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의 신앙 생활에서 예배가 차지하는 비중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주일 예배가 신앙 생활의 전부인 경우도 있다. 따라서 예배 갱신은 교회의 본질적 기능을 바로 세운다는 측면뿐 아니라,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을 바로 세운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21세기에 들어 우리는 지난 세기 말과 너무도 달라진 사회 환경으로 인해 이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작은 두려움마저 느낄 정도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교회는 어떻게 예배해야 할까? 물론 예배학적 입장에선 어떻게 예배해야 할지보다 예배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겠지만, 목회적 입장에선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교회가 어떤 예배를 제공하느냐의 문제로 귀착될 뿐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서 일부 대형 교회를 제외한 대다수의 교회들에서 사람들은 20~30년 전의 예배와 별로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현대 예배 운동에 대한 저항감을 갖고 있고 전통적 예배를 선호하는 일부 목회자들과 예배학자들은 각종 조사 결과를 제시하며 불신자들이나 구도자들이 새로운 것보다 거룩한 것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예배 스타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신조와 교리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통계1에 고무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교회에 나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어떤 것이 거룩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정말 안다고 생각해서 그런 조사 결과에 힘입어 예전 개혁 운동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과연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교리와 신조를 중시한다는 말이 정말 신뢰성이 있는 것인가? 그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교회를 선택할 때 그 교회가 어떤 예배 스타일을 가졌는지를 보라. 결국 대부분은 현대적 감각이 있는 교회를 선택한다. 이것이 지금 미국과 한국의 교회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임을 목회자들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고대 교회나 성당에 대한 동경과 향수가 있는 일부 사람들은 고전적인 예배가 있는 교회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교회를 택하는지 자세히 살펴보라. 최근에 성장한 교회와 불신자, 구도자, 청년과 중년들이 몰려드는 교회의 예배에 대해 조사해 보라. 그들의 공통점은 현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교회들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에선 새들백, 윌로크릭, 모자이크, 노스포인트, 펠로십, 깅햄스버그, 이스트사이드 커뮤니티 교회 등이 있다. 아시아권에서 싱가포르의 FCBC, 국내의 온누리교회, 사랑의교회, 지구촌교회 등이 있다. 그 교회들의 예배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그 교회들의 예배가 예배학적으로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만나 보았지만, 과연 그렇게 매도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시에 독일 등 예전적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의 저조한 예배 참석률의 원인은 무엇일까도 냉정히 생각해 보면서 21세기 한국 교회 예배 갱신의 방향을 함께 고민해 보자.
예배 흐름의 변화
중세의 전통적인 예전 중심 예배, 특히 가톨릭의 미사 형태 예배에서 종교 개혁 이후 말씀 중심의 예배 회복과 회중 찬양으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시각뿐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 생활의 근본 자세를 단순히 예배 중심에서 말씀 중심으로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지각 변동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말씀 중심성이라는 것이 예배에서 설교 중심 예배 생활이었고, 서구의 이성적 합리적 교육 일색으로 여겨지는 이런 예배 생활을 하며 사람들은 하나님 경험의 결핍으로 목말라 하기 시작했다.
결국 교육적이고 설교 중심적인 인지적 예배는 오순절 계열의 예배를 통해 성령의 역동성을, 경배와 찬양 운동을 통해 회중 중심의 생동감을 가져왔다. 현대 구도자 예배를 통해 시대적 연계성과 문화적 경험으로서의 예배까지 발전해 왔다. 이런 움직임 끝에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포스트모던, 포스트 크리스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예배의 현란함 속에서 다시금 옛 상징과 신비의 결핍에서 오는 부족감을 느끼며 고대 종교성과 중세 기독교 영성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느끼고 있다. 이제 예배는 현대성과 함께 종교성 추구라는 두 가지 측면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가 과제이다.
구도자 예배에 대한 비판을 다시 고려함
이런 예배 전통의 변화 속에서 최근 세계 대형 교회들이 선보였던 구도자 중심 예배는 전통 예배의 흐름에 서 있던 목회자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아왔다. 첫 번째 비난은 예배실 내에 있는 일체의 기독교적 상징을 제거하고,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성례전을 제대로 실시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예배 전통에 서 있는 국내 교단 중에도 예배실에서 십자가를 제거하려는 것을 보면 반드시 구도자 예배자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이며 모든 구도자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도자 예배에서 성례전(아마 성찬식을 지칭하는 듯하다. 세례식은 전통 교회보다 더 많이 시행하는 편이다)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면 더 많은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구도자 교회들이 하는 것처럼 성찬식은 거듭난 자들이 주축이 되는 공동체 예배에서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은가?
