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믿음이란 무엇인가 눅7:6~8

하나님아들 2024. 7. 22. 23:46

믿음이란 무엇인가                    눅7:6~8              

 

 

◑‘믿음’이 아닌 것

 

정말 성도들은, "믿습니다" 라는 말을 참 많이 쓰십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과, 성경의 믿음이 다른데,

교회에서 “믿는다”고 할 때

세상적인 믿음과 성경적인 믿음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성경적인 믿음이 무엇인가를 논하기 전에

무엇이 진짜 성경적 믿음이 아닌가를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첫째로 “나를 믿는 것”은, 성경적 믿음이 아니죠.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

특히 자수성가한 분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하시는데

이런 맹목적 <긍정적 사고 방식>은..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자기 한계를 모르고 날뛴 분들이 일으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내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지 마십시오.

 

▲요행을 바라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어떻게 되겠지.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

‘언젠가 내게도 해 뜰 날이 오겠지. 설마 망하기나 하겠어?’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죠?

 

이렇게 요행을 바라는 분들이, 복권을 사고, 도박을 하고, 한 방에 인생 역전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런 허황된 꿈을 꾸다가 나중에 주저앉게 되죠.

 

▲대책 없는 낙관주의도 믿음이 아닙니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다 잘 될 거야.

 

사람과 사람이 미워하던 것이 시간이 해결해주던가요?

가만히 있으면 남북 관계가 잘 풀리던가요?

 

세상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탄은 사악합니다.

세상은 갈수록 악하고 사나워질 것이라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 장밋빛 환상을 갖지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것이고, 전쟁과 기근과 핍박을 각오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을 핍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책 없는 낙관주의를 가지는 게 믿음은 아닙니다.

 

<그럼 "믿음"은 무엇이냐>

 

◑1. 성경적 믿음의 첫 번째는, "믿음은 구원의 열쇠다" 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다'는데, 나의 무엇을 믿는다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만 다니면,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거라고, 구원 받을거라 착각합니다.

"나는 교회 나가니까 천국 갈 거야." 그것은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 받는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으로 나의 죄를 대속했다는 것을 내가 믿고

그 분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선포할 때, 그것이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어설프게 내가 교회 다니면서 예수님 이야기 한 두마디 들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구원받는 믿음은 어떻게 생깁니까.

말씀을 들음으로 생깁니다.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거듭날 수도, 믿음이 생길 수도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구원 받지 못한 분들을 보면

영적으로 참 답답합니다.

 

굉장히 나이스한 분인데, 구원을 받지 못하면, 영적으로 뭔가 탁 막힌 벽이 느껴지죠.

종교적으로 몸만 왔다갔다하는 것은,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거듭나야만 합니다.

1:2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래서 살아 있는 교회는 말씀이 가르쳐주는 교회에요.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요.

교회가 건물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은데, 그 교회에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는 굉장히 중요해요.

 

사도행전에, 초대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몇 만명 교인인데도 건물이 없었잖아요.

그냥 성전에 와서 솔로몬 행각, 그 앞에 그 넓은 공터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그냥 공짜로 쓰는 거예요.

말씀이 있으니까 교회가 되는 거예요.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죠.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이 믿어지기까지가 쉽지가 않아요.

믿으려면, 믿어져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거든요. 사람의 노력으로 되지 않거든요.

말씀의 씨가 우리 마음에 떨어졌을 때, 성령의 인큐베이션 프로세스. 부화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 생명의 씨가 우리 안에 떨어져서 수정이 되고 나면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일정기간 부화하는 기간이 필요하듯이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 떨어지면.. 부화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 때 성령께서 역사하세요.

우리 주위에 사람들과 각종 다툼들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점점 부드럽게 하셨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안에 떨어진 말씀에 반응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인식하게 하고 회개가 터져나올 때, 비로소 복음이 믿어지는 거예요.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님에 의해서 설득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때, 이 성령의 인큐베이션 프로세스를 통해서

말씀에 반응하고, 그 말씀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임을 인식할 때

그리고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받는 믿음이에요.

이 구원받는 믿음이 생기기까지, 정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었죠.

