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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 영적해석과 상징적해석의 대안 문장적해석

하나님아들 2024. 3. 12. 20:24

천년왕국 영적해석과 상징적해석의 대안 문장적해석

 

 

1. 영적 해석의 폐해

 

성경 66권 중 유독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만큼은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무천년주의자들이 그렇다. 그래서 이들은 영적 해석1)을 하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문자적 해석2)이라고 하면 세대주의로 보는 선입견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천년왕국에 관해서이다.

 

1) 영해라고도 한다. 고린도후서 3장 6절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 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한 말씀을 근거로 모든 말씀을 본래의 문자적 의미는 무시하고 영적 의미만을 발견하여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는 우의적 해석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우화를 해석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성경 말씀을 우의 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이다. 풍유적이나 우의적이라는 말은 성경 말씀에는 배후에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전제 하고 비유나 상징이 아닌 평범한 진술까지 모두 비유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풍유적 해석은 성경의 모 든 말씀에서 문자적인 의미는 무시한 채 어떤 다른 의미를 찾으려한다. 즉, 본문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무엇은 무엇에 해당하고 또 다른 무엇은 무엇을 가리킨다는 식으로 계속해서 어떤 것들에 빗대어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다보면 원래 단어의 뜻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아는 데만 열중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천년주의가 성경 전체를 영해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영적 해석에 관해서는 신중하다.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우선한다. 

 

2) 성경적 사건과 성경에 계시된 내용의 예언을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문자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는 해석을 일컫는다. 이는 문자주의와는 구별된다. 문자주의는 성경 말씀을 극단적으로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자적 해석은 성경 말씀에 대하여 기본적으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지만, 필요 할 때는 비유적 해석도 가능한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시나 예언에 많이 나오는 비유나 상 징적 표현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며, 때로는 풍유적인 해석을 통하여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문자적 해석은 종교 개혁이래 건전한 주해방법으로 인정되어 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자주의 해석이다. 문자주의 해석이란 모든 기록된 글은 문자로 표현된 통상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성경말씀 역시 문자적인 뜻 외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다고 하면서 오직 글자 그대로의 표현에 의존하여 문자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주해방법을 말한다. 문자주의에 의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나 상징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성경 자체가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명시적으로 비유라고 가르치 는 것 이외의 모든 말씀은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대주의가 비판받은 것은 이러한 문자주의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문자적 해석은 성경적인 해석 방법인 것이다.  

 

1) 천년왕국을 영적 해석으로 보는 견해들

 

무천년주의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무천년론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을 문자적인 천년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의 긴 기간의 상징으로 보며, 왕노릇 한다는 것은 이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복음 전파 행위와 그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한 것이므로 천년이라고 하는 기간의 제약을 받을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사탄이 결박되었으므로 전 신약 시대는 모든 성도들(영적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3)

 

"천년동안은 … 신약시대의 은혜의 기간 전체를 말하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신 기간이다.…천년동안 악의 대장인 사탄을 결박하는 것은 기독교 시대의 구원 받은 자들이 문제없이 선교 활동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의 배려이다 주님의 설명은 사탄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천년 동안 결박한 것이다. 사탄이 이 땅에서 마음껏 활동하면 성도가 정상적인 생활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4)

 

"전천년설에 의하면 구속역사에서 현재라는 시점에서 볼 때 미래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천년왕국과 심판과 영원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 중에 신약성경에 재림과 부활과 심판과 영원 상태는 여러 번 반복해서 예언되었으나, 천년왕국(전천년설이 말하는 지상 천년왕국)에 대해서는 계시록 20:1~6에 밖에 없다는 것이 여전히 전천년설의 문제점이다."5)

 

"1. 성경을 해석할 때,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전체는 부분에 의해서 해석하고 조명한다. 불분명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1~6은 상징적인 것으로 하늘의 광경을 말하고 있지 지상적, 국민적, 팔레스타인에 있게 될 왕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 같은 계시록 144,000(구약12지파x신약12사도x완전수10의 세제곱)은 신구약의 구원받은 자의 총수라는 상징으로 보면서 천년을 문자대로 계산하는 것은 잘못이다. 3. 천년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의 권세가 성행한 시기이다. 쇠사슬은 복음의 권세를 말한다. 사단이 무저갱에 감금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의 권세로 사단을 무장해제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왕노릇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에서 다스리되 '기도와 도고'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6)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되어 천년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것인데,"7)

 

"이 세상에서 천년왕국이 있고 그 후에 영원한 천국생활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바로 천국생활로 들어가게 되든지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천년왕국에 가까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8)

 

상기에 인용된 저서 저자들의 견해를 통해 무천년주의를 표방하는 한국교회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천년왕국에 대한 생각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국외 신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 14, 15절에 언급된 '불못'이 최후 형벌의 장소를 상징하기 때문에 1절과 3절에 언급된 '무저갱'은 최후의 형벌의 장소가 아니어야 한다고 하며 이 장소들은 사탄의 활동이 천년기 동안 약화될 것을 뜻하는 내용으로 해석되어야 한다"9)

 

"마귀가 모든 의미에서 결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되풀이한다. 그의 영향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탄이 그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허락된 영역에서는 더욱더 극심하게 날뛰고 있다. 한 마리의 개가 굵고 긴 쇠사슬에 묶여 있으며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감금된 행동 반경 안에서는 매우 사납고 큰 해를 입힐 수 있다. 그러나 그 개가 쇠사슬에 묶여 있는 범위 밖에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하여 어느 누구도 물지 못한다.10)

 

그 외에도 벌콥(Louis Berkhof, 1874~1957)은 "요한계시록 20장 4~6절 '이 구절들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이 지상에서 통치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암시들이 결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계시록 4장 4절과 6장 9절 같은 구절들에 비추어 볼 때 그 장면은 하늘에 놓여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고 하였다."11) 보쿰(Richard J. Bauckham, 1946~)은 "다니엘서 7장 9절의 '신적 보좌 환상'을 계시록 20장 4절의 '보좌'와 연결시켜 성도들, 특별히 순교자들의 통치가 '하늘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주장한다."12) 빌(Gregory K. Beale, 1949~)은 "'사탄의 결박과 결과로 무저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다루던 앞선 내용에 이어 20장 4절부터는 하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묘사하는 장면 전환이 있다.'고 해석한다."13)

 

2) 천년왕국을 영적 해석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반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마귀를 결박했으며 무저갱에 던져 잠갔고 그 위에 인봉까지 했다고 한다(계 20:2~3). 그런데 이를 사람이 개를 끈으로 묶은 것에 비유하다니 이것이 과연 적합한 해석인가? 또 하나님께서 친히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어떻게 마귀가 움직일 수 있는 감금된 행동반경이 있다고 하고 그 안에서는 매우 사납고 큰 해를 입힐 수 있다고 하는가? 도무지 성경에 기록된 의도와 강조점과는 무관한 해석이 아닌가? 이러한 헨드릭슨의 해석은 어떻게든 무천년주의 종말론 틀에 천년왕국 본문을 억지라고 끼워 맞추려는 무리한 시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계 20:2~3)

 

어떻게 '철저하게 결박당했다'고 하면서 재림의 때까지 '왕성하게 활동'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를 인정하려면 둘 중 하나를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 편의 철저한 결박과 통제가 실제로는 철저하지 못했거나, 마귀 편의 능력이 하나님의 결박과 통제를 무시할 만큼 강력했다는 뜻이다.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중 어떠한 것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영해의 과도. 무천년기 재림론이 계시록 20장 1~6절의 명백한 진술을 영해하고 지상 천년기의 실재성을 부정하려는데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논법이 많이 포함되니 동의하기 곤란하다. 즉 명확한 년 수 천년 간을 완전한 시기로 보고 마는 것은 견강부회의 억설로 보인다."14)

 

"계시록의 기록대로 사단의 사역들은, 역사적 진행성(進行性)을 보여 준다. 그러나 무천년주의자들은, 그것들을 진행으로 보지 않고 모두 다 한 가지 사건(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때문에 사단은 성도 참소의 자리에서 떨어지고, 신약의 복음 운동이 승리함)이 여러번 강조된 것으로만 본다. 이것은 잘못이다. 계시록의 기록 내용은, 분명히 사단의 사역들을 진행성 있게 말한다."15)

 

무천년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을 신약시대의 복음 전도 운동으로 보는 무천년주의자들과 달리 그리스도의 재림 광경을 보여준다고 해석하여 실상은 역사적 전 천년설에 동조하고 있다.16) 20장 2절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에 관해서도 카이퍼는 이 시대가 재림 후에 올 것으로 생각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행동의 진행에 관계된 과도기를 말함인데, 여기서는 인간의 시간 관념보다 하나님의 시간 관념으로 말한 것이다. 이 기간은. 큰 결론적 사건에 이르는 중간 계단이라"라고 하였다.17)

 

이것은 무천년주의자들도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백마와 그것을 탄 자'(19:11), '사탄 천년 결박'(20:2) 등 일부분들을 종말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부분들은 초림 혹은 초대교회로 해석함으로서 요한계시록 해석에 일관성이 결여된 큰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요한계시록 19장 1~3절을 무천년설에서는 그리스도 초림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활동이 어느 정도 제한될 사실을 가리킨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것은 재림 이후에 있을 일이다."18)며 4~6절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뒤에 땅 위에서 되어 질 일들에 대하여 기록되었다."19)고 해석하였다.

