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현대신학 입문서

하나님아들 2024. 5. 15. 16:21

현대신학 입문서

titolo : discussione di teolgia moderna

edicatore : 두란노(protestante)

autore : 목창균

 

현대 신학의 흐름 : 자유주의 신학. 신 정통주의. 근본주의 및 최근신학으로 분류

 

제 1장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19세기 신학 :  1799년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출판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  의 신학(현대주의 신학. 신 개신교 신학 칭) 독일 신학계 주도 ➡ 1920년대까지 유럽 신학계 주도 ➡ 1930년대까지 미국 신학계를 주도했다.

 

1.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배경

 

1. 계몽주의

버나드 램 교수는 계몽주의가 현대 정신과 신학에 미친 영향으로 일곱가지 지적

역사주의 : 객관적이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만을 진리로 인정하려는 사상. 이것은 성서의 역사적 자료에 대한 신뢰성과 사실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자유주의의 발생을 촉진 시켰다. 이것들은 사회. 윤리 및 영적 가치를 결정하는 지금까지의 삶의 양태와 가치 기준을 변화시켰으며 성서적인 세계관과 과학적인 세계관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따라서 창조와 타락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는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자연 세계에 대한 과학적 탐구 결과를 수용하고 방법을 신뢰하여 성서와 종교 연구에 사용했다.

비평주의 : 모든 사실과 자료들의 확실성을 의심해 보거나 분석, 또는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고등 비평이란 이름아래 성서 비평이 시작되었다. 성서 비평은 기독교가 계몽시대의 새로운 학문과 학문 방법에 적응해 보려는 시도였다.

합리주의 : 이성의 완전한 능력을 강조하여 이성을 최종적인 권위와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고 이성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론, 동정녀의 탄생. 기적 등의 교리에 문제시

관용주의 : 절대적 진리(verita di assoluteza)를 주장하지 않고 계속성의 원리를 강조하는 것. 이것은 자유주의가 인간과 자연 세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인간과 하느님의 연속성과 기독교와 타종교의 공통성을 주장하고 기독교를 다른 종교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도록 했다.

낙관주의 : 인간과 인간의 미래를  신뢰하여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며 세계가 계속적으로 좋아지고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이것은 당시의 평화적인 분위기, 급속한 산업화, 민주적인 정치 구조, 역사의 진행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 과학에 대한 신뢰 등에 기인되었다. 이런 낙관적 정신에 근거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원죄 교리를 거부하고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계몽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은 칸트의 비판철학이다. 칸트는 초자연적인 종교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단지 이성의 한계 내에서 가능한, 종교만을 논함으로 종교를 도덕 화 시켰다. 칸트의 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할 정도로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트뢸취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 특히 자유주의 신학이 종교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은 칸트의 영향이었다.

 

2. 경건주의

18세기와 19세기 개신교 고회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또 다른 사상 운동이 경건주의이다. 경건주의는 사상의 체계이기보다는 감정의 체계이며 신학적 분위기와 종교적 부흥운동이라 할 수 있다.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페너는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복음적 교회의 개혁을 위한 열망」을 저술하고 이 책에서 성서의 진지한 연구, 평신도의 교회 행정 참여, 기독교인의 실천적 삶이 교리 지식에 대한 본질적인 보충 물이라는 것, 이단자들에 대한 혹독한 처벌, 수사학적 설교를 순수하고 신앙심 있는 설교로 대치할 것을 제의함

경건주의의 특징 - 첫째,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했다. 의인, 중생, 성화를 교리로만 취급하지 않고 실제로 체험해야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지식보다 오히려 실천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 행위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다고 비판받을 정도로 선행강조

셋째,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종교의 개인화를 목적으로 삼았다. 경건주의 자들은 세계를 기독교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혼만을 구원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넷째, 강력한 헌신 생활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중시하는 친교의 원리를 강조했다.

경건한 무리의 모임으로 교회를 간주하고 하느님과의 내적인 연합과 중생의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은둔하여 함께 더불어 사는 특수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 경건주의는 칸트, 헤르더, 슐라이에르마허, 헤겔과 같은 이에게 영향을 줌. 또한 19세기 개신교 사상의 재구성에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3. 낭만주의

18세기를 지배하던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우주관을 거부하는 또 다른 흐름이다.

1790년대 루쏘와 레씽에 의해 독일에서 시작되어 18세기후반과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 문학, 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독일 낭만주의는 헤겔, 쉘링 등과 같은 철학자와 슐라이에르마허, 코러리지, 뉴우맨같은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Ⅱ.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르네상스(rinascere)로부터 시작된 현대 정신은 18세기 유럽의 지성계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것은 과학적이며 낙관적인 세계관을 형성했으며, 과학적 경험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가 그 특징이었다. 이 현대적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성서의 확실성과 가치를 집중 공격하였다. 이러한 위기에서 현대 세계에 존립할 수 있는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디에서 그 토대를 발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슐라이에르마허(1768-1834)였다. 계몽주의의 종교 연구는 그 본질을 종교 현상에서 발견하려 함으로써 종교를 도덕으로 환원하거나 철학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바로 이즈음 슐라이에르마허는 계몽주의 종교관의 비판을 출발점으로 종교의 직접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도덕 화되고 이성 화되었던 계몽주의 시대의 종교관에 반기를 들고 직관과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주장하여 종교의 독자성을 확보한 것이 그의 공헌

그는 신학적 관심의 방향과 출발점을 자아에로 향했다. 그는 신학의 토대를 신조, 교의 또는 성경 본문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 혹은 기독교인 자기 의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래의 신학이 단순히 권위에 대한 호소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경험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했다.

슐라이에르마허 신학의 의의 : 첫째, 그것은 현대 세계의 도전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응답이다. 그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삼고 현대의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재 진술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둘째, 인간의 주된 경험을 신학의 주된 자료로 받아들임으로써 신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셋째, 그는 흔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창건 자로 불려질 만큼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나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후대 신학이 인간 중심적이 되거나 인간학 화 된 것은 그의 방법적 오류에 기인함이 적지 않다. 그가 신학을 계시의 연구가 아닌, 인간의 자기의식 또는 종교성의연구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Ⅲ. 자유주의 신학의 조류와 특징

1. 신학 조류

자유주의 신학의 조류 : 슐라이에르마허 ➡ 리츨 ➡ 트뢸취 ➡ 하르낙 등 독일 신학계를 지배해온 신학전통을 가짐

자유주의 신학의 세 가지 흐름

첫째, 슐라이에르마허로 대변되는 감정의 신학이다. 그는 비록 학파는 형성하지 못했지만 신학적인 면에서 19세기가 그의 세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향은 막대하다. 바르트에 따르면 그의 영향은 대단하며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이것을 거부할 수 없으며 그들은 단지 그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둘째, 헤겔 철학에 기반을 둔 역사 비평적 신학 또는 헤겔 학파의 신학이다.

칸트 이후 서양 철학은 헤겔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본래 철학자였으나 그의 철학이 곧 신학이라 할 정도로 신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공헌은 역사 철학에서 발견되는데 역사는 그 자체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변증법적으로 진보적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을 신학에 도입하여 성서와 기독교의 본질 연구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사용한 헤겔 좌파에 속하는 스트라우스, 바우르, 바이세, 비더만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현대 사상과 과학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여 전통적인 기독교를 포기하거나 수정하려 했다.

셋째, 칸트 철학에 기반을 둔 리츨학파의 신학과 트뢸취의 종교사학파의 신학이다.

리츨은 칸트의 추종자로 그의 비판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 현상계와 본 체계의 구분, 하느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한계성, 도덕과 종교의 일치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수용했다. 그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리츨의 사상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리츨이 형이상학적 신학을 거부하고 경험에 호소한 것은 그와 유사하다. 그러나 중대한 차이점은 그는 신학을 그리스도인의 의식이 아닌 역사적 계시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리츨은 복음이 로마 카톨릭, 신비주의, 경건주의, 낭만주의 등으로 인해 변형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종교 개혁적인 이해로 재해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의 목적은 종교 개혁자의 길을 통해 신약성서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리츨과 더불어 기독교의 윤리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주류가 되었다.

리츨의 학파 형성 : 헤르만- 하르낙- 고트쉬크- 카텐부쉬- 숄츠 등에 계승됨

한편 19세기 마지막 10년 간 독일에서 발전한 종교사학파(궁켈)가 있다. ➡ 트뢸취

이 학파는 세계 모든 종교를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과정을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비추어 연구하려 했다. 복음서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요소를 고대 근동의 신비종교로부터 들어온 것이라 하여 제거해버렸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에서는 1929년 경제 대공황 이후로 자유주의 신학은 쇠퇴하였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새로운 신학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인간 이서의 능력, 낙관주의, 역사적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파괴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은 그 사상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능력에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것이 위기의 시대에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는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

따라서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하나님 중심주의로의 전환이 신 정통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붕괴된 이후에도 그 영향력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인간의 경험을 중시하는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등 급진신학이 오늘날도 자유주의 신학의 맥을 잇고있다.

2. 신학조류의 특징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세 관심 :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논의를 통해 여러 가지의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과 특색

첫째,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었다. 성서나 신조를 신학의 출발점이나 궁극적 규범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인간의 종교적 의식을, 리츨이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경험을 신학의 근본적 자료로 간주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둘째,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공관복음서의 자료에 근거하여 역사상의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와 구분하려했다. 특히 역사 비평적 신학파는 신앙의 그리스도는 후대 교회가 부가한 것으로 취급하고 역사적 예수를 회복시키는데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의 탄생, 부활, 승천과 같은 전통적 교리를 포기했다.

그리스도를 인간의 원형이나 모본으로 봄으로써 인간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완전한 신 의식을 가진 분으로, 그리고 리츨은 탁월한 도덕적 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이해했다.

셋째, 하느님의 내재성을 강조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무한하고 완전한 하느님과 유한한 세계사이의 분리를 주장했으나, 자유주의 신학은 세계 내에서 하느님의 활동과 임재를 강조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하느님과 세계, 이성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타종교간에 연속성이 있다하여 종교적 관용의 태도를 취했다.

넷째, 낙관주의적 인간관 주장

다섯째, 기독교의 윤리적, 사회적 의미 강조, 현재의 세계와 인간의 상황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도덕과 종교의 일치를 주장한 칸트의 영향이며 특히 리츨학파, 종교 사학파, 사회 복음주의 신학파에서 현저했다.

여섯째, 현대 과학과 기독교의 교훈을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여 과학의 업적뿐 아니라 과학적 탐구 방법을 수용하여 성서 비평은 이러한 방법으로 시도

결론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 신학이 되었고 기독교를 윤리 종교로 격하시킴.

신 정통주의자 틸리히가 유럽에서 “개신교는 죽었다. 개신교 신학의 마지막 200년은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외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건전한 신학은 성서, 전통, 이성 및 경험이라는 신학의 네 가지 근원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다룸에 있어 성서는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전통은 또 어떻게 해석하며, 이성은 어떻게 체계화하고 있는지, 존재론적으로는 과연 어떻게 인간 경험에 관련되어 있는지 제시해야 한다.

오늘의 급진신학은 성서와 전통을 희생시킬 만큼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중시했던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의 몰락을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제2장 슐라이에르마허 1 : 감정의신학

생애 : 그는 19세기의 교부로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한편 대 이단자로도 비판받고 있다. 특히 칼 바르트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반면에 바르트는 자신의 이층 집 계단에 슐,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는데 그의 영향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예이다. 시카고 대학교수 게리쉬는 슐의 영향은 어거스틴, 어퀴나스, 루터, 칼빈 대열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신 정통주의자들과 바르트는 슐이 루터와 칼빈으로 소급되는 상속선을 파괴했다고 주장하며 특히 바르트는 칼빈, 루터, 사도 바울로 이어지는 위대한 전통에이르는 길을 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비난했다.

1768년 독일 블레슬라우에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출생, 아버지는 프러시아의 군목

1785년 모라비안 교단 신학교에 입학하여 철저한 신학적 훈련받음. 개인의 경건함 강조

이런 이유로 학생들이 근대 문학이나 철학 서적 독서를 금지, 그러나 슐은 비밀 그룹을 만들어 읽었다. 그에게도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회의하는 신앙의 위기가 왔다. 그것은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 칭한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죽었다는 대속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러한 신앙적 회의로 슐은1787년 신학교를 중퇴하고 할레 대학에 입학했다. 재학 3년 내내 그는 신학보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의 철학에 몰두하여 지적으로 성장했지만 철저한 신앙생활은 못했다. 신앙적 회의로 건강이 악화될 즈음 그는 아저씨의 강력한 권유로 신학고시를 치러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아버지 친구의 소개로 부유한 집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침체되었던 신앙생활도 가정교사 생활을 통해 점차 회복되었다. 그는 2차 신학고시에 합격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병원 원목으로 일했으며 그의 30세 생일을 맞아 젊은 지성인의 모임에서 책 한권 내지 않고 있는 그에게 저술을 부탁해 나온 책이 1799년 출간된 「종교론: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에 대한 변론」이었다. 이 책에 염두에 둔 독자, 즉 종교를 멸시하는 지성인들은 슐에게 책을 쓰도록 권했던 바로 그 친구들이었다. 그의 첫 저서이자 하룻밤사이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종교론」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언서로 평가되었다.

