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교과서로 되돌아온 그 나라들의 사연 [평범한 이웃, 유럽]
입력2024.11.21.
스위스에서도 교실의 디지털화는 뜨거운 이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디지털 기기를 도입한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은 정책을 과거로 되돌리고 있다.
경고가 나오고 있어서다
.H의 열두 살짜리 아들은 2022년 취리히에 있는 김나지움(인문계 중고교)에 입학했다. H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 좋은 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새로 배우는 과목들이 늘었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라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두어 달 뒤 학교 공개수업에 갔다가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학생들이 노트북 컴퓨터를 앞에 펼쳐놓고 수업을 받는데,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 중 일부가 교사의 설명을 듣지 않고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교실 뒤에 서 있던 학부모들에게는 게임이 진행 중인 스크린이 보였지만 앞에 선 교사는 이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게임을 하는 아이들 중에는 H의 아들도 있었다. H는 “이 학교는 종이 교과서를 전혀 쓰지 않고 모든 수업을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서 한다. 처음에는 진취적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전혀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았다”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H의 아들은 온라인 채팅방으로 전달되는 숙제를 확인하지 않아 수차례 경고를 받고 몇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은 뒤 지금은 다른 학교로 옮겨 갔다.
2023년 8월31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한 초등학교에서 손글씨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AP Photo
H의 아들이 다닌 학교는 취리히에서 2013년 이른바 “아이패드 교실”을 처음 도입해 ‘교실의 디지털화(digitalization)’로 주목받은 곳이다.
H의 아들이 다닌 학교는 취리히에서 2013년 이른바 “아이패드 교실”을 처음 도입해 ‘교실의 디지털화(digitalization)’로 주목받은 곳이다.
종이와 펜 대신 전교생이 아이패드만 들고 다니도록 했다.
몇 년 뒤 꼭 아이패드가 아니더라도 학생들 스스로가 선택한 다른 디지털 기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여전히 이 학교 교실에서 종이로 된 책은 볼 수 없다. 가정에서 기기 장만이 어려울 경우 학교에서 대여해준다. H의 아들이 이 학교에 다니던 당시, 교감이 스위스 일간 〈NZZ〉와 학교의 디지털화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그는 “디지털 기기 사용이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전에 없던 기회를 제공한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기기를 이용해 어떤 식으로 수업을 하느냐고 묻자 “구글 독스(Google Docs)를 이용해 교사와 학생이 동시에 문서에 접속해서 함께 텍스트를 작성할 수 있다”라고 답했다. 구글 독스로 교사와 학생이 동시에 뭔가를 쓰는 게 과연 학습 방식의 획기적 변화인가? 교실 뒤쪽에서 학생 일부가 컴퓨터로 게임하는 상황을 방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변화일까?
한국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교실의 디지털화는 뜨거운 이슈다. 2022년 취리히 칸톤(주) 교육청은 “디지털 양자 도약”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관내 모든 학교의 디지털화를 시작했다. 중고교 39개 및 직업학교가 대상이다. 교내 IT 인프라 강화, 디지털 기기 확대, 기술지원 등을 위해 칸톤 정부 내에 관련 일자리 59개를 새로 만들고 향후 3년 동안 추가로 3000만 스위스프랑(약 48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디지털 기기를 이용할 교사들이 관련 정보를 얻고 최신 앱을 찾아볼 수 있는 ‘디지털 수업 허브’라는 웹사이트도 개설됐다. 유럽 내에서 디지털화가 상당히 뒤떨어진 나라인 스위스는 지금이라도 이를 따라잡기 위해 급히 서두르는 모양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BYOD(Bring Your Own Device·개인 기기 지참)’는 이제 ‘뉴노멀’이 되었다.
교실의 디지털화는 정해진 미래로 향하는 고속도로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탄하게 뻗은 길은 아니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디지털 기기 이용이 실제 학습에 도움을 주는지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기기 의존으로 인한 부작용이다.