 

어느 학자는 역사적 전 천년설주의자로서 천년왕국을 지지한다고 밝히면서도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기도 한다.

 

"계 20장(천년왕국)의 어느 해석을 취하든 영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과거에 하던 방식과는 달리, 어느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보다. '왜' 택하느냐를 질문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무천년을 사랑하는 역사적 전 천년주의자들의 입장에 서기를 원한다. 아니면 역사적 전 천년주의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무천년주의의 입장에 서도 좋다."20)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한국의 가장 전통 있는 신학대학원에서 그나마 역사적 전 천년주의를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교수 중 한 분이 한 이 말은 결국 무천년주의 즉 영적해석화로 볼 수밖에 없다.

 

앞에 소개된 한 무천년주의자는 성경 한 곳에만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적 천년왕국을 인정할 수 없다 말한다. 중요계시는 반드시 반복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러한 주장들에 저자는 동의할 수 없다.

 

성경에서 '목사'라는 칭호는 에베소서 4장 11절 한 곳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만 있는 직분을 부정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아니면 용어는 한 곳에 기록되었지만 성경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같은 사역을 뜻하는 구절들을 찾아 정립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이에 대한 실례를 더 든다면 요한계시록 등장하는 교회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을 보면 더 명료하게 알 수 있다.

 

"2장과 3장 '교회'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 7장 '흰옷 입은 무리'. 12장 '해를 옷 입은 여자', 14장 '곡식'. 15장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가에 선 무리', 19장 '어린양의 신부'. 이렇게 '교회' 한 가지를 말하면서도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였다."21)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미가서 5장 2절 말씀대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탄생 장소에 대해 이곳 한군데에만 예언되어 있다고 베들레헴을 실제(Reality) 지명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천년왕국이 교회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중대한데 부인하려드는가? 그런데도 이것을 왜 묻어 두려하는지 목회자들은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3) 천년왕국을 예언한 성경의 증언

 

요한계시록 20장 6절 외에 천년왕국으로 언급된 성경 구절은 없지만, 묘사(Description)와 약속(Covenant)으로 예언된 말씀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2:44;7:14) ;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슥 14:9) ;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것이며",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받은 자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사 11:6-9;35:5-7;65:17-23)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1) ;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15:24) ;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3) ;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 하니",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계 11:15;19:6;20:6)

 

성경은 인류 구원을 위한 책이다. 그러므로 전개상 구원받아야 할 모든 대상자들에 대한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러나 천년왕국에 들어갈 백성들은 예수님 재림 시까지 생존한 성도들로 전체 구원 백성에 비해서는 적은 수이다.22) 그렇기 때문에 천년왕국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압축된 계시와 같아서 신약에는 재림 후 곧바로 천국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이 전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이라는 용어가 없다는 이유만을 들어 인정하지 않고 천년 기간을 영적으로 보려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해석이 아닐 수 있다.

 

4) 천년왕국을 구체적으로 계시한 다니엘서

 

다니엘서 12장 11~13절에 "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란. 7년 환난 중 전 3년 반이 끝나가는 시점에 적그리스도가 성전에서 제사를 금하고,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단 9:27 ; 살후 2:4). 이때로부터 '1290일을 지낼 것이요'라고 했다. 후 3년 반 1260일을 마치고도 30일 경과한 기간으로 저자는 최후 심판으로 본다. 지구는 세 갈래로 쪼개지고 불타버리는 시간이다(계 16:19~20 ; 벧후 3:7). 그리고 '기다려서 1335일까지'라는 말씀이 나온다. 1290일 후 45일이 지났다. 이 기간은 멸망 후 천년왕국으로 새롭게 조성될 시간으로 본다.23) 왜냐하면 1335일까지 기다린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 이 복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메시아왕국(천년왕국)에 살아갈 성도들의 삶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1~13),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단 9:27) ;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4) ;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계 16:19~20) ;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이스라엘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는 구약에 등장하는 재림이후 천년왕국에서 통치하시는 메시아를 보았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세상의 왕으로 자신들은 그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을 통치하며 살아가게 될 것을 믿었다. 그러나 2000여 년 전 오신 예수는 멸시와 수난을 받으셨다. 유대인들은 그러한 비참한 메시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을 역으로 말한다면 유대인들은 7년 환난에 들어서면서부터, 전 3년 반이 지난후가 되어야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후 3년 반의 혹독한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이겨내야, 복을 누리는 즉 그토록 갈망하던 메시아왕국에서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다니엘서에 나타난 종말의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이고, 이 계시를 광의적으로 교회시대를 위해 기록된 곳이 요한계시록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초림의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방인(교회시대)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우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롬 11:25). 그 후에야 즉 교회시대가 마쳐가는 7년 환난에서부터 후 3년 반이 가서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11:26). 반면에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땅에 동정녀에게 탄생하셔서 고난자요 구원자로 오신 예수에 대해서는 밝히 아는데, 승리자요 심판자로 오시는 재림의 예수를 영접하기 위한 준비는 너무나도 소홀하다. 우리는 미련한 처녀가 아니라 슬기 있는 처녀가 되어서 신랑되신 예수를 맞이하는 흠 없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마 25:8∼9, 살후 5:23). 그리고 천년왕국에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사 11:6~9, 35:1~10, 65:17~25, 벧후 3:7~13).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5~26) ;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마 25:8~9) ;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후 5:23),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1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10), "17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21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24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17~25),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7~13)

 

5) 천년왕국을 지지하는 견해의 확대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1953∼)는 '개신교의 변화하는 성경 해석' 중 천년왕국을 받아들이고 있는 전 천년설에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역사가 종말을 맞이하기 직전에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천년동안 통치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초기 교회에는 널리 퍼져있었다. 이레니우스(Irenaeus)24)와 테르툴리우스(Tertullianus)25)와 같은 저술가들은 이것이 (요한계시록) 20장 2절의 명백한 의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사람들은 이런 해석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가 지금도 하늘에서 통치하고 계신다고 주장하는 '무천년설'을 선포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까지 주류 개신교는 이 무천년설을 지지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와 '전 천년설'이 큰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오늘날 전 천년설은 오순절주의자들과 많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면서 다수의견이 되었다."26)

 

미국 덴버신학교(Denver Seminary) 조직신학 교수로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 정성욱 박사27)는 '세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의 역사적 전 천년주의의 현황'(The Current State of Historic Premillennialism in Global Evangelical Theology)'28) 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교회사에서의 역사적 전 천년주의의 위치에서 초대교회 및 교부시대(1세기~4세기)에는 폴리캅(Polycarp,69∼155), 파피아스(Papias,70 이전 출생∼155),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103∼165), 이레니우스(Irenaeus,130∼202), 히폴리투스(Hippolytys,170∼235), 터툴리아누스(Tertullian,160∼225), 락탄티우스(Lactantius,240∼320).

 

교부시대 후기와 중세시대(4세기∼15세기)에는 역사적 전 천년주의가 쇠퇴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몇몇 교부들이 천녀왕국에서 성도들이 누릴 축복을 너무 물질적이고 사치스럽게 묘사했고,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가 당할 환난과 핍박을 강조하는 것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부 극단적인 집단들에 의해 시한부 종말론으로 연결함에 따라 무관심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 전 천년주의의 문자적, 역사적 계시록 해석을 거부한 오리겐(Origen,185∼234)에게 영향을 받은 티코니우스(Tyconius, 4세기 후반)은 요한계시록은 영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보고 무천년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지배적인 영향을 받은 역사상 최대 교부라고 인정되는 어거스틴(Augustinus, Aurelius,354∼430)은 주저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무천년주의적 종말론을 확립하였고 이로 이해 약 천년 동안 중세기는 무천년주의가 지배적인 흐름이 되었다(Gregg R, Allison, Historical Theology, 687).

 

종교개혁 시대(16세기∼17세기)에 들어서는 마틴 루터와 칼빈이 당시의 지배적인 흐름이었던 무천년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요한 하인리히 알스테드(Johann Heinrich Alsted,1588∼1638), 조셉 미드(Joseph Mede,1586∼1638)와 청교도 신학자인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1600∼1680), 존 데이븐포트(John Davenport,1597∼1670), 사무엘 메더(Samuel Mather,1626∼1671), 인크리스 메더(Increase Mather,1639∼1723), 코튼 메더(Cotton Mather,1663∼1728), 사무엘 시월(Samuel Sewal,1652,-1730),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1752∼1817) 등에 의해 역사적 전 천년의가 이어져왔다.

 

근대교회시대 (18세기∼19세기)에는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y,1733∼1804), 존 길(John Gill,1697∼1771), 헨리 알포드(Henry Alford,1810∼1871), 찰스 엘리컷(Charles Ellicott, 1819∼1905), 라일(J. C. Ryle,1816∼1900), 찰스 스퍼전(Charles H. Spurgeon,1834∼1892), 벤자민 뉴튼(Benjamin Willis Newton,1807∼1899), 프란츠 델리취 (Franz Delitzsch,1813∼1890), 테오도르 찬(Theodor Zahn,1838∼1933), 피터 랑게(Peter Lange,1802∼1884). 헨리 드러몬드(Henry Drummond).

