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조직신학 개론』John M. Frame 지음

하나님아들 2024. 5. 9. 16:30

조직신학 개론』

 

John M. Frame 지음

 

김용준 옮김

 

 

 

오 재 훈

 

 

 

 

 

 

 

 

Ⅰ서문

 

이 책은 조직신학에서 필수적인 요소들을 대략적으로 설명한 조직신학개론서입니다.

 

주권사상을 통한 전반적인 신학적 특징과 말씀 중심의 신학적 특징을 살펴보고 또한 여러 신학적 다양성을 통해 전통적인 조직신학이 가지고 있는 구성 체계를 과감하게 벗어나길 원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실천적 문제를 조직신학의 결론이라고 주장하며 개혁주의 조직신학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제 1 부

 

 

 

 

 

제1장 주 하나님

 

조직신학은 주제신학입니다. 성경의 다양한 부분들에서 다루어진 하나님, 인간, 계시, 그리스도, 종말 등과 같은 주제들을 설명함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만약 성경의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그의 주권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우선 주(Lord)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이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인격(a person)이십니다. 최고로 거룩한(holy)인격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라는 이름은 그분의 본성, 즉 그분이 어떠한 하나님이신지를 성경은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통치(control)는 그가 우주 전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대한 지배자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권위(authority)는 피조물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을 명령할 수 있는 그분의 권리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절대적인 권위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에서는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그 요소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행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presence)입니다.

 

 

 

 

 

제2장 하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의 사역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의 영원한 작정, 자연 세계에서의 사역, 죄인을 향한 구속 사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중 하나님의 자연 세계 안에서의 사역은 기적, 예정, 창조로 다시 나눠지게 됩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주권의 특별한 드러내신 것 이라면, 섭리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입니다. 기적과 섭리가 시간적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는 반면, 창조는 시간의 시작에서 그의 주권을 보여줍니다. 또한 영원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시작 전에 그의 주권을 우리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작정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 지식, 능력으로 이러한 속성들을 나누고 연관시키는 현존, 권위, 통치의 주권 속성들에 각각 상응합니다.

 

 

 

 

 

 

 

제3장 하나님, 하나 안에 셋

 

삼위일 교리를 하나님이 한 분 안(in)에 셋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 됨, 즉 하나님의 일체성은 삼위일체 교리의 부분입니다. 비록 신약성경의 명료함이 구약성경에는 없지만 신약성경에 의하면 이 셋 성은 세 위격, 즉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고정된 교리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됩니까? 왜냐하면 신약성경이 쓰이기 전에 성자와 성령 모두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세 위격이 실제로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각각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셋이 구분된 위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친밀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 연관은 상호교통입니다. 이 말은 첫째로 성부가 성자 안에 그리고 성자가 성부 안에 있다는 것, 둘째로 성부와 성자 모두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부가 성자 안에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선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하나님이 셋인지를 나타내기 위한 표준용어를 니케아 공의회(A.D.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381)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하나의 본체이시고 세 위 위격’이시라고 결정한 것을 선포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주된 주제인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와 구원, 결국 이는 주권의 문제들입니다. 왜냐하면 주 만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4장 하나님의 말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라고 말하기를 원하고 확실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통보다 더 많은 것들을 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일 뿐만 아니라 언어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 즉 우리들 가운데 있는 모든 현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능력 있고 권위 있는 자기표현으로서 정의합니다.

 

말씀은 중재로서 먼저 자연과 일반역사, 구원역사, 기적의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말씀을 두 가지 방식에서 하나님 말씀의 매체와 인간 언어의 형태를 취하는 두 가지 방식의 언어적 매체입니다. 즉 신적 음성, 선지자나 사도들을 통한 말씀, 기록된 말씀, 설교와 가르침의 사역으로 나눕니다. 말씀계시는 자연계시가 아닌 특별계시입니다. 세 번째 매체인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인격이십니다. 그것은 현현 안에서 드러내십니다.

 

가장 심오한 인격적인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말씀을 쓰신 것처럼 중생과 성화를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우리에게는 두 번째 본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기록된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동일합니다.

