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 요 5:25
박봉수 목사
일전에 {Ministries Today}라는 잡지 2001. 1. 2월 호를 뒤척이다가 눈길을 끄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잭 훼이포드 목사가 쓴 “God Still Speaks”(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신다)라는 글입니다.
이 글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성경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 바울에게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훼이포드 목사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우리가 지금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식의 질문에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첫째, 신비주의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당이 점을 치듯이 매사 신비적인 어떤 영감을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둘째, 주관주의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나 모두가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진리를 따르는 대신 주관적인 느낌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셋째,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특별한 은사를 받았거나 주의 종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고 오해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거부감 때문에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식의 표현을 금기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정통보수 신학자라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소위 ‘기적 종식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으며
오늘날 개신교 성경 66권인 정경의 기록이 끝이 났기 때문에
더 이상 성경 외적인 특별 계시가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어거스틴은 뛰어난 지성을 가졌지만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도 괴로워 친구가 선물로 준 성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웃 아이의 음성 같은 것이 들려왔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마치 노래처럼 그 마음 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어거스틴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닫고 성경책을 폈는데 마침 롬 13:13-14을 읽게 됐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도 정확하게 지금 자신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이 때의 체험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더 읽을 필요가 없었다. 이 말씀은 광명한 확신의 빛으로 내 마음을 비추어 내 속에 있던 모든 의심의 어두움을 물리쳐 주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철저하게 회심하여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번민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에 순종하다가 놀라운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생각해 보니 저도 이런 체험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제가 진로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 상도중앙교회에서 제게 청빙 제안을 해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을 때 제 마음 속에 “가라!”는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음성인지 여부를 확인하지 못해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전에 섬기던 교회의 한 여집사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다른 교회로 가시려고 기도 중이시죠?” 물론 이 모든 사실은 저와 제 아내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때입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제 꿈을 꾸었는데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을 하시더라구요. 예배 후에 교인들 악수하시는 모습을 보았어요.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지금 기도하고 계신 그 교회로 보내신다고 하셨어요.”
너무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절차가 잘 진행되어 제가 우리 교회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이 분이 임직식에 다녀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바로 꿈에서 본 그 교회가 상도중앙교회였어요...”
저는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제게 직접 말씀하셨고, 제가 제대로 그 말씀을 받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또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계 2:11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 55:3을 보면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성경 말씀 중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적고 있습니다. 수 많은 성도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할 때 주님의 음성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주님의 음성이라고 할 때 입으로 나오는 육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영이시라서 사람의 육성이라는 형태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성의 형태로 말씀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매우 드물고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이라고 말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뜻과 지혜를 드러내시는 모든 방법을 주님의 음성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와 교통하시는 방법 전체를 말합니다.
삼상 3:4-8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랐습니다. 제사장 엘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제대로 응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뜻과 지혜를 드러내시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는 동안,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성경 말씀을 암송하는 동안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 중에 특정 구절이 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때론 갑자기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죄를 생각나게 합니다. 때론 어떤 창조적인 생각들을 불러일으킵니다. 때론 큰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때론 새 힘을 얻게 해 줍니다. 내 영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둘째, 설교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설교 시간에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강력한 도전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급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채워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 영이 설교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셋째, 성령의 말씀하심을 통해
우리가 기도 중에, 찬양 중에, 골똘한 묵상 중에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강력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미래를 가슴으로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 영이 이 시간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넷째, 환경과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만나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우연히 지나치는 말로 던지는 말일 수 있지만 우리가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건 사고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질병을 통해서 경제적인 큰 실패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내 영이 이런 일들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주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어떤 경우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특별한 경우 눈을 뜨고 있으면서 환상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내적인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으로 들을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내 영이 주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자연을 통해서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찬송가 499장 1절을 보면 이렇게 작사되어있습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길 때 주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 영이 자연 현상 속에서 성령의 인도로 주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알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제대로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피터 로드 목사가 쓴 {Hearing God}(하나님의 음성 듣기)라는 책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로드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목사님 뒤 뜰 덤불 속에 18가지 귀뚜라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귀뚜라미라고 나는 이 집에 오래 살았지만 귀뚜라미 소리를 의식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 청년은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곤충학을 전공하는데 사람의 귀로 200가지 이상 서로 다른 귀뚜라미 소리를 분별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분별해 보니 지금 뒤뜰에 18가지 서로 다른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드 목사는 뒤뜰에 그렇게 다양한 귀뚜라미가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전혀 듣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기를 이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을까요?
첫째, 들을 귀를 준비해야 합니다.
막 4:9을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주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정말 그 말씀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들을 귀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계 2: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교회가 세워진 뒤에 성령께서 교회에게 계속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귀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들을 귀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미는 더듬이를 잃으면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TV라고 해도 안테나가 없으면 제대로 프로그램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영적인 더듬이, 영적인 안테나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한 복판에서 세속적인 삶을 산다면 우리의 영적 안테나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죄와 짝하며 산다면 우리의 영적 더듬이는 더 이상 제 역할을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왕상 19:12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여기에 세미한 소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영어 성경에는 'still small voice'라고 나와있습니다. 정말 작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쉽게 듣기 힘든 소리입니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만 들을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집중하는 사람들만 들을 수 있습니다.
삼상 30장을 보면 다윗이 아내들과 자녀들을 아말렉에게 빼앗긴 뒤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가 묻습니다.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다윗은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셋째, 분별해야 합니다.
요일 4:1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음성을 들었을 때 이것이 정말 주님의 음성인지 여부를 시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마음으로 듣는 음성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우리 영이 듣는 음성을 말합니다.
둘은 사탄이 주는 음성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달콤한 음성으로 유혹했습니다. 주님께서 금식하신 뒤에 세 가지를 시험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달콤한 음성으로 유혹합니다.
셋은 자아의 소리입니다. 자기 자아 저 깊은 곳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옵니다. 욕망의 절규가 들려옵니다.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남학생이 여학생을 흠모했습니다. 그 여학생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여학생을 만나서 다짜고짜 말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학생은 남학생이 본래 기도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어서 그 말을 믿고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찜찜하지만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그것이 정말 주님의 음성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선 성경 말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 위배됨이 없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교회의 덕을 세움에 위배됨이 없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다시 모두에 말씀드린 내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잭 훼이포드 목사가 던진 질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신비주의에 빠질 수도, 주관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탄의 소리와 자기 내부의 욕망의 소리와 혼돈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그런 말이 있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 자동차가 사고가 많고 위험하니까 자전거만 타고 다닐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은 자칫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주님의 음성 듣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여전히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 기도/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삶을 살게 하소서.
들을 귀를 주시고,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분별을 잘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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