두 번째 비난은 구도자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일체의 예배 행위가 인도자들에 의해서만 진행되며, 행동할 필요 없이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회중 참여의 결여라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구도자 예배 참여자들이 전통적 예배 참석자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경배와 찬양과 기도 등 예배 요소에 참여하고 있음을 몰라서 한 말로 보인다.
세 번째 비난은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구도자 예배는 전통적 의미에서 말하는 ‘예배’라고 할 수 없다2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란 그 대상과 목적과 지향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서 절정에 이른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행위인데 반해, 구도자 예배는 모든 점에서 ‘구도자들’에게 최대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구도자 예배는 인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도자 예배를 디자인하고 인도하는 그 누구도 구도자들을 높이거나 예배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줘야 한다. 그들도 동일하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되 전통 예배에서 배제되다시피 한 구도자를 배려해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춰 돕자는 것뿐이다. 이런 비판의 기저에 예배는 신자만이 드릴 수 있다는 신학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구도자 중심적 예배는 인본주의적이며 예배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예배는 오직 신자만을 위한 것이며, 구도자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성경에서 그런 주장의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냥 신앙의 개념적 논리로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해서 말한다면 안 된다. 만일 구도자나 불신자나 이방인이 예배드리는 것이 성경에 한 번이라도 나온다면 그런 주장은 신학적으로 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반대자들은 성경 신학적 연구보다 감정적으로 구도자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
구약 민수기 15장 14~15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그들 중에 이방인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음과 그 제사의 율례가 같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시편 96장 7절에선 만방의 족속들도 여호와의 궁정에 들어가 영광을 돌릴 것을 요청하고 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 외에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가는 일이 요한복음 12장 20과 사도행전 8장 27절 등에서 다루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23~25절을 보면, 교회에서 모두 방언으로 말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을 염려하는 것은 불신자도 함께 예배드림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할 경우에 불신자들이 책망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써 그들이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구도자와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예배드림을 전제로 하는 것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성경의 이런 사례들은 구도자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과 그 반대로 하나님은 구도자를 배려하는 예배에 관심을 갖고 계심을 깨닫고 바른 예배 갱신의 방향을 잡아야 함을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 이것은 필자 외에도 “구도자가 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면서 감동받을 수 없다고 말한 곳은 아무 데도 없다”3라고 확언하는 모갠셀러 등을 참조해도 잘 알 수 있다. 필자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이해 한국 교회의 예배 발전을 고민할 때, 우리 스타일의 예배나 우리 교단의 예배 방식과 다르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배타적이고 분리주의적이며 이중적인 예배의 잣대가 더 마음에 걸린다. 주일 아침에 소위 대예배 시간에 구도자 예배나 현대적 감각을 갖춘 예배는 안 된다는 교회에서도 주일 오후 예배, 주일 저녁 예배, 수요 예배 때는 훨씬 자유로운 구도자 예배를 방불케 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왜 주일 아침에만 안 되는 것일까? 주일 저녁이나 수요 예배 때 복음 성가도 받으시는 하나님은 주일 아침의 하나님과 다른 분이신가?