 

 

 

 

 

제5장 성경의 권위

 

두 개의 신약성경 본문을 통해 성경적 권위의 본성을 기술하는데 첫 번째는 딤3:15-17말씀입니다. 성경은 ‘영감된’이라고 번역될 수 있지만, 정확히 번역해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어떤 것을 성경 안에 불어넣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내쉬었다 또는 다른 말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입니다. 신적 음성과 동일한 것입니다. 두 번째 본문은 벧후 1:19-21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가야할 곳으로 예언자를 인도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주권의 최고 권위를 가져오는 그분 자신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떤 책들이 성경으로 포함되어야 할지 정경에 대한 답변으로 교회가 성경에게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는 이 책들을 읽고 하나님이 이미 그 책들을 권위 있게 하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글들을 조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 책들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양은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27)

 

그리고 말씀의 전달은 하나님은 그것을 영감하셨습니다. 영감은 ‘숨을 내쉼’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말씀들을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가능하게 하시는 조명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보여주는 설득,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두 번째 본성이 되는 존재적 계시인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쓰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에서 많은 논쟁이 된 주제가 성경의 무오성입니다. 이 용어는 단순히 ‘오류가 없음’, 즉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참이고 결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고 그 안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이제 성경에 대한 네 가지 주요점을 간단하게 언급하면 우선 명확성입니다. 말씀의 능력, 권위, 명확성은 주권 속성에 일치하는 3중구조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필요성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 없이 우리는 그와 함께하는 어떠한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충분성은 단순히 성경 안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훈련을 위해 성경 밖으로부터 오는 지식 또한 필요합니다. 성경을 사용하기 위해 성경 밖에 있는 것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기초적인 부분은 성경 밖에서부터 오는 어떠한 종류의 지식도 성경에 더해질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6장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불가 해적이시지만, 그분은 또한 가지적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우리 자신의 방식에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오셨고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해적인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를 주로서 아는 것입니다. 첫째로 그분은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모든 영역 즉 사회적 삶, 도덕적 삶, 심지어 지적인 삶 속에서 순종해야만 하는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삶에서 그의 현존을 더욱 느낄 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훈련된 연구입니다. 슐라이어마허가 본 하나님을 만나고, 확실한 방향을 느끼고, 그 후에 감정을 말로 표현했다는 주관적 관점과 달리 찰스 핫지는 신학을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객관적 관점에서의 “적당한 질서와 관계 안에서 성경의 사실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학은 내적인 과정, 즉 생각의 과정입니다. 성경 자체는 성경의 사실을 우리 자신의 경험, 의문, 감정, 생각의 과정들에 적용해야 합니다. 신학은 훈련된 연구로서, 하나님의 지식으로서 신학의 부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훈육, 즉 우리의 종 됨의 부분입니다.

 

전통적 신학 프로그램에는 주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이 있습니다.

 

 

 

 

 

제7장 인간, 하나님의 형상

 

우리 자신에 대해 알아야할 첫 번째는 우리가 피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에서 근본적으로 두 존재, 즉 창조주와 피조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창조주이시고, 사람과 그 왜의 모든 것들은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적인 특별한 행위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우리는 이 형상을 우리 안에 있는 지적, 감정적, 의지적인 것과 동일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하나님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육체적, 신체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직분적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윤리적 요소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우리를 만드십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인간의 대표로서 아담을 대신하는 현저한 방식에서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성경은 몸, 혼, 영, 지성, 감성, 의지, 생각, 마음 등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혼이라는 단어는 영이라는 단어처럼 몸을 떠난 인격적 존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도덕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도덕적 자유라고 부르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 혹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제8장 죄와 악

 

성경은 우리의 행위, 우리의 태도, 또는 죄 된 인간이 되는 것, 즉 죄 된 본성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죄는 그 자체로 마음, 즉 인간 인격의 단일성에 부착됩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죄를 짓습니다. 그것은 죄 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 죄의 결과 범죄, 타락, 형벌로 나눕니다. 죄의 기원은 분명히 인간의 것이 아니라 사탄의 것이었습니다. 죄는 죽음의 형태 법정적, 영적인, 물리적인 것으로 죽음에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은 우선 사탄을 저주하시고 둘째로 여자는 아이를 낳는 저주를 받고 남자는 노동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땅 자체에 대한 저주가 적용되었고 육체적인 죽음 자체의 저주와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이 있었습니다. 죄가 역사적인 인간에 의해서 세상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의가 역사적 인간에 의해 세상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해야하고 역사적 아담을 부인한다면 역사적 예수님을 부인해야 합니다.