첫째, 디지털 기기가 학습 내용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 증거는 부족하다. 오히려 그 반대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읽기가 텍스트를 눈으로 보고 뇌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이 위에 쓰인 글자를 읽는다는 것은 종이를 넘기는 손의 촉감, 종이의 냄새, 빛에 따른 안구의 움직임 등이 결합되어 일어나는 체화된(embodied) 경험이라는 게 〈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종이에서 스크린, 오디오까지 디지털 전환 시대의 새로운 읽기 전략〉의 저자 나오미 배런의 설명이다. 디지털 읽기 및 학습 연구의 최고 전문가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언어학자 배런은 이 책에서 같은 텍스트를 읽었을 때 종이책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하고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는 여러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학교의 디지털 전환을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한다.
비슷한 의견을 가진 학자들이 늘고 있다. ‘스타방에르 선언’은 유럽에서 ‘디지털 시대 읽기의 진화’라는 주제로 4년 동안 공동연구를 진행한 학자들이 2019년 그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과학자 130명 이상이 서명한 이 선언문에는 ‘스크린의 열등성(Bildschirmunterlegenheit)’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스크린으로 읽을 때는 독자의 집중력이 떨어지며 내용을 대충 훑고 넘기기 때문에 종이로 읽을 때보다 이해도가 낮다는 뜻이다. 경고는 계속 나온다. 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 등 유럽 독일어권의 과학자 43명은 지난해 12월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디지털화를 유예할 것을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교육과 지식을 위한 협의회(GBW)’ 소속 교육학자·의사·컴퓨터과학자·심리학자·언어학자 등으로 구성된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미디어가 실제 어린이와 청소년의 발달 및 교육 과정에 미치는 막대한 불이익과 피해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단 한 번의 삶과 교육 과정이 있을 뿐이므로 (디지털화를) 함부로 결정해선 안 된다. 현재 교육기관에서 진행 중인 디지털화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일 뿐이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교실에 디지털 기기를 도입했던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은 이 같은 전문가 의견에 따라 정책을 과거로 되돌리고 있다. 2017년 스웨덴은 5년에 걸친 학교 디지털화 계획을 수립하고 유치원 이상 모든 학교에서 스크린을 이용해 수업을 하도록 했다.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은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이 걷기도 전에 태블릿 쓰는 것을 배운다”라며 놀라워했다. 학교 교실에서 종이 교과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이 흐른 2023년, 로타 에드홀름 새 교육장관이 이를 뒤집었다. 사라졌던 종이 교과서를 다시 배부하고 종이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이 복원됐다. 여기 들어간 돈이 6000만 유로(약 900억원)다.
둘째, 디지털 기기를 교실에 들이는 것 자체의 부작용이 만만찮다. 앞에 언급한 H 아들의 사례처럼 수업용 컴퓨터로 게임을 하는 걸 원천 차단하기란 불가능하다. 학습용 웹사이트 계정 설정이나 확인을 위해 개인 스마트폰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내 딸이 다니는 중학교는 원칙적으로 스마트폰을 금지하면서도 일부 교사는 ‘수업 중 원활한 디지털 소통’을 위해 스마트폰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 또 숙제가 모두 마이크로소프트 팀스(Teams)로 안내되기 때문에 집에서도 계속 폰을 확인해야 한다.
과연 이 나이의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로그인이나 숙제 확인에만 쓰고 말겠는가.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스마트폰을 쓰는 것은 어떻게 막을 건가. 에릭 애덤스 미국 뉴욕 시장이 청소년의 스마트폰(소셜미디어) 사용을 흡연이나 마찬가지라고 한 것(〈NBC 뉴욕〉 인터뷰)은 적절한 비유다. 정신 건강은 물론 신체 건강도 위협을 받는다. 야코브 포르스메드 스웨덴 사회장관은 “스마트폰 때문에 신체 활동이 줄어 아이들이 가위질이나 나무 오르기도 못하고 노인성 질환을 겪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도이체벨레〉 인터뷰).