 

▲믿음의 성숙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인데. 구원 받으면 끝나는 것이냐. (아니죠) 

천국갈 때까지 그 믿음을 이제 성장시켜 가야 합니다. 업그레이드 시켜야 합니다.

 

이 믿음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믿음을 업그레이드한다는 의미를, 이제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성도가 무엇을 믿는가, 믿음의 방향성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무도 결을 따라서 대패질을 해야 하잖아요. 속도보다 중요한 게 방향이잖아요.

 

아무리 좋은 스포츠카로 밟아도, 길을 잘못 들면 소용 없듯이

믿음이 "믿습니다"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제대로 된 믿음의 방향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도,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자기 감정이나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성품과 위배되는 기도를 하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대항 축구 대회를 합니다. 저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굉장히 많이 봤습니다.

A교회 B교회가 서로 충만해서 경기 전에 기도합니다. 찬송가도 부릅니다.

'승리는 내 것일세.' 어떤 사람은 우리가 블레셋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졸지에 다른 교회는 블레셋이고. 승리를 확신하고 된 줄로 믿습니다.. 라고 기도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그 양쪽의 교회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연습 열심히 하고, 잘하는 쪽이 이기는 거예요. 왜냐면 그 기도는 응답될 수가 없는 것이

'뿌린 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죠.

 

여러분이 시험 공부하지 않고 "믿습니다" 그러고 시험 치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실하게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인품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요한이 열불이 나서

"주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이 마을을, 그냥 프라이드 치킨으로 만들어버립시다. 확 태워버립시다."

하나님이 그 기도 이뤄주지 않았어요.

사랑의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품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여러분이 남을 망하게 해달라는 그 기도, 들어주실 수가 없어요.

욕심을 가지고 기도하면, 들어주지 않아요.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는 기도는, 아무리 강한 믿음이라도, 응답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달라고 하지 마시고, 내가 하나님의 편인가를 여러분이 체크하셔야 합니다.

 

옛날에 한나라당/열린우리당 시절이에요. 양쪽 의원들을 다 알았는데요.

다 기도해보니까 자기 당이 이기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예요.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한나라당에도 신자가 있고, 열린우리당에도 신자가 있는데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시면 안된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해요.

하나님의 의가 아닌 쪽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면, 그는 선거에서 당선 안 되어야, 하나님의 뜻이에요.

우리 당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하나님의 성품에 맞게 기도하는 것이죠.

 

 

◑2.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의 약속대로, 말씀대로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맥을 잡아서 믿어야만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긴 믿는데, 짜깁기해서 믿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성경 다 읽은 거 아닐걸요. 일부 구절만 선택적으로 믿은 것입니다. 

 

제가 그 분께 성경구절을 찾아줬씁니다.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순종하면, 내가 말씀으로 충만할 때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뤄지는 거지

앞부분을 잘라버리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이루리라.. 이게 아니거든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성경의 말씀에 맥이 아닌

말씀의 전체 흐름을 잡지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구절만 딱 뽑아내서

우리나라 사업체 시작할 때 크리스천들이 제일 많이 걸어놓는 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것은 욥이 고난 중에 있을 때, 친구들이 가서 아주 너 욥 좀 잘하라고 하면서 한 말이에요.

 

그 컨텍스트(상황)에서 쓰는 말이 아니거든요.

무슨 사업이든 크리스천이 열면 미약한 사업이 창대하게 되는 게 아닌데

말씀의 맥대로 믿지 않는 거예요. 그냥 내 아집과 욕심에 맞는 말씀을

문맥에 다르게 건져내서 그렇게 믿는 건, 믿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 충만해야 합니다. 제대로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의 맥을 붙잡고 발걸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가족, 나의 교회, 나의 직장에서 믿음을 발휘하기 전에

나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나가면, 하나님이 책임지세요.

 

말씀의 맥이 받치고 있는 건 하나님이 책임지시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내가 저지르고 망하고 나면

괜히 혼자 시험 들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내가 기도했는데..'

그것은 내가복음으로 믿은 거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잡고 한 게 아니에요.

 

내 욕심으로 저지른 일은, 여러분이 책임지셔야지, 왜 하나님께 책임지게 합니까.

기도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내 뜻대로 그렇게 저질러버린 일에 결과는, 자기가 책임지셔야죠.