 

아담의 죄와 아담의 후손의 관계에서 우리는 유전적 죄를 알아보겠습니다. 죄의 전가에 대한 기술적인 면은 대표적 관점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전 15:45-49과 롬15:14을 따라 우리가 보았던 본문들은 하나님이 전체로서 인간을 대표하도록 아담을 지시하셨다고 제시합니다. 그래서 그의 결정은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담의 경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경우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복음의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의를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게 우리에게 전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과 유죄뿐만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타락한 본성을 상속받았습니다. 우리는 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것을 종종 전적부패(전적타락)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필연적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악하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최악의 악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은혜입니다. 일반은혜를 특별은혜, 구원하는 은혜로부터 구분합니다. 신자들은 비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의해서 변화되지만 계속 죄를 짓습니다. 이 죄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법적인 위치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회개하면서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있는 것으로 향하고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새롭게 맞이하는 영적 성장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제9장 하나님의 언약

 

언약은 그동안 다양하게 정의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정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성경적 언약의 모든 기초적인 요소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언약은 주와 주께서 주권적으로 성별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법의 제재에 의해서 그들을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은혜의 목적을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이루십니다. 언약의 중심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하신 약속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와도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응답으로 우리의 신앙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 주권은 통치, 권위, 현존에 대한 그분의 주권 속성 안에서 표시될 수 있습니다. 그의 통치에 의해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십니다. 언약은 협상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시행하십니다. 이는 그의 값없이 주신 선물이며 은혜이고 공로 없는 호의입니다. 게다가 그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언약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시고 순종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를 주십니다. 권위의 주권 속성에 의해 하나님은 적절하게 상과 벌을 부여하시면서 언약법을 선포하시고,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리고 언약 현존의 주권속성에 의해 우리의 삶에 들어오시고 사랑하시고 인도하시고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언약은 율법(규범적), 은혜(상황적), 하나님의 현존(존재적)입니다.

 

 

 

 

 

제10장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교회는 A.D.451년 칼케돈 공의회에 의해서 결정된 진술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공식적인 주장을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을 한 인격 안에서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실제로 참 하나님, 즉 삼위일체의 제2위격이시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그리스도가 주시라는 것입니다. 주(Lord)는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절대적 권위로 말하시며, 그의 백성이 되도록 사랑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십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 적용된 또 다른 중요한 명칭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또 다른 예수님의 중요한 호칭은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메시아에 해당되는 헬라어에서 온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은 그들의 사역에 대한 성령의 선물을 상징하는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여러 본문들이 있습니다. 또한 인자라는 명칭을 어느 정도 확장한 예수님의 인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거룩한 분, 알파와 오메가 등 다른 명칭들이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은 전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혜이십니다.

 

예수님은 시적 사역, 즉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을 것들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성경적 묘사에 대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그가 사람들로부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안 인격 안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인격적 연합이라고 불립니다.

 

 

 

 

 

제11장 예수께서는 무엇을 하셨는가?

 

첫째, 예수님은 선지자들 중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지자 그 이상입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는 희생제물과 중보라는 두 범주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희생에 대한 신학적 명명은 속죄입니다. 속죄라는 단어는 사람을 하나로 이끄는 화목을 지시하는 옛 영어 표현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지에 대한 질문에 첫 번째 관점은 보편속죄로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관점은 제한속죄로서 그리스도가 택자, 즉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궁극적으로 구원받는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속죄가 그 효력에 있어서는 무제한적이지만, 대상의 범위에 있어서는 제한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또한 왕중의 왕이시오, 만유의 주이십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의 직분, 즉 메시아의 직분,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직분을 완성하십니다. 이 직분들은 창조 시에 아담에게 주어졌지만 그가 실패한 직분들입니다. 선지자, 즉 규범적 직분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선포하십니다. 존재적 직분인 선지자로서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상황적 직분인 왕으로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받기 위해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십니다.

