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은혜로 사는 삶(갈1:6-10)

하나님아들 2024. 8. 31. 18:21

은혜로 사는 삶(갈1:6-10)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도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로부터 은혜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문둥병자였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까?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셨으니 그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장례 하러 가시던 길에 만난 죽은 청년도 살아났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일생일대에 귀중한 은혜를 받았는데 성경을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았다하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저런 은혜를 예수님께서 베풀고 여러 사람들이 은혜를 입고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다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궁금한 이런 특이한 점을[오스카 와일드]라는 사람이 나름대로 추리해서 우화적인 단편소설을 썼습니다. 예수님이 과거에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만나본 일이 있다는 것으로 소설은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어떤 곳에서 알코올 중독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가만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묻습니다."우리 어디서 본 일이 없습니까?"그 사람이 대답합니다."아, 있지요. 나는 본래 절름발이 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셔서 제가 이렇게 걷게 되었습니다. 절름발이였을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얻어먹고 살았는데 건강해지고 나니 할 일이 없어요. 또 누가 나를 환영하지도 않고. 그래 이럭저럭 하다 보니 타락해서 이렇게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그럽니다. 가시다가 또 한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창녀였습니다."네가 창녀일 때에 내가 용서하고 구원했는데 아직도 창녀냐?"하고 꾸중하듯이 물었더니 이 창녀가 대답하는 말이"물론이지요. 제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고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딸이 되고 감사해서 창녀생활을 청산했었지요.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고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워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와서 삽니다."예수님이 가슴아파하시면서 또 한 곳에 가서 혈기를 부리면서 싸움질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 역시 옛날에 본 사람이었습니다."자네는 어떻게 폭력배가 되었나?"하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의 대답이"예수님 저는 원래 시각장애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저의 눈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만 눈 감았을 때는 몰랐는데 눈뜨고 보니까 아니꼬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부정부패 사치와 타락, 여기에 울분이 터져서 주먹을 쓰다 보니 조폭이 되었습니다."】하더랍니다.

 

생각해보면 이 소설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단편 속에 정말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받은 바 그 귀한 은혜를 지켜가며 그 소중한 은혜 안에 살아가느냐 아니냐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성도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 사는 성도는 세상의 정욕을 멀리합니다. 은혜 받기 이전에는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소욕들을 즐기며 거기에 어울리는 삶을 좋아하였으나,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이전에 좋았던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가치 없이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로 사는 성도는 선한 행실로써 그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일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위대한 지도력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강력한 지도력을 나타 내었을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 크나큰 업적을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도 은혜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면서 은혜가 아닌 공로주의를 경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 받은 이후의 삶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을 사는 크리스챤들이 가장 중요시 해야할 일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1.다른 복음을 쫓는 것을 이상히 여겨야 합니다.(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심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이 여기노라”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다른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지고 있는 때입니다. 즉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는 때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교회들마다 초교파적인 교회가 되어서 자신의 교단이 지향하는 기본적인 진리를 알지 못하고 모조리 잡탕이 되어 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진리를 변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예 드러내 놓고 반대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괴악한 일입니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복음도 가짜가 득세하고 가짜들이 더 요란하게 떠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명백하게 드러내 놓고 이단도 아닙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이 정말로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바울 당시의 창궐하던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의 도전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흔들리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후에 유대주의의 강렬한 도전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유대주의의 폐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은 바로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외의 복음은 다른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복음과 대조가 될만한 다른 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행위, 또는 율법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의 형태가 가지고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는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쌓는 선을 통해서 그들의 구원을 완성할 수 있으며, 또한 남의 구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가진 율법이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자신들의 가르침을 교회로 가지고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만일 그들이 은혜의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된다면 결국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에서부터 온 천사라도 예외 일 수 없다고 강력하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다른 복음은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신비주의자들이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정성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질 것을 가르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조차 가르치지를 않으며 다만 그들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뉴에이지 사상을 가진 자들은 스스로가 경지에 이르러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치며,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이든지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며, 이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는 자는 결국 저주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행위나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들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고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 문제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히브리서9:28)

