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란 무엇인가?
목창균 교수(서울신대)
1. 신학이란?
신학(神學)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연구, 하나님에 대한 학문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신학에 대한 예비적이며 초보적인 정의에 불과하다. 이런 단순한 정의는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직관이나 도덕적인 통찰 혹은 논리에 근거하여 하나님 혹은 최고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순수한 이론적 학문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려고 하는 학문의 한 분과이다. 기독교의 교훈과 신앙의 내용에 대해 체계적으로 해명하려고 하는 학문이 신학이다. 신학은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한 것을 인간이 체계적으로 묵상하고 추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계시가 있을 때에만, 신학은 가능하다. 인간은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 신학을 흔히 계시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신학은 무엇보다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신학의 근본적이며 제일차적인 자료와 근원은 성경이다. 성경은 신학의 교과서이다. 성경 없이는 신학은 불가능하다. 성경 말씀과 일치하고 부합하느냐에 따라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이냐 아니냐가 판가름난다.
기독교 신학은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려고 하는 학문의 한 분과이다. 기독교의 교훈과 신앙의 내용에 대해 체계적으로 해명하려고 하는 학문이 신학이다. 신학은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한 것을 인간이 체계적으로 묵상하고 추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계시가 있을 때에만, 신학은 가능하다. 인간은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 신학을 흔히 계시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신학은 무엇보다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신학의 근본적이며 제일차적인 자료와 근원은 성경이다. 성경은 신학의 교과서이다. 성경 없이는 신학은 불가능하다. 성경 말씀과 일치하고 부합하느냐에 따라 건전하고 올바른 신학이냐 아니냐가 판가름난다.
신학은 경건과 신앙으로 부터 시작하는 학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두려워하는 경건이 없이는 신학할 수 없다. 한편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a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이다. 신학은 이스라엘 역사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계시한 진리를 신앙에 의해 계발된 이성을 사용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학문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가 참되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신앙을 명료화하는 지적인 노력이 신학이다.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학(神學)은 신학(信學)인 것이다.
신학을 단지 학문의 한 분야로 간주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필자가 미국 유학시절, 명문대학이 위치한 도시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로 부터 그 대학의 신학대학 학생 중에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었다. 이단종파에 속한 학생이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학은 단지 인간의 생각이나 지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에 관한 책 몇권 읽는 것으로 기독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이성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신학을 하려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와야한다. 그것이 신학 연구의 전제 조건이다. 기독교 신앙과 생활은 그 내부로 부터만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신학적 지식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신앙으로 부터 나온 지식이다.
2. 신학은 필요한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충분하지, 신학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이가 있다. 신앙만 있으면 되었지, 굳이 신학이 있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신학이 평신도들에게 긍정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보인다는 생각으로 부터 이런 질문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신학은 성경 말씀을 단순하게 만들기보다는 복잡하게 만들며, 평신도가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보다는 어렵거나 혼란스럽게 하며,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보다는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신학의 차이 때문에 많은 교단이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신앙생활에 필요하며 중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충분하지, 신학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이가 있다. 신앙만 있으면 되었지, 굳이 신학이 있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신학이 평신도들에게 긍정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보인다는 생각으로 부터 이런 질문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신학은 성경 말씀을 단순하게 만들기보다는 복잡하게 만들며, 평신도가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보다는 어렵거나 혼란스럽게 하며,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보다는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신학의 차이 때문에 많은 교단이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신앙생활에 필요하며 중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정확한 교리적 신앙은 신앙생활에 필수적이며 본질적이다. 예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는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질문을 하셨다(마16 : 13 -19).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문제이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례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는 예수를 뜨겁게 사랑하고 인정하는 단순한 감정만으로는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세례 요한이나 선지자 중 하나로 이해하는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자가 아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신앙을 가진 자가 신자인 것이다.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과 올바른 신앙은 동전의 앙면과 같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성서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에 기초한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하며 그것을 정립하는 것이 신학의 사명이다. 따라서 신학은 성서적이며 교리적인 신앙에 본질적이며 필수적인 것이다.
둘째, 진리와 경험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신학은 필요하다. 진리와 경험의 관계성을 부정하거나 의문시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진리가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다치게 마련이며 심한 경우에는 생명을 잃게 된다. 이것을 스스로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10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면서 나는 안전하다고 외치는 사람과 같다. 그는 떨어져 내려오면서 각 층을 통과할 때마다 나는 아직도 괜찮다고 소리칠 수 있다. 그러나 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그는 그 진리가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의미와 진리는 우리의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경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앙의 의미와 진리를 탐구하는 신학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필요한 것이다.