 

서구 복음주의 신학계(20세기∼21세기)에서는 찰스 어드만(Charles Erdman,1866∼1960), 조지 래드(George E. Ladd,1911∼1982), 로버트 건드리(Robert H. Gundry), 디 에이 카슨(D.A. Carson,1946∼), 더글라스 무(Douglas J. Moo,1950∼), 크렉 블롬버그(Craig Blomberg,1955∼), 로버트 마운스(Robert H. Mounce), 그랜트 오스본(Grant R. Osborne,1942∼), 크렉 키너(Craig S. Keener), 비슬리 머레이(George R. Beasley Murray), 리처드 헤스(Richard S. Hess), 벤 휘더링튼(Ben Witherington III,1951∼), 대니 캐롤(M. Daniel Carroll Rodas), 밀러드 에릭슨(Millard Erickson,1932∼), 웨인 그루뎀(Wayne Grudem,1948∼), 브루스 데머리스트(Bruce Demarest).

 

아시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는 한국의 박형룡(1897∼1978), 박윤선(1905∼1988), 박수암, 한정건, 김형태(1930∼2006), 민병석(1932∼), 이광복과 싱가포르 토니 시우(Tony Siew)를 들었다.

 

정 박사는 결론적으로 "오늘날 전세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 역사적 전 천년주의는 매우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서구권에서 현재 생존해서 학문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탁월한 성경 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 들 중 대다수가 역사적 전 천년주의 종말론을 옹호하고 견지하고 있다. 한국과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시아권에서 역사적 전 천년주의의 영향력은 점점 더 확대되어 가고 있다"고 역설했다.29)

 

이와 같이 전 천년설이 주장하는 실제적인 지상에서 천년왕국 존재를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정 박사는 논문 발표 후 한 기독교 언론과 인터뷰에서도 '무천년주의자들은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독 천년왕국만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는 비판도 있다.'는 질문에 대해 "정확한 지적이다. 천년왕국이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 역사적으로도 역사적 전천년주의가 대세였고 지금도 복음주의권에서 대세다. 미국 복음주의권에현재 훈련된 신학자들 중 60% 정도가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다."고 30)답변하였다.

 

정 박사가 말한 복음주의권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혁주의에서의 역사적 전 천년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도 "개혁주의자라고 다 무천년주의자는 아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작성에 참여했던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같은 사람도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지지했고, 신대륙으로 넘어온 청교도들 상당수도 그러했다. 역사적 전천년주의는 언약사적 해석이면서 개혁파적 해석과 일관성이 유지된다. 그래서 역사적 전천년주의는 개혁주의와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다."31)고 하였다.

 

그러면서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위 역사적 '황금시대'(The Golden Age)인데, 이것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에덴동산에서 누렸어야 할 복을 우리가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뤘어야 할 하나님 나라를 천년왕국에서 회복하는 것이다."32)고 강조했다. 이는 천년왕국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당위성을 강조했다.

 

천년왕국은 에덴동산의 회복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에덴동산은 사라졌는가? 창세기 3장 24절에 에덴동산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다. 에덴동산을 소멸시키지 않고 가는 길을 열어 두셨다. 그것을 곧바로 천국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자는 예수 재림으로 심판받은 세상에 새롭게 에덴동산 천년왕국으로 본다.

 

멕시코 치와와 사막 나이카산 수정동굴(Naica Mine of Chihuahua, Mexico)

2008년 10월 28일 세계 최대 천연 수정들이 가득 찬 동굴이 멕시코 치와와 사막 나이카산 수정동굴(Naica Mine of Chihuahua, Mexico)이 2.54km 지하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고 영국 텔레그래프 인터넷판이 보도했다.33) 2000년도에 나이카산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은과 납을 찾기 위해 새 터널을 파던 광부 2명에 발견된 이 수정동굴의 크기는 9.14m에, 27.43m로 현대적 채광 기술로 이 동굴에서 물을 뽑아냄으로써 찬란한 모습이 드러났다. 길이 10.97m, 무게 55t에 이르는 수정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이곳은 화씨 122도(섭씨50도), 습도가 90%나 되고, 체감 온도가 거의 화씨 228도(섭씨108도)라서 보호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

 

우리가 흔히 땅이라고 부르는 지각은 지표에서 5~10km 밖에 되지 않는다. 이곳은 지구 전체의 3%도 되지 않는다. 인간들이 아무리 거대한 마천루를 세운다고 해도 기초 공사 지하 깊이가 이 이하가 되는 곳은 없다. 수정동굴은 2.54km에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하에는 어떤 광석 어떤 광맥들이 존재할지 아무도 모른다.

 

예수님 재림 후 이 지구는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한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조성된다. 에덴동산의 회복이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하에 감추어진 수많은 보화들로 천년왕국이 조성될 것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문자적 해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영적 해석으로는 성경적 귀결(歸結)이 아니라 요원(遙遠)해질 수밖에 없다.

 

천년왕국은 결코 허황되거나 망상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로마제국은 BC 753년 발흥하여 서로마 기준으로 AD 476년에 멸망하였다. 무려 1229년 기간 존속했고 지중해 전 연안 국가 정복이라는 세계사에 유일무이한 대업을 달성했다. 또 하나 우리나라의 신라이다. 삼국시대 가장 늦게 태동되었지만 BC 57년 박혁거세가 지금의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국가였다. 마지막 임금 경순왕 9년인 AD 935년까지 56대에 걸쳐 992년 동안 현존했다. 이렇게 천년동안 이 땅에 엄연히 역사했던 국가(제국)가 있었는데 주님이 통치하시는 천년왕국을 아예 픽션(Fiction)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지 말씀 앞에 진지한 자세가 요청된다.

 

3) 석원태, 『기독교7영리』, 서울:도서출판 경향, 2000.12.5. p.404. 

4) 강신권, 김형종, 『읽기만 해도 열리는 요한계시록』, 서울:솔로몬, 2009.7.31. p.267.  

5) 권성수, 『요한계시록』, 서울:도서출판 횃불, 1999. p.704. 

6)서철원,「종말론」(서울: 총회신학교 신학부 3년, 1986),「목회대학원 강의안 제1집」(서울: 개혁신학연구원, 1983년 여름학기).  

7) 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성서유니온선교회 2003. p.219.

8) 김서택, 『역사의드라마요한계시록,』, 서울:성서유니온선교회, 2004.8.20. p.802.  

9) Anthony Andrew Hoekema, 류호준역, 『개혁주의종말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90.6.1. p.307-311. 

10) William Hendrriksen, 오성종역, 『내세론』, 새순출판사, 1991.9.10. p.232.  

11)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조직신학 상, 하 합본』, 권수경, 이상원역. p.118.  

12) Richard. J. Bauckham, 『요한계시록의 신학(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 이필찬역, 서울:한들출판사, 2006.8.30. p.115.

13) G. K. Beale, 「The Book of Revelation :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Eerdmans,1999). p.995. / 11-13 이광복, 『역사적 전천년주의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서울:도서출판 흰돌,2012.5.30. p.141 재인용.

14) 박형룡, 『박형룡박사저작전집Ⅶ 교의신학 내세론』, 서울: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7. p.235-236.  

15) 박윤선, 『성경주석요한계시록』, 도서출판 영음사, 2011. 5. 2. p.333.  

16) Abraham Kuyper, 「Revelation of St. John」, 1964. p.286. 박윤선, 『성경주석요한계시록』, 도서출판 영음사, 2011. 5. 2. p.335. 재인용.  

17) Ibid. p.329.

18) Ibid. p.329.

19) Ibid. p.330.

20) 김길성, 『개혁주의 종말론』, 경기: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2007.

21) 이광복, 『알기 쉬운 계시록』, 서울:도서출판흰돌, 2012.1.1. p.25.

22) 저자는 재림 때까지 생존한 성도만이 휴거된 후, 예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에서 거룩한 백성으 로 살아간다는 해석을 지지한다.

23) 예수님 재림 후 세상은 심판을 받는데 그 멸망의 기간을 30일 그 후 천년왕국의 조성 일수를 45일로 보는 것 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허황하거나 막연부지가 아니다. 인류 첫 번째 심판인 노아 홍수에 관한 기사 창세기 7 장 6절~8장 19절을 통해 볼 때. 40일간 비가 계속되었고 110동안 물이 땅에 창일하였으며 150일간 물이 줄어 들고 70일간 땅이 말랐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사도는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라고 말씀하고 있다(벧후 3:6). 그리고 두 번째 불 심판에 대하여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 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 라"고 하였다(벧후 3:7). 1290일의 30일 동안 지구는 이 불로 멸망하게 되며, 1335일의 45일은 그 이후 이 세상에 새롭게 창조되는 에덴동산의 회복 즉 천년왕국이 만들어지는 시일인 것이다.

24) 이레니우스(Irenaeus, ?~202?). 로마제국 곧 지금의 프랑스 지방 루그두눔(Lugdumum, 지금의 리옹) 주교였다. 그의 주저인 <이단 반박(Adversus Haereses)>은 당시 교회를 위협하던 영지주의 이단에 맞서 기독교를 변증한 학자다.

25) 테르툴리우스(Tertullianus, 160?~220?), 라틴어로 기독교 문화를 기록한 최초의 저술가이다. 삼위일체라 는 말을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26)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Christianity's Dangerous Idea,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박규태역, 서울:국제제자훈련원, 2009.

27) 정성욱 박사는 계명대학교(B.A.)를 나와, 미국의 Whitworth University(B.A.)과 University of Texas(UT ustin)에서 역사학을 공부했으며, Harvard Divinity School에서 수학하고(M. Div.), 영국 University of Oxford 신학부에서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 1953~)에게 조직신학을 지도를 받았으며(D.Phil), 현재는 덴버신학교 교수로 제직하고 있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주목받고 있다.

