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본질 실현
셀 교회가 가지는 또 다른 정신은 교회가 하나의 몸으로서 유기체적 공동체적 본질을 지닌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집”(family of God, household of God)으로서의 본질을 회복하고 실현시키고자하는 정신과 열망이다. 교회의 본질에 관한 신약성서의 표현들이 옳다면 교회는 실로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이며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의중에 계획하셨던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신학적 중요성을 지니는 교회의 본질과 개념을 회복하여 형상화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셨던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제시하려는 정신을 의미한다.
필자는 "왜 셀 교회인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아오고 있다. 이 질문의 핵심은 셀 교회의 모습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셀 교회 본질에 관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언제나 분명하고 단호하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과 그러한 교회본질 회복과 실현의 유일한 방법이 셀 교회라고 믿기 때문이다. 셀 교회 모델을 결코 정체된 오늘날의 교회성장의 돌파구로 제시되는 실용적 측면에서 이해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교회성장의 전략이거나 방법이기에 앞서 교회의 본질을 실현시키려는 강력한 소원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셀 교회 모델은 교회의 본질, 사명, 기능 등과 같은 교회에 관한 기본적인 신학적 이해를 중심으로 이해되어질 때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셀 그룹 교회의 기본정신들 중--그리스도의 주재권, 모든 신자가 사역하는 교회, 그리고 교회로 교회 되게 하는 일, 즉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정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결국 다른 두 가지 정신도 이 마지막 정신을 구현하는 보조적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본질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교회다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 이러한 말은 아마도 현실교회에서 성서가 말하는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갈증과 요구는 사실상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교회의 본질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일은 교회로 교회답게 만드는 일에 있어서 절반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교회의 본질은 셀 그룹 교회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성장해야하는지 목표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린그렌(A. J. Lindgren)은 잘 알려진 그의 저서인 『목적을 이루는 교회행정의 기초』(Foundations for Purposeful Church Administration)에서 교회의 본질을 하나님의 선택된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 구속적 사랑의 교제 등 네 가지로 설명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된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의 본질로서의 하나님의 선택된 공동체 개념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교회는 그 기원이 하나님 자신이며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들이 스스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적으로(God's initiation) 선택하신 것이 교회인 것이다. 마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선민이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적 선택에 의하여 선민이 되었던 것처럼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과 의지에 따라 선택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은 신성한 기원을 가지는 교회는 사실상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의 의중에 품으셨던 비밀"로서 하나님의 세상 창조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그 대가로 지불했으며 이 교회를 위해 수 많은 신앙의 위인들의 순교의 대가도 지불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에 동참하는 일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공급의 최절정을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의 위치에 있게되는 의미를 지닌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둘째, 교회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란 "삶이 서로 의존관계를 지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는 그 본질에 있어서 구성원 상호간의 삶이 상호 의존관계를 지닌다. 즉 네가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으며, 내가 아니면 네가 생존할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는 그런 생명력의 상호의존관계를 의미한다. 공동체로서의 교회 개념 이해는 오늘날에 이르러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으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절감하게 될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사회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은 미래사회의 변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예측해왔다. 오늘날의 사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급속도로 변하고 있으며 날로 가속화되고 있다. 그 변화는 모든 삶의 영역에 망라되어 있으며 변화의 방향은 결코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친화적인 것이라기보다 배척적인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을 하게된다.
