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세의 확장인가? 복음의 전파인가?
대형 교회가 우후죽순으로 세워지고, 비즈니스같이 거대한 조직을 가진 산업형 교회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고 있다. 교회가 늘어 가고 교회가 성장해 가는 듯이 보이지만, 그런 현상들이 교세의 확장을 위한 것인지, 진정한 복음 전파의 정신을 띠고 생겨나는 것인지 의아해질 때가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맡기신 소명은 이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교회가 생긴 것은 바로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이 소명을 다 완수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복음의 전파
먼저 우리는 무엇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인지 알아야만 한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다만 교리를 설파하는 것인가? 교회들을 세우는 것인가? 아니면, 구호 사업을 통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빈궁한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는 것인가? 물론 복음의 전파에 이 모든 요소가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만으로는 진정한 복음 전파라고 말할 수 없다. 많은 교파의 교회들이 침례를 주고, 교회들을 설립하며,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빈궁한 자들을 돕지만, 성경상 의미로 볼 때에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 전파는 진리를 설교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활동, 그리스도인 봉사 활동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복음은 단순한 말씀의 전파나 행위의 실천 이상의 것이다.
신약 교회의 위대한 복음 전파자인 바울은 말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죄인들의 생애를 온전히 변화한 생애로 만들기 전까지는 복음은 아직 온전히 전파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복음은 오순절 때처럼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게 되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을 말한다.
성령이 없이는 어떠한 복음도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각각 다른 개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복음을 세상에 전하도록 교회의 신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기를 원하신다. 교회의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동역자”라 불려야 한다(고전 3:9). 모든 교인은 기별을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 전도 활동은 그것이 진정한 복음 전도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에 따라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 각 개인과 교회로서, 우리가 우리 가운데서 죄와 이기심을 없애고, 성령의 부어 주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업에 바칠 때, 우리는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하여 필요한 성령의 능력 있는 은사를 받게 될 것이다.
복음 전도의 목적
복음 전도의 목적은,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데리러 다시 오실 수 있도록,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영혼들을 준비시키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 복음 전파의 명백한 목적이 현대 교회의 목적이 되고 있는가? 복음 전도가 영혼들을 구원하는 자체의 목적보다도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정책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영혼 구원 사업이 이기적인 동기로 행해지거나 교회의 성공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잘못하면, 영혼 구원 사업은 개인들에게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로 봐서도 이기적인 목적과 노력으로 행해지기 쉽다. 교인 명부에 교인의 숫자가 더 많이 적혀 있을수록 교회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려는 정책은 더욱 강화되고,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교회는 더욱더 유명한 교회가 된다. 영혼 구원 사업이 정책적인 방편으로 수행될 때 그것은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탁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 쉬우며, 오히려 그것은 복음의 진보를 저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가라지”가 “원수”에 의해 뿌려진 것을 알 수 있다(마 13:25). 마찬가지로, 진정한 복음 전도가 교회의 목적이지만, 다만 숫자를 늘리려고 회심하지 않은 자들을 무조건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은 자칫 사단이 교회에 틈탈 수 있는, 모조 복음 전도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사단의 가장 큰 목적은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더 많이 끌어들이는 것이다. 교회의 표준이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낮아질 때마다 교회는 능력을 잃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한 많은 회심한 영혼들을 끌어들이는 것에 큰 관심을 두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은 단순히 숫자만 늘리는 식의 전도는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진심으로 회심한 모든 개인을 받아들이기를 기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공중 봉사 기간에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숫자를 늘리려고 하는 대신에 숫자를 감하려고 종종 애쓰셨다.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많은 자가 진정으로 회심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과,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실제로는 그분의 사업을 강화시키기보다는 약화시킬 것을 아시고 오히려 사람들을 돌려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단지 반만 회심한 미지근한 자들 수천 명보다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 소수가 더 효과적으로 일을 수행할 것을 아셨던 것이다.