이머징 교회들의 예배 방향
지금까지 몇 가지 구도자 예배에 대한 비난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필자도 현대 구도자 예배에 대해 전적으로 긍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문제점이 있고 따라서 ‘이머징 교회’(Emerging church)4의 예배 운동이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때 반갑게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 목회자들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교회의 예배 발전과 갱신을 위한 도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머징 교회 운동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예배학적으로 매우 중대한 두 가지 질문을 제기했다. 첫 번째로 예배를 영어로 보통 ‘worship service’라고 하는데 과연 예배란 worship ‘service’이냐, 아니면 worship ‘gathering’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예배 갱신의 한 방향으로 예배를 ‘service’(이것은 구도자 예배나 예전 예배 모두 마찬가지다)로 보는 개념에서 벗어나 예배 공동체의 모임으로 봐야 한다고 인식5한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 하듯이 제사장이나 사제나 목회자가 예배(미사)를 수행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초대 교회에서 하듯이 회중 곧 성도가 예배 공동체로 모이는 그 모임 자체에 초점을 둬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예배 디자인 자체와 인도 방식을 바꿔 놓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예배가 인식적인 것인가, 아니면 경험적 사건에 더 가까운가에 대한 것이다. 전통적인 인지론 신학 교육 체계와 예배 환경 속에서 자라온 우리는 잘 모르는 중에 설교와 설명을 통한 인지론적 예배에 길들여져 왔다. 하지만 20세기 말부터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신학적 성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지 못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갈등에 부딪히고 말았다. 따라서 성도들은 차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깊은 갈구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 그러나 현대 예배 갱신 운동은 이런 점에 대한 이해와 대책보다 인지론적이고 지적인 예전 회복과 예배 예전 일치 운동에만 계속 매달리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운 것이다.
사실 구도자에 민감한 현대 예배에 대한 현상학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구도자 예배의 진정한 강점은 이런 면에서 기여한 것들이다. 그들은 사제와 목사와 찬양대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뛰어넘어, 신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맺게 해 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들을 뿐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상호 관계를 맺는 ‘몸으로 드려지는 복음’6을 관찰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회를 주었다고 봐야 한다.
필자는 이머징 교회의 예배 운동을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머징 교회 운동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일깨워 준 점은 전통 예배나 현대 예배 운동하는 사람들이 구도자 예배 흐름 속에서 느끼고 있었던 본질적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현대 구도자 예배는 기독교인의 정체성 혼란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전통 예배나 구도자 예배 모두 ‘나는 교회에 간다’라는 의식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다름이 없는데, 특히 구도자 예배 추종자들은 더욱 솔직하게 소비자 성향을 보이고 전통 예배 선호자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소비자 교회에서 이머징 교회는 선교적 교회로의 변화7를 시도한 것이다. 진정한 예배 갱신은 예배자들 즉 성도들에게 목사나 전문 예배 인도자들의 인도를 보러가는 소비자 성향을 버리고 ‘내가 교회다’라고 인식하게 만들 때 시작되는 것이다. 교회는 예배하고 격려하며 가르치고 돌보는 성도의 공동체이지, 미사 예전이나 극장식 퍼포먼스를 제공하고 교인들을 보는 곳이 아니다. 참고로 이머징 교회의 예배가 구도자 예배와 어떻게 다른지 다음의 표8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길 바란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위한 예배 갱신의 방향
전통적인 예전적 예배, 편한 현대 예배 등의 문제점은 하나님과의 상호 관계, 회개, 헌신 등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예배 속에 하나님과의 상호 관계가 별로 존재하지 않고, 전재하더라도 너무 미미하지 않았는가? 전통적 예배자나 현대 예배 선호자는 서로를 비난해 왔지만 혹시 우리의 종교 행위에도 불구하고 겉치레적인 예배를 드려오고 있지 않았는지 자성해야 한다. 설교를 들으며 감동 받은 것을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예배에서 감상적으로 감동 받은 것을 신령과 진정의 예배로 착각해선 안 된다. 의미 있는 예배는 잭 헤이포드가 자주 지적한 것처럼 항상 희생과 연관이 된다. 이때 희생이란 ‘구속’(redemption)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무엇을 드리는 행위9를 말한다. 예배 시에 봉헌 순서를 갖고 물질을 드릴 뿐 아니라 삶도 드려야 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예배 갱신의 방향은 첫째로 삶의 변화를 낳는 예배 즉 변혁적 예배가 돼야 한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는 말한 대로 행한다. 거룩하고 멋진 예배는 계속 드리지만 변화가 없는 예배의 반복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 결코 아니다. 진정한 예배의 최종 리트머스 시험은 ‘삶의 변화’(transformation)이다. 잘 계획된 음악 순서에 따라 연주와 문화에 맞는 유머, 함축성 있는 예화, 잘 준비된 예배 진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변화된 마음과 삶이 나타나지 않는 예배를 극복하고자 하는 결단이 당신에게 있는가?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설 때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는 예배, 주님의 메시지 인식에 따른 결단과 변화와 영적 새로워짐이 일어나야 한다.