많은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21세기를 준비하고 있는 사상적 지주라고 말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특징지어질 다음 세기의 사회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의 대안으로서 교회는 그 공동체적 본질을 더욱 뚜렷이 드러내는 일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김영한 교수는 후기산업사회, 소비자본주의 사회, 다국적 자본주의 사회로 불리우는 현대사회에 도래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문화체계의 경험주의적, 합리주의적, 휴머니즘적 가설에 도전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9가지로 제시한다 1) 기존의 전통과 인습과의 극단적인 단절을 이루는 탈정전화(脫正典化), 2) 애매모호성, 불연속성, 탈창조, 탈중심, 임의성, 반항, 변형, 분산, 붕괴, 해체 등으로 확실성과 결정성을 거부하는 비결정성과 불확실성, 3) 인간의 주체성,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주체성 상실과 자아분해, 4) 모든 사람의 의식과 독특성과 개별성이 사라지고 불확실한 일련의 해체성향이 보편적으로 확산되는 보편내재성(immanence), 5) 총체성, 전체와의 조화, 통합 및 종합을 거부하는 파편화(破片化) 혹은 편린화(片鱗化), 6) 문학과 철학의 한계, 문학의 장르의 한계도 무너지는 탈장르화와 이종혼합(異種混合), 7) 억압적인 것, 주변적인 것의 복귀, 8) 행위와 참여의 중시, 9) 그리고 예술과 실생활을 연결시키고자하는 대중문화주의이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필연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력 하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생활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는 방식과 기독교 신앙을 대하는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어진다. 김영한 교수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끼치게 될 부정적 영향으로 1) 전통과 규범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단절함으로써 전통적 가치와 규범의 해체를 초래함으로써 가치와 규범의 혼돈 야기, 2) 객관적 지식과 도덕을 극단적으로 회의하고 지식과 윤리의 애매모호성, 붕괴, 임의, 탈 중심(脫 中心), 불연속성을 선언함으로써 진리와 윤리의 상대주의와 허무주의 대두, 3) 인간의 존엄성과 자아의 존엄성부정, 4) 사회의식과 정신의 단절, 혼돈, 해체와 분해로 인한 사회 통전성(通典性)의 붕괴, 5) 문화의 퇴행과 퇴폐 등을 손꼽고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전통적 가치와 규범의 해체, 탈 중심, 윤리의 상대주의, 사회의식의 단절, 사회 통전성의 붕괴, 그리고 문화 퇴행현상 등은 공동체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갈 것을 예견하게 만든다.
손봉호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그의 글에서 데카르트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주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존재한다는 확신과 우리의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에 의존한다는 생각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이것을 통렬히 비판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대단한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21세기 사회의 변화 방향이 계몽주의 이후부터 기독교를 위협해온 각종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더욱 심화된 부정적 방향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준다. 이렇듯 사회학적 측면에서 바라볼 때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본질을 반드시 회복해야 하며 또한 그것만이 다음 세기의 사회에 새로운 소망을 제시해 줄 대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의 교육은 공동체의 맥락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자신을 양육하고 지원해주는 사랑과 돌봄의 공동체 속에서 배우며 성장한다. 따라서 교회의 교육사역을 이해함에 있어 공동체 개념은 기초적인 요건이다. 이와 같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교육적 기능에 관하여는 이미 많은 기독교교육학자들이 주장한 바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공동체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전략이기도 하다. 근대의 개인주의 사회로부터 다원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21세기의 신학교육은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교육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공동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헌신, 행동규범, 문화, 환경, 삶 등이 신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교회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 또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가족”(household of God) 등으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교회의 공동체적, 유기체적 본질은 개인주의적 기질과 성향을 격려하고 촉진하는 교육보다 공동체적 관점의 확립과 공동체 속에서 그 일원으로 행동하는 성향을 육성받음으로써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식과 이해력의 증대를 통하여 신앙을 교육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실시되어 온 "교실에서의 교육접근법"(classroom instruction approach)의 한계를 경험했으므로 지금까지의 교육으로부터 공동체적 접근에로의 구체적인 전환을 절실히 요청 받고있다.
