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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3. 3. 2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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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中性) 성경 번역에 대해

1999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지 않는 단성(單性) 언어 번역들 성경을 만들어 내려는 국제 성서 공회(IBS)와 새 국제역(NIV) 성경 번역 위원회와 및 존더반 출판사의 최근의 노력들을 반대하고 비평함에 있어서 연합한다. 우리는, 영감된 성경 본문에 있는 성이 구별된 명사들과 대명사들을 현대 번역들에서 중성 단어들로 고의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성경의 축자(逐字) 영감에 대한 성경 자체의 교훈에 모순되며 결국 하나님의 무오(無誤)한 말씀의 거룩한 본문에 대한 더러운 위조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미합중국 장로교회가 여성안수 반대를 비평함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미국 남침례교회가 여자 목사를 허용하기를 거부한 일에 대하여 정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약 86% 대 13%의 표수로, 약 250만명의 교인을 가진 미국 장로교회 총회는 "그들의 목회적 은사의 실행을 부정 당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과의 유대감을 정중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표현하였다. 미국 장로교회는 1950년대 중엽 이후 여성들을 목사로 안수하여 왔다. 위의 결의안은 다른 기독교단들이 그들의 강단을 여성에게 개방하라는 그 교회의 소원을 표현하였다. 그 결의안은 표현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신앙 전통들이 여성들과 남성들에 대한 목사와 지도자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동일한 신념들을 가지지 못하는 계속되는 현실로 인해 슬픔을 느낀다"고 하였고 또 "비록 우리의 고상한 말들이 미국 장로교단의 목회사역에서 여성들과 남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현실에 항상 부합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동등성에 대한 우리 자신의 신념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성 안수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반대된다(고전 14: 34-38; 딤전 2:11-15).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가 여성 안수 30주년을 기념함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는 미국에서의 여성 안수 3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약 520만명의 교인을 가진 그 교회는 1999년말 교단의 17,611명의 은퇴 및 시무 성직자 중 2,358명(13.4%)이 여성이었다. 시무 성직자 중에는 18.7%가 여성이었다. 그 교단의 목회 분과 총무인 죠셉 왜그너 목사는, "우리의 8개의 신학교들에서 목사직을 위해 현재 준비하는 학생들의 49%는 여성이다"라고 말하였다.


미국 아프리카 감독교회(AMEC)는 여성 주교를 선출

미국의 유명한 발티모어 교회의 목사인 바쉬티 매켄지 목사는 2000년 7월 11일 미국 아프리카 감리 감독교회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약 230만명의 교인을 가진 그 교단의 213년 역사에 그 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들은 은사들, 재능들, 기술들 및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고려되며 우리의 성별은 단지 우연히 네가 누구인가 하는 것의 일부이다. 그것은 장애물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지도자직에 대한 제한물이 아니다.


윌로우 크리크 교회와 여자 목사들

미국의 시카고 부근에 있는 빌 하이벨즈의 윌로우크리크 커뮤니티 교회는 수년 전에 "수개월 간의 연구와 논쟁 끝에" 교사나 설교자나 장로 등 어떤 지도적 직위에서도 여성들을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교회의 신학적 선생이며 창립 장로인 위튼대학 교수 길버트 빌레지키안은, 남자들이 어떤 일들에 그리고 여자들이 다른 일들에 배정되는 "성의 역할들에 관한 세속적 사회주의화"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있을 곳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교회는 그것이 가상적 교인이 윌로우 크리크 교회에서 등록하기 전에 "여성 교사들의 가르침 하에 즐거이 앉고" 또 "여러 가지 지도적 직위들에서 여성들의 지도에 즐거이 복종할" 수 있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비평을 계속받아 왔다. 한 여성 장로는 말하기를, "만일 여러분이 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실제적으로 말해서, 여러분은 아마 다른 어떤 교회에서 더 행복할 것이다"라고 했다. 빌레지키안은 식사 때 붉은 포도주 한 잔을 즐긴다고 하며 "수많은 여성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 "윌로우 크리크 교회의 여자들이 그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아마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이 구도자들에 큰 관심을 가진 빌 하이벨즈의 대교회 사역의 배후에 있는 자이다.

예일 신학대학원의 여성신학

미국의 예일 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여성신학의 개척자인 레티 러셀이 은퇴하고 과격한 여성 운동은 새 노정을 꾸미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나의 신학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가진 해방신학이다"고 하였다. 크리스챤 뉴스의 한 사설은 논평하기를, "다른 말로, 반기독교적인 '사회복음'이 '여성신학'의 중심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지 않다"라고 했다. 지난 25년 이상, 여성 신학은 널리 대교단의 인정을 받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예일 신학대학원에는 여성이 학생들의 48퍼센트와 교수들의 30퍼센트에 이른다.


조용기 목사는 여자 목사를 옹호함

조용기 목사는 "목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동등하다. 그들은 인허를 받고 안수를 받는다. 그들은 집사와 장로가 되며 조장이 된다"고 말한다. 카리스마지의 보도에 의하면, "조 목사의 [70만명 교인의] 교회의 5만명의 조장들 중 4만7천명이 여자들인 것과 같이, 600명의 부목사들 중 400명이 여자들이다." 여자들이 목사가 되는 것을 금하는 성경 구절들에 대해 그는 "일단 여자들이 목회로 부름을 받으면, 그들은 더 이상 여자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의 사자들이다"라고 말한다.