50세 이후 신학부 교수로 재직할 때 헤겔은 철학 교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둘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헤겔은 종교의 본질을 하느님께 절대의존 감정이라고 정의한 슐을 비판했다. 헤겔은 개가 사람이 하느님보다 인간에게 절대 의지하므로 개가 가장 종교적 동물이라고 비판했다. 베를린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1834년 급성폐렴으로 운명하였으며 고린토전서 11장을 인용한 후 “이 성서의 말씀에 나는 굳건히 서있다. 그것들은 내 신앙의 근거”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역사가 랑케에 따르면 그의 장례식에는 2만명정도의 추모 인파가 몰렸다 한다.

Ⅱ. 신학적 배경

종교적 배경 : 개혁교회적인 모라비안 경건주의에서의 교육

철학적 배경 : 할레대학시적 칸트 연구와 플라톤사상

사상적 배경 : 베를린의 자선 병원 원목시절 젊은 지성인들과 교제를 통해받은 낭만주의

Ⅲ. 감정의 신학

1. 신학 방법론

2. 그리스도론

슐의 신학적 통찰의 중심을 이룬 문제는 그리스도론이었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그의 그리스도론은 “교회적인 그리스도를 현대 정신에 수용하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나 그가 이에대해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만도 아니다. 그의 그리스도론의 몇가지 특징

첫째, 역사적 계시보다 기독교인의 경험, 의식에 의존하고 있다.

둘째, 그는 그리스도의 원형적인 인간으로 이해했다.

셋째, 요한 복음을 선호하였는데 공관복음보다 오래되었고 목격자의 눈으로 기록되었으며 예수의식이 진정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믿었다.

넷째, 교회의 전통적인  용어나 성서적인 용어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했다.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를 거부하고 신성이라는 표현대신 그리스도의 신의식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아닌 인간적 탄생을 주장했다. 그의 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그리스도론은 인간학적인 지평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예수의 생애에대해 최초로 공개 강의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의 생애 연구가 성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속죄론

교부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속상금의 지불로 간주하는 교부 속상설(ransom teory)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중세에는 안셀름의 만족설(satistaction teory)로 대변되는 속죄의 객관적인 견해와 아벨라드의 도덕 감화설(moral influence teory)로 대변되는 주관주의적인 견해가 대립했다. 종교 개혁시대에는 안셀름의 만족설을 수정 보완한 루터와 칼빈의 징벌 대속설(penal sustitution teory)이 제시되어 개신교 속죄론의 근간이 되었다.

슐은 그리스도가 인간이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았다는 징벌 대속설과 그러므로 하느님을 만족시켰다는 만족설과 같은 전통적 견해를 거부했다. 그에 있어 속죄는 하느님의식이 자기안에 출현하여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은 완전한 하느님의식을 가진 그리스도가 믿는 이들에게 자신의 하느님의식을 나눠주는 것이다. 그의 구속 능력이 그리스도의 특정 행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그의 인격 속에 있다고 보았다.

4. 죄론

그는 성서에 근거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인의 종교적 의식, 즉 내적 경험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설명하고자 했다. 죄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하느님의식에 나타나는 반대물이나 장애물을 죄로 정의했다. 우리는 하느님의식이 우리이 자기의식을 고통으로 결정할때마다 죄 의식을 가진다. 그러므로 죄는 영에대한 육의 대하이다. 육과 영의대립은 인간안에 쾌락과 혐오감을 일어나게하는 것과 하느님의 의식을 일어나게 한ㄴ 겆ㅅ 사이의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슐은 죄와 악의 근원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들에 비판적이었다.

뿐만아니라 하느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며 죄의 원인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남용이라는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적인 인과율과 인간의 자유라는 양자 사이에는 긴장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 하나를 수용하고 다른 하나를 거부함으로써 그 긴장 관계를 해소하려고 한다면, 마니교같은 이단적 견해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우리의죄가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윌의 존재 밖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의식한다.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이해 일어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인과율에 근거한다. 죄 의식 없이는 결코 은총에 대한 의식을 가지지 못하므로 하나님은 은총과 병행하여 죄의 존재를 규정했다. 슐은 전통 신학과 다른 죄관을 제싷T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불순종이나 불충성, 하느님께로부터 돌아서는 해위, 심지어 사탄에 속박당하는 것도 죄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죄가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부터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 곧 하느님과의 관계의 혼란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죄의식을 무력한 신 의식과 동일시했다. 이 무력한 신의식을 인간에게 죄가 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명령적이며 효력 있는 의지이다. 따라서 죄의 원인을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서 찾은 겆ㅅ이 슐의 죄관의 특징이며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개념이 그의 죄론의 핵심이다.

결론

슐의 세가지 오류가 지적된다. 범신론, 주관주의 및 불가지론이 그것이다. 특히 슐의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소위 그의 범신론이다. 그는 종교론 출판이후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당시 사람들은 슐에게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그를 범신론자로 간주했다.

심리적 주관주의는 인간의 감정을 종교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종교적인 경험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따라서 그는 신학은 종교적인 감정에 대한 설명이며, 하느님은 단지 신자의 경험에서만 알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그가 현재 자유주의 신학의 토대와 기본적인 전제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객관적인 계시를 등한시하고 주관주이적인 경험을 중시한 그의 견해는 신학의 객관적인 토대를 거부하는 한편, 하느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포기한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또한 그는 불가지론자로 비판 받는다. 그는 하느님의 본성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론에서 우주르르 종교의 대상으로 간주했으나 그 본질을 체계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의식 속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을 감정에 의해 감지할 뿐이며 하느늼의 본질에 대해 탐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불가지론으로 평가된다.

슐로부터 사실상 현대신학이 시작되고 있음에도 비판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 방법론상의 오류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는 성경, 신조믿 교리를 신학의 토대로 삼는 전통적인 신학과 달리,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과 현실 상황을 신학의 기본 자료로 삼았다. 이것으 srP시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간의 종교적인 의식 연구로 신학을 전락시켰다. 따라서 슐은 그가 도달했던 결론이 아니라 그가 택했던 방향에 의해서, 그리고 제시한 대답이 아니라 그가 제기한 문제에 의해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누리는 것이다

 

3장 슐라이에르마허 2: 범신론 논쟁

서론

종교론을 비롯한 초기 저서에서 범신론적인 경향이 없지 않았으나 말년에 대폭 수정했다. 그렇다면 범신론자라는 꼬리표를 계속 달고 다니는가? 그의 신관을 보자

Ⅰ. 하느님의 내재성과 초월성

하느님이 누구인가를 나타내는 것은 신학 용어로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본질 또는 속성을 의미한다. 그 가운데서도 내재성과 초월성은 하느님과의 세계의 관계를 나타내는 속성이다. 내재성은 세계안에 계신 하느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 인간 본성 및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임재와 활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초월성은 세계 밖에 계신 하느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자연, 인간 및 역사로부터 독립된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이 세계와 관계하는 이 두 가지 측면을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신관은 달라진다. 유신론, 범신론, 이신론이 그것이다. 유신론은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범신론은 초월성을 부정하고 내재성만을 강조하는 반면, 이신론은 내재성을 부정하고 초월성만 강조한다. 서양사에서 범신론을 최초로 제시한 대표적인 인물은 스피노자이다. 그는 이 세계에는 단 하나의 실체가 있다. 실체는 독립적으로존재하며 그 자체를 통해 이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ㅣ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이 실체가 곧 하느님이요 자연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연과 하느님을 동일시 했다. 단 이름만 다를 뿐이다.

따랏 그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별하는 기독교 전통적인 신관을 거부했다. 하느님과 자연의 관계는 “생산하는 자연”과 “생산된 자연”의 관계이다. 생산하는 자연은 증동적이며 창조적인 자연을 의미한다. 모든 만물을 생기게하는 생산적인 힘이다. 생산된 자연은 피동적이며 일정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자연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하느님이 곧 자연이라는 범신론적 세계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내재성과 초월성을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현대 신학에서 내재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예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 20세기 폴 틸리히, 사신 신학자 등을 들수 있다. 틸리히는 자유주의와 정통주의의 중간 입장을 취하면서도 하느님의 내재성을 강조했다. 범신론이 아니라 만유재신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입장은 하느님과 세계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것이다. 세속화 신학의 극단적인 형태인 하느님의 죽음의 신학 역시 하느님의 내재성을 강조했다. 죽음이라는 것은 초월적인 하느님의 죽음을 말한다. 하느님은 한때 초월적으로 존재했으나 이제는 그 지위를 포기하고 자연과 인간안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한편 초월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예로는 19세기 키에로케고르, 20세기의 바르트, 희망의 신학자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몰트만이 주장한 희망의 신학은 하느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우주적인 면이 아닌 역사적인 면에서 고려했다. 하느님의 초월성은 공간적이 아니라 종말론적이다. 따라서 희망의 신학은 우주적 형이상학적 하느님의 초월성 대신 역사적인 초월성을 강조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하느님의 초월성보다 내재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슐로부터이다.

 

스트라우스(가리옷 유다)

개신교 신앙 진리를 철학적으로 표현한 헤겔은 1831년, 그리고 그의 사상적 맞수이자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슐라이에르마허는 34년 세상을 떠났다.

19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신학은 헤겔 사상에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에의해 주도되었다. 튀빙겐 학파의 창시자 바우르와 그의 제자 스트라우스, 스위스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 비더만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헤겔 좌파에 속하는 신학자이다. 따라서 합리주의 신학이라고 불리운다. 또한 이들의 신학은 역사 비평적 신학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들이 한결같이 역사적 비평을 신학과 성서 연구에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역사 비평적 신학의 특징은 역사학의 타당한 원리들을 성서 연구에 적용시킨 rt과 역사 비평적 연구의 결과를 기독교 본질을 파악하는 원리와 신학 재구성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역사적 비평은 루터의 성서 주석으로부터 시작되어 역사 비평적 신학의 시조로 간주되는 제믈러를 거쳐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하나의 신학적 흐름을 형성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여금 역사적 연구를 하도록 자극을 한 사람이 바우르와 스트라우스였다.

특히 그의 예수전은 역사 비평적 성서 연구의 전형이다. 스트라우스는 스승이자 동료였던 에센마이어에의해 “우리시대의 가룟 유다”로 취급된 사람이며 스트라우스가 만년에 이르러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인연을 끊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평가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생애: 1808년 독일 스투트가르트 근처에서 생. 스트라우스는 튀빙겐 대학교에 진학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스트라우스는 쉘링과 헤겔의 철학과 뵈메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1830년 자격시험을 거쳐 목사 안수를 받았다.1831년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의 강의을 청강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으나 헤겔이 콜레라로 사망하여 못하였다. 스트라우스는 신앙론 출판이후 신학과 신학자와 인연을 끊었다. 그는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고 작가. 칼럼니스트, 문학 비평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872년 고향에서 플라톤의 “파이돈”등의 책을 읽으면서 생을 마감했다.

Ⅱ. 신화적 성서 해석

그는 예수전에서 복음서의 이야기에 대해서 철저한 역사 비평적 연구를 시도했다. 그가 역사 비평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 복읍서 이야기에서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신하적이라고 판단될 수 밖에 없는 요소들을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 이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성립되어 예수와 결부되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가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신화적인 해석방법이었다. 그는 부활이야기를 초기 기독교인의 문화적 의식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이는 신화의 개념을 복음서의 초자연적 요소에 적용시킨 것이다. 그는 예수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에서 역사적인 것으로부터 비 역사적인 것을 구별하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소극적 기준과적극적 기준이다. 전자는 기록된 방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즉 기적을 말하며 후자는 특별한 유형의 기적 즉 신화를 의미한다. 신하는 전설의 무의식적인 창조력에 의해 형성되고 하나의 역사적 인물 속에서 구체화된 종교적 관념들은 역사적인 이야기 형태로 표현한 것을 의미한다. 복음적 신화는 그의 최초 추종자들의 관념의 산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신화를 순수 신화와 역사적 신화롤 나누었다. 그 한나는 변화산상의 이야기와 같이 당시 유대인의 메시야 개념과 기대로부터 기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운명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이야기와 같이 예수의 인격, 행동, 또는 운명이 남긴 특정 인상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역사적 신화는 종교적인 열광주의에 의해 채택되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발췌된 대념들로 꾸며진 특정 사실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이야기와 같이 역사적 사실들이 불가사의한 일로 바뀐 것 들이다. 신화적인 해석은 스트라우스의 독창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제물러, 바우르, 파울루스등이 구약성서나 예수의 탄생과 부활기록에 이 방법을 적용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신화의 진정한 개념을 파악하거나 그것을 일관되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스트라우스의 공헌은 그의 역사 비평적 방법을 복음에 철저히 적용한 것이다.