세이모어(Seymour)와 밀러(Miller)는 그들의 공동저서인 오늘날의 「기독교교육 접근방법」(Contemporary Approaches to Christian Education)에서 오늘날의 기독교교육 접근방법을 종교교훈적 접근(religious instruction approach), 신앙공동체적 접근(faith community approach), 영적발달 접근(spiritual development approach), 해방신학 접근(liberal approach), 그리고 해석학적 접근(interpretation approach) 등 다섯 가지로 구분하고 각 교육접근법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 이것들 중 종교교훈적 접근법은 주로 교회학교 중심의 접근법으로서 학교-수업형 패러다임(Classroom-instruction paradigm)이라 불리어질 수 있는데 이러한 패러다임에 관하여 웨스터호프(John Westerhoff, III)는 기독교교육을 고사(枯死)시킨 주범이라 부르면서 공동체적 접근을 통한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이는 탈 중심화의 사회적 특성을 지니는 포스트모던 사회 속에서의 인간 행동양식과도 일치하는 것으로서 거대한 집단 속에서 개인이 소외되며 소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던 상황을 오히려 소집단화를 통해 충족시키려는 성향과도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적 요구이기도 하다.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교육적 기능에 관하여 넬슨(Nelson)은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는 자연스러운 작인(作因)은 기독교 신앙공동체"라고 말한다. 즉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화 된다는 것이다. 웨스터호프는 신앙공동체의 교육적 기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우리를 양육하고 지원해 주는 신앙공동체를 우리 는 필요로 한다. 공동체 또는 집단들은 그것에 속한 구성원 개개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한다. 개인을 집단(공동체)으로부터 분리시켜 그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에 가 까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의 교육적 기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어제, 오늘에 표명된 것이 아니라 플라톤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시되어 온 것인바 오늘날에 이르러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과 관계되어 새롭게 그 의미가 확인되고 강조되고 있으며, 21세기에서의 교회가 생명력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또 복음의 전달체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 학교형의 조직적 교육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으며 오히려 인간의 공동체를 교육의 주체로 보고 공동체가 의도적이고도 조직적인 교육과 달리 자연스러우면서도 비조직적인 힘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그러한 교육이 본래적인 교육이라 믿었다.
『복음적인 교회를 구할 수 있는가?』(Can We Save the Evangelical Church?)라는 책에서 빌 헐(Bill Hull)은 소그룹 공동체를 복음적인 교회를 살리는 근본으로서 참된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공동체 본질 회복을 손꼽으면서 이러한 코이노니아의 실현전략으로 소그룹 공동체를 제시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늘날의 복음적인 공동체가 진정한 성서적 코이노니아 또는 교제에로 그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가? 나는 우리가 공동체들을 형성하여 제자들을 훈련시킴으로써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 리스도인들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만일 우리가 공동체라는 말을 의미있게 사용한다면 우 리는 그 단어를 서로 정직하게 의사소통을 할 줄 알고 서로간에 보다 깊이 있는 관계를 맺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며 서로를 기뻐하는 관계로 발전시킨 개인들로 구성된 그룹에 국 한시켜 사용해야 한다.
교회가 공동체로서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으려면 교회 전체가 소그룹들로 재구성되어 모든 교인이 상호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야 한다. 셀 교회가 바로 이 점을 가능하게 해주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이 교회 모델은 교회가 수 많은 소그룹으로 구성되되 각 소그룹이 "교회 속의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로서 하나의 교회 역할을 감당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구조를 가지는 교회모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사실상 교회에 대한 이와 같은 성경의 표현은 교회의 공동체적 본질 이상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것은 교회를 하나의 유기체(생명체)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어떠한 생명체도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한 생명체로서의 신비를 지닌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본질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첫째,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즉 교회를 주관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적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어떤 민주적 모임들이 가정적으로 전제하는 것과 같이 교회의 주권이 그 구성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주님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어떠한 인간적인 정치적 계산과 행동도 교회를 유린해서는 아니 되며 그러한 것들로 얼룩지게 될 때 교회는 그 본질을 훼손당하고 생명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진다. 교회는 머리되시는 주님께서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전폭적인 순종을 기본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권이 회복되어 보편적으로 그분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일 때 교회의 본질이 회복되거나 실현될 수 있게 된다. 머리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몸이란 장애를 가진 몸이다.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거나 전폭적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결코 교회다워질 수 없다.
