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조직신학 개론

하나님아들 2024. 5. 9. 16:33

조직신학 개론


1. 序論
1. 조직신학
: ① 기독교 신앙의 내용(성서의 내용)을 가능한 명료한 언어로 주제에 따라 조직화
하는 것.
② 나아가서 신앙의 조항들에 대해 통일성을 추구한다.
③ 또한 다른 인간의 지적인 것들과의 내용과 관련하여 통일성을 이룬다.
*. 교의(Dogma) = 공식적인 교회를 통해 선포된 신앙의 교리.
교리(Doctrine) = 선포되지 않고 받아들인 교리.
2. 신학이란 ?
: 신학은 신에 관한 학문, 즉 하나님에 관한 사람의 이해를 인간의 언어와 논리를
통하여 구성하고 표현하는 학문이다. 이 개념은 본래 기독교가 형성될 때 희랍철
학자들로 부터 받아들인 개념으로 Theolia라고 표기된다.
- 개념 = 이것은 Theos( ε σ)에 관한 Logia(λ γθα) = 하나님에 관하여 인간
이해를 논리적으로 표현한 학문) 즉 하나님에 관한 논술, 이야기를 뜻한다
- 역사적 증명
= 초기 기독교에선 이 개념을 기독교의 변증의 목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삼위
일체론에 국한하는 좁은 의미로 쓰였으며 Augustin은 신성에 관한 논술 내
지 설명이라고 했고, 중세기에 이르러서 敎義學의 모든 분야로 확대되었다
3. 神學의 目的
: 성서를 통한 복음의 내용(神言)을 사람들에게 알게하여
① 구원에 관한 진리를 알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
어,(선교적 목적)
② 행복되고 보람있는 삶을 가지도록 하는데 있다.(실천적 목적)
그러기 위해 신학은 실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4. 神學의 根據와 規範
: 신학의 근거와 규범은 인간의 이성이나 자기의식, 경험이나 체험에 있지 않다. 또
한 교회의 전통에 있지도 않다. 성서가 전통의 근거하지 전통이 성서의 근거가 아
니다.
① 성서가 곧 근거와 규범이 되는데 그것은 성서의 중심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학의 궁극적 근거요 규범이다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하여 형성되고 성립된다. (BARTH =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 가능성을 인식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되신 하나님 아버지
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 신학의 근거와 규범이 된다.

5. 神學의 對象
: 신학의 가장 본질적인 연구 대상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활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즉,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행위가 본질적인 연구대상이다. 그러나 좀더 폭넓게
신학은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 하나님과 관계된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도
말해야하므로 신학은 계시, 성서, 하나님, 창조, 인간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구
원, 성령, 교회, 종말의 문제를 대상으로 삼으며, 또한 교회의 역사, 교회의 실
천, 변증과 7777 교도 이에 포함시킨다.
결국,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과 관계된 모든
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가진다.
6. 神學의 姿勢
: 신학을 영위하는 대전제는 신앙이다. 그 신앙을 중심으로
첫째 성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 성서언어 연구.
둘째 성서해석의 1,900년사를 충분히 알아야 한다.
성서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고, 이해되고, 연구되고, 표현되어
야 한다.
세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야 한다. - 성령의 조명하에 이성을 활용하여 신학한
다.
네째 신앙고백이 따라야 한다. - 신앙자 자신의 신앙의 결단이 요구된다.
7. 神學의 方法
: 크게 나누어 “위로부터의 방법”과 “아래로부터의 방법”이 있다.
1) “위로부터의 방법”
가장 전통적인 방법으로 위에 계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하여 아래
에 있는 인간 문제를 다룬다. 이것이 오늘날 두 가지면에서 수정되고 있다.
Barth = 기독론적 수정 =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
고 啓示論으로 부터 시작한다.
Moltmann = 종말론적 수정 = 하나님은 위에 계신 분이기 보다 앞에 계신 분이
다. 하나님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분이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 미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2) “아래로부터의 방법”
이 세계 안에 있는 것으로 부터 출발하여 위에 계신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연
구하는 방법이다. 즉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나 종교적 감정이나 실존적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시작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의 진리를 논하는 방법
이다. 대표학자 = P.Tillich

*. P.Tillich의 相關關係의 方法
신학과 철학과의 대조 시도가 가능함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여 철학적
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거기에 따라 성서를 통하여 신학적으로 답을 도출해 내는 시
도이다.
장점 = 철학과 신학의 유기적 조화를 시도한 점은 큰 공헌이다.
단점 =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답변을 주지 못했으며 추상적 이
론으로 철학과 신학의 조화를 꾀한 상관관계이다.
8. 神學의 課題
: 1) 신앙을 위한 과제 =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
신앙의 근거 : 신앙인은 자기가 무엇을 신앙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는데 신학은 이
러한 신앙의 내용을 방법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신앙의 내용이 신앙의 규범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啓示와 일치하
는가를 신학은 비판적으로 질문하고 양자의 더 가까운 일치를 위하
여 노력해야한다.
규범과 과제 : 또한 신학은 무엇을 신앙해야 하고 어떻게 신앙해야 하는가를 제시
해야 한다. 결국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 및 규범과 관제에 대
한 방법적 연구이다.
2) 敎會를 위한 課題
신학은 교회의 신앙과 선포와 모든 실천 및 삶이 교회의 主가 되는 예수 그리스
도 계시와 일치하는가를 질문하고 양자의 일치를 추구해야할 과제를 가진다.
즉,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 신앙과 인식작업의 기능이다.(P.Althaus)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바른 위치와 자세를 상기시키는 것이 신학의
과제이다.
*. K.Barth의 神學의 敎會的 機能
①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교회의 진술 내용이 타당 한가를 질문하면서 이 진술을
그의 근원과 대상에 비추어 판단함으로서 “교회의 진술을 따른다.”
② 신학은 불완전한 인간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종이어야 함을 상기
시킴으로서 “교회의 진술을 인도한다.”
③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심판 아래 있고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힘으로 유지됨
으로 신학은 “교회의 진술을 동반한다.”
3) 聖書的 課題
a)反復的 課題 : 성서의 내용을 단순히 반복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 기능은 성
서가 어떤 다른 사상의 영향을 받아 왜곡 되는 것을 반대하고
성서의 使信을 조금도 변조하지 않고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제
시하고자 한다.
단점 = 성서를 지나간 역사의 유물로 경직화시켜 버린다.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한 의미와 연관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b)創造的 課題 : 성서를 과거의 한 유물로 만들지 않고 오늘 우리 시대에 있어
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체험하고자 한다. 그래서 성서
의 사신과 그 시대의 상황과의 연관성을 중요시 한다.
단점 = 성서의 본연의 주제를 망각하고 그 시대의 정신이나 이데올로
기를 가지고 성서의 내용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4) 기독교 진리의 변증을 위한 과제
그 시대의 사조와 정신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서 이에 대한 기독교 진리의 타당
성 내지 의미를 제시해야할 과제를 가지는데 그러기 위해 다른 종교의 사상들
인간관, 세계관, 역사관 등을 연구해야 한다.
5) 학문적 과제
개념적 명확성 내지 합리성을 가져야 하며(어의학적 합리성)
논리적 명확성 내지 합리성을 가져야 하고(논리적 합리성)
방법적 일괄성을 가져서 (2방법적 합리성)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 P.Tillich -
9. 神學의 學文性(신앙의 학문으로서의 신학)
: 신학은 일반학문과 같이 보편타당성에 있지 아니하다. 신학은 어떤 다른 분야의
학문이 그 타당성 여부에 대하여 논의할 수 없는 그 자신의 학문적인 대상과 규범
과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신의 학문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신학은 다른 학문과 같이 한 특수한 대상에 대한 인간적 연구 활동인데 하나
님이라는 대상을 인식하기 위한 인간의 신앙을 방법적으로 연구한다.
둘째 다른 학문과 같이 하나의 일관된 인식의 방법을 따른다.
세째 과거로부터 전하여 오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근거에 의해 그 자신의 학문성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다.
10. 他神學의 分野들과의 關係
1) 성서신학과의 관계
: 조직신학은 성서의 내용과 교훈을 표준하여 소재로 삼는다. 그러면서도 성서학
자들의 해석에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성서학자는 대체로
분석적이고, 단편적이고, 귀납적인 방법으로 성서의 부분적이고, 개별적이고,
단절적인 해석을 내리지만 조직신학은 종합적이고, 전체적이고, 연역적인 방법
으로 성서의 전체적인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한다.
2) 역사신학과의 관계
: 역사신학의 교리사와 신학사상사의 형성과 발전과정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
고 그 교리 형성의 타당성을 알아보고 그 내용을 종합해서 체게적인 해석을 내
리고자 한다.
3) 기독교 윤리학과의 관계
: 오늘날 기독교 윤리학은 조직신학으로 부터 독립된듯 하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
학이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의식과 구원의 필요성을 망각하고 일반윤리학으로 되
어갈 위험이 있다. 기독교 윤리학의 특징은 인간은 자기의 본래성과 자기 실현
을 스스로 성취할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데 있다. 이것은 조직신
학의 전제이기도 하므로 이들은 구분되나 나뉠 수 없다.
4) 실천신학과의 과제
: 신학의 모든 분야는 실천신학을 연구해 가는데 있어 전제가 된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실천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실천신학은 모든 신학의 전제일 뿐 아니라 기
준이 된다. 나아가서 실천신학은 학문으로서의 전제일 분이다. 가치를 점검하고
그 본질을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조직신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11. 神學과 哲學과의 關係
(루터의 ?영광의 십자가?와 ?십자가 신학?을 참고하여 정리할 것.)
철학과 신학은 역사가 흐름에 따라 차츰 분리되어 왔으며 이 분리는 19세기의 무
신론과 함께 한층더 뚜렷하게 되었다. 오늘의 현실을 살펴볼때 신학에 대하여 뚜
렷한 관심을 가지고 양자의 종합이나 화해를 꾀하는 학자는 별로 없다.
최근 Tillich. Pannenberg 등의 시도가 있었으나 철학자들의 보편적인 공명을 얻
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은 과거와 같은 방법, 즉 희랍철학의 전통에 입각
한 자연신학적 방법으로 철학과 신학의 연관성 내지 종합을 시도해서는 않될 것이
다.
오히려 신학은 우주의 현실에 대한 철학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신학은 그 자체의
견해를 명백히 피력하여야 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인간의 이성의 전제에 입각해
연구하는 반면 신학은 삼위일체가 되신 하나님과 신앙이라는 전제에 입각해 연구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이 철학의 독자성을 인정할 때 양자의 참된 대화와
연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할 때 이 세계가 하나님으로 부터 오고 하나
님에게로 돌아가며 이 세계의 구원의 말씀에 철학이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
다.
12. 기독교 토착화의 문제
: 기독교 토착화란 기독교가 한 나라의 종교, 문화, 역사, 정신과 잘 조화되어 이질
감을 주지 않고 한 나라의 종교로 정착화 되는 것이다.
이것의 목적은 = 기독교를 한 나라의 토양 속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선교하고 한
나라의 민족종교로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있다.
문제점 = 기독교가 한 나라의 문화와 만날 때 그 나라의 전통종교와 정신에 동화
되거나 침식될 우려가 있다. (혼합종교)
결 론 = 토착화는 필요하다. 기독교의 정신과 특징을 잃지 않고 한 나라의 정신
과 문화를 성경적으로 개조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토착화는 무
익하다.
2.啓示論
1. 啓示의 意味
1) 어원 = 계시는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
αποκαλνπτειν (계시하다.신의 세계를 신 자신이 인간에게 전해 주는
자기행위) ⇒ 쓰고있던 가면, 혹은 껍질을 벗어버리고 드러내는 것.
2) 종말적 계시 = 역사의 종말에 완전히 드러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성자가
말하는 하나님은 예수 안에 계시되는 하나님인데 숨어있는 하나
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 그것을 계시라고 한다.

3)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계시
= 시간 안에서 인간과 그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
님으로부터 일어나는 사건으로 무신간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 안
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유일회적 사건이며 이 사건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4) 하나님의 행위, 은혜의 사건으로서의 계시
=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설명되는 인간과 그의 세계에 대한 하
나님의 사건
5) 구원의 사건으로서의 계시
=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은혜의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 즉 성서가 말하는 비밀은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 4), 5)는 은혜와 구원의 계시
**결론 = 계시는 인간의 실존을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
의 구원사건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계시는 어떤 신비한 환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2. 계시의 내용
1) 하나님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분노아래 있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계시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짐으로서 이 인간과 그의 세계를 초기하지 않고 찾아
오시며 자기와 화해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가 함께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의 계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게에 나타남, 눈에 보임을 뜻하는 동시에 이 세계
의 완성에 대한 약속을 뜻한다.
2) 하나님의 의와 사랑 ⇒ 신성 ( P 118→128 추가 공부할 것.)
3) 계시의 방법
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서 포함)
② 피조물을 통해서 (신존재증명)
3. 啓示의 分類
- 개신교 정통주의자 Hollaz의 분류 -
1) 일반계시 혹은 자연계시
2) 특별계시 즉 초자연적 계시
a. 직접계시 → 성서기자가들이 받았던 계시영감.
b. 간접계시 → 성서를 통하여 뒤의 세대가 받는 계시.
*. K.Barth와 E.Brunner의 접촉점(Point of contact)논쟁.
E.Brunner = “자연과 은혜”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형상(실질적 형상.형식적 형상)
실질적 형상은 망가졌고 인간의 “형식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에 접촉점이 주어져 있다고 보았다.