28) 이광복, 「역사적 전천년주의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서울:도서출판흰돌, 2012. 5. 30. p.15-56.

29) Ibid.

30) "계시록, '두려움' 아닌 '승리 확신' 주려고 작성된 것". 이대웅. 2012.6.21.www.christiantoday.co.kr

31) Ibid.

32) Ibid.

33) "World's largest crystal discovered in Mexican cave", Richard Alleyne, 28 Oct 2008. Telegraph.co.uk.

 

 

2. 상징적 해석의 폐해

 

1) 적그리스도를 상징으로 보는가?

 

문자적 해석은 적그리스도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 13장 1절 '일곱 머리 열 뿔 짐승'을 적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로마제국 황제들의 상징이라고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모진 핍박 속에서도 변절하지 않은 것처럼 전 교회시대의 성도들도 이를 본받아 어떤 박해 하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신앙생활의 교훈으로 본다. 그러면서도 19장 11절 '백마를 탄자'는 재림하신 예수라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해석의 차이가 아니다. 무천년주의는 초림과 로마의 억압을 받는 초대 교회 그리고 한참을 건너뛰어서 재림과 적그리스도의 심판을 수없이 반복되는 것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히 맥이 끊기고 일관성이 결여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난제들을 주석할 때 상징적 해석*방법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 말씀들을 보자.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니라 ??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 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가지 하리라 ??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2:3~8)

 

상기 성경 구절들을 보면 어느 역사적 시점에 가서 '저 불법의 사람'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그가 '나타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는 종말이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종말의 최대 징조가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다니엘 9장 27절과 연결해 보면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그에 의해 한 이레 즉 7년 평화조약이 체결되면, 그 시점부터 7년 환난이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 기록된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를 상징으로 볼 것인가? 문자적으로 볼 것인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자적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용어가 상징일 경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지 않고 상징성만으로 보는 해석이다"(그런 부분에서 영해인 영적해석과 공통된 점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상징적 해석과 영적 해석은 성격상 차이가 존재한다. 저자 주(註)).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16장 16절 '아마겟돈'에 대하여 "묵시 문학에서 인류 최후의 격전장을 가리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34)고 해석한다. 이는 19장 19절 재림하신 예수와 하늘군대가 짐승(적그리스도)과 땅의 임금과 군대들과의 격전장인 지명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상징적 해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장 9절 '밧모섬'에 대해선 "에베소 남서 90km 지점에 위치한 에게해상의 작은 불모지 섬. 당시에 죄수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다."35)고 주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로마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 51~96) 황제 때 박해로 유배되었던 장소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같은 성경 안에 아마겟돈은 상징이고 밧모는 실제로 나누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기준도 불분명하다.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예를 하나 더 든다면. 사도행전 1장 12절 예수께서 승천하신 곳인 '감람산'에 대해서는 실제로 본다. 반면 스가랴 14장 4절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에서의 감람산에 대해서는 "이곳은 최후 심판이 행해질 상징적 장소로 일컬어진다."36)고 해설하고 있다. 이는 사도행전 1장 11절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재림 장소를 실제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미가 5장 2절 '베들레헴'은 "메시아의 초림과 출생지를 예언한 구절로 유명하다"37)고 주해하고 있다. 동일한 구약 안에 등장하는 지명에 대하여 어떤 근거로 달리 보고 있는지 어떤 원칙이 없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망이 기록된 말씀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구약은 초림만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재림 또한 명시되어 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그러면 초림 장소는 실제고 재림 장소는 왜 상징이 되어야 하는가? 유대인들이 베들레헴을 상징으로 보았던가?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 상징인가? 아니면 그런 탄생에 장소에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재림의 예수님에 대한 말씀 또한 초림의 예언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뚜렷한 설명 없이 상징으로 덮어 버리면 되는 것인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재림에 대한 해석 은폐로 공개되어야 할 징후에 대한 증거도 함께 묻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 해석(Symbolic Interpretation)은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 언어와 표현을 해석하는(좁은 의미) 또는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데 문자적/문법적/역사적(Literal/Grammatical/Historical)의미를 넘어서 '보다 충만한 의미'(Sensus Plenior)를 밝히는 해석법으로 성경 원저자이신 하나님께서 담아 놓으신 보다 깊고, 풍성하고, 충만하고, 숨어있는, 영적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 하는(넓은 의미) '상징적 성경해석'(Symbolic Interpretation of the Bible)"38)과는 구분된다. 이 해석법은 저자도 지지한다.

 

이에 대한 혼선을 피하기 위해 "'상징적 해석(Symbolic Interpretation)은 각 단어의 문자적 배후에 암시되고 있는 다른 뜻을 찾으려는 시도로써 이는 역사적 사건이 아닌 영적 의미를 찾는 것'으로, '상징의 해석(Interpretation of Symbols)은 여러 가지 환상과 상징을 해석할 때 그 상징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을 찾는 방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39)

 

적그리스도는 어떤 가상의 인물이 아니다. 한 인격체를 지닌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가 등장하여 행할 일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4절에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 역시 상징이 아닌 문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대적하는 자',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를 지난 역사의 인물로 보아서도 안 된다. 과거에 교황 가운데 성전에 앉아 자신을 신이라 칭했던 자가 있었다. 황제들 가운데도 그런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적그리스도는 다니엘 9장 27절에 명시된 바와 같이 '장차' 앞으로 어느 시점에 등장하여 7년 평화조약을 체결할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앞서 요한계시록 13장 1절을 적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을 박해했던 로마 황제들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철저히 종말에 될 사건들의 계시인 요한계시록을 과거와 미래로 섞어버리는 혼선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 등장하는 '저 불법의 사람', 적그리스도는 분명히 우리들 앞에 역사적인 어느 시점에 문자 그대로 나타나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반론 가운데 하나는 초림 이후 2,00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아니고 재림의 시점에 있을 종말에 사건에 대해서만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면, 그 말씀은 종말에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은 종말 이전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그 말씀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성경이 기록될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데에는 사실 요한계시록을 초대교회 당시대로 보려는 과거주의요 상징주의인 무천년주의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말세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지금은 그 말세 중의 말세 말세지 말이다. 이것은 누구나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종말의 계시는 어제 기록되었건, 10년 전에 기록되었건, 100년 전에 기록되었건, 1,000년 전에 기록되었건, 2,000년 전에 기록되었건, 임박할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상 끝을 알리는 소리 경종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말 종말에 맞닥뜨려 살아가는 성도들만을 위한 말씀인가? 아니다. 2,000여 년 전에 살던 성도들이건 오늘을 사는 성도들이건 생전에 죽음을 당하지 않고 재림을 맞이할 성도들이건, 바로 지금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자세로 살아가는 신부가 참된 성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 막 13:37 ; 눅 21:36)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루하루를 경성하여 종말을 준비하는 것 이것이 성도가 지향해야할 정도인 것이다(마 25:4 ; 살전 5:23 ; 벧후 3:14 ; 계 19:7~8).

 

정성욱 박사도 저자와 상응하는 의견을 표방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대한 책이라는 사실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철저한 오해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을 미래의 책으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요한계시록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책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40)

 

요한계시록을 대부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무천년주의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해석의 무원칙> 무천년설은 상징적 해석은 위험하게 본다. 사정이 그러한데도 유난히 종말론에 있어서만큼은 상징적 해석을 고집한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 (1)70이레(단 9장). 무천년설은 70이레 중 7이레, 62이레, 70이레 모두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나머지 1이레는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1이레가 신약 시대라는 것이다. 원칙 없는 해석이다.(2)큰 신상(단 2장). 무천년설은 큰 신상의 신체 부위를 역사로 해석한다. 곧 이를 바베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등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뜨인돌로 인해 세워진 나라 곧, 하나님이 세우신 한 나라는 예수 초림으로 세워진 영적 하나님 나라라고 해석한다. 상징적 해석을 하는 것이다. 원칙 없는 해석이다."41)

 

'종말의 계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가? 상징적으로 해석하는가? 영적으로 해석하는가?'에 따라 그 방향이 얼마나 큰 차이를 나타낼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가를 두고 신중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

 

2) 문자가 상징일 경우 전후 문맥과 성경 각 권을 연결하여 해석하라

 

문자가 상징일 경우에는 전후 문맥과 성경 각 권을 연결하여 해석해야 한다. 이에 대해 구약성경신학자인 김지찬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경 본문 자체가 항상 모든 해석의 최종 판단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성경 본문 자체란 실제 해석에서는 '성경 본문에 대한 더 나은 이해(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biblical text)'를 가리킵니다. 최종적으로 '성경 본문에 대한 더 나은 이해'로 나아가지 않는 상징적 해석은 성경 본문을 왜곡할 수 있기에 위험합니다. 따라서 성경 본문이 언제나 모든 성경 해석의 시금석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만이 성경 해석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최종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42)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성경만이 성경 해석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최종 심판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상징적인 계시와 문자적인 계시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때 어떻게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과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렇기에 어떤 것을 상징적인 계시로, 어떤 것을 문자적인 계시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한다. 우리가 두 가지 문제를 잘 이해해서 조화시키지 못하면 종말론 해석에 굉장한 혼란이 따르게 된다.

