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응답 받는 기도의 원리
단 9:1-19 (봉독: 1-10, 16-19)
저는 지난주 한 뉴스 기사를 읽었는데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시대가 돌아왔다”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기사는 전쟁의 시대 자체 국방 능력, 국방 과학 기술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지금 세대는 6.25 이후,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전쟁의 시대가 되면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폭격한 이후, 그곳은 말 그대로 “황폐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전쟁은 양쪽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다니엘 역시 전쟁의 시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벨론이 멸망하는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메대-페르시아 연합군이 습격하여 바벨론을 무너뜨렸습니다.
오늘 본문 다니엘서 9장 1절에 보면 다리우스가 점령한 통치 원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때 다니엘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나라가 “황폐”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황폐라는 사전적 의미는 “집, 토지, 혹은 정신이나 생활 따위가 거칠어지고 메말라 못 쓰게 됨”이라는 뜻입니다. 왜 다니엘이 이렇게 보는 것일까요?
먼저는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17절 보세요.
[단 9:17, 개정]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황폐한 성소”(17절)는 거의 주전 586년 이후 거의 47년째 그대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만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과 영혼도 황폐해져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단 9:18, 개정] 나의 하나님이여...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혹시 여러분들도 황폐한 상황 가운데 계십니까? 황폐한 가정, 황폐한 재정, 황폐한 영혼...
다니엘은 백성들의 황폐한 상황을 깨닫고 주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18절에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이라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가요?
1차적으로 여전히 페르시아의 포로된 상황을 뜻하는 것이지요.
바벨론이 망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페르시아에 의해 여전히 포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황폐한 상황이라 함은 이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황폐한 상황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 페르시아의 세속화된 사상에 포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믿는 자나 안 믿는 자가 별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틴 루터가 쓴 논문 중에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오직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데 교회가 세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주장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가 된 상황입니다.
더 나아가 황폐한 상황이라 함은 하나님의 백성이 멸시와 조롱거리가 됨을 의미했습니다.
7절, 16절 보세요.
[단 9:7, 16] 7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흩어져 사는 사람이...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16 ...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의 죄악 때문에, 예루살렘과 주님의 백성이 우리 주위에 있는 민족들에게 멸시를 받습니다. (우리말: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습니다)
열방과 민족들이 패하고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고 조롱하며 비웃습니다.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지금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소위 ‘고난’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수치와 멸시입니다.
이 수치와 멸시는 “응보적인 고난” 아닐까요?
번영신학에 기초하여 예수만 믿으면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기복신앙을 가르친 결과, 물질주의, 세속주의, 권력지향주의라는 바벨론 문화가 교회에 침투하였습니다.
교회를 사유화하여 세습하고, 탈세를 하고, 성 문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2,000년 이후에 유독 한국교회가 겪은 일들이었습니다. 신뢰도는 바닥에 추락했습니다.
고난은 고난인데, 죄로 말미암은 ‘응보적인 고난’이요 멸시요 수치입니다.
다니엘은 왜 우리가 포로가 되었고 왜 우리가 황폐하게 되었나? 그 원인을 알았습니다.
국방력이 약해서인가요? 국방 과학 기술이 뒤쳐져서 전투기 스텔스 기능이 없거나 장거리 미사일을 쏘지 못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11절 보세요.
[단 9:11] 참으로 온 이스라엘이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주님의 율법을 어기고 벗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벌과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우리의 황폐해진 상황을 보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근본적인 원인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 나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높은 직위를 갖고 부와 영화를 누리며 사니까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3절 보세요.
[단 9:3] 응답을 들으려고, 나는 금식을 하면서, 베옷을 걸치고, 재를 깔고 앉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간구하였다.
다니엘은 베옷을 걸쳤습니다. 굴욕과 무가치함을 의미합니다. 재는 황폐하고 절망적인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며 낮추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금식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23절에 보니 그가 간구하자마자 응답을 받습니다. 물론 금식 자체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은 단식투쟁이 아닙니다. 하나님 응답하지 않으면 저 죽을 겁니다!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만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내 삶이 음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금식은 더욱 더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특정 기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좋은 음식을 제하는 ‘선택적인 금식’을 21일간 행했습니다(단 10:2-3).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삼상 1:7).
에스더는 금식하며 몰살 위기에 있던 유대 민족을 구원해 달라며 기도했습니다(에 4:3, 16).
느헤미야는 성벽을 완공하고 백성들의 영적 각성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9:1-4).
에스라도 포로기를 마치고 귀환하는 백성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보호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스 8:21-23).
사도 바울은 회심한 이후 새로운 부르심 앞에 3일을 금식했습니다(행 9:9).
성경은 금식과 기도에 대한 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탐식, 과식하는 이 시대 금식은 인기가 별로 없지요.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기도 응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황폐한 상황을 겪고 계신 분들이라면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연말과 연시를 맞이하여 여러분들에게 21일 금식 기도를 도전해 드립니다.