Ⅲ. 예수전 논쟁

그는 예수의 생애에 관한 모든 복음서 기록에서 신화적인 요소가 발견된다고 보았다. 예를들어, 예수의 수세(受洗)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모두 신화로 꾸며져 있다. 그의 세례에 앞선 이야기들(마1-2장,눅1-2)은 구약 성서의 서술 형식을 본받아 메시아적으로 해석되는 구절들을 고려하여 엮은 것이다. 예수와 세례 요한이 만나게 되기 때문에, 이에 앞서 그들의 부모가 서로 관련을 가진 것으로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게되었다. 예수가 세례직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면서 그의 메시아됨을 세례 요한에게 계시한 이야기는 비역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후 요한이 그의 메시아됨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광야헤서 받은 시험 이야기 역시 구약 성서로부터 암시를 받아 맞추어진 원시 기독교적 전설이었다. 그가 처음 제자들을 부른 것도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른 방식을 본따서 꾸민 것이다. 치유이야기는 일부 사실일지라도 대부분 전설이다. 스트라우스는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인이 믿는 신앙의 그리스도를 철저히 구분했다. 예수 사후 그의 추종자들은 그에게 무의식 중에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속성을 부여했으며 메시아에 관한 구약 성서의 구절들에 근거하여 이상화된 그리스도상을 형성했다. 스트라우스 역시 요한 복음서를 예수에 대한 역사적 자료라기보다는 오히려 초기 교회의 신학을 위한 자료로 취급했다. 그것은 헬라 사상으로부터 로고스, 선재성, 신의 아들등과 같은 개념을 도입하여 예수를 신격화한 것이다.

맥그래트에 따르면 스트라우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현대의 기독론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첫째, 기독교의 교리적 진리는 본질상 철학적인 것이며 역사적 사건과 필연적으로 관련된 것이 아니다. 둘째, 나사렛 예수의 탐구에대한 복음서 이야기를 탐구하는 것은 신학적 작업이 아니라 역사적인 작업이다. 역사 비평적 작업만이 복음서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을 확립할 수 있다. 셋째, 복음서 저자들은 그 당시의 신화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복음서 이야기들은 신화적 요소로 가들차 있다.

스트라우스는 헤겔 철학을 신학적 토대로 삼은 헤겔 신학파의 대표자였다.

 

5장 죄렌 키에르케고르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개괄하다 보면 자유주이 신학 전통과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정통주의 기독교에 비판적이었던 신학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의 신학이 그것이다.그는 덴마크가 낳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인 동시에 19세기 최대이 기독교 사상가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생전보다는 오히려 사후에 인정 받은 사상가였다. 42년의 짧은 생을 살았음에도 30여권의 저서와 많은 유고를 남겼다. 그의 사상의 중요성이 20세기 초 하이데거나 야스퍼스 같은 철학자와 바르트나 브룬너 같은 이들을 통해 발견되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그의 특수한 생애로부터 형성되며 그의 사상은 그의 생애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Ⅱ.실존과 역설

1. 실존의 개념

그는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을 사상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이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실존 개념을 사용했다. 헤겔은 사유와 현실을 동일시하여,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케고르는 헤겔은 모든 것을 추상화함으로써, 그의 사유의 세계속에는 보편성만 존재하고 개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헤겔에 있어서, 개별적 존재는 참되거난 이성적이지 못한 추상적 존재자인 반면 보편만이 구체적이며 참된 존재이다. 추상적 관념만을 중시하고 실재의 사실을 무시하는 헤겔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 실존이다. 헤겔은 존재라는 말을 사상가의 사유와같이 관념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반면, 케고르는 존재를 이 세계에 실제로 생존하고 있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이해했다. 케고르는 인간의 존재양식을 실존으로 보았다. 따라서 실존개념은 그에게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변형시킨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진실한 인간존재, 곧 실존은 하느님 앞에 홀로서는 단독자였다. 단독자는 그의 사상의중심 개념이었으며 사람들에게 단독자가 되도록 일깨우는 것이 저술활동의 목적이었다. 그는 사람이 단독자가 되는 길을 세 단계로 생각했다.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 그것이다. 각 단계는 삶과 삶의 목적에 대한 태도에 의해 특징되는 인간 실존의 종류를 나타낸다.

세 번째단계는 종교적 실존이다. 종교적 실존의 초점은 고난이다. 윤리적 실존으로부터 종교적 실존에 이르는 경계선이 유머(humer)이다. 유머는 바울의 표현대로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것”(로마7:19)을 의미한다. 종교적 단계에 이르기위해 유머를 거처야 한다는 것은 절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과 함께 형성되는 종교적인 실존은 절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면서 신앙이 일어나게한다. 여기서 그는 역설의 개념을 사용했다. 다른 실존이 단계는 인간 스스로 도달할 수 잇으나 종교적 실존은 하느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해의 영역을 떠난 이 역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그는  영원한 진리는 객관적ㅇ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으며, 실존적 또는 주관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만 존재하신다. 하느님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의 행동을 취해야 한다. 따라서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이다. 여기서 진리는 주관이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나왔다.

2. 역설의 개념

 

6장 알브레히트 리츨

서론

리츨은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 전통이 가장 탁월한 대표자로서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흐름을 대변했다. 리츨은 계몽주의를 극복하려는 이전의 모든 새도들을 거부하고 오히려 계몽주의의 이론적이며 실천적인 철학을 수용했다. 그는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칸트의 사상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삶의 실천적인 이상으로 해석했다. 신 정통주이 신학자인 바르트와 브룬너는 리츨이 고전적 기독교를 완전히 이탈했다고 비판했다.

리츨은 당시 기독교가 성서적이며 종교 개혁적인 모습을 상실하고 다른 형태로 변형되었음을 지적하고 칸트와 슐라이에르마허이 사상 체계에 근거하여 종교 개혁적인 기독교를 회복하려고 했다.

Ⅰ. 사상적 배경. 독일 생

 

7장 에른스트 트뢸취: 종교사학파의 대표자

19세기아 20세기 신학 사상의 중요한 연결 고리중 하나가 트뢸치이 신학이다.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츨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유주의 신학과 사고의 틀 속에 활동하는 한편. 트뢸취는 19세기 자유주이 신학의 “종착점“ 또는 가장 위험한 대표자로 취급된다.

그는 19세기 마지막 10년간 독일에서 발전했던 종교 사학파의 대표적 조직 신학자였다.

특별 계시에 근거하여 종교 문제를 해명하는 초자연주의적 입장을 거부하고 역사적 연구에 이해 종교를 이해하는 상대주이적 입장을 취했다. 기독교의 절대성 문제는 그의 일생의 관심사였다. 그의 사상은 치근 들어 종교 철학, 역사 철학, 종교 사회학등으 ㅣ분야에서 재 발견되고 있으며, 종교 다원주의 의 태동가 함께 기독교의 절대성에 관한 그의 견해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신학 방법론은 역사적 방법이었으며, 그의 신학은 종교사의 신학이었다. 필자는 먼저 역사적 방법과 종교사의 신학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을 개괄하고,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상대주의적 입장과 이를 둘러싼 기고교의 절대성에 대한 신학 논쟁이 어떠했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1. 생애와 저작

1865년 독일 아우그스부르그 근처에서 의사의 아들로 생. 그는 칸트, 피히테, 슐라이에르마허를 집중 공부했으며 신앙과 지식의 화해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리츨로부터 지식과 신앙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많은 학자로부터 공부했다. 한편 그는 괴팅겐에서 구약성서 학자 궁켈, 신약성서 학자 브레데 등과 깊은 친교를 가졌다. 종교를 역사의 발전 과정으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이 기원 역시 고대 종교들, 특히 후기 유대교의 관점에서부터 연구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의 외적 환경과 배경에 관심을 갖는 비교의 학적이며 사회학적인 방법으로 성서를 연구했으며 전통적 성서 연구를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종교사로 전환시키려 했다. 이들 학파가 종교사학파였다.

트뢸취는 1891년 박사학위를 받고 게팅겐 대학과 본대학에서 강사생할을 잠시 했다. 그후 1894년 29세에 하이델베르그 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21년 동안 조직 신학을 가르쳤다.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베를린 대학 교수로 초청받았고 1923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를 목적으로쓴 논문이있었으나 그의 사망으로 직접 발표하지 못했다. 그의 조직 신학 강의록이 사후에 신앙론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Ⅱ. 역사적 방법과 종교사의 신학

1. 역사적 방법

트뢸취는 인간사에 대한 역사적 견해란 역사적 방법의 원리들에 의해 상세히 진술될 수 있으며 종교 문제 역시 역사적 연구에 이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적 방법의 기본 원리: 비평, 유비, 상관관계

비평은 모든 자료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모든 결론을 새로운 증거의 조명에 의해 검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비평의 원리는 역사의 영역에는 단지 개연성의 판단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유비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는 원리를 전제로 한다.우리가 직접 경험한 사건들은 과거의 사건들과 본질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결과를 예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비평과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유비의 사용이다. 유비는 역사적 비평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

상관의 원리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이전의 다른 사건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전체 역사는 이런 내적 관계의 조직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모든 역사적 구조와 사건들응 다른 것과의 관계, 더 나가서 역사 전체와의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방법의 특징은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는 것이다. 역사적 상대주의는 트뢸취의 결정적인 사상을 이룬다.

그의 방법론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고와 역사적 방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기독교 역시 전체 역사의 일부로 간주하고 모든 종교 및 문화현상에 적용용된다고 언급했다. 기독교의 본질은 단순히 그 기원을 관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전체 역사적 발전을 관찰함으로써 결정된다. 트뢸취는 전통 신학의 교의학적 방법을 역사적 방법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취급했다. 교의학적 방법은 특별계시와 기적에 근거한다. 그긋은 역사적 사건들의 동질성과 기독교와다른 종교들의 유비를 부정하며 기독교를 유일하고 절대적인 종교로 간주한다. 반면 역사적 방법은다른 종교를 구별하기 보다는 오히려 동질적인 현상으로 본다. 모든 종교가 초자연적이며 구속적이며 계시에 기초한 것으로 간주한다. 모든 종교들은 종교적 직관 또는 신적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일반적인 학문과 구별되는 기독교 신학 특유의 방법을 주장하는 교의학적 사고를 거부하고 모든 학문에 통용되는 보편화된 방법을 주장하는 종교사적 사고를 신뢰했다.

2. 종교사의 신학

종교사학파는 성서적 종교가 다른 종교들과의 접촉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들 입ㅈㅇ하려 했으며 종교사의 보편적 발젖 내에서 기독교의 타당성을 확립하려 했다. 따라서 종교사학파는 종교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한편, 종교다원론적 입장에서 역사적이며 비교 종교학적 방법으로 종교들을 탐구하려고 했다.

Ⅱ. 기독교의 절대성 논쟁

트뢸취는 하느님의 계시가 모든 인간과 종교에 보편적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기독교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위대한 계시인 것처럼, 다른 종교도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이처럼 다른 종교이 상대적 진리성을 인정한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어떤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트뢸취에 따르면, 기독교이 타당성은 기독교가 모든 종교들 가운데 “인격주의적 종교이해의 가장 강력하고 가장 농축된 계시”라는 데에 있다. 그는 기독교의 절대성은 부정했으나 우월성과 규범성은 인정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강연하기 위해 집필한 기독교와 세계종교(1932)에서 그는 기독교가 철저히 역사적, 상대적 현상이라는 것을 재확인 했다. 또한 모든 종교는 제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기독교는 서구인들에게는 훌륭하고 유일한 종교이다. 마찬가지로 힌두교는 인도인들에게 훌륭한 종교이다. 타종교들 연구는 절대적 타당성에대한 그들의 주장 역시 참되다는 것을 나에게 점점 더 확신시켜 주었다. 나는 특히 불교와 힌두교가 참으로 인도적이며 영적인 종교이며 기독교와 같이 그 신봉자들의 내적 확신과 헌신에 호소할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주장하기를, 모든 종교가 알려지지 않은 어떤 피안의 세계에 공동적인 목적을 두고 같은 방향으로가고 있으며 신적인 정신안에 공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그가 기독교 절대주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종교적 상대주의를 철저히 신뢰했다는 것을 명시해준다. 타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 자유주의 신학이 도달하게되는 막다른 골목이 트뢸취의 입장이다. 기독교의 절대성에관한 트뢸취의 견해는 종교사적 관점의 학자들이나 20세기 종교다원론자들에의해 크게 환영받았다. 반면 정통주의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로부터는 그의 규범을 “그리스도없는 기독교”라고 비판했다.

그가 제기한 기독교의 절대성 문제는 20세기 후반들어 종교 신학 또는 종교 다원주의란 명칭아래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트뢸취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논쟁의 불길을 당긴 사람으로 평가된다.

결론

슐라이에르마허 ➡ 리츨 ➡ 트뢸취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신학의 마지막 주자였다. 그는 종교사학파의 대표적인 조직 신학자로서 역사적 방법에 근거하여 신학적 과제를 재구성하려고 했다. 그의 신학은 철저하게 역사적 사고와 역사적 방법에 기초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종교사의 신학이라 불린다.

트뢸취의 문제점

1. 기독교의 역사성만 인정하고 절대성은 부정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양면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역사성만을 강조했다.

2. 트뢸취의 신학은 성경본문이나 신조보다는 종교철학과 종교학에 기초했다. 따라서

3. 그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주장했다. 예수의 자기의식에 대해서만 강조했다.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 신학계를 지배했던 자유주의 신학은 1차세계대전을기점으로쇠퇴하였다.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가반인 이성의 능력과 낙관주의, 역사적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1차대전을 통해 허구로 판명됬기 때문이다.