교회는 마땅히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져야 한다. 그분의 말씀을 들을 줄 모르는 교회는 순종할 수 없다. 몸으로서의 교회는 머리되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익숙할 만큼 영적으로 민감성이 개발되어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가지신 뜻이나, 그분께서 지금 교회를 통하여 하시는 일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교회의 요건적 특징인 것이다. 초대교회들은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집사를 세우기도 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으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움직이는데 있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일과 아울러 중요한 것은 전폭적인 순종이다. 그것은 절대 순종을 의미한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고 그분의 뜻을 식별한다 할지라도 분별된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뜻을 분별하지 못한 것보다 나을 거이 없다. 우리 인체는 머리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순종함으로써 모든 상황에서 적절히 보호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는 머리되신 그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함으로써 그 몸을 온전히 보존시키며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상호 유기적 관계를 지닌다는 의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의 구성원은 서로의 삶이 생명체로서의 유기적 관계를 지닌다는 면에서 밀접히 상호 연관되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한 구성원의 아픔과 고통, 기쁨과 즐거움이 곧 다른 구성원에게 직결되는 그런 유기적 관계를 의미하며 나아가 교회 구성원 서로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서로의 생존을 위해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에서의 유기체로서의 경험은 어떠한가? 나 없으면 너 혼자 못 살고 너 없으면 나 혼자 못 사는 그런 절대적인 상호의존관계를 얼마나 경험하고 있는가? 단순히 서로를 그리워하거나 만나기를 즐거워하는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영적 삶에 있어서 서로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존재로 느끼고 있는가? 마치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가 온전한 몸을 이루어 생존을 가능케 하듯이 교인들 상호간에 이토록 밀접한 관계를 맺고 상호 의존성을 가지는 것이 유기체로서의 교회 본질인 것이다. 필자는 어렸을 적에 바느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바늘로 찔리는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 오른 손에 바늘을 들고 바느질을 하다가 실수해서 왼쪽 손가락을 찌를 때면 온 몸의 지체들이 다친 손가락을 해결하기 위해 총동원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왼 쪽 손 두 번째 손가락을 찔리면 왼 손의 나머지 네 손가락들은 어떻게 하는가? 즉각적으로 네 손가락들은 다친 한 손가락을 감싸쥔다. 그리고 왼쪽 손가락을 찌른 ‘가해자’인 오른 손은 어떻게 하는가? 얼른 바늘을 놓고 나머지 다섯 손가락이 다친 손가락을 감싸쥔다. 이때 오른쪽 손은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미안한 나머지 재빨리 몸 뒤로 숨어버리지 않는다. 이것 저것 따질 여가도 없이 우선 달려와 다친 손가락을 감싸쥔다. 이 경우 다친 왼 손은 어떻게 하는가? 달려오는 손을 뿌리치면서 “저리 비켜, 병주고 약주는 거야?”라고 항변하면서 도움을 거절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다친 손가락을 내밀고 치료를 의탁한다. 참으로 놀라운 몸의 유기적 관계인 것이다.
셋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가시적 사역체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통로로서의 교회 존재를 의미한다. 요한복음 13:34-35에서 예수께서는 사랑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질이 결과적으로 세상이 그리스도를 보게되는 장소이며 구체적 실체임을 언명하셨다.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시고 더 이상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교회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사역하고 계신다. 왜냐하며 교회가 그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몸 된 교회의 특징은 각 지체간의 생명력을 서로 주고받는 관계인 것이다.
구속적 사랑(redemptive love)으로서의 교제
교회의 본질에 관한 또 다른 표현이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다. 즉 신앙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그러한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을 일컫는 헬라어 단어가 바로 코이노니아인데 이것을 우리는 "교제" 또는 "공동체"로 번역한다. 이 신앙공동체는 주님을 모신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 핵심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임존이 이 공동체의 독특성을 결정지으며 그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아니라면 이 공동체가 사람들에 의해 결성된 여타 공동체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많은 모임들이 교제나 공동체로 불리우지만 결코 코이노니아는 아니다.
교회에서의 교제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사실로 연합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만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과의 전적으로 새롭고도 변화를 가져다주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준다. 코이노니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신 관계 위에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의 행위에 의해 교인들은 한 가족으로 엮어지는 것이다.