잘못된 것은 구도자 예배 자체가 아니라, 현대적 공연주의자들의 행태이다. 현대적 예술 도구는 모두 잘 사용했지만, 예배에 내용이 없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부족해 제자를 낳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전락시킨다면 그것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예전 중심의 전통 예배는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 새들백교회와 윌로크릭교회는 주말의 구도자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중 예배를 강조하는 것이다. 제자도 설교자를 따로 세우고 훈련과 셀 그룹 사역 강조로 그것을 보완하기에 교인 대다수가 봉사하고 섬기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냈음을 알아야지, 구도자 예배의 드라마와 음악만 흉내내거나 구도자 예배는 잘못된다는 말만 하고 무시해선 안 된다.
둘째로 우리가 사랑하고 경배하는 예수님을 닮은 제자의 모습까지 전체 주기(cycle)를 고려한 예배여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사람들로 가득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 속에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게 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즐거워하는 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 게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주님을 닮고자 하는 제자의 모습과 그 주님 앞에 우리를 전부 드리는 헌신의 요소까지 나타나는 예배가 되도록 디자인해야 한다.
셋째로 잘 짜여진 예전적 질서 준수와 설교를 통한 논리적 설득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경험과 주님과의 친밀성 함양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지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가르쳐 알게 할 것인가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떨며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친밀해지는 것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넷째로 성직자나 예배 인도자가 이끄는 행사가 아니라, 예배 공동체인 회중이 참여하는 예배를 만드는 것이다. 전통적 예배에서 볼 수 있는 구경꾼 방식의 예배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회중의 참여란 아주 특별한 것이어야만 하지 않고 문화 속에서 무난하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예배 준비, 반주, 찬송, 성경 봉독, 봉헌, 광고 등 각 순서의 주체가 되어 이끌어 가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공동체적으로 설교 후 묵상과 응답 기도, 봉헌 때의 기도 기회, 통성 기도의 참여 등을 통해 이룰 수 있다. 목회자가 매 주 하듯이 틀에 박힌 대로 혼자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달라진 인도자의 언어와 회중의 반응 기회를 주는 작은 변화와 배려들이 참여적 예배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기회를 늘리는 반면에 전통적으로 제직들이 해왔던 대표 기도 대신에 사역자가 나서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한 목회 기도 시간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회중 참여적 예배 흐름은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의 표현 문화에 대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교인들이 보여줬던 것과 달리 갈수록 자신들의 감정 표현에 익숙해져 간다. 그러고 나면 표현 기회가 없는 예배를 답답해 할 것이다. 그것은 순복음교회 출신들이 이미 경험했듯이, 장로 교회 예배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감정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다섯째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배는 창조성과 예술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게 된다. 미국에서도 구도자 예배를 뛰어넘는 예술적 측면이 강화된 예배가 모자이크교회 등을 통해 새물결을 이루고 있다. 그뿐 아니라 노스포인트교회나 펠로십교회 등 최근에 부흥하는 교회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예술적 측면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고 있다. 물론 예술은 예배의 종이고 기능이며 돕는 역할이지, 예술적 표현 자체가 목표가 되면 안 된다. 아무리 예술성과 창조성이 중요해도 기독교의 본질적 메시지를 이해 못하고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일반 예술 활동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과 선율과 연주라도 무의미한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예술은 하나님의 창조성, 성육신으로 인해 예배에 나타나야 할 요소이지 선택 사항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여섯째로 개신교 예배의 독특성을 살려야 한다. 참된 예배의 기초는 신령과 진정이다. 제사장의 제사 행위와 죽은 의식 중시하기보다 신령(Spirit) 즉 성령에 이끌림과 하나님 영의 임재 및 충만이 나타나는 방향으로 예배 갱신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진정(Truth) 즉 하나님의 계시가 명료하게 나타나고 전달되는 예배를 이루기 위한 갱신이어야 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 예전 예배의 말씀과 성찬식의 형식적 이중 구조가 아니라 설교 중심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성례 약화에 대한 자성보다 예배에서 설교와 성찬식의 대등 구조로 돌리려는 움직임이 에큐메니컬 예전 갱신 운동가들에 의해 다시 일어나고 있다. 