예성 교단 여성안수 통과

2003년 4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제82회 총회는 여목사 안수허용문제를 긴급동의에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것은 한국교계에 또 하나의 슬픈 역사가 되었다. 예성의 초기 지도자들 김응조 박사, 전영식 박사 등은 매우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예성은 보다 자유주의적인 기성[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교단보다도 진보적 교단이 되었다. 기성 총회는 여러 해 여성 안수 허용안을 부결시켰다. 그러나 기성보다 보수적이라고 생각된 예성 총회가 여성 안수를, 그것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예성 교단이 여러 해 동안 상당히 개방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어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에 대해 금하고 있다(고전 14:34-37; 딤전 2:11-12).


예성, 여목사 안수 허용

과거 보수적 교단으로 알려져 왔던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2004년 4월 26-28일에 열린 제83회 총회에서 목사 후보자 자격에 대해 기존의 '만 28세 이상의 남자'라는 조항을 '만 28세의 자'로 개정 통과시켰다. 이러므로 예성은 예장 통합, 기장, 기감, 기하성, 성공회와 더불어 여목사 안수를 인정하는 교단이 되었다. 그러나 여목사를 허용하는 것은 명백히 성경의 교훈을 거스리는 잘못이다.


기성, 여성안수 압도적 통과

2004년 6월 23일 전주 바울교회에서 열린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98차 총회는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 총대 665명 중 559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이것은 그 교단의 자유주의적 경향과 입장을 다시 한번 더 분명히 확인시킨 일이다. 여자 목사, 여자 장로는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다섯 가지의 이유로 여성의 교훈과 치리의 직분을 금하고 있다(딤전 2:11-14; 고전 14:34-37). 여성이 가정에서나 주일학교에서나 또 여성들만의 모임에서 가르치거나 그 회를 인도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성인 남녀가 함께 모인 교회 안에서, 즉 가상적으로 생각할 때 남편들 앞에서,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직분을 가지는 것은 성경이 금하는 바라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여자 목사, 여자 장로의 비성경적 직분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일찌기 자유주의적 교단인 기장과 기감이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용납했고 뒤이어 예장 통합, 또 근래에 예성이 그리고 이제 기성이 그것을 용납한다. 이것은 그 교단들이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현대기독교음악(CCM)

교회 음악에 대한 릭 워런의 견해

1998년 1월,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릭 워런은 '목적에 이끌린 교회 건립하기' 세미나에서 크리스챤 록 음악을 '새 노래'라고 말하면서 새 노래를 부르라고 강조한다.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음악의 가사들이 더 근래의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악의 스타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날마다 듣는 것이어야 한다." 릭 워런의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음향 시설, 밴드, 노래하는 이들과 연주 등의 오락 구성물은 어떤 세속적 록 연주회의 것과도 경쟁할 만하다. 워런은 말하기를, 교회가 해야 할 첫번째 일들 중의 하나는 '오르간을 밴드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했다. . . . 교회 찬양대의 목적은 '독창 연주자를 배경 음악으로 후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찬양대로 하여금 직접 노래하게 하는 것보다 그것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90년대의 방식이다'고 하였다." 워런은 또 말하기를, 몰아대는 비트를 가진 큰 소리의, 쉰 목소리의 음악이 그의 회중들이 듣는 종류의 음악이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주말 집회 때 정말, 정말 소리가 크다. . . . 나는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어린아이 같은 대중들은 음악을 느끼기를 원하지, 단지 그것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전통적 음악의 사용을 주장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죄와 동일시 하였고 또 부언하기를, "모든 좋은 음악이 200년전 유럽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얇게 덮인 인종차별주의 . . . 문화적 엘리트 의식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또 그의 책에서 자기 교회가 현대 팝송과 록 음악을 채택한 이유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우리 교인의 96%가 성인 현대 음악을 듣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새들백 교회에서 우리가 사용하기로 선택한 주요 음악스타일이다," "우리는 열린예배에서 찬송은 더 이상 부르지 않기로 전략적 결정을 세웠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교회에 전도대상으로 정해준 종류의 사람들에게 맞는 음악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음악의 스타일이 좋은 음악 혹은 나쁜 음악이라고 판단될 수 있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누가 이것을 결정하는가?" "교회도 어느 한 특정 형태의 음악만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주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통하여 메시지는 전달될 수 있다"고 한다.