21일 온전한 금식이 아니라 다니엘처럼, 고기와 같은 좋은 음식을 제하는 “선택적인 금식”입니다.
또는 하루에 한 끼를 금하는 “부분적인 금식”입니다.
건강 때문에 금식을 못하시는 분들은 “미디어 금식”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올해는 12월 1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새해는 1월 1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됩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올해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금식하며 기도해 보십시오. 새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구하고 싶다면
금식하며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단지 금식만 하며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기도의 비밀이 담겨 있었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의 비밀 2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다니엘은 ‘약속의 말씀’에 기초하여 기도했습니다.
2절에 보면,
[단 9:2] 곧 그가 통치한 첫 해에, 나 다니엘은 거룩한 책들을 공부하면서, 주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하신 말씀, 곧 예루살렘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한 상태로 있을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는 거룩한 책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바로 예레미야서입니다.
당시 예레미야의 예언이 담긴 두루마리들이 바벨론의 포로들 사이에서 회람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서 36장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말씀을 두루마리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바룩에게 명하여 예언을 기록하게 하지요. 비록 그것이 유다 왕 여호야김에 의해 태워지지만, 예레미야는 다시 적게 합니다(렘 36:28).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다니엘이 이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말씀을 기초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에 약속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25장 11절과 29장 10절입니다.
[렘 29:10]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 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정한 때가 있었습니다. 고난의 끝이 있었습니다.
70년이 지나면 내가 너희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 회복시키겠다는 겁니다.
실제로 다니엘은 벨사살이 암살을 당하면서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주전 539년, 바로 그 해에 다니엘은 예레미야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약속을 알았습니다.
누군가는 묻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꼭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겁니다. 정당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왜 기도한 것일까요? 바로 그 다음 구절들 때문입니다.
[렘 29:11]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뒤이어 하나님은 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렘 29:12-13] 12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13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이 약속을 붙들고 나를 찾고 기도하라. 재앙이 아니라 번영과 희망을 줄 거야.”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 계획을 오직 주님만 아시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시고, 그분을 경험하기를 원하시고, 더 친밀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찾으면 내가 너희를 만나주리라.” 그래서 다니엘은 기도하는 겁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함으로 약속을 누리고, 또한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난 장로회 부부 수련회 때 조지 뮬러에 대한 책을 함께 읽었습니다. 그는 5만 번 이상 기도응답을 받은 분으로 유명하지요. 많은 장로님들의 고백이 “우리가 죠지 뮬러를 잘 몰랐다”였습니다. 그는 200번 이상 성경 통독을 했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모르셨을 텐데 그가 살았던 시기는 19세기 총 세 차례 (1849, 1854, 1866)에 걸쳐서 콜레라 팬데믹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황폐한 시기를 겪은 겁니다.
그 콜레라 팬데믹은 인도에서 시작하여 동남아시아, 한국, 중국, 일본, 아프리카와 유럽, 아메리카 등 세계 전역으로 퍼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가 있었던 브리스톨 지역은 영국 내에서도 가장 타격이 심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아원 사업을 위해 지금으로 말하면 750만 불, 약 80억 넘는 금액을 오직 기도로만 후원을 받았습니다. 10만 명이 넘는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황폐해진 상황, 무너진 상황 속에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비밀은 바로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69년 4개월 전부터 지금까지(1896년 3월), 하나님 말씀에 담긴 성령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그리고 인내하면서 뒤따르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나님은 항상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셨다.”
말씀으로 기도하는 모범이 다니엘입니다. 오늘 본문의 그의 기도는 온통 성경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절 하나하나가 다 성경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출애굽기(34:6), 레위기(26:40), 신명기, 시편, 예레미야서 등에서 가져온 기도들입니다. 왜 그의 기도가 기도하자마자 응답이 되었는가? 바로 말씀에 기초했기 때문입니다. 왜 내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가? 말씀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약속하셨지요.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을 때, 무엇을 구하든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아멘입니다.
다니엘은 거룩한 책들을 읽고 연구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계획이 나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희망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도할 동기를 부여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붙잡고 인내하며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여러분과 가정과 나라를 위해, 황폐해진 모든 영역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둘째, 다니엘은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동일시했습니다.
다니엘 기도의 특징은 나와 죄인들을 나누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자들은 조상들이지, 나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반복적으로 “우리가” 죄를 짓고 악한 짓을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
[단 9:5] 우리가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단 9:6] 우리는 ..., 주님의 종 예언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단 9:8] ... 낯뜨거운 수치를 당한 것은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단 9:9] ...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하였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동일화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죄가 곧 나의 죄입니다.”
사실, 다니엘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그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입니다.
