 사랑을 바라기만 하며 그는 자기의 바른 손으로 값을 내셨다.

포도원 품군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곧 해결된다. 용서에는 공적이 문제될리 없고, 다만 은총으로 될뿐이다(마20:1-6). 용서하는 사랑이 없다면 회개라는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까 회개 조차도 하나님의 창조요 인간의 제품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과 사랑본 참회를 일으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 한 후에 일어난 후회도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도리켜 베드로를 보시니...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1) 한대로 그리스도가 그것을 일으켰다. 언제든지 또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이 주동이 되신다. 갈보리 산상에서 이루신 구원의 능력의 비결 하나는 십자가의 광경이 사람의 마음에 죄로 말미암아 느끼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돌이켜 저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게 함에 있다. 참회의 행위를 내포한 사죄 은총의 경험은 곧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제 사죄에 대한 예수님의 중심적 위치를 생각해 보자.그리스도의 활동이 아니면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용서를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는 그 용서를 구체화 시켰다. 예수님을 만나는 죄인들은 그 자신에게 미치는 두 가지 영향을 깨닫게 된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무죄성, 그 결백성이 죄인들의 심령에 불을 붙인다. 그의 거룩함은 거울과 같아서 그 지성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때 그 경험을 했다.[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로써 말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요4:29).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쳐다볼 때 죄인들은 그 품은 바 실망을 쫓아버리고 큰 희망으로 재생하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들어 갔을때,모든 사람에게 멸시받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여러 사람앞에서 부끄러워 했으나 예수님은 그런 문제에는 개의치 않으셨다. 그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인간의 자기 가치를 발견케하여 그 길로 구원에 이르게 했다(눅 19:6-7).예수님을 대면하게 될 때 저들 자신 조차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데 자기들을 믿어주는 위대한 한 어른이 계셔서 그 어른과 함께 어떤 위대한 아름다운 확실한 일을 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 감정으로 말미암아 사라졌던 희망이 소생하고 용서해 주는 사랑의 기적이 다시 새롭게 된다. 예수님의 그들에대한 태도 그것이 그가 지니고 있는 사죄의 은총의 사실임을 믿게 한다. 처음에는 이를 잘 모르나 점점 이 사실이 확실해져서 그로부터 오는 사랑이 인간의 비애와 고통의 심연에 빠졌던 그들을 끌어 올려 비록 그들이 서 있는 그 수치의 자리도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자리로 바뀐다.

다음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그의 사죄 은총과 직접 관게되어 있음을 복음서는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마20:2836:28). 이미 생각한 바와 같이 죄악의 본성을 폭로시키는 그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중심이 어떠함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준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의 세력에 끌리어 십자가로 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이를 선택했다. 즉 자유로이 길을 택하셨다. 이 십자가 죽음의 의의에 대하여 제19장 마지막에서 좀더 생각하자.여기서 우리는 특히 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거기서 예수님의 사랑만 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보며 그 아들의 희생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희생도 그 십자가에 나타났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갈보리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강한 사실이며, 또 그 구원은 이 십자가에서만 이루심을 알린다.[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고후5:19).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사죄 은총의 결과를 말씀하셨다. 사죄 은총을 받은 사람의 생활에는 두 가지 관계가 나타난다. 그는 사랑을 추모하게 한다. 그는 결코 실망하지 아니한다. 사랑은 항상 그에게 임한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옥합을 깨드림은 큰 용서를 받게된 심령이 경험하는 새로운 창조의 사랑의 상징이다(눅 7:37이하). 그 결과는 또한 선을 추모하게 한다. 용서는 한 재생력으로서 사람들의 성격을 새로워지게 한다. 따라서 희망은 소생한다.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삭개오는 즉시로 그 자신이 자유의사로 회개했기 때문에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말슴으로 그 자신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다(눅19:8).베드로로 하여금 위대한 사도가 되기는 그가 대제사장 영문 뜰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한 용서를 받으며 [내 양을 먹이라]는 자비스러운 말씀으로 격려를 받아그 자신이 자의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다시금 내어 맡겼기 때문이었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항상 자유로운 용서는 그저 죄를 크게 덮어주기 때문에 죄인들의 도덕력을 박약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사죄의 은총을 받음에는 언제든지 크게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하며 따라서 사죄은총을 받은 자의 제일 큰 의무는 그의 도덕적 힘을 최대한도로 발휘함에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 몸을 바쳐 사는 사죄은총 받은 자의 생활에 나타나는 신앙의 모습이다. 그것이 우리의 성격을 창조한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정의의 걸음을 걷게한다. 그것이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한다. 그것이 은총 안에서 사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신으로서 영원히 살게한다.

매일 성경

 마가복음  7:14-23   죄의 본질
 누가복음 22:39-44   그리스도가 죄에서 치룬 대가
 마태복음 25:16-31   하나님의 심판
 마가복음  2:1-12    예수 안에서 구현된 용서
 마가복음 15:1-10    용서의 기쁨
 누가복음 19:1-10    용서와 회수
 누가복음  7:36-50   용서받은 자의 사랑
 

토론을 위한 문제

1.오늘의 우리는 연합생활에서나 개인 생활에서 "죄 의식" 을 상실했다는 것에 동으하려 하는가?

2.용서의 '형제면제'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3.신약성경의 "하나님의 진노"라는 어떤 의미인가?

4.십자가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성취하는가?



제 11 장. 병자를 고치심

1. 선한 의사

이 문제를 다루는 데는 두 면이 있다. 복음서에 말한 예수님의 치료 기사 하나를 택하여 그 방법과 그 뜻을 찾아보는 한 면과 또는 복음서 전체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 치유의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2의 것을 택하시고 하자.

첫째,예수의 치료 사업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의 완전한 한 요소를 차지한다. 결코 치료 사업은 그의 교훈과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치료의 기적은 다만 일시적인 동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영혼의 문제와 꼭 같이 그들의 육체의 모든 문제에 해결을 주며,그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저 하신 자기 사명을 강력히 추진시킨 한 결실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구주로서 이러한 일을 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영혼과 육체의 문제는 어느 면으로서든지 서로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으며 언제든지 계속적으로 함께 행동하고 서로 영향을 끼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료 사업은 하나님에게서 받으신 중요한 사명으로 알고 계셨다. 그가 제자들을 파송하여 어떤 사명은 사명으로 알고 계셨다. 그가 제자들을 파송하여 어떤 사명은 감당하도록 분부하실 때의 형편을 다만 그들로 하여금 가르치는 일과 병고치는 일 두가지를 특히 하고 오라고 했다(막 3:15,눅10:9) 예수님의 생애의 사건에서 그가 병고치신 이야기를 제해버리고 나면, 그는 다만 한 인망 있는 선생이요 귀찮으리만치 설교만하는 설교자일 뿐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생애에 이 치료의 사건들을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신비한 힘 즉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은 하신다는 기적의 사실을 강력히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이 모든 치료의 기사가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한 부딪치는 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치료의 사업은 정말 깊고 높은 거룩한 의미를 내포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다만 가르치기나 잘하는 한 스승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의 초자연성을 아시는 길.그것은 그의 치료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고 이것을 만일 모르고 지내거나 여기에 무관심 한다면 그리스도의 중요한 일면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힘있는 일들은 이 치료의 사업이었다는 것을 복음서 기자들은 매우 소중히 다루었다.

2. 그리스도의 동정

예수님의 치료 사업은 흔들리지 않은 사실 중의 사실이다. 우리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곧 그 해석이다. 왜? 또 어떻게 이일을 행하셨나 생각하자. 그 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 방면의 고찰이 가능하다. 즉 그 일을 하신 동기와 그 방법이다. 예수님은 왜 이 치료 사업을 중요시 하셨을까? 또 그의 고치심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동기의 문제

이 문제는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다. 즉 이 일을 하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을 주목케 하려는 신중한 목적에서와 그의 신성을 증명하고 그러하므로 그의 교훈을 좀 더 확실히 깨닫게 하시려 하심에 의의가 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자기에게 주목을 끌게 하는 것이 필요했었다. 즉 이 극적인 모든 사건을 그가 자기 사업 성취에 필요 조건으로 삼으셨다. 그의 지상 사업을 이 세계에 알리는 나팔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이는 그의 당당한 권위, 혹은 권리의 표시인 신임장을 세상에 제시하시는 행위다. 즉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사실적 증거였다. 그 동기는 자기자신을 신임할 수 있게 하는데 있고 이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일으키고자 함에 있다.이 동기에 대하여 좀더 생각하자. 한가지 이상한 일은 이 일이 복음의 증거 자체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주목하게 하고 그의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리고저 하여 그 능력의 일을 했다고 했다. 복음서가 참으로 그렇게 말했는가?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보다도 자기의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고 남에게 칭찬을 받게 될 경우에도 그의 몸을 숨기셨다고 했다. 복음서에 보면 그는 자기의 치료의 이적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시려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8:4,막 8:26,눅 8:56).자기선전의 행동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대체 왜 예수님은 자기의 하신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으며 그 신기한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여 큰 인망을 얻으려 하지 않았는가? 기적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람을 놀라게 함으로써 세계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단번에 거절하셨다. 그것이 바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는 진실로 놀라게 할 수 있는 기적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자 하지 않고 다만 거룩함과 불타는 사랑으로만 걸으셨다. 그러므로 병자들의 병을 고치심에는 그 치료의 이적으로서 자기를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병자와 함께 아파 하시는 바로 그 사랑이 그 동기였다. 이것을 좀더 설명하면 그가 자기의 신적 능력을 가지고 기적을 행함에 있어서 그 능력을 자기 몸에 친히 나타나게 할 수도 있었으나 복음서는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아니! 모든 사람이 그 능력으로서 은혜를 받도록 한 사실을 기록했다. 그는 그의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기도 했다. 처음에 그의 제자들에게 이 능력을 받아가지고 어느 정도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동기는 그의 인망을 높이고저 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런 동기에서 기적을 행하셨다면 그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기적은 신앙을 일으킬 수 없다.[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그런 방법이 신앙을 일으킬 수 없음을 예수님은 철저히 알고 계셨다. 이것이 사실임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으로 확실히 알 수 있다. 신자의 부활 신앙은 결코 예수님의 신비와 놀라움으로 일어남이 아니다. 기적과 논쟁하는 그런 종류의 것으로 기독교를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기는 그의 기적 때문이 아니다. 실상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순수하게 믿는 사람이라야 또한 그 기적도 믿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망을 얻기 위하여 기적을 행했다거나 우리가 결코 그 요술에 미혹되어 그를 믿게되지는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권위있는 행동은 다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보다 깊은 동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서에는 두 가지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모든 상처에 대한 자비심이다. 문둥이가 고름나는 손등에 그의 손을 얹으심은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또한 어린이를 그의 품안에 안으심도 군중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신비스런 인상과 감동을 일으키려고만 했다면 정말 그것은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다만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를 자기 품에 안으셨을 뿐이다. 문둥이의 몸에 손을 얹으심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였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행위의 가장 큰 동기는 언제 어디서든지 다만 그의 자비심,남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었다.

그것은 결코 사람들이 할 수 잇는 값 싼 동정은 아니었다.[동정]이란 라틴어의 뜻은 [함께 괴로워 한다]는 말이다. 문둥이의 괴로움을 자기의 고민으로 삼으시고 함께 괴로워하는 그 마음이 주로 주님의 동정이었다. 땅위에 있는 모든 형제들의 상처를 자기의 상처로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며 그들의 비애를 자기의 비애로 삼음이 예수님의 동정심의 근본이었다. 로마교에서는 [예수님의 다섯개의 상처]를 말하는데 그것은 곧 네 곳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말한다. 그러나 상처는 다섯개만이 아니다. 수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마태는 이사야의 글을 일허게 인용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마 8:17,사53:4).실상 남을 위하는 동정심은 언제든지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권세있는 일을 행하신 다른 동기는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의 세계에는 병이란 용납될 수 없는 존재이다. 병이란 하나님의 계획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그 의지가 병을 당초부터 용납하실 리가 없다. 신을 쫓아내는 병은 하나님의 세계를 어지럽히는 난군이며 이단자다. 하나님의 세계와는 양립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그를 쳐부수고저 했다. 병고치는 이적의 해석에 있어서 이적은 오늘날까지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 예가님에게는 단념적 순응이 있을 수 없다. 그는 결코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을 고칠 수 없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괴롭히시니까요] 같은 말은 할 수 없다. 예수님은 문둥이를 만났을 때 운명에 내어 맡기는 단념을 하지 않았다. 어린이의 울음을 못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병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흑암속에서 예수님은 결코 그저 복종을 권함으로써 만능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는 언제든지 그런 흑암과 싸우시는 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하늘에 깊은 하나님께로 부터 보냄을 받아 오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세계에 있는 이 모든 해악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어디까지라도 그것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예수님은 자기의 사업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업을 방해하는 사람의 왕국 역사를 파괴하기 위하여 이 치료 방법을 시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다만 사귀병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병도 다 사탄의 장난으로 되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악령의 사자로 인하여 모든 흉악한 일이 발생한다는 생각했다.그러므로 어느 곳에서든지 고침을 받는 것은 그 병을 일으킨 악령 하나가 쫓김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로 말미암아 모든 병자가 나음을 받게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은 곧 악령과 흑암과 사탄 왕국의 그 기초가 흔들려 무너지고 선과 빛과 하나님의 왕국이 새로이 세워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셨나니라](눅 11:20). 그리고 그가 보낸 70제자들이 신비한 치료 사업을 하고 돌아와서 경과를 보고할 때 예수님도 기뻐하여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10:18).그가 가까왔나니라]한 그의 교훈의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이 왜 병을 고치셨는가 하는 점은 위에서 고찰했다 우리는 이제[왜]에서 [어떻게]즉 그 치료 방법을 생각하자.그는 과연 병을 어떻게 고치셨는가?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그의 무죄성과 도덕적 완전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모든 일은 결코 그것이 마술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일은 모두 한 도덕적인 성과에서 된 것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법칙을 그것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하는 점에서 생각하기 쉽다. 죄악 세력을 공경하는 노예성과 불가피의 제한성을 가진 우리 같은 인간에게는 법칙이란 보장할 수 없는 한낱 향기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와 같지 않고 초월한 분이라면 제한된 노에성과 제한성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절대적인 결저으로 깨끗하고 무죄하신 이가 어느날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분이 나타난 세게는 분명히 한 새로운 미지수에서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그 추측할 수 없이 깨긋하신 그 이는 역시 그 능력에 있어서도 측량할 수 없는 위력을 나타낼 것이 아닌가?

나의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나는 열사람의 능력을 가졌다.

그 분은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인격의 힘이 그의 도덕적 순결에 직접적으로 정비례 한다고 하면 절대적인 순결은 다른 인격을 구원하는 절대적인 능력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런 순결하신 이를 상상으로 원했지만 사실 우리 역사상에 그런 분이 나타났다. 즉 나사렛 예수는 미증유의 능력의사실을 그의 순결로서 보여 주었다. 그가 위대한 능력을 나타냈다고 하여 별로 놀랄 것은 없다. 오히려 그가 그런 능력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놀랄만하다. 그 모든 능력의 사실은 모두 그의 인격의 정상적인 표현이며 그의 도덕적,독보적 탁월성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 능력의 가장 높은 예는 그의 부활이다. 예수를 친히 접하여 그 인격의 내용을 숙지한 초대 교우들은 부활 같은 초자연적 사건이 문제가 안될 정도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즉 그들은 그가 도덕적 완전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병이나 죽음 같은 것도 그에게 순복하고야 말 것을 알았다(이점에 대하여는 행2:42를 보라).전무후무의 죄 없는 인격 예수님이 그 위대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만 있다면 그가 하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

병고치는 그의 이적은 그의 무죄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그의 무죄성은 하나님을 믿던 그의 신앙으로 말미암음이었다. [우리는 왜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만화산 아래서 사귀 들린 한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 아이를 고쳐서 돌려 보내신 후 이렇게 물었다. 예수님은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마17:20)했다.

예수님은 아이를 고쳤지만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참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고 있었다. 그 확신의 문이 활짝 열리자 하나님의 능력은 쏟아진 것이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예수님의 생애는 이 말씀대로 살아가신 결과를 우리가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능력 있는 일은 곧 그 아버지의 하나님을 믿는 아들의 신앙에 대한 그 아버지의 응답이다. 그러나 그의 무죄성과 그의 신앙만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대한 사람의 신앙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이 병자 고치시기를 주저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에게 어떤 어두운 그림자가 질때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앓는 사람은 여전히 앓고,불구자는 여전히 불구자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그것은 병자들이 예수님에게로 부터 아무 것도 받고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동네는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의 혜택을 입어보지 못한 곳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이런 불신의 나사렛 동네에서는 아무 일을 하시지 않았다고 복음서 기자는 말한다(마 13:58).

어떤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그는 먼저 말씀으로서 그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우쳐 그들의 신앙에 불을 붙여 주셨다. 병자들의 상처를 만지고 그 불구된 곳을 만지심도(막 7:32) 그들로 하여금 먼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일으키고저 함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 자신에게서 예수님을 믿는 마음이 생기게 될 때 그들은 고침을 받는다. 예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털끝만한 의심도 가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단순하게 믿는 신앙을 보여 주는 일이다(막10:46)우리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신앙을 주시옵소서]그렇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치료의 능력을 말함에 있어서 한가지 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무엇이든지 그를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일은 그 능력으로 되어졌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친히 일하시는 것을 나타냄이다. 이 성령 활동의 축복을 받은 제자들도 그와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요한복음의 위대한 성구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없이 주심이라](요3:34)한 말이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능력을 받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줄곧 은혜를 베푸히던 예수님의 사실은 우리의 한정된 필요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한정의 능력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이 땅위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인간의 비극을 처리해 주시는 것 즉 은총의 활동이 나타난다.

이 땅위에는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일 이외의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곤궁과 비극은 우리를 실망케하고 넘어지게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그 생명은 우리에게 승리를 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일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매일 성경

 마태복음 8:10-17  자비의 전형적 행위
 마가복음 1:23-28  귀신들의 쫓겨남
 마가복음 1:40-45  문둥이가 고침 받음
 마가복음 10:46-52 소경 바디매오
 요한복음 11:35-45 나사로의 소생
 마태복음 17:14-21 믿음의 필연성
 누가복음 11:14-23 악한 나라의 패배
 

토론을 위한 문제

1.예수의 병고치신 동기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2.예수는 자기 교회로 하여금 병 고침 사역을 계속하게 하셨는가?

3.병고침 과정에서 믿음의 기능은 어떠한가?

4."기적"(혹은 이적)이란 말을 어떤 뜻으로 이해하는가?



제 12 장. 예수님의 기도생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예수

먼저 누가 복음의 한 구절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중 하나가[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눅11:1)하고 말씀드렸다. 물론 이전에 제자들이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었다거나 그제서야 처음 기도 생활을 시작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아마도 그들 모두가,혹은 거의 모두가 이미 기도할줄 아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경건하고 소박한 가정에서 자라난 베드로나 안드레, 야고보,요한은 틀림없이 어머니 무릎에서부터 기도하는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누가 복음에 나타나 있는 이 요청이 이루어진 때의 특수상황이다. 이 요청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시다가 기도를 막 끝내신 때였다. 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와 자기들 기도의 차이를 종종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즉 예수님의 기도가 매우 확신에 차 있으며 강력하고 실제적인 기도였음에 비해 그들의 기도는 너무나 나약하고 더듬거리며 자신이 없는 기도였다.또한 예수님의 기도는 포괄적이고 하나님에 의하여 감동된 것이며, 설득력 있는 기도였고, 그들의 기도는 종잡을 수 없고 충동적이며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감당할 수 없는 경외감과 함께 그 차이가 그들에게 절실히 느껴졌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도라고 한다면 그들은 아직 기도의 기초 원리들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벼란간 느끼게 되었다. 저녁 예배가 끝나자 그들은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간청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려 하시지 않은 것처럼 기도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논증하려 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논증으로 증명될 수 있는분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순히 존재하시는 분이며, 신앙의 시작과 끝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논증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며, 영혼의 생태적인 호흡인 것이다.기도는 인간의 본능적인 성향이며 바로 인간의 구조 속에 조성된 것이다. 기도의 원천은 논증이 미치는 영역 저 아래 깊은 곳에 놓여 있다. 또한 기도의 원천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과의 교제를 위해 만드신 인간의 마음 속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찾기까지는 언제나 불안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문제에 대해서 결코 논증하려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의 기도 생활이 어떤 의미에서 반발할 수 없는 논증이 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어떤 제자라도 예컨대 도마 같은 제자가 기도에 대해서 의심을 가진적이 있었다면 예수의 강력한 무엇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알고 삶의 심오한 것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찰력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제자라면 자신의 불확실함 보다는 예수님의 확실함을 신뢰하는 것이 더 낫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며, 자신의 의심보다는 예수님의 확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모든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것은 극히 귀중한 원리이며 더우기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 비중이 크다. 그리스도의 빛나는 기도생활 앞에서 의심은 사라지고 해소되어 버린다. 예수님께서 기도의 생활을 하셨다는 사실이 기도 자체제 대한 더할 나위 없는 논증이 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기도 문제에 대해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교훈과 함께 몸소 실천하심으로 가르치셨다는 사실이다. 즉 기도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의도적인 교훈을 주신 반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 자신의 생활로 본을 보이셨다. 그런데 이 두가지 면을 서로 분리시켜 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하다. 모든 점에 있어서 이 두가지 면은 상호 관련되어 있다. 기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은 그 자신의 은밀한 기도생활에서 나온 열매이며 그의 기도생활은 단순히 그 교훈을 행동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두가지 면을 동등하게 그리고 구별없이 취급해야 할 것이다.

주의를 요하는 세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로 기도는 예수님께서 그의 일상 생활에 항상 지니고 계시던 그의 일과였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위기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신 사실을 볼 수 있다. 세째로 [주기도문]는 여러가지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즉 하나님과의 교통은 물론 간구도 포함하고 있으며, 감사는 물론 남을 위한 중보 기도도 포함하고 있다.

2. 하나님을 뵙는 생활

기도생활은 예수님의 일과로써 그가 일상 생활에서 항상 지나고 계시던 일면이었다. 이 사실에 대한 증거는 모든 복음서들의 거의 매 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온 세상이 아직 잠든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시기 위해 일어나셨고,그의 영혼이 지치도록 쉴새 없는 고된 하루가 끝난 후에 하나님과 함께 온 밤을 지새우셨다(막 6:46). 또한 무리가 그에게 몰려와 그의 조용한 것을 방해하며 그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아우성일 때 예수님께서는 잠시나마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붙잡기 위해 그의 마음과 생각을 하늘로 향하셨다.(막 7:34).이러한 사실이 각 복음서의 매 장마다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생활 대부분이 열 두제자는 물론 가장 가까왔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까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한 것이었고, 따라서 어느 복음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덧붙여 생각해 볼 때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란 단순히 그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였으며, 바로 그의 존재의 호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사실은 우리 인간들의 기도를 방해하고 질식시키는 요소들이 그리스도 앞에서는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예컨대,예수님의 기도생활은 결코 기분에 좌우되지 않았다.물론 예수께서도 감정의 변화를 겪으셨다. 예수님은 결코 감정 없는 금욕주의자(stoic)는 아니었다. 예수님은 기쁨과 슬픔,웃음고,눈물,황홀한 기쁨이나 피로에 지치는 일도 겪으셨다. 그러나 그의 온 마음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마치 지남침이 북쪽을 가리키듯 언제나 기도로 향하셨다. 기도는 천지간에 그가 가장 사랑했던 그분과의 교통을 의미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에 그와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셨으며, 밤이나 낮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사랑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드리셨다. 감정에 움직이는 기도는 생활의 실패를 초래한다. 기도생활의 실패는 예수님을 본받지 않은데서 초래된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번도 실패가 없었으며, 감정이나 환경에 좌우되지 않았다. 즉 기도의 실패는 사랑의 붕괴를 나타내는 징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사랑을 바치라고 하신다.

보통 기도생활을 질식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는 사람들의 분주함이다. 매일 매일이 할 일들로 가득차서 기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럴 경우 종종 일 그 자체가 기도라든지 혹은 성실기도 중 하나이며,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이 밀려나는 것쯤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등의 변명을 구실로 내 세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라. 우리의 나날이 바쁘고 할 일이 많은 것처럼 예수님의 나날은 더욱 그러했다. 마가복음의 처음 몇장을 읽어보라.거기서 예수께서 그 사역 기간중 보내신 전형적인 나날,즉 매우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나날의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연구해 볼 때, 어떻게 한가지 일이 끝나면 또 한가지 일이 쌓이며, 병든 자와 상한 죄인들이 어떻게 밤늦게 그에게 나아와서 모두 도움을 받고 떠나갔는가를 살펴 볼때, 과중한 힘의 사용과 소모로 그의 힘이 그에게서 모두 빠져 나가는 것을 거의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된 날일수록 예수께서는 더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셨다. 그 앞에는 구원해야 할 세상이 있었고, 그 혼자만이 구원자가 되실 것이었다. 인간의 사상과 도덕에 있어서 철저한 혁명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혁명의 도구로는 그 자신의 몸과 영혼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꾼(toiler)이었던 그는 또한 시간마다 하나님을 뵙는 일에 있어서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모범이 되셨다. 일 자체가 기도란 변명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면 비록 그것이 조금도 틀림없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로 하여금 기도를 대신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결코 찬성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명령과 그 실천의 요점은 아무 것도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이것이다. 사람의 생활이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문을 닫고 무릎을 꿇을 시간을 만들어야 하며, 또한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종종 기도를 방해하는 또 다른 요소는 인간의 조급함이다. 그들은 첫번째 노크에 문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이 열리지 않을 때는 문두드기를 그치고 돌아서 버린다. 예수님의 경우는 이것과 얼마나 다른가!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하고 있다(히5:7).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 뜻 만은 분명히 나타나 있다. 즉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의 마음과 뜻과 혼의 전힘을 기우리는 투쟁적이고 심각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 밤중에 이웃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 관한 위대한 비유에서 비쳐나오는 것과 꼭같은 진리이다(눅11:5이하).예수께서는 그를[염치없는 자](5절)라고 부르고 있으나 바로 그 다음에서 그의 염치없음을 칭찬하고 계신다. 사실상 그는 [그러한 것이 바로 기도의 정신]이라고 말씀하신다. [거절하지 못하게 하라! 다시 두드리라! 하늘 의 문을 두드리라!] 물론 예수께서 하나님이 주시기 싫어 하신다거나 그의자녀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인색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뜻 하신 바는 마음 내키지 않는 냉담한 기도는 무익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이며, 하나님의 응답은 때때로 인간의 극성스러움이 그의 진지함을 증명하는 때라야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나아와 그로 하여금 거절하지 못하도록 간청하는 사람들 즉 떠나기를 거절했다 수로보니게 여인(막 7:25이하).어떠한 위협과 제지에도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외침을 그치지 않았던 길가의 소경 바디매오(막10:46),길이 막힌 것을 알고도 실망하여 떠나지 않고 지붕을 뜯었던 사람들(막2:4이하)에 대해 예수께서 항상 특별한 사랑을 가지셨던 것은 여기에 하나님께 통할 수 있는 바로 그 정신이 있었고 참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조급함은 기도에 있어서 금물이다.