크리스웰 목사 교회의 춤추는 록 연주회

미국 남침례교의 W. A. 크리스웰 박사는 달라스에 있는 역사적 제일 침례교회의 원로목사이다. 우리는 댈라스 모닝 뉴스 1998년 8월 1일자의 한 논설에서 케이던스라는 새로운 청년 사역을 시작한 7월 25일 하드코어-어돈 연주회 동안 그 밤에 젊은이들이 떠들석하게 춤추는 모습을 보니 슬펐다. 그 기사에 의하면, "떠들석한 춤과 천둥 같은 기타들과 크리스챤의 경건으로 완비된" 그 주 연주회로 인하여 "달라스 제일 침례교회의 부속건물인 그 장엄한 스펄젼 해리스 빌딩은 흔들린 것 같았다." 펀더멘탈리스트 다이제스트 1998년 7-8월호는 보도하기를, 은사주의와 신복음주의 계열들에서 흔히 세속적, 관능적 현대 기독교음악 혹은 록 음악과 단정치 못한 복장을 특징으로 하는 춤에 대한 새 경향이 있는 것은 슬픈 일이며, 그것은 어떤 근본주의적 교회들 속에도 침투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크리스웰 목사와 같이 경건한 분이 목회하던 교회가 세속적 방향으로 변한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온다. 전 세대에 경건했던 목사가 후임자를 바로 세워 그의 사역을 계승시키지 못한다면, 그 교회의 쌓여진 좋은 역사는 이처럼 쉽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속적 음악

고든 시어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오늘날의 음악에 대해 말할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이 세속적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질문하는지 놀랍다. 단지 2, 3년 전만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속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현대 기독교 음악이라는 것이 들어오면서 '세속적'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대단히 큰 혼란이 생겼다. . . . '세속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세상에 속한 혹은 세상과 같은'이라는 뜻이다. 사탄은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리운다. 사탄의 목적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남침례교에서의 록 음악

죤 비새그노 박사의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제일침례교회는 그 교회의 솔리드 록 카페에서 1994년 행사로 엘비스 대회와 비틀즈 음악 연주를 가졌다. R. L. 히머즈 2세 박사는 죽어가는 국가를 향한 설교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이 저녁 예배가 완전히 은사주의적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 . . 안내 위원들은 귀거리를 하고 짧은 바지와 모자를 쓴 남자들이었다. . . . 우리는 나이트 클럽이나 락 컨서트나 마약 소굴에 들어왔을 때 느꼈을 것처럼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 . . 그 교회는 남침례교단 안에서 '보수적' 교회들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남침례교단의 신년 록 댄스 청년 축제

미국의 남침례교단에서는 2000년 신년 전야제가 유스링크 2000의 7지역들에서 3일 밤, 2일 낮 밀레니엄 축제로 치루어졌었다. 4개의 남침례교 기관들에서 후원한 이 행사는 남침례교 역사상 가장 큰 청년 모임이었다. 그 모임은 4만 6천명 이상의 남침례교 청년들을 모았고 그들은 미국 내에서 알려진 '기독교' 록 밴드들에 의해 귀가 찢어지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찬양과 예배 음악을 즐겼고 약 새벽 2시까지 웃으며 노래하며 소리치며 춤췄다.

현대기독교음악(CCM)은 어디로?

현대기독교음악의 인기는 치솟고 있지만, 일부 예술가들은 이 장르가 상업적 시험과 유행 형식들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성경적 세계관에 너무 적게 의존한다고 믿는다. 2000년 5월 13일자 월드지는 현대기독교 음악가들이 그것을 그 양쪽 길로 다 가지려고 애썼다고 경고한다. "그들은 대중에게 주류적 호소력을 얻으려는 성공적 산업을 만들었다. 그러나 현대기독교음악의 위험은 그것이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가장 악한 것, 즉 긍정적이기 위해 복음을 묽게 만드는 빈곤한 기독교와 기독교인이 없는 세속 시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비가 입맞춘다'(Butterfly Kisses)는 곡은 1997년에 '올해의 복음송'이 되었으나 그 내용 안에는 아무런 복음이 없었다.


예배와 음악의 혁명?

미국의 애즈베리 신학교장 맥시 던넘은 "오늘날 교회 내에서 가장 큰 혁명은 예배와 음악의 영역에서다"라고 말한다. 더넘은 현대적 음악과 예배를 추천한다. 그러나 우리는 록과 랩 스타일의 현대 기독교 음악과 세속적 방식을 도입하는 열린 예배의 형식은 순수한 기독교를 혼란시키는 어두운 영의 활동들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오늘날 유행하는 풍조를 거스려 옛날부터 가져온 경건한 예배와 음악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현대 기독교 음악이 점점 유행함

내쉬빌에 본부를 둔 현대 기독교 음악 보도 기관의 회장이며 미국 복음송 협회의 차기 의장 당선자인 죤 스틸은 현대 기독교 음악이 교회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서정시적인 내용에 의해 한계가 정해지는 그래미상(賞) 지명 과정의 유일한 부문이라고 언급한다. 현대 기독교 음악의 많은 양식들이 있지만, 현대적/유행가적 양식이 가장 인기가 있고 '예배와 찬양' 부문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스틸은 말하기를, 현대 기독교 음악은 신 세대에게 예배의 경험을 좀더 적절하게 만들었으나 "현대 음악이 매우 연주 지향적인 위험성이 있다. 예배와 오락 사이의 선은 매우 쉽게 지워져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찬양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올려져야 한다.


