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설이 왜 시대마다 다른가?
최재석
성경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되었다는 영감설은 주로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근거하고 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에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만이 영감설과 관계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NIV에서는 “All Scripture is God-breathed”라고 번역했는데, 여기 “God-breathed”는 그리스어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의 번역이다. 이 단어를 흠정역에서는 “inspiration of God”라고 번역했고, 학자들은 흠정역을 따라서 ‘영감’이라고 표현해 왔다. 여기 디모데후서의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말에는 성경의 기록에서 작용한 하나님의 영감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이 구절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한자 한자 불러준 것인지, 기록자인 인간의 영향은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베드로후서에서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것을 예언으로 한정하고 있다. 물론 창세기를 제외한 오경과 예언서들에서는 모세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지만,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영감에 대한 언급을 성경 전체에 적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데, 인간과 하나님 둘 중에서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영감설이 나왔다. 영감설의 종류 영감설들 중에는 기계적 영감설이 있다.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펜을 붙들고 앉아서 하나님이 불러주는 대로 기록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생각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자인 인간의 생각이 가미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훼손하는 신성모독적인 일이다. 초대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이 이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했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나온 영감설이다. 축자영감설도 기계적 영감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계적 영감설과의 차별화를 위해서 완전 영감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성경 전체의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하지만, 축자영감의 ‘축자’라는 글자는 그것이 기계적 영감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기계적 영감설이나 축자영감설에서는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에서 인간의 언어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운다. 이 외에 역동적 영감설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기록에 성령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기보다는 성경 기자에 의해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성경 기자들은 주로 그들의 영적 감수성과 예민성 그리고 도덕성에 근거해서 성경을 기록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언어를 더 중시했다. 역동적 영감설은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운 주장이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영감설은 유기적 영감설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록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지만, 나름대로 그들의 어휘를 선택하면서 그들의 개인적 특성을 발휘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성경의 기록자를 단순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저자로 간주한다. 유기적 영감주의자들은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에서 인간과 하나님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20세기에 개혁주의자들을 비롯해서 여러 복음주의적인 교회에서 유기적 영감설을 지지했다. 이 외에 성경의 어느 부분만 영감된 하나님 말씀이고, 어떤 부분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는 부분적 영감설,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은 영감 되었으나, 그 사상을 표현하는 문자나 용어들은 성령의 지도나 감독 없이 저자 자신이 선택하여 사용했다는 사상적 영감설 등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양한 영감설의 주창자들이 디모데후서나 베드로후서에서 영감(감동)이라는 단어를 빌려왔을 뿐 성경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성경에 그 영감의 정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댈 수 없는 각각의 영감설에는 그 주장이 나온 시대의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기계적 영감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강조하던 종교개혁기를 중심으로 나왔고, 역동적 영감설에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중시하던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앙적 자세가 반영되었다. 그런가 하면 유기적 영감설은 20세기 신학의 산물이다. 부분적 영감설은 18세기 합리주의자들의 주장이고, 사상적 영감설은, 역동적 영감설처럼,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에서는 성경 저자의 역할을 거부한다. 성경에 인간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서 설명하는 영감설은 우리가 서구의 복음주의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유기적 영감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영감에 대한 존 스토트의 글 우리는 영감의 진리를 잘못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허공에 대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또한 그분은 요셉 스미스(몰몬교의 창시자)가 자신의 황금판들에 대해 주장하듯이 자료들을 기록하여 그냥 내버려 두어 발견되도록 하지도 않으셨다. 또한 하나님은, 회교도들이 믿는 것처럼, 알라가 모하메드로 하여금 아랍어로 코란을 받아쓰게 한 것 같이 서기관들에게 기계적으로 받아쓰게 하시지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영감의 과정이란 하나님이 저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실 때마저도, 인간 저자들 자신이 역사적 연구와 신학적 고찰과 문장적 구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역사적 이야기며, 각 저자는 자기 자신의 신학적 관점과 문학 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감은 인간의 협조를 필요 없게 만드는 것도, 저자들의 독특한 공헌을 제거해 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이라는 영감을 의미하는 말이, 성경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아니다. 