 

8장 칼 바르트1:

20세기 최대의 신학자로 바르트를 꼽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는 20세기 신학계를 주도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창시자요 현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은 개신교 뿐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황비오12세가 그를 “토마스 아퀴나스이후 최대의 신학자”로 평한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신학적으로 19세기가 슐라이에르마허의 세기였다면 20세기는 바르트의 세기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르트는 19세기 방법론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Ⅰ. 생애와 저작

1886년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하여 개혁교회적인 신앙 환경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저명한 보수주의 신학자 프리츠 바르트였다. 바르트는 아버지가 교회사와 신약성서 교수로있던 베른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특히 칸트와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에 흥미를 가졌다. 바르트의 신학교육은 주로 독일에서 이루어졌다. 1909년 목사로 활동 그리고 1911년부터 10년동안 스위스의 작은 공업도시 자펜빌에서 목회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신학의 대가 하르낙과 헤르만으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자유주의를 신봉했다.

그러나 바르트가 자유주의와 결별하게된 결정적인 요인은 1차세계대전이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지성인93명이 독일황제 카이젤 빌헬름2세의 전쟁 정책이 기독교 문명의 방어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지지하는 성명서를 냈다. 하르낙이 그것을 기초했으며 헤르만등 자유주의 신학자 다수가 서명했다. 바르트는 그들이 「지성인의 선언」에 서명한 것은 잘못된 신학과 철학에 근거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을 더 이상 따를 수 없었다. 자유주의적 기독교와 역사에대한 외경은 더 이상 청중들의 반응을 일으킬 수 없다고 믿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등의 영향으로 신약성서, 특히 바울 서간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1919년 출판된 「로마서 주석」 성경에 대한 재발견의 결실이었다. 로마서 주석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핵폭탄이 떨어진 것과 유사하다. 1921년 괴팅겐 대학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무명의 목회자에서 20세기 신학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1925년 뮌스터 대학에서 교의학 및 신약 성서 주석학 교수가 되었으며 1932년 사망때가지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바르트는 그에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으며 복음교회를 장악하려는 나찌의 시도에 반대하여 고백교회 운동을 전개했다. 바르멘 선언은 그의 주도로 나온 것이다. 이로인해 1935년 본 대학 교수직에서 해임되었고 독일에서 교육과 출판을 금지당했다. 추방된 바르트는 스위스로 돌아와 1968년 사망할 때까지 바젤대학교수로 여생을 보냈다.

Ⅱ. 하느님 말씀과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1. 하느님 말씀의 신학

2.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9장 칼 바르트2:

1차대전으로 자유주의와 합리주의가 쇠망하자 이러한 상황에서 20세기 초에 나타난 새로운 신학 사조가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것은 “위기의 신학”,“변증법적 신학”“하느님 말씀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위기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과 명령아래 놓여 있다는 것과 계시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다는 의식으 가져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계시와 인간 사이의 모순과 대립을 지적한다. 그리고 양자 사이의 무한한 차이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변증법적 형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변증법적 신학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이해 사이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적 관계에서파악한다.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하고 사람의 말을 중시한데 비해, 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한편 루터와 칼빈주의적 정통주의 신학과도 다르고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도 다른 점에서 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대표적 신학자가 바르트와 브룬너이나 자연신학의 견해차이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된다.

Ⅰ. 바르트와 브룬너

Ⅱ. 일반계시와 자연신학

Ⅲ. 자연신학 논쟁

 

10장 루돌프 불트만: 양식사 비판

서론

불트만이 평생 과제로 삼았던 신학적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대인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전달되어야 하는가 였다. 불트만은 두가지 접근 방법을 통해 이 과제를 수행하고자 했다. 신약성서의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분석이 그것이다. 전자가 소극적 방법이라면 후자는 적극적 방법이다. 비신화화는 1세기 신화적 세계상과의 관계에서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이 세계상이 신약성서에 포현된 실존에 대한 이해에 얼마나 불필요한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즉 신화적 표현이나 사고로 둘려싸여 있는 복음의 진리를 그것으로부터 벗겨내는 것이다. 실존론적 분석은 1세기의 개념, 언어, 의미들을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고 안간 실존의 현실 상황에 일치하는 용어들로 전환하는 것이다.

시신화화론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 비견되는 파문을 신학계에 던졌다. 비신화화논쟁은 1941년에 독일 루터 교회 내부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럽 대륙의 신학계에 널리 전개되었다. 1952년 독일 루터교회 총회는 그의 학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1950년대는 비신화화 논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찬성과 반대를 둘러싸고 열띤 존쟁이 일어났다.

Ⅰ. 생애와 저작: 1884년 독일 올덴부르그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Ⅱ.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

그의 신학적 발전은 자유주의 신학적 배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궁켈, 하르낙, 헤르만등 당대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 맡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일어난 변증법적 신학운동에 참여한 이후에도 자유주의 신학의 합리적인 방법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하이데거 철학을 도구로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신학인 실존 신학을 형성했다.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대인에게 어떻게 전달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신약성서 학자로서의 자신의 평생과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초기에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양식사 비판(form criticism)과 종교사적 접근 방법을 수용했으며, 이에 기초하여 후기에는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 방법을 개발했다. 양식사 비판은 구전 전승들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문학 해석의 방법이다. 성서중에는 문학 양식과 고대 근동의 문헌들을 문학 및 역사적 비교, 검토하여 그 사상의 유래가 어디에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궁켈이 이 방법을 구약 성서 연구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는 근동 문화를 연구하여 창세기의 배후에는 당시의 이교문학이나 신화로부터 유래된 것이 많으며 시편 양식들이 종교 의식상의 특정 축제난 마술적인 제례에서 근원한다고 주장했다.

 

양식사 비판에 따르면,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구전 즉 원래의 복음인 케리그마가 있었으며, 초대교회가 그것을 필요에 따라 가감하여 보존한 것을 편집한 것이 복음서였다는 거이다. 예를들어 예수를 인자(the sun of God), 메시아등으로 부르고 부활과 승천 사건을 첨가했다. 따라서 양식사 비판은 복음서 기록 배후에 있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구전 문학 양식을 연구하고 평가하는 방법이다. 그 목적은 초대 교회 교인들이 첨가한 내용과 재해석한 것들을 제거하고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구전의 원형태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 불트만의 초기저서 「예수」에 반영되어 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 연구에 종교사적 접근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에 독일 괴팅겐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한 종교사학파의 방법이었다. 종교사학파는 성서학을 주로 한 학파로서 성서의 외적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희브리종교와 고대 근동의 이방종교 및 헬라종교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세계 모든 종교를 역사 발전과정에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비추어 연구했다. 이 학파는 복음서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과 같은 초자연적 요소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여러 신비종교로부터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온 것이라 하여 제거하려 했다. 불트만은 신약성서 연구에 이 연구 방법을 도입하여 발전시켰다. 즉 그는 성경의 개념과 교훈을 고대 문화의 배경과의 관계성 속에서 해명했다. 기독교는 주변 정황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에 영향을 받은 역사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후기에 불트만은 비신화화와 실존론 적 해석을 통해 신약성서를 연구했다. 그는 신약성서가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했다. 신약성서에는 케리그마라고 불리는 복음의 진수와 신화적인 성격을 가진 세계관이 있다.

 

신약성서의 신화적인 요소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쩨, 하늘의 존재가 세상 속에 임재하는 극적 이야기이다. 초대 교회는 예수의 근본적인 의의를 설명하고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 이전에 있었던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를 수용하였다. 이것은 지상에 와서 계시를 전하기 위해 인간으로 나타난 하늘의 존재에 대한 극화 적인 이야기이다. 이 신화는 기독교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 한 것이다.

둘째, 과학 이전의 우주론이다. 신약성서 저자들의 세계관은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세계가 3층, 즉 하늘과 땅과 땅 밑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땅은 인간의 자연스런 생활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고 하늘은 하느님과 천사들이 사는 곳, 땅 밑은 음부, 즉 고통의 장소이다. 그들은 인간의 삶과 역사의 진행은 선과 악의 초자연적 힘에 의해 지매된다고 믿었다. 땅은 “초자연적인 하느님과 그의 천사들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사탄과 악마의 활동무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죽음, 부활도 신화적인 세계관에 의해 표현된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  하느님을 인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 즉 저 세상 적인 것을 이 세상 적인 것으로,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트만은 이런 신화적인 표현이 현대인에게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신화적인 개념은 신학적으로 지지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신화적인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 이전시대의 우주론이다.

불트만은 현대인이 신약성서의 케리그마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신약성서를 현대인의 과학적 세계관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성서의 비신화화이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신약성서에 대한 해석의 방법이다. 그것은 초월적인 것을 이세상의 것으로 말하는 것이며, 성서의 진리에 대한 당시의 해석을 현세의 해석으로 고치는 것이다. 케리그마를 그 신화적 윤곽으로부터 벗겨 내는 것이다.

이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제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불트만이 신화를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실존적 해석이다. 신약성서의 사명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 즉 인간의 실존적 자기 이해에 있다. 따라서 불트만은 케리그마가 아닌 신약성서의 신화 역시 우리의 실존을 위해 어떤의미가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의 본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는데 있지 않고 자기가 살고있는 세계에서 인간의 자기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가 아니라 마땅히 인간학적으로 또는 실존적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과거의 사건이나 신화론 적 사건이 아닌, 영원한 현재적 사건으로 해석했다. 현재 우리들의 삶과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가건인 것이다. 그는 대속 적인 속죄론이나 만족 설과 같은 전통적인 해석과는 달리, 세상에 대한 심판가 인간에 대한 심판과 구원을 십자가의 영원한 의미로 간주했다. 기독교의 부활절 신앙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구원 사건, 즉 실존적 체험으로서 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매일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실존론 적 해석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보다는 오히려 그 사건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건의 교리 적 내용보다는 오히려 인간 실존과의 관계성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결론

불트만은 어떻게 하면 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성경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는 관점에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것은 신앙과 이해문제였다.

 

11장 폴 틸리히: 철학적 신학

서론

독일 태생의 미국 신학자요 철학자로 위대한 현대 기독교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비판가들도 그의 사상과 저술이 20세시 기독교 사상에 끼친 탁월한 공헌을 인정하고 있다. 틸리히이 신학은 경계선상의 신학, 철학적 신학, 문하의 신학으로 특징 된다. 그는 자신을 독일과 미국, 철학가 신학,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등 다양한 영역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중재하여 종합하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틸리히는 니버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그이 사상의 많은 부분이 루터 신학에 의존하고 있고, 변증법적 신학의 초기에 틸리히가 바르트의 협력자로 자신을 간주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의 입장은 변증법적 신학가 자유주의 신학의 중간이다. 전자는 신과 세계의 분리를 주장하고 신의 초월성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신과 세계의 종합을 주장하고 신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틸리히는 양자의 충돌을 극복하는 중재와 화해 그리고 종합이라는 제3의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곧 철학적 신학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했으나 결코 자유주의를 완전히 거부한 것이 아니라 성서 비평과 역사 비평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의 공헌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했다.

Ⅰ. 생애와 저작

1886년 독일 브란덴베르그에서 루터 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할레 대학에서 칸트, 피히테, 슐라이에르마허, 헤겔, 쉘링 등을 공부했는데 쉘링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쉘링의 종교 철학에 대한 두 논문은 그의 철학적 신학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중요한 개념중 많은 것을 쉘링으로부터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1912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목으로 입대했다. 4년간  군목생활은 그의 생애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수많은 전상자를 돌보며 수백 건의 장례를 집례하면서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체험했으며,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다.

1951년 같은 대학 철학 교수이던 하이데거와의 교제를 통하여 그의 실존 철학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통이 된 직후, 틸리히는 종교 사회주의 에 가담하고 저서 「사회주위자의 결단」에서 나치의 정치 이념을 공박했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수많은 저술과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Ⅱ. 상관의 방법

틸리히의 신학 방법론의 핵심은 상관 방법이다. 이것은 철학과 신학, 종교와 문화 가운데 어는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편을 조정하고 중재하여 양자 모두 수용하는 신학 체계를 건설하려는 방법론이다. 상관의 방법은 한마디로 철학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메시지와 현대 상황을 결합하는 방법이다. “상황 속에 암시된 질문을 메시지 속에 암시된 대답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즉 상관 방법은 질문과 대답, 상황과 메시지, 인간 실존과 하느님의 계시를 서로 관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 목적은 기독교 신앙과 현대 문화사이를 중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관 방법은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틸리히는 그의 저서「조직 신학」에서 이 상관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실존적인 질문이 일어나는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고 기독교 메시지에서 사용된 상징이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조직 신학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이 신학의 과제를 상황에 대해 대답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틸리히의 신학을 상황 신학(situation teolog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메시지와 상황의 상관성을 강조하는 틸리히의 신학은 자유주의와 정통주의 및 근본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틸리히에 따르면 신학은 그 기초가 되는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진리와 이 영원한 진리가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시대적 상황, 즉 메시지와 상황이 그것이다. 신학은 항상 이 양자 중 어느 하나를 희생시킴으로 균형을 일을 위험성이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상황을 강조한 나머지 메시지를 희생시킨 반면, 정통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은 메시지를 강조한 나머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Ⅲ. 궁극적 관심과 새로운 존재

1. 궁극적 관심

2. 새로운 존재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 상황을 분석하고 해결책으로 새로운 존재의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의 실존 해명이 그의 죄론이며, 새로운 존재의 개념이 그의 기독론이다.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 상황을 소외의 상태로 규정하는 한편,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새로운 존재의 지참자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실존한다”(to exist)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밖에 선다”(to stand out)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비존재로부터 나와서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철학은 실재를 본질과 실존 두 측면으로 나누었다. 플라톤은 실존을 단순한 의견이나 악의 영역이요 참된 실재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 반면, 본질을 참된 존재요 영원한 이데아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실존을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전락되거나 참된 본질성을 상실한 것으로 이해했다. 한편 이와 다른 견해가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에 제시되었다. 그것은 본질과 실존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실존을 인간이 우주를 지배하고 변화시켜야 하는 장소로 보는 것이다. 플라톤이 본질로부터 실존으로 옮기는 것을 전락이나 타락으로 취급한 것과는 달리, 그것을 발전과 실현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헤겔이다. 그러나 헤겔 철학을 비판하고 인간의 실존 상황을 본질적인 성격으로부터의 소외상태요 불안의 상태라고 주장한 것이 10-20세기의 실존주의였다. 틸리히는 실존주의의 입장에 근거하여 실존의 상태를 소외상태로 규정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거, 다른 존재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인간이 실존한다는 것은 그의 본질적인 상태, 즉 참된 존재로부터 이탈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틸리히는 이러한 소외의 관점에서 죄를 재해석했다.