 

우리는 먼저 상징적인 표현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정의부터 내려야 한다. 상징적이란 말은 성경에 나타난 어떤 사건에서 그 표현만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고 해석할 수도 없는 경우, 그것을 성경 전체의 내용에 비춰서 새로운 방법의 해석을 시도해야 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 해석은 반드시 성경에서 짝을 찾아야 하고 성경 해석에 무리가 따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리에 어긋남이 없이 누구에게나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무리가 없고 설득력이 있으며 진리 안에서 상식에 어긋남이 없다.

 

예를 들어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요한계시록에는 짐승이 등장한다(계 13:1). 이 존재는 종말론 해석에 매우 중요한 존재로 등장하며 이 인물을 만약 잘못 해석하는 날이면 종말론 해석이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짐승은 분명히 종말에 등장할 하나의 인물이지만 이 인물은 상징적으로 나와 있다. 그러면 이 짐승이라고 하는 상징적 존재의 실체를 해석할 때 어디에 근거해야 하는 것인가?

 

다니엘 7장 7∼8절에 보면 열 뿔 가진 짐승에 대한 계시가 나온다. 그리고 그 열 뿔 외에 작은 뿔이 등장한다. 이 작은 뿔은 열 뿔 중 세 뿔을 뽑아버린다. 이는 작은 뿔이 열 뿔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며 열 뿔 가진 짐승을 통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작은 뿔이 인류의 종말에 등장하여 세계를 지배할 적그리스도로 계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 열 뿔이 작은 뿔을 그들의 왕으로 받들어 섬기는 모습이 요한계시록 17장 12~13절에 나온다.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이 짐승은 신약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 와서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로 등장하는데, 이자가 바로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이 외에도 실질적으로 해석해야 할 상징적인 표현이 여러 곳에 나오고 있다. 그런데 만약 실제적인 수효나 표현을 상징적인 표현으로 오해해서 다른 해석을 시도하려고 한다면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은 그 전체가 상징적 해석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게 된다. 무천년주의 자들의 해석이나 일부 전 천년설의 경우 이런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정성욱박사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상징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하여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해석하는 독법이 소위 '상징주의적 해석', '우화적 해석', '알레고리적 해석'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상징주의적 해석이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통한 본문 그대로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시도를 도외시한 채 어떤 본문의 영적·신령적 의미만을 추구하는 해석이라면,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해석하는 독법은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통한 본문 그대로의 의미를 파악한 다음, 그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상징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독법이기 때문이다.43)

 

저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 소속된 목회자로서 축자영감설을 지지한다.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이란 말은 성경이 일점일획도 틀림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성경이 한 자 한자 기록되었으며, 표현 방식과 표현에 동원된 소재는 말씀을 기록한 사람과 그 시대의 범주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시되 성경기자들을 기계나 로봇으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과 지성 그리고 삶의 경륜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래서 유기적영감설(有機的靈感說, Organic Inspiration)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상징적 해석은 사실상 축자영감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바탕 위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이라고 어찌 다른 성경과 구별되어 상징적으로 해석하므로 그 의미를 모호하게 흐려도 된다는 말인가? 물론 요한계시록 안에는 상징적인 표현도 많이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표현은 상징성을 띄웠어도 그 해석은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야 예언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모든 상징적 표현은 그 상징적 표현만으로 끝나 버린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상징적 표현에는 또 반드시 그 상징적 표현을 실질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많은 해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성경 전체적인 맥락으로 비추어 어느 것에 상징적인 해석을 가해야 하고 어느 것에 실제적 해석을 가해야 한다는 성경적 상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든 숫자나 어떤 사건의 상징적 표현을 상징적이라고 모호하게 숨겨 버린다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예언을 그 누가 이해할 것이며, 또 누가 깨달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되어 약속하신 복을 받겠는가?'(계 1:3).

 

아마도 상징적 해석에 뛰어난 인간적 재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나 상징적 해석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받은 사람 외에는 전혀 불가능할 것이니 과연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그렇게 일부만이 해석하도록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했다고 보는가? 만약 그렇다면 중세 로마가톨릭에서 교황과 사제 그리고 지도자 등 특정계층을 제외한 성도들에게서 성경을 빼앗아 버린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종말론에 대한 문자적 해석의 중요성

 

이재철 목사44)는 종말론에 관해서는 철저히 문자적 해석이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은 그의 저서에서 발췌한 글이다.

 

"그 다음으로 inde venturus (est) judicare vivos et mortuos(인제 벤뚜루스 (에스뜨) 유디까레 비보스 에뜨 모르뚜오스)는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 해당합니다. 라틴어 원문은 제일 먼저 'inde'로 시작합니다. 'inde'는 '저리로서', '거기로부터'입니다. 즉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로부터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위에서부터 오신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초림(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해 구약 성경이 예언한 내용이 모두 문자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7장이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는다고 했는데, 실제로 동정녀 마리아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미가서 5장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스가랴서 9장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실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했는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수난당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모든 예언이 문자대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어떤 거짓 예수도 설 자리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로부터 오신다'는 말씀도 문자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45)

 

'예수님에 대한 모든 예언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과 그 이유가 예수에 관한한은 '어떤 거짓 예수도 설 자리에 없게 하기 위함'이라는 이 목사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김경섭 목사46)도 미래 예언 해석의 길잡이에서 문자적 해석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다음 같은 경우가 아니면 예언을 항상 문자적으로(일반적이고 평범한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그 예언이 직유, 은유, 비유, 풍유(알레고리), 상징, 혹은 예표들을 사용한 수사적 언어임을 문법적 맥락으로 알 수 있을 때. ?문자적인 해석이 상식에 어긋나거나, 저자가 말하는 바와 다르거나 성경의 나머지 부분이 가르치는 바와 모순되는 경우. 예언적 문구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 저자가 비유나 상징적인 언어를 통해 전달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보라. 저자가 말하는 바를 분별하기 위해, 아래 중에서 해답을 찾아보라: ?그 문구가 나타나 있는 성경의 문맥 안에서 ?그 저자가 쓴 다른 성경책에서 ?저자가 접할 수 있었던 다른 예언서들에서(예를 들면, 성경전서에서 다른 예언서나 예언적 문구들)"47)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예언을 항상 문자적으로(일반적이고 평범한 의미) 해석해야 한다'는 김 목사의 견해에도 적극적인 지지를 표한다.

 

문자적 해석의 중요성에 대해 다른 각도로 살펴보고자 한다. 수문학자(Hydrologist)인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 1918~2006) 박사는 미국창조과학연구소(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ICR)의 설립자이고,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저서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합당한 방법은 성경을 전혀 해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시라면 그분은 자신이 뜻하는 바를 그대로 말씀하셨음에 틀림없으며, 사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늘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암호로 쓰여진 어떤 비밀 책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평범한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분은 성경의 각 권을 기록하기 위해 군인, 목자, 어부, 의사, 세리, 왕, 제사장 등 여러 배경의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배경의 사람들 곧 부자와 가난한 자, 교육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노인과 어린이, 모든 인종과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성경을 많이 읽고 사랑하며 믿으며 이해하고 있습니다.…성경 해석시 최선의 법칙은 문맥이 명백히 상징적인 의미를 요구하지 않는 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성경의 저자가 비유적인 표현 또는 시적인 표현을 사용할 때는 언제든지 앞 뒤 문맥 안에서 이를 분명하게 해 놓았으며, 비유로 전달해야 할 진리도 문맥 안에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48)

 

전문 신학교육을 받지 아니한 그의 주장을 무시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모리스 박사는 이러한 견지 아래 성경을 연구하여 신학자인 존 휘트컴(John C. Whitcomb, 1924~)박사와 함께 1961년 '창세기 대홍수'(The Genesis Flood)를 발간했다. 이 저서에서 모리스와 휘트컴은 창세기 대홍수에서 과거 이 땅이 한 차례의 엄청난 대홍수에 의한 격변을 치렀음을 증거한다는 대격변설(Catastrophism or 대홍수설(Great Flood Theory))을 수많은 지질화석학적 자료들을 근거로 창세기 노아홍수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한 신학계나 진화론적 과학계에 가해진 충격과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 현재는 세속적 지질학자들 사이에서도 과거의 전통적인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49)은 빛을 잃어가고 있으며, 이른바 신격변설(Neo-catastrophism)을 제창하여 기왕의 창조과학자들의 대격변설과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50)

 

이렇게 모리스는 전 세계에 현대 창조과학 운동의 불꽃을 일으켰다. 나아가 기독교에서만 아니라 과학계에 매우 큰 반응을 불러오게 한 것이다. 노아의 홍수와 지질학적인 연대를 비롯한 모든 성경 내용이 과학과 부합된다는 것을 세속과학자들과 불신자들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출간된 70여 권의 책들과 그가 설립한 미국창조과학연구소는 본격적인 현대 창조과학 연구의 시초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 영향을 받은 NASA(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연구원 김영길박사(현 한동대총장)를 중심으로 1981년 한국창조과학회(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KACR)가 설립되어 지금까지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가 있었는데 에는 성경을 가감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이 사례를 한 크리스천 과학자의 쾌거로만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말씀에 기록된 문자를 사실로 해석하는 방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하는 예로 보아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믿고 행하면 교회 지도자와 신학자만 아니라 평신도와 일반학자까지도 사용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보편적인 것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대다수의 신학자 목회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편적일까요? 보편적(Generic)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Natural) 통상적(Normal)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통상적인 성경 해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것은 문자적(Literal)인 것이다. 성경은 먼저 문자대로 해석해야 한다. 문자적 해석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해가들의 공통된 성경 해석 순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종말계시를 문자적으로 보는 것은 결코 잘못된 해석이 아닌 것이다.