공동체의 한가지 특징은 전인적인 참여이다. 부분적인 헌신이나 제한된 시간, 또는 삶의 일정부분의 참여만으로는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앙공동체 속으로 들어감은 생애 전체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언행과 생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겠다는 헌신을 드린 것이다. 공동체의 증거하는 일을 통해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코이노니아란 단순히 교회의 친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각자가 기꺼이 서로 나누며, 서로에게 복종하고, 서로를 도우며,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상호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하여 서약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 코이노니아는 수직적 의미와 수평적 의미의 양 차원을 가진다. 수직적 의미란 코이노니아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며 수평적 의미란 형제들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뜻한다. 적어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한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해 선택한 약속의 나라 안에서 선택된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개념으로서 진지한 헌신과 책임을 동반한다. 이러한 사랑으로 관계 맺는 방식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하는 교회이며 이러한 코이노니아는 필연적으로 그 속에 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함으로써 구속적 사랑의 공동체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을 약속한 세 장소가 언급되어있다. 첫째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출애급하여 광야를 지나는 동안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회막(성막) 짓는 일을 완성했을 때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현상이 나타났다(출 40:34-35). 뿐만 아니라 “낮에는 하나님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어”(38절) 하나님이 그 회막에 임재하신 사실을 가시적으로 나타내셨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이동한 것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그 회막에서 떠올라 이동할 때 그대로 좇아감으로써 이루어졌던 것이다(36-37절).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회막에 나타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두 번째 장소는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었다. 성막을 대체하는 장소로서의 성전은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 장소로 굳게 믿던 곳이었다.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완성되고 이어서 언약궤를 성전 안으로 메고 들어왔을 때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함으로써(왕상 8:10-11)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고 계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진 사실을 가득한 구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세 번째 장소는 교회이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그러니까 지상에서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이 마쳐지는 마지막 날 밤에 자신이 떠나신 후에 남겨질 제자들을 향하여 사랑공동체가 될 것을 당부하셨다. 이 당부 직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대와는 다르게 누가 큰가라는 서열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제 예수께서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그들을 떠나야 하는 시점에서 그들은 사랑이 아닌 경쟁적인 태도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심정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가르치고 훈련시킨 이유가 그들로 하여금 사랑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이었는데 막상 마지막 순간이 닥쳐왔을 때 그들은 서열다툼을 하는 한심한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할 말을 잊은 예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들어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 그들도 서로 발을 씻으며 섬기는 일을 할 것을 당부하셨다.
식사가 끝난 후 예수께서는 입을 열어 가르치기를 시작하셨다. 그분의 첫마디는 새 계명을 준다는 말씀이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께서 의도하신 제자들의 사랑공동체가 기져야 할 사랑의 수준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수준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4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 중 계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경우는 단 한 번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새 계명”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말씀하셨으며, 그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13장 34, 35절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 계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막중함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예수께서는 사랑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들 상호에 이루어지는 사랑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기를 기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시발점이며, 우리의 실존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에 상응하는 그분께 대한 사랑의 반응이 있을 때 그 사랑이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표현됨을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은 수준의 사랑임을 본다. 즉 자기희생적 사랑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으로서 서로의 삶을 책임지고 가족으로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랑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 본질이 실현되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각자가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랑관계를 유지하며 헌신하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가 교회 본질에 유사한 모습을 만들어 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교회공동체의 실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앞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 하는가의 질문을 던지셨을 때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실 계획을 알려주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영어로 “I will build my church on this rock"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교회를 세우려는 예수님의 의지와 계획을 나타내주는 말씀이었다. 예수께서 의도하신 교회는 그 본질이 사랑공동체였다. 그리고 그 사랑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사랑을 보고 그 속에 예수께서 임재하시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될 것을 의도하셨다.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짐을 가시화 하는 것이 구성원들 상호간의 사랑인 것이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임재 방식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여기서 사귐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로 표현되었으며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지는 교제를 의미한다. 교회에서 경험되는 많은 것들이 참된 의미의 공동체가 아닐 수 있다. 