실존적 소외는 인간에게 죽음의 두려움, 죄책감, 무의미와 절망을 가져다준다. 틸리히에 따르면, 인간은 율법, 금욕, 신비, 경건 등의 방법을 통해 실존적 소외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와 같은 종교적 또는 철학적 노력은 소외상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인간의 실존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새로운 존재에 의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새로운 존재를 그는 바울 서간에 근거하여 이를 설명한다. 새로운 존재는 단순히 옛 존재와 대치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해, 재결합, 부활을 의미한다. 이것이 새로운 존재이다. 즉 본질과 실존의 분열이 극복된 상태이다. 그는 이 새로운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그의 실존 상황 안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과 하나되어 사신 분이었다. 예수그리스도는 실존적 삶과 분리되지 않았다.(모범이)

틸리히의구원은 새로운 존재의 능력을 통해 인간의 실존적 쇠외를 치유하는 것이다. 소외상태에 있던 인간이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의 새생명의 능력에 참여할 때, 실존적 소외가 극복되는 구원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는 구원 사건의 세 측면을 새로운 존재에로의 참여가 중생(rigeneration)이며, 새로운 존재의 수용이 의인(gustification)이며, 새로운 존재에 의한 변화가 곧 성화(sanctification)이다.

Ⅳ. 신학 논쟁

그의 사상이 일으킨 논쟁을 통해 현대 신학에 대한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상관의 방법이며, 틸리히 연구가들이 그의 가장 큰 공헌과 업적으로 지적하는 것도 신학 방법론이다.

이 상관의 방법에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한 것은 바르트였다.

첫째, 상관 방법은 하느님의 계시가 아닌 인간 상황에 대한 질문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있으므로 인간 중심적인 자유주의 신학에로 복귀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인간에게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계시가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다. 상관 방법은 인간의 상황으로부터 나온 질문의 대답을 계시에서 제시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대답이 질문에서 나올 숭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전자의 비판에 대해 틸리히는 상관의 방법이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을 인간에게 의존될 수 없지만, 자신을 나타내는 계시에서는 불가피하게 인간이 응답하는 방식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후자의 비판에 대해서는 기독교 신앙이 기초하고 있으며 인간의 실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계시 사건에서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제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또 다른 논쟁은 신학과 철학의 관계 문제이다. 틸리히는 이 문제를 그의 저서「조직신학」에서 자세히 검토했다. 틸리히는 철학과 신학을 엄격히 구별하는 이분법적인 입장을 거부하고 양자의 일치점을 지적하며 신학과 철학은 동일한 대상, 즉 존재의 문제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철학은 존재 자체의 구조를 문제시하는 반면, 신학은 존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문제시했다. 비판가들은 틸리히가 철학과 신학을 혼동했다고 주장하고 옹호자들은 양자를 창조적 긴장 상태 속에 위치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바르트와 같은 계시 신학자들은 철학은 질문하고 신학은 대답하는 밀접한 상호작용이 양자 사이에 있다는 틸리히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시만을 위해 봉사해야하는 신학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신론 또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위격 적이라는 진술을 상징으로 간주하고 그것은 한 위격이 아닌 위격 적인 모든 것의 근거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두 측면이 문제가 된다.

첫째, 하느님은 위격 적이다 라는 진술을 왜 문자 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가다. 하트숀은 하느님에 대해 상징적이기보다 문자 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많다고 주장했다.

둘째, 성서의 하느님은 왜 위격 적인 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틸리히는 하느님이 위격 적인 분이 아니라고 주장한 반면 역사 속에 활동한 하느님은 지성적이라고 주장하는 반론이 많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틸리히의 존재와 근거로서의 신 개념은 정서적으로 중립적이고 비 인격 적이어서 기도와 예배의 활력 적인 경험을 뒷받침 할 수 없다고 비판받았다.

 

제3부 근본주의 신학

13장 세대주의 신학

서론

19게기 자유주의 신학과 입장을 달리하며 성서적인 기독교를 수호하려 했던 또다른 신학적 흐름이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났다. 세대주의가 그것이다.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세계통치에는 분명히 구분될 수 있는 서로다른 세대들이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렬한 기대를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일어났다. 세대주의는 근본주의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근본주의 운동의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 세대주의 의 전 천년설, 성경의 문자주이, 축자 영감설들이 근본주의의 주요 교리가 되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세대주의를 근본주의와 동일시 하거나 근본주의의 공식 신학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한편 세대주이 하면 종말론이 연상될 만큼 세대주의는 현대 종말론 발전에 크게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종말론 논쟁의 중심에서서 전천년왕국설과 환난전 휴거설의 정립과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론

세대주의는 아담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각세대마다 변화한다는 신념에 근거한 신학체계이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하고 양자가 병행적이면서도 별도의 역할과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성서에 대한 일관된 문자적 해석과 예언의 문자적 성취, 대환난 전 교회의 휴거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세대주의는 철저하게 성서 제일주의 입장을 취했다. 성서의 축자 영감과 무오설을 수용했고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었다.

 

14장 근본주의 신학

서론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반작용으로 20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것이 신정통주의 신학이라면, 미국에서 일어난 것이 근본주의 신학이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과 진화론과 같은 현대과학이론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신학의 전개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수하고 촉진하려는 운동이다.1968년 발표된 로버트 캠벨의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기독교 신자 중 근본주의자는 2350만으로 추산되며, 몽고멜;의 조사로는 미국 목사의 20%와 평신도의 25%가 근본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다. 심지어 미국 젙체 인구의 20-25%가 어떤 형태로든 근분주의 단체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미국 신학의 흐름을 논하면서 근본주의를 논하지 않는 것은 미국의 자연경관을 살피면서 로키산맥을 빠뜨리는 것과 같다고해도 지나치지 않다.

 

 

4부 최근 신학

15장 세속화 신학1: 디트리히 본회퍼

서론

20세기 후반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신학의 강조점이 바뀐데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으로, 하늘로부터 땅으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말씀의 전파보다는 인간의 인간화가 강조되었다. 한마디로, 세상성에 대한 발견과 관심이 고조되었다. 1960년대 이후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세속화되고 신학은 급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신학적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본회퍼였다. 그의 핵심사싱이자 혁명적인 개념인 무 종교적 시대와 무종교적 기독교, 혹은 성인된 세계와 성서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은 기독교 신학계에는 큰 충격을, 젊은 신학자들에게는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세계신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그가「옥중 서간」에서 주장한 “성서 개념의 비 종교적 해석”은 기독교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세속화신학, 사신신학, 상황윤리등이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정치신학, 혁명신학, 해방신학이 간접적으로 연관되어있다. 이러한 급진 신학의 중심에는 항상 본회퍼의 사상이 자리잡과 있다. 비기독교인까지도 사로잡는 본회퍼의 매력은 그의 삶과 사상의 일치에서 찾을 수 있다. 히틀러의 독재정권에 용기있게 항거하고 저항한 끝에 투옥되어 39세에 처형당한 그의 삶은 그가 강조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삶의 실현이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위해서 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Ⅰ. 생애와 저작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명문가 집안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신경정신과 의사였고 어머니는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그는 열 살때 모차르트를 연주할 정도로 음악에 재능이 있었으며, 한때는 전문음악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1923년 튀빙겐 대학에 입학 다방면에 걸쳐 폭넓게 공부했다. 특히 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베드로 대성당을 보고 교회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훗날 그리스도와 교회를 신학이 중심 주제로 삼았다. 1924년 베를린 대학으로 학교를 옮겨 1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지 베를린 대학은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의 마지막 보루였다. 자유주의 신학을 대중화 시킨 하르낙이 정년 퇴임중임에도 강의는 계속하고 있었으며 저명인사들이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본회펴는 이들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과 역사 비평적 방법에 익숙하게 되었다. 이웃에 살며 친하게 지냈던 하르낙은 본회펴를 사랑했을 뿐 아니라 교회사를 전공하기를 권했지만 본회퍼는 조직신학을 더 좋아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역시 조직신학에 관한 것이다.

1928년 그는 목사로 활동하기도 했다.1930년 베를린 대학에서 강사자격을 얻었으며 베를린 대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열성적이었다. 본회퍼의 삶에 결정적ㅇ니 영향을 미친 두 사건은 히틀러의 집권과 2차세계대전이었다.  그것은 순수하게 신학 연구에 몰두하던 신학자 본회펴를 투사로 만들어 일생을 투쟁과 항거로 일관하게 만들었다. 전자는 그가 고배교회운동에 참여하여 교회 투쟁을 하게했으며, 후자는 그로하여금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지하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했다. 나찌당은 1932년 의회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의회를 지배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1933년 1월 30일 제3공화국의 총통이 되었다. 나찌당은 기독교와 빈족주의적 사회주의를 종합할 뿐만 아니라 독일 교회를 장악하려는 시도로 “독일 기독교 신앙 운동”을 조직했으며 많은 목사들이 여기에 가담했다. 따라서 독일 기독교는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루트비히 뮐러를 중심으로 한 “독일적 그리스도인들”로 나찌당을 지지하고 민족적 기독교를 주장하여 기독교를 게르만화하고자 하는 기독교 운동이다.

본회퍼가 속한 “옛 프러시아 연합교회”는 유대인이 교회내에서 직책을 가지는 것을 금지했다.

다른 하나는 뉘밀러가 주도한 독일 복음주의 고백교회 운동이다. 이 운동은 독일적 기독교 운동에 항거하여 일어났으며 1934년 조직화되었다. 바르트가 기초한 이 신앙 고백서가 “바르멘 선언”이다.

1933년 히틀러가 총통이 된지 단 이틀 후에, 본회퍼는 베를린 방송을 통해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화”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중도에 중단된 이 연설은 새로운 지도자의 개념을 직책이 아닌 사람에게두는 우상적인 지도자 원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와 유대인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 유대인 문제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분명히 하였다. 1933년 본회퍼는 런던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고백교회운동을 계속했으며 이에대한 영국 교회의 지지를 촉구했다. 그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법을 연구하기위해 인도로 갈 계획이었으나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교 설립의 요청으로 신학교의 책임을 맡았다. 이 학교는 신학적 연구와 영적 훈련과 실천의 종합을 강조하는 고백교회의 지도자 양성소였다. 1937년 신학교가 비밀경찰에의해 폐쇄되자 「성도의 공동생활」을 저술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길을 해명한 것이다. 특히 ”나를 따르라”는 그의 생존시 출판되어 독자들에게 큰 감명을 준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그를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저서였다. 1939년 라인홀드 니버와 레만의 주선으로 미국에서 강의하기위해 갔으나 전쟁이 임박한 고국을 떠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않았다. 7월 초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일로 돌아왔다. 한편 9월1일 히틀러의 군대는 결국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1940년 여름, 학교가 폐쇄되고 온갖 저술활동이 금지당했고 독일 군정보부 법률 고문이었던 매부 도나니의 배려로 군정보부의 민간인 정보요원으로 채용되어 뮌헨 사무소에 배속되었다. 한편 도나니를 통해 알게된 지하 저항세력의 히틀러 암살 계획에 적극 가담했다. 미친 운전사가 대로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그 자동차에 뛰어올라 핸드을 빼앗고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윤리학」을 저술하기 시작했는데 본회퍼는 그리스도가 교회에 어떻게 관계되는 가의 문제보다 오히려 교회와 그리스도가 세상에 어떻게 관계되는가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1943년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18개월동안 반복된 심문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많은 책을 읽었으며 성경을 깊이 연구했다. 현대 세계에 있어서 기독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색하며 검토했다. 이곳에서 그의 핵심사상인 “성인된 세계”와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핵석”에 대한 개념이 형성된다. 그는 세계가 중세 이후 세속화의 과정을 겪어왔으며, 인간은 점진적으로 “성인된 세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학적 성서적 개념에 대한 종교적 견해를 폐기하고 비종교적 해석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옥중 서간은 20세기 후반의 신학적 흐름을 바꾸어놓을 정도로 큰 영향을 비쳤다. 1945년 4월 9일 새벽, 미군이 그 지역을 해방하기 직전 교수형에 처해졌다.