@. 접촉점이라는 것은 죄인에게도 없어지지도 않고 남아있는 형식적인 하나
님의 형상이요, 사람의 사람됨이며, 인간성이요, 언어능력과 책임성이다.
특히 언어능력, 즉 말을 할 수 있다는 범위는 좁은 의미에서 인간적인 것
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신인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포함한
다. 따라서 자연인이 하나님과 율법을 알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게 속
해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신적인 은혜를 위해서는 필요하고 불가결한 접
촉점이다.
K.Barth = "dkslek" 라는 책에서 절대 타자성을 주장.
자연계시가 인정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접촉점
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인식하게 하는 성령의 단독적 능
력을 제한하고, 계시의 인식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십자가의 주권적이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은혜에 대
해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접촉점이라는 것은 없으며 모든 사람
들 가운데 한 분 인간 예수가 있는데 그 분만이 ‘접촉점’일 수 있다고
본다. (바르트는 구약성서의 계시를 “기다려진 계시”로서 인정한다.)
4.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1) 일반계시(자연계시)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통한 계시.
주장: Althaus = 하나님께서 인간의 정신과 양심에 자기를 알려주었기에 인간
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 복음 이전의 다른 종교들에도 하나님
의 계시가 있다.
Tillich = 하나님은 ?존재? 혹은 ?존재 자체?인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를 떠나서 이미 모든 존재자들 안에 계시되어 있다. 즉 자연,
역사, 단체들과 개인들, 말, 이런 것들이 존재론적 충격을 받
고 황홀경(ekstase)에 빠지는 순간 하나님을 계시한다.
2) 특별계시(초자연계시) :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게시.
주장 : K.Barth = 자연계시를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계시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다.
3) 비교 결론 : 성서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모두를 말하므로 그리스도의 계시만
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을 통해 그의 영원
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셨다.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자연계시 그 자체는
우리를 성서의 하나님에게 인도할 수 없으며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즉 인간을 죄의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리
스도의 계시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입장
이 타당하다.

*. Analogia entis(存在類比) → 자연계시를 통해 신을 알수 있다. = 카톨릭
Analogia Fidei(信仰類比) (롬 12:6) → 신앙을 통해 신을 알수 있다. 예언자들의
믿음을 통해하나님을 알수 있다.
Analogia relationis(관계유비)
<루터교와 개혁교회의 계시 이해 비교>
5. K.Barth의 三位一體的 啓示
: 바르트는 일원론적 계시이해를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율법과 복음이 이원론적으
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복음의 형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
이거나 율법이거나 간에 언제나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를 율법
과 복음이라는 체계로 이해하지 않고 그의 신학 전체에 숨어있는 사고방식으로서
계시를 이해한다. 즉 계시를 삼위일체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한 부분을 계시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계시한다.
이 계시의 사건에는 계시자(Offenbarer)와 계시의 사건(Offenbarung)과 계시의
능력(Offenbarein)을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계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
에 일어난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문제점 = 양태론적으로 빠질 위험성이 있다. 성부 수난설.
*. Moltmann의 啓示觀
몰트만은 바르트의 계시 이해를 계승하는데 그는여기에 있어서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에 영향 받고 있다. (루터 =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참된 신학과 하나
님의 인식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성부는 무한한 사랑의 영 가운데서, 성자를 십자가의 고난에로(헤겔의 사랑의 원
리를 적용) 내어주며 성자는 성부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순종 가운데서 자기를 내
어주고 고난 당한다. 성부는 성령 가운데서 성자의 고난을 함께 당하며 성령 역시
이 고난에 동참한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죽음은 삼위일체적 사건으로 해석되며
따라서 십자가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되어야하며 삼
위일체론은 십자가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 루터교 신학자들의 계시관
하나님의 계시는 율법과 복음으로 이원론적 계시를 나타낸다. 즉 하나님측에서 율
법과 복음은 서로 분리되어 계시되며 인간측에 있어서의 죄와 신앙의 분리에서 반
영된다.
또한 하나님에게서는 분노와 은혜가 계시되며 인간에게 있어서는 죄와 신앙이 계
시된다.
*결론 = 그러나 이 두 계시는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를 계시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율법과 복음의 두 가지 형태로 자기를 계시
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율법이 계시하는 것을 말한다.

6. 발전적 계시와 완결된 계시
1) 발전적 계시 = Troelfsch와 Tillich가 주장한다.
Troelfsch에 의하면 계시는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완
결된 사건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종교들을 포괄하는 발전적 과정
인데 이것은 기독교에 이르러 그 정점에 도달한다.
Tillich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궁극적으로 계시이기는 하나
마지막 계시가 아니라 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의존적 계시
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의존적 계시에 대한 규범적 기능을 갖고 있다. 이것을 “규범적
계시”라고 한다.
틸리히는 계시의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이 역사는 “역사의 종말
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고 말한다.
2) 완결된 계시 (結論)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언제나 다시금 현재화되어 일어난다거나 예수 그리스
도의 어떤 새로운 규범적계시가 일어난다는 의미의 발전적계시를 인정할 수 없
다. 하나님의 직접적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결되었으며 이 계시는 과거
에 한번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7. 역사로서의 계시
Hegel : 역사의 관정 자체를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하도자 한 대표자이다. 그는 세
계의 모든 것을 絶對精神, 곧 하나님의 자기 疎外라고 했다. 모든 것 안
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것의 부정도 절대정신의 행위이며 따라서 역사는
하나님 자신의 활동이다. 이렇게 볼 때 세계사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Pannemberg
: 계시와 역사는 서로 대립되지 않으며 계시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로
서 일어난다. 즉 하나님은 자기를 간접적으로 계시하시는데 역사적인 사
건들을 통하여, 즉 하나의 수단을 토하여 이루어지는 계시이다.
그리고 역사로서 일어나는 계시는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완성되어진다.
따라서 역사의 완성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는데 계시는 이
성을 가진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자기계시로 인식 될 수 있다. 따라서 계시
는 보편성을 가지며 역사적 - 보편적 연구대상이 될 수 있고 검증 될 수
있다.
Pannenberg의 신학적 공헌
: 하나님의 계시를 수직적으로 이해하고 역사지평을 상실한 Barth의 계시
이해를 거부하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스라엘의 역사에 국한 시켰던
G.V.Rad의 지엽적인 계시관을 극복하여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로 이
해한 그의 보편사 신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말씀 위주의 신학에 대하여 역사의 차원을 열
어주는 점에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계시와 일반역사로서의 계시가 차이점이 없으며 뿐만 아니
라 이성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한다면 인간이 신앙을 스스로 갖게 된
다는 문제 점이다.
O.Cullmann
: 하나님의 구원사는 역사 안에 전개되며 세계사 자체를 위해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점진적 감소와 점진적 확대 형식
으로 일어나는데 신앙 가운데서만 인식된다. 구원사와 세계사는 동일시
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단지 세계사를 위해서 일
어날 뿐이다.
8. 啓示와 理性
: 계시와 이성의 관계는 성서에서 언급치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복음이 희랍사상이
지배하는 세계로 등장하면서 계시와 이성의 관계는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Augustin은 이 관계를 가장 깊이 연구한 학자인데 그의 영향을 받아 중세기는 계
시와 이성의 종합체계를 세웠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들의 체계를 거부하고 계시와 이성을 분리시켰다. 멜랑히톤
이 분리된 양자를 서로 종합시키고자 하면서부터 계시와 이성은 개신교신학의 중
요한 문제가 되었고 특히 Barth를 중심한 신정통주의신학은 이들을 엄격히 분리하
면서 격렬한 토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계시와 이성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이성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이성은
결코 신적인것이 아니라고 본다. 성서는 이성이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지
를 알지 못한다. 단지 이성은 인간의 죄와 악으로 말미암아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
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따라서 이성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의 노예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이성의 활동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할 수 없
다. 또한 이성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서 계시를 인식할 수도 없다. 이성은 계시를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에 응답하는 인간의 순종과 신앙 가운데
서만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 계시는 이성을 배제하지 아니하며 배제할 필요도 없
다. 인간의 이성도 계시 앞에서 순종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계시에 대한 신앙은 이성의 인식을 필요로하며 이성의 인식은 계시에
대한 신앙을 필요로 한다. 이성이 결여된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 내지 광신이 되기
쉬우며 그리스도의 계시를 신앙하지 않는 이성은 인간을 ?인간의 늑대?로 인간의
세계를 ?인간의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9.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성서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
Barth에 견해에 의한 하나님의 말씀의 세 가지 형태.
① 聖肉身된 말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계시로서 성육신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하는 인격이요
말씀하는 하나님이다. 결국 성육신된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다.

② 記錄된 말씀
기록된 말씀의 형태로서 즉 성서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두
번째 형태로서 성육신된 말씀에 대한 증인이며 이 말씀에 대한 선포이다. 그러므
로 성서는 과거의 사건에 대한 보도가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의 성격을 가진다.
③ 宣布된 말씀
설교와 성례전 등을 통해 말하는 것 즉 교회의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의 한 형태이
며 계시의 한 형태이다. 선포되는 말씀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리고 이 선포는 성서에 근거해야 한다.

3.聖靈論
1. 역사적 배경
축약하여 성서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로 집약해 볼 것.
역사적 교회가 성서를 인정(카톨릭)
개신교 성서의 권위가 교회 위에 있다.
Calvin = 성서 자체가 성서를 인정한다.
Barth = 교회는 성서를 인정하고 발견했을 뿐이다.
1) 초대교회 시대의 성서관
신약성서의 공동체는 세 가지 규범 즉 구약성서, 사도들, 주님 이 세 가지 규범
내지 권위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한다는 점에 있어 일치했다. 그러면서도
사도들의 말씀이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면 그리스도는 이 기초 위에서 가장 중요
한 모퉁이 돌이다. 그 후 1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사도들의 사망과 함께 그들의
말씀이 기록되었고 영지주의, 몬타니즘 등 이단들에 의해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 기록된 말씀을 정경화 할 필요를 느껴 주후 4세기 후반에 27권이 정경이
되었다. 이러한 성서는 유스틴(Justin) 이후 영감설을 통해 권위를 인정 받았고
Origen 이후 은유적(allegorical) 해석을 통해 권위를 인정받았다.
2) 중세
교회가 성서를 해석하였다.
3) 종교개혁 시대의 성서관
루터는 은유적 해석을 거부하고 문자적 이해를 주장했다. 따라서 성서가 성서를
해석해야 한다고 보고 성서는 그리스도의 빛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다.
4)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의 성서관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명제 아래 성서의 형성에 하나님이 주원인이고 인
간은 도구적 원인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성서의 저자요 인간은 도구일 뿐이다.
5) 계몽주의 시대의 성서관
신프로테스탄티즘은 성서는 다른 책들과 같이 한 역사적인 책이며 역사적으로 해
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적인 책’으로읽혀져 인간의 이성과 종교적
자기의식이 성서의 규범적 권위보다 앞서게 되었다.