끝으로 도덕적 난제(difficulties)들이 때때로 인간의 기도를 저해한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우리 자신의 생활속에 우리가 직면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어떤 도덕적 결정이 미해결로 남아 있게 될 경우 필연적으로 약화되며, 비현실적으로 되어간다. 온전한 도덕적 순결의 배경은 기도의 첫째 가는 요소이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라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전기학자는 자동적으로 접촉을 단절하여 전류를 끊는다는 뜻으로 절연체라는 물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죄는 하나님과의 접촉을 단절하는 절연체이다.시편 기자는[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편66:18)라고 말하고 있다.이것이 기도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의 근원이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명백히 이것이 기도를 저해하는 요소라 되지 못했다.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당하셨으나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죄의 그림자에서부터 깨끗하게 지키셨다.마음의 순결은 하나님을 본다. 그리스도의 비교할 수 없는 순결이 항상 끊임없이 하나님을 뵈었다. 아무 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그리스도의 접촉을 끊을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기도를 방해하고 질식시키는 것들이 전혀 그리스도를 지배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기도는 그가 일상 생활에서 항상 지니고 계시던 면이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첫번째 중대한 사실은 이것이다. 이제 그 두번째로 넘어가기로 하자.

3. 기도와 위기

예수님은 그의 생애중 중대한 위기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어느날 그의 일생 사업에의 갑작스런 부름이 있었다. 누가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눅 3:21)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사명(vocation) 에 관해 기도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최초의 사도들을 선택할 결정의 때가 왔다. 누가는 그 결정이 내려지기 전날 밤을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눅 6:12)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가르침(guidance)를 받기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하루는 열두 사도가 전혀 나올 가망이 없어보이는 귀신들린 자의 아주 어려운 경우를 만나 모두가 좌절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망없는 것으로 포기하고 그 일을 예수님께 맡겼을 때 치유의 역사가 있어서 그 악령이 쫓겨나게 되었다. 그후에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라고 물었다. 그 대답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였다. 여기에서 그는 능력있는 이적을 위한 힘을 받기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 은밀한 곳에 계실 때 어둠의 권세와 그 때가 닥쳐와 하나님의 길을 저버리려는 유혹이 극심해졌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께서 괴로움 중에 있어 기도하셨다](눅22:44)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험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보리에서 못박히시던 때 그 고통이 거의 끝나가고 모든 힘이 빠져나가며 요단강물이 그의 발치에서 넘길거렸을 때 예수님게서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눅23:46).

여기에서 기도하면서 죽으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생애의 모든 중대한 위기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까지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셨다.

여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최초의 추종자들과 그 밖에 다른 모든 추종자들에게 영원한 표본이 되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이겨 극복해 나가신 이러한 위기들은 모든 인간들에게도 닥아올 것들이기 때문이다. 참된 제자라면 그의 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생의 사업을 시작할 때에나 생에 있어서 중대한 결정의 순간에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사업을 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유혹이 그를 공격할 때 승리하기 위해,그의 생애에 밤(죽음)이 닥칠 때에,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리스도와 같이 기도에 깊이 파묻혀 있는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4. 기도의 제요소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대한 복음서의 묘사가 보여 주는 셋째번 중대한 사실을 살피기로 하자. 주님께서 하신 기도들은 그 속에 여러가지 다른 요소들, 즉 영교,감사,간구,중보 등을 가지고 있었다.

영교 : 가끔 예수님께서는 그가 필요로 하고 있는 어떤 은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향하셨다. 누가는 그러한 경우의 하나를 묘사하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셨다](눅 9:29)고 기록하고 있다.이러한 것이 영교의 기도이다. 그 때에는 마음과 마음이 맞으며 변화산에 있던 예수님의 영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과 말씀하셨으며, 그 완전한 친교의 시간이 너무 깊고 부요하며 귀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광채와 기이함을 얼굴에 지닌 채 마치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는 얼굴로 나타나셨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은, 단순히 기도를 하나님께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에 대해(우리에게 주는)경고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인간 사이의 우정을 단순히 편리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며, 도움을 바랄 때만 친구에게 접근하고 그 밖에 다른 때에는 전혀 그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이런 물질적 이익만을 바라는 관계에서는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근거 위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전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요청할 것이 없는 때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은사를 바라서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고 그 앞에 나아가게 하신다.이것이 영교가 맺어지는 기도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이러한 길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만나 주시며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 속에 뚫고 들어오는 복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에서 사람은 그 전생애가 변화산에서 기도하시던 그리스도와 같이 하늘의 광채를 지니고 변화하게 된다.

감사 : 또 다른 하나의 요소는 감사이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감사로 가득찬 기도였다. 때때로 예수님으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했던 것을 찬양과 감사였다.종종 기도의 특징을 이루는 불평이나,항변이나,투덜대는 어조를 예수님의 기도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넘쳐 흘렸던 것은 언제나 그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이었다. 그리고 햇빛처럼 밝은 생활만이 그의 입술로 하여금 감사의 외침을 말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생활에 어두움이 덮혔던 때에도 그의 감사는 식어지지 않았다. 그의 부서질 몸의 상징인 부서진 떡을 취하신 후 그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눅 22:19).그는 잔을 취하신 후 그 잔 속에서 자신의 피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눅 22:17).그는 다락방에서 부터 겟세마네 땀과 고통속으로 찬송하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나아갔다(막 14:26).밝을 때나 어두울 때나 예수님의 입에서는 찬양과 기도가 그치지 않았으며,십자가 마저도 이를 침묵케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기도의 또 다른 요소는 간구이다. 우리가 이미 상본대로 하나님께 은사들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주님의 기도 생활의 전부가 아니었으며,주요 부분 조차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 방향의 극단으로 흘러서 이러한 간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에 와서 특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명확하게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초보적이고 유치한 형태의 기도이므로 성숙한 신자의 신앙 속에서는 찾아 볼 수 없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간구를 깎아 내리려는 위험한 경향을 오늘날 소위 진실하다는 기독교인 가운데서 조차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단호히 부정해야 한다. 간구의 유치한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유익하다는 생각은 다음의 분명한 사실에 부딪칠 때 산산조각이 난다. 즉 예수님께서는 결코 간구를 유치한 것으로 내어 버리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간구를 장려하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간구기도를 활용할 것을 권고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첫 두마디[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눅11:2)에서 이 사실을 아주 못박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참으로 그의 자녀라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명확하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간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 수가 없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간구는 그리스도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제일의 조건인 [당신의 듯이 이루어지이다](마6:10)에 항상 지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열망하는 것을 하나님의 지혜는 거절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강조하려는 주안점은 간구기도를 깎아 내리려는 경향은 첫째로 믿음의 결핍을 표시한다는 사실이다. 이 경향의 근원에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자유로우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속박되어 있으며 어느 정도 그 자신의 세계 속에 사로 잡혀 포로라는 사상이 잠재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자유로우시며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항상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것이며 그 요구를 하나님의 보좌에 바로 직고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기도에는 중보적인 기도가 많이 들어있다.그는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막10:16).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도 그으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눅23:34).그는 그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요12:9). 그는 유다를 위해 기도 하셨다.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얼마나 무섭게 기도로 씨름하셨는가는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만이 아신다. 어느날 제자들과 계실 때에 외쳐 말씀하시기를 [시몬아,시몬아, 보라,사탄이 밀까부르듯 너희를 유혹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눅22:31-32)라고 하셨다. 또한 이러한 중보기도의 영원한 팔이 그를 받치고 지탱하고 있음을 안 것이 베드로에게 어떤 강력한 힘이 되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

우리의 추하고 한 없는 범과가 우리와 함께 자라나고 우리의 호흡과 함께 시작하였을 지라도 영원한 중보의 팔을 드소서 예수, 가장 인간이셨을 때 가장 신성하셨던 분이여!

또한 꼭같은 중보의 제사장직의 예수님에 의해 모든 제자들에게 위임되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생활 연구에서 맺어지는 실제적인 결론을 기도는 모든 참 종교의 심장이 되어야 하며 모든 최선의 삶,그리고 고상한 삶의 동력과 추진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순례자들이 [유혹의 나라를 지날 때에 [손과 시선을 높이 들고 높이 계신 분에게 말하고 있는 듯한 무릎 꿇은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가까이 가보았으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말을 끝낼 때까지 그들은 조용히 있었다. 그러자 말을 끝낸 후 그 사람은 일어서서 천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남들이 멈추거나 넘어지는 곳에서 걸어가거나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은 [견인씨](Mr.Standfast)처럼 자주 무릎을 꿇고 위에 계신 분께 열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다. 승리의 비결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기도하는 방법을 습득한 사람이다. 그들은 강한 데서 더 강한 데로 나아가며 모두 시온에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를 뵙는다.

매일 성경

 마가복음  1:35-38  기도하시는 예수
 마태복음  6:5-8    진실한 기도
 누가복음 11:5-13   끊임없이 계속하는 기도
 누가복음 18:1-8    하나님께 통하는 기도
 누가복음 18:9-14   최선의 기도
 누가복음 22:31-34  베드로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기도
 

토론을 위한 문제

1.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처럼 예수님께도 기도를 드려야 하는가?

2.당신은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한 기도를 옳게 여기는가?

3.응답되지 않는 기도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답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4.무엇이 우리에게 적당한가를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께서 더 잘 아신다면 기도는 무엇 때문에 드려야 하는가?



제 13 장. 위대한 신앙고백

1. 전환점

가이사랴 빌립보의 사건은 복음서에 있어 그 분수령을 이룬다. 여기에서부터 그 흐름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그를 왕좌에 앉히기라도 할 것 같았던 대중적인 인기는 사라지고 이제 조류는 시자가를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둘러싸고 있던 밝은 햇살을 사라져 어두워지고 대가는 찌는 듯이 더웠으며, 다가오는 폭풍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갈채를 보내던 목소리들이 약해져가고 더욱 불길한 어조가 들려왔다.예수께서는 가이사랴에서 말하자면 분기점에 서 계셨다. 그것은 마치 뒤로는 그가 지나왔던 모든 길이 돌아다 보이며, 앞으로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더웁고 험악한 길이 보이는 언덕 마루와 같았다. 예수님은 행복했던 때의 잔조가 아직 머물고 있는 곳을 향해 일별하신 후 돌아서서 어두운 그늘을 향해 걸어가셨다. 이제 그의 길은 갈보리 쪽으로 향해졌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산 기슭 근처 요단강의 근원이 시작되는 먼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멀고 한적한 지방에서 제자들하고만 계셨을 때 예수님은 드디어 제자들에게 그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던지셨다.[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3 이하,막 8:27 이하 눅 9:18이하).

2. 메시야 신분의 유보

제자들이나 그밖의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위와 인격에 대해 어떤 의견들을 가지고 있었든지 간에 예수님 자신의 마음속에는 그의 사역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는 여하한 의심의 그림자도 지나간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더욱 깊이 들어가서는 그 혼자만이 독특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이 지식은 그의 세가지 시험 사건 배후에 있었떤 지식이었다. 이 사실을 떠나서는 광야에서 있었던 사건을 전혀 설명할 수가 없어진다. 확실히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 지식이 그에게 있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 신분과 하나님 아들이라는 의식이 최초로 예수님의 영혼에 떠올랐던 것은 그가 세례를 받으실 때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나사렛에서의 전 침묵기간을 통해 점차로 형성되었으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사건은 그 자신의 본성과 직문에 대한 갑작스런 깨달음이 아니라 위로부터 권능을 받은 것과 오랫동안 점차로 발견해 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인침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그럴듯하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기간중 그가 철저한 확신을 가지고 그 자신이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되신 사실을 알지 못했던 때는 한 순간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이사랴에서 이 일이 있기까지는 그 지식이 대부분 가리워 숨겨져 있었다. 어떤 의미의 유보와 은폐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그 사실을 지붕 위에 올라가서 외치지는 않으셨다. 그가 고쳐주신 병자들에게 그는 병 나은 사실을 널리 퍼뜨리는 것을 금하셨다(마8:49:30 막 5:43).예수님의 권능을 감지하고 그 신분을 추측한 후 이를 큰 소리로 외쳐 말했던 악령들에게 예수님은 잠잠할 것을 명하셨다(막1;24-25).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질문을 피하시고 그가 하시는 일들을 가리켜 보이셨다.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즉 요한에게는 충분히 사실을 드러내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지 않는 대답을 덧붙여 말씀하셨다(마11:2 이하). 예수니믄 같은 목적으로 수수께끼와 같은 [인자]라는 말을 일부러 택하여 즐겨 사용하셨다. 이 칭호는 영적인 심령에게는, 그리고 그들에게만 예수님의 메시야적 품격에 대한 암시를 주는 연상들(특히 다니엘 7:13)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연상들이 전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다만 "들을 귀"를 가진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 사건이 있었던 그날이 사실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던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경계하사 지기가 그리스도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다(마16:20).혹자는 이것을 설명하여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낮추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가리우셨도다 인간의 모습으로 땅위에 거하시나니 그의 위엄이 숨겨졌도다 라고 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유보하셨는가?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마음이 의심으로 번민하셨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가 방금 살펴 본 바대로 이러한 답변은 고려대상에서 제외된다. 아마도 두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로 유대인들이 수백년동안 꿈꾸어오던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금의 메시야와는 매우 달랐다. 메시야에 대한 대중적 기대에는 정치적 요소와 민족주의적 요소가 가득했다. 그 미세야는 오셔서 그의 나라를 티끌에서부터 일으키실 것이었다. 그는 힘으로 다윗의 위를 회복하실 것이었다. 그는 철장으로 이방을 부숴뜨릴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희망으로 타올랐으며,이제 필요한 것은 싯뻘건 잿불을 부채질하여 타오르게 할 [내가 메시야다'라고 하는 사람의 출현 뿐이었다. 실제로 과거에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났을 때는 이와 같았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만일 처음부터 그의 신분은 내세우는 길을 택했더면 틀림없이 다시 한번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백성들이 와서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그들의 민족적인 바램과 현세적인 욕망을 따라 왕으로 삼으려는 위험(요6:15)이 결코 멀리 있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공공연히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선포하시기 전에 먼저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영화시켜야만 했다. 예수님은 수세기동안 부착되어 온 정치적 첨가물들을 제거 하셔야만 했다. 특히 예수님은 메시야 사상 속에 수난이 포함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셔야만 했다. 메시야의 수난 사상은 예수님 시대 사람들의 생각에는 전혀 낯선 것이었다. 이것이 메시야 신분 유보의 첫번째 이유였다. 예수께서는 첫번째 목표가 사람들을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것이어야 할 것을 알았다.이것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메시야 신분의 선포가 오해만을 낳게되며 전혀 예수님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열렬한 현세적 희망,따라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희망만을 자극할 뿐이라는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 침묵하신 두번째 이유는 [그 이유는 그의 메시야 신분보다는 오히려 그가 하나님 아들이신 신분과 관계된]가장 위대한 진리들은 말과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생활과 사랑으로만 계시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느날 예수께서 성전의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실 때 동족의 한 무리가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 여든 밝히 말하시오]라고 궁금증을 토로했다. 그러나 삶의 가장 중요한 일들이 그런 식으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여러분은 명예나 아름다움 또는 사랑이 무엇인지 "명백히 말할 수" 있겠는가?여러분은 저녁 놀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위대한 교향복의 아름다움과 신비의 마력을 간결한 한 구절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참으로 위대한 감동적인 체험이나 발견들 중에 말로써 명백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그런 식으로 말해질 수 있기를 기대하겠는가? 인간의 마음속에 확신을 낳게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다. 그러나 바람소리가 들리는 곳에 바람이 불듯이 예수님과 함께 살며 그르 띵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본성과 아울러 그를 누구라고 불러야 할것인지 배워 알게 마련이다.

3. 가장 중대한 질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 일이 있었던 날,군중들을 멀리 뒤에 두고 열두 제자와만 함께 계셨을 때 예수께서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유보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느끼셨다. 매우 갑작스럽게 그는 제자들에게 가장 위대한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삶의 얼마큼 깊이 실제적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는 [토마스 칼라일]의 유명한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어느날,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온 집안이 침울하고 [칼라일]자신의 마음 역시 괴로웠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말씀을 읽어주었다(요14:1이하).그러자 [칼라일]이 갑자기 외쳤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당신 역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 범인보다 무얼 더 잘 알 수 있겠습니까?] 그때까지 [칼라일]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신]성품에 관한 질문인 [가이사랴]에서의 질문을 애매하고 먼,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갑자기 삶의 무거운 압력에 눌리게 되자 그는 그 질문이야 말로 온 세상보다 더 중대한 것임을, 즉 그에게 있어서는 희망, 마음의 평화, 위안 등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과 권리에 관한 이 질문과 밀착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가장 중대한 질문이다.

복음서들은 왜 예수께서 이 특별한 시기를 택하셔서 질문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닥아 올 일을 말해주어야 한 은밀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마지막까지 시험하고 연단하시려 했는데 그 일이 더 이상 지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치욕적인 죽음이 그에게 신속히 닥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하셨다(마16:21,막8:1,눅9:22). 이 사실을 말해주면 제자들의 충성 역시 끝나게 되지나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제자들 역시 그에게 등을 돌려버리게 되고 그의 수고가 헛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예수께서는 당연히 가질만 했다. 모든 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어느 정도까지 자랐는가에 달려 있었다. 만일 그들의 신앙이 약했다면, 아직까지 머뭇거리며, 희미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려 했던 내용이 주는 충격은 틀림없이 그들의 약한 믿음을 끝장 내버렸을 것이다.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도 그 순간은 제자들에게 못지 않게 갈림길이 되는 순간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일반적인 질문을 던지시는 것으로 시작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어쨌든 대답하기에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도처에서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각 자기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여러 의견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벼라별 소문과 의견이 떠돌고 있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저 예수에 대한 소문 뿐 아니라 예수에 대해 굉장한 사실들을 추측해서 말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온 것이 아닌가고 생각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나 다른 어떤 선지자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바꾸어 말한다면 예수의 정확한 신분에 대해서는 그들의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어떤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에 있어서는 모든 의견이 일치했다. 이들에 의해 예수님의 지위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들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오늘날 다시 한번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 예수님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파피니(Papini)]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시인을 발견한다. [부르스 바톤(Bruce Barton)]은 행동의 사람(the Man of action)을 발견한다. [미들턴 머리(Middleton Murry)]는 신비주의자 (the Mystic)를 발견한다. 정견이 없는 사람들은 곧 잘 예수님을 성자들의 귀감으로, 또한 모든 도덕적 지도자들의 영원한 머리로 높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죤 스츄어트 밀]은 아직까지 추상적인 도덕률을 구체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권하시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더 좋은 예는 찹아보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로 불렀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전시대를 통해 영웅들과 성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예수께서 어떠한 계열에 속한 한 사람이란 것을 의미했다. 즉 이 말은 그보다 앞선 자와 그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의미 했으며,비록 그가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고 해도 다만 그와 비교할 마난 수준의 무리 중에서 제일이란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신약의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보다 앞선 자도 없으며, 비교하거나 필적할 만한 존재도 없는,독특한 존재로 말씀 하셨다(그 예로 마11:2710:3724:35,요10:3014:6). [판테온]에 플라톤의 상과 나란히 예수의 상을 놓았던 로마 황제는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숭고한 찬사를 바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리스도께 찬사를 바치고 있었다. 다만 그런 것은 복음이 아니었을 따름이다. [에른스트 르낭]이 예수께 대해 "그는 하나님의 참아들들의 찬란한 가문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얻었다"라고 말했을 때 틀림없이 나사렛 출신의 예수에게 존귀한 영광과 위엄을 부여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세례요한, 엘리야,또는 예레미야로 보는 것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에 대해 궁극적으로 옮은 견해일까?그리스도를 플라톤,소크라테스,석가모니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 이것이 옳은 견해였는가? [아사시의 프란시스][버나드][어거스틴]등 의한 사람으로 보는 이것이 옳은 견해였는가?사람들은 때로 이런 답변으로 만족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코 이런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여기[가이사랴]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뒤로 밀려나고 바로 단도직입적인[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질문을 어떻게 개인에 대한 도전으로 이끌어 가셨는가를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가 통상 쓰시던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우물가에서 여인과 대화하시던 때에도 쓰셨던 방법이다. 즉 처음에는 일반적인 대화하시던 때에도 쓰셨던 방법이다. 즉 처음에는 일반적인 화제로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그 여인의 정곡을 찌르셨다. 이러한 방식은 또한 본디오 빌라도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왕되심을 주장한 것에 대해 그리스도를 심문할 때 그와의 대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도전이 마치 화살처럼 갑자기 빌라도에게 날아왔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즉 이것은 빌라도 네가 스스로 판단하여 링하는 말인가. 아니면 단지 남의 말을 듣고 옮기는 소문이냐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보만간에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셨다. 예수께서는 남에게서 들은 의견이나 남을 대신해서 말하는 의견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그가 원하신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체험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젠 여기서 예수님의 이 질문이 오늘의 세계를 향해 세가지 측면에서 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역사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시이저]나 [알렉산더]또는 [나폴레옹]보다 더욱 진정한 의미에서 마치 [콜로서스] 처럼 좁은 세계를 활보하는 이 예수, 그의 대의가 수십세기를 통해 수십변 사멸했으나 다만 매번 전보다 더한 영광으로 되살아 났던 이 예수는 누구인가? 성경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11:27)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이 견습 목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온 세상을 향해 자기에게로 와서 쉬라고(28절)명할 수 있었던 이 방랑 설교자, 이 사람은 누구인가?셋째로 양심이 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말이 지금도 하나님의 예리한 검처럼 우리 마음을 찌르며 그의 눈길이 우리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그의 순결하고 거룩한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깨끗하게 살려는 각오를 갖게 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세계는 이 질문을 피할 길이 없다. 또한 종교와 인생의 모든 것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운명을 걸고 있다.

4. 믿음의 답변

[시몬 베드로]는 그 질문에 응했다. 그는 충동적이며 사랑에 넘치는 마음의 담대함으로 그 질문에 응했다. 긴장된 그 순간의 극적인 장면을 상상해 보라.이전에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던 질문이 던져졌다. 예수께서는 장기간의 꾸준한 개인적 훈련과 교제를 통해 제자들을 이 질문에로 이끌어 오셨으며 그 질문이 이제 여기에서 던져졌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사역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아셨다. 이제 그 질문은 던져졌다. 아마도 잠시 동안은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의 열두 사람은 궁극적인 신비와 하나님의 존재의 측량할 수 없는 깊이에 직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베드로]가 그 질문에 응해 일어섰다. 그는 조잡하고 평범한 반신반의하는 답변을 훨씬 상승하여 놀랍고 굉장한 답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외침으로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베드로의 이 고백의 어느 정도의 뜻을 함축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가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두 말할 여지없이 그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로 인식한 것을 의미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부른 의미였는데 이것은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이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기 전 이 땅위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사실을 어느땐가 깨달았었다. 이 사람은 예고자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이 사건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메시야 사상은 이미 오래 전에 쓸모 없어진 케케묵은 유대인들의 사상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변해야 한다. 비록 말과 개념은 틀림없이 히브리적이며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사건 자체는 전 우주적이며 영원한 것이었다라고 왜냐하면 메시야 사상이란 바로 세상의 소망이 되시며 모든 약속의 성취와 모든 기도의 응답이 되실 어떤 분이,인간의 모든 얽힌 것들을 푸시며 지상의 모든 잘못을 바로 잡으시며 하나님의 보다 나은 시대를 도래케 할 어떤 분이 올 것이라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지금 그 사상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우리 세대에 지침으로 주신 말씀으로 인식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함께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신성

베드로가 나타내려한 것은 이것 뿐이었는가? 그는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 말은 [메시야]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사상과 어법에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라는 말은 때때로 동의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 즈음 수개월 동안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생활에서는 그 때까지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즉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 대해서만 느끼던 감정을 예수님에 대해서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려 할 때 예수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그제서야 발견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정당하게 요구하실 수 있느니 생명까지도 그들의 선생에게 기꺼이 바치려 했다. 이 모든 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외침속에 들어 있었다.

여기에는 큰 확신이 있었다. [베드로]가 이 확신에 도달하게 된 경로를 살펴 볼 수 있다. 이 경로는 그러한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경로였다. 즉 그는 예수님과 사귀는 삶을 통해서 이런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한 확신이 시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어부[시몬]에게 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시몬 베드로]가 일어서서 따랐을 때는 그가 따르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그 당시 그가 가졌던 생각이란 단지 [여기에 내가 찾고 있던 지도자가 계시니 이제 나는 그와 함께 가야지]라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매우 초보적인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 시작으로는 충분한 것이었다. 사실 처음 시작에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도 결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그 자신을 어떠한 분으로 생각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의 신적 신분에 대한 교리 강습을 받게 하지는 않으셨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과 만나 사귐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조건으로 [베드로]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그 즉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을 기다리셨던 것이다.