 

"문자적 해석이란 특별히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단어가 문맥에 없을 경우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문자적 해석 원리에 따른 것입니다."51)

 

4) 역사적 전 천년설을 주장하면서도 상징적해석을 강조하는 주의도 있다

 

역사적 전 천년설이라고 말하면서도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역사적 사건의 예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이들이 있다. 사실상 무천년설과 다를 바가 없는 상징적 해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에서의 바른 전 천년설의 정립이 시급하다.

 

천년설(The Millennial View)은 크게 세 가지 무 천년설(A-millenarianism), 후 천년설(The Postmillennial View), 전 천년설(The Pre-millennial View)로 나눈다.

 

이 가운데 전 천년설(The Pre-millennial View)을 역사적 전 천년설(Historic Pre-millenarianism)과 세대주의 전 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arianism)로 분류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이란 말의 의미가 너무나도 방대하고 그 해석의 방향이 너무나도 다양함을 알아야 한다. 역사적 해석이란?'요한계시록을 역사적 사건의 예언으로 인정하고 해석하는 견해'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한다면 세대주의 종말론도 역사적 전 천년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역사적 전 천년설을 구분할 때 상징적 전 천년설(Symbolic Pre-millenarianism),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arianism), 개혁주의 전 천년설(Reformism Pre-millenarianism)로 분류하는 민병석목사52)의 견해를 따른다.

 

이 중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위험에 대해 실례를 들어 다시 한 번 재론하여 강조하고자 한다. 상징적 해석에 있어서 여러 가지 지적할 수 있는 문제가 많지 만, 다니엘서 9장 27절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는 것을 신약 시대의 예배로 보고, 요한계시록 11장 3절 '두 증인의 사역'을 교회시대의 사역으로 본다. 11장 7절 '두 증인의 순교'를 교회 시대 의 환난으로 보고, 11절에 '그 증인의 부활'을 성도들의 부활로 보며, 12절의 '두 증인의 승천'을 교회 휴거로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두 증인이 왜 교회를 상징하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이에 대해 종말론적 관점에서 저자의 해석은 별도의 종말론 연구 '십사만사천은 누구인가?'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상징적 해석은 종말론적 예언이나 종말에 관한 징조의 나타남이나 성취를 인정치 않고 있기 때문에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막연하게 예수의 재림이 언제인가 있다고 하는 사실 한 가지뿐이다.

 

상징적 해석은 계시의 모든 면을 상징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여러 갈래의 해석을 다 수용해야 한다.

 

상징이란 그 말의 표현처럼 분명한 목적이나 표적이 제시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징적 모든 해석을 수용해야 할 부담을 안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라는 다니엘 9장 26절의 말씀을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보고, 또 어떤 상징적 해석을 취하는 분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로 규정해 버린다. 한 가지 인물을 가지고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예언을 해석하는 사람은 이같은 사실을 모두 인정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예언의 올바른 해석이 전혀 불가능해지고 만다.

 

상징적 해석에는 문제의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예언의 말씀이라고 볼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예언의 말씀은 그 예언대로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는데 그 내용이 상징적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예언이 성취될 리가 없는 것이다. 가령 1260일도 상징적 숫자, 42달도 상징적 숫자, 144,000명도 상징적 숫자, 1 이레도 상징적 숫자, 69 이레도 상징적 숫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도 상징적 숫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예언은 전부 상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 숫자의 해석이 다만 해석하는 사람의 상징적 견해를 따른다면, 그런 무의미한 예언이 어떻게 하나님의 예언일 수가 있으며, 그런 예언을 토대로 성경을 어떻게 연구하며 종말에 관한 징조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분에 관해서는 역사적 전 천년주의를 밝히고 있는 존경하는 정암 박윤선 박사도 마찬가지이다. 박 박사는 요한계시록 11장 1~11절에 기록된 숫자들에 대하여 두 증인이 예언 사역을 마치고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후'삼일 반(사흘 반)'(8,11) 부터 해석하고 있다.

 

"얼마 동안 있는고 하니 사흘 반 동안 있다고 했습니다. 사흘 반이라는 것이 진짜 3일 하고도 반을 말합니까? 요한계시록은 그 문투가 시적인 동시에 얼른 풀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 사흘 반이라는 것은 하루를 1년으로 쳐서 삼년 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년은 반은 또 왜 삼년 반인가? 그것을 이번에는 개월로 풀어 보면 삼년 반은 42개월로 환산이 되더란 말입니다. 11장 2절 끝에 보면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같은 사흘 반으로 말하고 마흔 두 달로 말하고 1260일로 말했습니다. 3절 끝에 보면 '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흘 반이 42개월, 42개월이 1260일, 지금 이렇게 풀이를 했더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느 것이든지 문자적으로 해석을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해 놓았으니까 사흘 반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사흘 반을 환산해 놓은 42개월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할 수 없는 수치란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흘 반이라고 했다가 42개월이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1260일이라고 풀이를 했으니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1260년이라는 뜻이겠는가 말입니다. 그렇게 고정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를 1년으로 잡아서 3일 반을 3년 반으로 해 놓은 것인데, 지금 와서 도 1260일이라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 수치들을 액면 그대로 받거나 액면 그대로 읽으면 안 됩니다."53)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흘 반'='마흔 두 달'='1260일'을 모두 같은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박 박사의 설명을 볼 때 1260일이 마흔 두 달 3년 반이니 사흘 반을 3년 반으로 본 것 같다. 그렇다면 1260일과 마흔 두 달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본 것인데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1260일을 사흘 반을 해석한 것과 같이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해서 1260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모순을 차단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삼일 반에 대하여 교회 시대 또 삼일반 동안은 적 기독 시대라고 중복계시로 말하기도 한다.54) 아마도 짐승에 대한 처리를 그렇게 붙여 놓은 듯 보인다.

 

결국 박 박사는 이 모든 숫자는 신약 시대의 교회가 복음을 증거하는 기간이라고 판정한다.55) 이 해석은 일반적으로 무천년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숫자들이 등장하면 분명한 주해를 하지 않고 상징으로 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역사적 전 천년주의라고 하면서 모든 해석을 무천년주의의 상징적 해석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점이라고는 이 땅에 예수님 재림 이 후 천년왕국이 들어선다는 것뿐이다.

 

구약의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른다. 거센 풍랑을 만난 후 자신의 죄임을 선원들에 밝히고 스스로 바다에 던져줄 것을 요청한다. 요나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 일'을 있었다고 요나서 1장 17절에 말씀하고 있다.

 

이 '삼 일'이라는 수에 대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부활하기까지의 기간을 예표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해석하는데 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께서 "39…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고 마태복음 12장 39~40절에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기록된 요나의 물고기 뱃속의 삼 일을 십자가의 죽음 후 부활까지 실제 삼 일로 예언하신 예수님에게 이의를 달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 11장 2절에 기록된 '이방인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는 것은 7년 환난 중 7년 환난 중 후 3년 반의 기간 적그리스도의 잔혹한 통치를 말하며, 3절에 기록된 '두 증인이 천 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는 말씀은 7년 환난 중 전 3년 반 동안 종말의 사명자들의 사역 기간을 뜻하며, 두 증인(두 선지자)이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죽임을 당한 후 사흘 반 만에 부활하는 것에 대하여 일 수 삼일 반이라는 해석은 전혀 밝혀 낼 수 없게 된다(상기에 열거된 숫자에 대한 바른 해석은 Chapter 11 7년 환난을 인정하며 세대주의인가?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1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계 11:1~11)

 

상징적 해석에 크나큰 문제로 부각되는 일은 짐승이나 짐승의 표에 대한 상징성 문제이다 .

 

만약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짐승의 표, 666표를 상징적 표로 해석한다면 그같은 표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된다. 인류의 종말에 적그리스도가 실제적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 하여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찍어 주는 표'가 짐승의 표, 666표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계 14:9-11). 그런데 만약 이 표를 상징적인 것이라고 하여 이 같은 예언의 역사적 성취 사실을 무시해 버린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14:9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3:18, 14:9-11)

 

그것은 이 표를 받은 자들은 "10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는 명백한 경종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계 14:10,11).

 

만약 짐승의 표가 상징적이라면 여기서 말씀해 주고 있는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지옥의 불도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할 것이며,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아마겟돈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혀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계 19:20)에 던지우는 그 유황불 못도 상징에 불과하며, 년 후에 사단이 들어갈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고 말씀해 주고 있는 그 유황 못도 상징에 불과하며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20:14)고 밝혀 주고 있는 그 둘째 사망인 불 못 역시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할 것이 아니겠는가?

 

"19:20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0:10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19:20, 20:10,14)

한국교회의 종말론 연구 대가 민병석목사는 이러한 상징적 해석에 대하여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해석은 성경의 예언을 공허(空虛)로 돌려버리는 인간 지식의 상상적 작품이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해석이야말로 시한부 종말론보다 더 나쁜 해독을 교회에 끼칠 뿐 아니라 종말에 처한 많은 성도들을 짐승의 표 앞으로 인도하므로 죽음의 표를 받게 하는 안내인의 구실을 하는 최악의 성경 해석 방법이라고 본다. 시한부 종말론은 그 시한부적 기간이 지나가면 그 거짓이 드러나고 그 생명력이 꺼져 무력해지지만 상징적 종말론의 해독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그 시기까지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그 문제점이 크다."56)

 

이러한 사실들에서 상징적 해석이 얼마나 위험스러울 수 있는지 경각해야 한다.또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문자적 해석이라고 하면 세대주의자라는 선입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이 문자적 해석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상징법(Symbolism) 등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이라고 다 버려버려야 할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해석들도 많이 있다.

