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거룩 없이 주를 보지 못한다

하나님아들 2024. 7. 29. 23:50

거룩 없이 주를 보지 못한다

 

(강문호 목사)

 

 

(히 12:14)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벧후 1:4-7)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거룩을 잃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런데 현대는 거룩이라는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도 30년 목회하면서 거룩에 대한 설교를 두 번 하였습니다. 15년에 한번 거룩에 대한 말씀을 전한 셈입니다.

 

그리고 내가 설교집을 수 백권을 읽어도 거룩에 대한 설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탄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거룩은 심각한 말입니다. “거룩이 없으면 예수님을 볼 수 없다.” 이만하면 심각한 말씀이 아닙니까? 거룩이 없이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거룩이라는 말은 하기오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어원적으로 <순수하다> <헌신되었다> <구별되었다> 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분리되었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분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구별된 것을 거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별된 땅을 성지라고 말합니다. 구별된 쌀을 성미라고 부릅니다. 구별된 사람을 성인이라고 합니다. 구별된 책을 성서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구별된 가구를 성구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구별된 돈을 성금이라고 합니다. 구별된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여야 합니다. 청교도들의 생활 철학의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거룩함.> 이것이 청교도들의 삶이었습니다.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리은 감리교를 창설하면서 말했습니다. “성경에 의한 하나님의 거룩함을 전 세계 알리기 위하여 감리교를 창설한다.” 피비 팔머, 핸드리 모울, 앤드류 머레이, 재시 펜 루이스, F.B 마이어, 오스왈드 챔버스, 호레이시우스 보나르, 에이미 카마이클, L.B 맥스웰 이런 분들은 19세기 영의 거성들입니다. 이들의 핵심은 거룩이었습니다. 이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를 지나면서 거룩으로 성결 운동을 일으킨 영계의 거성들입니다. 종교 개혁 전 영적인 거성은 성 테레사,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마담 기용, 뻬루 그루입니다. 이들도 거룩을 제일로 삼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옛 우물을 다시 판 이삭 이삭이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하여 블레셋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땅은 옛날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살던 땅이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우물을 팠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우물을 빼앗고 메웠습니다. 이삭은 그 곳으로 가자 말자 우물이 필요하였습니다. 새로운 땅에 새롭게 우물을 판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창 26;18)

 

우리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과거의 진리를 재발견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어제와 오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과거에 그렇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대로 역사하여 주십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던 것처럼 우리는 초대 교인들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었던 거룩의 우물을 다시 파야 합니다. 무엇이 거룩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없이는 주님을 보지 못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에릭 후롬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e)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속에 들어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흘러간 유행가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노란 샤쓰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 지 맘에 들어. 어쩐지 나는 좋아.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어쩐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그 사람이 마음에 들까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좋아 하는 것이 있습니다. 1. 노란 색을 좋아 합니다. 2. 말없는 것을 좋아 합니다. 3. 씩씩한 것을 좋아 합니다. 자기가 좋아 하는 요소가 그 사람속에 들어 있기에 그 사람을 좋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 하실까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 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에 성품에 참예하는 사람을 좋아 하십니다. 하나님이 좋아 하시는 성품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 하십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신에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 옵니다.

 

신의 성품은 어떤 것일까요?

 

기본적인 믿음에 7가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갔습니다. 아들은 앞에 있는 십자가를 보더니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저기 더하기 표가 있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더하기입니다. 믿음은 더하기입니다. 다음과 같은 7가지가 신의 성품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무지개는 7가지 색갈이 합하여 무지개가 됩니다. 도래미파솔라시 7음이 합하여 음악이 됩니다. 신의 성품은 다음 7가지 요소가 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7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1거룩, 덕

 

덕이라는 말은 아레테라고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덕중에 최고의 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덕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자기게 침을 뱉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덕은 최고의 덕입니다.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는 최고의 덕입니다. 예수님의 덕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덕이 있으신 분이시기에 덕이 있는 사람을 좋아 하십니다. 덕을 가지는 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무엇이든지 정도가 있습니다.