 

Ⅱ. 성인된 세계

본회퍼는 13세기에 시작된 인간의 자율성을 위한 운동은 이제 완성의 단계에 도달했으며, 인간은 더 이상 종교나 하나님에 의존하여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성인된 세계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옥중 서신에서 성인된 세계 혹은 무종교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다. 성인된 세계는 종교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종교가 필요없는 시대가 성인된 시대이며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진단이다. 그 예측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율성과 세계이 자주성, 그리고 세계의 비신격화와 세상성의 발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종교적인 세상의 의미를 극복하고 성인된 세계를 긍정하는 것을 말한다. 본회퍼는 죄와 죽음을 인간 실존의 한계상황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해결하기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실존 철학이나 전통적 기독교 신학의 입장을 거부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신앙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인간능력의 한계나 급한 상황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을 부정하는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어려울 때만 해결해주는 해결사나 곤란한 틈을 메워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계상황에서가 아니라 삶의 한 가운데서, 인간의 약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함에의해서, 죽음과 죄가 아니라 삶과 인간의 선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성서의 복음으로부터 종교의 옷을 벗겨 버리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인간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 또는 세계를 초월한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작 해석을 의미한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죽은 그는 신학의 완결을 내놓지 못하여 후대의 과제로 남아있다.

 

16장 세속화 신학2: 존 로빈슨과 하비 콕스

서론

2차 세계 대전 이후, 신학의 새 주제로 등장한 것은 이 세상에 대한 관심문제였다. 본회퍼를 시작으로 세속화신학은 이어진다. 젊은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는 전쟁을 사전에 막지못했고 전후 시대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역 효과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신학적 관심을 저세상적인 것에서 이세상적인 일이나 사건으로 전환했다. 따라서 이 세속화 문제가 20세기 후반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되었으며 이것이 세속화 신학이다.

 

17장 사신신학

서론

이 급진신학은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본회퍼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신학 조류이다. 신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불리기도하는 급진신학은 전통적인 신학의 길을 거부하고 신학적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려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급진신학은 전통적인 기독교와 하나님은 현대인의 문제와 욕구를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분쇄하고 새로운 기독교 제2의 종교개혁을 모색했다. 「신에게 솔직히」를 발표함으로써 세속화 신학의 불을 당긴 영국 성공회 감독 로빈슨은 16세기 종교개혁은 이제 지나갔고 새로운 종교개혁이 요청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급진신학이 사신신학이며 현대 미국인의 낙관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1960년대 전세계신학계에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이 외에도 1970년대 희망의 신학과 해방신학에 뿌리를 둔 정치신학

1980년대 본격적으로 전개되고있는 종교 다원화 신학과 과정신학이 급진신학으로 분류될 수 있다.

사신신학은 1960년대 초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학사의 에피소드였다. 그것은 단지 몇 년간 지속되다 소멸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신 죽음에 대한 논의가 신학자들에 의해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서구의 정신사에 포이엘바하, 니체 등이 주장한 사상이었다. 포이엘바하는 신을 인간 속성의 투사로 취급했으며,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

사신신학은 유신론을 부정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신론의 관점을 기독교에 수용하여 무신론의 용어로 신학작업을 하려했던 현대신학의 한 흐름이었다. 이 신학의 핵심 주장은 첫째, 기독교 전통적인 초월자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은 죽었으며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둘째, 하나님의 죽음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 신학은 1960년대 말을 고비로 더 이상 지속치 못하고 한 때의 유행신학으로 끝났다.

 

장 과격한 사신신학자는 알타이저였다. 그는 시카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에모리 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엘리아드의 종교 현상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종교학자였으며 틸리히의 대화신학을 계승하여 그것을 극단화 했다. 알타이저는 급진신학을 개신교의 현대적인 발전으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이제 지나간 시대였다. 전통적 신학의 형태는 무의미하며 새로운 신학이 수립되어야 한다.

알타이저가 주장한 하나님의 죽음은 하나님이 실제로 죽었음을 의미했다. 성서는 하나님의 실재나 임재만 말할 뿐, 초월적이거나 인격적인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를 성서적 신앙의 타락으로 생각했다. 알타이저는 하나님의 죽음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케노시스 개념에서 찾았다. 그는 하나님의 죽음을 성육신 사건속에서 일어났다고 보았다. 알타이저는 성육신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인간이 된 것” “하나님이 그기스도 안에서죽은 것”으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죽음이 곧 성육신의 의미이다. 그것은 케노시스(비움)의 과정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완전히 비어지고 완전히 인간이 된 사건이다. 알타이저는 초월자로서의 하나님은 죽었지만, 내재자로서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성육신 사건에 서 다시 태어났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은 철저하게 세속화, 인간화, 내재화되었다.

요약하면 그는 엘리아드의 종교 현상학, 니체의 허무주의, 불교의 신비주의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개념을 부정했다. 초월적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죽었으며 내재적인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18장 희망의 신학: 위르겐 몰트만

사신신학은 소멸되었지만 희망의 신학, 정치신학, 해방신학 등의 급진신학을 통해 사상의 맥이 존속되고 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사신신학의 잿더미에서 불사조같이 일어난 것이 “희망의 신학”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죽음에 대한 선고를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오류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신에대한 어떤 결론보다는 유보하는 입장이었다. 역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미래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신학은 신 존재에 대한 희망의 촛불을 꺼버리지 않고 살려놓은 것이다. 희망의 신학 주제는 미래와 희망으로 요약된다. 현재를 강조하는 실존주의 신학과는 달리, 희망의 신학은 미래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는 미래와 관련될 때만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취급한다. 이로인해 희망의 신학은 “미래의 신학”이라고 불린다.

Ⅰ. 생애와 저작

몰트만은 1926년 독일의 함부르그에서 출생했다. 18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포로로 잡혀 3년동안 벨기에와 영국에서 수용소 생할을 했다. 그는 전쟁의 참혹한 고난속에서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라는 신정론의 문제에 고심하는 한편, 희망을 가진 사람이 생존확률이 높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몰트만은 독일로 돌아와 괴팅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고백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들로부터 교육받고 박사와 교수자격을 얻었다.

Ⅱ. 희망과 약속

희망의 신학의 중심을 이루는 두 개념은 희망과 약속이다. 희망의 신학에서 희망과 약속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 몰트만이 희망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된 것은 수용소 생활이었다. 한편 몰트만은 성서가 미래적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성서 연구를 통해 발견했다. 성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 희망으로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사건이나 모세의 출애굽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몰트만은 이러한 개인적 체험과 성서에 나타난 희망과 약속 사상을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을 매개로 하여 체계화했다. 이것이 희망의 신학이다.

Ⅲ. 종말론적 해석

Ⅳ. 교회의 사명

몰트만은 하나님의 약속은 또 다른 세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새로운 창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세계가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 약속의 성취는 역사의 모든 가능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주요한 과제는 개인을 회심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사회구조의 개혁이다. 신학역시 세계가 무엇인가를 단지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몰트만의 정치신학은 이러한 교회관과 신학관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희망의 성취가 단지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노력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희망의 신학은 이론 신학이 아니라 행동신학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악에 대해 어떤일을 하시지 않는가를 묻는 대신, 악을 변화시키려고 행동한다. 교회는 현 역사 안에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며, 필요한 경우 어떤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여 현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Ⅴ. 희망의 신학 논쟁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개신교 신학뿐 아니라 로마카톨릭 신학, 제3세계 신학계를 포함하여 전세계 교회와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비판은 그는 과거와 현재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일 만큼 미래를 강조했다. 둘째, 이 신학이 함축하고 있는 정치적 의미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몰트만은 세상을 해석할 것만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하며 정치적인 힘을 발휘햐여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는 것이 교회의 새로운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치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태동에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으며 그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해방신학자들은 몰트만의 입장이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셋째, 몰트만의 미래적 종말론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함과 동시에 그를 현대적 종말론 논쟁의 중심에 서게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기점으로 전개된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이냐 아니면 미래적이냐 하는 것이 논쟁의 초점이었다. 리츨과 하르낙의 자유주의 신학,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 불트만의 실존적 종말론은 하나님나라를 현재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에반해 몰트만의 종말론은 미래에대한 기대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한편 그가 역사내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강조한 점에서 그의 종말론을 역사 내재적 또는 정치, 사회적 종말론으로 분류한다.

넷째, 몰트만의 계시관은 현대 계시론 논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몰트만은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계시를 약속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계시를 역사로 정의하는 판넨버그, 케리그마적 말씀으로 저으이하는 불트만과 입장을 달리한다. 정통주의신학자들은 계시가 과거와 현재에도 계시하시는 하느님이 아닌, 단지 미래에만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이라고 비판했다. 다섯째, 개인의 영혼구원보다는 사회개혁에 의위를 둔 것이 비판받는다.

결론

사신신학이 제기한 하느님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형성되어 희망의 신학, 정치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제3세계 신학 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19장 해방신학

20세시 후반에 일어난 최대의 신학논쟁은 해방신학 논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1984년 바티칸 교황청에서 열렸던 브라질의 해방 신학자 레오나르드 보프 신부에 대한 세기적인 종교 재판은 해방 신학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이며 결정적인 의사 표명이었던 동시에 이 논쟁을 극적으로 표현해준다. 해방 신학은 오랜 식민 통치와 군사 독재로 인구의 절대 다수가 빈곤과 억압속에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로부터 가난한 자와 눌린자를 해방시캐려는 역사적 과제를 기도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해방신학ㅇㄴ 남미의 불공정한 상항을 제거하고 보다 자유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공동 노력의 체험에서 생긴 신학사상이다. 196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하여 1980년데에 이르러서는 전세계적으로 광법위하게 유포된 종교 사상이 되었다. 또한 해방신학은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이 신학뿐 아니라 북미의 흑인 신학과 여성 신학 그리고 최근의 생태학적 신학을 포함하는 현대의 큰 신학적 흐름을 형성했다.

해방 신학은 한국 신학계에 1970년대 소개된 이후, 이에대한 저서와 번역서 및 논문이 200여편 출판되거나 발표되고 수많은 관심과 토론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1980년대 들어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정황과 맞물려 큰반향과 논쟁을 일으켰다. 라틴아메리카와 크게다를바 없는 한국의 상황이 해방신학에 대한 격렬한 촉매가 되었다. 민중신학은 세속화 신학과 함께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일부 해직 교수들이 중심이되어 1970년대 유신체제 속에서 억압받는 모든 민중의 해방을 목표로 생성되었다. 이로인해 한국판 해방신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해방신학 논쟁은 순수 학문적인 차원보다 오히려 정부의 이에올로기 비판 교육적인 차원에서 전개된 면이 없지 않다.

Ⅰ. 해방 신학의 태동

해방신학이 일어나게된 동기는 세가지이다. 라틴아메리카의 특별한 역사적 정황과 정치 신학 및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그것이다. 그곳은 현대화과정에서 극심한 사회적 혼란, 높은 인플레이션, 노동자 대량 실업, 막대한 외채, 전체 인구의 5%가 전체재산의 80%소유하고 있는 경제적인 불평등과 불균형지역이었다. 역사 정치적으로 콜럼부스의 바하마 군도 발견이후 스페인과 포루투칼의 라틴아메리카 정복으로 시작하여 19세기 초 300년 이상 전개되었다. 이러한 식민 지배는 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의 여러나라가 독립한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경제개발 계획, 외채, 다국적 기업이 활동 등이 이들 나라들을 영국과 미국과 같은 제1세계 국가들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예속, 즉 신식민주의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한편 로마카톨릭 교회는 라틴 아메리카 전인구의 절대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밀착되어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정복과 교회의 복음화가 동시에 일어났다.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국가의 후원 아래 광대한 토지와 자본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2차대전까지 식민주의를 지지하거나 독재자를 옹호했다. 근대하를 배척하고 보수적인 정치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러나 콜럼비아의 메데린에서 열린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를 계기로 카톨릭 교히의 입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회의는 카톨릭 지도자들이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제2차 바티칸 회의의 영향을 토의하기 위해 개최되었으며 해방이라는 주제와 그것이 제기한 문제들을 공식적으로 다룬 최초의 회의였다. 그것은 억압적 체제를 비난하고 가난한 자에 대한 부자의 제도화된 폭력에 대항하며 교회를 통해 새로운 대안이 나오기를 염원하는 내용이었다.

이 메데린 회의는 교회의 현실 참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으며, 메데린 문서는 해방신학의 토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해방신학이 태동한 것이다. 해방 신학 태동의 다른 요인으로는 정치신학의 영향을 지적할 수 있다. 요한네스 메츠와 위르겐 몰트만의 정치신학이 특히 영향을 미쳤다. 메츠는 정치적 상황을 신학의 영역에 수용하는 정치 신학의 방법론을 제시한 독일의 카톨릭 신학자이다.

하편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을 주창하고 이를 정치신학으로 발전시킨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다. 그는 희망의 신학에서 하나님은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인간에게 미래를 개방해주는 희망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해방 신학의 태동의 또다른 요인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분석의 이론적 도구와 역사 철학으로서 해방 신학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사회분석의 도구로서 변증법적 도구를 제시했다.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브루주아와 프로레타리아, 억압자와 피억압자,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석했다. 해방신학은 이런 부조리를 타개할 방법론으로 마르크스적 개념을 도입하였다. 해방신학이 정통 실천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나 이분법적으로 사회를 분석한 것, 계급 투쟁이나 폭력에 의한 혁명을 인정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었다.

과거의 교리적 관점이 아닌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성경을 읽는 새로운 방법과 죄와 구원과 같은 성경의 주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죄는 하나님과 개인간의 관계의 왜곡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삶의 터전으로 허락한 역사적, 정치적 세계의 왜곡을 의미했다. 구원역시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화해나 죄로부터의 구원뿐 아니라 현재의 역사적 현실로부터의 해방으로 인식했다.