과학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디지털 학습의 효과를 신봉하며 교실의 디지털화를 밀어붙이는 것, 스마트폰의 위험을 경고하면서도 쓰지 않을 수 없게 커리큘럼을 짜는 것은 자라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거대하고 위태로운 사회 실험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디지털화에 앞장선 나라들에서 잇따라 ‘탈디지털화(de-digitalization)’가 추진 중이다.
마티아스 테스파예 덴마크 아동교육장관은 지난해 11월 “디지털 실험으로 청소년들을 기니피그로 만들었다”라며 사과를 했다(〈더로컬 덴마크〉 인터뷰). 디지털화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고 신기술에 대해 순진한 열정만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덴마크는 유럽에서 인터넷 사용량이 가장 많은 나라다. 15세 청소년이 하루 평균 9시간(학교에서 4시간, 집에서 5시간)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다. 스웨덴처럼 어린이집에서부터 스크린을 이용하고 학교에서 태블릿 교과서를 쓰는 등 지난 수년간 학교의 디지털화를 추진했지만 이제 이를 되돌리려는 중이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2023년 6월8일 AI 디지털 교과서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덴마크 오덴세 대학 교수인 심리학자 아이다 비키치는 지난 9월 스위스 일간 〈타게스 안차이거〉와의 인터뷰에서 “덴마크가 저지른 오류(교실의 디지털화)를 스위스가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충고했다. 핀란드 역시 지난해 초등학교의 디지털화 전략을 원점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이탈리아는 2024년 가을 신학기부터 전국 학교 내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했다. 11~19세 청소년의 47%가 하루에 5시간 이상을 온라인에서 소비(‘세이브더칠드런 이탈리아’ 2023년 설문조사)하는 등 기기 의존 현상이 심각해지자 주세페 발디타라 교육장관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정책이다. 수업 중 부분적으로 태블릿과 컴퓨터를 쓰는 것은 허용되지만 교사의 동의와 감독하에서만 가능하다. 이제 모든 숙제는 종이 공책과 펜을 이용해서 해야 한다.
교실의 디지털화를 둘러싼 논의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기기나 연결망 같은 ‘디지털 환경’과 그 환경을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능력’을 구분하는 일이다. 환경이 갖춰졌다고 그것을 이용하는 능력이 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가 ‘어릴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해 디지털 기기를 원어민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세대’라는 의미로 흔히 쓰이지만, 이 개념은 과학적 용어가 아니라 신화에 가깝다는 게 현재 학계의 중론이다. 나라별로, 또 한 나라 안에서도 교육과 소득수준에 따라 아이들의 디지털 능력에 큰 차이가 난다는 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표 참조). 최신 스마트폰으로 와이파이에 접속해 새로 나온 게임 앱을 내려받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소셜네트워크에서 접한 정보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기기를 잘 다루는 청소년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디지털 능력의 차이를 주로 연구하는 취리히 대학 에스터 하르기타이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신 기기로도 정밀한 검색을 하지 못하는 이들은 디지털 네이티브가 아닌 ‘디지털 나이브(naive)’에 가깝다.
현재 엄청난 예산을 들여 진행 중인 교실의 디지털화는 디지털(AI) 교과서가 학습에 실제로 도움을 주는지, 기기 의존의 부작용이 너무 크지는 않은지, 디지털 환경과 능력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등을 바탕으로 전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나이브들을 기니피그로 만들지 않으려면 말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교실의 디지털화는 뜨거운 이슈다. 2022년 취리히 칸톤(주) 교육청은 “디지털 양자 도약”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관내 모든 학교의 디지털화를 시작했다. 중고교 39개 및 직업학교가 대상이다. 교내 IT 인프라 강화, 디지털 기기 확대, 기술지원 등을 위해 칸톤 정부 내에 관련 일자리 59개를 새로 만들고 향후 3년 동안 추가로 3000만 스위스프랑(약 48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디지털 기기를 이용할 교사들이 관련 정보를 얻고 최신 앱을 찾아볼 수 있는 ‘디지털 수업 허브’라는 웹사이트도 개설됐다. 유럽 내에서 디지털화가 상당히 뒤떨어진 나라인 스위스는 지금이라도 이를 따라잡기 위해 급히 서두르는 모양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BYOD(Bring Your Own Device·개인 기기 지참)’는 이제 ‘뉴노멀’이 되었다.