개신교의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단이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와 함께 미사의 기본 골격 구조인 설교와 성찬의 두 축으로 구성된 예배 쪽으로 갱신 방향을 잡고 있다. 그것은 종교 개혁가들의 정신을 뒤로 돌리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개신교 예배는 신령과 진정의 균형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균형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타자성을 강조하고 싶은 사람들은 예전적 예배만이 바른 예배라 하고 예배에서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부각시키려 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친밀성과 사랑을 강조하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좀 더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현대의 예배가 진짜 예배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예배에서 그리스도의 인성만 강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바른 예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하나님의 거룩과 자애, 은혜와 진리를 균형 있게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중세처럼 예배가 초월성, 거룩성, 타자성이 적으면 인간적이고 세속화되었다고 비난하고 역동성과 기쁨이 적으면 죽은 예배라고 비난해선 안 된다. 또한 그것은 예배에서 하나님 지향성과 사람 지향성의 균형으로 표현돼야 한다. 성경적 예배 갱신은 하나님 중심성을 강화해야 하지만 예배를 신 중심의 어떤 예식으로만 몰고 가려 해선 안 된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 예배에서 보여준 인격적 따스함과 우리 가까이에 임하시는 성령님을 느끼게 해준 오순절 형제들의 기여를 잘 살리는 것이 갱신의 방향으로 되어야지, 다시금 서구와 중세 기독교의 차가운 예전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
포스트모던 시대 개신교 예배의 예전 발전을 위한 제안
개신교 예배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설교가 예배의 중심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성례가 예배의 중심인가? 그것도 아니다.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 행위를 상징하는 표시(징표, sign)이지, 그 자체가 메시지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것이 칼빈을 비롯해 많은 종교개혁자들의 확신이었다. 따라서 그동안 무시된 주의 만찬의 중요성 회복은 필요하지만, 설교와 대등한 두 축으로 올리려는 현대 예전 운동가들의 움직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예전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교회의 예배에 대해 무질서하고 신학이 없으며 즉흥적인 것으로 보지만 사실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 나름대로 예배의 신학에서 그런 예배를 구성한 것이고, 나름대로 질서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금 더 자유로운 스타일의 예배를 드리는 쪽에서 보면 예전적 예배는 융통성이 없는 콱 막힌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려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에서 예전적 교단인 감리교 예배학자인 샐리어스가 잘 지적했던 것처럼, 초대 교회에서 과연 예배를 예전과 예식으로 이해했을까?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배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 경험이고 그 나라에의 참여 방법으로 이해했다.10 칼빈의 예배 개혁 모델도 교황 제도 이전 교회에 관한 것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11 예배는 단순하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해야 한다.12 중세 로마 교회의 복잡하고 장황한 예배와 예전이 개신교 예전 개발의 모델이 되어선 안 된다. 초대 교회에서도 이룩하지 못했던 완전하게 통일된 예배 유형과 예식서를 가지려는 시도 역시 별로 권장할 것이 못된다.13 고전적 전통으로의 무조건적 회귀나 모방이 예배 개혁의 전형이 될 수는 없다14는 예배학자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예배 개혁이라 하면 성례와 예전 개발로 생각하는 경향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예전에 기초한 예배를 생각할 때도 예전을 꼭 치러야 할 미리 짜 놓은 순서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예배에 나타나야 할 성례전에 대해서도 성찬과 세례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의 여러 순서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고 오늘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과 부딪히고 공동체의 하나 됨을 경험케 하는 여러 순서들을 통해 성례전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물론 성찬식은 분명하게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나머지 예배 순서들은 죽은 문자 예식서에 매여 있는 상태에다 성찬식만 하나 더 하면 예배가 개혁되고 성경적으로 회복되었다는 단순한 생각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머징 교회들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에선 주의 만찬에 대해 더욱 강조할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잘 살릴 것인가에 대한 노력 없이 과거에 하던 것의 횟수만 늘린다면 안 된다. 