바벨론 포로라는 재앙은 다니엘 이전 세대들이 저지른 죄악의 열매에요. 다니엘은 말씀대로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놀랍게도 자신도 죄인이라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아무리 선한 사람도 죄성을 갖고 태어난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내가 설령 그때 태어났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비록 때와 장소와 환경은 달랐지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죄를 지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기도하는데 누구의 기도가 응답되고 의롭다함을 받나요? 세리입니다. 무슨 차이죠? 바리새인은 “오 하나님, 저는 이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드립니다.” 그가 경건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고백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늘을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주님, 저도 죄인입니다. 다른 죄인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저도 그들과 똑같습니다. 아니, 저에게는 이 세리보다 더한 자비와 긍휼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지금 다니엘의 기도입니다. 다니엘은 소위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지 않았습니다.
“난 그들과 달라! 그들이 죄를 지은 것이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반역했고, 불순종했고, 떠났습니다. 우리가 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동일화의 법칙”에다가 아주 구체적으로 죄를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황폐함을 회복시키시는 기도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 링컨 대통령이 1865년 3월 4일,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출발하는 취임식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 취임사 어디에도 “승리가 임박했다”거나 “북군이 남군을 응징했다”거나, “정의와 불의의 전쟁”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구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링컨은 이 취임식에서 남과 북 모두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서로 상대방을 응징해달라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하고 있지만, 링컨이 보기에 하나님은 어느 쪽의 기도도 온전히 응답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 전쟁은 남과 북 모두에게 가해진 하나님의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형벌은 “죄”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남부는 노예제도를 세운 죄를 지었지요.
그렇다면 남부만 죄를 지었나? 북부는 남부를 상대로 형제살육을 수행해야 했다고 결정한 것,
그것이 북부의 죄라는 겁니다. 남부는 노예제도를 둔 적극적인 죄를 지었다면 죄짓게 하는 남부 때문에 촉발된 북부의 수동적인 죄도 죄입니다.
링컨은 우리가 다 죄인이라고, 우리가 다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비록 링컨은 이로부터 한 달 뒤에 암살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링컨의 기도를 들으셨어요. 이 고백을 드린 한 달 뒤인 1865년 4월 9일에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하면서 사실상 4년간의 전쟁은 끝이 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보면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의인이 죄인을 품으면 의인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인처럼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래 구약에서 부정한 자를 만지면, 만진 자도 부정해집니다.
불결한 것과 닿으면 불결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부정한 것을 꺼려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그것이 바뀝니다. 사도 바울이 믿는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했을 때의 예를 듭니다. 불신자와 결혼했다면 이혼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로 인해 거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으로 인해 거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언제? 믿는 배우자가 믿지 않는 배우자를 품을 때.
[고전 7:13-14] 13 또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그가 아내와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14 믿지 않는 남편은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믿지 않는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자녀도 깨끗하지 못할 것인데, 이제 그들은 거룩합니다.
믿지 않는 자가 거룩한 자와 연합하면 거룩한 자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둘 다 거룩해진다는 약속입니다. 왜 그런가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이나 아내나 배우자가 죄를 저지를 때, 이놈의 웬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주님, 우리가 웬수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반역한 원수된 자들입니다!”
예전에 한번은 어떤 권사님이 눈물로 기도하시길래 나중에 물었어요. 무슨 기도 제목이 있나요?
“목사님, 제 남편이 죄를 너무 많이 저질러서, 제가 대신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불신앙, 불순종, 술과 도박, 이러한 남편의 죄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부부는 한 몸이니까.
남편의 죄는 곧 나의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18절에, 자비하신 주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만져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깨끗해졌습니다.
혈루병 앓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져서 예수님이 더러워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여인이 깨끗해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이 이 세상의 악한 영보다 더 강력하다는 말씀이요 약속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니엘서가 세속적 도시에서 사는 선교적 소수인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과 페르시아에 살기에 그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다니엘로 인해 변화됩니다. 다리우스 왕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사상적, 문화적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우리의 죄라고 고백하자,
하나님께서 그 황폐함을 그치고 회복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배우자가 변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 여기는 그 기도를 귀히 여기십니다.
이것이 바로 더 나은 다니엘이신 예수님의 기도였어요.
그분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히 9:1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재자이십니다. 그는 첫 번째 언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에서 사람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약속된 영원한 유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죗값을 치르셨어요.
다니엘은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땅에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바벨론 포로라는 죗값을 치러냅니다. 다니엘은 더 나은 다니엘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히 7:25).
황폐한 삶, 황폐한 상황을 우리 주님께 내어드리십시오.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황폐한 상황에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 제가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더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무관심했습니다. 방치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화의 기도, 구체적인 회개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실 것입니다.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세번째, 다니엘은 하나님의 성품에 의지하여 기도했습니다.
[단 9:18] ... 우리가 이렇게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고, 주님께서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니엘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입니다.
비록 범죄하였으나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에 의지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9장 24절에 나오지만, 죄가 끝나고, 속죄가 이루어진다고 응답하십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는 겁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께 나아가십시오.
이 하나님의 성품에 의지하여 기도하십시오.
다니엘처럼 기도를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시고 기도의 응답을 누림으로써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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