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신앙의 3대 키워드(key word)
신명기 6장 4~9절
서론
인간을 구성하는 3대 키워드는 지(知)‧정(情)‧의(義)입니다. 지(知)는 지성(知性), 아는 것, 아이큐(IQ), 정(情)은 감성, 희로애락의 이큐(EQ), 의(意)는 의지로 행동과 결단으로 인한 도덕성 행동지수, MQ입니다. 지식은 존경을 받습니다. 감성은 사랑을 받습니다. 의지는 신뢰를 얻습니다. 지식은 있는데 감성이 없으면 인생의 멋, 인간미가 없습니다. 감정은 풍부한데 지식이 없으면 광신, 맹신, 잘못된 열정에 휘둘립니다. 지식은 있는데 의지력이 없으면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철딱서니가 없습니다. 감정은 있는데 의지가 없으면 오락가락합니다. 그러기에 ‘지식’과 ‘감성’과 ‘의지’는 함께 가야 합니다. 지정의가 균형을 이룰 때 그 사람의 인격-가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에도 이런 지정의의 요소가 함께 가야 좋은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일체의 하나님으로서의 성부 하나님은 100%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성자 하나님도 100%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성령 하나님도 100%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삼위로서의 하나님은 사역에서 활동에서 각각 3분의 1씩 윈윈하는 삼각형표를 유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들도 믿음의 세 구성요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은 유대인들의 국민교육대헌장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지정의(知情意)가 삼각형 구도의 균형을 이루는 신심을 요구하고 있음을 봅니다.
기독교신앙의 지식(앎)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1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들어서 알라!’ 암만 들어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래 다녀도 듣는 귀가 없기에 알아들을 수 없으니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에서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자리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모세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를 알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選民)으로 누구보다도 여호와를 잘 아는 종교백성들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여호와를 알라 합니다. 잘 아는 것 같은데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생 살아온 부부들도 때로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한두 해를 살던 사람들이 헤어지는 것은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50년을 살았던 사람들이 황혼 이혼을 합니다.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 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 한상일씨가 불렀는데 글쎄, 66세에 헤어졌습니다. 서로를 잘 모른 것입니다. 몰랐기에 사랑한다 말은 하면서도 상대방이 기대하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안다고 자처했으나 그들은 여호와의 유일성을 믿지 못하고 여호와의 유이성 유삼성...으로 믿었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상대적인 여러 신들 중에서 큰 신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인 여호와만 알았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구름기둥 불기둥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주신, 보고 싶은 쪽의 하나님입니다.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부르짖으면 구원을 해주시는, 어떻게 보면 거래하는 하나님입니다. 자판기 눌러 원하는 식품을 얻는 것처럼 하나님을 조종하고 이용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안 되면 거래가 안 되는 것이고 그러면 다른 신, 특히 가나안에 비가 오지 않을 때 바알과 아세라 여신에게 열정적으로 빕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왜곡된 신관을 알았기에 “들으라”, 바로 알라!면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급화시키기 위해 인격적인 관계,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 나는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관계를 만들어 찾아오시며 자신을 설명하시며 끝까지 사랑해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 그 인격적인 관계, 그것을 알라, 그 관계를 알아야 제대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을까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신령한 분이다! 이런 하나님으로만 알아 신령한 하나님에게 빕니다. 도움 받고 보호 받고 그 혜택을 받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조종하는 것입니다. 헌금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빌면 자동적으로 주시는 기계처럼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주시고 만들어 가시는 그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간섭하시어 나를 치시고 다듬어 가시고 항복시키시며 결국에는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존재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배도의 길로 나가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힘써 알라고 합니다(호6:2).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고 합니다.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맛보라는 것은 간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가. 간 정도만 봐도 알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이 유일하신 피난처됨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어제(26일) 별세했습니다. 그는 딸의 죽음을 통해 늦게 기독교에 귀의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지성의 종착역은 영성(靈性)”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잠언 1:8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최고의 지성과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신앙의 감성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열정입니다.