[베드로]의 믿음은 실제로 자라고 성숙해졌다. 결국 [베드로]로 하여금 [신앙인(believer)]이 되게 한 것은 오랫동안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기까지 낮과 감을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데 있었다. 왜냐하면 매일 그는 예수께서 그가 전에 어떤 사람의 말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하고 믿기 어려운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으며, 또한 매일 일하시는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예수님은 어떠한 위급한 사태라도 감당하고 남음이있다는 사실을 감탄과 놀라움으로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좌절당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접촉한 후 하나님만이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러한 변화를 받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매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었다. [베드로]는 마음속으로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는 아주 명백하게,이 예수가 그의 죄를 사하셨으며 또한 순종하는 삶속에서 (in servant's life) 그로 하여금 죄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게 하신다고 말해주는 음성이 있었다.이것이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를 알게된 경로이다. 결국 누구라도 이 길 아닌 다른 길로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 예수는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나에게 해 주신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을 구속하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의 생명을 구속해 주신다. 하나님만이 나의 존재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예수님은 나의 존재를 가득 채워 넘치게 하신다. 그렇다면 내가 어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메시야 신분과 신성에 대한 [베드로]의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내적 계시로서 왔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그 지식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 지식은 [베드로]자신이 스스로 도달한 발견이 아니었다.진리에 대한 [베드로] 자신이 스스로 도달한 발견이 아니었다. 진리에 대한 [베드로]의 탐구가 그러한 계기가 오기 위한 길을 열어준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계시가 왔을 때의 그 계시는 하나님의 은사였다. 그 계시를 [베드로]에게 비춰주신 분은 하나님이었다. 그 확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그 계시는 그 자체 고유의 불가항적인 힘으로 [베드로]에게 부딪쳐와서 [베드로]의 마음에 확증을 주었고 그 결과 어떠한 논리적 증거와 증명을 떠나서도 그는 절대적인 확신으로 [내가 알거니와]라고 말할 수 있었다. [베드로]의 마음 어느 곳엔가에서 하나님께서 올리신 종성이 들렸으며 그 순간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계시의 순간들이야말로 종교의 생명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자신을 최종적으로 확신하게 하실 수 있다.

6. 반석

예수께서 그의 제자의 고백을 격렬한 감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바요나 시몬아아 네가 복이 있도다]여기에서 수년간의 모든 노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그의 영혼의 고통과 고생을 나타내 보여주는 그 무엇이 이루어졌다고 예수님은 느끼셨다. 여기에서 어떤 일-패배,사망,극에 달한 재난-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대의는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고백으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기쁨에 넘치는 감사로 격앙되었다.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신앙이 우리 주님께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좋은 예증이 된다. [시몬아 네가 복이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반석]이란 말이 무엇을 가르키는가에 대해논란이 있어왔다. 그것은 [베드로]자신이었는가?아니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는가? 그 말은 둘을 다 가리켰음이 분명하다. 교회는 신앙안으로서 또한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자로서의 [베드로]와 최초 기독교인들의 세대를 뛰어넘어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신 이래 모든 세대를 통해 믿는 자, 즉 자신을 위탁하는 자들에 대한 약속이었다. 우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재료도 쓰여질 수 있는가? 우리의 믿음과 충성은 어떤 것인가? 표류하며 밀려다니는 모래와 같은 것인가? 아니면 견고하고 단단한 바위와 같은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모든 기독교인이 호롤 그의 영혼과, 하나님과 직면하여 물어보아야 할 질문들이다.

매일 성경

 이사야  11:1-10   메시야에 대한 희망
 이사야  53:       고난의 종
 마태복음 11:1-6   "오실 그이"
 요한복음 6:59-69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마태복음 16:13-21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요한복음 10:22-38 하나님의 아들
 요한복음  5:17-27 심판주
 

토론을 위한 문제

1.구약은 메시야에 관한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어떠한 예비적 성구들을 제공하는가?

2.그리스도께서 어째서 복음서에서 그의 메시야 신분을 비밀로 하셨는가?

3.[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고백했을 때 그 의미는 어느 정도였다고 생각하는가?

4.예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이 20세기 교회에 대하여 어떤 의미와 관련을 갖는가?



제 14 장. 최고의 법은 사랑

1. 최고의 법

이 법은 [왕]의 법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여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에서 예수님은 왕적인 권위로 말씀하신다(마5:43-44).

이 법은 다른 모든 법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법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당당하게 나열된 굉장한 미덕들이나, 깊은 신앙, 긴 기도라 할지라도 만일 사랑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으면 하나님께 하등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마5:23-24). 이 사랑의 정신이 우리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시험이다.[무디]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밖으로 흘러나오게 하지 않는 사람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서 4:8).

이 법을 순종하는 것이 삶을 가장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다."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자비롭지 못한 태도는 마치 [부머랭 2]과 같이 그 사람에게로 되돌아 온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또한 이 말씀은 타인에게 대한 무정한 마음이 결국은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생활 분위기에 해독을 끼치듯이 자비로운 마음은 그 생활 분위기를 윤택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결국 자신이 스스로 개척한 세계에서 살게되며 하나님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자는 오직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2. 사랑의 의미

예수님께서 권하시고 칭찬하신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는가? 그저 온순하고 도덕적 뼈대없이 살을 에는 듯한 역풍에 맞설 힘이 없는 선량하게만 보이는 성격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正과 邪에 대한 구별을 흐리게 하면서 까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마13:6)는 무서운 말씀을 서슴없이 하시고,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깨끗케 하셨던 (마21:19,요2:15)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도덕적 가치에 무관심한 안일한 자비심을 권하시지 않았다. 이것은 기독교적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적인 태만과 무관심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적인 태만과 무관심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사소한 것을 가지기에는 너무 도량이 넓어서 결코 악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었다. 또한 남의 깊은 마음을 들여다 보아서 그의 가장 좋은 점을 발견하고 그 자신이 어려운 처지를 겪어보아서 이해심이 많으며 그 중심에 큰 소망을 가지고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인내하며 또한 하나님을 아는 전혀 순결한 마음을 뜻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는 말씀은 그저 좋기만 한 유순한 성격이 뜻하듯이 우리의 비판 기능을 전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참조 요7:24 "공의로 판단하라").예수님께서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97:10)는 시편 기자의 권고에 아멘이라고 동의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그의 도덕적 엄격을 제한다면 그 예수님은 신약이 말하는대로의 예수님은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나의 하나님께는 불타는 마음을! 이웃에게는 사랑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는 강철같은 마음을!"이라고 외친 [어거스틴]의 위대한 말처럼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는 엄격해야 한다.

사랑의 필연성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주린 심령들을 만나셨다.[삭개오]의 지친 얼굴이나(눅 19:5) 사마리아 여인의 유창한 말에 (요4:10이하) 나타난, 그리고 목자없는 무리(마9:36)의 지친 표정에 나타난 사랑의 굶주림이 예수님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이러한 연유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한 여러가지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신 반면 사랑할 각오가 없는 사람은 누구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셨다. 세상의 모든 심령이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예수님에 따르면 교회나 국가나 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정한 원수는 언제나 [사랑의 결핍]이었다. 자아는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이기적인 태도는 그리 흉하지 않은 죄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바로 육적인 죄와 비교해서 그리 흉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의 사회나 오늘의 사회가 간과하기 죄중 하나이다. 육적인 죄나 마음의 죄를 불문하고 어떤 다른 죄보다도 이 죄에 대한 예수님의 눈은 [불꽃 같으시다](계1:14). 여러가지 다른 죄를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실 수 있으나[사랑의 결핍]에 대해서는 참으시지 못한다.

사랑의 방법

진실이 없는 친절이 있을 수 있으며, 방법만 존재하는 사랑도 사랑으로 보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공격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불었다(마6:12).그들의 사랑은 억지 사랑이었고 직업적이며 직무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말을 했다. 비록 의식적인 미덕으로 인한 만족감으로 가득차 있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사랑은 모조품에 불과했다. 그러한 사랑은 가짜로 들렸다. 그래서 그러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그 속에 있는 흠을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차라리 전혀 무심해 버리는 것보다 더 나쁜 이유다.

진정하는 사랑은 남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마6:34,고전13:4).사랑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며 선심을 쓰는체 하는 것이 아니다.다만 하나님께서 채워주신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태도가 결정적으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가르치신 사랑의 행위는 은밀히 행해졌다(마8:2326), 특별히 [동네 밖으로 그를 끌어내사]라는 말에 주의하라(눅5:14).그의 사랑은 짐짓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의무여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하신 사랑이었다(마10:21).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형제가 되신 것은 이 세상에서 형제우의를 증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우셨기 때문이었다. 의무적인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것 없다.

5. 사랑의 어려움

예수님께서 명하신 [사랑의 법칙]자체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진심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을 삶에 적용하려고 했을 때 어려움은 일어났다. 언제나 어려움이 시작되는 곳은 여기에서 다 이것에 대해 분명히 알아보자. 우리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마22:40)에 동의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우리가 신경질을 부린다면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용서에 대해 하신 모든 말씀에 찬동할 수도 있지만 만일 우리가 모모씨가 언젠가 우리를 무시했다거나 우리와 충분히 의논을 하지 않았다거나 우리에 대해 난폭한 말을 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께 가까워 진 것이 아니다. 최초의 제자들 무리가운데서도 때때로 사랑이 무너지곤 했다. 누가 더 우월한가 하는 문제가 그들을 갈라놓았다(마18:1,막9:34,눅 22:24). 그리고 다툼이 일어났다(마20:2124).제자들중 누구도 몸을 굽혀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 하지 않았다.(요13:45).자존심과 개인의 권리를 내세우므로 사랑은 그들 마음속에서 밀려났다.

이러한 자주성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아주 명백하다. 예수님의 태도는 세상의 태도와 정반대의 것이다. 세상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때 여러분의 권리를 위해 일어나서 받은 해와 동등한 보상을 받아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자주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런 태도야말로 근본적인 자주성의 결핍을 뜻한다고 하신다. 이러한 태도는 여러분이 여러분을 해하는 것들을 초월할 만큼 충분히 자주적이 못된다는 것을 보여준다.여러분은 그것의 노예이지 그것의 주인이 아니다. 이것이 [산상보훈]의 가르침이다(마5:38-48).이것이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신](벧전 2:23,막14:65)그리스도 전생애의 가르침이다. 만일 사랑과 개인적인 자주성이 서로 충분한다면 그 자주성은 거짓된 자주성이다. 또한 우리가 그럴듯 하게 보이는 우리의 자주성과 그리스도의 명령인 사랑중 어느 것에 순종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순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투쟁이 시작된다. 또한 이것이 사랑에 따르는 어려움 중 하나이다.

최초의 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오늘에 와서도 매우 결실한 또 하나의 다른 어려움은 그 법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서약하게 한대로 사랑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과연 사람들이 그런 모험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히 만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를 동의하고 동시에 그 명령을 실천하기 시작한다면 그 명령의 실현은 용이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명령 실천을 시작할 의시가 전혀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먼저 시작할 수 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사랑으로 대하며 그 다른 한 사람이 그에게 사랑으로 대하는 일이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사랑을 베풀고 그에 따를지도 모르는 모든 위험을 감수할 각오를 갖는다는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는 사랑을 받는 자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곧바로 뛰어드는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모험적인 사랑이었다. 우리가 아직 그의 원수였을 때에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5:10)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가 온 세상을 위해 용서를 탄원한 것은 세상이 그를 못박아 죽였던 십자가 위에서였다(눅23;34).이것이 기독교적 모험의 주요 부분이다. 이 세상과 같은 곳에서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모험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위험성을 결코 숨기려 하시지 않으셨다(눅21:12). 그는 바로 그 위험성을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도전으로 삼으셨다. 그는 청년에게 있는 모든 정열과 용기가 그 도전에 응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그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청년들은 그 도전에 응했고 오늘날에도 응하고 있다. 사랑의 어려움은 또한 사랑의 영광이기도 하다.

6. 사랑의 범위

사랑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어느 정도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갈보리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베드로에게 그 형제를 일곱번이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을 때(마18:21-22).그가 뜻하신 것은 진정한 사랑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너무 지나친 것을 요구하셨는가? 그의 요구를 지나치게 높은 수준에 두셨는가?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은 이상적인 것이어서 이 세상과 같이 거친 경쟁적인 세상에서는 실천 불가능한 것이며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비판이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복음서는 두 가지 답변을 주고 있다. 즉 기독교인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기 위해 존재하며(마19:26,막9:23),또한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서 지나친 것을 기대하고 계시며 인간이 미치기에는 불가능한 사랑의 한계가 있다는 비난은 욧점을 벗어나고 있다고 복음서는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기독교가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적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요구가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암시하신 적이 없다(마5:2048). 그는 말씀하시기를 기독교의 영광은 그 속에 전혀 인간적인 것이 아닌 초인간적이고 신적인 내적 충동에 의해 인간으로 하여금 초월하게 하며 인간적으로 가능케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다.[웰즈]가 말한 것처럼 [진리는 갈릴리 사람 예수가 우리의 좁은 마음에 비해 너무나 위대한 분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랑의 법]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마16:24). 예수님께서는 솔직히 사랑의 법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때때로 그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일을 당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여, 제가 제 십자가를 졌나이다]라고 말하는 자가 사랑의 법과 일곱번의 일흔번 용서에 대해 지나친 요구라고 불평할 권리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져야 할 십자가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갈보리를 의미했다.[제자는 그 선생보다 나을 수 없는 법이다](마10:24).

7. 사랑의 동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에 대하여는 그것을 행할 힘을 주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요구하신 것을 이루는 일에는 도움을 주셨다.그가 [사랑의 법]을 세우셨을 때 그는 그것과 함께 그에 필요한 동력을 제공하셨다. 복음서에는 세 가지 중요한 동기가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성과 사랑스러움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사랑을 일으키신다. 다른 사람의 초라한 외투나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투,이상한 버릇같은 것은 쉽게 눈에띄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욱 깊이 들어가서 모든 사람이 한왕의 아들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셨다. 그는 멸시받는 배교자 세리에 대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19:9)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선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을 여왕에게나 주어질 법한 위엄과 예의로 대하셨다(눅7:37이하). 또한 [삼가 이 어린 소자들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아라](마18:10)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생각하신 것은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약한 자와 보호받지 못하는 자, 그리고 연약한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간에 대한 가장 강렬한 사랑이 일어나는 때는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모든 얼굴들에서 예수님께서 보셨듯이[하나님의 형상같은 것을 보게 될 때]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죽으심으로 사랑을 창조하셨다.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께서 병든 자와 죄인들을 위해 그 힘을 아낌없이 쓰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갈보리의 수난이 닥쳤을 때 그들은 그가 죽으신 것이 순전히 그들을 사랑하신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아무리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라 할지라도 여러분이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바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여러분은 그래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국제평화를 위한 참 동기가 존재한다. 만일 그 자신은 평화를 믿지도 않고,다른 모든 나라들 이전에 그의 조국만을 생각하는 것을 애국심으로 알며 남의 권리를 짓밟게 되더라도 그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음의 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을 사랑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세대에 있어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업을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모여 도덕적으로 벌리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이 사업은 모든 기독교인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가지는 명백한 의무이며 그 동기와 추진력은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그의 영으로 충만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창조하셨다.일곱번의 일흔번 용서는 베드로와 같은 성격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가 발견한 사실은 그 자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는 이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스스로 동료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방법은 희망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날이 지나감에 따라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도록 하였을 때 형제에 대한 사랑이 저절로 일어났다.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말씀과 단 한자 틀리게 표현하기를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다]라고 했다.

이것은 오늘에 있어서도 문제의 핵심이 되는 말이다. 어떤 저명한 독일인이 [괴테]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괴테) 나로 하여금 그의 힘을 사랑하도록 가르친다.]라고 했다. 당신이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다. 어찌 당신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못하시겠는가?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의 힘으로 사랑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8. 사랑의 힘

힘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 같이 보이는 사랑이 실재에 있어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최초로 증명해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사랑은 무정하고 비판적인, 그리고 남의 흠 찾기를 좋아하는 태도가 얻지 못하는 승리를 획득한다. 부끄럽고 상심한 죄인들에 대한 바리새적인 태도는 그 죄인에 대해 구원할 힘을 과거에도 전혀 갖지 못했으며 또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태도는 전혀 반대로 작용해서 다만 쓰라림과 낙심의 쇠사슬을 전보다 더욱 튼튼히 조이게 할 뿐이다.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말했다. 이러한 것은 한 영혼도 천국으로 끌어 들일 그 세리를 사랑하셨고 그를 사랑하심으로써 그에게 인격과 자존심을 되찾아 주셨다.또한 겁이 많고 부끄러워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굳세고 강하게 하셨으며 그의 눈에 희망의 빛을 주시고 그를 구원하였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후에 무자비한 비판을 받았더라면 오늘날 성경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같은 베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그와 같은 무서운 실수를 범한 후에라도 그를 계속 사랑하셨으며 (막 16:7,요21:15),그를 무서운 죄의 구렁과 낙망의 진창에서 즉시 건지시고 그의 발을 반석위에 다시 든든히 세우셨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영원한 모본이 되신다. 사랑은 비판보다 나을 뿐 아니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효과적이다. 사랑은 바로 구원하는 힘이다. 어떤 우화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세상에는 철석과 같이 굳은 물건을 녹이는 유일한 것, 즉 영원히 굳은 반석을 용해시킬 만큼 강한 단하나의 얜체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피다.]이 말에는 우화 이상의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버나드쇼]의 화곡 [성 쟌 다르크]에서 [쟌 다르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내가 만일 불 속을 걸어가야 한다면 나는 그 심장부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걸어 가리라.]이와같이 사랑 역시 패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패배 속에서 승리의 무기를 만들어 낸다.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모든 강한 것 보다 더 강하다(고전1:25).

9. 사랑의 보상

사랑은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이 요구하는 전부는 계속 더욱 더 사랑하게 해 달라는 것 뿐이다. 상을 받기 위해 기독교의 길을 택한다는 사상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전혀 동 떨어진 것이다.[이와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지니라](눅 17: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상은 있다. 분명히 '사랑없음'은 그 댓가를 받게 된다. 무정하고 비판적인 성격은 그러한 성격을 내보인 사람에게 되돌아 온다. 그리고 결국 그 자신이 사랑 없는 사막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바로 그러한 마음이 궁극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왕에게서 그 빚을 탕감받고서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던 종에 관한 위대한 비유는 다음과 같은 엄숙한 말로 끝을 맺고 있다(마18:23-24)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사랑이 없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화목과 교제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그 스스로를 제외시킨다.

그러나 만일 [사랑없음]에 대한 보상이 있다고 한다면 사랑에 대한 풍성한 보상 역시 있다.[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눅 19:26)라는 예수님의 흔히 쓰시는 원리는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창조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에게서 그 사랑이 재생되며 결국 사랑으로 사는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비록 냉수 한 그릇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어질 때 그 일은 준 자에게 축복으로 보상된다(마10:42). 왜냐하면 주님의 형제들 중 지극히 적은 자에게 대한 선물은 바로 주님 자신에 대한 선물이 되기 때문이다(마25:40). 이 위에 용서의 사랑을 베푸는 것은 바로 자신을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위치에 두며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영역 속에 살게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6:1214). 그러나 사랑의 정신이 받는 가장 큰 보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요14:23).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영이 거하실 수 있는 분위기를 창조한다.그리하여 하나님이 영이 그 사람의 생활 속에 들어오셔서 거주하시며 그 영혼을 그의 거처로 삼으신다.이와같이 사랑은 영광을 얻게 되며 이러한 곳에 하나님께서 계신다.

우리는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이오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의 형제들이옵니다. 성령이여 비둘기 같이 우리 마음속에 강림하셔서 우리들로 하나같이 되게하소서 우리가 늘 당신만을 향하여 당신과 하나된 것 처럼. 그가 우리에게 형제와 친구가 되어 우리와 하나된 것처럼.

매일 성경

 누가복음 10:29-37  누가 내 이웃이니이까?
 마태복음  5:38-48  원수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6:1-4    사랑은 자랑치 아니하며
 마태복음  7:1-5    비판적인 수도를 정죄하심
 마태복음 18:21-35  용서의 정신
 마태복음 25:34-40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봉사하라
 고린도전서 13:     사랑의 찬가
 

토론을 위한 문제

1."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은 이와같이 명령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2.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사랑의 동기들로써 어떤 것들을 창조하셨는가?

3."너희가 이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행했으므로" 이 말이 행위에 의한 구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답변하겠는가?

4. 사랑의 법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과연 기독교인들이 사랑의 법을 따라 살 수 있을까?



제 15 장. 예수님과 사회문제

1. 예수님의 태도

이제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시대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사회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서 매우 다른 두가지 견해가 나타났다. 즉 한편에서는 예수님께 사회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고 주장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가장 위대한 사회 개혁자로 받아들여왔다. 먼저 이 두 주장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전자에 의하면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 대상은 사람의 영혼이었다. 그가 가르친 것은 어떤 신비적인 경건이었으며 물질적 환경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으로 만족하셨다. 영적인 것 외에는 현세적인 삶의 어떠한 면도 인정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셨다.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세상에서부터 구원해 내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사회악을 바로잡는 일이나 사회적 물의를 개혁하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그의 생각은 다른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교회 역사상 전시대를 통해서 이러한 견해는 일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사회적 의무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단절하게 하였으며 그 결과 기독교가 종종 개혁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것처럼 외부인들에게 인식되었고 케케 묵은 폐습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것은 전혀 잘못된 견해이다. 복음서를 대충만이라도 훑어 본다면 이 견해가 얼마나 본제도에서 빗나간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천국을 전파하시면서 나타나셨는데 바로 그 천국사상이 굉장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한 형제임을 강조하는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최초의 추종자들을 모아 진정한 공동생활을 하는 사회적 단체를 만들었다. 산상보훈은 사회적인 교훈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이미 살핀대로 병자를 고치신 이적은 인간들을 영적으로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도우려는 강렬한 소원에서 생겨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결코 무관심한 일이 아니었다(마9:36).그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마4:4) 그러나 전혀 먹지 않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이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중심부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마6:11)라는 기도를 두셨다. 인간의 물질적 결핍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이 일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너희 천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마6:32).참으로 인생에 있어서 성속을 구별하려는 경향은 전적으로 복음과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전 부분을 요구하셨다. 그가 정하신 종교는 삶의 모든 구석에 침투하는 종교였다. 전체가 한 성령의 지배 영역아래 들어와야만 했다. 어떠한 사람도 구별하는 선을 그어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는 끝납니다. 여기까지는 예수님의 영역이나 이 이상은 아닙니다. 그 나머지는 당신의 지배영역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와같은 이중적지배는 근본적으로 언제나 불성실한 것을 의미한다고 예수님은 주장하셨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두 개의 진리는 있을 수 없으며, 진리는 다만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전영역에서 왕이 되시든지 아니면 전혀 아무 것도 되지 않든지 해야 한다. 가능한 단 하나의 선택은 예수님의 종교를 삶의 모든 관계에, 단 하나에 이르기까지 작용하든지 아니면 그의 종교를 완전히 내버리든지 양자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제3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 교훈속에 흐르는 전체적인 경향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이다.

따라서 사회문제를 예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주로 사회개혁자로 받아들이는 견해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이 견해는 인간 구원의 첫 단계가 사회질서 구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외적 상태가 향상된 연후에 성령께서 역사할 기회를 얻게된다고 말한다. 가난과 무지를 추방하면 죄를 제거하기가 비교적 쉬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분명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던 방법이 아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결코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다. 이 일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더우기 예수님께서는 심적 변화 없는 외적 환경의 변화는 무용하다는 것을 아시고 이를 명백히 선언하셨다(마15:19-20). 이러한 연유에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예수께서는 마귀가 제안한 지름길을 거부하셨다(마4:1이하). 먼저 하나님과 바로 되기 전에는 인간이 결코 상호간의 바른 관계에 있을 수 없다. 인간성의 진정한 문제는 너무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사회적인 처방이나 환경의 개선으로는 거기에 미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위대한 개혁자였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은 먼저 그가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본 두가지 견해 사이 어딘가에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시대와 또한 모든 시대를 위한 사회적 멧세지를 가지고 오셨다. 그러나 그 멧시지의 기초는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었다. 세상 환경에 대해 끼친 그의 영향은 그가 종교적인 것이었다. 세상 환경에 대해 끼친 그의 영향은 그가 하나님에 대해 계시한 것의 결과였다. 그는 사회 혁명을 주도하지 않았으며 당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만들지도 않으셨다. 다만 그는 사람들에게 어느 곳에서나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여 싸울 정신을 나누어 주셨다. 바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1900년 동안 모든 고상한 사회적 봉사의 추진력이 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정신이 로마의 수치스런 투검경기라는 야만적인 유물을 사라지게 했으며, 또한 노예제도의 뿌리를 도끼로 찍어 넘어뜨렸다. 예수님의 이러한 정신은 [셜트베리]경과 그 외의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셔서 19세기의 가공할 공장 작업조건의 실상을 폭로하고 더 좋고 훌륭한 작업 환경으로 개선되게 했다. 또한 그 정신은 헤어날 수 없는 비참과 고통의 비극에 적중하여 도처에 병원과 치료기관이 생겨나게 했다. 말하자면 이 땅에 있는 모든 병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변화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 오셨다. 가장 고상한 사회적 동기는 언제나 이와같은 종교적 근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야말로 그 근원에 가장 충실한 교회이며 복음에 가장 가까운 교회일 뿐 아니라 사회정의를 대담하게 외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를 내세울 때 사회적 선을 위한 가장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한다. 이 사실을 마음에 두면서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이 빛을 던져주는 중대한 두 가지의 사회적 관계에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2. 가정 생활