 

 

 

 

 

제12장 성령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그들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포함하는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사도적 축복 도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풉니다.

 

성경은 자주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성령을 보여줍니다. 이 능력은 주권 속성 중 첫 번째인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는 창조주이시고 공급자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서 행하십니다. 속죄하는 예수님의 사역은 현재적이고, 지속되고, 자주 주체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성령의 사역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 게시고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도록 중생케 하시는데 이러한 시초적 중생을 성령 세례라고 부릅니다. 비록 성령 세례는 단회적으로 발생하지만,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성령의 다른 경험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령의 은사가 존재합니다. 가르침, 선행 행함, 행정과 같은 자연적 능력들과 연관되어 있고, 어떤 은사들은 방언, 에언, 치유, 영분별과 같은 더욱 “초자연적인”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제2부

 

제13장 선택, 부르심, 중생

 

성경은 성령이 특별하게 하나님의 능력(상황적), 그의 권위 있는 말씀(규범적),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그의 현존(존재적)과 연계된 신적 인격이시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세 위격 안에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단번에 모두를 위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는 다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금 부활하도록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밖에서 발생했고, 결코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구원의 서정이라 불리어집니다. 외부적이고 단회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은 여기서 규범적 관점에서 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을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중생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규범적이고 단회적 사건은 물론 우리 각자를 고려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입니다. 이 작정은 선택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시작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고, 선택됩니다. 택자들은 하나님은 효과적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진리를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순종하려는 새로운 방향을 가지도록 하시며, 중생케 하십니다. 부르심은 상황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중생은 전재적인 것입니다.

 

 

 

 

 

제14장 믿음과 회개

 

우리는 구원하는 믿음, 즉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서 믿는 믿음에 대해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일반적인 믿음이 아닌 신학적 개념의 특별한 믿음 또는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믿음을 지식, 신앙, 신뢰, 이 세 가지의 요소로 분석합니다. 우선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우리 구원의 기초가 아닙니다. 기초는 우리에게 영생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기초입니다. 다음으로 원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관계로 이끄는 힘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입니다.

 

소망은 믿음과 극단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고, 믿음의 종류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약속의 미래 성취를 향해 인도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삶에서 말하는 잠정적이거나, 불확실한 소망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부터 오고 또한 회개로부터 옵니다. 회개의 정의는 믿음이 지식에 기초하는 것처럼 회개는 우리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이해하는데에 기초합니다. 회개의 첫 번째 요소는 근심이며, 회개는 포기를 포함하며, 회개는 실제로 죄로부터 돌아서게 합니다.

 

 

 

 

 

제15장 칭의와 양자

 

칭의, 양자, 성화는 3중구조를 형성합니다. 즉 세 개의 주권 속성들로부터 가져온 3중구조를 형성합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법적 지위, 새로운 가족, 새로운 삶입니다. 칭의는 새로운 법적 지위의 필요성을, 양자는 새로운 가족의 필요성을, 성화는 새로운 삶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법적 지위를 제공하는 칭의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권위적, 법적 선언입니다. 그래서 저는 칭의를 하나님의 권위의 주권 속성에 연결시킵니다. 양자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사탄의 가정으로부터 옮겨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새로운 환경, 즉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십니다. 중생과 성화에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죄 많고 불순종한 마음을 제거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순종하려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성향, 새로운 삶, 새로운 소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중생은 이것의 시작입니다. 성화는 이러한 모습의 지속입니다. 저는 이러한 과정을 하나님의 언약적 현존의 주권 속성에 연결시킵니다. 또는 존재적 관점에 연결시킵니다. 왜냐하면 중생과 성화에서 하나님의 영은 직접적으로 우리 마음 안에서, 우리 마음과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16장 성화 확신

 