성찬식을 논할 때도 수찬만을 생각하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교인들이 수동적으로 성찬을 받는 것에서 벗어나 능동적 참여(고전 10:17, 성찬에 참예함)로 자세를 바꿔야 한다. 필자가 교회에서 매달 주의 만찬을 행할 때면 당황스러운 일이 있다. 예배학자들이 성찬식에 대해 그렇게 강조했건만 성찬 전, 중간, 후에 부를 적절한 찬송가나 복음 성가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개발하는 일이 복잡한 성찬 예식 개발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리고 과거에 해오던 대로 깍두기 같은 카스테라나 얇은 웨이퍼 혹은 작은 플라스틱 잔을 극복하고 주의 만찬의 원형과 그 상징의 의미를 살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필자의 교회에선 성찬식의 시작과 마지막에 집례자와 성찬 위원들이 커다란 빵 한 개와 큰 포도주 잔 하나를 들고 다닌다. 이때 목사니, 장로니 하는 호칭 대신에 서로 형제라고 부르면서 “이 떡은 김덕수 형제를 위해 찢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받으십시오”라고 말하며 건네준다. 필자도 장로님에게 “이 잔은 쫛쫛쫛형제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입니다. 받으십시오”라면서 필자가 마신 큰 잔을 건네준다. 이를 보고 교인들도 자신들이 참예한 빵과 잔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모두 함께 손을 잡고 한 몸과 한 잔에 참여한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성찬 참여에서도 로버트 웨버가 지적한 것처럼, 칼빈 이래 개신교도들은 성찬을 받는 사람의 자기 반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으며15 허물 있는 사람의 참여를 막는 것에 집착한 적도 있다. 그러나 고백과 죄사함의 확신을 갖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참여토록 해야 한다.16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성찬식이지 천사들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사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배신자와 주님을 팔아먹은 사람도 함께 한 자리였음을 기억한다면, 형식적 성례전 회복 운동을 뛰어넘어 진정한 성례전의 회복도 필요함을 잘 알 수 있다.
성찬식뿐 아니라 기회가 닿는 대로 교회는 애찬도 시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식사가 어렵다면 예배 후에 둘러서서 커피를 마시는 시간, 새 교우 환영 만찬과 여러 식사 모임을 활용하는 방안이라도 개발해야 한다. 이런 것도 성례전 강화와 함께 고려해야 할 예전 운동의 한 부분으로 여겨야 한다. 전교인 수양회나 특별 행사 자리에서도 공동체가 함께 주의 만찬을 행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기억으로 된다.
예배는 하나님과 공동의 대화이며 친교이다. 예배를 통해 공동체는 공동의 기억을 나누고 침묵으로 묵상하며 의식을 행하고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일깨운다. 성찬식은 물론이고 세례식에 대한 창조적이고 발전적인 노력도 중요하다.
사람들은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옛 것에 대한 동경, 향수가 강해지고 그 가치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은 현대적인 것을 포기하지 못한 채 두 가지를 동시에 보유하길 원한다. 그것이 이머징 교회들이 개발하고 있는 예배의 모습으로 최근에 등장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 현대인들은 종교적 상징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들은 현대적이면서도 진지함을 원한다. 구도자 때는 가벼운 예배, 가벼운 설교를 선호하지만 방황하다가 돌아와 정말 거듭나면 진지한 설교와 예배도 원하게 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의 조화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초자연적 체험과 함께 매일의 삶에서 실제적 관련성을 갖는 것을 동시에 경험하길 원한다.
따라서 미래 예배는 전통적 예전 속에서 초자연적 체험이 녹아 있고, 설교 속에서 실제적 연관 짓기가 병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돼야 한다. 이런 동향과 최근 이머징 교회의 예배는 예배 전통의 수렴 현상(convergence, 로버트 웨버 같은 예배학자는 이를 예전의 통합 현상17이라고 부른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예전 개발이란 성찬식을 예배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성례전 중심으로만 생각해선 안 되고 설교와 성례, 고전성과 현대성을 아우르는 종합 예술을 만들어 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예를 들면 필자가 15년 전에 시무하던 교회나 현재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서도 말씀을 봉독할 때는 교인들이 앉아서 듣는 게 아니라 느헤미야 8장 4~6절의 정신을 살려서 모두 일어나 경외함으로 받게 하고, 봉독자는 본문 낭독 후에 “이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는 선언을 하게 한다. 또한 개신교 예배의 클라이맥스인 설교의 감동과 헌신 그리고 이어지는 축도와 파송 부분 사이에 끼어 그 맥을 끊는 광고 시간을 없애고, 예배 전반부에 코이노니아 부분에서 함께 나눌 사항으로만 제한하고 나머지는 주보를 활용케 한다. 축도 역시 왜 항상 똑같은 권위적인 어조로 ‘…있을지어다’라고 해야 하는가?