예수님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족제도를 매우 존중히 여기는 민족에 속해 있었다. 유대인들이 가족제도를 존중히 여기게 된대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작용했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라는 확신이었다. 창세기의 서두에는 가정의 기원에 관한 기사가 보존되어 있으며 가족제도가 직접 하나님의 심중에서 생겨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창1:26, 2:18). 따라서 매우 자연스럽게 각 가족은 하나의 종교적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며 깊은 의미에서 유대인 가정의 가장은 그 가정에서 제사장이었다(신16;11).유대인의 율법은 가정의 순결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활을 했다. 물론 여러가지 면에서 율법이 가정생활을 속박하는 멍에이기도 했지만 당시 세계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도덕적 파멸로부터 유대교를 구한 것은 이 율법의 공로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유대인 어머니들은 그녀가 낳은 아들이 메시야일 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들에 대해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해석이었는데 이러한 희망이 가정생활을 건전하고 순결하게 지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정생활에 더욱 차원이 다른 신성을 부여하셨다. 그는 세가지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생의 대부분을 가족과 더불어 보내졌다. 그에게는 형제 넷과 적어도 여동생 둘이 있었다(마13:55이하). 즉 30년 동안 하나님의 영광은 한 시골 가정에 머무르시는 것으로 만족 하겠다. 이로 인해 모든 가정생활은 영원히 신성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는 가정을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으로 생각하셨다. 이 사실은 그가 가장 깊은 영적 진리를 설명하고 그것을 절실히 느끼게 하기 위해 가족관계를 항상 비유로 사용하신 것에서 드러난다. 그는 가정생활에서 고귀한 신적 속성의 개념을 끌어 내셨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으시다가 말씀하셨다. 또한 치대의 비유언 탕자 비유는 어떤 가정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눅 15:11이하). 친밀한 가족 관계에서 일어나는 한 아버지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해주고 있다.이와같이 인간의 가정이 천국의 축소판으로 묘사되고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여인들과 아이들에 대해 행하신 일로써 가정의 신성함을 깊게 하셨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그의 특정한 교훈에 의해서 판단하기 보다는 그의 전 태도에 의해서 판단해야 한다. 복음서 이야기에 나타나는 여인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 의해 예수께서는 여인을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위엄과 존귀로 높이셨다. 유대인의 높은 표준도 여기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결혼에 대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하되 하나님께서 짝지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막 10:9). 바울도 예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여 말하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갈3:28). 어린아이들의 지위 역시 예수님의 변화시키는 손길에 접하게 되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그에게로 불러 그들의 가운데 세우셨다(마18:2). 그 후로부터는 어린이가 언제나 가운데 위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혁신적인 태도가 얼마나 굉장한 것이었는가는 최근 발굴되어 빛을 보게된 B.C.1세기의 고대 파피루스 편지 내용이 잘 설명해 준 것이다. 이 편지는 외국에 근무하는 남편이 본국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가 바로 B.C 1세기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우리는 아직 알렉산드리아에 있오. 아이를 잘 돌보도록 하시오.그리고 봉급을 받는대로 곧 얼마를 당신에게 보내겠오. 만일 사내아이거든 그냥 두고 계집애이거든 내 버리시오.]이렇게 극도로 냉담했던 세게에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어린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천국이 이런 자(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마10:14).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가정의 신성함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게 하신 반면 어떤 상황에서는 가정의 권리가 2차적인 것으로 물러나야만 한다는 것을 주의깊게 지적하셨다. 예수님 자신의 생애에서도 나사렛 어린 시절의 가정이 더 이상 그를 붙잡아두지 못하고 그를 붙잡는 손들이 조용히 물리쳐져야 했던 때가 왔었다. 후일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찾아와 그와 말하기를 간청했을 때에도 그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마다 그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50)고 대답해야만 했다. 또한 그가 택한 제자들에게서도 이와비슷한 부인을 요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 그의 도전이 인간 사회에 초래할 분열상에 관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사람을 그 아비와,딸을 그 어미와, 또한 그 시어머니와 불화케 하기 위함이라](마10:35)고 하셨다. 예수님의 주장을 따르는 자가 되려던 어떤 사람이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그러나 나로 먼저 가서 내 집에 있는 자들과 작별하게 하소서]라고 말할 때 예수께서는 그의 결심이 가족들의 간청에 쉽사리 허물어질 확고하지 못한 결심임을 아셨기 때문에 섬기기를 자청하는 그를 거절하시고 슬픈 마음으로 돌아 서신 일이 있다(눅9:61). 예수님께서는 비록 가정의 권리를 큰 것으로 인정하셨지만 이 권리와 하나님의 권리가 충돌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권리가 우선한다는 것을 언제나 서슴치 않고 주장하셨다.기독교가 새로운 종교로서 그 길을 헤쳐 나가고 있었을 때, 또한 이로 인해 가정이 분열하고 박해가 심했을 때인 초대교회 시대에서는 오늘날에도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비기독교 국가에서 그러하듯이 이 명령의 실제적 의미는 분명하고 광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나 기독교인 자신의 생활에서도 예수님의 이 명령은 큰 비중을 갖는다. 덜 중요한 충성이 더 큰 충성과 충돌할 때에는 더 큰 충성이 이기도록 해야 한다고 그는 말씀하신다. 기독교인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로 인도하신다면,천국을 위해 가정의 의무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3. 부와 가난

금전에 대한 암시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빈도 수는 일견헤서 놀라울 정도이다.비유를 그 예로 들어보자. 너무 소출이 많아서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 정말 문제가 된 한 부유한 지주의 비유가 있다. 이 비유는 어떻게 그 지주가 그 문제를 그 자신에게 만족하게끔 해결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해결책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를 말해주고 있다(눅 12:16이하).또한 한 주인이 청지기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게으르고 쓸모없는 부랑자인 청지기가 곧 해고될 것을 알고 계산서를 변조하여 그 주인의 영향력 있는 고객들의 환심을 산다는 비유가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불의한 돈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이상한 말로써 끝을 맺는다(눅 16;1이하).또한 그 나름대로는 정직하고 점잖앗으나 자신의 일과 친구 대접하는 일로 너무 분주해서 뒷문간에 누워있던 한 부유한 수리아 유대인에 대한 비유가 있다(눅16:19이하). 또한 다음의 여러 비유에서도 즉,감추인 보화(마13;44이하). 자비심 없는 종(마18:가23이하).포도원의 품군(마20:1이하). 두 사람의 빚진 자(눅 7:41이하).선한 사마리아 사람(눅10:30이하).잃어버린 동전(눅15:8이하).10파운드(눅19:11이하)등의 비유에서도 금전이 한 역활을 맡고 있다. 비유를 떠나서도 복음서 이야기 가운데 특히 젊은 부자 관원과의 대화(마19:16이하),삭개오의 회개(눅 19:1이하) 등의 이야기 가운데서 금전이 등장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뜻과 反하여 금전 문제가 그들의 생활과 경험에 얼마나 멜수 없을 만큼 얽혀 있는가를 알기 전에는 이렇게 자주 돈 문제가 언급된 것이 놀랍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돈 문제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나 이웃의 불행에 대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동정,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헌물과 같은 훌륭한 영적인 일들과도 얽혀있다. 예수님은 구름위에 사는 공상가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현실주의자여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셨다. 금전문제에는 무시하지 못할 삶의 국면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지침이 시급히 요구되었다. 이제 그 지침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이든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반드시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를 따른 자들 가운데서도 한 사람의 부자 아리마대 요셉을 헤아릴 수 있다(마27:57이하).그리고 예수님의 친구들 가운데는 부자는 아닐지라도 생활의 걱정이 없는 니고데모(요3:1이하)와 가버나움의 백부장(눅7:2이하),베다니에 살던 나사로 가족(눅10:38이하),예루살렘에 있던 이름없는 무리들(막 10:13이하).그리고 [그들 자신의 소유로 그를 섬겼던] 여인들(눅8:3)이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분명히 부자는 그가 부자인 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도록 그리고 가난한 나사로는 그 가난한 것으로 인해 천국으로 보상받도록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그 품에 안긴 아브라함은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눅16:19-).또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그가 가진 것을 전부 팔아 모든 소유를 하나도 없이 할 것을 명령하셨을 때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자 청년의 경우 천국에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을 정곡으로 지적하신 것이었다(마19:21). 예수님께서 모든 소유가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가난이 반드시 축복받은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셨다. 그는 집 없는 유랑인이었고(눅9:58).예를 들어 설명하시기 위해 동전을 빌리셔야 했으며(마22:19),그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그가 입었던 통옷 한벌 밖에는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만한 소유를 남겨놓으시지 못했다(마27:35),또한 그는 다른 사람의 무덤에까지 묻히셨다(마27:60).그러나 예수님의 가난은 후일 그의 위대한 추종자였던 [아시지'[의[프란시스]의 가난처럼 고상하며 자유로운 것이었고 새들의 노래와 꽃, 흘러가는 구름, 밝게트인 길의 아름다움,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한 것이었다. 온갖 더럽고 천박한 비참이 따르는 산업문명의 가난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러한 가난에 대한 미화나 칭찬은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의 정신은 이 세상에서 이러한 불행을 종식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충만한 삶을 얻도록 하기 위해 역사하고 있다. 편견을 가지지 않고 복음서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물질에 대한 논쟁에서 멀리 떠나 계셨던 반면 사랑과 형지애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강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인 소유물을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충만하고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함께 누리도록 분배해야 한다는 경제상의 명령을 함축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명령은 바로 복음의 성격 자체속에 명백히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대해 가지셨던 의도의 필수적 부분이었다.

적극적인 면에서 볼때 소유물을 번제나 신성한 위험물을 간주해야 한다고 예수께서는 가르치셨다. 모든 사람은 그 소유를 사용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지운다(눅 19:21-).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마5:45),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들이다. 이 세상의 선한 물질에 대한 이기적인 태도는 종국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를 받게될 것이 분명하다(마25:41).

예수님께서는 만일 사람의 소유물이 그의 영혼을 해롭게 하면 철저한 희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하셨다. 성령을 소멸하기 보다는 오른 손을 잘라버리는 것이 나으며,황금더미 속에서 시들고 남루한 영혼을 가지고 부자로 죽는 것보다 가난한 자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그 생명(영혼)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막 8:36).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많은 재물을 갖지 않아야 기독교인이 되기가 훨씬 용이하다고 주장 하셨다.부자 불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위험한 것임은 분명하다. 재물이 고상하게 그리고 가치있게 사용될 수 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은혜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이 제일 강조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다. 그가 여러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재물의 위험이었다. 재물은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 안도감을 주기 쉽다. 또한 희생적인 삶을 받아 들이는 것을 꺼려하게 한다. 재물은 또한 도덕적 표준을 무르게 하며 양심의 날(刀)을 무디게 한다. 재물은 사람을 지배하는 욕망이 될 수도 있으며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섬기는 물건이 되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도 있다.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려우니라](마19:24)고 하신 말씀에서 엄숙한 경고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재물은 무서운 시험이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그러한 시험을 당하지 않아도 될 형편에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가장 귀한 것은 매매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일깨워 주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존재의 내밀한 비밀이며 빛나는 영광인 사람의 생명은 그가 가진 소유의 풍족함에 있지 않다고 하셨다(눅 12:15).사랑이나 편안한 양심 그리고 어린아이의 웃음이나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돈으로 살 수는 없다.

위대한 것들,생명을 주는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돈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들이며 재물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들이다. 다만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복종과 예수님의 멍에를 받아들이는 것에만 관계하는 것들이다.

4. 국가와 정치

이 문제에 대하여 결정적인 해답을 주는 귀절은 한 바리새인이 세금문제로 예수님께 도전했다가 가이사의 권리와 하나님의 권띵에 대한 예수님의 중대한 선언을 낳게 했떤 사건의 이야기(마22:15이하)라고 할 수 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은 고의적인 함정이었다. 복음서 기자는[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생각은 만일 그들이 예수로 하여금 일치하지 않는 대답이나 모순된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궁지에 밀어 넣을 수만 있다만 그들이 예수님의 대의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퍼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진리를 아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상대방을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분명히 아주 쉬울 것 같이 보였다. 결국 예수는 무식한 시골사람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로 하여금 대답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는 것 쯤 간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함정에 아첨하는 말로 미끼를 달았다.[선생님이여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줄 우리가 아니이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날카로운 눈이 어떠한 위장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문제를 꺼내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즉 민세(民稅)를 바쳐야 합니까? 함정은 교묘하게 고안되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대답을 하시더라도 그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걸려들게 할 수 있을 것같이 보였다. 예수께서 可하다고 대답하신다면 로마의 세금과 전쟁 배상금으로 시달리는 애국적인 유대인들이 즉시 그와 관계를 끊게 될 공산이 컸으며 만일 아니라고 대답하신다면 선동죄로 몰리게 될 것이고 로마 당국이 틀림없이 그를 억압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더우기 만일 그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당연히 주위의 백성들은 그 침묵을 예수께서 그 대답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결코 참 선지자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할 것이었다. 혹은 그가 만일 머뭇거리거나 생각할 여유가 갖기 위해 백성들에게 다음날 대답을 들으러 오라고 말한다해도 역시 그의 영향럭이 무너지게 될 것이었다. 그 함정은 가장 교묘하게 마련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간파하시고 그들의 계획을 깨뜨리셨다.[나에게 셋돈을 보이라'고 명하시었다.그리고 동전을 보시고'이 형상과 글이 뉘것이냐?고 물으셨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고 그들은 대답하였따.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즉,가이사에게 속한 것이 가이사에게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예수님의 대답하셨다.

이 중대한 말씀은 여러가지 이상한 해석을 낳았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근거로 왕권신수설(王權神受設)을 창안했으며,다른이는 이와는 정반대로 국가는 진정한 신자에 대해서 전혀 어떠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주장을 끌어내었다. 또 다른 이는 이 말씀의 의도를 전혀 곡해하며 일시 모면하기 위한 답변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어떤 것이 참된 해석인가?

즉석에서 분명하게 대답할 한 가지가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파정치 논쟁에 있어서 어느 한쪽을 편드는 값싼 해결책을 제공하기를 거절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치계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주는 그의 멧시지에 당파적 색채를 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가 오신 목적인 근본적 혁명이 흐려지게 될 것이었다. 더우기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이지만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영원히 폐기되지 않을 법에 비추어 어떤 정치 질서를 확립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리스도께서 관심을 두신 것은 지침이 되는 원리였기 세부적인 지시가 아니었다. 또한 그가 인간 가운데 오신 것은 정치적 논쟁을 종식시키거나 경제 계획을 결정지우는 일보다 훨씬 높은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가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한 정신을 나누어 주시어서 그 정신의 힘에 의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논쟁을 해결짓고 자신의 계획을 수행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천에게는 이것이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 참여를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치적 논쟁에 들어가시는 것을 거절하신 반면"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라"고 하신 그의 말씀은 특권은 항상 그에 따르는 의무를 수반하는데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만일 당신이 국가에 빛을 지고 있다면 다른 빛과 마찬가지로 그 빚을 갚아야 할 도덕적 의무가있다. 그들이 가이사의 돈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가이사 통치에 의한 덕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의무를 인정하고 가이사에게 빚진 것을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시민권으로 누리는 특권에는 이에 상응하는 의무가 있기 마련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시민의 의무를 거부하는 자에 대해 결코 찬동하지 않으신다. 문제의 쟁점은 예수님의 손길이 순전히 정치적인 것에서부터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것으로 바꾸어졌다. 의무는 그것이 어떤 국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든지 신성한 것이며 또한 그러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라]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상은 인간 창조의 개념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창1:7)창조되었다는 위대한 히브리적 사상에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가? [터툴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즉 가이사의 형상은 동전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혼에 있었다. 인간이란 동전이 세상에 와서 흘러 다니면서 아무리 낡고 희미해지고 마멸되었을지라도 인간이 속한 하나님이 형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와간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또한 모든 시대의 어려움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 와중을 꿰뚫고 영원한 사실에 도달해 계신다. 그는 모든 문제를 개인적인 복음의 문제로 환원시키신다.[너는 하나님께 속한다]고 그는 말씀하신다. 너의 몸, 너의 영혼, 너의 마음, 너의 애정,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印)쳐진 것들이라고 말씀하신다. 네 빚진 것을 돌리라!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것을 그에게 돌리라!

매일 성경

 마가복음 10:13-16 어린이들을 높이심
 마가복음 10:1-9   결혼의 신성함
 누가복음 14:15-27 가정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에 대한 의무
 마태복음 14:14-21 가난한 자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
 마태복음 19:16-26 재물의 위험
 누가복음 16:19-31 부자와 나사로
  

토론을 위한 문제

1.예수께서 이 지상 가정에서 생활하신 사실은 어떤 의의를 갖는가?

2.지상의 소유물에 관한 주님의 교훈은 우리의 사회 경제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겠는가?

3.국가에 대한 기독교 공동사회의 수도는 어떠해야겠는가?

4.성(聖)과 속(俗)을 분리함으로 인하여 기독교 복음 증거가 어떻게 피해를 입게 되었는가?



제 16 장. 폭풍전야

십자가의 그림자

[홀맨 헌트](Holman Hunt) 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죽음의 그림자]는 나사렛의 한 목공소에 있는 예수를 그리고 있다. 시간은 하루가 끝나갈 무렵,지는 해의 마지막 햇살이 열린 문으로 흘러 들어 오는 때이다. 긴의자를 열심히 만들고 있던 젊은 목수는 옹색하게 구푸린 의자에서 잠시 동안 몸을 일으켜 양 팔을 편다. 바로 그때지는 해가 그 모습을 잡아 뒷쪽에 있는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십자가의 형상을 만든다.이 화가는 예수님의 사역 시초에서부터 죽음이 감돌고 있었음을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시초부터 그 종말은 명백했다. 참으로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이 사실은 명백하게 나타나 보인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타협을 단호히 거부한 순간, 세상의 권세와 공중에 있는 영적 사악에 대하여 결코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도전적 태도를 취할 것을 단연 결정한 그 순간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미 그전에도 오랫동안 조용히 묻혀 살면서 예수께서는 멀리 잇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셨을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성경은 공부하면서 [고난의 종]의 모습에(사53장) 자신이 비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린다는 것은, 또한 전생애를 바친다는 것은,하나님을 부인하고 선지자들을 돌을 들어치는 세상에서는 반드시 고난과 종국에 가서는 죽음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그림자는 처음부터 있던 것이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중대한 고백이 있을 무렵에 그것은 이미 그림자 이상의 것이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다가올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그의 말씀은 비록 직접적이고 명료한 것이었으나 제자들의 마음을 뚫어 그 진리를 완전이 깨닫게 하지는 못했다. 제자들에게 그 일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 일은 그들이 품고 있던 생각과 희망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생이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상한 비유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문자적인 의미의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베드로는 붙들고 간하여 말하되[주여,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외쳤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까지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방해할 수 밖에 없음을 아시고 대답하시되[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고 하셨다 (마16:23). 예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 두려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웠던가는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그들이 가장 좋은 지위에 대한 다툼을 계속한 사실에서 (마18:120:20), 또한 실제로 그 일이 닥쳤을 때 그들은 놀라 어쩔줄을 모르면서 완전히 절망에 빠졌던 사실에서 (마26:31.51)알아 볼 수 있다. 다만 그리스도만이 그 앞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십자가를 직면하려 나아가셨다.

바리새인들의 반대

이제 우리는 닥아오는 폭풍을 지켜보면서 갈보리 십자가 처형에서 그 절정에 달했던 적의이 동기들을 살펴보아야겠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살펴보자.왜냐하면 예수님의 생활과 성품에 대해 주된 공격을 시작한 주역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때때로 변칙적인 사태를 낳는다.그러나 적어도 외부적으로는 그 나라에서 가장 종교적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것을 모의하는 반대파의 우두머리가 된것 보다 예외적인 사건은 없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한 종교 개혁의 진정한 계승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어둡고 어려웠던 시기에 그들의 종교를 강하고 활력있게 하며 오염되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신앙의 수호자로 행세했다. 義가 그들의 기조였으며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공경이 그들의 변함없는 주제였다. 또한 율법은 그들의 도덕적 수준을 높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주의에 의하면 예수님은 상종치 못할 인간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러한 증어가 생기게 된 세가지 근원이 복음서 이야기 가운데 밝혀져 있다. 그 첫째는 그들이 예수님을 사깃군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이었다.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당시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매우 고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갑자기 널리 알려지고 민중이 그를 따르자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비록 그가 공공연히 선포하지는 않았찌만 그의 행동은 메시아의 행동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예수님과 같이 빈민 계급에서 나올 가능성이나 문화적 배경과 종교적 전통을 그들과 같이하지 않는 지도자에 대해서는 그들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더우기 예수님이 그 따르는 자들을 선택하신 방식을 바리새인들 눈에 그 운동 전체가 잘못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외국인에 고용된 배교자[마태]같은 자를 택하여 제자로 삼는 대의(大義)는 분명히 의심을 받을 만했을 뿐 아니라 존경할 만한 것도 되지 못하였다. 지각있는 바리새인이라면 누구나 가까이 오게 하지도 않을 사람들을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기꺼이 환영하셨다. 마치 그는 명망 있는 종교 지도자들 보다 사회의 서민 층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결론은 명백했다. 갈릴리 선지자 예수가 시작한 운동 전체 위에 [이 자는 사깃군이다]라고 마치 한낮처럼 드러나게 쓰여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리새적인 독특허나 죄행(罪行) 즉 멸시하는 죄를 볼 수 있다.한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두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신적이 있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눅18:11)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적인 정신이었다. 바리새인의 죄는 우월한 자가 짓는 무서운 범죄였다. 그 우월감의 가장 나쁜 점은 그 우월감이 주로 영적인 것에서 생겼다는데에 있다. 그들의 교만은 영혼을 파멸시키는 불신앙적인 교만, 즉 선한 것에 대한 자랑, 은혜에 대한 자랑이었다. 이러한 자만의 죌 눈이 어두워져서 그들 자신의 독선에 삼킨 바 되었으며,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좁은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볼 수 없었으므로,그들은 예수님을 사깃군이라 공언하고 몰아낼 것을 계획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간의 갈등에 있어서 두 번째 요인은 율법과 전통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였다. 유대인의 율법을 구성하고 있는 613개의 계명을(이들 중 365개는 금지 명령이고 248개만이 적극적인 명령이라는 사실은 깊은 의미를 가진다.) 지키는 것이 바리새 종교의 전부였으며,또한 그 본질이었다. 정통과 는 이 계명들이 전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진리 외에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만일 누가 바리새인에게 [율법을 주었던 교사들은 오래 전에 죽은 반면 하나님은 아직 살아 계시니 지금쯤은 무언가 덧붙일 것이 있을 것이 아닌가?]라고 암시라도 했다면 혹은 613개의 계명중 상당수가 낡고 현학적인 율법주의 냄새가 나니 새로운 빛과 진리가 들어올 여지를 주기 위해 점잖게 물러냐야 하지 않을까]라고 암시라도 했다면, 그 바리새인은 겁에 질려 두 손을 높이들고 이단 중에도 극악한 이단이라고 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셨으며,따라서 이단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막2:1824).그는 오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그 요구가 폐쇄된 바리새인의 마음에는 터무니 없고 용인할 수 없는 요구로 들렸다.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를 죽게한 것에 대한 책임이 대부분 폐쇄된 마음에서 비롯된 사실이라는 점이 복음서를 통하여 명백하게 기록되었다.[죠지 메레딛]은 말하기를 "교훈을 받지 않는 마음은 인생의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를 세운 것은 바로 교훈을 받지 않은 마음이었다.

사실 이러한 면은 강조해야 할 가치가 있다.생활이나 생각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개방적이고 친절한 마음 편에 있었다. 청교도 이민의 목사였더[죤 로빈슨]은 말하기를 "주님께서 아직까지도 그의 말씀에서 끌어낼 수 있는 진리를 더 갖고 계시다."라고 했다. 불행하게도 역사에는 [인간은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 만큼 생각하기를 두려워 한다]는 [버트란트 러셀]의 말을 입증해 주는 예들이 풍부하다. 또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새로운 진리의 대부분이 그 생존자체를 위해 시초부터 그 진리를 환영함직 한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적인 정직을 포함해서 모든 종띵하의 절대적인 정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는 "내가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4:6).따라서 완전히 폐쇄된 교훈 받지 않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불신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이,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도왔던 그 날에 얼마나 비열한 것으로 드러나 보였던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지 된 세번째 요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는 예수님의 보편주의였다. 보통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인류는 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졌다. 그 하나는 유대인으로 출생한 참 유대인 집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별없이 멸시하여 이방이라고 부른 나머지 모든 민족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이 두 집단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바리새]라는 명칭 자체가 [분리된 자]라는 뜻이었다. 유대교는 참 종교를 독접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도 전하신 시대 정신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어느 곳에도 계시며 만인을 위한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셨다. 멸시 받던 사마리아인들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였따(눅10:30이하,요4:4이하).한 로마 군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고 하셨다. 그는 또한 온 세상의 모든 대로들이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로 모여드는 무리로 가득하게 될 날을 그리기도 하셨다(눅13:29).이러한 보편주의는 배타적인 바리새인들이 신성하고 가장 귀한 것으로 간직했던 모든 것을 받아 치는 격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위험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선포하는 예수를 침묵하게 만들어 버려야만 했다.