 

최고 지선의 덕을 아레테라고 말합니다. 용장보다는 지장이 낫고 지장보다는 덕장이 낫다고 들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덕은 인격의 최고의 요소입니다. 거룩의 최고봉입니다. 사람은 덕스러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덕이 있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덕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려면 덕을 가져야 합니다. 덕은 거룩의 첫 요소입니다.

 

제2거룩, 지식

 

하나님의 두 번째 거룩은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머리털까지 몇 개 인지 다 알고 계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머리이지만 자기 머리털이 몇 개 인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머리털도 세실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중심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지식이란 헬라어로 그노스라고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덕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식이 없으면 잘못 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이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예수믿는 이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철로가 없는 기차같아서 아무대로나 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믿으려면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잠 8;10)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잠 11;9)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잠 24;5) 이같이 지식이 더 하여야 믿음은 믿음으로 완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에 지식을 더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3) 우리 나라 속담에도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힘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알되 낙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면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8년동안 아이를 낳지 못 하였어도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였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불치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최고의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하나님의 예정은 당신을 하늘 나라로 데리고 가시려고 하는 것이니 죽을 준비를 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하나님은 아무리 예정하고 계시더라도 기도하면 예정도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낯을 벽으로 향하고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그대로 예정을 바꾸어 주시고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살에 난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럴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삭을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 할 지라도 하나님은 이삭을 통하여 민족을 이룬다고 하셨으니 부활시켜 주실 것을 믿었기에 이것이 힘이 되어 이삭을 바쳤다고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하나님의 거룩은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거룩하여 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통하여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는 거룩함이 임하였습니다. 알면 거룩하여 집니다.

 

제3거룩, 절제

 

절제는 헬라어로 엥크레이아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엥크레이아라는 말은 자기 조절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절제입니다. 절제하며 살면 거룩하여 집니다. 베드로의 귀를 자른 말고의 귀를 고쳐 주시는 것은 최고의 절제입니다. 자기 조절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조절할 줄 알고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이를 좋아 하십니다. 모세도 믿음이 누구 못지 않게 충만하였으나 혈기가 있었습니다. 절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자기 조절을 못 하는 이는 믿음이 있더라도 실패하기가 쉽습니다.

 

10년 동안 정성껏 쌓아 놓은 교회를 한번 혈기로 다 흐트러뜨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으기는 힘들어도 흩으러 뜨리기란 순식간입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내가 홧김에 가출하였습니다. 몇 일만 기다리면 다시 들어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의 화를 참지 못 하여 자식 둘을 저수지로 데리고 가서 묶어 빠뜨려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다 구조대에 구조되었습니다. 자기 조절이 없습니다. 위기 관리 능력이 없습니다. 화를 처리할 줄 모릅니다. 감정의 폭팔을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더라도 절제가 없으면 믿음이 빛을 발하지 못 합니다. 무엇이든지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조금 모자라도 조금 남아도 문제입니다. 절제하여야 거룩하여 집니다.

 

제4거룩, 인내

 

하나님의 네 번째 거룩은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고 베드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믿음에는 인내가 더 하여져야 참된 믿음이 됩니다. 인내는 원어로 휴포모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휴포모네라는 인내를 크리소스돔은 “미덕의 여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미덕중에 가장 큰 미덕은 인내입니다. 인내보다 더 큰 미덕은 없습니다. 모든 일에 참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인내야 말로 인내의 극치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끝까지 참으셨던 그리스도의 인내가 온전한 인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기에 인내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사람이 됩니다. 인내가 거룩입니다.

 

제5거룩, 경건

 

하나님의 거룩은 경건입니다. 믿음에 더 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경건입니다. 헬라어로는 유세베이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세베이아라는 말은 “바르게 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경건한 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가 있습니다. 윗 사람에게 경건한 이는 윗 사람을 바르게 섬길 수가 있습니다. 경건이란 바르게 섬긴다는 뜻입니다. 섬기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게 섬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대통령을 섬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대통령의 머리에 무엇을 입력시켜 주느냐에 따라서 대통령의 판단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국가에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목사를 섬긴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섬겨야 교회가 바로 서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이는 경건하게 섬겨야 합니다. 경전이 거룩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경건하여야 합니다.