6) 근본주의 성서관
고등비평을 거부하고 축자영감설을 강조.
7) 신정통주의 성서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문자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객관성이 없고 성령이 성서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
믿음으로 고백할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2. 正經의 基準, 正經과 敎會의 權威.
1) 正經의 基準
정경(κανον)이란 기독교의 모든 선포에 있어서 규범이 되는 것. 혹은 기독교
“진리의 규범”을 말한다.
- 신약성서의 정경의 기준 -
① 내용 자체에 있다. : 정경의 중심적 내용을 형성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
는데 있다.
② 사도성에 있다. :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도들, 이 사도들의 제자
들로 부터 유래하는 증언.
③ 주관적 기준 : 성령의 내적 증언.
2) 正經과 敎會의 權威
- Calvin = 성서 자체가 성서로 인정한다.
- Barth =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언, 곧 정경으로 확정하고 다른 문
헌으로 부터 구별, 선택한 것은 교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다.
정경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고 구별되어 선택되어 있었으며 교회는
이것을 발견하고 인정하였을 뿐이다.
- 로마 카톨릭교회
= 정경에 대한 교회의 권위가 가진 타당성을주장한다. 정경은 교회의
전통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정경에 대한 인정은 전통을 신
앙의 제 2원천으로 인정하는 것을 내포한다.
*3. 聖書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
1) 성육신된 말씀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성서
고전적 축자영감설에 있어 성서의 문자 그 자체는 하나님이 불러준 것이기 때문
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서를 통하여 성서 안에서 말씀하기 때
문이다.
Barth에 의하면 성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
그러나 오직 신앙의 기초위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 Barth에 의하
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는 것은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2)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서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증언이기 때문
이다. 또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를 가지기 때
문이다. 즉 하나님의 성육신된 말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하나님의 선포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요약>
① 성령이 성서 안에서 성서와 함께 증언하기 때문이다.
② 성서의 텍스트는 우리가 신앙의 응답 속에서 이 텍스트가 증언하는 내용에 순
종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약의 역사에 소속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③ 성서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증언하
는 점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4. 聖書의 靈感設의 問題
1) 성서영감설의 의도
성서영감설이란 성서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속에 아무런
오류도 있을 수 없음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성서영감설이 본래 의도하
는 것은
① 성서영감설은 성서의 저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② 따라서 성서의 권위는 신적으로 근거된 것이며 교회는 이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결국 성서영감설은 성서의 권위문제와 관계되어 있다.
2) 종류
Calvin의 성령의 내증론
: 영감으로 쓰여진 성령은 하나님의 영감이 성서의 저자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까지 성령으로 역사해야 성서의 뜻을이해할 수 있다는
그것을 성서영감설이라고 보았다.
① 기계적 영감설 : 글자 한자 한자까지도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대로 썼다.기자
는 도구이고 저자는 하나님이다.
② 축자 영감설 : 글자 한자 한자 까지도 영감되었는데 용어 표현을 선택하는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③ 부분 영감설 : 전체적인 영감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영감되었다는 뜻으로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축자영감을 부르짖는 자들
이 축자영감설을 주장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켜 사용.
④ 유기적(목적) 영감설 :
기자의 능력과 재질 환경에 따라 어휘선택이나 문장이나 표
현방법에 있어서 다양성은 있으나 전체가 유기되었다.
⑤ 역동적 영감설 :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관여하신 것이 아니고 기자들에게 교인
들과는 다른 영적 조명으로 성경을 기록케 하였는데 단어,
문장, 문체를 기자에게 맡기셨다.
5.성서 해석학
1) 유대인의 방법(구약시대 방법)
① Midrash방법 : 구약시대 랍비적 방법으로 율법서를 매 절마다 조직적으로 해석
② Mishnah방법 : 유대인의 규례를 위주로한 해석.
2) 초대교회 : 은유적 해석(Origen) = 단어 하나가 영적인 뜻을 하나씩 갖고 있다
는 것. Clement가 시초, Origen - Augustin까지 초대교회 신학
자들이 보편적으로 사용.

3) 현대신학자
① 슐라이어마허 : 주어진 택스트를 해석해야할 과제를 넘어서서 이해에 관한 하나
의 ‘보편적 해석학을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문법적해석 이외에 심리학적 해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② 딜타이 : 텍스트 이해가 심리학적 과제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해석학이란
‘글자로 고정된 삶의 표현을 이해하는 기술론’이다고 함.
③ R.Bultmann : 인간의 행동과 체험의 가능성들이 거기에서 부터 이해될 구 있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구조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과거에 기록된 성서의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것도 ”텍스트와 해
석자의 결합성“에 있으며 성서의 테스트가 말하는 ”내용에 대한 전
이해“가 성서해석의 ”전제“이다고 함.
④ Barth : 실존론적 해석에 반대하는데 특히 인간의 前理解에 대해 반대한다. 이
것은 인간이 성서를 이야기 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감화가
먼저 있어야 성서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성서의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결합성 내지 연속성을 거부한다. 죄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 가
능한 것이다. 성서 텍스트와 해석학자의 연속성은 하나님의 이 은혜롭
고 자유로운 결단에 있으며 이 결단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서 발견한다. 따라서 해석학적인 연속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오는 것이다.
⑤ Pannenberg : 성서를 포함한 과거의 텍스트가 오늘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
은 보편적 역사의 체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보편사의 개념에
서 텍스트를 발견한다.
⑥ Moltmann : 해석학은 글자로 고정된 삶의 표현들을 이해하는 기술학일 뿐만 아
니라 정치적 컨텍스트 안에서 모든 역사적 삶의 표현들을 이해하는
기술학이다.
*. 유형학적 해석 : 구약성경의 해석방법이다. 즉 신약은 구약의 유사성을 통해 보
아야 한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V.Rad)
실존론적 해석 : 성서는 우리의 실존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알
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한다.
① 성서는 당시의 우주관에 대해 옷을 입고 있으므로 그것을 벗
겨야 한다.
② 우리도 우리의 실존이 어떠한가를 이해하고(前理解) 성서를
보아야 한다.

*. 불트만이 비신화화
: 불트만에 의하면 성서 이해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차안적인 형이하학적 세계관인
데 성서는 모두 신화적 세계상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런 성화론적 표상을 비판하
면서 비신화화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불트만에 있어 신화의
과제는 그 신화를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화의 실존론적인 의미를 밝혀내려
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즉 신약의 신화론적인 것을 비판하는 부정적 의미보다는
그 속에 숨겨진 실존론적 의미를 밝힌다는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비신
화화는 구속사건과 연결되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실존적인 사건으로 이해하여 非본래적인 것은 죽고
본래적으로 그듭 태어나는 것이다. 본래적인 실존론으로 부활하는 것이 성서의
비신화화를 바로 이해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4.神論
A. 神의 知識
B. 神의 實存(본질, 속성, 진리)
C. 神의 役事(창조, 천사론)
D. 神正論
E. 救援論
F. 豫定論의 歷史
G. 三位一體論
* 1. 회의주의 : 불가지론이 형성되기 전에 인간의 지식 취득에 대한 회의주의가 선행
했다. 이것은 소피스트들과 키레네학파의 인식론의 영향을 받아 “인
간의 이성은 물체 내부의 실체에까지 파고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물체 뿐이다.” 따라서 “이것이
그렇다고 하는 것보다 나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혹은 그것이 그럴 것
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게 된다. 지식에 대한 이런 회의주의에 대해 Augustin은 반박한
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
다”고 함으로서 기독교 인식론의 확실성을 강조했다.
17C 경험론, 과학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더 확대되어 형이상학적 대상
과 신에 대한 회의주의는 신 죽음의 신학을 이끌어간다.
2. 불가지론 : 신의 존재에 관해서 우리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신은 절대적 존재요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신앙은 있어도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으므로 신에 대해서는 모른
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불가지론(Agnosticism)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Hoxley이다. 그의
불가지론은 현대 자연과학과 진화론과 유물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결과 : ① 모든 사물의 판단의 기준을 내재화한다.
② 초경험적 대상에 대해서는 적극적 판단 보류.
③ 과학이 제공한 자료를 최대한으로 신용.
④ 경험을 토대로한 실증주의 입장을 긍정.
3. 否定神學(Theologia Negativa)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우리는 有限者이기에 하나님이 무엇이
라고 말할 수 없다. 무엇이 아니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Origen에서 시작
T.Aquinas가 대표.)
: 우리는 상대적 존재요 죄인이기 때문에 직접 신을 볼 수도 없으며 우리의 思考
나 言語로서 絶對者이신 신을 肯定的으로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의 肯定
은 신을 인간의 말로 制限하는 結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Origen이 처음으로 기독교에 도입했다.
: 신은 存在 自體이기에 우리의 知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신을 말할 때
否定的으로 말해야 한다.
T.Aquinas = 신에 대해서는 긍정적 표현으로는 정의할 수 없다. 부정적인 묘사로
서 그의 본질을 어느정도 말할 수 있다.
P.Tillich = 신을 모든 존재의 근원 또는 존재자체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 신
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비판 :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자아계시를 경시하는데서 초래된 매우 소극적인 신
이해가 되고 만다. 부정만으로서는 신에 대한 긍정은 조금도 얻을 수 없다.

1. 우주론적 증명 : 우주에는 시작이 있고 그 시작에는 반드시 최초의 원인이 있을
것인데 그 원인이 곧 하나님이다.
비판 = 인과율의 근거가 무엇이냐가 문제가 된다. 하나님에게도 원인을
적용해야 된다는 근거가 된다.
2. 목적론적 증명 : 우주 안의 모든 존재들은 질서, 법칙, 조화가 있는데 이것을 한
목적전달만 들어낸 정신적 존재, 정신이 곧 하나님이다.
비판 = 질서와 인간에 의해서 초래되는 모든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져야
한다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3. 존재론적 증명 : 모든 인간의 내면에 신에 대한 관념, 사상, 신념, 종교성 등이
(ANselm) 있는데 이것을 생득적으로, 직관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에
상응하는 신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이론.
비판 = 신은 개념이나 사물은 아니다. 생각으로 신이 존재한다 볼 수 없
다.
4. 도덕론적 증명 : 인간 사회에 있는 도덕법은 지고신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그 지고
신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Kant)
비판 =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가치가 신을 증명할 수 없다.
5. 역사적 증명(인류학적 증명)
: 신이란 관념을 역사적으로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데 이것은 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비판 = 신적 감정으로 신의 존재를 말할 수 없다.

<종합비판> : 위의 다섯 가지 방법은 자연을 통한 간접적 지식에 불과하다. 이것으로
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고 우리와 어떤 인격적 관계를 가지는가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이 방법을 의지해서는 않되고 하나님의 계시를 통
해서만 바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계시만이
신을 증명할 수 있다.
A. 神의 知識 (神知識)
1. 계시를 통한 신지식
1) 啓示 : “아포카룹시스”를 번역한 말.
“나타나게 하다.” “뚜껑을 열다.” 라는 뜻.
- 구약성서에 계시된 神
① 역사를 주관하시는 신
② 성자로 나타나심과 동시에 자비하신 자.
③ 이스라엘에 계시된 신은 세계의 창조주요 주관자.
- 신약성서 = 공관복음 = 구약시대에 숨겨지고 가리워진 신과 그의 나라가 이
역사 속에서 계시될 것을 강조.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계시자인 동시에 신 자신이라고 한다.
2) 그리스도를 통한 신 지식.
: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계시자로서 성육신하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
님과 그 본체를 같이 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 삼위일체론이나 예수 그리스도
의 이성과 인성에 대해 우리는 케리그마적 (역사적, 지적) 취급보다는 예배하
는 태도로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3) 성서를 통한 신지식
: 신언으로서의 성서는 신의 명칭들을 통해 신을 알게 한다.
종교철학에서는 하나님을 “IT” “HE”로 표시하나 기독교의 신은 "THOU"(성서의
계시의 신)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이다.
*.유신론과 기독교신학을 같은 차원에서 보는 Van Til은 그리스도의계시의 절대성을
약화하는 경향이 있다. 또 대다수의 종교철학자나 철학적신학을 주장하는 학자나
과정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계시성 보다 일반계시 또는 합리주의적 유신론을 더
강조하므로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절대계시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2. 被造物을 통한 神知識
*. 합리주의적 신존재증명 ↔ 신비주의적 신존재증명(이 종성 참고)
???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도덕성을 토대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요청하여
따라서 신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다.
1) 우주론적 증명(consmo logical argument)
( Aristotels → Thomas Aqunas → 이 세계의 보편적 모습을통해 하나님의 존재
를 알 수 있다.)

: 모든 결과는 적당한 원인에 기인하는데 우주는 시작이 있고 그 시작에는 반드
시 최초의 원인이 있을 것인데 그 최초의 원인이(이 최초의 원인은 부동의 동
자로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인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다.) 곧
하나님이다.하는 이론.
이 증명은 이 세계의 운동과 원인, 그리고 이 세계의 가능성존재와 필연적존재
로 부터 출발한다.
반대이론 : 인과응보의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설명이 인과율
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모든 것은 대체로 이 인과율에 의해
생성 소멸 된다해도 그것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치 못한
다. 따라서 이 증명에서 나타나는 신은 너무나도 추상화된 신이다.
자유,공의, 사랑,자비 같은 성품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이다.
2)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
: 우주 안의 모든 존재물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놀라운 조화, 법칙, 질서가 있
다. 그러나 물질은 스스로 어떤 목적이나 질서나 법칙이나 조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질서, 법칙, 조화 이런 것을 만들어낸 놀라운
정신적 존재가 있다는 것이 상정되어 그 존재정신이 신이라는 이론이다.
즉 우주는 지성과 조화를 가진 신적존재를 표시한다는 것이다.
*에밀부르너 : 이 우주 자연 신비로움을 보며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우연
히 됐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것이 아니다.
*칸트 : 어느 정도 이 증명을 인정.
3)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
이 증명의 대표는 Anselm이다.
: 이 증명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부터 출발한다. 신의 관념이 곧 신의 실재와
직결된다. 즉 모든 사람의 내면에 신에 대한 관념, 사상, 신념 혹은 종교심
이 있는데 이것은 생득적으로 직관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에 상응하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 칸트의 반대이론 :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인데 그러나 신
에 대한 생각만으로는 신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즉 존
재는 관념의 한 부분이 아니다.
- 기독교 신학적 입장의 반대
: 이러한 신존재증명을 찬성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사고방
식과 논리에 의해 얻어진 결론은 너무나도 사변적이고 추상적
이며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관념을 아무리 종합해도 거기에
실재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서는 이런 신 이해를 배척한
다.