 

한 예를 들면 다니엘 9장 24~27절까지에 대한 해석이다.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단 9:24~27)

 

이 본문은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 타임테이블(Timetable)인 '칠십 이레'(단 9:24~27)에 관한 말씀이다.

 

이성경을 주해하는데 저자는 세대주의와 정형을 같이 한다.그렇다고 세대주의자들의 해석과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대주의 신학자들이 다니엘서를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사건과 연결시켜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많은 공헌을 한 사실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교회를 위한 종말 계시로 주신 요한계시록까지 유대인들의 종말 계시로 다니엘서와 동일 선상에서 해석하는 일은 대단히 잘못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세대주의에서는 70 이레의 70을 숫자적인 연대로 계산한다. 그 중, 마지막 부분의 '한 이레'(27)에 대해서는 69 이레와 역사적으로 연결 된 선상에서 해석을 취하지 않고, '장차'(27)라고 하는 미지수의 역사적 공간 기간을 두고 오랜 훗날인 인류의 종말과 연결시켜 '종말적 기간인 7년'으로 해석한다. 여기까지는 개혁주주의 입장에 있는 저자의 견해와 별로 상충되는 점이 없다.

 

그런데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이 한 이레 기간을 유대인들을 위한 기간으로 해석하는 나머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여섯 번째 세대가 되는 교회 시대에서 7년을 제외시켰기 때문에 결국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교회의 7년 환난 전 휴거설을 절대적 주장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7년 환난 기간은 유대인들의 기간이며 유대인들의 회복을 위한 회개 기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이 기간을 한 발 자국도 지나갈 수 없다는 주장이 그들의 지론이다.

 

이같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결국 적그리스도는 7년 환난 중에 등장하므로 교회는 적그리스도에 의 한 아무런 핍박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고, 그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공중으로 휴거 되어 공중 재림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7년간의 공중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복을 받는다고 믿고 있으며, 이 견해가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향하는 개혁주의적 관점으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작은 뿔'(단 7:8)인 적그리스도에 의해 한 이레의 언약이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적그리스도에 의해 신앙적인 핍박을 받게 되며 적그리스도와 영적 투쟁을 하는 기간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기간이 전 3년 반을 이루는 한 이레의 전반부가 된다.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에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첫 번째 뿔 중의 셋이 그 앞에서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들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더라"(단 7:8)

그리고 교회의 공중 휴거는 7년 환난 직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 재림 때 거의 동시적으로 공중으로 휴거 된다는 성경적 증거를 확신한다. 그리고 다니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장래에 관한 종말적 계시이지만,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위해 주신 종말적 계시임을 믿는다.

 

이 같은 견해 차이는 어느 면으로 보면 대단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시한부 종말론' 같은 시끄러운 문제가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싹이 트게 되며, 예수님의 지상 재림시에 따르는 성도들의 처신 문제와 천년왕국에 있어서의 제반 문제에 비 성경적인 문제들이 대두되어 종말론을 혼란하게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적 근거를 통해 70 이레 중 69 이레까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장차'라는 기간이 지난 후 '한 왕'(26) 즉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그에 의해'한 이레의 언약'(27)이 체결됨과 함께 나머지 1 이레 종말의 7년이 시작된다고 하면, 무조건 세대주의자로 공격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에 대한 민병석 목사는 다음과 같이 논진하고 있다.

 

"계약 신학적인 입장에 서서 요한계시록을 세대주의적도 아니고 상징론도 아닌 성경 그대로의 종말론적 견지에서 해석하는 이 일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개혁주의 전 천년설'로 체계화하였다. 이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유인즉 7년 환난을 인정하는 일은 세대주의적 해석을 취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세대주의는 이단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한계시록 해석도 이단이라고 보면 절대로 안 된다. 다만 그 해석에 있어서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계약 신학적인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세대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주장이 절 대 타당성이 있는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7년 환난의 경우, 이 낱말은 결코 세대주의 신학의 창작품이 아니다. 종말에 대한 성경적 예언으로 분명히 성경에 명기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다."57)

 

민 목사는 세대주의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같다는 이유로 그들과 동일하게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주의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가하는 여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올바른 개혁주의적 성경관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견지에 이광복 목사도 지지를 표하고 있는데 그는 통합적 해석을 주창하면서 아래와 같이 저서에 밝히고 있다.

 

"필자는 역사적 전천년주의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다른 학파에서 내놓은 주장이라도 성경적으로 맞으면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과감히 수용하여 필자의 성경적, 신학적 이해를 보완한다. 중요한 것은 성경 본문이 가르치는 진리에 부합되느냐이지 학파가 아님을 확신하기 때문이다."58)

 

상기 인용문에서 '다른 학파'에 세대주의도 포함한다는 것이 이 목사의 견해이다. 그의 종말론을 전적으로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입증되는 것이라면 부정하지 않고 수용한다는 태도에 공감한다.

 

그리고 세대주의자들도 다비(John Nelson Darby,1800~1882)로 대표되는 고전적 세대주의(Classical Dispensationalism), 왈부우드(John F. Walvoord,1910~2002)를 중심으로 한 개정 세대주의(Revised Dispensationalism), 블레이싱(Craig A. Blaising,1949~)과 박(Darrel L. Bock,1954~)을 선두로 하는 점진적 세대주의(Progressive Dispensationalism)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점진적 세대주의는 역사적 전 천년설과 거의 동의하다. 그들의 해석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커다란 착오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하는 요지는 보편적이지 않을 경우 기존 해석의 관점으로 먼저 판단하고 부정하려는 자세를 지적하는 것이다.

 

일반적 해석과 판이(判異)한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 나타날 수 있다. 아니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해석이라도 그것이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 볼 때 이상이 없다면 소견은 달리할지 몰라도 문제는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주의(Calvinism) 노선을 따르고 있는 분들이라면 말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적인 근거가 분명하다면 반대를 위한 반론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성경적인 종말론에 갈급한 목회자들이 얼마나 확신하느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자적 해석만을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장에서 저자가 취하고 있는 해석에 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5)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이 아니다

 

종말 계시를 상징적으로 해석 하여 신앙생활의 교훈 정도를 얻는데 그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장로회신학대학교 김명용 총장의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강의 내용이다.

 

"요한계시록 11장과 12장에 3년 반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유대 묵시문학의 가장 맏형격인 다니엘서로 올라가 보아야 한다. 묵시문학의 전통 속에 3년 반이라는 숫자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구약의 다니엘서에도'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나온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표현이 이미 구약의 다니엘서에서 정확하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박해기의 책인 묵시문학에서 다니엘서가 제일 먼저 등장하는 맏형격인 책이다. 과거 안티오코스 4세가 이스라엘을 어마어마하게 박해했다. 그러나 마카베오 형제의 영웅적인 저항으로 마침내 끝이 난다. 유대인에게 하누카 절기라는 것이 있는데 마카베오 형제들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티오코스 4세의 박해가 3년 반 지속이 됐다. 3년 반이라는 숫자가 여기에서 부터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박해기 문학인 묵시문학에서 3년 반은 마귀가 통치하는 기간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안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3년 반을 7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59)

 

김 박사가 요한계시록 11장 2절의 '마흔 두 달'과 12장 14절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다니엘 7장 25절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와 연결 상징으로 주장하는 주된 이유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을 박해기의 문학인 묵시문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이 모순 가운데 하나는 다니엘 8장 11~14절에 대한 해석이다. 이 말씀에는 안티오코스 4세의 박해가 기록되어있는 데 그 기간에 대하여 '2300주야'라고 했다.

 

이 날들이 어떻게 3년 반이 될 수 있는가? 3년 반은 일수로 '1260일'이다. 김 박사는 마흔 두 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3년 반, 2300주야 등 악의 세력에 의해 자행된 실제나 예언의 기간 모두를 마귀 통치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어떻게 성경적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종말계시를 묵시문학 안에 넣을 때 나타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용은 결단코 묵시문학이 아니다. 묵시문학이란 '하나님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은 신비를 계시한 문학'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B.C.200~A.D.100까지 40여 개 작품으로 전해오는 문학 장르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과 유사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반면, 묵시문학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묵시문학을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와 비견한다는 것은 매우 염려스러운 접근이다. 요한계시록은 왜 묵시문학으로 분류될 수 없는가에 대하여 이광복 목사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실명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임. 묵시문학은 예외 없이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오직 그의 저술을 고대의 어떤 유명한 인물이 저작한 것으로 가장하여 가명을 사용하여 전하고 있는 반면 계시록은 자신을-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사도 요한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1:4,9;22:8). 묵시문학은 당대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도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가명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기록자 요한이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궁극적으로 내다보았던 최종적인 종말론의 성취에 서 있는 자로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2)상징의 다양성과 통일성이 있기 때문임. 묵시문학에 나타난 상징은 비교적 단편적이고 단회적인데 비하여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은 전체가 하나의 단일한 상징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묵시문학과 동일시 될 수 없다. (3)환상에 대한 의미의 부여가 다르다. 묵시문학은 대개 환상을 제시한 후 그 환상에 대한 천사의 설명을 포함시키는 데 비해 계시록은 환상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맡기므로 문자적인 설명이 제한시킬 수 있는 보다 풍성한 환상의 의미를 그대로 보존시키고 있다. (4)희망적이고 소망을 주기 때문임. 묵시문학은 현 시대와 역사에 대해 지극히 염세적이므로 인간의 도덕적 삶에 대해 아무런 소망이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비하여 계시록은 현시대와 역사를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현장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비록 현실이 환난과 핍박으로 얼룩질지라도 소망적이며 성도들의 신앙윤리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시록은 묵시문학과 다르게 교회의 승리와 축복이 주제이다."60)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종말계시로 믿는 성도들은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경성으로 '깨어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신랑을 맞을 흠 없는 신부가 되는 경주를 감사와 기쁨으로 하게 된다(마24:42;막13:37;눅21:36). 결과적으로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이 아니라 환희의 말씀이 되게 한다. 이것이 묵시문학으로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극명한 차이이다.