 

 

◑3. 믿음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결, 말씀의 맥을 제대로 잡고 중요하다. 믿음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다음에는

믿음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같은 방향성을 잡았어도 큰 믿음 작은 믿음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고 하신 대상은, 대부분 뜻밖의 대상이에요.

성경을 잘 모르던 로마 백부장, 천대받던 이방 가나안 여인

이런 사람들에게 "너의 믿음이 크도다! 이렇게 큰 믿음을 보지못하였다" 하시고.

 

반대로 "믿음이 적은 자여, 네가 어쩌려고 이러느냐." 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 3년 제자 훈련을 받은 수제자 베드로였단 말이에요.

 

여기서 우리가 받는 교훈은, 교회 오래다녔다고 해서 큰 믿음 생기는 게 아니다.. 입니다. 

성경 많이 안다고 해서, 교회 측근자라고 해서 큰 믿음 있는 게 아닙니다.

 

큰 믿음은 어떤 것인가? 여러분 이왕 믿음을 가지려면 큰 믿음을 가지셔야죠.

왜냐면 큰 믿음은, 큰 은혜를 끌어내거든요. 큰 능력을 끌어내거든요.

크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가거든요.

 

<큰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신 로마 백부장의 말 속에

"큰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가 나옵니다.

 

눅7:6~8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 짧은 말 속에 완전 신앙 초보인 백부장의 말 속에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큰 믿음의 엑센트가 들어있어요. 잘 보세요.

 

1. 첫째 이 큰 믿음의 엑센트는 주제 파악입니다. 겸손이에요.

로마 백부장은 감히 자신의 집은, 예수님을 맞아들일 자격이 없는 집이라는 거예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니죠. 이 로마 백부장은 식민지 로마의 톱 장교거든요.

우리로 말하면 일제시대 그 지역 일본군 사령관과 같은 계급이에요.

 

그러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자의 집인데. 자랑스러워서라도

'우리 집 정도 되어야, 이 마을에서 예수님 모실 만하지..'

이 정도의 사회적 지위와 힘을 가졌는데, 로마 백부장은 인간적 시각으로 예수님을 본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모시기에는, 자신의 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이 말이 튀어나온 거죠.

 

여러분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높이는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기사를 부를 때 취하는 태도와

우리의 보스인 사장님에게 가서 해결해달라고 하는 태도가 달라요.

 

기사는 내가 부리는 사람이에요.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불러서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는 거. 사장님은 다르죠.

 

사장님은 어렵죠. 내가 가서. 사장님, 문제가 터졌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물어보면

사장님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대로 해결하게끔 처분에 나를 맡기는 거예요.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서

그 믿음은 하나님께 기도를 부리는 믿음이지, 주인으로 대하는 믿음이 아니에요.

겸손이 없는 믿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비서로 부리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에요.

 

'하나님 문제 터졌으니까 몇 시까지 이런 방법으로 해결해주세요.'

하나님께 지시하는. 알라딘 램프의 하인처럼 하나님을 부리는 기도.

그리고 안 들으면 막 시험 드는 거죠. 시험은 자기가 드는 거지, 하나님이 들게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믿음은 다른 거죠. 주님, 이 문제가 터졌네요. 주님 앞에 맡깁니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타이밍에 해결해주십시오. 자기 위치를 아는 게 큰 믿음이에요.

저는 여러분의 믿음이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백부장은 그런 겸손이 있었습니다.

 

2. 그리고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능력의 차원이 자신과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을 믿었어요.

예수님께서 오시겠다고 하니까 오지 마시라고, 말씀만으로 내 하인이 나을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대단한 믿음이에요.

 

그 때까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없었어요.

구약 시대에도 항상 선지자가 와서, 손을 대고 터치하면서, 물리적 공간 안에 같이 있으면서 낫게 했지,

시공간을 초월해서 말씀만으로 나을 거라는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가진 게 없어요.

 

그런데 백부장이 그 말을 하는 거예요. 또 무슨 얘길 하는 겁니까.

"나도 내 부하가 있어서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갑니다." 그 예를 왜 들었을까요?