외양으로는 교회가 공동체 모습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사랑공동체가 되게 하는 내적 본질을 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들이 함께 함으로써 의미있는 경험을 하게하는 공동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연합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으며, 모든 감동적인 경험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감동적이다"라고해서 반드시 코이노니아를 경험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증거는 불일치의 해소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초대교회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이러한 모습을 인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당시 초대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뛰어넘어 모두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었다. 이러한 코이노니아, 즉 다양한 배경과 신분을 뛰어넘은 하나 됨의 사랑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으며 오직 그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오늘날의 도시화한 사회구조와 여건이 교회 본질로서의 코이노니아를 실현시키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코이노니아 실현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절대적인 요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조금 부족함을 느끼는 그런 장식물이 아니라 코이노니아 그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들은 교회를 敎會로 표현하기보다 交會로 표현하는 현상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들 중에 교회를 church로 표현하지 않고 fellowship으로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환언하면,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경험되지 못하는 교회는 아직 교회로서의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주일 낮 예배에 서로 무관심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채 한 시간동안 예배를 드리고 각기 뿔뿔이 흩어지는 교회생활은 결코 신약성서가 보여주는 교회생활이 아니며 그와 같이 실질적인 공동체 경험이 결여된 곳에서 그리스도의 임존을 경험하거나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코이노니아는 세계를 향한 사명을 부여받은 "사명의 백성"이다. 교회 본질과 관계된 강조점은 공동체 그 자체에 있는 것이지 구조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공동체는 안내하고 지원하고 양육하며 믿음을 새롭게 해주는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매우 특별하며 독특하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교회
성경은 교회본질을 "하나님의 집"(family of God, household of God)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 구성원간의 가족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으로서 교회가 독특한 방식으로 사랑의 가족관계로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교회본질을 깨닫고 매우 흥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권속,"(엡 2:19)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 "그리스도의 비밀," "영원부터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엡 3:1-10) 등과 같은 놀라운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새로운 가족공동체의 출현을 선언하는 것으로서 혈육의 가족관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공동체가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교인들간에 부르는 명칭으로 “형제,” “자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단순히 친밀감을 느끼기 위해 빌려온 단어가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가족이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대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같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이라 믿고 가족으로서의 사랑을 주고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언어는 의미를 담아 전달된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가 담고있는 의미를 이해하고 또한 그대로 믿고 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가족이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간의 관계를 가족으로서의 관계로 맺고 살아야 한다.
에배소서에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사람들의 가족 관계를 배운다. 5장 22절-33절은 부부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많은 부부관계를 다루는 저술가들이나 세미나를 인도하는 지도자들, 그리고 부부 관계에 관한 설교나 강의를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돌아가 사용하는 본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부부간의 관계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부부관계가 그와 같은 것임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가 관계 맺는 방식을 실체로 사용하여 부부관계를 그 그림자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으려면 교회를 경험할 때 가능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부관계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2, 33절)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실체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며 그것의 적용이 부부관계임을 분명히 했다.
하나님의 가족들이 관계 맺고 살아가는 방식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전적으로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독특성을 가진다. 그것은 부모와 자녀관계, 형제와 자매관계로서 단순한 한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핵가족화한 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한 가족으로 서로 돌보며 서로의 삶을 책임지며 서로의 삶을 위해 헌신하는 독특한 방식의 삶을 전제로 한다. 역사상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각 구성원들을 책임지는 사랑의 실체로서의 교회를 그다지 자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종종 그것을 하나의 이상(理想)으로 생각할 뿐 실제로 가능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태도에 익숙해 왔다. 필자는 성서가 말하는 교회의 본질로서 코이노니아를 설명하고, 또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교인관계를 설명하면 너무도 자주 “과연 그러한 교회가 이 땅에서 실제로 가능하겠는가”라는 회의에 가득 찬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교회에 관한 신학적 개념을 그토록 익숙하게 알면서도, 그리고 교회의 본질을 설명할 때면 예외 없이 코이노니아를 설명하고 또 하나님의 가족 개념을 설명하면서도 실제로 그러한 가족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굳게 믿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행전 2장이나 4장에 나오는 유무상통하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한 역사의 싯점에서 발생했던 특별한 사건으로 치부해 버린 채 오늘까지 그러한 공동체의 실현을 포기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족인 교인들이 사랑으로 관계 맺는 삶의 방식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바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는 일을 지상과제로 삼아야 마땅하다.
성경은 교회를 "가족관계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딤전 3:15)라고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지 비유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집과 같은 것”이라는 말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비유법은 실체의 성격이 비유로 사용하는 것을 빌려 설명될 수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유물과 비유대상물이 그 본질상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직설법은 선언하는 내용 그 자체가 바로 그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실체에 있어서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며 그 구성원들이 곧 가족이라는 말이다.