교실의 디지털화는 정해진 미래로 향하는 고속도로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탄하게 뻗은 길은 아니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디지털 기기 이용이 실제 학습에 도움을 주는지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기기 의존으로 인한 부작용이다.
첫째, 디지털 기기가 학습 내용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 증거는 부족하다. 오히려 그 반대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읽기가 텍스트를 눈으로 보고 뇌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종이 위에 쓰인 글자를 읽는다는 것은 종이를 넘기는 손의 촉감, 종이의 냄새, 빛에 따른 안구의 움직임 등이 결합되어 일어나는 체화된(embodied) 경험이라는 게 〈다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종이에서 스크린, 오디오까지 디지털 전환 시대의 새로운 읽기 전략〉의 저자 나오미 배런의 설명이다. 디지털 읽기 및 학습 연구의 최고 전문가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언어학자 배런은 이 책에서 같은 텍스트를 읽었을 때 종이책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하고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는 여러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학교의 디지털 전환을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한다.
과학자들 ‘스크린의 열등성’ 선언
비슷한 의견을 가진 학자들이 늘고 있다. ‘스타방에르 선언’은 유럽에서 ‘디지털 시대 읽기의 진화’라는 주제로 4년 동안 공동연구를 진행한 학자들이 2019년 그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과학자 130명 이상이 서명한 이 선언문에는 ‘스크린의 열등성(Bildschirmunterlegenheit)’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스크린으로 읽을 때는 독자의 집중력이 떨어지며 내용을 대충 훑고 넘기기 때문에 종이로 읽을 때보다 이해도가 낮다는 뜻이다. 경고는 계속 나온다. 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 등 유럽 독일어권의 과학자 43명은 지난해 12월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디지털화를 유예할 것을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교육과 지식을 위한 협의회(GBW)’ 소속 교육학자·의사·컴퓨터과학자·심리학자·언어학자 등으로 구성된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미디어가 실제 어린이와 청소년의 발달 및 교육 과정에 미치는 막대한 불이익과 피해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단 한 번의 삶과 교육 과정이 있을 뿐이므로 (디지털화를) 함부로 결정해선 안 된다. 현재 교육기관에서 진행 중인 디지털화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일 뿐이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교실에 디지털 기기를 도입했던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은 이 같은 전문가 의견에 따라 정책을 과거로 되돌리고 있다. 2017년 스웨덴은 5년에 걸친 학교 디지털화 계획을 수립하고 유치원 이상 모든 학교에서 스크린을 이용해 수업을 하도록 했다.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은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이 걷기도 전에 태블릿 쓰는 것을 배운다”라며 놀라워했다. 학교 교실에서 종이 교과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이 흐른 2023년, 로타 에드홀름 새 교육장관이 이를 뒤집었다. 사라졌던 종이 교과서를 다시 배부하고 종이책으로 가득한 도서관이 복원됐다. 여기 들어간 돈이 6000만 유로(약 900억원)다.
둘째, 디지털 기기를 교실에 들이는 것 자체의 부작용이 만만찮다. 앞에 언급한 H 아들의 사례처럼 수업용 컴퓨터로 게임을 하는 걸 원천 차단하기란 불가능하다. 학습용 웹사이트 계정 설정이나 확인을 위해 개인 스마트폰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내 딸이 다니는 중학교는 원칙적으로 스마트폰을 금지하면서도 일부 교사는 ‘수업 중 원활한 디지털 소통’을 위해 스마트폰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 또 숙제가 모두 마이크로소프트 팀스(Teams)로 안내되기 때문에 집에서도 계속 폰을 확인해야 한다.