3. 사두개인들의 반대

바리새인들의 반대는 이와같이 여러가지 로선을 따라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사두개인들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는 종종 마찰과 긴장이 고조되어 왔으며 때로는 공공연한 투쟁으로 까지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공통의 적의가 그 간격을 메꾸고 그들로 하여금 단번에 친구가 되게 하였다. 사두개파에 대하여 유의해야 할 세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로 그들은 옛 귀족계급 출신들로 이루어진 귀족당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국내외에서의 국가 이해를 좌우하는 정치적 당파였다. 셋째로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제사장 당파였다. 사두개파의 특성은 철저한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였다. 그들의 지위가 기존 질서의 유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은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모든 새로운 움직임에 대해 도전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었다. 종교는 정치의 시녀로 전락되었다. 그들이 가졌던 신앙은 반대당인 바리새파가 가지고 있는 어떤 교리들을 부정하는 등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받아들였으나 역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에 참가했던 전통을 부인했다. 그들은 메시야 사상을 부인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과 개인의 영생에 대한 믿음을 부인했다. 사두개파의 사상과 예수님의 사상이 조만간에 공공연한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와같이 세속적인 사제귀족당에게는 예수님이 극히 위험한 인물로 보였다. 예수님이 자유로운 동안은 그들은 불안을 느꼈다. 그 위험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전국을 어떤 움직임에 휩쓸리게 함으로 로마와 충돌을 일으켜 기존 정치 질서와 그들 자신의 안락한 지위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산종교가 죽은 종교에 끼치는 더 깊은 위험이 있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검과 같아서 겉모양이나 거짓,비현실성을 꿰뚫었다. 그 말씀은 정직으로 타오르는 말씀이어서 불성실한 것을 두려워 떨게 했다. 그 말씀은 살아 있었고 헤아일 수 없었으며,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었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사두개인들은 그 말씀을 증오했다. 또한 그 말씀을 선포하는 예수를 더욱 증오했다. 그들은 저 말이 조용해지고 저 사람이 죽기 전에는 우리는 평안하지 못할 것이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군중의 반대

이런 상황에 또 다른 하나의 요인이 끼어들었다. 예수님의 사역 기간 동안에 대중이 그를 외면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사여 가초기의 굉장했던 인기는 시들기 시작했고 그를 숭배하고 따르던 민중의 수는 현저히 줄어 들었다. 이러한 대중 감정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들의 [좌절된 기대]가 부분적으로 이 사태를 설명해 준다. 예수님의 권능있는 역사를 보고,또한 권위 있는 그의 말을 듣고서 많은 사람들은 로마 정권에 대한 다음 번 반역 폭동에서 그들을 이끌어 줄 바로 그 지도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한 좋은 기회를 헛되이 낭비하고 있는 예수가 그들에게는 못마땅했다. 왕 위에 오르려고 시도함으로써 그들의 기대를 실현시켜 줄 수 있던 좋은 기회에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도 비현실적인 말만 했던 그는 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한번은 그들이 억지로 예수를 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요6:15).최후로 꺼져가던 이러한 기대가 종료 주일날 예루살렘 입성 때에 다시 한번 타올랐다(마21:8이하). 이와 같이 민족적인 지도자로 삼으려는 요구에 보응하기를 한결같이 거절하신 것이 거대한 잡재지지 세력으로 하여금 공공연한 적의를 갖게 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하나의 요인은 바리새인들이 민중으로 하여금 편견을 갖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고의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의심의 씨를 뿌리려고 애썼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자 마자 이러한 목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대표들이 파견되었다(막3:22). 어떤 반대의 흔적이라도 불씨를 부채질 하여 타오르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막2:67:1).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유대 민족의 공인된 종교적 지도자들이었다.따라서 예수님에게 해로운 소문을 퍼뜨리는 그들의 공작은 자연히 쉽게 끌리는 민중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만일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대항하셨다면 일은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수단을 쓰시려 하시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와 같은 교묘하고 간악한 영향력은 계속되었고 그 해독은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들을 떠나서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과 그가 요구하신 것들 때문에 멀어졌다. 그 복음은 편안하고 안락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요구는 엄중하였다. 산상보훈은 만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보통 자연인에게는 전혀 실천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것을 선포한 예수는 견딜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예수께서 요구하신 것처럼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종교는 통속적인 의미의 "대중적"인기를 얻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거침없이 "그리로 들어가는 문은 좁다고 말씀하셨다(마7:14).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나 일곱번의 일흔번을 용서하라는 명령은 과격한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마5:4418:22). 어중간한 태도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말씀하셨다(마5:30). 이러한 조건으로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분명히 영웅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 일은 영웅적인 것이며 지금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사실이 종종 흐려지고 망각된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 자신이 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는 그의 요구에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은 채 단순히 그를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갈릴리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동안 예수님의 엄격한 요구는 곧 한때 그를 열렬히 환영했던 많은 사람들의 열의를 식어지게 했다. 가라지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가 곧 싹이 터서 밝은 희망을 주지만 오래지 않아 시들어 버린다는 비유의 말씀은 바로 이런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마13:5-6). 예수님께서 전하신 바로 그 복음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친구에게 적으로 변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근거 위에 세워진 세상은 결국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5. 영웅예수

이아같이 어두운 그늘이 짙어지고 폭풍이 거칠어져 가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의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대담한 일격을 가하기로 작정하였다. 자신에 대한 반대를 그 본거지에서 맞 부딪쳐 보려고 했다. 그 싸움을 수도 예루살렘에까지 끌고 가려했다. 바로 여기 하나님의 도성에서 최종적인 계시가 주어져야 했으며 어둠의 세력에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져야 했고 구속적 사랑의 완전한 희생이 열납되어야만 했다. 이를 위해[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였다.](눅9:51) 이때부터 한결같은 눈부신 불꽃이.즉 예수님의 영웅적인 정신이 한밤중과 같이 짙어가는 어둠을 통해 타오른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는 반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 이와같이 당당하게 확고한 시선과 발걸음으로 사랑의 무기와 하나님,그리고 자신의 불굴의 정신만을 가지고 악의 세력이 진을 치고 그를 기다리는 곳으로 나아가셨다. 복음서 기자가 이 최후의 행진의 한 장면을 묘사하여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라.](막10:32)고 기록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벵겔]의 훌륭하게 표현된 것처럼 [예수께서는 열정에 사로잡혀 계셨다]만일 복음적인 기독교가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온유함을 강조하면서 종종 타오르는 예수님의 영웅적인 정신을 흐리게 해 왔다면 여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파죽지세로 휩쓸고 가시던 그 노상에서 그의 영웅적인 정신을 재발견해야 하며 그 정신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마음과 양심을 감당할 수 없는 마력으로 사로잡히게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감상주의와 불성실한 것을 참지 못하는 오늘의 세계가 종교는 많은 표어가 아니라 용감하고 아름다운 생의 바탕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지금 또한 교회의 참성도들은 무익한 체념의 한숨으로 [주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라고 말하는 나약하고 무력한 자들이 아니라 마치 전승자의 외침 소리와 같이 [주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외치며 뛰어 나가 천국을 취하는 자이며 힘든 길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그 길을 찬송하며 걸어가는 자, 직장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는 젊은이,그리스도의 법을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법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이러한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지도자이며,사령관이다. 여기 십자가에로 나아가는 노상에 우리가 기꺼이 위해 죽을 수 있는 지도자,영웅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6. 변모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시기 직전,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고난에 대해 그를 강하게 해 주었던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후 엿새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요한을 데리고[헬몬]산으로 가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예수의 용모가 변화했다(마17:1이하,막9:2이하,눅9:28이하). 이 놀라운 사건은 신비에 싸여 있어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이 틀림없지만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체험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이 체험은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영적 체험이었으며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영적 환희의 체험이었다. 보이지 않는,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실제적인 세계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출현했다. 마치 오래 전 도단성에서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이 갑자기 하나님의 불말과 병거를 보게된 것처럼(왕하 6:17)제자들은 천사의 무리가 예수님과 그들 주위를 둘러 서서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을 때 그것이 예수님의 영혼에 얼마만한 힘을 주었겠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찬성의 외침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느니 일에 큰 이해 관계를 갖고 계시며 그 어두운 그늘과 번개구름 그리고 무서운 비극 배후에는 그리스도의 영혼을 승리로 관씌울 것을 약속하는 영원한 권능과 사랑이 있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었다. 그 거룩한 순간에 제자들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한 빛이 예수님의 얼굴에서 비쳐 나왔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에,

예수여, 이 눈이 주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지 못함은 감각의 휘장이 주의 영화로운 얼굴과 나 사이에 드리워져 가리우고 있음이라.

고 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여기 [헬몬산]에서는 마치 그 감관의 휘장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걷어진 것처럼 예수님의 인간모습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 계시되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신비로운 명상, 한 없이 깊은 영교,영혼의 환희 높은 곳에서부터 넘쳐 흘러 들어오는 한,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얼굴을 어떤 천사의 얼굴보다 밝게 빛나게 했던 그 기이한 순간의 체험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변모에는 주의깊게 복음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빠뜨릴 수 없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여기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그의 아버지 하나님께 새로이 최종적으로 헌신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그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희생의 제단에 올려 놓았다. 여기에서 구속주로서 최후의 무서운 사명에 그 자신을 내맡겼다. 나사렛에서 시작되어서 요단강에서 인침을 받고 갈릴리 사역기간을 통해 심화되었던 그 무엇이 여기[헬몬]산에서 그의 존재에 넘쳐 흐르는 환희의 열정으로 십자가를 수락하시는 순간 완전하게 되었다.[오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의뜻을 행하러 왔다니아.]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참뜻은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쓴[킹츠]의 싯귀의 뜻과는 전혀 다르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귀를 기울인다. 여러번 편안한 죽음을 얼마 쯤은 사랑했다. 명상하며 쓴 많은 詩 속에서 부드러운 이름으로 그것을 불러보았다. 나의 고요한 호흡을 대기속으로 데려가도록 이제는 죽는다는 것,한 밤중에 아무 고통 없이 끝나버린 다는 것이 어느 때보다 더 풍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을 예수님 속에서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도 요한은 [그(예수님]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생명을 강렬하게 사랑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의 수난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고 상사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못된다. 그는 죽음을 증오했다. 사망은 그가 파멸하려고 오신 악한 권세중의 하나였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만이 전부였다. 세상을 구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만일 그 구속의 성취가 지극한 희생의 길에 있다면 사망을 기꺼이 맞으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었다. 그는 생명을 매우 사랑하셨다. [변모]의 희열과,함께 절대적인 자기 헌신의 기쁨,그리고 그 순간에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그 얼굴에서 비쳐나와 놀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발 아래 경배하게 했던 거룩한 기쁨이 빛이 뒤섞여 있었다. 예수님 생애의 한 고비였던 신비스러운 사건 한 복판에서 도전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린다.즉 우리가 창조된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음성이다. 그 뜻에의 순종은 희생과 자기 부정,그리고 십자가의 험한 길을 의미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만 기쁨을 발견할 수 있으며 평화와 삼이 태양처럼 밝게 빛나게 된다. 자기 헌신의 길은 하나님의 정도이다. 이 길을 걷지 않는 자는 길을 잃어버린 자이다.

매일 성경

 마가복음  3:22-35   비난빌으신 그리스도
 누가복음 11:37-54   바리새 정신
 마태복음 21:33-46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함
 요한복음  6:60-71   대중의 인기가 사라져감
 마태복음 16:21-28   십자가의 그림자
 마태복음 17:1-13    변모
 히브리서 10:1-13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심
 

토론을 위한 문제

1.예수께서 사역 초기부터 십자가를 직시 하셨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2.예수님의 멧시지 가운데 어떤 요소들이 그로 하여금 대중의 인기를 잃게 했는가?

3.제자들에게 있어 [변모]의 주된 의미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주님의 [변모]는 어떤 의미를 갖는다?

4."교훈 받지 않는 정신은 근본적으로 불신앙이다. 이말에 대해 토론해 보라.



제 17 장. 최후의 몇날

왕이 그의 수도에 입성하심

[헬몬]산에서 변모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전파사시고 가르치시며 남쪽으로 내려가셨다. 가시는 길 주변에 있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여러 동네에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다. 그리고 칠십인을 따로 세워 사명을 주어 보내신 것도 아마 이 기간 중이었을 것이다(눅10;1이하). 그러나 최종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다. 마가복음은 갈릴리 사역 기간에서 바로 예루살렘의 마지막 일주간으로 건너 뛰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연대순으로 살펴볼 때 누가복음의 한 부분 전체가(19:51-18:14)이 사이에 끼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갈보리에서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최소한 두번,즉 10월의 장막절(요7:210)과 12월의 수전절(요10;22)에 예루살렘에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 지방에서 모여드는 순례자들로 예루살렘이 혼잡하게 되는 3월의 유월절 즉 유대인 최대 명절과 함께 예수께서는 그의 결정적인 시기가 다가온 것을 아셨다.

유월절 엿새 전 금요일 저녁에 그는 베다니에 도착하셨다.다음날 안식일을 조용히 쉬셨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그는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셨다. 많은 순례자의 무리가 성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전국에 으명해진 갈릴리 선지자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보려고 길 가에 나와 서 있었다. 그동안 숨기워졌던 모든 베일이 벗겨졌다. 종려주일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메시야로서 입성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 떠들석한 절기에 있었던 화려한 행렬의 의미였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러한 영광을 공공연히 받아들이셨다.대중적 인기는 한번 일어났다가 사라졌으나 이제 다시 한번 짧은 순간이나마 되살아났다. 잿물로 변했던 불길이 벼란간 다시 타올랐다.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호한 순례자들의 대부분은 말할 것도 없이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즉 그 주간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쳤던 도시의 잡배들과는 전혀 다른 북쪽 갈릴리 예수님의 동향인들이었다. 대중의 감정이 이미 그를 거슬러 흐르기 시작한 후에도,실로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그들의 친구로, 영웅으로 생각했던 수천의 사람들, 즉 그로 인해 육신의 병이 나았던 사람들, 얽혔던 가정이 원만하게 되었던 사람들,영적으로 모든 것이 새로와지게된 남녀의 무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들의 감사와 찬사를 그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를 환영하는 무리의 외침 속을 지나 왕은 그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셨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분을 선포하셨다. 더 이상 사역 초기에서처럼 군중들이 갈채를 피하시지 않으셨다. 갈릴리 사역 시기에 제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숨기신 것과는 달리 더이상 자신의 왕적 위엄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렸을 때부터 종종 깊이 생각해왔던 옛 위대한 선견자의 말씀이 맴돌고 있었다.[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도다] (슥9:9).드디어 옛 선지자의 꿈이 이루어졌다. 영원히 시온의 딸이 그 사랑하는 자,그 주를 기다려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영원히 다윗의 왕위가 비어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종려 주일의 그 행로등으로 예수님께서는 말로써 하는 것보다 더 명백하게 선포하셨다[네 왕을 보라!]

예루살렘 입성은 행동화된 비유였다. 그 일이 신실한 자에게는 그들이 기다리던 표적이 되었다. 또한 이 일은 예수님의 최종적인 사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뒤 따라 올 격렬한 행동과 감정에 알맞는 전주곡이었다. 이 일은 예루살렘의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집중시켰으며 그 결과 그 주간 동안의 모든 관심을 예수님께 집중시켰으며 그 결과 그 주간 동안 어디를 가든지 무리가 그를 따랐고 그의 이름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었다. 이 일이 그를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도전장이 된 사실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일은 그들에게 대한 도전되었다. 그들은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으나 거리를 지나 행진하던 이 행렬만은 참을 수 없었다. 이 광신적인 찬탈자를 아주 억눌러 버려야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란한 절기에 도전을 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그 날 받아들이셨던 왕적 영광의 표는 그 도전의 실마리를 제공했으며 군중이 외친 [호산나]가 그것을 단단히 못박았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세력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는 자신의 권능을 알고 계셨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왕좌에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싸움에 대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흥분으로 인하여 군중의 가슴속에 그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민족적 혹은 현세적 메시야 사상이 되살아 나지나 않을까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의 나라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국에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조처를 취하셨다. 즉 그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군마를 타시지 않고 나귀의 새끼를 타셨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라 그는 겸손하여 나귀,곧 멍에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21:5). 더우기 그 행렬이 예루살렘을 향해 서서히 움직일 때 예수님이 제2의 [막카비]라고 상상했던 자들을 놀라게 할 만한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구부러진 길이 감람산의 모퉁이를 꺾어 도는 곳에서 예루살렘성이 벼란간 시야에 들어왔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멈추시고9눅19:41-이하) 말없이 앉아서 생각에 잠기셨다. 그는 그 앞에 펼쳐 있는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셨다. 놀랍게도 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예수님께서 우신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우신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사랑하는 성의 완악함과 우매함으로 인해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셨는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불과 칼날이 예루살렘의 운명을 결정지을 임박한 날을 내다보고 계신 것으로 스스로를 내세울 것을 바랐던 그 지도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상하게 여겼으며 마음이 동요되었다. 행렬이 다시 이루어져서 움직였을 때 아마도 그들의 호산나 소리는 전보다 덜 확신에 찬 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이 그들이 바랐던 왕이었던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각은 그들의 새각과는 달랐다. 그날이 끝나고 그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몰래 빠져 나가 무력으로 왕위에 오를 메시야를 아직도 열망하고 있던 자들의 심한 실망과 분노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베다니로 돌아왔다.

2. 짙어가는 그림자

다음 이틀,월요일과 화요일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에 계셨다. 그는 대담하게,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던 불경건한 매매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직접 채찍을 들고 징계하셨다(마21:12-13). 예수님 영혼 속에 있던 격렬한 성품이 성전 뜰에 서서 끈으로 만든 채찍을 머리 위에 높이 쳐드시고 장정들도, 무리도 겁에 질려 말못하고 물러서게 했던 그 때만큼 눈빛이 무섭게 타올랐던 때는 없었다. 또한 그를 반대하는 자들과의 논쟁,특히 우리가 이미 살펴 본 가이사의 세금 문제에 대한 논쟁,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궤변과 위선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 그들 사이를 완전히 벌어지게 하고 예수님의 운명을 결정지우게 된 사건(마23장) 역시 이때에 있었다.

유월절 이틀전[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최종적으로 제거하는 방법과 수단을 논의하기 위해 급히 소집되었다. [산헤드린 공회]는 71인으로 구성된 귀족의 조직체였는데 유대민족의 총회와 최고 재판부를 겸했으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리새파와 지도자들이 함께 그 회원이 되었기 때문에 심의중에 종종 마찰과 쟁론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협약이 이루어져 양편이 그의 체포를 요구하는 일에 합세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를 체포했느냐였다. 정말 어려운 문제는 언제 변할지 모르는 군중심리였다. [산헤드린 공회]의 공개적인 공적 조치가 군중의 감정으로 하여금 예수님 편으로 급변하게 하지 않을런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것은 주의 깊은 계략을 요하는 매우 난처한 문제였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해결책이 스스로 굴러 들어왔다. 예수의 제자중 하나가 이들을 만나 보기를 간청했다. 그는 즉시 안내되어 들어왔다. 그리고 예수를 은밀히 어둠을 이용해 체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자신이 예수님의 행동을 미리 알고 있었다. 예수가 잘 가시는 곳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서 예수를 마음대로 체포하게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더러운 배신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 사이에 터놓고 오고갔다. 피흘린 돈이 주어짐으로 협정이 맺어졌다(마26;14이하).

다락방

이 주간의 수요일은 예수께서 [베다니]에서나 산중에서 혼자 보내신듯 하다.그러나 목요일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는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한 친구의 객실에 앉아계셨다. 이제 불과 한두시간만 지나면 폭풍이 무섭게 휘몰아 칠 것이었으나 여기 이 조용한 다락방에는 하나님의 참 평화가 가득했다. 이 방에서 기독교의 영원한 성례가 제정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거할 곳이 될 천국]에 대한 불멸의 말씀이 있었으며 보혜사 성령의 약속이 주어졌다. 또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전 최후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부터 그에게 주신 자들, 즉 궂은 때마 맑은 때나 수년간은 따라다니며 동행했던,그리고 오늘 밤 그를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소수의 충성스런 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면서 다시 만날 것과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따른 잔을 그의 손에서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이 다락방이 기독교인들에게는 후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세워졌던 모든 그대한 교회건물들 보다 더욱 친밀하고 귀중한 곳이 되어왔다는 것은 약간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다락방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식탁에서 일어나신 후 제자들을 이 정적이 덮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후 지도자 없는 상심한 제자들이 폭도들로부터 숨을 곳과 피난처를 찾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이 다락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다락방은 잃어버린 그들의 선생에 대한 제자들의 절망적인 슬픔을 목격했던 장소였다. 또한 예수님께서 빗장을 지른 잠긴 문으로 들어오셔서 그가 부활하여 사신 것을 보이셨을 때 그 슬픔이 당혹한, 믿기지 않는 기쁨으로 바뀌게 되었던 곳이기도 했다(요20:19).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후 아마도 이곳에서 그들은 다시 모였을 것이며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그들의 영혼을 오순절의 영광으로 넘치게 하시고 교회를 탄생하게 했을 것이다(행1:13.2:1).만일 전설이 말하는대로 이 다락방이 베드로가 감옥에서부터 피신하여 왔던 집과 같은 곳이라면(행12:12) .복음서에서 이와같이 신비스런 인물로 나타나는 [그 집 주인](막14:14)은 다른 사람이 아닌 마가복음의 저자 [요한 마가]의 어머니,즉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마가복음에서 예수와 함께 [겟세마네]에 있다가 예수께서 잡히시자 벗은 몸으로 도망했던 [어떤 청년]은 바로 [마가]자신이었을 것이다(막14;51).우리는 그가 그 아버지 어머니를 도와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그 다락방을 예비하며 그날 밤 최호의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무슨 일이 생기나 보기 위해 감람산으로 그들을 뒤쫓아 갔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어쨌든 많은 추억을 지닌 이 다락방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끌고 사로잡게 될 것이다. 성찬 떡이 나누어질 때마다 성찬 포도주가 부어질 때마다 성찬 떡이 나누어질 때마다, 성찬 포도주가 부어질 때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눅22:19). 이것은 주님의 마지막 소원이었으며 기독교인들은 항상 이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일은 단순하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의미를 지난다. 수세기에 걸쳐 성례를 행하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왔으며, 희망이 불붙고 사랑이 유지되어 왔다. 우리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려고 할때 우리는 세가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첫째로 말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 언어가 얼마 못되어어서 무용(無用)해진다는 것은 안다.또한 가장 깊은 것들을 전달해 줄 말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안다. 말의 언어 너머에는 예술의 언어 즉,음악,회화,조각 등이 있다. 물론 종교는 이러한 것을 필요로 하나 여기에는 역시 한계가 있어 예술의 언어가 무용해져 버린다. 이 이상에는 행동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이것만이 삶의 궁극적인 것들을 전달할 수 있다.이러한 행동의 언어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떡을 떼면서 눈앞에 갈보리의 수난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떡을 떼면서 눈앞에 갈보리의 수난을 그리며 포도주를 분배하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피를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다락방에서 다락방에서 제정하신 성찬의 의미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교회는 [주의 만찬]시행에서 단순히 [기념]만을 찾지 아니하고 언제나 [임재]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찬에 있어서 우리가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믿음에 그 자신을 실감케 하시며 정결케 하는 교제로 우리를 축복하신다.[오,내 주여, 여기에서 내가 당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나이다]

4. [겟세마네]

밤이 깊어진 후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사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로 가셨다(마26:36 이하).[감람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장소는 예수님께서 자주 가시던 곳 중 하나였다. 그들이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이곳으로 온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밤 예수님께서는 그 영혼의 짐이 그를 잘 아는 자들까지 함께 나눌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또한 그의 영이 혼자서 하나님과 있기를 바랐으므로 대부분의 제자들은 숲 밖에 남겨두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까지도 조금 떨어진 곳에 두시고 어두운 곳으로 홀로 기도하시러 나아가셨다. 그는 무릎을 꿇고 엎드리셨다. 그리고 얼굴을 땅에대셨다.그러자 누구도 알지 못할 고통이 시작되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 고통이 계속되는 동안의 예수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생각해 볼 필요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명을 찾는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짓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으니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일을 피하려고 하게 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순교자들도 찬송하면서 굽히지 않고 그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하물며 그들 누구보다 더 큰 용기를 가지셨던 예수님이야....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울부짖게 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였다. 그것은 온 세상의 수치와 모든 인간들의 짐이었으며, 그 무서운 시간에 이것들을 죄없는 그의 마음에 떠맡고 계셨다. 그것은 죄의 무서운 공포와 혐오,그리고 저주를 벼란간 의식하게 된 것이었다. 바울이 그 특유의 대답함으로 표현한 것처럼 그것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가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바된 것이었다.(고후5:21).이 이상 더 깊이 캐고 들어가려고 해서는 안된다.그리스도께서 그의[사랑하는 제자들]까지도 뒤에 남겨 두셨다면 우리는 이 일에 개입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만 멀리 서서 어둠 속에서 외치는 [내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외침을 들을 수 있을 뿐 이다. 그러나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또 다른 외침이 조용하고 단호한,그리고 위대한 수락의 평안으로 가득한 기도 소리가 정적을 들려온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이와같이 그의 전생애를 통해 한번도 흔들린 일은 없었던 그의 믿음은 여기에서도 승리하였다.

이때쯤 제자들은 이 며칠간의 긴장으로 심신이 지쳐서 잠이 들어 있었다.그들이 만일 깨어 경게하고 있었더라면 숲 밖에서 깜박거리는 횃불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깨어 지키지 않았다. 어쨌든 무력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에서부터 멀었다. 그래서 유다와 성전 군관들, 그리고 그 부하들이 왔을 때 그들은 예수를 체포하는데 거의 아무 어려움도 없음을 발견했다. 예수님께서는 끌려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완전히 기력을 잃고 "모두가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다"(마26:56).

5. 유다의 수수께끼

그 반역의 밤에 있었던 사건을 다루기 전에 먼저 예수를 배신한 유다에 대해 살펴 보아야겠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 한사람이었으며,하나님 아들의 은혜로운 임재에 감화를 받아온 유다가 이와같이 무서운 배신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은 일반에게는 전혀 납득이 가지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유다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 사탄의 화신이며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만족스러운 해답이 못된다. 이 주장은 또한 복음서 기자의 관점이나 심리학적 사실을 정당하게 취급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좀더 깊이 살려 보아야겠다.