 

수도사 암모니우스는 사막에서 수도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를 찾아 가서 말했습니다. “암모니우스를 우리들의 감독으로 임명하여 주십시오.” 대주교는 사막에서 수도하고 있는 그를 불러 오면 감독으로 임명하여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세상을 나와 감독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나 암모니이우스는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습니다. 암모니이우스는 가위를 가지고 오더니 자기 왼쪽 귀를 잘라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1장 17절에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지 오지 못 할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은 사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주교가 말했습니다. “그 율법은 유대인들이나 지키라고 하는 율법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코없는 사람을 데리고 와도 나는 인격만 되면 그를 감독으로 임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다시 사막에서 수도하고 있는 암모니이우스에게 갔습니다. 암모니이우스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들이 자꾸만 요구하면 나는 내 혀를 잘라 버리겠습니다.”

 

그리고 고집스럽게 살면서 평생 수도하였습니다. 정욕이 몸에서 올라오면 불인두로 자기 몸을 지졌습니다. 온 몸이 곪아서 고름이 흘렀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불로 요리한 음식은 빵외에는 먹지 않고 지냈습니다. 후에 사람들은 암모니이우스에게 대하여 말했습니다. “우리는 정욕으로부터 암모니이우스만큼 자유로운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 무덤을 남겼습니다. 그의 무덤에 병자들이 가서 기도하면 병이 나았습니다. 그는 정말 고집스럽게 자기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경건이 거룩입니다.

 

제6거룩, 형제우애

 

이 말은 필라델피아입니다. 이는 글자 그대로 형제 사랑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형제간에 우애를 가지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이는 형제 사이에 우애가 있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 하면서 어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자리에 대하여 미드라쉬는 이런 전설을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같습니다. 서로 우애가 깊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결혼을 하였고 동생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두 형제는 밀밭을 상속받았습니다. 밀농사를 지은 후 둘이는 적당히 나누어 밀단을 쌓아 놓고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집에 돌아 온 형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농사가 끝나기까지 동생이 혼자 수고 많이 하였소. 나는 이 일 저 일로 들에 나가지 못 하였지만 그 때마다 동생이 혼자 농사를 다 지은 것이요. 그러니 가서 동생 밀단에 우리의 것을 더 갖다 놓고 오시오.” 둘이는 같이 나가서 밀단을 동생 것에 더 놓고 돌아 왔습니다. 한 편 동생은 집에 돌아 와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는 혼자 사니까 별 것 아니지만 형은 식구가 많으니 얼마나 어려울까?” 이렇게 말하면서 밭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밀단을 형에게 갖다 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둘이 밭에 나가보고 놀랐습니다. 서로 자기 것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 데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날 밤에 다시 나와서 다시 날랐습니다. 이튿날 나가 보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음 날은 서로 지켜 보았습니다. 서로 지키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그들은 또 곡식단을 나르려고 나갔습니다. 서로 나르다가 중간에서 만났습니다. 형제는 이제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서로는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형제의 눈물이 떨어진 곳에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형제우애가 거룩입니다.

 

제7거룩, 사랑

 

사랑이 거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쳐집니다. 기독교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종교입니다. 형제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의 범위를 더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뿐만 아나라 불의한 이에게도 태양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이뿐 만 아니라 악한 이에게까지도 비를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똑같이 남에게 보여줌으로 끝내야 합니다.

 

여기에서 사랑이란 아카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카페 사랑이란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상식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7가지가 거룩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쉬지말고 기도하라!!성경: 마7:7  (0) 2024.08.16
성도에게 고난은 필수?  (0) 2024.07.29
마지막 때 피난처 예수 그리스도  (0) 2024.07.29
성령의 네 가지 별명!  (0) 2024.07.29
휴거의 기록  (0) 2024.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