 

예수님이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백부장이 아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병도 불경기도 예수님의 권위 밑에 있으니, 직접 안 오셔도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천지를 다스리는 문제 위에 있는 권위자이기 때문에 말씀만 하시라.

그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자신과 차원이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대단합니다. 여러분 인간도요, 인정 받을 때 좋아하잖아요.

하나님도 그러세요. 하나님을 하나님의 수준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을 대할 때 눈에 보이는 현상을 원해요.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라도 와서 직접 와서 손으로 만지고 기도하면 뭐가 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주님은 사차원적인 분이세요. 그분은 우리가 불러서 일 시키는 비서가 아니라

그 문제까지 하나님 권위 밑에 두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겁니다. 전능자이신 거죠.

 

그래서 우리는 보이진 않지만, 성령으로 말씀으로 그 분의 임재를 초청할 수 있습니다.

 

히11장 1절 말씀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과학이지 믿음이 아니죠. 큰 믿음은 능력이 있는 사역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헨리 블랙커비 목사님의 글에 그런 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사명을 주실 때, 이걸 하라고 사명을 주셨을 때

   그 사명은 분명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당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애초부터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사명을 주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사명이 내려오면 우리가 가진 자원을 봐요. 내 돈으로 택도 없는데. 내가 가진 사람들 할 사람 없는데.

   '시간 없는데. 나 건물 없는데. 재능 없는데. 주님 못하겠습니다.' 이건 뭐가 잘못된 거예요.

 

뭘 놓쳤냐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명을 주실 때부터, 우리 힘으로 할 거라 기대하지 않으셨어요.

우리의 능력이 이만큼인데 사명은 이만큼 줬단 말이에요.

 

무슨 말이겠어요. 하나님이 사명을 주시고나서 그 사명을 주실만한 능력을 너희에게 부어주겠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러므로 사명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큰 사명이라 할지라도, 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잠잠히 기다리면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전에 없던 능력의 축복을 받고 일어날텐데

우리가 너무 머리가 빠르고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 제가 있는걸로 못하겠습니다," 하고 거절해버리니까

하나님이 부어주시려던 능력이 돌아가버립니다. 순종할 다른 사람 없나 하고, 그 사람에게 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보기에는 "왜 저 사람은 하나님이 저 사람만 예뻐하지.

왜 나한테 없는 돈, 아이디어, 사람들이 다 저 사람에게 몰리지?"

왜냐면 그 사람은 순종하니까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은 처음부터 못한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안되는 거죠.

 

너희는 땅 끝까지 가서 제자 삼으라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셨을 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주셨을까요. 아니죠.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셨잖아요.

"네 힘으로 하지 말고, 가서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려라."

 

기도하며 기다린 그 120명에게만 성령이 왔고, 그 능력을 가지고.

처음에 그 사명을 들은 사람은 500명이었어요. 기다린 사람은 120명. 나머지 380명은 어디로 갔을까요?

 

똑똑한 강남 사람들이에요. 사명이 너무 크고 자신이 가진 능력은 짧으니까

머리 좋은 엘리트들 습관, 셀피쉬하잖아요. 못해요 그러고 도망가버렸어요.

 

그래서 우둔한 120명만 남아서 기도하다가 이 사명을 감당할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임한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역사의 주역이 되었어요.

 

여러분, 이게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주신다는 걸 믿는 거예요. 그게 완성된 믿음입니다.

 

완전 신앙 초보인 백부장이 이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수준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백부장은 예수님을 그렇게 인정해드린 거예요. 제일 대책 안 서는 분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도와줄지 가르쳐드리는 분이에요.

 

그건 마치 공부 못해서 공부 잘하는 애에게 물으러 가서

'이렇게 하는 거 맞지?' 하고 묻는 거예요. 처음부터 왜 왔냐는 말이죠.

 

운동 코치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서 나쁜 습관 배워서 온 사람.

그 나쁜 버릇 버리게 하는 게 더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지 상태의 어린 아이 가르치는 게 제일 쉽잖아요.

그래서 신앙 초보인 백부장에게 큰 믿음이 있는 거예요.

 

이 믿음은 커야 하지만, 동시에 순수해야 합니다. 순수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의심이라는 마귀에 넘어가면 믿음이 폭발하지 않아요.