성경을 만들어내는 데 관여한 것은 하나님의 입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20)고 말하고 있는 성경이 또한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행 3:18, 21)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말씀은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가? 하나님의 입인가? 인간의 입인가? 유일한 성경적 대답은 ‘둘 다’라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이 동시에 그들의 말이 되고, 그들의 말이 동시에 그분의 말씀이 되게끔 인간 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이것이 성경의 이중저작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말이다. 더 나은 표현으로는 그것은 인간의 말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두 저작자를 결합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고대와 현대의 구교와 신교의 일부 신학자들은 하나의 유추로서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에 호소해 왔다. 비록 그 대비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뭔가를 설명해 준다.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볼 때, 우리는 그분의 신성을 부인할 정도로 그분의 인성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서로 모순이 되지 않도록 그 둘을 똑같이 주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한 교리에서도 그것이 인간의 말이라는 것을 부인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해서도(이것은 근본주의다) 안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할 정도로 인간의 말이라고 주장해서도(이것은 자유주의다) 안 된다. 서로 모순이 되지 않도록 둘 다를 동등하게 주장해야 한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을 결정하시고 인간 저자들의 개성을 묵살하지 않으시면서 말씀하셨다(히 1:1). 다른 한편으로 인간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진리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말했다(벧후 1:21).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은 성경을 읽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성경의 이중저작은 이중적 접근을 요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어떤 다른 책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읽어야 한다.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읽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인간의 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책을 읽듯이,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고 생각하면서 숙고하고 고찰하면서, 문학적, 역사적, 문화적, 언어학적 특성에 깊이 주의하면서 읽어야 한다. 이러한 겸손과 경외함과 비판적인 고찰은 불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필수불가결하다. 마치면서 존 스토트는 ‘양극화’를 피하고 양극단의 것을 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복음주의 신학자다. 그는 『균형잡힌 기독교』에서 지성과 감성, 보수와 진보가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구교와 신교, 감리교와 장로교가 각자의 특성을 뛰어넘어서 대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하나님과 인간이 성경의 기록 과정에 관여했다는 이중저작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그의 신학적 자세에서 나왔다. 대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그의 신학적 입장은 현대의 대화적 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20세기 신학에서는 전통적 신학에서 무시되었던 인간의 노력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미 18세기에 존 웨슬리는 신인협동을 내세웠다. 개신교의 루돌프 불투만은 역사적 변화와 문화의 중요성을 전면에 내세웠고, 폴 틸리히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문화와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칼 라너와 한스 큉 같은 가톨릭 신학자들은 내재와 초월의 균형을 꾀했다. 대화와 조화를 위한 현대 신학계의 특징은 신학자들이 문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인간의 경험을 다루는 문학을 멀리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문학적 소양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아주 긴요하다는 것을 신학자들이 인식하고 문학을 수용하면서 지금 신학과 문학은 밀월관계에 있다. 그래서 지금 신학계에서는 신학의 언어는 상징의 언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은유의 신학이나 이야기 신학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신학계의 대화와 균형의 추구는 열린사회를 주장하는 인문주의자들의 사상과 상통한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열린사회를 언급한 후로 열린 시대가 동텄다. 인문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가 상반되는 성과 속의 벽을,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장벽을 허무는 작업을 했다. 이러한 철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의 주장은 피식민자, 흑인, 여성 등의 해방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결과 열등한 자들의 인권이 존중되고 지위가 향상되면서 우월한 자들과 열등한 자들 사이의 균형, 대화, 조화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분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었다. 오랫동안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 남성과 여성, 신과 인간을 구별하고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의 차이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대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사상가들의 영향으로 이것과 저것의 차이(either/or)보다는 이것과 저것을 모두 받아들이려고(both/and) 한다. 스토트가 성경의 기록 과정의 영감을 말하면서 하나님과 인간의 이중저작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문화적 상황이 반영된 신학계의 움직임과 맥을 같이 한다. 현대의 사상과 신학에 발맞추는 스토트를 자유주의자라고 속단하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유주의적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전 세계 교회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영감설은, 스토트가 현대 사상과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당대의 사상과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신학에 맞는 영감설이 나왔다. 우리의 열린 대화의 시대에는 유기적 영감설이 나왔고, 스토트는 그 유기적 영감설을 설명하면서 이중저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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