베드로나 안드레 또는 그 나머지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다에게도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았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그는 예수를 위해 가정과 친척을 버렸다. 물론 현세적 지상 왕국에 대한 희망이 그러한 결정에 작용한 것은 틀림없으나 이런 것 이상의 사실 즉 그가 예수님에게서 흡인력을 느꼈다는 사실이 있다. 갈릴리에서 온 젊은 선지자의 호소는 이 전 그의 전생에에 있어서 어떠한 것보다도 더욱 그를 감동하게 했다. 그래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따를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이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판별하는데 익숙한 예수님의 눈이 유다 속에서 참 사도의 자질을 찾아내었다. 여기에 천국을 위해 훌륭하게 봉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셨다. 종종 예수님께서 유다를 그 곁에 있게 하신 것은 제자 가운데서 배신자가 생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에정 계획에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불합리할 뿐 아니라 불신앙적이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것은 예정론을 운명론으로 바꾸어버리는 주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을 비난하는 주장이다. 이것은 거룩한 설화을 엄숙한 연극 연기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주장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열한 제자를 부른것과 꼭 같은 이유로 유다를 불러 제자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며 고상한 장래가 촉망되는 한 인간을 보셨다. 물론 그는 다른 것들도,즉 그 영혼의 은밀한 곳에서 혼잡을 이루고 있는 도덕적 모순들,빛과 어둠의 이상한 갈등 용기와 비겁,자기 헌신과 자기애등을 보셨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그가 인간적인 욕망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의미했을 뿐이며 또한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에서부터 그의 성도들을 모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 있어서도 이와같이 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께서 맨 처음 제자가 되었을 때는,가능성 많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되어갔다. 그는 생의 위대한 모험에 나섰으며 그 자신 그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차츰 미묘한 변화가 그에게 찾아왔다. 마치 그것은 봄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았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전보다 편치 못했다. 다른 제자들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런지 모르나 예수님은 아셨다. 이 시기에 예수님께서 한밤중에 하신 은밀한 기도에는 유다의 이름이 괴로운 짐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유다의 태도에 생긴 변화는 제자들의 현세적 물질적 만조가 된 인기의 조류를 타지 못했던 것이 직접적인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다에게는 이와같이 비실세적이고 꾸물거리는 방법이 이해되지 않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조가 된 인기의 졺는 그들 모두를 행운과 굉장한 성공에로 날라다 주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버릴 예수님때문에 그 기회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의 마음은 쓰리고 억울했으며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그 배신 행위의 참 동기가 무엇인가를 암시해준다. 이 동기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돈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였을까? 의 본성에 탐욕의 기질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또한 그는 전대의 돈을 훔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음서 기자중 요한은 솔직하게 그를 가리켜 도적이라고 말하고 있다(요12:6).그러나 돈이 유다로 하여금 그의 선생을 팔게 한 주된 동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일 돈이 그의 목적이었다면 매우 용이하게 제사장들과 더 나은 거래를 할 수도 있었다. 은 삼십량은 두배 또는 세배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시기심이 그 동기였을까? 이것 역시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다른제자들이 전부 갈릴리 출신인 반면 그만이 열두 제자중 유일한 유다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가롯"이란 말은 유다의 한 동네인 [가롯출신의 사람]이란 뜻이다) 그를 외롭고 소외된 자로 만들고 비판적인 사람이 되게 했을런지도 모른다. 또한 그와 같이 야심적인 성격의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택하여 더욱 가까이 두신 것이(막5:379:2) 마음 쓰리게 느껴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범죄를 시기심 만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무 가볍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이 그 동기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유다는 닥아오는 재난을 내다 보았으며, 그 재난이 닥칠 때 지도자인 예수님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사가도 함께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즉 예수님께서 가라앉게 될 때 다른 사람도 함께 끌려 들어가게 될 것으로 알았다. 두려워진 유다는 최악의 사태가 닥칠 때 그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길은 당국이 그들의 적을 잡도록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밀고자를 놓아줄 것을 바라서[공범자 밀고]의 증거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는 이 동기를 제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드 퀸시](De Quincey)는 유다가 배신자 노릇을 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집권자가 되게 하려는 수단이었다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그의 선생이 자신을 내세워 왕위에 오를 기회를 하나씩 놓치고 있는 곳을 지켜 보면서, 조급해진 유다는 드디어 만일 예수님께서 스스로 행동을 취하지 않으신다면 그로 하여금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 분명히 그렇게 하는 방법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는 분기하여 그의 권능을 나타낼 수 밖에 없을 것이며 그러면 그의 왕국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매우 교묘한 주장이다. 그리고 만일 이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다시 한번 역사상에 최악의 평판을 되살아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이 주장은 예수님을 우유부단하고 일을 미루는[햄릿]과 같은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배신자 유다 대신에 [생각을 잘못한 聖者]유다를 보여주고 있으며 뿌리채 악에 물든 범죄 대신 판단상의 오류를 말하고 있다. 복음서에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단하나도 없다.이 주장은 예수님 자신이 그 제자의 행위를 정죄하신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 판단상의 오류나 지나치게 열렬한 제자의 경솔함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용서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만"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고 말씀할 수 밖에 없었다(막14;21).그렇다면 [듸 퀸시]의 주장도 젖혀놓을 수 밖에 없다 이제 남은 것은 거의 참 동기임이 확실한 [유다의 비뚤어진 원한]이다. 그의 세속적 희망에 대한 좌절이 원한을 키웠으며 그 원한이 깊어져 증오를 변했다. 유다는 자신이 거짓된 구실에 이끌려서 기만당했으며 몇년 동안의 그의생활은 헛된 낭비였다고, 또한 예수님이 그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그를 절망적인 재난에 끌어 넣은 것 뿐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냐 이것을 그대로 갚아 주리라! 그는 앙갚음을 결심했다. 이 외에도 그는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눈이 그를 마치 책읽듯이 꿰뚫어 그의 생각과 은밀한 성격의 불성실한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이것이 그의 분노와 원한을 더욱 강렬하게 했다. 그는 배반할 것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한번 이런 생각이 그 마음을 흔들 때에 유혹자 사탄의 나머지 일은 손 쉬웠다. 그 생각은 곧 확고한 의도가 되었으며 그의 영혼은 놀라운 속도로 타락해갔다. 이제는 아무것도 그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나(요13:5).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마지막 호소도(요13:26)그를 구해내지 못했다. 그때 쯤 그는 이미 되돌릴 수 없게끔 그의 영혼을 팔아버린 후였다. 이제는 다만 그것을 실행하는 행위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날밤 공범자들과 미리 짠 신호는 어떤 악한 영이 암시한 것일까? 동산에서 유다가 그 선생으리 고함소리나 때리는 것이나 찌르는 것으로가 아니라 입맞춤으로 배반했을 때 그것은 소름끼치는 무서운 범죄의 절정이었으며, 인간의 무도함이 갈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파렴치한 극에 달한 것이었다.

매일 성경

 누가복음 19:26-14  승리의 입성
 마태복음 21:10-14  성전을 깨끗케 하심
 마태복음 23:13-39  바리새인들을 공격하심
 마태복음 26:17-30  다락방
 요한복음 13:1-17   만민의 종
 마태복음 26:36-46  겟세마네
 마태복음 26:14-16  유다의 신비
 마태복음 27:3-10   유다의 신비
 

토론을 위한 문제

1.종려주일 행진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2.성전을 깨끗케 하실 때 예수께서 인용하신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은 오늘의 교회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3.당신은 유다가 배신하게 된 동기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4.성찬이 거행된 때마다 그 속에 과거.현재,미래 전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일 수 있는가?



제 18 장. 재판 받으시는 예수

1. 이중재판

[겟세마네]와 [갈보리]사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이중적 재판을 받으셔야 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를 재판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실제로 그것은 심문이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나고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 그것은 법적 살인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앞에 계셨다. 이것은 교회 재판이었다. 그 다음 그는 로마 법정에 보내어졌다. 이것은 세속 재판이었다.예수님에 대한 혐의가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산헤드린 공회]만으로서도 [빌리도]에게 그 사건을 전혀 의뢰하지 않고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광대한 로마 제국의 다른 모든 속령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다에서도 로마 제국은 피정복민에게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치권 허용원리] 현명한 적용은 전 로마제국의 평화 유지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사형 선고가 관계되는 사건에 있어서는 최종적 결정권을 로마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사건은 유대인 법정을 거친 후 로마 법정 앞에서 재심리를 받아야 했는데 이 법정은 이미 선고된 판결에 동의하여 피고인에게 처형 선고를 내리거나 아니면 그 판결을 반복하여 죄수를 놓아 줄 권리를 가졌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일어났던 일을 잘 설명해 준다.

2. [안나스]앞에 서신 예수

[겟세마네]에서 예수를 체포했던 성전 군관들은 먼저 그를 [안나스]에게로 데리고 갔다(요18:13).그러나 이러한 절차는 엄격하게 말해서 전혀 비공식적이며 독단적인 것이었다. [안나스]는 그 때 공직을 맡고 있찌 않았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영향력과 위세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그의 의견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이십년 전에는 그 자신이 대제사장이었으며 지금도 예의상 그런 칭호로 불리웠다. 그리고 그의 아들 중 다섯 이상이 그를 계승하여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대제사장직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탄핵하였던 성전 안에서의 장사매매를 개인적 이익을 위해 개설했던 자도 아마 [안나스]였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체포하게 했던 음모의 배후에 있었던 악한 일을 꾸미는 천재였다. 예수님께서 끌려가신 때가 자정이 지난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노인은 깨어 있었으며,또한 이 사건을 지체없이 밀고 나가기로 마음 먹고 있었다. 비공식적인 예비 심문이 있은 다음 그는 예수님을 [가야바]에기로 보냈다.

3. [가야바]앞에 서신 예수

[안나스]의 사위였던 [가야바]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었다. 이 사람은 유대 민족의 공인된 정신적 보호자였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최고 대변자이며 대표였다. 그에게는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영광스러운 특권이 위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한 자는 바로 이 사람이었다. 역사는 최상의 종교적 기회와 환경이 인간의 구원을 보증하지 못하며 그 자체로는 인간의 영혼을 고상하게 하지 못한다는 진리에 대해 이 보다 더 놀라운 에증을 제공하지 못한다.[천로역정]을 쓴 [죤 번연]은 그의 책을 끝맺으면서 [그 다음에 나는 바로 천국 문에서도 지옥으로 가는 길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체포 소식은 이 때쯤 널리 퍼져서 [산헤드린 공회]의 많은 회원들이 대제사장 집에 모여들었다. [산헤드린 공회]는 그 법규에 의하면 해가 뜨기 전에는 합법적으로 소집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야바]와 그 나머지 사람들은 지체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한 심문을 즉시 진행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면 해 뜬 다음의 공식회의에서 해야 할 것으로는 비공식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인준하는 것만이 남게 될 것이고 귀중한 시간이 절약될 것이었다(마26:5727:1). [가야바]는 예수님에 대한 심문을 그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대한 것부터 시작했다(요18:19). 물론 가야바는 예수님으로부터 그가 반로마적 감정을 옹호한다고 뒤집어 씌울 수 있는 진술이 나오기를 바랐다.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로마 총독 앞에서 재판이 시작될 때 결정적으로 불리한 증거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첫번째 심문은 실패로 끝났다.[저희가 나의 말을 아느니라.] 사실상 예수님은 이 말만을 하셨다.[내가 은밀히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아니하였거늘,즉 모두가 다 알고 있거늘 어찌하여 나에게 묻느냐?]는 말씀이었다. 이로써[가야바]의 의도는 좌절되었다(요18:20).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두번째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더 이상의 번거로움이 없이 정죄의 선고가 통과되게 할만한 증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서 증인들을 불러 들였다. 그러나 그 증인들은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으며 어쨌든 그들의 증거는 박약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다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막 14:56-59).심문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과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협의를 실증하는 것의 실패로 점점 근심과 불안이 더해 가자[가야바]는 갑자기 그의 최후의 가장 무서운 무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단도 직입적으로 그는 예수님께 스스로 메시야임을 주장하는 가고 답변을 요구했다. 그는 지금 예수님께서 스스로 유죄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는 영원히 없다는 것을 느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시고 덧붙여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의미 심장하게 말씀하셨을 때 대제사장은 그의 적이 드디어 그 자신을 드러내어 고발자의 손에 떨어진 것이 너무 기쁘고 득의한 나머지"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그 입으로 스스로 정죄하니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라고 외쳤다(막 14:63-64).이것과 함께 그 법정은 만장 일치로 사형을 결의하였다.

그들의 모든 의도와 목적대로 유대인 법정은 끝나게 되었다. 그 판결의 공식적 인준은 해뜬 후 [산헤드린 공회]가 공식적으로 회집될 때 몇분 동안에 처리될 것이었다. 그동안 유죄 판결을 받은 예수님은 간수들과 폭도들의 처분에 맡겨질 것이었다. 그 법정의 배심원들 마저도 뒤이은 불경건한 잔인한 짓에 가담했다(막 14;65).이러한 무도한 비행이 저질러지고 있는 동안에 복음서의 기자가 한결같이 기록하고 있는,교회의 양심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시몬 베드로의 부인]사건이 일어났다. 마지막까지 열렬하고 충성스러웠던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 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에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오게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누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불안한 느낌을 가졌다. 그를 따라다니며 지켜보는 시건들이 있었다. 그곳은 온통 지켜 보는 눈물과 가득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도전이 갑자기 저면으로 피할 수 없게 찾아왔을 때 그는 용기를 잃고 그리스도가 그에게 아무 상관없는 인물이라고 맹세하여 외쳤다. 바로 그 때 파수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지나갔으며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들으셨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이 생각났더라"(눅 22:61). 그 돌아보시는 눈길에는 슬픔과 비탄,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부끄러움을 느낀 제자는 심히 통곡하면서 어두운 밤속으로 비틀거리며 나갔다. 모든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이 기사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을 그때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 대한 모든 불충성은 베드로의 비극적인 실패만큼 어두운 것이며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다시 만나 베드로에게 그의 양을 먹이라고 하신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4. 재판의 불법성

이제는 예수님에 대한 종교 재판에서부터 세속재판으로 넘어가야 할 차례이다. 그러나 먼저 이 때까지 있었던 재판 절차에 있어서 법률과 공의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 점들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어떠한 점에 있어서[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은 불법적이었는가?

a) 예수님의 문제를 결정할 법정 자체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의 공범자였다는 점에서 불법적이다.[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은 유다의 배신 행위에서 그 절정을 이룬 은밀한 음모에 뗄 수 없이 연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사람들이 배심원이 되게 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시초부터 그 재판 절차가 무효였음을 증명한다.

b) 그 재판은 유대인의 법률이 요구하는 대로 피고에 대한 명확한 혐의의진술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대로 [가야바]와 그의 무리에게 정말 어려웠던 문제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줄 만한 혐의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증인들의 말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혐의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을 때,그 사건을 기각하는 것이 그 법정의 의무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고 재판은 계속되었다.이것 역시 불법이다.

c) 더우기 그 사건을 심리하는 판사는 사건을 기소하는 공소인이기도 했다. [가야바]는 이 두가지 역활을 겸했다. 그는 사전에 유죄판결을 내리기로 결심한 후 그날밤 그 법정의 재판장 자리에 앉았다. 그는 역사상 가장 냉소적이고 냉혈적인 말들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유익하다."(요11:50)고 이미 선언하지 않았던가? 증언 청취가 실패로 돌아가자 재판장 자신이 피고에게 유도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러한 처사가 법률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고 있었으나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의 손에서 빠져 나가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백번 이상이라도 법을 어기려고 했다.

d) 더우기 피고를 변호하기 위한 증인들이 없었다. 아무도 소환되지 않았으며 나타날 기회도 없었다. 예수님은 온 세상과 맞서 있었다. 그를 고소하는 자의 음성 외에는 어떠한 음성도 허용되지 않았다.

e)그러나 그 재판의 결정적인 불법성은 재판을 급히 서둘러 마쳤다는 데에 있다. 깊은 밤중에 그 사건은 서둘러 끝마쳐졌다. 밤 사이 되어진 일을 인준하기 위해, 그리고 합법성의 겉 모양만이라도 부여하기 위해 해뜬 후 짧은 공식 회의를 소집한 것도 [산 헤드린 공회]의 심야 재판이 완전한 위법이라는 사실을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최악의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사형에 해당하는 혐의 사실을 재판한 경우 사형 선고는 심리가 끝난 다음 날에야 내려질 수 있다는 법률이 있었다. 즉 시간이 지나야만 했다. 더우기 그러한 사건은 안식일 바로 전날이나 큰 절기 중에는 청취할 수 없다는 법률도 있었다. 그들은 이 두가지 법을 다 위반했다. 무리들이 그의 편에 서서 들고 일어날 기회가 생기기 전에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절망적인 안타까움에서 그를 고발하던 자들은 원리 원칙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정의를 조각 조각 찢어 버린 것이었다.

5.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

[가야바]와 그의 추종자들이 자기들의 할 일을 끝낸 후 예수님은 그 다음 단계의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 총독에게로 끌려가셨다.[본디오 빌라도]는 6년 동안 행정관으로 있으면서 그의 직책이 결코 한가로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직할 식민지였던 유다는 [디베료]황제의 광대한 영토 중 가장 까다롭고 폭동이 잦은 곳의 하나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당면했던 행정적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불필요하게 가혹하고 무자비했던 [빌라도]는 그가 다스려야 할 백성들에게 전혀 인기가 없었다. 그는 유대인을 경멸했으며,유대 민족의 종교적 전통을 전혀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감정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으로 또한 로마가 공식적으로 시인한 유화 정책을 완전히 묵살하고서 [빌라도]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거리로 [가이사]의 神像을 지나가게 했던 일을 잊지 않았다. 또한 [빌리도]가 폭동의 기민을 알아채고 군인들을 군중 속으로 들어가게 하여 유혈의 살륙을 벌이게 했던 일들을 잊지 않았다(눅13:1).[산헤드린 공회]나 일반 대중들도 [빌리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요는 기적을 낳는다.이제 [가야바]와 그 무리의 희망은 그 총독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그를 그들의 편으로 만든 다음 예수님의 사형을 허락받는 것이었다.

[빌리도는]정당한 절차대로 협의 내용의 확실한 진술을 요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9요18:29).그러나 이것은 매우 난처한 요구였다. 왜냐하면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유죄로 판결했을 때 우리가 이미 살핀대로 그들은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 즉 신앙이 없는 로마인에게 중한 죄로 보이거나 사형을 받을만하다고 생각될 것 같지 않은 신성모독죄를 적용했기때문이었다.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그를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모호한 답변을 했다(요18:30).당연히 이 답변은 [빌라도]를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더 이상의 혐의 사실을 요구했다. 그러자 예수님을 고소하던 자들은 이전에 그들이 저질렀던 불법에 하나를 더 첨가하여 슬며시 본래의 신성모독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그 대신 다른 혐의 즉 [빌리도]가 받아들여 심리할 수 밖에 없을 반역 혐의를 내세웠다(눅 23:2). 그들은 먼저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하고"(이것은 비방에 지나지 않았다). 두번째로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이라고 했다."(이것은 비록 그들이 의미했던 뜻과는 다르지만 사실이었다) 고 주장했다. 이러한 삼중적 고소 내용을 들은 다음 [빌라도]는 예수님을 혼자서 비공식적으로 심문하기로 결정했다. 역사상 어떠한 사건의 장면도 이와같이 생생하게 온 세상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일은 없었다. 이 이야기의 숨은 뜻을 찾아가면서 읽어가면 우리는 [빌리도]가 운명이 그에게 맡긴 이 이상한 죄수를 어떻게 처리할까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떤 그 중대한 시간 내내 그 죄수는 재판장 [빌라도]의 영혼을 위해 고심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빌리도]는 아직 절망적이지는 않았다.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를 그 자신으로부터 구원해 주려고 하셨다. 더우기 총독은 이 사람이 그가 다루어야 했던 보통 범죄자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볼 만큼 이해력이 빨랐다. 그는 그 앞에 서 있는 이 사람, 폭도들이 밖에서 죽여 다랄고 외치고 이는 이 사람의 침착함과 확고함, 그리고 위엄과 왕다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심문을 끝내고 그의 판결을 - [이 사람은 죄가 없다!]라는 판결을 공포하려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 판결은 군중의 감정을 격하게 했다. 이제 처음으로 [빌라도]의 태도에 두려움과 불확실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그는 귀찮은 사건이 생기게 될 것을 내다보고 이 어려운 사건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했다.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노력으로 그는 세가지 방편을 사용했다. 그 첫째는 예수님을 헤롯에게로 보내는 것이었다(눅23:16).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이므로 헤롯의 관할 아래 있다고 생각해 낸 그는 (다행히 그 때 예루살렘에 와 있던)헤롯으로 하여금 그 책임을 수락하게 해서 그 재판의 시종을 담당하게 하려고 했다. 그것은 교묘한 방편이었으나 불행하게도[빌라도]에게는 그가 바랐던대로 되지 않았다.잠시 후 호송병들이 죄수와 함께 헤롯의 전교를 가지고 그의 궁전으로 되돌아 왔다. 그 전교는 로마 총독에게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해 감사드리나 로마 총독의 특권을 빼앗아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그 사건을 총독이 끝내 줄 것을 간청한다는 취지였다.[빌리도]가 시도한 두 번째 수단은 비겁한 수단이었다. 그는 에수님께서 잘못을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그를 채찍질한 후 석방하겠다고 제안했다(눅23:16). 이와같이 유감스러운 타협책은 물론 전혀 정당하지 못한 것이며 조리에 맞지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두려움에 쫓긴 가엾은 인간이 예수님께는 그의 의무를 다하고 동시에 군중을 기쁘게 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책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노한 제사장들이 그 판결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것도 놀랄 것이 못된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는 외침을 웅성거리는 소리에서 점점 소란한 외침으로 변해갔다. 두 번 시도에서 실패한 [빌라도]는 이제 최후의 방안을 시도했다. 그는 예수님과 [바라바]를 놓고 혹시라도 군중들이 예수님을 살리기 원할 것을 바라서 그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했다(요18:39). 그러나 이 계획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바라바]를 살리라는 외침 소리가 크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벼란간 군중 속에서 한 음성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고 외쳤을 때 [빌라도]는 어찌 할줄을 몰랐다(요19:12).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지웠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그 위협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두려웠던 일으니 그에 대한 불평이 로마에 있는 황제에게 들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과거 생활속에서 심문에 걸리게 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없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기꺼이 그 앞에선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했으나 그 자신의 이익과 나쁜 과거가 그 길을 막고 죄 없는 희생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소리지르는 군중들에게 굴복하고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었다.

6. 재판장으로서의 예수

이렇게 해서 재판 아닌 재판은 끝났다. 이 장을 끝맺으면서 이야기 전체에 있는 이상한 특징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 사건에 대한 성경 기록을 연구해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바로 그의 눈 앞에서 국면이 뒤바뀌어 있다는, 즉 예수님이 [가야바] 나 [빌라도],[헤롯]앞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끝나고 예수님이 골고다로 끌려가셨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에게 심판을 받은 것이었다.[가야바],[빌리도],[헤롯],이들 모두가 잠깐씩 인자(예수님)와 얼굴을 맞대고 서 있었다. 예수님의 탐색등은 그들의 영혼 위에 비쳐서 그들의 가장 깊은 본성을 드러내어 보였으며 온 세계와 모든 시대가 볼 수 있도록 그들을 드러내 보였다. 그 어둡고 혼잡했던 날 밤에 참 재판장이었던 사람은 그리스도였다.

[가야바],[빌리도],[헤롯]이 그날 밤에 섰던 자리에는 모든 인간이 인생 여정의 어느 단계에서, 결정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로 서야만 한다. 또한 각 영혼의 주님에 대한 판결은 깊고 엄숙한 의미에서 바로 그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판결이 된다.

매일 성경

 요한복음 11;46-57   편리주의의 사도
 누가복음 22:54-62   베드로의 부인
 마태복음 26:57-68   교회의 재판
 마태복음 18:19-26   세속 재판
 요한복음 18:19-26   빌라도의 비극
 이사야   53:        멸시당하고 배척 받으신 자
 계시록   22:11-15   그리스도의 심판대
 

토론을 위한 문제

1.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떠한가?오늘 우리는 그일을 어떻게 되풀이 하고 있는가?

2.어떠한 점에서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불법적으로 집행되었는가?

3.[빌라도]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에서 당신은 어떤 인상을 받는가?

4.예수님을 재판했던 자들이 사실은 예수님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가?

  • 복음서 예수님의 생애

      제 19 장. 갈보리

      지성소

      모세가 광야에서 불타는 떨기 나무에 가까이 다가 섰을 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 장에서 우리는 온 땅에서 가장 거룩한 곳, 가장 깊은 경외감으로서가 아니면 아무도 가까이 하지 못했던 갈보리로 생각을 돌려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일에 있어서는 복음서 기자들 자신이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높고 깊은 사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들은 고상한 침묵과 온전한 절제로써 서술하고 있다. 그들의 서술은 말할 수 없이 예리하며 무서우리만큼 감동적이지만 감정을 비탄에 잠기게 하거나 격앙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그 고귀하고 경건한 침묵과 절제가 그들의 서술 전체를 특징지우고 있다. 이러한 조용함과 단순함은 그 서술이 주는 효력을 감소시키기는 커녕 헤아일 수 없을 만큼 강하게 하고 있다. 예를 하나만 들어 보자.[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이 섰는지라.] (요19:25)는 문장만큼 깊은 비통을 느끼게 하는 글을 어느 문장에서 읽어 보겠는가? 얼마나 절제되고 꾸밈없는 표현인가, 이 복음서 기자는 전혀 자세히 서술하려 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묘사는 마치 마법을 부린 것마냥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감동적이다. 복음서는 우리를 온전한 경건으로 주님의 최후 순간의 지성소로 인도한다. 또한 복음서 기자의 단순하고 꾸밈없는 표현에서 모든 기독교인은 [눈물 흘리기에는 너무나 깊은 곳에 놓여 있는 사실들] 을 발견해 왔다.

      자원하여 드린 희생

      우리가 지난 두 장에서 살핀대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인 세력들의 연합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 교회와 국가 그리고 민중이 모두 그를 죽이기 위해 연합했다. 바리새인들의 무지와 관용 없는 데도,[가야바]에게서 예시된 제사장들의 배타성과 이기주의,[빌라도]에게서 구체화 된 로마 제국의 정책과 힘,예루살렘의 폭도들에게서 나타난 민중의 좌절감과 노여움 그리고 원한,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세력들이 최종적인 결정 요인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세력에 밀려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패배하지 않은 영혼의 자유의사로 그 길을 가셨다. 갈보리에서 죽으신 분은 잔인한 환경의 절망적인 희생 제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약이 시종일관 주장하는대로 그 희생에서 예수님은 그 자신이 대제사장이었으며 그의 영혼을 자원하여 제단에 바치셨기 때문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주려 함이라]고 하셨다(막 10:45).또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셨다(요10;18).물론 예수님의 죽음에는 어떤 필연적인 요소가 있다. 즉 그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죽임을 당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9:22).그러나 그 필연성은 폭력이나 억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그의 애타는 사랑에 의한 필연성이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그 댓가를 충분히 아시고 기꺼이 수락하심으로 구속 사업을 떠맡으셨기 때문이다. 그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냉정하셨던 것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를 재판하던 자들이 스스로 그를 상황의 지배자로 또한 그의 운명을 좌우하는 자로 상상했던 것 만큼 사실에서 동떨어진 것은 없다. 갈릴리 사역 당시부터 삶과 환경과 모든 새로이 닥치는 위험을 극복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악의의 채찍에 의해서, 또는 운명의 수레 바퀴에 어쩔 수 없이 끌려서가 아니라 그의 완성된 사업의 영광을 취하시려고 자발적으로 승리감에 차서 나아가셨던 순간에 최고의 정복자가 되셨다. 이것이 바로 "사람보다 강한 하나님의 약한 것이었다(고전 1:25).