 

야고보서 1장 6절, 7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마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기대하지 말라는 거예요. 의심했다고 하면.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고 하면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케 하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의심케 합니다. 그것은 다 마귀의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순수해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셔야 해요. 그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불신은 징계를 받아요.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엘리자벳은 나이 늙도록 아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오래 아기를 갖게 해달라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와서

너에게 아기가 생길 거라 그랬습니다. 가브리엘은 뭘 기대했을까요.

이렇게 오랜 기도에 대해 응답해줬으니까 나를 안고 뽀뽀라도 해주겠지.

 

그런데 사가랴의 반응은. 우리는 늙었는데 어떻게 생겨요.

지금까지 기도한 건 무엇이냐.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는데, 진짜 주시니까 놀란 거지요.

이럴 리는 없다고 놀란 겁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기도하면서도 실은 안 될거라 믿음으로 기도하고 계세요.

사가랴가 그랬던 거예요. 설마, 아브라함은 늙어서 애를 가졌지만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하고 생각한 거예요. 여러분 히브리서 11장 1절, 2절 말씀 다시 보세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구약, 신약에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써주셨겠는가.

그것은 구경만 하라고, 전설의 고향 보듯이 전래 동화 보라고 주신 스토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지금 너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라는 거예요.

 

"네가 바로 이 시대의 아브라함이다. 네가 바로 이 시대의 다니엘, 네가 바로 이 시대의 요셉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런 기름 부으심을 말씀을 통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읽어야 마음이 뜨거워지죠.

 

아브라함에 대해서 야곱에 대해서 모세에 대해서 여호수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축복을 받는데 불신하면 징계를 받아요. 사가랴가 이렇게 불신했기에

세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9개월간 벙어리가 됩니다. 좀 불편했겠죠.

이 징계는 이 사람을 저주하기 위한 징계가 아니라

이 사람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잠시의 불편함과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너 믿음 없으니까 취소. 이렇게 세례 요한이 안 태어난 건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감당할 만한 신실함을 갖추기 위해, 약간의 고난을 주십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은혜롭게 잘 감당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의 갈등> 문제를 조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부모 사가랴만 탓할께 못 되죠.

우리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고 싶다는 믿음의 사명을 주실 때

우리는 백프로 믿음의 갈등에 부딪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고 싶지만, 내 안에 생각이 너무 많아요.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이 너무 힘들어요.

75세의 나이에 고향 땅 떠나는 게 쉽습니까. 아들 자식 다 데리고.

그리고 그 나이에 아들 준다는 약속 믿기 쉽습니까. 25년이나 걸렸는데, 나중에. 진짜 아들을 받기까지.

 

아브라함은 의심과 갈등이 많았을 겁니다 성경에 안 나왔을 뿐이지.

이 갈등을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그냥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부부가 결혼을 하면 부부싸움, 안해요? 해요. 그런데 신혼부부들이 이걸 못 견딥니다.

우리가 허니허니 그러면서 결혼했는데. 왜 싸울까. 우리는 미스테이크가 아닐까.

 

그러나 부부싸움 해요. 부부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케하는 의도가 있는데

그것을 믿고 이 싸움을 당연시 받아들이면서

'이건 내 자아가 너무 세서 그렇구나'

해가 가면 아름다운 성숙의 열매가 나오듯이, 믿음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은 언제나 우리를 믿음의 갈등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중요한 건 이 믿음의 갈등 상황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잘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믿음의 갈등 상황으로 우리를 밀어넣으시는 것을

우리 인격 속의 어떤 모난 부분을 다루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조급하게 인간적인 무리수를 두면 안돼요.

 

이 갈등 상황을 견디지 못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무리수를 두죠.

'왜 애가 안 생기지. 하나님이 분명히 우리 남편을 통해서 내게 아들을 준다고 하셨는데 안 생기는 이유는,

나 때문인가? 남편의 아들이니까 혹은 내 배를 통해서 나올 필요는 없잖아.

그럼 나보다 젊은 여종 하가를 통해서 남편과 동침시켜 낳게 하면 되겠다.'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태어난 거예요.

그렇게 사라가 조급하게 머리 굴려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두고두고 이삭과 갈등관계가 되고

삼천 년이 넘도록 아랍과 이스라엘 민족의 중동의 화약고를 만들어버렸어요.