4) 도덕론적 증명
: 도덕론자로서의 신에 관한 지식은 실천이성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참된 행
복은 도덕법과 일치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최고의 선의 가능성을 위해 하나님의 존재가 돌연적이어야 하는데 이
것은 실천적인면에 있어서의 요청이다.
하나님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어서 지식으로 얻을 수 없다.(불가지론 주장 -
Kant)
신, 자유, 영혼은 경험이 않되는 것이기에 도덕이 있어야 한다. 도덕은 거러
한 것들을 요청한다. 이것을 도덕론적 증명이라 한다.
5) 역사론적 증명(또는 인종학적 증명)
: 신이란 관념을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신이 실재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 개념은 종족의 발전과 함께 발전하기도 하고 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예배의 대상을 생각하게되며 그러한 존재가 실재함을느끼게 한다. 그
느낌에서 신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킬케로 - 락탄티우스(초대교회) - Calvin - 근래에 M.Kahler 주장.
그러나 이 증명은 사실에 있어서 증명이라 말할 수 없다.
종합비판
: 이런 다섯가지 합리적 방법은 어디까지나 자연(인간이성, 오성, 도덕심)을 통
한 방법으로 간접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방법으로는 신이 구체적으로 어
떠한 분이며 우리와 어떠한 인격적 관계를 가지시는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이 방법에 의존해서는 않된다.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계시만이 신을 증명
할 수 있는 것이다.
B. 神의 實存(本質, 屬性, 眞理)
1. 하나님의 본질(본성 = Essentia)과 속성(Attributa)
전통신학 :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진 그의 성격을 그의
속성이라하고 피조물과의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 자신이 가진 성격을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부른다.
문 제 점 :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이라는 두 가지 다른 개념을 사용할 때 하나님
은 둘로 나누어 생각될 수 있다.
현대신학 : 그러므로 본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속성이라는 개념만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진 속성과 하나
님의 내적인 존재 자체가 가진 속성을 구분하기도 한다.
1) 비공유적 속성(절대적 속성)
: 그의 영원한 존재 자체 안에 계신 하나님이 가진 속성, 단순성, 단일성, 무한
성, 영원성, 불변성, 편재성, 전지, 전능.
① 영성(Spirituality) = 하나님은 관념이 아닌 실체로서 영적존재이다. 하나님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비물질적이고 무형체적 존재이
며 불가시론적 존재이고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며 인
격적 존재이시라는 것이다.
② 자료성(self-existence)
=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원인적 존재라고 부를 수
있다. (출 3:14)
③ 광대무변성(Immensity)
= 공간과의 관계에서 무한성을 가진다.
유한한 공간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 편재성과 동일한 느낌을 준다.
④ 영원성(Eternity) = 시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무한성을 의미.
⑤ 편재성(Omnipresence) 내재성에 치중.
= 패조물과의 관계에서의 하나님의 무한성의미.
⑥ 전지(Omniscience) = 하나님 자신과 다른 모든 존재들에 대해 완전히 아신
다.
⑦ 전능(Omnipotence) =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본질 본성에 의해 제한된
다.
⑧ 불변성(Imnutability)
= 하나님은 그의 본질들이 불변하고 그 속성들이 불변하고
그의 뜻과 약속이 불변하다.
2) 공유적 속성(상대적 속성, 활동적 속성)
인간을 위한 행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가진 속성. 공의, 사랑, 거룩.
① 神性(거룩, Holines)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분리, 초월해 계시고 모든 도덕적, 악, 죄에서 분
리 떠나 계신다.
② 善하심(Goodness)
하나님은 그 자신으로서 영원히 완전히 선하시며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 선
하시다. 그리고 우주에 있는 모든 선의 원천이다.
③ 사랑
하나님의 창조물 중 이성을 가진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선은 사랑의 성격
을 띤다. 그 사랑에 의해 죄인을 구원하신다.
④ 恩惠
인간에게 언제나 공로가 없는데도 베푸시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⑤ 公義
구약“공의” - 체다카.
신약“공의” - 디카이오수네.
Paul ??공의적의 마 5:10, 롬 3:24??인간적 차원에서 구별되나
??도덕적의 마 6:1. ??신은 동시적으로 주관하신다.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존재에 존재장향과 행동규범을 제공해 준다.
인간 공동체의 규범인 인간 이성, 양심, 체험으로서 부족하기에 인간 공동
체의 표준을 세우기 위해 성서를 통해 神言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말
해준다.

C. 神의 役事(創造, 攝理, 救援, 惡과 神正의 問題)
1. 하나님의 사역
1) 창조사역 : 단일회적 사건이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공의로우신 야웨 하나님이 완전하게 하신 사역이다.
사역의 결과에 대하여 더 첨가하거나 수정하거나 어떤 부분을 제거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사역이었다.
이 창조사건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이 사역의 결과로서 발전하고 성
장한 것이다.
*. 기독론적 창조신앙
창조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구원의 새로운 경험을 통하여 규정된다.
구약성서의 창조신앙의 근거는 구원사의 신앙에 근거하므로 기독교의 창조신앙
의 근거도 구원의 사건, 곧 그의 계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창
조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 하나님은 창조자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
므로 창조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전제와 시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새
로운 창조를 뜻한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만의 창조사역이 아닌 성자와 성령이
참여하고 있는 삼위일체적 사역이다.
2) 십자가의 사건 : 일회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일류 구원사역의 결정적 사건 으로서 그 한 사건으로서 인류
구원의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다.
2. 攝理論
이 말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그의 전능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자비하심
가운데서 유지하고 동반하며 인도하여서 그가 계획한 목표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
다.
1) 개념 : 라틴어 Provideo에서 나온 말과 희랍어 προνοια에서 유래된 말로서,
미리 본다(예지), 미리 보시고 아시고 그것에 대해 대책을 세운다
라는 뜻이있다.
2) 의도 : 섭리론은 창조자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의 관계는 과거에 일어난 창조의
사건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신학적
사변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과 신뢰를 표현하고자 한다. 또
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선포이다. 즉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우연이나 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섭리론은
고백하고자 한다.
3) 근거와 출발점
: 이 세계의 현실, 인간의 경험이 아니고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자기 계
시인 예수 그리스도사건에 있다.
그가 지으신 피조물의 주가 되신 하나님이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을 배우고자 하시며 그의 의도와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답변된다.

4) 섭리론의 내용
: 하나님은 세 가지 활동을 통해 그의 피조물들을 돌보신다.
① 維持(CONSERVATIO)
: 하나님도 그가 창조한 피조물의 세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 그
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당하는 하나님으로서 그의 사랑과 성실하심을 보이
신다. 따라서 그의 능력은 태초의 창조부터 지금까지 계속 활동하시는 것
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지는 계속적 창조이다.
② 同伴(CONCURSUS)
: 하나님은 피조물 세계를 유지하시고 또한 피조물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안에서 함께 활동하며 이것을 동반하신다. 이 활동은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당하기로 한 하나님
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③ 引導(gubernatio)
: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피조물 안에 함께 있고 그 속에서 그의 목적을 이
루며 결국 모든 것을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인도하신다.
5) 섭리의 구분
① 보편적 섭리 : 피조물 세계 전체에 보편적으로 해당하는 하나님의 섭리.
② 특별한 섭리 :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
리스도 안에서 고난 당하신 인간에게 해당하는 하나님의 섭리
③ 가장 특별한 섭리
: 신앙의 순종과 사랑과 감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찰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하나님의 섭리.
3. 구원사와 세계사
1) Pannenberg의 구원사와 세계사의 一致
Pannenberg는 Hegel의 역사이해의 반복으로서 세계사와 구원사를 같은 것으로
본다. 헤겔은 세게사의 모든 것은 정신의 자기 활동이라고 했는데 이 정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세계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기 활동인 것이다. 즉 예수 그
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의 보편적 실현인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앙의 영역에 제한되어서는 않되고 세계사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Pannenberg는 구원사와 세계사를 분리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는
“구원사를 일반적인 사건과는 다른 종류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있을 수 없
다”고 하며, 예수 안에 미리 앞당겨 일어난 구원사는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원칙
상 이성에 의하여 인식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적인 구원의
사건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며 세계사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를 뜻한다며 세계
사는 곧 구원사를 뜻하게 된다는 것이다.
2) 구원사와 세계사의 관계성
Pnnenberg : 예수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있으며 이스라
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역사이다.

O.Cullmann : 구원사는 점진적 감소와 점진적 확대의 형식으로 일어난다.
즉 창조 → 인류 → 이스라엘 → 남은자들 → 예수 그리스도(감소
의 형식)으로 일어나며, 예수 그리스도 → 사도들 → 최초의 공동
체 →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교회 → 세계(확대형식).

점진적 확대
창 인 이스 남은 예 수 사 최 초 교 하나님의
조 류 라엘 자들 그리스도 도들 공동체 회 세계통치
점진적 감소 (역사의중심)

결국 이런 형식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사는 “역사 안에서 전개되며”
이런 뜻에서 구원사는 역사에 속한다.
결론 = 세계사의 내적인 근거와 의미는 구원사에 있다. 구원사를 통해 세계사는 보존
되고 구원 받을 수 있다. 구원사의 목적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구원하는데 있
다. 따라서 구원사는 세계의 중심이요 열쇠이다. - K.Barth -
반면 세계사는 구원사의 외적인 근거를 형성한다.
3) 구원사와 세계사의 구분
이런 밀접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동일시 될 수도 없다.
- 피조물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으로, 하나님의 활동을 피조물의 활동으로 보며
따라서 세계사를 곧 구원사로 이해하는 Hegel, Pannenberg의 입장을 거절한다.
- 또한 구원사를 세계사의 ?안에?있는 것도 아니고 ?곁에?있는 것도 아니며 단지
?모든 역사의 계속적위기?라고 보는 Barth의 입장도 동의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세게사 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모든 피조물들 안에 계시면서 그들의 고난을 함께 당하
며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고 그들을 그의 구원의 목적으로 인도하고자 하신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속한다. 구원사는 ‘하나의 은폐된 역사’이다 이것
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신앙 될 수 있다.
*. 분명 이 두 역사는 거부되나 구원사는 세계사적 지평(HORIZONT)을 상실하고 개
인의 내면적실존의 역사성으로 위축되어서는 않된다.
구원사는 세계사적 지평에 있다.
4) 신앙을 통한 구원사의 인식
구원사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
(Pannemberg)이 아니라 은폐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가운데서만
인식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재하면서 성령의 빛과 능력 가운데서 인식
된다. 궁극적으로 구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에 대한 신앙 가운데
서만 인식된다.


*. 神正論
라이프니츠로 부터 유래하는 개념인데 “하나님이 의로운 분이라면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하는 문제인데 여기서 악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의로움이 문제가 된다.
악을 막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전능성이 문제가 된다.
*Augustin = 하나님의 창조에는 악을 포함하지 않고 선의 결여가 악이다.
*Lutter = 악은 비본래적인 사역으로 이 악을 통해 선을 이룬다.
*P.Tillich = 악은 비존재이다.
*K.Barth = 하나님께 도전하려는 타락된 인간 사건과 카오스가 하나님께로 위협적
으로 나타나는 파괴적 세력이다.(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것이다.)
<전체 결론> 현대신학자들이 악의 실체를 인정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惡과 神正의 問題 * 하나님의 전능성과 하나님의 義性이 문제다.