세상이 교회 음악을 지배한다

세상은 이제 음악에 대한 교회의 표준을 지배하고 있다. 비(非)중생자들의 마음에 드는 바로 그 음악형태가 신자들의 마음에 점점 더 들게 되었고 수천개의 교회들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바는 이것이다--불신자의 옛 본성의 육신적 욕구를 감동시키고 자극시키고 불붙게 하는 그 음악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는, '새 사람'인 신자를 유익하게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좀더 경건한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즐겁게 하는 음악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음악으로 하나님께 찬송해야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복음성가의 영예의 전당에 앉혀짐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지난 9월 복음성가의 영예의 전당에 앉히웠다. 엘비스가 그렇게 앉히운 것은 '로큰롤의 왕'의 영성의 반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늘날 복음성가 분야에 침투해 들어오는 믿지못할 세속화의 반영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완전히 육신을 위해 살았고 그의 복음성가 앨범들도 육욕적이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노래를 기뻐하실 수 있겠는가?


상업적 현대 음악

좌석표 값을 받는 현대 찬양 콘서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로부터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으로 변해왔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돈을 내지 않는다! 찬양 집회의 비용은 자원적 헌금으로 충당될 수 있지만, 토론토에서의 최근의 게이더(Gaither) 콘서트에서처럼 좌석표를 팔 때는, 강조점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보다 오락에 놓여진다. 토론토 자유 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인 프랑크 맥클레란드 박사는 말하기를, "광고된 좌석표 가격들로 계산해 볼 때, 만일 에어 캐나다 센터가 가득찬다면 수익금이 150만불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대기독교음악은 신복음주의로 이끈다

음악은 변화의 강력한 힘이다. 죤 애쉬브룩 목사는 오하이오 바이블 펠로우쉽의 비지터(Visitor)지 2002년 4월 2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느 곳이든지 기독교 현대음악이 근본주의적 교회나 학교에서 환영을 받으면, 그 근본주의적 기관은 신복음주의적이게 될 것이다. 예배 음악은 오늘날 성경을 믿는 교회들에서 큰 싸움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학생들로 하여금 구주를 높이는 예배 음악에 감격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현대기독교음악은 세속 음악에서 기원함

현대기독교음악(CCM)과 기타 형태들의 '기독교' 록 음악은 오늘날 교회들에게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도적인 교회 성장 전문가들은 교회들에게 CCM과 '기독교 록 음악'과 찬양과 경배 음악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교인들을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하든지 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심지어 CCM의 지지자들도 오늘날 수천의 교회들이 받아들이는 음악이 기독교회에서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정한다. CCM 커뮤니케이션즈의 회장이며 복음성가 음악협회의 차기 의장인 죤 스틸은 2001년 4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밀 밸리에 있는 골든 게이트 침례교 신학교에서 한 경배와 음악 지도자 모임의 방문 연사로 봉사하였다. 2001년 4월 16일 뱁티스트 프레스 보도에 의하면, 스틸은 오늘날의 '기독교' 음악이 "교회에서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스틸은 말하기를, 그것은 1960년대의 문화에 대한 대항(對抗) 문화적 반응으로서 시작되었으며 1960년대의 '예수 운동'에 관계되었던 사람들은 "단지 그들이 알고 있었던 유행하는 록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였고 거기에 예수에 관한 서정적 내용을 주었다"고 했다. 뱁티스트 프레스에 의하면, 스틸은 청중에게 말하기를, "긴 머리와 맨 발의 경배자들로부터 하나의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 결과적으로 하나의 산업이 되었고 그것은 이제 주류의 오락 사업체들이 소유한 아주 거대한 현대기독교음악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틸은 말하기를, 오늘날의 교회는 CCM을 목마르게 원하고 있고 그것은 예배 음악을 "이제 유행적이고 상업적이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는가? 미국의 교회 생활에 대한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연구인 하트포드 종교 연구소의 최근의 한 연구는 보고하기를, "진동하는 예배"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께 "접속된" 회중들은 가장 큰 성장을 경험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카리스마 뉴스 서비스에 의하면, 그 연구는 전자 악기들의 사용의 증가는 "종교적 권위의 위치의 심각한 변환"을 수반하였음을 나타내었는데, 그 변환은 "성령의 권위에 대한 급격한 증가와 신조들과 인간의 이성에 대한 강조의 현격한 감소"라고 하였다. CCM과 그 외의 기독교 록 음악의 형태들은 회중으로부터 성경의 권위와 경외심을 가진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제거하고 인간의 감정과 오락에 대한 보다 큰 강조로 그것을 대치하는 도구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

예배 음악이 중요하지 않는가?

인기 있는 CCM 가수이며 교회 개척가인 마이클 W.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무디 먼스리지에 인용되었다: "나는 주께서 우리가 어떤 스타일의 음악으로 그에게 예배드리는지 참으로 관심을 가지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그 사람의 창자에 있고 그가 참으로 주께 부르짖고 있다면 . . . 그것은 예배이다." 두 면을 건너서, 죤 피셔는 그와 비슷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때때로 나는 예수께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음악으로 예배드리는지에 대해 심지어 관심조차도 가지실까 의문을 품는다." 이것은 바보 같은 그러나 오늘날 점진적으로 유행하는 생각이다. 피셔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통계는 대형교회들이 반드시 회심자들에 의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교회들은 단지 더 유행하는 예배 형식들에 있어서 더 낫고, 단지 그렇게 할 수 없는 소형교회들로부터 교인들을 흡수한다. 심지어 이전에 가장 중요했던 설교는 때때로 더 많이 찬양과 경배의 부가물로 보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 듣기 위해서보다 그를 체험하기 위해 더 교회에 가며, 그들은 음악에서 가장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느낀다." 슬프지만 사실일 것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딤후 4:3). 설교는 단지 '부가물'인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거룩한 힙팝(Hip-Hop) 음악?'