과연 이 나이의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로그인이나 숙제 확인에만 쓰고 말겠는가.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스마트폰을 쓰는 것은 어떻게 막을 건가. 에릭 애덤스 미국 뉴욕 시장이 청소년의 스마트폰(소셜미디어) 사용을 흡연이나 마찬가지라고 한 것(〈NBC 뉴욕〉 인터뷰)은 적절한 비유다. 정신 건강은 물론 신체 건강도 위협을 받는다. 야코브 포르스메드 스웨덴 사회장관은 “스마트폰 때문에 신체 활동이 줄어 아이들이 가위질이나 나무 오르기도 못하고 노인성 질환을 겪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도이체벨레〉 인터뷰).
“청소년들을 기니피그로 만들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디지털 학습의 효과를 신봉하며 교실의 디지털화를 밀어붙이는 것, 스마트폰의 위험을 경고하면서도 쓰지 않을 수 없게 커리큘럼을 짜는 것은 자라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거대하고 위태로운 사회 실험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디지털화에 앞장선 나라들에서 잇따라 ‘탈디지털화(de-digitalization)’가 추진 중이다.
마티아스 테스파예 덴마크 아동교육장관은 지난해 11월 “디지털 실험으로 청소년들을 기니피그로 만들었다”라며 사과를 했다(〈더로컬 덴마크〉 인터뷰). 디지털화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고 신기술에 대해 순진한 열정만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덴마크는 유럽에서 인터넷 사용량이 가장 많은 나라다. 15세 청소년이 하루 평균 9시간(학교에서 4시간, 집에서 5시간)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다. 스웨덴처럼 어린이집에서부터 스크린을 이용하고 학교에서 태블릿 교과서를 쓰는 등 지난 수년간 학교의 디지털화를 추진했지만 이제 이를 되돌리려는 중이다.
덴마크 오덴세 대학 교수인 심리학자 아이다 비키치는 지난 9월 스위스 일간 〈타게스 안차이거〉와의 인터뷰에서 “덴마크가 저지른 오류(교실의 디지털화)를 스위스가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충고했다. 핀란드 역시 지난해 초등학교의 디지털화 전략을 원점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이탈리아는 2024년 가을 신학기부터 전국 학교 내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했다. 11~19세 청소년의 47%가 하루에 5시간 이상을 온라인에서 소비(‘세이브더칠드런 이탈리아’ 2023년 설문조사)하는 등 기기 의존 현상이 심각해지자 주세페 발디타라 교육장관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정책이다. 수업 중 부분적으로 태블릿과 컴퓨터를 쓰는 것은 허용되지만 교사의 동의와 감독하에서만 가능하다. 이제 모든 숙제는 종이 공책과 펜을 이용해서 해야 한다.
교실의 디지털화를 둘러싼 논의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기기나 연결망 같은 ‘디지털 환경’과 그 환경을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능력’을 구분하는 일이다. 환경이 갖춰졌다고 그것을 이용하는 능력이 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가 ‘어릴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해 디지털 기기를 원어민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세대’라는 의미로 흔히 쓰이지만, 이 개념은 과학적 용어가 아니라 신화에 가깝다는 게 현재 학계의 중론이다. 나라별로, 또 한 나라 안에서도 교육과 소득수준에 따라 아이들의 디지털 능력에 큰 차이가 난다는 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표 참조). 최신 스마트폰으로 와이파이에 접속해 새로 나온 게임 앱을 내려받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소셜네트워크에서 접한 정보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기기를 잘 다루는 청소년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디지털 능력의 차이를 주로 연구하는 취리히 대학 에스터 하르기타이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신 기기로도 정밀한 검색을 하지 못하는 이들은 디지털 네이티브가 아닌 ‘디지털 나이브(naive)’에 가깝다.
현재 엄청난 예산을 들여 진행 중인 교실의 디지털화는 디지털(AI) 교과서가 학습에 실제로 도움을 주는지, 기기 의존의 부작용이 너무 크지는 않은지, 디지털 환경과 능력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등을 바탕으로 전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나이브들을 기니피그로 만들지 않으려면 말이다.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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