神正(Theodizee)이란 하나님의 義認 내지 칭의를 뜻하는데 라이프니츠로 부터 유래하
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 세계의 악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의로운 분이라고 불릴 수 있겠는가의 문제이다.
“만일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 ” 하는
것이다.
Lutter : 악은 선을 위하여 있다. 하나님은 악을 통하여 선을 요구하며 죄를 통하여
의를 완성하신다. ”노예의지“에서 하나님이 인간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다
고 인정 받아야 한다고 한다. (소극적)
Hegel : 세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기 疏外로부터 오며 하나님의 자기 활동이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은 아니며 모든 유한한 것은 그 속에
부정적인 것 즉 악한 것, 불완전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것은 신적 정신 혹은 영(Geist)으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자신으
로부터 출발하여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변증법적 운동으로부터 오는데 악
은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 활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않될 필요한 요소이며 정
신에 의하여 부정되고 고양된다.
결국 Hegel에 있어 악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정립된 것이다. 왜냐하면 세
계의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악은 선으로 넘어
가는 과정 속에 있으며 악의 요소가 전혀 없는 완전한 선이란 유한한 세계
속에 있을 수 없다.
P.Tillich :
악은 비존재(Nichtesein)로 생각되고 있다.
비존재란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론적 구조를 형성한다. 모든 존재자들은 비존
재 곧 無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유한한 존재로 존재한다. 실
존하는 모든 것은 존재의 힘에 참여하고 이는 동시에 비존재와 화합된다. 그
러므로 실존하는 모든 존재자들은 비존재 곧 악의 위협과 존재의 힘 사이의
긴장관게 속에 있다.
절대적으로 선한 것과 절대적으로 악한 것으로 부터 선한 것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악의 근원 :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고자 하는 사건, 곧 하나님과 같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타락의 사건과 함께 無(카오스)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다시 無
로 돌리려고 하는 위협적인 세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파
괴하는 세력으로 곧 악으로서 모든 죄된 행위다. 사건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
타난다.하나님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악으로 나타나는 무를 허용하셨는데 결
국 무로 인하여 인류가 당하는 불의와 고난은 인류 자신이 이끌어 온 귀결이
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참된 자유를 상실하고 무를 악
으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해결 : 이러한 인간의 악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
이 악은 문제를 해결 하셨는데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물이 되시고 피조물의 죄와 벌과 고난과 심판을 스스로 당한다. 이와 같
이 악에 대하여 궁극적인 승리가 일어난 곳이 골고다의 십자가이다. 부활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이 승리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피조물 세계 속에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악은 하나님에 의하여 극
복된 악이다. 그러면서도 악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활동하지만 예수 그리스
도가 다시 오실 때 더 이상 그의 세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 하나님의 사역 -
작정(DECREES) : 장차 일어날 모든 사건들을 미리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것이다.
예 정 :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재적인 일.
Calvin의 예정은 절대적 예정이고 이중적 예정이다. 인간의 공로와 관계없이 하나
님이 예정하시고 하나님이 선택할 인간과, 유기할 인간을 이중적으로 예
정하셨다.
Barth의 예정은 이중적 예정으로 하나님이 인간들을 위하여 선택하셨고 하나님 자
신을 위해서는 유기를 예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만인구원설은 아니다.
하나님은 저주와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는 반면 이 인간이 당해야 할 저주와 죽음을 자기에게 예정한다.

E. 三位一體論
1. 삼위일체론의 의도 :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고백하고자 한다.
2) 성령을 통하여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언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고백하고자 한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오셨음과 그의 현재적 오심과
그의 미래적 올 것임을 동시에 고백하고자 한다.
4) 모든 종속론적 표상과 양태론적 표상은 삼위일체론과 함께 거부될 수 밖에 없다.

*. 양태론 :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태에 불과하다.
2. 세 人格들의 仕役
1) 內在的 三位一體와 經綸的 三位一體
(1) 內在的 三位一體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영원히 자기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역, 본질의
삼위일체이다. 두 가지 사역을 가진다.
① 성부로 인한 성자의 출생.
② 성부와 성자를 통한 성령의 내어쉼.
(2) 經綸的 三位一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계시의 삼위일
체이다. 즉 성부의 창조(creatio), 성자의 구원, 성령의 성화로 구성된다.
3. 삼위일체론은 십자가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삼위일체의 흔적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얼굴 위에 있다.
4. Filioque - 동서방 교회 분열.
동방교회는 신성의 근원이 오직 하나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성령은 오직 성
부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하였다.
서방교회는 성령은 성자와 아무 관계 없이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없다
고 한다. 왜냐하면 성부는 오직 성자와의 관계에서만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방교회는 성령은 성부와 그리고 성자
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여 “그리고 성자로부터”(Filioque)라는 단
어를 단어를 삽입했다. -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서 -
이 때문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분리되었다.
5. 학자들의 견해.
1) Arius : 종속론 There was when He was not. = 그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
성부는 가장 높은 실체이고 나뉘어질 수 없는 단일성으로 인해 모든 존
재자들의 해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모든 존재자들의 고통을 위한 중
간존재인데 하나님의 최초의 피조물이다. 그는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해
모범이나 하나님 아래에 있는 존재이다.
2) Tertulian :
종속론과 양태론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삼위일체론의 기초형성.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계시지만 혼자는 아니고 그의 단일성 수적인 단일
성이 아닌 이미 구분되어 있는 단일성이다. 성자는 영원한 출생의 행위
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를 통하여 성자로 된다. 성부는 성자
를 성령을 통하여 파송하며 성령은 신적인 실체의 단일성을 통하여 성부
와 성자와 결합되어 있다. 이것을 터툴리안은 UNA SUBSTANTIA - TRES
PERSONAE(한 실체 - 세 인명)이라 하고 Disti, non divisi, discretim
non separati(구분되어 있으나 나뉘져 있지 않고 구별되어 있으나 분리
되어 있지 않음)라고 표현했는데 한 마디로 TRINITAS(삼위일체)라고 말
한다.

3) 양태론(modalism) : Sabellius
하나님은 한 분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세 가지 양태를 취한다. 성부의 양태 속에서 그는 창조자로
성자의 양태 속에서 그는 구원자로
성령의 양태 속에서 그는 생명을 주시는 자로
나타난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세 가지 방식 내지 양식이
다.
4) K.Barth
삼위일체로의 뿌리를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발견한다.
즉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계시자와 계시의 사건과 계시의 능력을 볼 수 있는데
따라서 계시는 삼위일체로의 근거이고 삼위일체론을 계시에 대한 기독교적 해
석이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한분 하나님의 반복 혹은 존재양식 이라고
한다. 결국 바르트는 양태론으로 빠져있다.
5) Moltmann
Moltmann은 과거와는 달리 “세 분의 신이 어떻게 하나의 신이 될 수 있는가 ”
라고 물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Moltmann은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숫자
상의 하나가 아니라고 한다. 동일에서 “하나”라는 단어는 EINIG(하나로 혹은
일치하여)와 EINER(숫자 1)가 있는데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EINIG라는 것
이다. Moltmann은 이러한 그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기 위해 Hegel의 사랑의 원
리를 도입하여 삼위가 하나되는 것은 세분 하나님 사이의 깊은 사랑의 관계에
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하면 삼신론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神 名.
1. 구 약
1) 엘 (ㄹ에) = 능력 있다. 강하다. 주가 된다.
하나님에게만 사용될 뿐 아니라 강한 인간이나 능력있는 천사,이방
신에게도 적용(217회)
2) 엘로아(헐?ㄹ얘) = 두려움의 대상, 존경의 대상.
3) 엘호힘(ㅁ?히ㄹ얘)
= 강한 자, 권능 있는 자, 주관자, 존경 있는 자라는 뜻.
재판장에게도 쓰이고 천사, 이방신에게도 쓰임. 경외의 하나님(창
조주)
4) 야웨(ㅎ?ㅎ?)
= 고유명사, 스스로 있는 자.(자존자)
5) 엘솨다이(?덜써ㄹ얘)
= 전능자. 언약을 세울 때는 엘솨다이, 약속을 성취하실 때는 야웨로
보여 준다.

6) 츠바오트(ㅌ?ㅇㅇ까쳐)
= 야웨라는 말과 복합되어 사용된다.
예) 만군의 여호와(삼상 7:17에서 부터 사용되기 시작)
전쟁 군대에서 유래. 전쟁하시는 하나님.
7) 아도나이(?나도야)
= 심판자, 통치자, 주권자 하나님, 구속의 주.
8) 엘리욘(???려?) = 노래나 시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 지극히 높으신 자
라는 뜻.
2. 신 약
1)  θεοσ = 하나님에게 족용된 일반적인 명칭. 개인적인 하나님.
2) κνριοσ = 주. 법적 권세자. 통치자.
3) πατηρ = 아버지의 개념. 영적자녀로서 윤리적 개념.

5 . 基 督 論

A. 基督論의 出發點
B. 歷史的 예수와 케류그마적 그리스도
C. 그리스도론의 方法
D. 예수 그리스도의 歷史的 過程
E. 예수 그리스도의 人格
F. 예수 그리스도의 使役

1. 그리스도론의 出發點
그리스도론은 역사의 예수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 아니면 그의 공동체의 선포로
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
1) 19C 역사적 예수의 삶에 대한 연구는 교회의 경건이 채색하여 놓은 신비롭고 종교
적인 예수의 모습을 벗어나서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예수 자신에게로 다시 말해
“역사적 예수”를 찾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따라서 처음 기독교의 증언과 역사적
예수와의 불일치를 지적하고 예수와 바울 사이에도 불연속성을 주장하였다.
2) Martin Kahler
역사가가 연구하는 이천년전의 예수가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선포되어 왔
고 지금 하나의 현실로서 경험되는 신앙의 그리스도가 더 중요하다고 하여 예수
및 사도들과 그리스도 선포를 분리시키는 것을 반대하며 참된 그리스도는 설교된
그리스도이라고 한다.

3) Bultman = Kahler의 생각을 계승.
예수는 자기 자신을 선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선포한 것이 아니
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 선포자인 예수
가 최초의 공동체에 있어서 선포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
한 역사적 예수와 최초의 공동체가 신앙하였던 케류그마의 예수는 알 수가 없고
선포되어진 예수만 만날 뿐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역사적 예수가 누구인가
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케류그마 안에서 선포되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이다. 이 케류그마 안에 예수가 현존해 있다. (불가지론적 입장 표명)
4) 불트만의 제자들.
역사적 예수와 케류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여 동시에 공통점을 인
정한다.
5) Pannenberg
그 당시에 살았던 예수가 우리의 신앙의 근거라고 한다. 이 신앙은 과거의 예수
와 관계하여 오늘 우리에게 그에 대한 선포가 어떻게 가능한가 인식하는데서 출발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인론의 출발점은 이천년전 팔레스틴에 살았던 역사적 예수
에 있다.

결론.
역사적 예수냐 ? 케류그마의 그리스도인가 ? 의 양자택일을 벗어나서 역사의 예수
인 동시에 케류그마의 그리스도이며 케류그마의 그리스도인 동시에 역사의 예수에
출발점을 두어야 한다. 즉 신약성서의 전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2. 역사적 예수와 케류그마의 그리스도.
1)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연구사(필만의 단계 연구)
1단계 : Reimarus - Harnak 까지.
성서적 교의학적 그리스도의 뒤에 숨어있는 역사적 예수를 찾고자 함.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삶의 연구이다. 슈바이처와 Kahler에 의해 종식되었
다.
2단계 : 20C 초 엽의 변증법적 신학이 여기에 속한다. 양식사학파 시대 역사의 예
수 연구는 특히 양식사 학파에 의해 거부된다. Bultmann은 그리스도가 있
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알 수 있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더 이상의 객관적
사실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라서 예수의 역사와 처음 공동체의 연속성은
거부된다.
3단게 : 케류그마 뒤에 숨어있는 역사의 예수가 새롭게 연구된다. 후기 불트만 학
파 불트만의 제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역사의 예수와 케류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을 말한다.

2) Bultmann제자들의 입장
(1) Kasemann
연속성을 예수의 메시지에서 발견하는데 산상설교에 나타나는 반대명제
(Antithese) 곧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로 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예수
는 자기를 모세의 권위 위에 세우며 모세의 율법을 상대화시키고 더욱 철저화시
킨다.
여기에서 역사적 예수와 선포된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2) Bornkamm
예수에게는 유대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권위가 있는데 이런 특수성에서 예수
의 역사성을 발견하고 이것을 근거로해서 예수의 역사와 처음 공동체의 케류그
마 사이에 있는 連續性과 地上의 그분과 信仰되는 그분의 一致를 주장한다.

3) Pannenberg
불트만의 제자들의 견해를 거부한다.
예수가 요구하는 권위에서 예수의 연속성을 발견하고 예수의 역사성과 Kerygma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찾고자하는 그들의 입장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권위에 대한 예수의 요구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따
라서 예수의 역사는 그의 권위에 대한 요구를 증명할 수 없으며 이 요구는 하나
님으로 말미암은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증명된다. 따라서 Pannenberg는 부활에서
연속성을 찾는다.
결 론.
성령에 의한 연속성.
이 연속성을 역사의 에수 안에 직접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도 않되고 Pannenberg
처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규정된다고 보아서도 않된다. 이 연속성
은 성령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역사의 예수는 성령 가운데서 Kerygma의 그리스도였
으며 케류그마의 그리스도는 성령 가운데 있는 역사의 예수였다.
그러므로 역사의 예수와 케류그마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연속성을 가진다.