우리가 아직도 우리가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아직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는 비교적 여러 말로 그 교회에 대하여 칭찬하는 것이 그의 편지의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본서에서는 바울은 그러한 칭찬은 커녕 인내할 겨를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편지의 서두가 대단히 긴장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복음을 변질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변질시키는 일은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였고, 이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바울은 답답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들이 분명히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떠나서 다른 복음을 좇는 그들을 보고 너무나 한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하면서 본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여러가지 이단들이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단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본문에서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상히 여겨야 합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히 여기지 않는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들을 때에 새롭다 하여 다른 복음을 좇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신앙생활로 접어들게 됩니다. 다른 복음을 오늘날로 표현하면 이단자들이 가르키는 것을 말하는 데 이단자들에게는 특성이 분명히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특성을 알아서 주위에 성도들이 다른 복음 즉 이단자를 따르는 모습이 보이면 이상히 여기고 경계해야 합니다.

 

2.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9)

 

축복의 반대가 저주입니다. 저주의 사전적 의미는 남이 잘 안되기는 비는 것이라고 하는데 저주를 좋아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저주에 대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28장에 보면 68절로 되어 있는데 축복에 관한 절은 14절이지만 나머지 54절은 저주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거의 5배나 더 저주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9-10절에도 저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강조되어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도들이나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가 누가 되었든지 그것은 아무런 고려사항이 아닙니다. 단지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실제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복음을 변질시킨 자들이 정죄를 받고 교회에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처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강림했고 신의 속성을 받았다고 주장한 데오도투스는 유배를 갔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육신을 소유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마니는 산채로 껍질이 벗겨져서 페르시아 성문에서 교수형을 당하였습니다. 칼빈이 말하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자신은 생명을 걸고 말한 세베루스는 제네바 의회의 결의로 그의 원대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재판을 해서 유배를 보내거나 사형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22장에 있는 대로 마지막에 "성 밖에 있을 자"의 명단 중에 거짓말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거짓말하는 자들은 복음을 변하여 거짓말을 한 자들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씀을 맡은 자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은 바로 내가 전하는 복음이 바른 복음인가? 아니면 "다른 복음"인가하는 점입니다.

다른 복음은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말씀을 언제나 명심하고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이 예수님은 과연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그 예수님인가를 정확하게 늘 판단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때로는 기도원에 가거나 다른 교회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도 이상한 "다른 복음"을 교묘하게 포장하는 교회들이 많아서 사실은 걱정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다른 복음"을 추종하는 자들도 역시 그렇다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가서 나는 책임이 없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책임이라고 아무리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엉터리 약을 파는 사람의 약을 먹고서 부작용이 생겨서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때에 가서 양을 파는 사람을 원망해도 망가진 건강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문 입구에서 이것이 판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제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을 들어주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혜받은 자의 삶은 저주스런 삶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3.하나님을 좋게 해야 합니다.(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람들을 좋게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좋게 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도 10절에서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이 이제까지 일한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것이었으며 만약 그렇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일한 것이었다면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수 없을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바울과 같은 심정이 아니라 사람에게 좋게 보이려고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즉 복음을 복음으로 알지 않고 자신들이 영달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점을 계속하여 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남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한 두 번 하다보면 그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나쁜 말은 하지 않고 좋아하는 말만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다 보면 좋은 말만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지적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는 이러한 권면과 징계가 사라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라고 설교자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거나 자신의 죄를 지적하면 자기를 친다고 생각하고 쌩하고 돌아섭니다. 그리고 아무도 죄를 지적하는 말에 대해서는 "아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선언하고 복을 받으라고 하면 모두가 다 "아멘"하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설교자들도 교인들이 좋아하는 설교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가 오늘날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사라지니까 사람들의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불평만이 나오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축복의 말만 듣는 귀가 아니라 하나님의 책망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에 맞추어서 말씀을 전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인간에게 아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 사람은 사람의 종이 될지언정 하나님의 종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종이 될지언정 사람의 종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은 영원하지만 사람의 영화는 잠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히11:25∼26).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라면 사람의 종이 아니라, 세상의 종이 아니라, 권력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바른 삶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영원한 지옥의 멸망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는 우리의 사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전히 지켜 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도 보고 계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산다고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판단의 기준은 정말 이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우리의 삶은 변화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가 아닌가를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종"이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좋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과연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인간의 생각과 이성에 맞는 것들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하나님의 명령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는 질문을 끊임없이 행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좀더 풍성한 은혜의 삶을 누리게 될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