감성은 타인을 대하는 좋은 마음입니다. 감성이 있어야 인간미가 있고 정이 갑니다. 요즘은 성적, 실력 지상주의여서 자녀들까지 등급을 매깁니다. 1등급-공부 잘 하는 놈, 2등급-성격 좋은 놈, 3등급-건강한 놈, 4등급-지 애비 닮은 놈, 우스갯소리이고 부모는 성격이 좋은, 감성적인 아이가 좋습니다. 감성은 부드럽고 호감을 주는 친밀한 마음입니다. 감성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상대방을 제대로 알 때 나옵니다.
우리가 열렬히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정도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광대하다! 우주를 만드시고 통치하신다! 이런 분이라면 마냥 사랑할 수 있겠어요? 너무 두려워서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에서, 체험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다! 이것만을 갖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저 하늘님을 내가 어떻게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호세아는 사랑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을 알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는 것입니다. 광대하신 분임에도 나와 관계를 맺어주시고 관계를 통해 나를 사랑하시고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대접해 주시고 간섭하시고 붙들어 일으켜 세워주시는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이를 체험할 때에 우리는 진짜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원하는 것은 감동도 없이 기계적으로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5절, 마음을 다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제대로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기 백성으로 삼기위해, 나를 자녀로 삼기위해… 얼마나 크게 자기를 희생하셨으며 다루셨으며 만지셨으며… 아픔을 겪으셨는가… 나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측은지심을 알게 될 때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 딱딱한 지성인으로 살았던 이어령 교수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면 가엾게 여겨서 잠시 그 자비로운 손으로 만져줄 때가 있다. 배 아플 때 어머니 손은 약손이라고 만져주면 반짝 낫는 것 같지 않나. 그때 나는 신께 기도한다.”
고통 중에 있을 때 잠시 자비로운 손으로 만져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 그래서 그런 여호와의 긍휼의 마음을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고맙고 뜨거운 사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특징은 자꾸 주는 것입니다. 아까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받으려고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고 또 드리면서도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드라마 ‘사랑은 뭐길래’의 작가 김수현에게 물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작가의 입에서 나온 사랑의 정의는 한 마디입니다.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시간을 바쳐도 아깝지 않고 돈을 써도 아깝지 않고 희생해도 아깝지 않고… 바로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 아깝고… 돈을 주는 것이 아까우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깝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아깝지 않습니다.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알기에… 그래서 봉사가 나오고 헌금이 나옵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은 원하십니다!
의지(지)-행동으로 사랑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라” 합니다. 상벌이나 주는 무표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되 오랜 세월 나 때문에 상처 받고 자존심이 상하고 그러면서도 나를 붙들어 주시고 자기 백성을 만들어 가시는 그 하나님을 알라! 아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사랑하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지식-머리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머리에서 아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이 진정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의지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찬양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이 의지입니다. 의지는 머리도 가슴의 문제도 아니라 도덕적 행동의 문제입니다. 사람관계에서 잘 안다 하고, 사랑한다면서 말로만 “당신을 잘 알아요,” “사랑해요”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을 속이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윤리적인 하나님입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을 알수록 더욱 순결했고 거룩하고 깨끗해졌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거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임을 알기에 죄된 것을 버리고 성품을 날마다 다듬어가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고급적인 삶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나안 종교에는 윤리가 없었습니다. 신에게 제물 드리고 헌금 드리고 그래서 복이나 받고 소원이나 성취되면 됩니다. 돈 넣고 돈 먹는 식의 거래가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행동이 따라주지 않으면 고급하신 하나님을 저급한 이방신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헌금이나 받아먹고 성전이나 크게 지으면 좋아하는 이런 신은 저급적인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하나님을 그리 욕보이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처럼 우리도 고급스럽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힘들고 어렵고 피터지게 세상과 죄와 싸우고 그렇게 하기 위해 결단하고 결심하고 그런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도덕적 결단과 행동이 없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고급적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욕보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명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갈렙에 대해 "갈렙은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민14:24)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강아지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일편단심으로 쫓았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에 대해 잘 알았고, 그만큼 열정적이었으면 여론이나 다수의 민심에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강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가나안 입성이라는 큰 명예와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들을 점검해 봅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知). 성경적인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습니까? 나와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대한 감성(情). 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대한 의지(意志). 하나님 사랑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며 살고 있습니까.
이렇게 균형이 잡힌 믿음으로 살아야 3절의 복을 받습니다.
3절,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우리도 모세가 전해준 믿음의 3대 키워드로 신앙생활의 균형을 잡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하는 이런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성공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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