      십자가의 거치는 것

      여기에서 우리는 고대 세계에서 십자가 형벌이 어떤 뜻을 가진 것이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기독교는 십자가에 아름다운 후광을 둘러 놓았다. 우리는 교회를 십자가 형태로 건축하며 국기에다 십자가 문장을 넣기도 한다. 죽은 자를 매장한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우기도 한다. 우리는 붉은 십자가를 만들어 의료 사업의 상징으로 삼기도 한다. 시인들이나 찬송가 작가들은 [놀라운 십자가]나 복된 십자가]에 대해 노래로 들려 준다. 그러나 이러한 것으로 하여금 십자가가 본래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의 형벌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게 해서는 안된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바울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갈3:13,신21:23). 이것이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었다. 로마인들의 느낌 역시 이것과 마찬가지였다. [형벌 중에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다]라고 거의 공포의 전률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무서운 말들로써 [키케로]는 진술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그는 "결코 이런 형벌이 로마 시민의 몸에, 그들의 생각이나 눈에 뜨는 귀에도 가까이 오게 되지 않기를!"하고 기원했다. 동양의 半야만적인 국가에서 최초로 고안된 십자가 형벌은 로마인들에 의해 노예나 가장 파렴치한 범죄자에 대한 형벌로써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극에 달한 치욕의 죽음이었다. 고대 세계 사람들에게 그것은 교수대의 밧줄과 같은 것이었다. 최초의 사도들이 세계적인 복음 전도를 시작했을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나 사도들이 당면해야 했던 한 가지 선입견,즉 거치는 돌인 십자가의 장애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갈5:11,고전 23). 메시야가 죽어야 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가 그러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는 것은 전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했다. 그리스도의 손길이 닿은 것마다 - 십자가를 포함해서 - 광채와 아름다움으로 장식되고 변모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무섭고 깊은 구렁에서 십자가를 높이 들어 세우셨는가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

      4.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

      당시의 관례로는 잔인함의 극치로서,또한 그 형벌의 수치에 가하는 최후의 일격으로서 사형수로 하여금 자신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지고 가게 했다. 그러나 갈보리에의 행렬이 이루어진 다음 그 행렬이 군중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호송 책임자였던 로마의 백부장과 호송병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갈보리까지 내내 지고 갈 수 없음이 분명히 드러나 보였다. 이미 당하신 무서운 채찍질에 기운이 진해지신 예수님은 (끝이 쇠로 되어 있는 로마인의 채찍으로 맞으신 탓이었다) 드디어 땅에 주저 앉으셨고 행렬은 멈추어졌다. 그러나 어느 로마인도 다른 로마인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 만큼 십자가는 치사스럽고 더러운 형틀이었다. 그래서 백부장은 그의 부하 모두를 지수가나서 길에 있던 낯선 사람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달갑지 않은 일을 떠맡게 했다(막 15:21). 때때로 한 인간의 중대한 순간이 갑자기 뛰어든다. 또한 운명이 전혀 뜻밖에 평범한 길목에서 기다리고 서있기도 한다. 구레네 사람 시몬] 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다. 그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지나가는 군중을 지켜보기 위해 한 쪽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그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태를 깨닫기도 전에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의 첫 느낌은 그러한 오욕적인 일을 강제로 떠 맡게 된 데 대한 분노와 원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먼 후일 그가 그 순간을 돌이켜 보았을 때 그 순간은 그 생애 최상의 영광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마가는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불러 후일 사도 시대 교회의 저명한 두 인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롬16;13 참조).이와같이 [시몬]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와 그의 가정을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게 했던 것은 그가 주님의 십자가를 졌던 갈보리 언덕 길에서의 그 순간에대한 추억이었다고 우리는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을 기록한 곳에서 갑자기 등장했다가 다시 사라져버린 이 [구레네 사람]의 모습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시던 날 동안 많은 남녀들이 그를 섬긴 모든봉사 가운데 이 사람의 붕사만이 홀로 우뚝 솟아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집 주인]이처럼 그의 원수들이 가까이 있을 때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또한 죄인이었던 여인처럼 그의 발 아래 앉아 옥합을 깨뜨릴 수도 있었다.그러나 다만 [시몬]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다.

      5. 십자가의 명패

      목적지에 도착하자 병정들은 그들의 일을 시작했다. 그들은 십자가를 땅에눕혀 놓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 위에 놓고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 그들은 그 십자가를 들어 올린 다음 땅에 파 놓은 구덩이 속에 떨어뜨렸다. 그 다음 일을 마태는 간단하나 너무나 많은 것을 암시하는 생생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저희가 거기 앉아 그를 지키더라](마27:36). 그들은 그를 지켜 보았다. 그들은 세계를 바꾸어 놓을 사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만 하였다면 그들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한 마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영혼들의 죄 값이 지불되고 있는 바로 그 현장과 직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최종적인 계시의 면전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주사위 노름을 하면서 그 긴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는 언제나 도덕적,영적 자격의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서의 기자 모두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명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죄자가 처형될 때마다 그 죄의 성질은 공중에게 계시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즉 그 죄인으로 하여금 정죄 받게 한 범죄 사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형틀에 못박아 놓아서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올려다 볼 때 무엇 때문에 그가 처형을 받게 되었는지 알도록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왕권에 대한 주장이 반역적이었으며 민중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었다는 것 때문에 정죄되었다. 따라서 그의 머리 위에는 죄목으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다(요19:19). 그 자귀는 [빌라도]가 선택한 것이었다.우리가 그의 마음 속에 정확하게 어떤 생각이 있었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칭호는 망상으로 인해 파멸하게 된 한 견습 목수에 대한 값싼 조롱이었을까? [가이사]와 맞서려고 생각했던 한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마지막 돌팔매였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라기 보다는 [빌라도]가 멸시하고 굴욕 주기를 좋아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조롱 즉 [이 예수는 너희같이 가엾은 노예에게 알맞는 왕이다]라는 조롱이었을까?이것이 그가 의도했던 의미였을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명패를 읽는 유대인 제사장들이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모욕에 분개하여 즉시 [빌라도]에게 들어가서 그 명패를 떼어줄 것을 탄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의 풍자로 인해 분개해하는 무리들을 보고 웃기만 했다. 그리고는 [나의 쓸 것을 썼다]라고 일축해 버렸다(요19:22). 그러나 [빌라도가]가 뜻한 것이 더 깊은 데 있을 수는 없는가? 예수님의 어떤 힘이나 위엄 또는 본래적인 신적 위엄이 [빌라도]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았을까? 예수님의 본질적 왕권에 대한 어떤 암시나, 예수님의 믿기지 않는 주장의 진실성에 대한 어렴풋한 깨달음이 이 행정관의 영혼 속에 떠올랐던 것은 것은 아닐까?그가 감히 그 자신에게도 고백할 수 없었던 깊은 본능적 직관에 따라 [왕 예수]라고 쓰지는 않았을까요? 이 문제야 어떻든 간에 우리가 빠뜨리고 지나갈 수 없는 것은 명패가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의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의 의미이다. 물로 나이것은 군중 속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확실히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느니 언제나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권의 상징을 보아왔다. 이 세 가지 언어는 세계적 언어였으며, 그 언어들은 하나의 주된 사상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헬라어는 문화와 지식의 언어였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영역에서 왕이시라는 것을 그 명패는 말하고 있었다. 라틴어는 법률과 정치와 언어였다. 이곳에서도 예수님은 왕이셨다. 히브리어는 계시 종교의 언어였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왕이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을 쓰신]분이었던 것이다(계19:12).

      6. 그는 자신을 구원하려 하지 않으셨다.

      광야에서와 그의 전생애를 통해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탄은 이제 그의 최후의 공격을 퍼부으려 하고 있었다. [산 헤드린 공회]의 회원들은 그리스도를 정죄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가 고통받으시는 것을 즐거운 듯이 바라 보기 위해 갈보리까지 나왔다. 그리고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었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6:2740).이것은 조롱이 아니었다. 유혹이었다. 이것은 이중적인 유혹이었다. 즉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난의 잔을 끝까지 맛보지 못하게 하려는 곧 죄의 댓가가 완전히 치루어지기 전에 도피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이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제 십 일시 이 순간에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할 만한 찬란하고 극적인 어떤 일을 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올찌어다.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군중들은 외쳤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에게 있어서 참으로 아픈 곳을 찌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적 행하기를 절하셨다. 왜냐하면 이전 광야에서 그는 단호하게 이와같이 극적인 방식으로 그의 왕국을 오게하지 않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리들이 심한 조롱으로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마27:42)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것 보다 더 깊은 진리를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랑의 최종적 계시를 주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려고 열망하신 예수님께서 그 자신을 구원하려 하시지 않았고 또한 구원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중심적 사상이다. 로마인들이 그 손에 박으니 못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 속에 있던 완전한 사랑에 의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셨으며 그 일이 다 끝나기까지 단단히 달려 계셨다. 그가 자신을 구원하기를 거절하신 것이 세상의 구원이 되었다.

      7. 강도의 죽음

      예수님께서는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아마 예수님의 양편 십자가에 강도를 매달게 한 것은 더 이상의 조롱과 모욕을 주려고 한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의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을지라도 그 행위에는 특이한 적절함이 있었다. 예수님은 평생 동안 죄인들의 친구이셨으며 죽음의 자리에서도 그들과 떨어져 있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그 아들을 불러 세상의 구주가 되게 하셨을 때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과 멸망하는 영혼들의 수치를 끊을 수 없게끔 연결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연결하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는 두 행악자가 십자가들이 세워졌다(눅 23:33). 이와같이 여러 세기의 시선을 모으게 된 이르없는 이 두 사람은 누구였는가? 아마 그들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상기시켜 주듯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횡행하던 자들과 같은 난폭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폭도[바라바]의 동료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라바]가 주도했던 혁명 운동은 처음에는 애국적인 열심으로 로마 통치에 대항했으나 그후 약탈과 살인,범죄 집단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서 죽어가던 두 강도는 그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서 풍겨오는 그 무엇이 그중 하나를 잠잠하게 했다. 그 무서운 고통을 신음소리 내지 않고 견디며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도 이상하리만큼 고귀한 왕의 위엄을 지니고 있는 이 사람은 그 수족에 못을 박는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그 강도는 그 맑고 사랑이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별안간 저 깊은 곳에서부터 믿음이 솟구쳐 올랐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바로 마지막 순간,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고 화려한 의식이나 예식도 없었던 그 때에 단 한사람, 죽음이 임박한 때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본능적으로 그가 왕좌에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왕적 위엄에 대한 놀라운 찬사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에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가 생명을 바쳐 선포하려고 하신 진리, 즉 고통과 결박에 얽매여 희망이 없는 어떤 영혼이라도 일순간에 티끌이나 잿더미같은 生에서부터 바로 사죄로 말미암은 완전한 해방에로 나아갈 수 있으며 성도의 흰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진리에 최종적인 印을 치셨다.

      8. 요단강물의 범람

      이러한 고통의 마지막 시간 동안에 예수님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숨기신 것 같아 두려워 떨었던 순간이 있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시22:1 참조)외침이 터져 나왔을 때 우리로서는 예수님의 생각과 심정이 어떠했는가를 결코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 어둡고 신비했던 순간은 예수님께서 일생 동안 스스로 인간들과 동일해지려는 노력의 절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상이었다.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인간들이 범한 죄의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공포가 그의 죄없으신 마음을 내려 눌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그 비통한 외침의 깊이르리 헤아리지는 못한다. 우리는 다만 멀리 서서 머리를 숙이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흑암을 홀로 건너 가시도록 버려둘 수 밖에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믿음의 최후 한계에 다달았을 때에도 그의 믿음은 쓰러지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적을 뚫고 지나는 그의 외침 소리는 여전히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침 소리가 지난 다음 이번에는 마치 승리자의 음성으로 [다 이루었다](모든 것이 끝났다)는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요19:30).이 말은 그 때 갈보리 언덕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하고 있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나 다른 뜻을 가지는가? 병정들에게도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 그들은 병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를 사랑했던 가엾은 남은 무리들에게도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 그들은 결코 그전과 같지 않을 세상으로 지쳐서 돌아가게 되었다. 그를 조종하던 제사장들과 무리들에게도 모든 것이 끝났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복수가 끝난 것을 자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있던 그 사람이 갑자기 눈을 들어 하늘로 향하시고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외쳤을 때는 흑암의 왕국 전체가 그 뿌리채 흔들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끝났다는 의미는 오랫동안 힘들었던 생이가 이와같이 거친 종말로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외침이 단순히 안도의 한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그의 사업이 끝났으며 사탄의 왕국이 끝났고 세상을 구속하는 일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또한 그 외침은 이러한 성취에 대한 승리의 확언이었으며 승리의 외침이었다. 그 기쁜 외침과 함께 그리스도의 영혼은 그 아버지의 면전으로 달리셨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 주신 사업을 끝내심으로 그는 지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

      9. 세상에 대해 십자가가 갖는 의미

      갈보리 언덕의 걸구한 땅에 서서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천구백년 동안 인류의 양심이 마치 자석에 끌리듯이 한 장면에로 끌려 왔는지 또한 왜 기독교인들이 언제나 모든 것의 핵심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지르리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 자신이 그의 죽음에 의해 지상을 정결케 하는 구원의 능력이 모든 이해를 초월하여 활동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고 또한 공공연히 확언하셨다. 그 능력은 주로 두 방면으로 활동해 왔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죄의 참 성격을 드러내주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던 죄악들이 결코 낯설거나 전혀 변태적인 것이 아니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가야바]의 이기주의나 [빌리도]의 두려움, 그리고 헤롯의 불순함, 군중들의 분노와 원한, 이러한 죄들이 죄없으신 분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고의적으로 그를 죽일 것을 모의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평범한 죄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우리 모두가 이 일에 동참한 자들이다. 우리가 갈보리 언덕에 설때에 우리의 마음과 양심은 그곳에 보이는 광경이 바로 우리 자신에 의해 행해진 것이며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죄들이 언제나 하나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위대한 기독교적 사상을 인용하여 말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어린 양은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하시며](계13:8)오늘날에는 죽임을 당하고 계신다. [파스칼]은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고통 중에 게실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오,깨뜨려 주옵소서 나의 굳은 마음을! 나의 연약한 自己愛와 교만의 죄가 그를 죽이는 [빌라도]와 [유다]로다. 우리 주 예수님, 그를 십자가에 못 박도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의 진정한 성격과 진상을 드러내 준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회개를 낳게 한다. 이것이 십자가 능력의 큰 비밀의 하나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준다. 진노하신 하나님을 달래거나 그의 마음을 바구어 우리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생각은 전혀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하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도록 설득 당해야했던 때는 한 순간도 없었다. 예수님의 갈보리 수난은 결코 하나가링을 사랑에로 이끌기 위한 유인이 아니었다. 갈보리의 수난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행동화된 것이었다. 땅속에서 보이지 않은 채 타고 있는 불이 때때로 갑작스럽게 화산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절정에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 내밀한 존재에 있어서 영원히 어떠하신 분인지를 보여 주면서 역사속에 순전한 불꽃으로 뛰어들어 왔다. 십자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 준다. 또한 은혜를 현실화하며 사랑을 필요로 하는 영혼에게 사랑을 얻게 해준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며 세상을 하나님의 발 아래 엎드리게 한다.

      매일 성경

       마태복음 27:27-37  고난의 길
       요한복음 19:19-23  십자가 위의 명패
       누가복음 23:39-43  회개한 강도
       마태복음 27:39-50  최후의 유혹
       누가복음 23:46-53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심
       골로새서  2:10-15  죄에 대한 승리로서의 십자가
       로마서    5:1-11   사랑의 계시로서의 십자가
       

      토론을 위한 문제

      1.십자가에 어떻게 어둠의 세력이 행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뜻일 수가 있는가?

      2.바울은 십자가를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요.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이 말씀에 대해 토론해 보라.]

      3.[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고통중에 계실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 진실일 수 있는가?

      4.[구레네]사람 [시몬]의 반응과 그 미래가 어떠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제 20 장. 승 리

      사망에 대한 승리

      우리는 두 장면을 눈 앞에 그려보자. 그 하나는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 밤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에서 몇사람의 무리가 빗장을 지르고 문간을 막아 놓은 채 무서워 움추리고 있는 장면이다. 그돌 모두의 얼굴에는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공포보다 더욱 뚜렷이 그 얼굴에 새겨져 있는 것은 절망적인,결정적인 회복될 수 없는 실의였다. 망연히 당혹한 표정으로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상심해 있어서 말할 기력도 없었으며 마음이 무감각해져서 기도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끝장에 다달아 있었다. 운명이 그들을 파멸시켰다.살아야 할 목적이 없었다. 이것은 극도로 비참한 패배의 장면이다.

      여기에 또 다른 한 장면이 있다. 수주일 후였다. 바로 몇주일 전의 그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걸어 잠근 문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거리에 나와 있었다.그들은 인간적인 아닌 놀라운 확신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들의 외침은 쇳소리 같이 쟁쟁울렸다. 그들은 세상이 듣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었으며 감당할 수 없는 기쁨에 넘쳐 있었다. 그들은 온 지구를 정복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먼저 첫번째 장면을 본 다음 두번째 장면을 보라. 저기에서는 시들어버린 희망의 비참함을, 여기에서는 성도들의 용기를 볼 수 있다. 또한 거기에서는 우물쭈물하는 무익한 잔존자들을,여기에서는 전진하는 투쟁적인 교회의 핵심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이에는 다만 짧은 기간이 있었을 뿐이었다.어떻게 해서 이와같이 놀라운, 거의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이 사람들의 생애에 일어나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이 두 장면 사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던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리워져서 무덤에 눕혀졌을 때 만큼 모든 것이 완전히 파멸된 것처럼 보인 때가 없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어 장사되었다"고 사도신경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매우 결정적 느낌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제자들이 앞일에 대해서 생각이라도 해보았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한때 예수님의 명령을 좇아 그렇게 열심으로 떠났던 그 고향에 부끄러운 얼굴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와 같이 면목 없이 돌아갈 때 마을 거리에서 수근거리느니 조롱과 욕설을 상상으로 들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했지만 그 역시 그가 그만두었던 곳에서 옛생활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이제는 결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체험이 그 사이에 끼어 들어서 그를 영영 다른 것에는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스도만 죽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죽은 것이었다.그리고 그 무덤을 커다란 절망의 돌이 굴러와 막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저기 몇몇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들이 갈보리에서 보았던 것이 그 마지막이 아니라는, 아니 마지막일 수 없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감돌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죤 메이스 필드]의 연극 [예수에 대한 심판]중에 놀라운 대화가 있다. 십자가 처형을 맡았던 병사들의 지휘관이 로마 백부장 [론기 누스]는 그날 일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빌라도]에게 돌아온다. 보고가 끝나자 [빌라도]의 아내인 [프로쿨라]는 백부장을 손짓해 불러서 어떻게 그 죄수가 죽었는가를 말해 달라고 간청한다. 백부장이 그 이야기를 해주자 그녀는 갑자기 그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부인,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론기누스]의 대답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는 어디에 있어요?" '부인, 그는 지금 로마인이나 유대인들이 그의 진리를 방해하지 못하는 자유로운 세상에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걸어다녔던 사람중 가장 깨끗하고 고상한 영혼을 지녔던 분이 죽어 달려 있는 십자가의 그늘 아래 서 있으면 우리는 한 음성이 내부에서 "이것이 마지막일 수는 없다"고 말해 주는 것을 듣는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도신경의 위대하고 단순한 표현을 빌리면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

      부활에 대한 증거는 논박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 것이다. 물론 이 중요한 사건에 대한 여러 복음서의 기록에서 세부적인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그 이야기의 신빙성을 흔들리게 하거나 파괴하기는 커녕 실제로 그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고 엄청난 놀라움과 당혹에 빠져있었다. 또한 그 사건을 눈으로 본 다른 증인들, 즉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사람들은 극도로 고조된 감정과 흥분속에서 살고 있었다. 후일 복음서 기자들이 이런 혼잡하고 찬란했던 순간들의 기억들을 모아 복음서 속에 기록하게 되었을 때 세부적인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야만 할까? 이것이 조금이라도 그들 증언의 가치를 손상시키는가?이와는 반대로 만일 그러한 차이가 없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불안해 해야 할 이유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여러 복음서 기록들이 의도적으로 일치하게끔 만들어 졌다는 결론을 물리치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피상적인 불일치가 대사건의 보도에서 생기게 될 수 밖에 없는 경로에 대한 좋은 예증을 제1차 세게대전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특별한 사건에 대한 목격자들이 각각 그 나름대로 그 사건을 묘사하곤 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증언은 문면상으로도 현실성과 진정성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 증언은 그들 스스로 철저하게 확신했던 사람들의 증언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확신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불과 50일 후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부활은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증언이 수천명으로 하여금 확신케 했다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사도들이 공공연히 선언하여 그러한 놀라운 결과들을 낳게 했던 사실들이 참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사건이 바로 최근에 일어났던 것인 만큼 그들의 적이 그 사실에 도전하여 논박하려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그 새로운 움직임이 봉오리채 꺾어지는 것을 무엇보다 더 바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만일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를 불신하고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증언에 대하여 논박할만한 근거가 없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분명히 그때가 예수님께서 부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용이한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증명은 시도되지 않았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 편에서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 자체가 사도들이 선포하고 있던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최상의 증거가 된다. 그 사실들은 그것들이 도전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도전받지 않은 채로 있었다. 부활의 복음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혀 문서상의 증거를 떠나서도 한 뚜렷한 증거가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제자들 자신의 놀라운 변화 속에 나타나 있다. 부활 사건만이 이 사람들의 절망적이고 무익했던 생이 온전히 빛나고 승리에 찬 생에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 사실이야말로 부활 하건이 어떤 꾸며낸 이야기나 단순한 환상적 공상이라는 주장을 산산히 부서뜨리려는 견고한 반석이다. 선생을 잃은 제자들이 그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주장은 제자들 자신의 생활에 의해 부정되며 또한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드러나게 된다. 만들어 낸 이야기가 사람의 성격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며 거짓된 것을 위해 순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제자들의 믿음을 순전히 환상적인 근거에서만 설명하려고 한 시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그쳤다. 한가지, 단 한가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이 이 열한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을 믿을 있게 한다.

      그러나 그 증거는 최초의 제자들을 지나서 [교회의 실제성(the fact of the christian Church)에서도 발견된다. 교회를 건립하게 한 힘이 부활신앙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교회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땅의 정복을 위해 쏟아져 나왔을 때에도 그 추진력이 된 것은 부활의 메시지였다. 4복음서가 그 끝에서 취그바고 있는 놀라운 사실들의 진실성은 천구백년 동안의 교회사가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본질에 있어서 불멸성을 지니며 그 가능성에 있어서 무한하여 인간 영혼에 대한 그 가치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교회와 같은 영적운동에 완전히 그리고 순전히 사실이 아닌 어떤 것에서 생겨났거나 고취되었다고는 아무도 심각하게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오래 전에 멸절되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격심한 공격이 사회적,정치적, 지적 방면에서 수천년을 계속하여 교회에 가해져 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여러 차례 절망적이고 죽은 것처럼 보였다.[흄][볼테르]등은 그 무덤을 파는 일에 분주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그 무덤을 깨뜨리고 그 돌을 굴러 버렸다. 살아 게신 하나님의 교회의 이러한 역사는 다만 예수님의 부활 사실만이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면의 증거도 유효하며 큰 중요성을 가지나 부활에 대한 절대적 증거, 즉 부활 사실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들기만 할 뿐 아니라 불가피한 사실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다. 최초의 놀라운 충격이 불변의 확신으로 된 후에 제자들이 보게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동일하시기 때문에 그가 바로 이전과 동일하신 분이 아닌 어떤 분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중 하나가 옛일을 회상하면서 이 사실을 표현한대로 "그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2;24).

      이것은 위대한 확신이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의 생활에 대한 연구에서 이 확신에 관여한 몇몇 요인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에 대해 언제나 깊이 느낀 것 중 한가지는 그의 순전한 생명력이었다.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요1:4).베드로는 그를 [생명의 주](행3:15)로 부르고 있다. 복음서를 어느 곳이라도 펴 보라.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침의 해처럼 빛나며 하나님의 생기처럼 생명력있는 어떤 분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접촉하게 된 사람은 누구나 그가 거대한 숨은 힘을 소유하고 계시며 아무리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알아내더라도 그 뒤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이 사실을 그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왔던 놀랍고도 대담한 요구가 설명해준다. 그 한 예로 문둥병은 널리 알려진 불치의 병이었다. 그러나 한 문둥병자는 단순히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8:2).그들은 예수님께서 감다하지 못하는 상황이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죽음까지도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 위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다. 제자들이 그를 알게 된 최초의 그날부터 그 사랑은 그 위에 불멸의 인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랑은 이전에 바다에나 육지에나 어느 곳에도 결코 없었던 빛으로 온 세게를 가득하게 하였다. 그러한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자에게서 결코 탈취될 수 없었다. 그 사랑은 그 사랑하는 자를 곁에 서서 지키기 위해 무덤을 깨뜨릴 것이었다.

      그러나 저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무죄와 도덕적 완성이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치유이적에 대한 연구에서 예수님의 능력있는 이적이 어떻게 그 자신의 무죄 사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그 사실에 의존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았다. 모든 인간중 에수님 한분에게서만 죄와의 결정적인 단절이 이루어졌다. 또한 죄의 부패와 습관에 의해 언제나 가로 막히고 좌절되었던 [물질에 대한 영의 지배력]이 그에게 있어서 온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이와같이 이적의 역사가 예수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었다. 또한 가장 위대한 이적인 부활도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었다. 그와 매일 가졌던 교제가 그들에게 예수님은 인간 이상이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비록 갈보리의 십자가가 일시적으로 그 고귀한 믿음을 흐리게 했으나 그 믿음은 다시 밝게 빛나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하여 는던 것과 같은 감정을 예수님에게서 느끼게 된 그들은 이제 부활이 처음부터 확실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께서 죽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면 하나님 자신이 죽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부활에 대한 최후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의 인격과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망에 매여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수께서 친구들과 재회하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실제성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니심에 대한 기록으로 넘어가기로 한다.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그를 처음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요20:1.11,마28:19 참조).세상에서 생겼던 가장 중대한 소식,인류의 전생활을 변화시키고 왕좌를 무너뜨리며 나라에 혁명을 일으킬 소식,오늘날에도 여전히 온 세상을 영원한 소망으로 감싸며 부활주일 아침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는 소식을 제일 먼저 한 보잘것없는 비천한 여인에게, 일곱 귀신이 그에게서 나갔던 여인,용서받은 마음 외에는 그녀를 눈에 띄게 할 아무 것도 못했던,그리고 그녀의 사랑 외엔 아무 권리도 갖지 못했던 여인에게 주어졌다. 막달라 마리아는 동이 트기 전 예수님의 죽은 시체 곁에 앉아 있기라도 하려고 나왔다. 그녀는 죽은 시체 외에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말을 속으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음성은 이제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 눈빛은 더 이상 빛나지 않으리라. 생명을 주던 그 영혼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며 남은 것은 그의 죽은 시체 뿐, 사랑과 감사 도착했을 때는 그 시체마저 간 곳이 없었다. 이 순간은 그녀의 처절함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눈물에 가리워 그녀의 눈은 곁에 서계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알아 보았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라(이는 선생님이라)].그녀가 구함을 받고 용서받은 것이 컸던 만큼 그녀의 사랑도 지극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를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나타나신다.

      누가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눅 24;13이하).우리 생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실망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망만큼 심한 것은 없다. 황혼의 햇살은 맞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던 [글로바]와 그 친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던 실망이 바로 이러한 실망이었다. 그들은 상심하여 사라져버린 희망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행복했던 때의 추억이 그들의 마음 속에 밀려들었다. 그렇게 젊고 강하고 확고하며 하나님 같았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이 사람이 장차 오실 왕이며 수만 영혼의 지도자라고 확신했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이제 그 기대는 실망과 비탄,그리고 후회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인간들이 그가 영원히 가고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신다. 그들이 도중에서 자기들과 동행하게 된 낯선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거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여행의 목적에 도착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이 그날밤 처럼 가까왔던 때는 예전엔 없었다.같이 가는 동안 그들의 우울을 그렇게 신비하게 달래주고 즐거움을 싹트게 하였던 그 낯선 사람과 그냥 헤어지기가 어려웠다. 그 어떤 것에 이끌려 그들은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어서 식사에 초대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떡을 떼실 때의 낯익은 행동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빵을 드실때 못자국이 나 있는 그의 손 때문이었을까?아니면 빵을 드실 때 못자국이 나 있는 그의 손 때문이었을까? 그 무엇 때문이었던 간에 그들 눈앞에 드리워져 있던 휘장이 찢어졌으며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고 불렀다.