필자는 수년 전, 대전극동방송국에서 30분짜리 대담 프로그램의 사회를 6개월간 맡은 적이 있다. 주일 오후 12시 30부터 1시까지 진행되는 “개척교회 탐방”이라는 그 프로그램은 개척교회 목회자 부부와 교인 두 세 명을 출연시켜놓고 그 교회에 관하여 사회자가 여러 가지를 질문함으로써 그 교회를 소개하는 선교목적의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의 사회자로서 필자는 그 프로그램에 출연한 교인들을 상대로 매주 똑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성도님, 여기 계신 당신 교회의 목회자 부부는 처음부터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헌신했기에 신학교도 다녔고 개척을 각오했기에 이토록 개척하는 고생을 한다하더라도 당신은 당신 집 주변에 당신이 다니는 개척교회보다 더 크고 더 교인들도 많고 훨씬 더 좋은 각종 프로그램들이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을 것인데 왜, 무엇이 좋아서 이렇게 작은 개척교회에서 헌신하고 고생하십니까? 당신으로 하여금 이 개척교회에서 고생을 마다치 않고 헌신할 수 있게 만드는 이 교회의 장점을 한번 자랑해 보시지요.”
이러한 요청을 받은 교인들의 대답은 모두가 한결같았다. “왜냐하면요, 우리교회는 교인들도 많지 않고 교회가 크지도 않지만 교인들간의 관계가 너무너무 가족적인 분위기이기 때문에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그러한 교인들의 대답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러한 대답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 왜냐하면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의 교인들간의 관계가 가족적인 관계가 아니라 가족관계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방송시간에 그분들을 가르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답답한 마음 그지없었다.
“가족적인 관계”란 아직 가족이 아님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 비슷한 관계라는 의미이다. 교인들간의 관계를 가족적인 관계로 이해한다는 말은 아직도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교회의 가족됨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며 그분 자신을 드러내시는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 경험은 불가능하다. 또 다른 문제는 그와 같이 “가족관계”가 아닌 “가족적인 관계”만으로도 자신의 교회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현실이다. “가족관계”로서의 교회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에 “가족적인 분위기”만 경험해 보아도 자랑할 만큼 교회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현이 이루어지는 교회 경험은 “가족적인 관계” 이상이어야 한다. 교인들간에 통용되는 사랑의 수준은 단순히 “좋은 관계”라든지 “가족 같은 관계”를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
굳이 교회가 아니더라도 “가족적인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다못해 단순한 친목계원들간의 관계도 그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은가? 한 달에 한 번 또는 한 달에 두 번씩 계원들의 모든 가족들이 모여 걸찍하게 식사를 하며, 계원들 가정에 경사가 있을 때 찾아가 함께 축하도 해주고 애사가 있을 때는 함께 슬퍼하고 위로해주는 친목계원들간의 관계와 교인들간의 사랑의 관계의 표현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가? 그 분수령이 곧 “가족관계”인 것이다.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의 집”(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가문,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부르는 성경의 표현은 결코 교회의 본질을 보여주는 단순한 비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직설법을 사용하여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히 믿음으로 대하여야 한다.
우주적 교회가 아닌 지역교회
우리가 교회 본질을 논함에 있어 한가지 잘못된 전제를 가지는 경향성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총체로서의 교회를 의미하는, 이른바 우주적인 교회(universal church) 또는 비가시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고, 지역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신약성서의 대부분의 기록들은 분명히 지역교회를 언급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교회론의 가장 깊은 곳을 언급하고 있는 에배소서의 경우도 사도 바울이 에배소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 외의 모든 서신서에서 교회를 언급할 때 그 편지를 읽는 지역교회를 지칭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만일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교회의 본질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각 지역교회의 본질이 그러하다는 뜻이 되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소속된 지역교회를 위해 우리의 생명을 걸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공허한 신학이라는 꽹과리만을 요란스럽게 울리고 있을 뿐일 것이다.
지역교회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하나님의 집일진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가 그러한 교회본질을 회복하고 실현시키는 일을 위해 헌신해야만 한다. 그러한 본질 회복과 실현은 그 어떤 3자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어주시는 것으로서 우리는 주님의 역사하심에 전폭적으로 헌신하여 그분께서 마음껏 그분의 교회를 이루시도록 순종해야 한다.
교회 본질로서의 소그룹
그러면 그러한 교회 본질의 회복과 실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 본질 실현과 경험은 우선적으로 존 듀이가 말한 바 구성원 서로가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interaction)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가능하다. 따라서 교회가 여하히 구성원들간의 이러한 상호작용의 기회를 마련해줄 수 있는가가 핵심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이 있는 곳에 구성원과 공동체 모두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상호성장(transaction)이 이루어짐으로써 교회 본질의 경험이 가능하게 되는 기초가 마련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인갖들간의 만남은 수평적 차원의 만남이라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수직적 차원의 필연성을 고려해야 한다.