성화되는 것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거룩함은 의로움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칭의를 연구할 때, 칭의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이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도 하십니다. 이 의롭게 하심은 칭의라고 불리지 않고 성화라고 불립니다. 성경은 결정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로 부르는 성화의 두 가지 측면을 구분합니다. 첫 번째 성화는 한 순간에 발생하는 하나님의 단회적 사역입니다. 두 번째 성화는 하나님이 우리도 협력하도록 명령하신 지속적인 하나님의 일입니다. 결정적 성화는 우리를 죄의 영역으로부터 하나님의 거룩의 영역에로, 사탄의 왕국으로부터 하나님의 왕국으로 전환시키는 효과적인 부르심과 중생과 동시적인 단 번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점진적 성화는 우리의 죄 된 과거와의 단절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성화는 우리를 죄 없이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거나 최후의 심판 때까지 죄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보증은 구원의 서정의 부분으로 속죄를 통해 우리에게 오는 축복중 하나라고 말하려 합니다. 분명하게 보증은 믿음만큼이나 구원의 서정에 자리 잡을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약속, 그분의 거룩한 사역, 성령의 증거를 주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보증에 대한 권리를 가집니다.

 

 

 

 

 

제17장 견인과 영화

 

우선 영원한 보호의 교리로도 불리는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영원한 보호와 성도의 견인을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견인은 단순히 참으로 중생한 사람들이 구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즉각적으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는 용서됩니다. 그 점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재를 막는 모든 장벽은 제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히 견인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종말에까지 견인되기 때문에 그들의 필수적인 최종적인 축복은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구원의 서정의 제일 마지막으로 영광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가견적인 현존입니다. 영광은 외적인 장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를 영화롭게 하라고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을 그가 정하십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반영하게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그를 영화롭게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만, 성경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18장 교회의 본질

 

교회는 예수께서 글의 피로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을 위해서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는 더 큰 전체의 결속 안에서 연합된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 하나님의 백성의 개별체로 교회는 하나님의 택자들(규범적), 하나님의 백성들(존재적), 하나님의 보이는 왕국(상황적)입니다. 이는 유형과 무형입니다. 이는 지역적, 우주적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인 것입니다. 말씀의 참된 설교, 성례의 바른 집행, 교회 권징에 의해서 표지가 됩니다. 교회의 직분은 규범적, 상황적, 존재적 관점들을 차례로 반영하는 사도들, 장로들, 집사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교회 정치의 역사적 형태에 대해 말했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복수 장로들, 상위와 하위 회로 조직된 장로교, 각 회중이 다른 회중에 독립적인 회중파가 있습니다.

 

교회 권징에 대해 말하며 우리는 또한 3중구조의 관점을 가진 권징에 대한 세 가지 성경적 이유는 교회를 가르치고(규범적),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리고(상황적), 죄 지은 자를 다시 세우는(존재적)데 목적이 있습니다.

 

 

 

 

 

제19장 교회의 과제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의해 정복된 사람들, 지금 사탄의 왕국에 대항해 하나님의 왕국의 전투에 임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패하게 되고, 실로 그의 능력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의 본부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되고 확대되는 기초입니다.

 

교회는 행동하는 역동적인 몸입니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문화명령과 지상명령이 있습니다.

 

선교적 교회에서 더욱 특별하게 무엇이 진행되고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예배, 양육, 증거의 세 가지입니다.

 

교회의 사역은 말씀의 사역과 다스림의 사역과 구제 사역입니다.

 

교회가 행하는 모든 것이 지상명령의 성취이고 또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할 때, 주께서 언제나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하셨습니다.

 

 

 

 

 

제20장 은혜의 방편

 

우리 모두는 은혜가 무엇인지 압니다. 우리가 진노를 당해야 할 때 실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우리는 멸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기 위해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는지를 대해 우리는 묻게 됩니다. 성화를 위해, 즉 지속적인 영적인 성장을 위한 수단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그것은 말씀, 교제, 기도입니다. 말씀은 규범적이고 교제는 상황적이며, 기도는 존재적입니다.

 

말씀은 성령이 구원하는 능령에서 말씀을 동반하시기 때문에 이는 살아 있고 능동적인 말씀입니다.

 

교제는 예배와 나눔과 성령 안에서 서로 깊게 이해하며 양육하고 덕을 세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찬양, 죄의 고백, 감사, 간구로 시대에 관계없이 기도는 이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합니다.