Ⅱ. 해방 신학 논쟁

첫째, 해방신학의 방법론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도입하여 사회혁명의 개념이 그것이다. 이것이 특히 교황청 신학자들과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 사이에 일어난 논쟁의 중심 문제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이 정당한 혁명이며 성서적인 근거를 내새워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1984년 바티같 교황청이 해방 신학에 대해 발표한 공식 문서 「해방 신학의 일부 측면에 대한 교시」는 이 신학의 마르크스적 측면이 교회와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과 마르크스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둘째, 해방의 문제이다, 기독교는 영적인 해방을 더욱 강조하지만 이것은 사회적 해방만을 강조한다. 해방신학은 성서 본문보다는 역사적 현실과 상황을 신학의 근본 자료로 삼았다. 이 신학이 비판을 받고 논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방법론 때문이다. 하여 대답은 잘못되었지만 문제의식은 타당했다. 따라서 해방 신학을 통해 역으로 전통 신학과 교회가 소홀히 했던 문제나 문제점이 무엇인지르 발견할 수 있다.

 

20장 여성신학

신학적 흐름을 보면 여성신학은 해방신학의 한 유형에 속한다. 1960년대 세계와 교회에서 여성의 억압과 불평등 구도를 자각하고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에의해 일어났다. 전통신학과 교회제도는 물론 성경 본문 역시 성차별적 요소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여성 신학은 신에대한 인간 경험의 의미와 가치를 여성 입장에서 성찰하는 것이다. 서구의 여권 신장은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고대 교회는 여성들이 마귀와 연결되었다고 가르쳤으며 중세로마 카톨릭 교회는 일반적로 여성을 쾌락의 죄로 남성을 유혹하는 마귀의 불결한 그나풀로 취급하는 등 여성을 혐오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남자와 여자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서적 사실에 근거하여 여성 혐오 사상을 논박하고 상화 동등한 존재임을 주장했다.

한편 로마카톨릭 교회는 요한 23세의 교황 취임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꾸었다. 성차별 반대입장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에 반영되었다. 이와 더불어 1960년대에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형성되어 여권 신장 운동의 이론적인 체계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여성 신학의 탁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메리 댈리이다. 댈리는 제2차 바티칸 동의회를 참관하여 교회가 여성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을 목격하고 카톨릭 교회의 성차별과 여성 혐오 사상을 공격하는 「교회와 제2의 성」을 저술했다.

 

21장 과정 신학1: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서론

현대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두가지 요인은 전쟁과 과학이다.

한편 다윈의 진화론과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과학적 세계관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정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동적인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20세기 들어와서 이런 과학적 세계관이 또다른 신학적 흐름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화이트 헤드의 형이상학에 토대를 둔 과정 신학과 샤르뎅의 진화론에 토대를 둔 신학이 그것이다. 과정신학은 미국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1930년대 초 시카고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를 중심으로 시카고 학파를 형성하여 전개되었다. 그후 이 대학 동문을 주축으로 미국 전체에 확산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미국 토양에서 성장한 특유의 신학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현대 후기 신학을 이끌어갈 대표적인 신학으로 간주되고 있다. 전통신학이 존재의 철학에 기초했다면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 혹은 생성의 사상을 모델로하여 현대 정황에 맞는 신학을 형성한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과정 사상을 처음 제시한 것은 아니다. 이미 고대 헬라시대에 존재와 생성의 두 철학흐름이 있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참으로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뿐이며, 존재는 생성돠 소멸도 하지 않으며 영원히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헤라크리토스는 모든 것은 영원한 흐름, 즉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파르메니데스는 후기 헬라 철학의 시조가 되었으나 헤라크리토스는 거의 무시되었다. 서구 사상의 대부분은 생성, 과정, 진화등의 역동적인 개념보다는 존재, 실체, 본질 등의 정적인 개념에서 유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와 생성 사이의 긴장은 서구 사상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19세기 이후 생성, 과정 및 관계의 문제가 헤겔, 마르크스등에 의해 철학적 논의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과정 사상은 미국에서는 제임스, 듀이, 화이트헤드 등에의해, 프랑스에서는 베르그송에의해, 그리고 영국에서는 알렉산더와 모르간에의해 발전되었다.

Ⅰ. 생애와 저자

화이트헤드는 1861년 영국에서 성공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럿셀의 제자였다. 그는 럿셀과 함께 「수학원리」를 저술했다. 이것은 수학이 형식 논리학의 전제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수리 철학계의 고전이 되었다. 화이트헤드의 캠브리지 시대는 수학과 논리학에 몰두하여 대성하게 된 시기였다. 캠브리지와 런던대학에서 수학자로 탁월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하바드 대학으로부터 철학교수로 초빙되어 미국으로 이민 1936년 은퇴하기까지 철학을 가르쳤다.

Ⅱ.유기체의 철학

그는 현대 과학과 조화되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하는 일에 그의 생애 마지막 부분을 보냈다. 그는 과학적 우주론을 설명할 수 있는 포괄적인 형이상학적 체계를 산출하려고 했으며, 이는 칸트의 철학 작업과 유사하다. 칸트가 뉴턴의 고전 물리학에 철학적 토대르 ㄹ제시하는 것을 그의 생애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기초한 현대물리학에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기위해 노력했고 그는 현대과학을 철학에 도입하여 철학사의새로운 장을 연 과학 철학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유기체의 철학 또는 과정 철학이라 불렀다. 이것은 실체를 과정 또는 생성의 범주로 이해한 데 근거한 것이다.

1. 현실적 존재

그는 이 우주가 무수한 사건 또는 계기로 구성된 유기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런 기본적인 요소를 현실적 존재로 불렀다. 좀더 분석하면 고전 역학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물질의 이동으로 설명하는 반면, 양자 역학은 그것을 진동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전자는 빛의 상사를 물질적 에테르의 이동으로 설명했고 후자는 어떤 주기를 지닌 진동으로 설명했다. 그는 자연 현상을 이동으로 설명하고 실체를 지속으로 보는 고전적인 물질 개념을 거부하고 자연 현상을 진동으로, 실체를 사건으로 보는 물질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게는 모든 사건이 과정이며 생성이었다. 진동과 진동 사이에 존재하는 도약과 단절은 곧 새로운 창조와 신기성의 출현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그 자체를 과정으로 나타낸다. 그것은 생성과 흐름이다. 그것은 항상 신기성을 지니며 창조적이다. 그러므로 사건으로서의 모든 현실 존재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유기적이다. 유기적 자연의 근원에는 무한한 창조성이 있다. 이에 근거하여 하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을 유기체의 철학이라 규정한다.

2.영원한 대상

3. 신개념

결론

과정신학에 사상적 기초를 제시했다. 현대과학에 철학적 토대를 제시했다.

 

22장 과정신학 논쟁2:

샤르뎅

화이트헤드가 과정형이상학파를 대변한다면 샤르뎅은 과정사상의 진화론파를 대변한다. 화이트헤드가 과정을 창조적인 전진이라부르고 그것을 어떤 정점을 향해 반복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증대하거나 감소하는 운동으로 이해했다. 반면, 샤르대은 과정을 정점을 향해 계속적인 진화 단계를 거치며 일직선으로 상승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샤르댕의 핵심 사상은 진화의 개념이었으며 신학의 중심개념은 우주적 그리스도의 개념이다. 그는 다윈으로부터 유래사는 생물학적 진화의개념을 문화와 영적인 영역에 확대 적용했으며 전체 우주가 계속적인 단계를 거치면서 진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1. 양극적 본성

2. 만유재신론

3. 무로부터의 창조

화이트헤드는 하느님을 세계의 창조자나 지배자가 아닌, 진선미의 환상과 매력에 의해 영향을 미치는 세계의 시인 또는 세계의 위대한 동료로 간주했다. 그는 하느님 자신이 변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과정 속에 잇고 과정이 하나님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도 세계도 정적인 완성에 이를 수 없고 양자모두 신기성에 이르는 창조적인 전진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는 정통신학의 창조론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전통신학에 따르면 세계는 무로부터 세계를 존재케 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창조자이며, 세계는 그가 창조한 피조물이다. 이것은 성서적 창조론의 핵심교리이다. 화이트헤드는, 세계는 어느 시점으로부터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해 온 것이다. 끊임없이 과정속에서 존재했다 소멸하고 다시 존재한다. 과정신학은 무로부터 창조는 물론, 하나남이 우주의 창조자라는 사실조차 부정했다. 과정신학은 전통 신학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존재의 형이상학 자체를 문제삼고, 그것을 과정 형이상학으로 대치했다.

 

24장 종교신학1: 종교 다원주의란 무엇인가

서론

최근 신학적 토의에 뜨거운 논쟁거리로 대두된 것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문제이다.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는가 등의 문제가 조직 신학자, 종교 철학자, 종교 현상학자, 선교학자,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이것은 20세시 후반에 처음으로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이문제의 기원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가나안 정착까지 소급된다. 기독교는 절대주의(cristian assolusismo)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종교 다원주의(religioso pluralismo)가 나타났다.

Ⅰ. 종교 다원주의의 태동

기독교는 313년 로마 제국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공인받은 후 데오도시우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에따라 로마 제국과 기독교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기독교 선교 정책은 서구의 식밈주의 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식민주의적 선교 정책, 제국주의적 선교정책이었다. 서구의 군대가 동양의 나라들을 점령하면, 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기독교로 그지역의 종교를 정복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식민지 정책이 종식되고 식민지들이 독립하자, 정복식의 선교 정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wcc의 연합운동의 영향아래, 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던 선교지 취일선의 선교사들로부터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그와 대하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편, 과학의 발전이 종교적 다원주의의 태동을 촉진했다. 16세기 이후 유렵에 발견과 탐헙이 시대가 시작되면서 콜럼버스, 마젤란 등이 기독교 세계 밖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것에 기독교와 서로 다른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역사. 인류, 과학 연구가들은 인류의 기록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세계의 다른 곳에도 종교의 유형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동서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권의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문제가 긴급하게 일어났다. 특히 비교 종교학이 발전함에 따라 비교 종교학자와 종교사 연구가들을 통해 다른 종교가 기독교와 동일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종교 사학파의 대표자 트뢸취가 좋은 예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 기독교가 기독교인에게 훌륭한 종교인 것처럼, 힌두교가 힌두교인에게는 훌륭한 종교라는 것이다.

Ⅱ. 종교신학의 유형

1980년대 들어와 기독교와 타종교에 대한 농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많은 저서들이 출판되었으며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종교 신학(teology di religion)이란 용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존 힉이 있다. 그는 미국 크레어몬트 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종교 철학자이다. 그는 모든 종교가 제각기 다른 신을 섬기는 가, 아니면 동일한 신을 섬기는가, 여호와, 알라, 라마 등은 별개의 신인가 아니면 동일한 존재에 대한 다른 이름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동일한 신을 섬기며 여오와, 알라, 등은 동일한 신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다원주의을 주장했다.

반면 트뢸취와 힉이 대변하는 종교적 다원주의는 기독교인들의 신아잉 인간에 대한 하나님이 최정적이면 절대적인 자기 계시의 증거가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남으 fakssks 그들의 경험 역시 신적인 것을 만난 여러 다른 경험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폴틸리히와 윌프레드 스미쓰는 기독교 절대주의 보다는 종교적 다원주의에 가가운 인물로 분류되고 있다. 한편 기독교 절대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 양극 사이에 위히하느 입장이 있다. 카톨릭 신학자들인 라너의 “익명의 크리스천”이나 파니카의 “미지의 그리스도”개념이 이를 대변한다.

영국 교회 신학자인 알란레이스는 종교신학을 세가지 유형, 즉 배타주의, 포괄주이, 다원주의로 배타주의(exclusismo)는 사도행전 4:12과 요한 복음 14:6에 근거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만이 유일하고 참된진리이며, 구원은 교회에만 있다는 주장이다. 전총적인 카톨릭과 바르트, 브룬너, 크래머가 이를 대변한다.

포괄주읜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신학에 근거한 것으로 다른  종교에 있는 모든 진리는 본래 기독교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니만 구원에이를 정도로 충분하지 못함으로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교부시대의 순교자 저스틴,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 라너 등이 이 입장에 속한다.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의 근본에는 하나의 신적인 실재가 있으며, 종교의 차이를 단지 이 실재에 대한 형식의 차이로 간주하는 태도이다. 틸리히, 스미스, 힉, 트뢸취, 토인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린트벡 역시 「교리의 본질」에서 종교신학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 세가지를 제시했다. 명제적, 존재론적 방법, 경헙적, 표현주의적 방법, 문화-언어적 방법이 그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진리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으로 배타주의에 해당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종교의 공통 근원인 신적 실재에에 대한 표현의 유효성에 의해 종교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면서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포괄주의에 해당된다. 마지막 방법은 실재를 해석하며 경험을 표현하고 삶에 질서르 부여하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 방식으로 종교를 간주하므로써, 종교간의 차이를 실재를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로 취급한다. 이는 곧 다원주의적 태도라고 볼수 있다. 카나다 연합교회 신학자 카워드는 「다원주의: 세계 종교들에 대한 도전」에서 최근의 종교 신학 이론으로 신중심적 방법, 그기스도 중심적 방법 및 대화의 방법 세가지를 제시했다. 신중심적 방법은 그리스도보다는 하나님에 일차적인 초점을 두는 접근 방법이다. 따라서 하나의공통적 실재를 인정하는 반면, 예수 중심적인 배타적 태도를 피함으로써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와 같은 신 중심적인 다른 죵교와의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곧 다원주의에 해당되는 것으로 카워드는 동방 정교회의성령 중심 신학 틸리히, 힉. 스미쓰 등을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했다.