3. 그리스도론의 방법
: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진술하고자 하는 그리스도론의 방법이다.
1) “위로부터의 방법”과 문제점.
: 이 방법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한 가장 오래된 방법(전통적 방법)으로서 헬라의
우주론적 지도하에 근거한 것이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선재로부터 출발하여
성육신을 거쳐 그가 누구인가를 진술하는 전통적 방법이다.
신성에서 인성으로, 연역적 방법, 과거성 강조, 존재의 제1원인을 이야기 한다.
문제점 : 이것이 지나치면 이신론, 초월성, 관념론으로 간다.
대표 = K.Barth, E.Brunner, 중세 인전의 학자들, 스콜라신학, 개신교 스콜라신학,
신정통주의.
Pannenberg의 비판
: ①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잭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신성을 전재한다.
②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 예수의 특수성을 파악하지 못한다.
③ 인간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분을 파악할 수 없다.
Moltmann의 비판
: 이 방법에는 특정한 신의 개념을 전재하고 있다. 즉 인간은 유한하고 변화하며
고난을 당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대신에 신은 무한하고 불변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신의 고난의 문제가 남게되는 문제점이 있다.
2) “아래로부터의 방법”과 문제점.
: 고대와는 달리 “예수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가” 하고 묻는
다. 즉 예수의 참된 인간존재, 그의 하나님 인식, 그의 내적인 삶이 중요하게 부
각되고 있다. 근대의 인간학적 관점에 따라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람”
으로 이해되고 있다.
인성 → 신성으로. 인간화. 이성적인 Model. 귀납법적.
대표학자 = Kant. Harnack. Ritschl. Till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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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illich ? 본질 ? 실존 ?
? 새존재(new Being) ? 옛존재 ?
? Kerygma ? 역사적 예수 ?
? 일 치 ? 소 외 ?
? 부 활 ? 십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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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Tillich의 아래로부터의 방법.
: 틸리히의 그리스도론은 실존의 조건들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치성을 상실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Vere Deus - Vere Homo 라는 전통적
그리스도론의 패러독스(역설) 대신에 본질적 인간. 실존적 인간이라는 패러독스
(역설)가 등장한다.
따라서 Tillich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인간이 아니라 참
인간인 동시에 현실적인 인간” 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일치를 내용으로 가진 “새존재”이다.
결국 틸리히는 역사적인 인간 예수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신성을 파악하려는 의미
에서 “아래로부터의 방법”을 시도한다.
문제점 :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의미가 부인되거나 축소될 위험성이 있다.
(윤리화, 인간와, 보편종교화) 예수의 신성이 약화.

결론
: 종말론적 - 성령론적 - 삼위일체론적 방법.
위의 두 가지 방법을 극복할 수 있는 제 3의 방법
- 종말론적 방법 = 구약의 묵시사상적인 약속의 역사라는 종말론적인 틀에서 예수를
이해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예수를 단순히 참 하나님, 참 인간으
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분 곧 메시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 성령론적 방법 = 종말론적 방법은 성령론적인 방법과 결부되어야 한다. 성령은 하
나님이 이 세상에 계셔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의 모
든 활동은 하나님의 영의 삶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가 영에 대
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 안에서 행동하고 말씀하신다. 그
리스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다.
- 삼위일체론적 방법 = 성령론적 관점에 입각한 종말론적 방법은 삼위일체론의 관점
과 결합된다. 하나님은 성령과 함께 예수 안에 있고 그 안에
서 활동하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론은 삼위일체론과 결부
되고 삼위일체론적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구원의 메시야는 단순히 한 인간
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가 하나님 안에 있고 성령
가운데서 활동하신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과정

*. 하나님 자신의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

Moltmann의 삼위일체 이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지상)은 십자가에서 종합된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와 하
나님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다. 즉 예수의 죽음의 사건에 하나님이 관여되어 아들
의 고통을 함께 당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만의 사건이 아닌 예수와 그
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함께 당하는 고난이다. 예수 자신의 수난이요, 하나님 자
신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철저한 사랑이시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은 성령
을 통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의 죽음의 아픔을 함께
당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삼위일체적 사건이다.
다시 말해
성부는 성령 가운데서 성자를 내어주고, 성자는 성령 가운데서 성부에게 순종하여
그 자신을 내어준다. 성령 가운데서 성부와 성자는 뜻을 같이하여 한 몸을 이룬다.
그러므로 성부는 성령을 통하여 성자의 죽음 안에 있으며 죽은 성자를 자기와 동일
화 한다.
1) 그리스도 비하의 신분 5단계
(1) 성육신(Incarnation)
(2) 고 난(Suffering)
(3) 죽 음(Death)
(4) 장 사(Burial)
(5) 음부에 내려감(Descent into Hades)
2) 그리스도 승귀의 신분 4단계
(1) 부 활(Resurrection)
(2) 승 천(Ascension)
(3) 우편에 앉으심.
(4) 재 림(귀환, Parusia)

* 십자가 사건의 의미
1)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자기를 낮추시고 인간과 함께 계시고자 함이며. 심판을 당하시면서 사랑의 정열
로 나타나신 자기계시이다.
2) 십자가는 인간의 계시요 인간성의 계시이다.
즉 인간의 죄된 존재가 십자가에서 드러나는데 이 십자가는 죄된 인간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부정이요 심판이다.
3) 하나님의 심판의 사건인 동시에 용서와 구원의 사건이다.
4)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계 안에서 시작하였음을 뜻한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1) 예수의 칭호들
가) 그리스도, 메시야, -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된 말씀 - 하나님의 대리자 - 영원
한 아들 - 주.
(1) 그리스도, 메시야
이 칭호는 신약성서에서 가장 비번히 사용되는 칭호이며 제사장 직분이나 왕의
직분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자기가
메시야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한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 당세
에 통념적으로 가지고 있던 정치적 메시야 사상과 자신의 메시야 직분의 성격의
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힘의 소유자, 힘
의 메시야였고 세계의 종말이 올 날자와 시간을 정확히 계산했지만 예수가 이해
한 메시야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행동을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
라,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와 사랑으로 높으심과 영광이 아니라, 낮으심과 고난
을 통하여 이룬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된 말씀
- 하나님의 아들(ν  ζ τξ  ξτξ )이란 칭호는 본래 구약성서의 왕의 신학으로
부터 유래하는데, 고대 근동의 왕의 신학을 비신화화시켜서 이스라엘 의
선택의 신학에 받아들인 것이다.
- 고대 근동에서 왕은 신으로부터 물리적으로 신화적으로 태어나며, 로마에서는
로마황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므로, 이스라엘의 표상과 구분된다.
- 아들이란 칭호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하나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
그의 신적인 본성을 나타내는 동시에(신성), 그리스도를 그의 아버지되시는 하
나님으로부터 구분한다.(인성)
이 칭호는 분명히 가장 적절한 칭호로 판명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라는 칭호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이심에 대한 자기의 고백에다 어떤 종말론적
권리주장을 결부시킨다. 이 권리 주장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나사렛의
예수 안에서 첫번이자 마지막으로, 유독하게, 혼동이나, 대치를 용납할 수 없게
결정적으로 그리고 그 이상 능가할 수 없으리 만큼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수교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전 기독교적 신앙의 본질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약식 고백이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고백에 기독교적 신앙의 사활과 존폐가 달려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 된 말씀
으로(요 1:14)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를
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형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요 의지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세계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과 그의 세계 속에 새
로움을 일으키며 인간과 그의 세계를 하나님의 세계로 변화시킨다.
(3) 하나님의 대리자
-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칭호는 신약성서에 직접 사용되지 않는다.
- 하나님의 아들 혹은 성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대리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대리하여 인간이 당해야 할
죄의 심판을 당하신다. 이를 통하여 그는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계약을 회복하
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룬다.
(4) 영원한 아들
- 그리스도의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를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
서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영원한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이미 예정
된 것이다.
- 그리스도의 선재는 창조 이전부터 계셨으며, 창조의 중재자로 고백된다. 예수와
하나님의 하나됨, 그의 신성은 그 자신의 지상의 실존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으
로 선행되어야 한다.
- 그는 과거에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성령 가운데서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신
분이며, 이 세계의 마지막에 다시 오실 분이다.
(5) 주 (κ ρθξζ)
- 예수의 칭호들은 주라는 칭호와 함께 그 정점에 도달한다. 이 칭호는 희랍세계
에서는 종교적 칭호가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명령권을 가진 자를 가리키는 세속
적인 칭호이다. 그러나 희랍세계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야웨 자신을 가
리키며 세속의 영역에서는 궁극적으로 황제를 가리킨다. 70인 번역은 야웨를 주
(κ ρθξζ)라고 번역한다. 야웨와 황제에게 적용되던 칭호가 예수에게 적용된다.
(고전 16:22) 이 칭호는 예수와 하나님의 하나됨. 예수의 영원성과 현재성,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타적인 소속성으로 핍박을 받게되며, 이 칭호는 우주의
통치자이며, 세계의 주이며, 세계의 심판자임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세계사의 주이며, 중심이요 완성자이다.
나) 사람의 아들 - 사람의 대리자 - 하나님의 형상, 맏아들.
(1) 사람의 아들
- 사람의 아들(ν  ζ τξ   ν ρ ου)이란 칭호는 공관복음서에 있어서 예수 자신의
말씀 속에 나타난다. 유대교의 묵시사상적 전통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은 세계
의 종말에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마지막 심판을 내리며 의로운 사람들을 구원
하는 종말의 심판자와 구원자를 뜻한다.
- 공동체 후기에는 이 칭호가 점차 사용치 았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의 아들”은
하나의 일상용어로 “사람” 혹은 “ 그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예수의 인간적인 면은 그는 이 세상에 신적 존재나 반신 반인간적인 존재로 계
셨던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써 계셨다. 그러나 죄된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
님께로부터 버림 받았으며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 아래에 있는 것을 말한다.
(2) 사람의 대리자
- 그의 삶은 하나님의 행위였음으로 우리의 삶과는 다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간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의 경험들이나 우리의 인간학을 기초
로 이해될 수 없다.
- 그리스,도는 모든 다른 인간들의 대리자이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이
름으로 우리가 서야하는 심판의 자리에 선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다.
- 인간을 위한 대리자란 칭호의 근거로는 화목 제물, 새 계약의 중보자, 고난 받
는 야웨의 종,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등이다.
(3) 하나님의 형상, 맏아들.
인간과의 관계에 잇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규정한 본래
적인 인간의 모습을 계시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상실한
이 하나님의 형상, 인간의 본래성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가리켜 성서는 “맏아들”이라고 말한다.(롬
8:29) 그는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형제들의 구원자요 인도자이며
그들의 원형이다. 맏아들로서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를 열어주
며,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속으로 받아들인다.
2) 두 본성(양성론) 문제.
(1) 초대교회의 두 논쟁
① 신성과 하나님을 강조하여 사람됨과 인성을 약화시키거나 부인.
풀라톤적 경향, 헬라 사상에서 나왔다.
가현설(Docetism) → 신성 강조.
영지주의
② 인성과 사람됨을 강조하여 신성과 하나님을 약화시키거나 부인.
히브리 사상. 예수의 인성 강조.
Ebionism → 유대교적 이단.
(2) Docetism경향 = 신성 강조.
① 양태론(Modelism)
Sabellivs :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세 양태(Modus)로 나타나는데 예수는 하나
님의 두 번째 현상양태이다.
K. Barth ?? 현대적 Docetism
R. Bultmann ??
② Apollinarius주의(2/3설)
: 인간의 몸과 혼을 취했으나 인간의 정신은 취하지 않고 신적인
λξγ ζ가 영혼과 육 안에 거하면서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을 λξγ ζ로 바꾸었다.

③ 단성론(Monophitism)
- Eutyches
-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똑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신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
(3) Ebionism 경향 = 인성 강조.
① 양자설(Adoptionism)
: 모든 인간의 모범이신 예수를 성령의 능력으로 채우시고 그의 아
들로 입양했다.(양자론 , 역동군주론)
② 아리안 주의(Arius)
: 예수는 하나님의 최초의 피조된 아들로서 하나님과 같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
③ 네스토리우스 주의
: 성육신은 신성과 인성의 접촉 내지 결합을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서로 구분될 수 있고 나뉘어질 수 있다.
(신성 < 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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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Logos ? (Nestorius) ? 신 ? (Eutyches)
???????????????? 구분과 나뉠 수 있다. ???????? 단성론 주장
? 인 ? ? 인 ?
???????????????? ????????
λξγξζ - Man λξγξζ - Flash.

(4) 칼케돈 공의회(451)의 신앙고백.
- VERE DEUS VERE HOMO.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고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며 참 하나님인 동시에 이성의
혼과 신체로부터 오는 참 인간이며 신성에 따라서 아버지와 같은 본질인 동시
에 인성에 따라서 우리와 같은 본질이며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다.
- 두 본성에 있어서 혼합되지 않으며(Without confusion, Without change)
변화되지 않으며(단성론에 대항하는 것) 분리되지 않으며(네트리우스에
대한 반박) 구분되지 않는 분(Without seperation, Without division.)으로
인식함을 고백한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1) 예수의 3중직 ***. 그리스도의 3중직은 무엇인가 ?
- 칼빈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3중직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의 성
취로 보는 것이다.
장점 : 구약성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직분의 조합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 함
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약성서의 약속의 역사와 결함시킨다.