 

 

 

 

 

제21장 성례

 

첫째, 성례는 규범적으로 권위적, 신적 교통인 인침, 즉 우리를 위한 게시입니다. 성례는 복음을 상징화하고 우리에게 권위적으로 복음이 무엇인지 가르칩니다. 성례는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림과 행위를 통해 우리를 가르칩니다. 감각적으로 표현된 세례에서 우리의 정결함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고 느낍니다.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들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그분의 몸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맛보고, 냄새 맡고, 느낍니다. 개혁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성례는 가견적인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적인 가르침의 완성은 말씀과 성례입니다.

 

둘째, 성례는 상황적으로 우리를 대신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성례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례는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역입니다. 그는 실제로 거기서 행동하십니다. 세례와 성찬식은 아브라함의 할례가 마음의 의의 인침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의 인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하신 것처럼, 성례는 약속을 보증합니다.

 

셋째, 성례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의 현존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성례 안에서 그리고 성례를 통해서 행하신다면 하나님은 현존하시고, 그 자체가 놀라운 축복입니다. 성례는 교제의 범주 아래 있다고 지적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의미를 보게 됩니다. 그의 친밀하신 현존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에서 자라가도록 도우십니다. 성경은 우리의 성장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시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통해 온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례의 효력은 오직 믿음으로만 입니다.

 

 

 

 

 

제22장 천국과 지옥

 

사람이 죽으면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삶을 계속 살게 됩니다. 의로운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 또는 천국 이라고 불린 장소에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최후의 목적지는 아니지만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고 평화를 누리고 교제하는 장소인 중간 상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반면 악한 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제외하고서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의로운 자들로부터 다리를 놓을 수 없는 차이를 지나 다른 장소에 계속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대, 그는 하늘로부터 그와 함께하는 성도들을 데려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몸과 재결합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지상에 사는 모든 성도들이 공중에서 주를 만나기 위해 그름 위로 함께 들려 올릴 것입니다. 이것이 휴거입니다. 그다음은 최후의 심판, 의로운 자들과 악한 자들 사이의 최종분리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간 상태로부터 영원한 상태로 옮겨질 것입니다. 영원한 상태에서는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공개적으로 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눈물은 씻기고, 모든 의심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주실 축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제23장 최후의 날

 

이제 우리는 미래에 발생할 사건, 즉 우리 외부에서 일어나지만 우리 각 개인에게 매우 중요한 객관적 사건은 그리스도의 돌아오심, 즉 그의 재림입니다.

 

첫째, 신학자들은 천 년이 문자적인 시간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서로 입장이 다릅니다. 요한계시록의 숫자들은 고도의 상징이기 때문에 기자가 우리에게 문자적인 천 년으로서 그 수를 이해하도록 기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천’은 매우 긴 시간에 대한 금언입니다.

 

둘째, 논쟁의 논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선행하는지, 뒤따르는지, 이 기간을 나누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전천년설은 그리스도가 천년왕국 전에 재림사리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후천년설은 그리스도가 천년왕국 후에 재림하실 것을 주장합니다. 무천년설주의자들은 문자적인 천 년은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모든 언급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성경적 강조 중 하나를 빠뜨렸습니다. 우리가 최후의 날에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최후의 날은 여기 있지만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성취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아직 입니다. 왜냐하면 올 것이 더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학자들이 이미 그러나 아직로서 표현하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종말에 대해 첫째로,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리합니다. 둘째로, 만약 우리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갈망한다면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다른 윤리적 적용은 격려입니다. 넷째로 예수 재림의 시기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윤리적 적용을 가집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는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그렇게 많은 성경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그의 백성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제24장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때로 사람들은 윤리와 신학이 매우 어려운 학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딤후 3:16-17과 같은 본문은 분명하게 성경의 목적이 선한 행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의 주요 주제인 구원은 구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엡2:8-10에“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분명하게 행위를 위해서 구원받습니다.

 

더욱이 모든 신학은 윤리학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의무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는 아는 것이 중요하다면,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는 아는 것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실제로 행하는 것은 믿는 것보다 더 넓은 범주입니다. 신앙은 행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신학은 더 넓은 범위의 윤리학의 한 부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을 동일하게 광범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윤리학을 인간의 인격, 행위, 태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을 결정하는 도구로서 조망된 신학이라 정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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