심지어 필자가 현재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서 초창기에 민수기 6장 24~27절로 축복을 하자, 사람들은 공식과 다르기에 축도를 마친 줄 모르고 있었고 찬양대의 송영도 나오지 않은 적이 있었을 정도로 한국 교회는 항상 똑같은 틀의 반복에 매여 있다. 그러나 필자가 다녔던 고든콘웰신학교 채플에선 당시 재무부 총장이 네덜란드 개혁 교회 목사였는데, 모두 함께 눈을 뜬 채로 축복 기도를 하며 마지막 부분에 “then, the People of God says~”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면 회중은 목사님을 바라보며 “아멘”하고 화답했다. 이처럼 축도 역시 대화체이며 목회자가 축복하면 회중이 화답하는 구조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짜여진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가르치는 학교에서 교직원 예배 때에도 신앙 고백 순서에 사도신경만이 아니라 니케아 신조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왜 안 되겠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미래 예배 발전 방향에서 예술성이란 성례전 외에도 예배의 요소인 빛, 소리, 공간 모두에 대한 연구가 중요함을 의미한다. 구도자 예배가 그러하듯이, 예배 장소가 극장 무대처럼 기능면을 고려하면 되는가? 그렇지 않다. 강단의 설계와 설교단, 각 상징물 배치와 예배실 전체 구성이 공간적으로 신비와 거룩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은 예배에서 중요한 요소인 상징 중에 가장 큰 것이다. 이제 창고형 교회라도 예배라는 기능을 하는 데 지장이 없기에 상관 없다는 움직임은 점차 사라지고 예배실과 교회 건물 자체가 더욱 상징성과 신비성 표현의 기회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예배는 메시지, 행동, 빛과 소리를 통해 다가오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과 경외의 경험으로 돼야 한다. 좋은 설교만이 예배의 목표가 되지 못할 것이다.
생명력 있는 예배는 공간과 설교 외에도 여러 가지 소리와 빛과 색이 살아 있는 상징으로 와 닿는 시간이다. 예배 갱신은 성찬식과 세례식을 포함한 예전 순서 개발뿐 아니라 모든 색상, 공간, 소리, 빛 사용 등의 발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찬양과 연주 외에도 예배 시작하기 전의 소리, 예배 중에 사용하는 다양한 소리들, 예배가 끝난 후의 소리와 음악에 반해 언제쯤 침묵과 조용함을 사용할 것인지, 예배실 전체의 색조와 휘장들, 설교단에 드리운 천의 색상과 디자인, 천장에서 늘어뜨린 상징적 배너 사용법, 강단과 예배실 전체를 휘감는 조명 사용법, 강단으로의 행진, 강대상으로 향해 움직이고 그곳에서 나가는 행위 등 모두를 개발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 갱신이지 예전 통일만예배 갱신의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예전 개혁이 예배를 새롭게 하는 것과 같다고 착각해서 안 된다.18 ‘개혁’과 ‘새롭게 됨’은 서로 연관이 있지만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단지 신학적 사고가 요구하는 객관적 시스템이 아니다.19 예전적 규정과 틀로 제한해서도 안 되고, 논증적으로 배우고 이해하는 시간도 아니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20이어야 한다. 목회자는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 임재하심에 떨며 그 음성에 응답하고 헌신의 즐거움을 나타내도록 만들어야 한다. 오늘의 정황에서 현대 성도들을 신령과 진정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예전 갱신의 방향이다.
교회의 가장 본질적 목적은 선교도, 전도도 아닌 예배이다. 선교의 목적도 예배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교인들을 모아 놓는다고 진정한 예배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현대화의 편리 추구와 함께 모든 것이 종교적으로 포장되는 사이비 영성 사회에서 진정한 예배를 경험하는 일은 큰 축복이다. 모든 피조물의 영혼 깊숙한 소망인 창조주를 만나 만유의 주를 예배하고 싶은 열망이 성취되도록 유연함으로 자유로움 속에서 질서로의 적절한 이동을 통한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세상 끝 날까지 계속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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