카리스마 8월호는 힙팝(hip-hop) 음악에 관한 글을 특집 기사로 실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은 소리가 크고, 비트는 강하다. 그러나 기독교 힙팝 예술가들은 자기들이 한 세대를 접촉하여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이 비정통적 소리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독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하였다:

힙팝 혁명은 우리의 청년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탄이 정한 것이다. . . . 명백히 육신적이고 마귀적인 음악적 형태를 당신이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청년을 접촉하기 위해 힙팝 음악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명백히 청년들이 세상과 분리하기를 원치 않는 지점이다. . . . 힙팝 음악은 확실히 최면술적이다. . . .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도력을 보일 필요가 있고 이 불경건한 음악을 그들의 교회들에서 제거해야 한다. . . . 우리의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있는 음악을 권장하는 것은 카리스마지의 수치이다.


열린 예배

릭 워런(Rick Warren)의 새들백(Saddleback) 공동체 교회

릭 워런 박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새들백 공동체 교회의 목사이며 '목적에 끌린 교회 건립하기' 연수회의 지도자이다. 지난 1월, 데니스 코스텔라 박사는 워런이 인도하는 세미나들 중 하나에 참석했는데, 거기에서 워런은 전통적 교회를 극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로 변형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1) 현대적 스타일의, 비(非)위협적 '구도자(求道者) 집회'가 전통적 일요일 예배를 대체해야 한다.

2) 복장은 평상복 차림이어야 한다.

3)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4) 설교는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똑같이, 종종 심리학과 격려적인 성경본문을 섞는 설교 후에, 자신들에 대해 좀더 기분 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오직 긍정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5) 교회의 사역들은 대중의 필요들을 충족시키도록, 우울, 무절제한 식사, 불임(不姙), 동성연애자들의 가족이나 친구, 낙태 후의 일, 별거(別居) 등을 위한 후원 그룹들을 가지고 준비되어야 한다.

6) 교리적 교훈은 일요일들에 교회 전체에게 주지 말고, 예배 시간과 별도로 소그룹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한다.

7) 실용주의적(實用主義的) 타협의 정신이 우세해야 한다.


열린 예배, 교회 내의 문화 행사

요즈음 일부 교회들에서는 '열린 예배'라고 하여서 교회의 전통적 예배 모범을 깨뜨리고 예배 시간에 멀티비젼(대형 스크린에 비쳐지는 그림들), 드라마, 무용, 세속적 형식(록이나 랩 스타일)의 복음 성가와 밴드, 혹은 심지어 청바지 형태의 복장을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교회들은 '문화 학교'를 개설하여 영어 회화, 꽃꽂이, 바이올린 등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런 경향들은 이전에는 자유주의적 교회들에서 시도되었던 바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복음주의라고 하는 교회들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영성'(靈性)이 있는 활동이며, 심지어 이런 교회들이 '사도적 모범을 좇는 교회들'이라고 선전된다. 이런 류의 교회들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청중들을 모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대형교회가 목회의 성공이라고 인식하는 대중의 평가에 이끌리어, 많은 목사들은 '여하튼 교회가 숫적으로 커지고 봐야 한다'는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류의 교회 행태, 목회 행태는 심히 불성실하고 인위적이게 보인다. 우선, 정말 '열린 예배'가 바람직한 형식이라면, 먼저 기도와 성경 연구와 신중한 토론을 통해 목사들의 임직 서약 때 하나님 앞에서 수락했던 '예배 모범'을 고쳐야 할 것이다. 어떻게 목사가 신앙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며 받아들였던 '예배 모범'과 반대되는 예배 형식을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는가?

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엄숙하고 질서 있게 행해지고 예배 음악들이 아름답고 안정되게 연주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성경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말했다(시 96:9). 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했고(고전 14:33), 또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빌 1:9, 10). 우리는 질서 있고 가장 아름답고 선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예배 순서가 찬송과 기도와 설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보이고 있다.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런 말씀은 전통적 예배가 성경적임을 보인다.

또한, 교회의 문화적 행사들은 성경의 교훈들에도, 초대 교회의 모범에도 맞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본연의 임무와 사명이 있다. 그것은 예배와 영적 성장과 전도의 일이다. 특히, 전도는 예수님 자신의 사명이었고, 그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일이었다. 초대 교회는 이 임무들과 사명에 충실하였다. 어느 시대이든지, 교회는 오직 이 임무들과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성경은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만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이 아니고, 또한 교회 생활이나 목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인간적 생각과 지혜로 예배하거나 교회를 운영하지 말고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예배하고 목회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심히 혼란스런 오늘날 교회들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지시하는 정확무오한 유일한 규범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목회해야 한다.


열린 교회가 참 교회의 모습인가?