(1) 예언자 : 하나님을 대표해서 인간에게 나아와 말한다.
예언자는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받아서 말하는데 앞날의 일을 미리 말하
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전통적 예언자와 다른 것은
-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가 아닌 하나님 말씀 자체이다.
- 종래의 예언자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라고 하셨다:는 화법을 취했
으나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Antithese)고 한다.
(2) 제사장 :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자로서 제사장이다.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제사장으로 언급한 것은 히
브리서 뿐이다. 예수가 전통적 제사장과 다른 것은
- 제사장이면서 바로 희생제물이었다.
- 이중적 대리행위 = 화해를 당할 인간을 대리했지만 화해의 주체인
하나님을 대리했다.
(3) 왕 : ??구약 : 메시야를 왕으로 생각.
??신약 : 예수를 왕으로 본다.
예수의 최종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인데 왕으로서의 사역은 위의2
가지의 목적이고 예언자와 제사장의 결과로서 왕이 된다.
*. 화해론의 유형들 - 십자가에 대한 이해 - 속죄론.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Abelerd, Anselm, Calvin의 견해,약속.
1. 배상설 Ramsom Theory
이레네우스가 최초로 주장한 이 후 대다수의 교부들이 이 설을 지지했고 어거스틴
도 이 설을 따랐으며 루터의 사상에도 그러한 흔적이 보인다.
초대교회 신학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막 10:45과 딤전 2:6 등에 있는 말을 토대 로
마귀와의 거래의 결과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이 인류를 마귀로부터
석방시킬 때 일정한 대가를 마귀에게 지불해야만 하는데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을
요구했기 때문에 인간의 죄 값으로 예수의 생명이 지불되었다.
2. 만족설 = 객관설 = 공의 = 하나님 자신을 위한 = 상업설.
11세기의 안셀름은 그의 저서(Cur deus homo ?)에서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나 ?
라고 질문한다. 죄는 반드시 벌을 받거나 용서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 받았다. 하나님은 이 손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죄지은 인간에게 만족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데, 어떠한 인간도 하나님을 만족시
킬 수 없다. 오로지 이 보상은 “하나님 -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더 이
상 사탄의 개입이 언급되지 않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 화해론을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신학적 중심으
로 삼으며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중요한 문제로 삼는 점에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첫째 속죄의 필요성은 강조하나 속죄적 죽음의 필요성의 이유를 설명치 못하고(이
것을 보충하기 위해 루터의 형벌만족설이 나온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죽음이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북음의 구원론적 의의가 약화되었고.

세째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의 생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화해를 인간이 믿고 받아들이는 주관적인 면이 결여되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안셀름의 만족설은 중세교회와 루터와 칼빈, 멜랑히톤, 베차 등 종교개혁자들과
신정통주의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국의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화해론을 객관주의적 화해론이라고도 부른다.
3. 도덕설 = 주관설 = 사랑, 도덕, 감화설. Abelard.
아벨라드(Peter Abelard)의 견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 속
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비로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
하는 인간의 사랑이 일깨워지며 하나님과 죄인의 사귐이 회복된다. 그것은 객관적
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잠재적으로 숨어 있는 것이 깨어남을 뜻한다.
그러므로 안셀름이 강조하는 법적인 면이 결여되어 있다. 안셀름에게 있어서 중요
한 것은 죄에 대한 보상인 반면에 아벨라드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내면성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용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다 라고 함으로 아벨라드는
죄에 대한 벌의 무거움과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적, 대속적, 형벌적 죽음이었음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 설은 소치뉴스와 19세기 이후의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에게 영향을 주어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그 사상이 계승되었다.
4. 형벌 만족설 Calvin.
칼빈을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은 안셀름의 만족설에 따랐으나 그것을 더 보완하는 입
장에서 안셀름이 주장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공의를 확립하고 이 공의에 대한 반항
으로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었고 인간은 죄에 대한 공포로 쌓이게 되었으나 하나님
은 사랑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형벌을 그리스도
가 대신 받게하여 인간의 구원이 확립되었다고 한다. 객관설이라고 할 수 있다.
5. 모범설.
소치뉴스의 모범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람을 위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아
벨라드의 도덕설과 유사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도덕생활을 증진시킨다는
점에서는 펠라기우스의 그리스도론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는 자연적인 힘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나 사람에 대하여 훌륭한 도덕적, 종교적,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
는 인본주의를 주장하였다. 주관설이라고 할 수 있다.


6. 人 間 論
1. 神學的 人間 理解
인간을 신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치의 세
계와 영적 세계와의 관련 하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동물과 다른 특성이 있는데
1)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2) 영적 생활을 하며
3) 도덕성을 가지고 있으며
4) 종교적 감정이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신학에 있어서 인간은 초자연적인 절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한 맺고 있는 존재로 이해가 된다.
2. 人間의 本質
1) 하나님의 被造物로서의 人間
(1) 하나님으로 부터 창조된 존재
: 꼭 있어야 할 必然的 存在가 아니라 偶然的 存在이다.
(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
: 이 세상에 홀로 살도록 내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 존재이다.
(3) 책임적 존재
: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해야 할 존재이다.
(4) 사회적 존재
: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이웃과 함께 이웃을 위하여 살아야 할 존재이다.
(5) 만물의 통치자
: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지키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가꾸어야 한다.
(6) 하나님과 다른 존재
: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시지만 인간은 시작을 가진 존재이다. 하나님은 시
공을 뛰어넘은 무한한 존재이나 인간은 시공 속에 갇혀있는 유한한 존재이
다.
2) 하나님의 形象으로서의 인간.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形象이란 무엇인가 ?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하나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기
록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지는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를 생각
할 수 있다. 신약 골 1:15에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형상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십자가에 달려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다
면 우리의 언어능력, 이성적 기능, 책임성을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다.
(2) 역사적 견해
① 개혁파 : 사람의 영혼에 단순성, 영성, 불멸성 등 품격에
지성과 의지에 존재한다.
도덕적인 고결성(EALVIN)에 존재한다.
② 루터파 :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
③ 카토릭 : 창조시 영혼의 영성이나 의지의 자유 등에.
④ 자유주의 : 사람 안에 있는 신적인 수용성, 이성, 자유의지 피조물에 대한 통
치권.
⑤ Brunner :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실질적 형상과 형식이 있다. 실질적 형상은 공
의, 거룩성, 사랑을 말하고 형식적 형상은 언어능력, 책임성을 말한
다.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실질적 형상은 파괴되었고 형식적 형상은
남아 있다. 이 형식적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
이 있다고 말하며 이 형식적 형상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접촉점
(Point of contact)이다.
⑥ K.Barth :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성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배제해 버리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실질
적 형상은 물론 하나님의 형식적 형상까지도 파괴되어 버렸다.
인간의 언어능력인 Yes, No 하는 것 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
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으로 상호간에 관계 속에 계시듯
이 인간도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성이다.
(VonRad는 창세기를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이다.)
3) 죄인으로서의 인간
(1) 죄란 무엇인가 ?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에 의하면 죄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욕정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교만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권리와 율법의 위반을 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또 한가지는
이기주의이다. 이기주의란 자기 중심적 욕망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주의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오며 이웃과의 단절을 가져온다.
(2) 죄의 결과
① 자기 모순과 상실을 가져오며
② 자유의 상실
③ 고독, 불안, 죄책감.
④ 무의미, 무희망, 자살.
(3) 원 죄(original sin)
원죄란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죄있는 상태이다.
교회는 아담의 죄가 성행위를 통하여 생식적으로 유전된다고 주장해 왔다. 아
담 이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말한다. 이것은 죄의 보편성과 불가피성
을 말 해 준다. 즉 사람이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죄가 사람 안에서 죄를 짓게
한다.
(4) 현대 신학자들의 원죄에 대한 입장.
① Althaus = 원죄의 교리를 역사화하는 전통적 원죄관을 부인.
② Beunner = 죄란 행위이지 유전이 아니다.
③ Gogartton = 원죄의 유전설은 신화론적 사고에 근거했다.
④ 정통주의 = 원죄는 유전된다. 원죄는 죄의 보편성과 불가피성을 말한다.
(5) 죄에 대한 견해
- 펠라기우스 : 원죄는 유전되지 않으며 유아는 무죄하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
졌으며 선행을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도 죄 없
는 사람이 있었다.
- 어거스틴(칼빈)
: 아담의 죄로 전적으로 타락했다. 자유의지를 상실.
- 반페라기우스 : 원죄의 유전은 인정하지만 사람의 전적 타락은 부인한다. 자유
(알미니안) 의지 상실도 부인한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자유의지로 구원을 거부할 수도 있다.
*. 죄의 본질(뻘콥)
- 죄는 단순히 결핍이다.
- 죄는 illusion이다.
- 선의 의식의 결핍이다.(슐라이어마허)
- 무지에서 기인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핍과 하나님 나라 반대.
*. 바르트의 죄의 형태
1. 교만 2. 태만 3. 기만
죄론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다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인식된다.
*. Paul Tillich
죄 = 하나님과의 실존적 일치성의 분열이 죄의 근본적 특성이다.
불신앙은 인간이 자신의 중심을 신적 중심으로부터 자기에게 돌리려는 충동.
교만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과 세계 중심으로삼으려는 것.
정욕은 현실 전체를 자신의 자아에게로 병합할려고 하고 전 세계를 자신 안
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 무한한 갈구이다.
원죄 = 자유와 숙명의 이중성격은 철학, 정치학, 사회학으로 부터 입증 하려고한다
*. 원죄의 신학적 의미 (은혜)
원죄의 개념이 의도하는 것은 죄를 역사화, 인간화, 생리화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
지 죄의 보편성, 초주체성, 그리고 불가피성을 표현 하고자 하는 것이다.


7. 敎 會 論
1. 교회의 본질
1) 로마 카토릭 : 외면적 조직체로 사람의 구원을 취급하는 기관이다. 교회는 세례를
받아 성례에 참여하며 교황 아래 그들의 법적인 목자들에 의해 통
치되는 모든 신실한 자들의 모임이다.
2) 헬라 정교회 : 교회 회의를 중요시 하고 무오성은 감독들에게 있다.
3) 개 신 교 : 외면적 조직에 있지 않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 있다. 그리스도
의 몸인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다.
4) 신 약 성 서 : ①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공동체의 모임이다.
②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③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다.
2. 교회의 특성
1) 통일성 : 그리스도 안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영적)
2) 거룩성 : 내적인 거룩성이며 그리스도가 선포됨으로 거룩하고 성만찬과 세례로 거
룩하다.
3) 보편성 : 구원의 보편성.
4) 사도성 : 사도의 증언에 의하여 세운 교회이다.
3. 교회의 기능.
1) 말씀 선포.
2) 성례전의 올바른 시행.
3) 권징의 신실한 수행이다.
4. 루터의 두 왕국사상.
루터는 교회와 국가를 하나님이 세우신 두 왕국이라 말한다. 국가는 율법에 속하고
교회는 복음에 속한다고 보았다. 국가는 질서를 세우고 악을 제한하며 악으로부터
생겨나는 여러 결과에 제동을 가하고 율법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고 교회는 복음
의 왕국으로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복음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행되고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 지는 곳이다.
신자들은 국가에 대하여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또한 국가의 통치자가 교회 안에서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러나신자들은 국가에 속해 있으며 국가의 법 아래 있으므로
국가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통치하기 위한 율법적 기능은 자연적
이성을 소유했으며 누구나 따라야 할 법이며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루터가 말하는 두 왕국은 교회와 국가를 말하지만 이 두 관계를 대립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점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율법과 복음의 이분법이 중요하면서도 확실하게 화정지워진 것이 아니듯이 두 왕국
의 경계선도 국가와 교회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띠고 있지만 세속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으로서 서로 다른 유형이라고 규정 지울 수도 없다.