그리스도 중심적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유일한 서육신으로 주장하는 기독론에 근거한다. 이것은 예수의 종국성과 보편성을 견지하며 다른 종교의 유효성을 부정하는 배타적인 방식과 그것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포괄적 방식으로 세분된다. 대화의 방법은 모든 종교는 각각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주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다른 종교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보다 깊은 영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간학적 접근 방법이다. 대표자로는 사마르타. 파니카 등이 있다.

현재 미국 신시내티의 사비에르 대학 교수인 카톨릭 신학자 니터는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에서 종교적 다원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를 네가지 모델로 제시했다. 보수적 복음주의의 모델, 개신교 주류의 모델, 카톨릭의 모델 및 신중심적 모델이 그것으로 이것은 교회전통에 따른 분류 방법이다. 보수적 복음주의 모델은 참된 종교는 하나이며 나머지 종교는 오류라고보는 개신교 부수파의 입장이다. 개신교 주류의 모델은 셰시으 ㅣ보편성은 인정하지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개신교 자유파의 입장이다. 이것은 일반계시와 특수 계시의 개념을 원용ㄴ한 것이다. 다른 종교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것은 긍정하지만, 다른 종교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은 부정한다.

카톨릭 모델은 하나의중심에 이르는 많은 길들이 있다고 보는 다원주의의 입장이다. 힉, 파니카, 사마르타, 니터 등이 이를 대변한다.

디 코스타는 「신학과 종교적 다원주의 」에서 기독교적 다원주의에 대한 반응을 세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존 힉으로 대표되는 다원주의, 크래머로 대표되는 배타주의 및 라너로 대표되는 포괄주의가 그것이다.

Ⅲ. 종교 다원주의의 근거

첫째,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신념이다. 트뢸취의 종교 사학파 - 기독교가 기독교인에게 훌륭한 종교이듯 힌두교인에게 힌두교가 훌륭한 종교이다.

둘째,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신념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라의 구원을 원하신다면 당연히 시간과 공간적으로 다른 문화와 상황 속에서 이 일을 수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며, 깊이에서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며 길은 다르더라도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 따라서 종교의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적이고 문화적이며 시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모든 문화성의 배후에는 하나의 신, 즉 공동의 본질이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 윌프레드 스미스 등이 이를 대변한다.

셋째, 모든 종교는 공동이 심리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각 개인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심리학적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견해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무의식 속에 기원을 가진 심리학적 사건으로 취급하여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이 그 대표자이다.

포괄주의는 기독교 절대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를 절충하여 그 중간을 가려는 것이다. 그러나 포괄주의는 양심대로 산 사람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든지, 익명의 그리스도인, 미지의 그리스도 개념, 그리스도와 예수의 분리등의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원칙으로부터 반쯤 벗어난 것으로 이해된다. 양심이 구둰의 기준이 된다는 것도 양심이 보편적이냐 상대적이냐 하는 또다른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피레네 산맥의 이쪽과 저쪽의 양심이 다르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극단적인 예로 식인종의 양심과 기독교인의 양심을 비교할 수 있다. 식인종은 사람을 잡아먹어도 양심에 문제될 것이 없다. 관습적으로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심의 적극적인 해석 역시 경계해야 한다.

25장 종교 신학2: 종교 다원주의와 카톨릭 교회

Ⅰ. 전통적인 입장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가 종교가 되기 이전까지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다양한 태도를 취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회 중심의 배타주의적 입장이 있었는가 하면 고전 문화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포괄주의적 입장도 있었다. 2세기 키프리안ds 교히를 노아의방주로 해석했다. 노아의시대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대홍수시 구원은 노아의방주 안에만 있었다. 방주밖에는 구원이 없었다. 4세기 어거스틴 역시 교호르 그리스도의영역과 신비스런 몸으로 해석함으로써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느 입장을 재확인했으며, 이것이 서방 교회의전통적인 입장이 되었다. 한편 동방 교회에 속하는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아테나고라스 등은 그리스도의 유일히성과 종국성을 고수하는 동시에 참된 계시와 구원의 가능성이 모든 사람에게 배방되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로고스 개념에 근거하여 성서적인 구원사에서의 특별 계시와 다른 종교들에서의일반 계시를 연결시키려 했다. 예를 들어, 저스틴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로고스를 따라서 그리고 로소스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로고스를 따라 사는 한  기독교인이다.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로고스의 씨르 ㄹ가지고 있었으므로 진리의 단편적인 면에 도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성으로 산 이교도들은 어떤의미에서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인들이었다. 헬리인들 중 소크라테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등이 그러하였다. 헬라 철학과 기독교의 조화를 시도한 저스틴의 입장을 수용하여 더욱 발전시킨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이다. 그는 유대인에게 있어서의율법의 역할이 헬라인에게는 철학이 담당했다고 주장했다. 즉 율법이 유대인을 교육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것 같이, 철학은 헬라인을 교육하여 복음에 이르게 했다.1215년 라테란 공의회, 1302년 교황 보니파스 8세는 교회 밖에는 구원도 죄의 용서도 없다는 것과 교회에 복종한는 것이 구원에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천명했다. 또한 1442년 플로렌스 공의회는 이를 재확인하여“자선을 베풀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피흘렸다 하더라도, 카톨릭 교회 울타리 안, 통일성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느 stkfka은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고대 교회는 배타주의적인 입장가 함께 포괄주의적 요소도 지녔지만 중세 교회로 넘어오면서 교회 중심적 배타주의가 카톨릭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Ⅱ. 현대적인 입장

현대 카톨릭 신학자들은 바티칸 공의회와 계시 개념을 기초로 하여 종교적 다원주의에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응답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해석과 방법론은 학자들에따라 매우 다른다. 라너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포괄주의, 큉은 구원의 일반적인 방법과 특수한 방법을 주장하는 포괄주의, 파니카는 종교간의 대화를 중심한 다원주의, 니터는 신중심주의적 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라너는 바티칸 선언 출현에 여러모로 기여한 신학자인 동시에 종교 신학의 개척자이다.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으지와 그리스도의 유일성,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한다는 것과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에 근거한다. 그의 입장은 한마디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가능하지만 그리스도 밖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기준은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라너의 견해는 대부분 카톨릭 신학자들의 종교 신학에 기초가 되었다.

파니카는 카톨릭 사제로서 저명한 카톨릭 신학자요 힌두교 학자이다. 스페인의 신자인 어머니와 인도의 힌두교 신자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대화이 방법을 통해 하나 이상의 종교ㅕ에 종교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제시하려고 했다. “정상에 이르러서는 서로다른 길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든 길들이 사라진다면 정상 자체도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철저한 다원주의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는 1960년대초 세계 종교들 사이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범세계적 일치 운동(ecumenical ecumenismo)을 주도했다. 그의 대화는 파니카 자신의 기독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예수를 구분한다. 보편적인 그리스도와 특수적인 예수개념이 그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구원자에 대한 보편적인 상징이라면, 예수는 그 표현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지만, 그리스도가 반드시 예수는 아니다. 그리스도는 예수 외에도 크리슈나, 이스바라, 부처 등에서 현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구세주들은 기능적인 면에서 보편적 그리스도와 동일시 된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특정 종교가 우월하다는 것을 부정했다.

니터는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종교 신학의 유형을 제시한 후, 가장 유망한 것이 신중심적 모델이라고 주장하고 그 자신도 이 입장을 취했다. 이것은 하나의 중심에 이르는 많은 길이 있다는 다원주의를 대변하는 것으로 교회중심주의와 그리스도 중심주의로부터 신 중심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 이론의 기초는 보편적이며 비규범적 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를 유일한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신의 계시와 구원을 밝힌 보편 타당한 구원자로 간주했다. 뿐만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약 성서의 배타적 주장을 복음의핵심이 아닌, 그 시대와 문화의 종교적 언어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했다.

 

26장 생태신학과 창조신학

현대인은 생태학적 위기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생태계 파괴는 이제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딘 영향을 미치는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이는 동 서양, 민족, 국가, 종교, 이념을 초월하여 인류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최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로에서 유엔 주최로 개최된 지구 환경 정상 회의에 100여개국 이상의 정상들이 참석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환경 문제를 지구 차원의 생존 전략으로 취급했으며, 지구 헌장의 성격을 지닌 “리우선언”과 지구 환경 보전의지침격인 “의제 21”을 채택하여 환경문제 해결을 실마리를 마련했다. 이런 상항에 직면하여 생태 보존에 대한 기독교적 성서적 근거와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생태신학이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최근의 신학 사조로서 자연과의사귐에 대한 신학적 근거 제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창조론이 그 중심에 있으며 새로운 창조 신학이 제시된다. 현대신학은 상황신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현대의 상황(context)이라는 관점에서 성경 본분(text)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드이 이를 반영한다. 이것은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 신학 사상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그는 신학을 “주어진 시대의 기독교회에서 유행하는 교리를 체계화하는 학문”으로 정의함으로써  최초로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시 했다.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한 현대의 정황을 주제로 하여 전통신학의 창조 이해를 비판하고 창조 보존을 위한 새로운 신학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기 때문이다.

Ⅰ. 생태학적 창조신학의 태동

생태학(ecoloy)이란 말은 집과 학문을 의미하는 헬라어 `oikos`와 `logos`의 합성어이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집에 관한 학문, 삶의 공간에 관한 학문이 생태학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공간인 자연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는지 연수하는 것이 생태학이다. 전통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정신적 능력, 영적인 능력 등과 같은 인간의 특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과 통치권으로 주장했으나 베스터만은 그것을 자연의 운명을 함께 책임질 인간의 미래적 목적으로 해석했다. 생태학의 입장에서 창조론을 최초로 전개한 학자는 몰트만이었다. 그는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현대의 생태론적 세계관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응답으로 생태학적 창조 신학을 제시했다. 세계를 주체아 객체, 육체와 영혼, 개별과 전체로 분리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하고 통전적인 관점에서 창조를 인식하려 했다. 몰트만은 자연 파괴의 정신적 원리를 제공한 사람이 데카르트라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사상에서는 인간은 생각하는 정신적 존재인 반면, 자연은 비 인격적이며 비 정신적인 물질로서 지배의 대상에 불과하다. 몰트만은 이러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근대 자연 과학을 발전시키는 정신적 원리를 제공했던 동시에 자연 파괴와 생태계 위기에 대한 철학적 원리를 제공했다고 생각했다. 생태학적 신학 또는 새로운 창조 신학의 태동에는 세계교회 협의회(WCC)의 활동과 베스터만과 몰트만의 역할이 컸다. 세계교회협의회는 환경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베스터만은 창조에 관련된 구약 성서본문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제시했으며, 몰트만은 생태학과 창조론을 접목시켜 생태학적 창조신학을 전개했다.

Ⅱ. 생태계 위기의 원인

자연 파괴와 위기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기독교의 창조 신앙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생태계 파괴와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는 극단적이 주장과, 그 근본 원인을 단지 기독교의 창조 신앙에서 찾을 수만은 없다는 온건한 입장이다.

전자의 입장을 주장한 사람이 일본의 선 불교 철학자 스즈키와 미국의 역사학자 린 화이트였으며 칼 아메리. 죌레 등이 이를 지지했다. 후자의 입장을 대변한 학자는 몰트만, 듀보였다.

미국의 켈리포니아 대학 역사학 교수인 화이트는 기독교의 창조 이해가 인간의 자연 지배와 착위의 토대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는 성서의 창조 신앙이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연에 대한 약탈가 훼손을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고대 동양이나 헬라 로마의 종교들은 동물, 나무, 강, 자연의 물체들이 인간과 같이 영적인 으미르 가질 수 있으며 외경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기독교의 창조주 신앙이 자연을 비신격화하고 비 신선시함에 따라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사라지고 자연은 단지 인간의 필요 충족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한편 기독교 창조 신앙이 생태계 파괴 원인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미국 록펠러 대학 교수로서 퓰리쳐상 수상자였던 듀보는 생태학적 위기의 원인이 기독교의 창조 신앙에 있다는 견해가 역사적으로 완전히 타당한 견해가 아님을 주장했다. 성경이 쓰여지기 오래전에 인간은 환경을 파괴하고 자연을 훼손했다. 인간을 통한 자연고갈, 그리고 역시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생태계 파괴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데카르트 세계관의 핵심 참으로 존재하는 실재(REALITY)를 정신과 물질로 보는 이원론이다. 그는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개체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했다. 정신의 속성이 사유라면, 물질의 속성은 연장(extensione)이다. 그는 인간의 물질이 아닌 사유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의 철학 명제가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인 반면, 자연은 연장된 존재로 정의된다. 그의 철학에서는 인간의 주체화와 자연의 대상하가 명확하다. 인간 사유외의 모든 것은 대상이되기 때문이다. 주체로서의 인간은 객체로서의 자연의 주인이다.

생태계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기독교가 창조의 보전 문제를 소홀히 했던점을 반성하고 생태학적 관점에서 창조에 관한 본문을 재해석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이 생태학적 신학이요 새로운 창조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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