한 기독교 신문은 열린 교회를 지향하는 한 교회로서 서울의 목동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한 교회를 소개하였다. 그 교회는 예배당 경내에 예식장, 커피숍, 알뜰 매장, 문구점 등이 있다. 이웃 주민들은 교회의 모든 시설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고 생활필수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예식장은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예비부부 모임 등 가족 콘서트가 있고, 일일 찻집을 통해 구제 기금도 마련하고, 바이올린반, 꽃꽂이반, 영어회화반 등 문화학교가 개설되어 있다. 교회 본당도 음악발표회나 음악사랑동호회, 세미나 등에 개방되어 있다. 그 교회 담임목사는 '교회가 교인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러기 위해 교회는 외딴섬이 되지 않도록 다양하게 다리를 많이 놓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역사회가 교회를 생각할 때 나와 관계가 없다는 벽을 허물고 나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목회 비전으로 교회의 본질과 기능을 회복하여 초대교회처럼 성경적 교회상을 체험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 신문은 그 목사를 '젊은 목회자 중 가장 깨어있는 지도자'라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소위 이러한 '열린 교회'가 오늘날의 참 교회의 모습인가? 그것이 과연 교회의 본질과 기능을 회복하여 초대 교회와 같은 성경적 교회상을 이루어 가는 일인가? 우선, 분명한 것은 그런 교회가 전통적 교회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말씀 배우고 기도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곳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조용하고 경건한 곳이었다. 그러나 '열린 교회'는 그런 모습과 전혀 대조된다. 신앙의 선조들은 참 교회를 이루려고 애썼는데, 참 교회란 성경이 계시하는 모습의 교회이다. 성경은 교회를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분명히 계시한다. 교회가 믿지 않는 세상을 위해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만, 그렇다고 교회와 세상이 뒤섞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와 세상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신앙의 선진들은 참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고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고 훈련과 권징이 성실히 시행되는 교회라고 보았다. 이 특징들은 불신자들이 받기 어려운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백성에게 가서 전도하여 제자를 삼고 그가 명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마 28:19, 20). 주의 '모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중생치 못한 자들에게는 좀이 쑤시고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런 신앙 훈련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설교 내용을 축소해서는 안되며 성경의 모든 말씀을 성실히 강론하고 그대로 믿고 살도록 훈련시키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되며, 또 필요할 때는 권징도 시행해야 한다.

신앙의 선진들은 교회의 임무가 세 가지라고 보았다. 첫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며, 둘째는 교인들을 신앙적으로 건립하는 일이며, 셋째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일이다. 이것은 성경적 확신이었다. 교회는 이 세 가지의 임무를 다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교회의 예배는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이 가르쳐 준 대로 경건하고 엄숙하게 드려져야 한다. 또 성경 말씀을 배우는 것, 기도회로 모이는 것, 각 구역이나 부서의 모임 등 교회의 공적 집회들이나 활동들도 다 성도들 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특히 전도를 빙자하여 교회 자체를 세속화시키거나 예배나 영적 건립의 기능과 임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또 전도는 성경에 계시된 방식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주관적 생각이나 시대의 풍조를 따라 교회의 모습을 제멋대로 그리거나 교회의 사명을 제멋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밝히 계시되어 있고 신앙의 선조들이 바르게 이해하고 힘써 왔던 '옛길'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와 영적 건립과 전도의 일에 조용히 충실해야 한다.


축제가 대중에게 접근하는 모델인가?

2001년 8월 10-11일,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스에서의 루이스 팔라우의 축제는 10만명이 모였다. 이것은 많은 교단들에 속한 375개 교회들의 목사들과 교인들이 1년 동안 기도하고 협력한 결과이었다. 천주교회도 포함되었다. 게임과 음악과 오락이 그 기간을 가득채웠고 팔라우는 매일 밤 말했다. 그는, "축제는 [젊은이의] 마음에 접근하는 첩경인 것 같다. 그것은 대중에게 접근하는 이 세대의 모델이다"라고 말했다.


현대적 춤으로 찬양과 경배?

오늘날 교회들 속에는 찬양집회나 교회행사에 빠른 비트의 음악에 따라 현란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아이들이 등장하였다. 10여년 전부터 등장한 전통적 발레와 한국 무용 등을 사용한 워십댄스와 달리, 힙합, 디스코, 째즈, 하우스, 탭댄스 등의 현대적 춤을 예배와 찬양에 도입하는 이런 흐름은 현대기독교댄스(Contemporary Christian Dance)라고 불리운다. 이런 젊은이들의 요구를 수용해 낮은 울타리 아카데미, 온누리교회 등에서 발 빠르게 교육과정을 개설했다고 한다.

현대기독교음악이라는 것이 교회음악을 속화시키더니 이제는 그보다 한 걸음 더 진보한 현대기독교댄스라는 것이 교회를 혼란시키고 속화시키려 한다. 하나님을 사람 기분에 좋은 방식으로 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성경 교훈대로 경건함과 단정함으로 섬겨야 한다.