5. 칼빈의 교회와 국가관
국가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공직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받들어 섬기는
기능을 부여했다. 국가ㄴ의 통치자는 하나님으로 부터 권위를 부여 받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통치
자에게 순종해야 되며 그들을 거스려서는 않된다.
그래서 통치자들의 독제를 막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고 제도적 장치
에 의해 통치자들의 독제가 종식되지 않는다면 교회는 항거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통치자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방해하거나 하나님의 법에 위재되는 법을 만들거나
요구를 할 경우에는 복종을 거부해야 된다.
6. 교회와 국가의 관계
교회와 국가는 한 지역에서 경제, 사회, 문화, 정치체제의 관계 속에 있다. 국가가
공간의 차원에서 산다면 교회는 공간의 차원과 영원의 차원을 동시적으로 산다.
공간의 차원은 국가에 소속되지만 영원의 차원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신국(神國)
에 속한다.
교회의 국가에 대한 역할은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다는 점에서 그 나라의 근본 사상
인 하나님의 사랑과 봉사를 실천해야 되는 것이고 국가가 교회를 향한 역할을 국
가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교회를 적극 돌보아
야 하는 것이다.
7. 신교와 구교의 교회관

로마교회 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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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성경과 전승을 동등하게 여긴다. ? 오직 성서이며 전승은 성경을 해석한 귀결?
? ? 교회가 성경을 해석한다. ? 이며 성경이 성경을 히셕한다. ?
?경 ? 외경을 포함시켰다. ? 정경은 66권만 인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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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성례전 없이는 구원이 없다. ? 성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기념이다. ?
? ? 7성례를 주장한다. ? 2성례만 주장. ?
?례 ? (성례를 계시적 의미로 해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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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 성례전 중심의 예배이다. ? 말씀 중심의 예배이다. ?
? ? 형식과 상징적 예배이다. ? 인위적 요소를 배격한다. ?
? ?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 ?
?배 ? 강조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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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 믿음과 선행에 의하여 ?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
? ? 구원받는다. ? 신자의 선행은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 ?
? ? ?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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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
1. 교회와 국가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2. 오직 두 가지만의 참된 표지가 있다. 순수한 복음선표, 올바른 성례집행.
3. 교회는 본래 영적인 친교이고 그 자체로서는 볼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신앙하는 자
들에게만 보여질 수 있다.
4. 교황과 공의회는 오류 가능하다.
5. 교직 계급은 인간적인 법에 속한 것이지 하나님 법에 속한 것이 아니다.
개혁교회는 결코 새로운 교회가 아니라 갱신된 보편적 교회이다.
*. 교회 정치 제도.
교황제도
감독제도
회중제도
대의제도
무교적 제도
*.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1. 교회(직접적)와 국가(간접적)는 다 같이 하나님 허용한 제도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역은 완성하기 위하여 만든 제도이다.
2. 양제도를 하나님은 동시적으로 통솔하신다. 교회는 은총의 수단으로 국가는 자연
법의 수단으로 통솔하신다.
3. 그들이 담당한 기능과 임무가 다를 뿐이다. 교회는 복음을 담당하고 국가는 질서
를 담당한다.
4. 교회가 국가에 대하여 가지는 불변적인 임무와 역할은 예언적 기능과 제사장적 사
역이다.
5. 국가는 두 주인을 섬겨야 한다. ( 국민, 하나님)

8. 救 援 論

1. 信仰論
1) 정의 = 신앙은 인격적 신뢰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따라서 신앙은 인간의 결단이요 행위이며 태도이다.
2) 역사적 신앙관
(1) 초대교회 시대
성서의 지식으로 진리를 승인한다. 점차 교회가 제시한 내용을 지적으로 승인.
(2) 중세 시대?
교회가 제시한 교리(Dogma)를 승인함으로.
(3) 종교개혁 시대
교리적 승인이 아니라 인격적인 결단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
(루터 : 신앙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말한다)

(4) 정통주의 시대
신앙을 지식, 승인 신뢰의 세 단계를 구분하고 지식의 단계를 중시했다.
(5) 계몽주의 시대
이성에 의하여 승인되는 부분만을 인정.
(6) 신정통주의 시대
신앙과 이성을 분리하고 초월적인 면을 강조.
Barth. Brunner - 하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신적 응답이다.
3) 신앙의 요소
(1) 지적 요소(notitia) = 진정한 구원얻은 신앙은 구속에 대한 진리를 알아야 한
다.
(2) 감정적 요소(assensus) = 진리에 대한 확신과 신앙의 대상에 실재를 느끼고 삶
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느낌.
(3) 의지적 요소(fiducia) = 삶의 방향 결정. 신앙의 대상에 자신을 결단.

* 신앙이란 ?
신뢰로서의 신앙을 가리킨다. 구약성서에 있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
면 신약성서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신앙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는 것. 곧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하신 말씀
과 그가 하신 일에 대한 승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승인이다.
신앙이란 죄된 자기 자신과 세게에 대하여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그
에게 속하는 것을 말한다.
* The Order of Application
召命 effoctual calling 召還 summons

重生 regeneration
↓ Faith and Repentance
稱義 justification (conversion)

養子 adoption

聖化 sanctification
↓ perseverence
榮化 glorification
2. 稱 義 論
(1) 정의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시는 義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지만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
으로 인간의 믿음 그 자체 때문에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그
리스도의 의를 인간에게 전가시켜 주셔서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2) 칭의의 의미
① 칭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전가된 의로서 인간의 불의가 끝남
을 뜻하고
②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작을 뜻한다.
(3) 칭의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
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칭의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새하늘과 새
땅이 앞당겨 일어난다.
② 하나님의 칭의는 하나의 영적 사건, 온 인류와 자연과 물질적 세계 포함.
③ 칭의의 대상은 인간의 영혼, 인간의 몸, 물질과 자연의 영역.
④ 몰트만은 인간의 칭의는 물질과 자연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칭의
의 기초이며 시작이다.
⑤ 참된 칭의의 신앙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를 향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의
삶이요 이 삶은 개인의 영역, 사회의 영역에서도 일어나는 성화의 열매를 거둔
다.
3. 聖 化 論
1) 정의 : 성령께서 칭의된 자들을 새롭게 하며 선행을 행할 수 있는 성품으로 인도
하시는 은혜로운 계속적 사역이다.
(1)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포기를 뜻하는 동시에
(2)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며
(3)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는 삶을 말한다.
(4) 성화는 계속되는 과정이며 성화의 완성은 죽음의 순간이나 죽음 자로 이후에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2) 성화의 성질과 특성
(1) 성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2) 옛 사람의 소멸 새 사람의 소생이다.
(3) 성화는 전인격 즉 육체, 영혼, 지, 정, 의에 영향을 준다.
(4) 성화는 장구한 과정이며 현세에 완성 못한다.
3) 성화와 중생의 관계
중생은 즉간적이며 일회적이다. 성화는 점진적이며 하나의 과정이며 결과적인 성
결에서 구별되며 중생은 성화의 시작이다.
4) 성화와 칭의의 관계
칭의의 성화보다 앞서서 성화에 근거한다. 칭의 자체는 우리의 내면적 존재를 변
화시키지 못하나 그것의 보충으로 성화가 요구된다.칭의는 단번에 완성되고 성화
는 점진적이다.

9. 聖 靈 論
1. 정의 :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인격으로 하나님이 능력인 동시에 인격 안
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생명의 힘이고 구원
사의 수행자이며 새 창조를 일으키는 종말론적 능력이다.
2. 자유주의 신학의 성령관
: 성령은 인격을 무시하고 단지 신적 현현의 기능으로만 이해한다.
성령의 초월성, 인격성을 부인하고 내재성을 강조한다. 또한 성경은 영감되
었다는 영감설을 부인한다.
3. 칼 바르트의 성령관
: 성령을 절대적인 하나님으로 본다. 성령은 창조주이시고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자이시며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하는 구속주로 이해한다.
즉 삼위일체론의 점유와 순환의 개념을 3위(성령)의 위치에서 진술한다.
4. 신정통주의 성령관
: 성령의 신성은 인정하나 구별된 위력은 부인한다. 단지 신의 현현이라고 주
장한다. Hwndry에 의하면 성령의 증거는 성령에 기록된 글자 자체에서가 아
니라 말씀 안에서 나타난다. 교회가 말씀의 증거를 받아들여 그것을 믿음으
로 고백할 때 성령이 증거한다.
<세속화 신학> - 死神神學. 急進神學.
D.Bonhoeffer John.A.T.Robinson ?신에게 솔직히?
英.美인들의 경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문화를 잘 반영한 신학이다.
- Thomas. j. j Altieser ?기독교 무신론의 복음?에서신의 사망을 선언했다. “태고
시대에 인간에게 십계명을 준 신은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이 죽은 몸에 매달
리지 말고 오늘을 사는 용기 가운데서 기독교적인 말씀에 되돌아가서 새로운 신학
을 수림하여야 한다.”
- Paul Van Buren ?복음의 세속적 의미?
신의 사망을 선언하지 않고 신이란 낱말을 언어분석학적으로 고찰할 때 무의미하
며 ?객관적인 신?에 대해서는 침묵을 하여야 한다. “神 前提 없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살도록하는 神 앞에서 항상 살아야 한다.” “현대인은 경험에 의존하여
생각하며 實用的으로 생각한다.”
- Harvey ?세속 도시?
세속주의 → 폐쇠된 인생관
세속화 → 자유함을 얻은 역사관
세 ??창세기의 창조신화 → 세계를 인간 손에 맡기셨다.
속 ? 출애굽 → ?레?의 후손인 바로의 神政으로 부터 자유하였다.
화 ??시내산 언약 →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작품과 업적의 가치를
상대화시켰다.
- Joseph Fletcher의 상황윤리(situation zhhics)
실용주의 원리, 상대주의 원리, 실증주의 원리, 인격주의 원리, 오직 사랑만이 본
래적으로 좋은 것이고 사랑 이외에 좋은 것은 없다.
세속화 신학이란 하나님을 섬긴다고 입으로 말하든 말든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사는 것.

- 민중신학
민중신학은 1970년에 한국에 나타난 한국 특유의 신학이다.
민중신학은 60년대 후반에 나타난 유럽의 신마르크스주의와 중남미 해방신학의 영
향을 받고 70년대 한국인들의 민중적 삶의 체험 속에서 “한국적 정치신학”으로 된
신학을 말한다.
민중 사랑의 두 기둥은 민중론과 구원론이다.
민중론 = 민중은 백성, 시민, 대중, 지식인 - - - - - 과는 다른 개념이다.
민중이란 소박하고 소탈하고 단순하고 골직하고 인정이 있고 생겨진 그
대로 태어난 그대로의 그런 것을 의미한다.
민중의 개념 가운데는 “限”이라는 한국 특유의 개념이 들어있다.
“限”은 피지배자가 지배자로부터 받은 억울한 것이며 특히 당하고도 말
못하는 어떤 것이다.
민중신학의 과제는 “민중의 限을 푸는 것이다.”
구원론 = 예수관에서 나타난다. 예수는 그 자신 “민중”으로서 인간 해방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지도자 예수”라기 보다는 “해방자 예수”이다.
서 남동 및 대부분 민중신학자들은 내세의, 타계의 존재와 개인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늘의 구원은 민중의 해방의 메시지로
선포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공헌 = 한국인의 주체성을 가지고 세계 신학의 논단에 올라서 있다. 사회
적인 관심과 민중의 한에 관심을 갖고 있다.
비판 = ① 한국의 정치신학이다.
② 사회적, 경제적 인간을 강조함으로 반쪽 인간, 반쪽 구원, 반쪽
인 신학이다.
③ “민중”이란 집단 명사 속에 문제점이 있다.
ⓐ 기독교는 인간을 근본적인 집단, 무리로 보지 않고 개인으
로 본다.
ⓑ 인간을 類로 보고 집단적으로 생각하는 ?민중?은 ?공산주
의?의 프롤레타리아 사상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④ 限에 대한 민중신학의 이해가 물질적이고 경제적, 사회적인 영
역에 제한되고 있다.
- 해방신학(제 3세계 신학)
해방신학에 있어서 출발점이 되는 것은 “가난한 자”이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억눌
린 자의 편에 서서 일하며 그들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이다. 해방신학은 칼 막스의
경제학을 “신학적 도구”로 삼고 있다. 맑스의 경제학으로 중남미 나라의 가난과
억압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효과적인 “혁명 방법론”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한
다.
해방신학은 “교전”이라는 혁명적 용어를 사용한다. 즉 신학은 가난과 사회악과의
“교전”으로부터 “재교전”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 혁명적 과정에
참여”를 뜻하는 용어로 “지식에 입각한 항존”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 해방신학의 구원관
: 구더에러쯔는 출애굽사건에 입각한 구원관을 강조한다. 진정한 오늘의 구원은 이
스라엘의 출애굽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 부활 가운데서 나타났
으며 이 ”해방의 모델“을 쫓아 모든 사회적 불의와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고 가
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삶에 참여하면서 기존의 자본주의 제도의 전복을 위하여 투
쟁하는 것이라고 한다.

참고서적
구스타보 구더에레쯔 ?중남미 해방신학?
루엠 알베스 ?인간다운 희망의신학?
요완 소부리노 ?기로에 선 그리스도?
* 비판
: ① 칼 막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을 따르고 있으며 폭력을 긍정하고 있다.
② 해방의 의미를 ”사회적 경제적 구원“에 제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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