      같은 날 밤 예루살렘에서는 지도자 없이 방황하던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과 재회하게 되었다.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셨더라](요20:19,비교 눅 24:36)그 중요한 순간에 제자들 중 두사람, 유다와 도마가 빠져 있었다. 사도행전의 신중하고 엄숙한 표현을 빌리면 유다는 [제곳으로]갔다(행1:35).그러나 도마는 어디에 있었는가? 틀림없이 그런 자신의 깊은 슬픔을 생각하면서 동료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까지도 견딜 수 없어진 나머지 어둠 속에서 혼자 배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인적 없는 갈보리의 언덕 길을 걷고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 다음날 아침 베드로와 요한이 얼굴에 새로운 빛을 띠고 그를 만나 그 놀라운 소식을 알려 주었을 때 그는 그들을 슬픈 빛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잘못 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그는 그 다락방에 있었다. 그러고 언제나 정직한 의심에 대해서는 오래 참으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특별히 헤매고 있는 그의 제자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도마는 이제 다른 제자들이 보았던 것을 스스로 보았으며 그들이 체험했던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외침과 함께 도마는 한밤중같이 어두웠던 의심을 그의 마음에서 쓸어버렸다.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이 남녀들이 목격했던 예수님은 확실히 예전에 그들이 알았던 사랑하던 바로 그 선생님이었으나 그럼에도 어떤 차이가 있다는 주목할만한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이제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어떤 격의가 있었다. [나를 만지지 말라고 그는 말씀하시었다(요20:17).그것은 사이가 멀어진 것이라고 불리울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그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한장이 닫히고 새로운 장,더 높은 차원의 교제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상적인 시공간의 제한에 그는 더 이상 매이지 않으셨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오시고 또한 가셨다(눅 24;36,요20:19).동산에서의 막달라 마리아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이미 살핀대로 그를 알아보는 것이 언제나 즉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이 예수를 뵈옵고...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28:17).[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리니](막16:1-) [저희가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24:37).[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요21:4). 그는 동일하셨으나 또한 달라지시기도 하셨다. 그는 여전히 에전에 갈릴리의 밀밭 사이를 그와 함께 걷고 밤이면 함께 노숙하던 자들의 친구이셨으며,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들로부터,멍에나 쟁기,촛불,그리고 놀면서 외쳐대는 어린 아이들로부터 잊지 못할 교훈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던 선생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떤 변화를 의식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다만 기대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갈보리에서의 죽음이 그를 그들에게서 앝아간 이래 그는 긴 여행중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라도 한번 가면 다시 그 장벽을 넘을 수 없는 미지의 나라에서부터 돌아오셨던 것이다. 그 미지의 나라의 숨결이 그 의 주위에 가득했다. 그는 더 이상 좁고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물질세게에 속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더 넓고 높은 세계,그 홀로 참되며 영원한 영의 세계에 속하셨다.

      4. 부활의 내면적 의미

      우리는 이 장에서 부활의 사실성과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지게 했던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을 취급해 왔다. 이제 우리는 최종적으로 이 사실의 내면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분명히 이와 같은 사건은 제자들이나 교회 뿐만 아니라 전 세게에 대한 어떤 결과 또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부활은 그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입증이었다. 제자들이나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하며 선포할 때에 그들은 의미 심장하게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를 사용하여 그 사건을 묘사하였다. 그들은 꼭 [그가 부활하셨다]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들이 깊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 일어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오른팔이 그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행하신 일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행2;24,32,3:15,4:10,롬6:49,고전15;15).흉악범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은 정통파 유대인의 생각에는 충격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참람한 것이었다. 예수님에 대해 은밀한 기대를 가졌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십자가 형벌로 인해 그의 거짓됨이 드러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부활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품어왔던 가장 고귀하고 대담한 희망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과 예수님의 메시야 권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 그리고 그의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입증이 나타났다.

      부활은 더 나아가서 의에 대한 입증이었다. 대담하고 용감하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건부를 선과 진리,그리고 사랑의 절대적 타당성에 거셨다. 이것들의 중요성을 그는 항상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위해 그는 [자기 헌신]의 마지막 한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을 바치셨으며 이것들에 대한 믿음을 위해 그는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만일 무덤에 머물러 계셨다면 이 세상은 도덕적으로 혼란하며 善이란 한낱 신기루이며 도의심이란 해로운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날 새벽 온 우주가 하나의 위대한 행도에 의해 고상하고 이기심 없는 생활 방식을 보증하고 확인하였다. 이제는 우주자체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인간 편에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으며 이로써 의가 입증되었다.

      부활은 영생에 대한 보증이었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에 의해 감동을 받으나 가장 감명을 받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죽음에 대한 경멸이다. 그러나 사망의 왕에게서 그 권세를 박탈하신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였다.[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요14:2-3). 만일 죽음이 이러한 것이라면 두려워 할 여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망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그를 믿는 자들의 승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부활하신 날 아침은 영생을 밝히 드러낸 아침이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사망이 패배하여 넘어진 것을 보면서 시편 기자와 함께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 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시47:5)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후 말할 수 없이 즐거웠던 사십일간이 끝나고 예수님의 육체적 현현이 그쳤을 때에도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매일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그들의 체험 속에서 실증되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그들의 파란곡절 많은 모든 봉사활동을 통해서 그들을 버티어 준 것은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적 임재와 매일매일의 교제였다. 사망이 난폭하게 닥쳐 오는 것을 그들이 보았을 때에 그들을 붙잡아 준 것은 예수님의 손이었다. 그들의 체험만이 유일하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이 살았던 시대 이레로 수많은 남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해 왔다.이것은 이적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면 즉 그가 지금도 살아 계셨다면 그의 친구들이 종종 그를 대면하여 만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교제는 부활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어떤 날 [매튜 아놀드](는 (mattew arnold)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오, 그 위대했던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 영광이 새로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며 나의 황홀한 영혼을 사로 잡았을 것을! 이제 그는 죽었다. 그 오랜 동안을 [시리아]의 쓸쓸한 마을에 그는 묻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무덤 위를 [시리아]의 별들만이 반짝이는 눈으로 내려다 본다. [아놀드]는 잘못 알았다. 그는 전혀 결정적으로 잘못 알았다. 왜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가? 그리스도는 살아계신다. [버밍험]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故[데일]박사는 어느 날 그가 부활주일의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어떻게 부활의 사실성이 이전에 결코 그랬떤 것이 없었던 만큼 강렬하게 그에게 엄습해 왔는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신다!] 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는 살아계신다!]그리고는 잠간 있다가 다시 말했다. [그는 살아계신다! ]잠깐 후에 다시 말했다. [그는 살아계신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처럼 실제로 살아계실까?]나는 일어나 걸으면서 되풀이 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맨처음에 그 사실은 이상하고 그의 진실이 아닌 것처럼 영광의 광채처럼 나를 휩쌌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천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단순한 이론이나 불확실한 소문이 아니라 확증된 불가침의 체험이 되고 있다.만일 그들이 한때 패배했던 그곳에서 승리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아침에 동산의 꽃밭을 거니시던 부활하신 주님을 그들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일 성경

       
      고린도전서 15:8-9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
       요한복음   20:11-18 무덤에 간 막달라 마리아
       누가복음   24:13-35 [엠마오]길의 그리스도
       요한복음   20:19-23 잠긴 문 뒤에서
       요한복음   20:24-31 도마의 믿음
       요한복음   21:1-14  갈릴리 호숫가에서
       사도행전    2:29-36 부활의 복음
       

      토론을 위한 문제

      1.당신은 부활에 대한 주요 증거로서 어떤 것을 제시하겠는가?

      2.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지 아니하셨으면 너희는 아직 너희 죄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했다. 어째서 그런가?

      3.[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으며]라는 사도신경 중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4.아직도 부활을 부정하는 편에 서 있는 기독교이들이 너무 많은가?



      제 21 장. 생명의 주

      1.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과 미완성 사역

      이제 우리는 이야기의 끝 부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의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이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서 기자들은 이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또한 복음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끝내면서 거기에다가 [끝(Finis)]하고 쓸 생각은 결코 그들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펜을 놓고 복음서를 끝맺으면서 그들이 쓴 것은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수 없는 세대와 시대를 통해 계속되게 되어있는 이야기의 첫 부분 제1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중 하나인 누가는 후일 다시 펜을 들어 제2권을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리고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부른 제2권의 서문에서 그의 처음 기록에 대해 언급하기를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 부터... 의 길을 기록하였노라](행1:1-2)고 썼다. 왜냐하면 누가는 그가 이미 그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말했을지라도 그 뒤에 따를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지상에서의 예수님 사업은 그가그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을 때 끝났다.

      [그의 모든 일이 끝났노라]고 우리는 즐거이 찬송하네 [예수께서 승천하셨네! 우리 왕께 영광]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했다(롬6:9).이러한 모든 것은 끝났다. 지상에서의 봉사, 겟세마네의 고통, 체포와 재판, 골고다로 가는 고통의 길,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러한 것들은 모두 끝났으며,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것들은 왔다가 사라졌다. 그것들은 한번, 다만 한번 일어났다. 죄의 완전한 댓가가 치루어졌다. 구속적 사랑의 계시는 완성되었으며 끝났다. 아무 것도 미완성으로 남은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덧붙여 질 것이 없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보다 더 나아가기를 바랄 필요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쨌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갈보리에서,빈 무덤에서,그리고 승천에서 그 절정과 완성과 면류관을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역사적 사실의 흔들리지 않는 반석주위에 단단히 그 뿌리를 감은채 역사 속에 안전하고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는 반면 복음의 그리스도는 단순한 역사상의 인물 이상이히기 때문이다. 다메섹으로 가는 [다소]의 사울을 붙잡아 말에서 끌어 내려 땅바닥에 꿇어 앉히고, 그의 생애를 뒤바꾸어 놓았던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회고가 아니었다. 기독교의 메시지를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온 땅에 퍼지게 했던 것은 지나간 추억이 아니었다. 인간으로 하여금 오순절의 제자들이 타올랐던 것처럼 찬송하게 하며[프란시스 파]의 수도사들이 찬송했던 것처럼 찬송하게 하고 [카비란터]의 순교자들이 죽었던 것처럼 순교하게 했던 것은 고귀한 모본에 대한 회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첫번째 기록인 복음서의 뒤를 수백권의 기록이 뒤따랐다. 실제로 현재에도 예수님께서 잃은 자를 찾으시면서, 상한 마음을 싸매시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생의 혼잡한 거리를 지나다시시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기록되고 있다. 갈보리의 수난이나 부활의 아침이 지나간 때에도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그 이야기는 다만 시작하였을 뿐이다.

      최초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지금 알고 있는대로의 예수님을 [온 세상의 왕좌]보다 낮은 자리에 둔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생의 통치자와 주인이 되셔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골고다의 수치]로부터 삼백년이 되기도 전에 가이사을 바쳤던 것이다. 외견상으로 볼 때 사랑의 무기 외에는 어떤 무기도 갖지 못한 이 소수의 사람들이 무력이란 무기를 가지고 또한 그것을 쓰려고 작정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이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즉 바울이 말하는 [정사와 권세], 그리고 이 세상의 견고한 이기주의의 기득권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이 전대미문의 꿈을 그 눈길에 담고서 처음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에 세상은 이들을 그저 경멸하여 비웃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비웃음과 결명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계속 굳굳하게 마을에서 마을로 나라에서 나라로 나아가 드디어 로마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을 때,세상은 이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이들의 길을 가로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즘에는 타오르는 불이나 고문대,또는 맹렬한 모욕도 모두가 소용없었다. 그 꿈이 승리하였으며 세상은 그 발아래 굴복하였다. 이것은 이들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라고 언제나 이들은 말했다. 그것은 그 첫권이 베들레헴과 갈릴리 그리고 갈보리의 이야기를 담았던 전기의 계속이었다. 여전히 지금도 행동하시는 그리스도, 강한데서 강한데로 나아가는 그리스도 살아 계셔서 이 지상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었다.

      이들이 옳았다. 이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이들이 보여준 힘을 설명할 수 있다. 여러 차원에서 그 힘은 스스로를 나타내 보였다. 먼저 신체적 차원에서의 힘으로 나타났다.새롭고 상쾌한 기운이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와 그들로 하여금 열심과 생동하는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였을 일들을 이루어 내게 하였다. 그 다음 심적차원에서의 힘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를 최초로 따랐던 이들중 다수는 교양이 없고 무식한 자들이었런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이제껏 그 유례를 보지 못했던 독창력과 본질에 대한 파악력,결정의 솔직함을이들에게 주게된 어떤 일이 일어났다.

      또한 그 힘도 도덕적 차원에서의 힘으로 나타났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인간을 삼키며 멸망시키는 정욕에서부터 구함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맹렬하고 끈질긴 유혹과 싸워야 했으며 어떤 이들은 부패의 소굴이었던 도시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좁은 길을 흰옷을 입고 더럽히지 않은채 바로 예수님의 정결함과 같은 정결함을 지니고서 걸어갔다. 또한 그힘은 영적 차원에서의 힘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고 듣는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으며 능력있는 은헤의 역사가 나타났다. 그들은 일순간이라도 이 모든 힘이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힘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즉시 믿을 수 없을만큼 단순하고 대담한 것이었다. 그 힘은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였다. 그것은 그때에도 쓰여지고 있던 새로운 복음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에 있어서 새롭고 놀라운 국면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것도 그들을 좌절시킬 수 없으며 그들의 모험을 패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하나님의 힘으로 전진하여 진리의 복음 빛이 온세상에 비치게 하리 슬픔과 죄와 더불어 싸워 그 사로잡힌 자를 자유케 하여 큰 물이 바다를 덮듯이 가득하게 하리.

      그리스도로 왕을 삼으려는 열망

      최초의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예수께서 하나님과 主되심을 증거하게 했던 것은 네 가지 사실로 나타난다. 이 네가지 사실은 오늘의 달라진 상황에서도 여전히 모든 진실한 제자들에게 증거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

      그 첫째는 예수님 자신의 명령이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8-19). 이러한 세계적인 시야는 시초부터 예수님의 생활과 교훈의 특색이 되어왔다.(마5:148:1124:14, 26:13) 그러나 이와같이 분명하고 확정적인 명령이 이제 그들의 귀에 울리자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 따르는 자들에게 그 명령을 주실 때[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란 말을 덧붙이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눅 24:47).이것은 매우 흥미있는 암시,즉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그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암시하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은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을 버리고 도망했던 수치스런 실패의 장소였다. 이제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옹호하여야 했다. 예수님을 죽였던 바로 그 도시가 예수님 자신의 명령에 의해 맨 처음으로 복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항상 있었던 사랑과 인내 그리고 용서의 정신과 훌륭하게 조화되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비록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을지라도 온 세계로 퍼질 것이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들은 주님과의 교제가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서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봉사의 배후에는 언제나 이 명령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친구들에게 세상에서 자신을 증거해 줄 것을 부탁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의무적인 것으로 요구하고 계신다.[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기독교란 그리스도를 천재나 예술가 또는 선생으로 존경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명령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루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눅17:10).사람들이 종종 말하듯이 본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고 그들이 나아가는 길 뒷쪽에 아직도 점령하지 못한 요새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가야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면,우리는 다음과 같이 즉 종교가 스스로를 전파하며 널리 퍼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그 종교의 죽음을 의미하며 또한 이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든지 아직도 여전히 미해결 문제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라고 대답해 주어야 한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미해결로 남아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중대한 명령은 그 문제를 단번에 결정지워 버렸다. 이 문제를 놓고 아직도 논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감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잘못을 찾아내고 고치려는 자와 같다. 이것으로 그러한 주장의 논거는 파괴된다. 예수님의 판정은이미 내려졌다. 그리고 그는 그 판정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다.

      제자들은 세상에 내 보내어 증거하게 했던 두번째 사실은 상황의 위급함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종말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올지도 모랐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인자가 그 왕국으로 오는 것을 볼 때까지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고는 그들에게 확언하지 않으셨던가?(마16: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막 13:30)는 예수님이 말씀이 그들 마음속에 새겨져 있지 않았던가? 조말이 오기 전에 온 세계의 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면 분명히 시간은 촉박했다.[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 13:10). 왕 그리스도의 사업은 분별없는 세상이 멸망해 가는 지금 서두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어둠과 죽음의 그림 속에서 희망없이,믿음없이,절망적인 파멸속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종말은 서둘러 오고 있었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여금 뛰쳐 나가 복음을 전파하게 했다.

      이것 역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증거의 의무를 지우고 있다. 오늘의 세계적 상황 속에서 발견하는 한 가지 놀라운 요소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옛 신앙과 윤리 체계의 붕괴이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지침 원리도 없으며 마치 나침판이나 키도 없이 폭풍의 바다위에 떠있는 배와 같다. 만일 우리가 이 상황을 그리스도와 대면하게끔 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이 결국 우리를 압도하여 세계를 혼한 속에 빠뜨릴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히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늘의 시대는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를 믿는 자 모두가 위급한 상황에 의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에 대한 산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할 때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뛰쳐 나가 복음을 전하게 했던 세번째 사실은 복음의 영광이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 유례가 없었던 어떤 것을 발견했다. 복음 속에는 예를 들자면 용서의 기이함이 있었다. 다른 종교들은 죄를 지은 자들에게 힘들고 고통스런 노력으로 천천히 다시 도덕적인 고상함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말해 주었으나 기독교는 가장 누추하고 더러운 영혼을 감싸 주시는 공포로 인하여 항상 얽매여 왔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죽음의 냉혹한 얼굴 앞에서 미소 지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 더우기 세상 사람들의 반 이상은 하나님을 질투심 많고 위협적이며 달래기 힘든 폭군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며 오직 사랑만이시며 영원히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이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들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 그들은 세상이 꿈꾸어 보지도 못한 한 실재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영광이었으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뛰쳐 나가 온 세상을 불타 오르게 하도록 하였다.

      희랍의 옛 격언에 [횃불을 가진 자는 그 불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 그가 신앙하는 복음이 인류의 마음속에 들어 온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라면 누구나 그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가 표현한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기도(겟세마네와 갈보리에서의기도)를 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온 세계가 그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것이 선교 사명에 대한 진정한 호소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한 가운데는 숭고하고 사람을 끄는,그리고 경모할 만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이 우뚝 솟아 있다. 복음의 이러한 영광은 우리로 하여금 증거하지 아니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네번째 사실은(실제로 이것이 다른 세가지를 포함한다. 최초의 기독교 신조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던[예수는 구주시다]라는 확신이었다. 바로 기독교의 최초 설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는 말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바로 예수님이 주되신 이 사실이 모든 것의 핵심이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된 것을... 우리가 전파함이라](고후 4;5) 는 바울의 진술에 초대교회 모든 설교의 주제가 요약되어 있다.[예수는 주이시다]라는 단수난 고백이 초대 교회의 유일한 신조이었다(롬 10:9,고전 12:3,행10:36).이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는 이 칭호를 흔히 듣는 말로 만들어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경이감이 띵무디게 한 것 같다.그러나 최초의 제자들이 구약으로 부터[主]란 칭호를 빌려 (주란 말은 히브리어[여호와]의 헬라어 번역이다] 그들이 갈릴리에서 함께 길을 걸어 다녔던 그들의 선생에게 그 칭호를 적용했을 때 그들이 의미했던 것은 그들에게 온갖 것을 베풀어 주셨던 친구 예수님이 장차 온 인류를 심판하는 재판장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 억양하나까지 알고 사랑했던 그 음성이 마치 나팔소리처럼 온 세계를 일깨울 것이라는 것이었다.세상의 나라가 그의 것이 될 것이며 그는 참으로 주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생이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 제자들도 사람에게서 종종 멸시 받고 배척당하였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꿈을 잃지 않았으며, 그들의 지도자를 위해 시저가 생각해 보지도 못했을만큼 광대한 왕국을 바라보면서 그를 위해 [알렉산더]의 세계정복을 무색하게 할 세계적 전략을 계획하였다.

      제자들은 그들을 대적하고 경멸하는 바로 그 세상에서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그는 만유의 주시라]고 속삭였으며 그들이 쓴 암호는 [마라나다](주여 오시옵소서)였다(고전 16:22,비교계22:20).[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조는 그 후에 생겨난 어떠한 신앙 고백보다 훨씬 간단한 것이지만 그 의미나 세상을 뒤흔든 효과에 있어서 결코 덜 심오한 것이 아니다.이 고백을 충실히 적용한다는 것은 먼저 개인 생활의 모든 분야 위에,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의 생활 위에 예수님의 절대적 주권을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고백은 그리스도를 위한 온 우주의 왕좌를 의미한다. 또한 그 시초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대담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실제성과 정직하게 직면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왕좌가 당연히 그리스도의 것임을 의미하지 못한다. 그 왕좌는 값주고 사신 것이었다.

      돌로 떡을 만드시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에서 당하셨던 배고픔으로,인간의 죄로 인해 흘리셨던 눈물로 핏방울 같이 떨어졌던 겟세마네에서의 땀으로, 사망으로 그의 몸을 부서뜨렸던 쓰린 십자가로,잃어버린 세상을 그대로 버려두기를 단호히 거부했던 영원한 사랑으로 사신 것이었다. 인류의 대장이신 분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사병과 같이 되셨다. 그는 일반 사병 그 훈련을 견디어 내셨다. 그가 지금 말을 타고 군대의 맨 앞장에 서 계신다면 그것은 언젠가 그가 도보로 행군하셨던 때문이다.장차 그가 모든 인류 위에 왕이 되시기로 되어있다면 그것은 그가 처음에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러므로]바울은 이 한마디에 예수님의 고난과 슬픔의 전 내력을 잘 요약하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빌2:9). 참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은 값을 주고 사신 것이었다. 이 그리스도는 큰 시련을 겪으신 분이었다. 따라서 이제 그는 왕좌에 앉게 된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그 왕좌가 마땅히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증거한다. 예수님께서 그 수하에 부하들을, 그의 명령을 행하는 보이지 않는 군대를 거느리고 계시며, 그 배후에 왕국의 모든 위엄과 무게를 지니고 계신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가장 깊고 참된 모든 것으로 그의 왕국은 결코 쇠하지 않으며 장차 하늘과 땅의 온 우주가 그말을 주로 시인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며 안다.

      예수께서 다스리스다

      그 날은 아직 밝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그리고 한결같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이미 생이 서로 만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우뚝 서 계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먼저 국가가 서로 만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우뚝 서 계신다. [칠레]의 영토와 [아르헨티나]의 영토가 맞닿는 [안데스]산백 높은 곳에 못쓰게 된 대포를 녹여 만든 거대한 그리스도의 동상이 서 있다. 그 동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차라리 이 산들의 위치에서 생의 투쟁의 고난과 위험을 겪으셨다.그는 이 무너진 티끌이 될지언정 [아르헨티나]국민과 [칠레]국민은 그들이 구속주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서 맹세한 평화를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그 다음 계급이 서로 만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우뚝 서계신다. 구세군을 창설한 [부스]목사는 어떤 사람의 팔도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동시에 손을 뻗어 닿을만큼 길지는 못하다고 주장하곤 했다. 물론 인간의 팔은 그렇게 할 수 없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넓게 벌려졌던 그 팔은 그 사이에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넓게 벌려졌던 그 팔은 그 사이에 맞닿는다. 문학이 서로 만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우뚝 서계신다. 이천년 동안 예수님과 그의 피흘린 손과 발, 그리고 그의 타오르는 듯한 눈길이 세계의 문학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여미문학의 두 거장이었던 [칼라일]과 [에머슨]이 칼라일의 집에서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이 우주의 모든 일들을 논하면서 언덕 위를 걷고 있었을 때 조그만 시골 교회가 저 아래에서 시야에 들어왔다. [칼라일]은 멈추어 섰다. 그리고 [에머슨]을 돌아다 보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나무 위에 달려 죽어셨지요. 바로 그것이 저기에 있는 [던스코어커크]교회를 세웠고 또한 당신과 나르 띵이렇게 만나게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간이란 다만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봅니다.]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종교가 서로 만나는 곳에 우뚝 서 계신다.1928년 예루살렘에서 [세계 선교회담]이 개최되기 직전에 모든 비기독교적인 종교에 대한 철저하고 광범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죤 모트]의 말을 비리면 [비기독교적 종교들을 취급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좀 더 개방된 마음을 가지며 정직하고 공평하며 관대해 질수록 그만큼 더욱 고귀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절대적 독특성과 충족성,최고성,보편성 속에 드러나 보인다. 어떤 저명한 [힌두교]인은 [스탠리 죤스]에게 온 세상 사람의 마음에 심각하게 명령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이미 모든 시대가 함께 만나는 곳에 예수님께서 우뚝 서 계신다. 한 번이라도 옛님을 만나보고 자신의 생활 속에서 그의 능력을 체험해 본 사람에게는 우주의 모든 문들이 그 머리를 들어 그 왕을 들어오시게 할 그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분명한 일이다.

      이 모든 사실은 참되다. 그것이 참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의 매 장에서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한가지 도전이 있다.[그는 내 생의 지배자이시며 주님이신가?] 매년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첫 성찬에 참여하면서 공적인 신앙고백을 한다. 말하자면 매년 수많은 젊은이들은 공중 앞에 서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고 받아들이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다. 만일 수 많은 젊은이들이 온 힘을 기울여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의 삶이 [만일],[그러나]등의 조건이나 보류없이 참으로 철저하게 그의 것이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생각해 보라!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 주위의 세상에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오, 저기 거룩한 무리와 함께 그의 발 아래 엎드리고저! 영원한 노래를 함께 부르며 만유의 주께 면류관 바치리.

      매일 성경

       마태복음  28:16-20   사도들의 사명
       요한복음  16;1-15    그리스도의 영
       사도행전   1:1-12    예수님의 승천
       고린도전서 12:1-6    주님되신 예수
       골로새서  1:16-20    예수님과 우주
       계시록   19:11-16    정복한 것과 정복해야 할 것
       계시록   22:12-21    주님의 재림
       

      토론을 위한 문제

      1.오순절에 실로 무엇이 일어났는가?

      2.세계 선교와 기독교인의 연합과의 연관성에 대해 토론해 보라.

      3.[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은 국가정치와 국제정치에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4.오늘의 교히는 재림교리를 충분히 강조하고 있는가?


    •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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