참된 예배

아서 핑크(Arthur W. Pink)는 요한복음 강해 중 요한복음 4:23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늘날 '예배'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뜻들이 영적이기보다 육신적이고, 내면적이고 경건하기보다 외형적이고 구경거리적이다. 예배는 우리가 아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드리는 것이며, 육신과 그것의 감각을 끄는 모든 것은 참된 예배를 손상시킨다. 예배는 눈이나 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영으로' 즉 새 본성으로 드리는 것이다. 오 우리가 얼마나 멀리 정로에서 떠났는지! 현대적 '예배'는 주로 육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고안된다. 즉 그것은 아름다운 주위 환경과 감각적인 음악과 흥미 있는 이야기들을 가진 '밝고 매력적인 예배'이다. 이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조롱하며 모독하는 것인가! 찬양대는 누구에게 노래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인가? . . . 노래의 매력이 '설교의 어리석음'을 대치하였다. 그러나 음악이 잘못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재능을 주지 않으셨는가? 물론 그러나, 우리가 지금 비평하는 것은, 육신적이고 사람의 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전문적이며 구경거리적인 교회 합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영으로' 예배해야 하고 단지 육체적 감각으로 해서는 안된다.


하이벨즈의 윌로우크릭 지도자 정상회의

북미에서 3만명 이상의 지도자들과 장래 지도자들은 2003년 8월 7-9일까지 전세계의 교회 및 사업 지도자들의 모임인 연례적인 지도자 정상회의에 참여할 것이다. 그 모임은 미국 시카고 부근에 있는 빌 하이벨즈의 윌로우크릭 공동체 교회로부터 시작되었고 미국과 캐나다의 60개 곳에 인공위성으로 방송된다. 연사들은 하이벨즈, 캐렌 휴즈(죠지 부쉬의 전 대통령 자문관), 앤디 스탠리(애틀란타 부근의 노스포인트 공동체 교회의 목사), 짐 콜린스, A. R. 버나드 등을 포함한다. 윌로우크릭 협회는 2003년 지도자 정상회의를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9,500개 이상의 교회들(이단들을 포함하는)의 초교파적 세계적 조직이며 현재 매년 1000교회씩의 비율로 성장하고 있다. 하이벨즈는 매년 계속해서 자유주의적 로버트 슐러를 위한 연사이다.


'워십 댄스'에 대해

기독신학의 김석한 부학장은 "워십 댄스(worship dance)가 예배 구성요소인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최근에 한국교회는 전대(前代)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교회문화 행사종목인 예배춤(워십 댄스)이 예배에 도입되어 만연(蔓延)되는 추세에 있다. 아마도 종교적 여흥(餘興)(religious entertainment)을 즐기려는 회중들의 유희적 성향과 젊은이들의 오락적 취향에 맞추려는 열린 예배에 기생(寄生)하여 유입된 프로그램으로 보여진다. . . . 춤은 어떤 경축행사나 절기에서 신의 은총에 대한 환희의 극치를 표현하는 것인데 예배의 한 구성요소로 도입하는 것은 예배를 유희화(遊戱化)하여 사람의 관심과 만족을 주려는 인본주의가 된다. 예배의 본질은 경건에 있고 경건은 영적인 내재성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어떤 몸짓이나 신체적 작용을 통해 시각화(視覺化)하는 것은 아니다. . . . 성경에도 구약의 제의(祭儀)적 성전예배 때에나 신약예배에 춤의 순서가 구성된 근거는 없다. 춤은 구원받은 신자들의 감격을 종교행사적인 순서로 도입하여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워십 댄스(예배춤)란 말 자체가 부적절하다. 강단이 예술무대가 되고 예배순서가 오락화하는 것은 예배의 타락이며 예배타락은 기독교를 무너지게 함을 교회들은 유념해야 한다."

교회의 실용주의(實用主義)

릭 워런의 장사광(狂)

1998년 8월 미국 오하이오 바이블 펠로우쉽 발행 비지터지의 "영적이지 않고도 성공적인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팀 포터 목사는 릭 워런의 방법들과 그의 책 목적에 이끌린 교회의 가르침들을 검토한다. 워런의 책은 W. A. 크리스웰의 서문과 더불어 로버트 슐러, 빌 브라잇, 풀러신학교 교수 아치볼드 하트, 또 연합감리교회의 에스라 얼 죤스의 추천을 얻었다. 포터는 몇 가지 철학적 및 신학적 결점들과 기타 문제점들을 열거한다. 그는 말하기를, "장사술에 이끌린 목회 사역은 불신자의 요구에 응하므로 결국 불신앙에 이르게 될 암(癌)이다"라고 하였다.


현대 교인들은 오락을 구함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시설들, 가족들을 위한 프로그램들, 그리고 오락을 위해 교회들을 찾고 신학이나 신앙 사상을 위해 교회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청년연합회(YMCA)와 종교적 록 콘서트의 혼합물 같은 것을 찾고 있다. 슬프게도, 대형 교회를 추구하는 많은 목사들은 바른 교리와 거룩한 생활에 우선순위를 낮게 둔다. 성경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씀했다(딤후 4:3-4).