 

여러분, 믿음의 갈등상황에서 우리가 기도하면서 묵상해서 성령의 인도를 밭아야지,

순간적으로 머리 굴려서 요령 불리면 반드시 이스마엘 사건 같은게 터져요. 사태가 더 악화되는 겁니다.

 

'갈등'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Crisis는, 결정 Decision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믿음의 갈등 상황은 우리가 어떤 결단을 내려야하는 전환점입니다.

이 전환점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쓰임받는 일꾼이 되느냐,

아니면 그냥 살던 그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일과는 상관 없는 사람이 되느냐. 이걸 결정 짓죠.

 

모든 것이 안정적이던 아브라함에게 75세의 나이에 너의 고향을 떠나라고 했을 때

내가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순순히 참 좋은 말씀입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다음 주에 또 예배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그 다음날 짐을 싸고 떠난 거에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은혜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하는 것 믿지 않아요.

내 몸이 지금 인생을 어떻게 결정했느냐가 내 믿음의 간증이에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대한 간증이에요.

 

   토니 컴파울러 목사님 설교 끝나고 어떤 분이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너무 좋은 설교였어요, I was challenged, 도전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컴파울러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Stop being challenged, 이제 도전 그만 받으시고 Be changed. 변화 되었다고 하십시오.

   그게 내게 주는 최고의 칭찬일 것입니다."

 

▲믿음의 갈등 속에서 몸이 움직이고 있어요. 순종 Action 하고 있어야 해요.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 해줄 것이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면 된다.. 그게 아니죠.

 

믿음의 응답은 순종이라는 바구니에 담겨서 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순종이 정말 쉽지 않은데도, 마음의 갈등 속에 있더라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을 20대에 막 들어선 그 청년 이삭을

지금 막 유학 보내고 군대 갔다오고 파릇파릇한 이 꽃같은 청년을

모리아 산에 가서 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 어느 부모가 쉽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많이 울었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몸은 그러나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사흘 밤낮을 걸어가면서 얼마나 갈등이 많았겠어요. 마음은 괴롭지만 그의 몸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순종은 내가 백프로 확신이 있어서, 백프로 성령 충만하고 그래서 하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20~30%만 확신이 있고, 70%는 갈등과 고민이 있어도

그래도 몸이 움직이고 있어야 그게 저력인 거예요. 그게 믿음이에요.

 

내 감정과 이성은 아직 갈등 상태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몸이 순종하고 있을 때

그 몸을 움직였기 때문에 내 감정과 이성에도 불구하고 움직였기에

순종할 때 비로소 깨닫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어떤 주일학교 교사가 어느날 안 나왔어요. 왜 그랬냐 했더니

   자기가 요즘 몸도 아프고 요새 성령 충만치 못하고 이런 상태에서

   오늘 가서 가르친다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위선은, 내 마음이 아닌데도 내 체면을 의식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위선이지만

   내 몸과 마음이 힘들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기에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은, 순종이지 위선이 아니다.

 

여러분 한 홍 목사는 매주 백프로 성령 충만해서 설교하는 줄 아세요? 저는 부부싸움 안 할 것 같아요?

저한테는 10대 골룸 오크들이 안 들이받을 것 같아요?

저는 운전하다가 난폭 운전기사가 확 들어올 때 화 안 날 것 같아요?

저는 감기 안 걸려요? 저는 몸 피곤 안 해요?

이천 명 있는 교회에서 성도들끼리 교육자들끼리 힘든 상황 없을 것 같아요?

백프로 성령 충만한 그런 상황은 1년 52주 중에 1주일 정도 됩니다. 그리고 그게 이번 주는 아닙니다.

 

그럼 내가 오늘 마음이 안 따라주니 설교하는 것 위선이야 그러고 설교 안 해버릴까요? 그건 아니죠.

오히려 이렇게 힘든데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니까 설교하니, 이렇게 여러분 은혜 받고 있잖아요.

정말 아닌 것 같아도 몸이 따르는 대로 했는데, 그게 뜻밖의 영적인 폭발을 일으키는 때가 있어요.