본훼퍼(Dietrich Bonhoeffer)가 지적한 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진지하게 고려된 그리스도인들의 상호작용과 상호 성장이 곧 코이노니아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때문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는 뜻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과 상호작용을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나와 너와의 두 사람만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나와 그리스도, 너와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와 그리스도, 이 삼자간의 인격적 상호작용인 것이다. 환언하면, 구리스도인들간의 교제는 심리적(psychic) 현상이 아니라 영적(spiritual) 현상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경험은 대교회의 회중(congregation) 가운데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수백, 수천의 교인들과 깊이 있는 가족관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소그룹 경험의 기회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교회가 공동체로서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으려면 교회 전체를 소그룹들로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 30여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온 셀 그룹교회 모델(Cell Group Church Model)이 관심을 끌게 된다. 이 모델은 교회가 수 많은 소그룹으로 구성되되 각 소그룹이 "교회 속의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로서 하나의 교회 역할을 감당하는, 지금까지의 전통교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구조를 가지는 교회모델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모델이든간에 소그룹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소그룹 공동체를 육성하되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교회모델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실제적으로 경험되어지는 교회 실현은 불가능한 것이다.
교회의 사명
미국의 서남침례신학대학원의 교수였던 티드웰(Charles A. Tidwell) 박사는 그의 저서인 「교회의 교육 사역」(Educational Ministry of a Church)에서 교회의 사명을 “하나님의 다중적(多重的) 지혜를 알리는 것”(to make known the manifold wisdom)이라고 정의하면서 여기서 다중적 지혜란 곧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부연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에게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명령하셨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 각자가 성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기본적인 사명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교회가 그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그 사명을 다할 것을 의도하셨다. 이러한 그분의 교회에 대한 의도는 교회 자체가 사랑공동체로 성장하여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식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연합하여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어 그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불신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던 것이다.
미국 남침례교 주일학교국(Sunday School Board)의 모든 교회교육자료를 개발하는 기준이 되는 Church Curriculum Design에 따르면 교회의 사명은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헌신한 침례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의 사 명은 예배, 선포와 증거, 양육과 교육,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수 있도록 전 세계를 향 한 사역을 통하여 기독교인의 성숙을 향해 성장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의 구속적 몸이 되는 것이다.
Colson은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라면 가장 근본적인 임무는 거룩한 성격을 갖춘 공동체들을 세우는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공동체들의 우선순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 가도록 사람들을 훈련시키며, 삶의 모든 측면과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믿음대로 살 수 있도록 무장하는 일에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규정하고 에배소서 4장 11절-16절에 묘사된 교회의 과정은 오로지 실제의 공동체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다음의 요소들을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믿음의 일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
성숙한 인간
성인으로서의 가치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는 것
각지체가 서로 도움
교회의 성장
교회의 사명과 임무에 관한 일반적인 강조는 교회로 교회 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만큼 교회의 본질 실현이 가져다 줄 축복의 엄청남을 바라보기 때문이리라.
3. 교회의 기능
교회의 기능은 교회의 사명과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하여 교회가 필요로 하는 활동들을 의미한다. 앞서 Church Curriculum Design에 나타난 기능들을 다시 요약하면 예배, 선포와 전도, 양육과 교육, 그리고 사역(봉사)로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기능들은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고 활발하게 발휘될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교회가 이 기능을 알차게 수행할 수 있도록 재구조화 되고 재조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맺는 말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헌신, 곧 하나님의 말씀이 액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겠다는 헌신의 태도를 필요로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교회는 교회 다와야 한다는 각성과 새로운 열정이 필요하다. 더욱이 우리는 탈기독교 문화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세대를 거슬러 오히려 현세대를 복음으로 접근하기 위하여보다 민감하면서도 창의적일 필요가 있다. 셀 그룹 교회는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와 내일의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가능성에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있다. 문제는 오늘 그 사실을 알고있는 우리가 어떻게 그 가능성에 도전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을 하고 계시며 오늘 우리에게 그 일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새로운 세기를 접하는 우리들의 자세와 태도가 진정으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실현하려는 확고한 의지로 고정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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