교회의 상업적 경영 방식(Marketing)

1999년 7월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의 한 결의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접촉하고 '구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세속적인 상업적 경영 전략들(예를 들어 헐리우드 영화들, 록 음악)을 사용하는 일부 목사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 결의문에 의하면, "바로 이 사람들, 특히 에드 답슨은 근본주의자들과 성경적 분리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라고 지칭한다"고 말했다. 그 결의문에 의하면, "이 상업적 경영 방법론은 미국에서 빌 하이벨즈와 릭 워런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통해 시작되었으나, 온 세계의 복음주의를 통하여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다"고 했다. 그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 결의문은 선언하기를, "근본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41-47의 교회 예배 형태를 따르고, 요한1서 2:15-17의 경고에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묽어진 기분좋은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기에 무력하다.


교회의 실용주의(實用主義)적 풍조

보이스(Voice)지 1999년 12월호의 한 글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많은 교회들이 기도를 프로그램으로, 능력을 사람들로, 참된 예배를 오락으로, 순수성을 번영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복음에 대한 충성을 조직체적 일치로 대치하였다. . . .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가 하나님의 백성의 생각을 엄습하여 교회에서 교인수가 느는 것이 복의 기준으로 간주되고 교회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취하든지 정당화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에 사람들을 포함시키려는 이 과정을 방해할 모든 것을 제거하는데 큰 강조점을 둔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으로 재정의된다. 칭의(稱義)가 매우 교묘하게 정의됨으로써 천주교인들은 교회를 연합시키려는 노력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거룩에 대한 이해는 생활 방식 때문에 사람이, 용납할 만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조화되지 않는 것으로 비난받지 않도록 조정된다.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과 접촉함'이라는 공통적 목표가 본질적 신학 영역에서의 교리적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교회일치의 기초가 된다.


릭 워런의 실용주의

릭 워런의 목적에 이끌린 교회라는 책과 그의 주장은 미국과 온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가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의 근본적 문제는 교회성장이라는 목적을 위해 세상적 수단 방법의 사용을 정당화하려는 데 있다. 그것이 과연 바르고 건전하고 성경적인 생각인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교회답게 성장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적 방법을 사용해 성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극장 교회들

오늘날 너무 흔히 하나님의 집은 연주회장으로 변했고 찬송 사역은 의자들을 채우는 방책으로 변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가 곁에서 일들을 그들의 좋아하는 방향으로 만든 후에 목사는 강단에서 그의 의무들을 수행한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설교가 영혼들을 거의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원수를 초청해서 추수꾼 앞에 가며 가라지를 뿌리고 그의 뒤에 가며 씨를 빼앗아 버리게 하면서 추수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예전의 한 목사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집의 찬송과 예배를 보이게 만들거나 흥미 있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었다."


기타

제자 훈련이 성경적 목회 방식인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목회에 제자 훈련의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그것은 목사가 제한된 사람들을 제자로 훈련시키고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훈련시키고 그들의 제자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훈련시키는 등 이렇게 피라밋식으로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인들의 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성경적 목회 방식인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성경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해 오듯이 목사가 장로들의 협력 아래 교인들을 돌보는 것을 목회라고 가르친다. 목사라는 직분은 목자가 양들을 치듯이 교인들을 돌보는 직분을 가리킨다. 그래서 목회를 목양(牧羊)이라고 부른다. 장로 혹은 감독이라는 직분도 양들을 돌보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교회는 처음부터 장로들을 세웠다. 사도행전 14:23, "각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교회의 감독자로서 하나님의 양떼를 잘 돌보라고 교훈하였다.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사도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양들을 잘 치고 본이 되라고 교훈하였다. 베드로전서 5:1-3,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성경은 감독의 자격요건을 분명히 가르쳤다. 아무나 감독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독의 자격요건은 디모데전서 3:2-7에 자세히 언급되었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교회가 바른 자격자들을 목사나 장로로 세우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인데 하물며 모든 신자를 다 목자로 만들 수 있다는 제자 훈련의 개념 자체가 매우 잘못이다. 그것은 바른 교리 사상과 인격이 준비되지 못하고 다듬어지지 못한 교인들의 마음을 높여 놓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실상, 제자 훈련의 개념은 순전히 인본주의적 생각이다. 그것은 공산혁명운동의 조직이나 다단계 판매조직같이 지극히 인간적 조직이다. 물론 그것이 교인수를 증가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목회방식이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식이 아님이 분명하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계시하신 방식대로 목회를 해야 한다. 교회는 준비된 자들을 목사와 장로로 세워야 하고 이렇게 합법적이게 세워진 자들에게 교인들은 겸손히 순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전쟁관

예장 합동측의 기독신보는 세계 100여개국 400여 도시에서 열린 '국제반전평화의 날' 시위를 보도하면서 "어떤 이유와 목적 그리고 그 누구와의 전쟁도 정당화 될 수 없으며,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이고, 악은 선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전쟁관이다. 만일 그런 전쟁관이 옳다면, 6·25전쟁시 남한은 이북의 침입에 대해 손을 들고 있어야 했고 미군의 인천상륙작전도 없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남은 벌써 공산화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세계 적화(赤化)의 꿈을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자들만을 이롭게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정당성이 있는 전쟁이 있다고 본다. 국가가 보유하는 군대는 그것 때문에 존재해야 한다. 오늘날의 전쟁들은 이런 차원에서 판단되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모든 전쟁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e-noc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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