셋째, 현대인이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선택과 도전 때문에 신학이 필요하다. 현대인은 인도주의, 과학적 방법, 마르크스주의, 타종교, 유사 종교, 기독교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교훈 등과 같은 많은 삶의 방식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난감해 한다. 참된 진리를 연구하여 다양한 방안 가운데 어느 것이 참된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것은 혼란에 대한 해결책이다. 기독교의 교리적인 교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신앙의 혼란과 세속적인 도전을 해결하는 최선책이다.
3. 신학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신학은 일반 학문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 학문은 논리적인 증명이나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학은 그런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증명이나 추론을 초월하는 근본적인 확신, 즉 영감(靈感)된 진리의 영역을 이해하는 것이 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기독교의 교훈을 연구하는 바른 자세와 방법은 무엇인가?
신학을 하는 바른 자세는 한마디로 경청(敬聽)의 태도로 요약된다.
신학을 하는 바른 자세는 한마디로 경청(敬聽)의 태도로 요약된다.
첫째, 진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자신은 무지(無知)하며 안다해도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자기 중심적인 해석을 하기 쉽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도(道)를 가르치신다(시25:9).
둘째,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하는 사람은 손을 깨끗하게 하며 마음을 청결하게 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않아야 한다(시24: 3 -5). 발에서 신을 벗는 심정으로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잠1:7).
셋째,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연구하려는 사람은 시련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불평하지 않고 참으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인내하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내를 통해서만 자신의 영혼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눅21:19).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신학을 하는 최선의 태도이다.
신학을 연구하는 바른 방법은 무엇인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시편 119편에 근거하여 세 가지 법칙을 제시했다. 기도와 묵상과 고난이 그것이다. 첫째, 신학은 기도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깨우쳐주시고 가르쳐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신학연구의 필수 조건이다. 신학공부를 할 때, 우리의 지식과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절망하거나 낙담하기 쉽다. 나는 신학을 할 만한 능력이 없는 부적합자가 아닌가 회의하게 된다. 그럴 때, 무릅을 꿇고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깨우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필자는 특히 신론에 관한 학위 논문을 쓰면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영감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한바 있다. 주여 저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보여주소서.
둘째, 신학은 묵상으로 하는 것이다. 성경은 모든 다른 책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는 책이다. 성경 이외, 영원한 생명에 대해 참으로 가르치고 그것에 이르는 바른 길을 제시한 책은 없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것의 의미를 주목하고 묵상해야 한다.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셋째, 신학은 고난을 통해 하는 것이다. 진리를 위해 고난받기를 즐거워하는 것이 신학연구의 방법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옳고 참되며 능력이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시금석이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루터 역시 로마 교황 지지자들이 그를 억압하고 괴롭힌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런 고난이 그를 올바르고 훌륭한 신학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윗과 루터의 규칙에 따라 신학을 연구할 때, 시편 119편은 자신의 신앙고백이 될 것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 보다 승하니이다."
4.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일뿐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이나 관계가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독교인과 구원의 확신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구원을 받았는지 혹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의 확신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를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이란 무엇인가? 구원을 받았는지 혹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의 확신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를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구원의 확신이 참된 것인지 또는 성서적인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아무리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더라도 신앙이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 확신은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참 신앙은 세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지식과 신념과 신뢰다. 기독교 신앙은 신앙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신뢰한다면, 그를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 자체가 전부가 아니다. 아무 것도 아는 것 없이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설사 믿는다해도, 그런 신앙은 맹목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진리 더하기 신앙이어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환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지식에 기초한다. 지식은 신앙을 불러일으키는데 필요한 사실들을 제공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7).
신앙의 두번째 요소는 신념(belief)이다. 신념은 확신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리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 기독교의 교리를 긍정하는 태도를 말한다. 신념으로서의 신앙은 영원한 진리가 현재의 사실이라고 선언하는 확인이요 행동이다.
신앙의 세번째 요소는 신뢰(trust)다. 신뢰는 자신을 맡기는 것, 우탁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그것에 지성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그ㅌ나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참된 것이라고 믿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자신과 자신의 삶을 위탁하는 것이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구원의 확신에 필수적인 것은 진리에 른 이해와 지식이다. 단순히 믿는 신념만으로는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에 이를 수 없다. 이단들은 기독교 진리에 대해, 특히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기독론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다. 인류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삶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믿고 자신의 삶을 그에게 위탁하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올바른 신앙은 지식과 신념과 신뢰를 겸비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신앙은 환상이기 쉽다. 그런 환상과 구원의 확신은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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