 

지난 겨울 12월달에 부흥회를 결정하고 했을 때는,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어려움이 왔을 때에요.

그런 상황에서 부흥회를 해야 하나. 그런데 하니까 영적인 먹구름이 싹 걷히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늘 안내하시는 분들 다 성령 충만해서 안내했을까요?

아마 오면서 부부싸움한 부부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 분들은 훌륭하죠. 이게 위선입니까? 아니에요,

믿음의 순종이에요. 할렐루야 하면서 일하다 보면 부부 싸움이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믿음으로 찬양을 했는데 어느 순간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내 마음에 은혜가 온 거에요.

변한 거야. 그래서 믿음의 갈등 상황에서 중요한 건 몸을 움직여서 계속 순종하는 것이구요.

 

이 때 중요한 건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과 하나님의 방법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존중하는 거예요.

때로는 우리가 응답을 바랐는 대도 이게 응답인 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생각한 각본대로 응답이 안 왔거든요.

 

예를 들어 하나님 우리 아이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는데 아이가 대학에 떨어졌어요.

그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가 하면 그게 아니에요.

그 대학에 떨어진 대신 다른 대학에 가서 다른 전공을 하게 되었는데

훗날에 보니 그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믿음은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 박사 학위 시작할 때, 제가 가서 사역하고 싶은 교회가 있었어요.

좋은 교포 교회였어요. 그런데 거기서 못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모든 상황이 엉키면서 동부로 이사를 가고 삼 년을 더 있게 되고 굉장히 힘들어졌는데

동부로 삼 년 살다와서 거기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한국에 와서 더 좋은 교회로 올 수 있었고

더 좋은 사역의 찬스를 삼 년 있다가, 다른데서 만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지난 14년 동안 하나님의 복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 때는 내가 원했던 대로 응답받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제게 오신 거예요.

믿음의 갈등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점점 성장시켜 가십니다.

 

아브라함이라고 처음부터 믿음이 강했던 게 아니에요.

여호수와라고 해서 처음부터 백프로 강한 믿음으로 시작한 게 아니에요.

 

아까 믿음의 갈등 상태 말씀드렸죠.

여호수와가 여리고 돌진할 때 백프로 이길거란 확신을 가지고 한 줄 아세요? 아니에요.

기도해보니까 조금 불안했죠 여호수와가.

 

뭐 날라오는 거 아니야. 이러면서 갔지만. 여호수와의 힘은 그 불안과 의심을

그래도 믿음으로 몸으로 움직여서 이겼다는 거예요.

작은 승리를 경험하고 나니까 더 큰 것을 도전할 수 있었죠.

 

그래서 Every crisis will give you different kinds of bless.

모든 역경을 뚫고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차원의 축복과 능력을 받고 나와요.

 

그래서 믿음의 역량이 커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믿음의 여정에서 오늘의 일을 어디에 인도하심에 따라 결정하지 않거든요.

 

여호수와가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방법과 아이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이 달라요.

여호수와가 이걸 모르고 교만해서 똑같은 방법으로 노력하다가 처음에 실패했잖아요.

어제 성공했던 일이나 다른 교회에서 성공한 일이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쓰고 싶어하는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Your faith used to be freshed. 믿음이 그래서 신선해야 합니다.

 

내가 신선하게 믿는 것만 하나님이 책임지세요. 그러나 내가 안 믿는 것만큼은 내가 책임져야 해요.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하셔도 되지만, 책임질 자신 없으면 많이 믿으세요.

 

내가 믿는 것만큼 하나님이 책임지세요.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만큼 평안함과 담대함이 와요.

내가 책임지는 것만큼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와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커질수록 평안해지고 담대해지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세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해도,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아무리 많이 다녀도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어떨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나요?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드리는 믿음. 하나님을 비서가 아닌 내 주인으로 인정해드리는 믿음.

그것을 발휘할 때 하나님은 너무 너무 기쁘셔서 다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주시는 거예요.

 

성령의 임재를 주시고 능력을 부어주시는 거예요.

다같이 교회 다니고 신앙 생활 하지만, 모두가 맥시멈 크리스천이 되는 게 아닙니다.

큰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한번 예수 믿는 인생, 큰 믿음으로

맥시멈 크리스천의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