교회의 표준을 높이는 일
영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는 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친절을 발휘해야 하지만, 진리의 표준을 결코 낮추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높여야 한다. 물론, 모든 진리의 표준들을 단번에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헌신적인 생애, 올바른 생활 태도, 청지기 직분, 복음과 진리에 관하여 바르게 이해하는 것 등등에 관해서 한 계단씩 가르쳐 영적으로 자라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한 번에 한 계단씩 가르쳐야 하지만, 침례를 받기 전에 철저하게 가르치고 그들이 실천에 옮기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거짓 희망 속에서, “다만 믿음으로!” 라고 주장하며, 순종과 자아의 굴복을 멀리한 채 살다가 뒤늦게 자신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될 수백 명의 사람을 갖는 것보다,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 소수를 갖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이다. 겉으로 명목상으로만 회심한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것은 교회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만일 진리의 표준을 낮추셨다면 그분께서는 수많은 회심자를 얻으실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부자 청년 법관이 예수님께 왔을 때 그는 표준이 너무 높은 것을 발견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 유망한 젊은이를 그분의 제자로 받아들였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속에 여전히 죄를 품고 있으면서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마음을 강퍅하게만 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 바로 가룟 유다의 경험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헌신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그분께서 설교하시는 가장 위대한 설교들을 들었다. 그는 복음을 나타내는 일에서 그분과 동참하였다. 그는 구원받기를 원하였으나 예수님께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가 예수님과 더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그 마음이 더 강퍅해졌는데, 마침내 주님을 배반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교회는 회심에 대하여 가르쳐야 한다
자신들의 마음이 그저 교회와 연관을 맺음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희망하는 모든 사람도 유다와 같다. 침례를 주기 전에 목사는 그 사람의 헌신과 결심을 보아야 한다. 물론 침례 받을 때에 아직 그 사람의 생애에 성장과 성숙이 필요한 많은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생애에 나타나는 굴복은 완전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침례 받으려고 침례 요한에게 왔을 때, 그는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였다(마 3:8). 어떤 목사들과 교회들은 교인들이 증가하는 것을 너무도 바라기 때문에 비 그리스도인적 습관과 행실을 지적하는 성실한 증언을 하지 않는다. 새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세상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함에도 말이다.
일반 대중은 교인이라는 호칭과 공언에 호감을 느낀다. 경건의 모양을 옷 입고 교회의 명부에 이름을 등록하는 데는 자아 희생이나 헌신이 별로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 없이 교회에 소속된다.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려고 그리스도인의 길을 넓고 유쾌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칠고 좁은 길을 평탄하게 하시거나 넓히지 않으셨다. 우리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걸어가신 것과 같은 길, 겸손과 극기와 희생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교회는 진리의 표준을 결코 낮춰서는 안 되지만, 또 반면에 종교를 행위에 의존하게 하여서도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다. 죄인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와서 자신의 마음을 사랑의 구세주께 굴복시켜야 한다. 주님께서는 새로 태어나는 회심의 경험 속에서 변화를 가능하게 하신다. 침례 받기 전에 헌신과 회심과 열매를 볼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반쪽 복음 전도의 결과
교회가 숫자에 그 강조점을 두기 시작하고, 숫자에 중점을 둔 프로그램들을 계발하며, 숫자를 크게 과시하기 시작할 때, 회심하지 않은 목사들과 지도자들은 이런 것을 표준 삼아 교회를 마치 이 세상의 사업처럼 통계 숫자를 늘리려 애쓰기 시작한다. 세상의 사업에서의 이익과 같이 교인의 증가와 침례를 주는 숫자가 발전의 표준이 된다. 현대 교회는 이런 시스템이 최고라는 정책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교회들은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로 차게 된다.
이런 교회는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신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는 예언을 성취하게 한다. 종종 곧바른 기별을 전하는 설교자는 이러한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에 의해 거절당한다. 그들이 총회에 그런 설교자들에 대한 불평을 말하면 충실한 목사들은 교회에 소동을 가져왔다는 비난을 받게 되며,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을 계속 즐겁게 하는 자들이 칭송과 인기를 얻지만, 진리와 원칙에 충실한 목사들은 마땅히 설 자리가 없어진다.
교회가 뜨뜻미지근한 사람들로 차게 되면 교회의 영적인 상태 또한 뜨뜻미지근해진다. 그러나 교인들은 자신들이 뜨뜻미지근한 상태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들의 숫자와 교회의 성장을 가리키며 교회가 영적인 면에서 부유하게 증가하였다고 믿는다. 이런 모든 일의 시작은 교인의 숫자를 늘리는 데 중점을 두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성장보다는 진정한 선교를
만일 교회가 인기를 얻고 숫자를 늘리려고 복음의 표준을 낮추고 숫자의 증가를 교회의 성공으로 삼는다면, 만일 숫자가 성공의 증거라면, 어쩌면 사단은 승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 대다수가 그를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회의 번영은 바로 교회의 영적 그리고 도덕적 능력의 정도와 질이다.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의 영적인 수준과 덕과 경건이지 그 숫자가 아니다. 숫자를 강조하는 교회의 정책이 교회를 그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과 분리시켜 왔다. 진정한 개심을 백성에게 가르치고 변화와 거듭남과 개혁을 강조하여 진정한 하늘 백성,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백성을 양산해내는 것이 진정한 선교이다. 교회 안에 진정한 복음 전도의 정신이 일어나고 단지 숫자가 아닌 진정한 회심이 성공의 증거가 되는 참된 부흥이 교회에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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