 

정성욱 박사도 자신의 논문에서 이러한 저자의 견해와 상통하는 논지를 표명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이란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예수 재림 직전에 있을 대환난의 시기를 교회가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오늘의 삶 속에서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고, 영적으로 무장하기 위해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며,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며, 끝까지 견디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성도들을 권면하는 독법인 것이다.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딛 2:12~13)하는 독법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주님께서 대환난의 시기에도 끝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승리케 하신다는 확신을 고취시키는 독법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이런 관점에서 읽고 해석하고 적용할 때 모든 성도들은 밝고, 건강하고 균형 잡힌 종말론으로 무장하게 되며, 그 결과 요한계시록 2~3장이 약속하고 있는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누리도록 성숙해가게 된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건강한 관심을 회복하길 기대하며 주님 재림의 징조가 날마다 더 뚜렷하게 보이는 이 시대에, 주님의 재림이 진정 가까운 이 시대에 요한계시록은 정말 더 이상 무시돼서는 안 된다."61)

 

인간의 묵시문학을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와 비견한다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요 너무나도 우려스러운 접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외경과 위경 그리고 타 문서에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저자로 전해오는 묵시문학도 있다. 그러나 정경이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수 없다. 어떤 신비를 그럴듯하게 묘사하여 예리한 필체로 저술하였다하더라도 인간의 묵시문학은 전승으로서 가치를 가질 뿐 성경과 동일한 권위가 부여될 수 없다. 교황과 성인을 성경 위에 두는 로마가톨릭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시작과 마지막의 책은 성경이요. 그 중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의 총본산이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의 카테고리(Category) 안에 가둬놓아서는 기록된 목적인 실제적인 역사와 약속된 영광을 묻어버릴 수 있다는 경각을 가져야 한다.

 

34)『프리셉트성경』. 프리셉트성경편찬위원회. 편찬책임 김경섭. 서울:도서출판 프리셉트. 2009.4.12. 신약전 서. p.415.  

35) Ibid. 신약전서 p.399.

36) Ibid. 구약전서 p.1325. 

37) Ibid. 구약전서 p.1295. 

38) 정성욱. "세계복음주의권 내에서의 상징적해석의 역사와 현황". 『상징해석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서울:도 서출판흰돌, 2013.5.27. p.31-32.)

39) 이광복, 「알기 쉬운 계시록」, 서울:도서출판흰돌, 2012.1.1. p.16. 

40) 정성욱,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 논문, 2013.8.20. www.bamjoongsori.org. 

41) 이광복, 「알기 쉬운 계시록」, 서울:도서출판흰돌, 2012.1.1. p.628-629. 

42) 김지찬, 「상징해석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학술대회 대회사. 서울:도서출판흰돌, 2013.5.27. p.19. 

43) 정성욱,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 논문, 2013.8.20. www.bamjoongsori.org. 

44) 이재철 목사는 독립교파인 백주년기념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그는 무천년주의자로 개혁주의 전 천년설을지지 하는 저자와는 상이하다. 다만 그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성경적 예언을 모두 문자적으로 본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45) 이재철, 『성숙자반』, (주)홍성사, 2008.1.15. p.295-296 

46) 김경섭 목사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Temple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현재 죽전안디옥 교회 담임목사와 프리셉트 성경연구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김 목사와 앞에 예를 든 이 목사는 이렇게 예언 적인 부분을 문자적으로 보면서 '천년'(계 20:2)이라고 분명히 명시된 부분을 상징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47) 편찬책임 김경섭, 『프리셉트성경』, 프리셉트성경 편찬위원회, 도서출판 프리셉트, 2009.4.12. 성경연구 보 조자료 p.21.  

48)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성경을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 김무현. www.kacror.kr 

49)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질변화의 비율(rate), 강도(intensity)와 스케일 등이 과거에도 그대로 일어났 었다는 이론으로 세속적 학설이다. 영국의 허튼(James Hutton), 라이엘(Charles Lyell), 스미스(William Smith) 등에 의해 주장되어 세속적 지질학계에 정설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면서 창세기 홍수 기사의 역사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심지어 신학계에서도 팽배하게 되었다. 허튼은 '현재는 과거의 열쇠이다'(The present is the key to the past)라는 유명한 말로 이 이론을 함축하였다. 한편 백여년전 라이엘의 지질 동일과정설 에 영향을 받은 다윈(Charles Darwin)에 의해 진화론의 효시가 된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 출간 되었으며, 이후 생물학적 진화론과 지질학적 동일과정설이 서구의 지성계를 뒤흔들며 지구의 연대는 수천년 에서 수십억년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그 오랜 지질기간동안 생물체는 무생물로부터 저절로 생겨나고, 이어 원시 하등생물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고등생물까지 진화하였다는 이론이 오늘날까지 세속적 과학계를 지배하 게 되었다(Henry M. Morris, Recent Creation is a Vital Doctrine, Impact SERIES No.132, Acts &Facts (E1 Cajon, California: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June 1984). p.3) 

50) Dreak V. Ager, The Nature of the Stratographical Record, 2nd edation (New York : John Wiley  Sons Publishers, 1981). p.54  

51) Ladd George E. A.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Grabd Rapids:Eerdmas, 1972). pp.23-30.  

52) 민병석 목사는 한국교회 종말론 권위자로 1987년부터 종말론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해왔다. 요한계시록 해석의 결정적 Key Point인 첫째부활에 관한 연구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성경적 부활론을 정립 종말 계시를 여는 획기적인 길을 개척했다. 또한 기존 해석 방법의 한계점을 뛰어넘은 문장적 해석을 체계화하여 일관된 원칙과 기조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1년 6월 1일부터는 밤중소리 사이트(http://www.bamjoongsori.org) 개설 동영상 강의와 질의응답을 통해 난제들이 가득한 종말계시에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2013년 9월 현재 방문자수가 45만 명을 넘었다. 수십 권 분량의 저서와 교재 등을 회원 가입과 관계없이 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자료를 개방해 놓았다. 2006년 5월 16일에는 밤중소리사역회를 창립하여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인 종말적 전천년설 전파를 위해 매월 셋째주 화요일 종말론 단기대학 공개강좌를 개최하고 있다. 정성욱 박사는 논문 '세계 복음주의 신학계에서의 역사적 전 천년주의의 현황'(The Current State of Historic Premillennialism in Global Evangelical Theology)*에서, 민병석 목사를 한국 복음주의 신학계의 박형룡, 박윤선, 박수암, 한정건, 김형태 박사 등과 함께 역사적 전천년설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평가했다. 이중 목회자로는 민 목사가 유일하다(*이광복,「역사적 전천년주의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서울:도서출판흰돌, 201

2. 5. 30. p.53.). 

53) 박윤선. 『정암 박윤선의 요한계시록 강해』. 경기:도서출판영음사. 2014.11.11. p.394. 

54) Ibid. p.395. 

55) Ibid. p.395. 

56) 민병석. 『첫째부활과 천년왕국』. 제1장 종말론과 첫째 부활(1) 中에서. 서울:신생. 1995. 

57) 민병석. 『첫째부활과 천년왕국』. ⑸ 종말론적 전 천년기 설의 경우. 서울:도서출판신생. 1995.  

58) 이광복. 『성경종말론계시록통합전집 성경종말론』. 서울:도서출판흰돌. 2014.7.7. p.186. 

59) "요한계시록 14만4천은 희망의 숫자". 장신대 김명용 총장, 뉴욕 교협 요한계시록 세미나 인도. 이종철. 2013. 6.6. http://www.newspower.co.kr 

60) 이광복, 「알기 쉬운 계시록」, 서울:도서출판흰돌, 2012.1.1. p.17-18. 

61) 정성욱,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 논문, 2013.8.20.www.bamjoongsori.org.

 

 

3. 문장적 해석

 

1)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여러 방법들

 

지금까지 기존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주로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해왔다.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 상징적 해석(Symbolic Interpretation), 영적 해석(Spiritual Interpretation)이 그것이다. 과거적 해석(Preterist Interpretation, 과거주의), 역사적 해석(Historical Interpretation, 역사주의), 미래적 해석(Futurist Interpretation, 미래주의)도 있지만 이것은 요한계시록 성취시기에 따라 구분될 수 있기 때문에 앞에 열거한 해석들과는 구별하고자 한다(상징적 해석은 상징주의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신학적 해석(Theological Interpretation), 문법적 해석(Grammatical Interpretation), 이상적 해석(Idealist Interpretation), 일반적 해석(Generic Interpretation), 문학적 해석(Literary Interpretation) 등이 있다. 문자적, 문법적, 일반적 해석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 이상적 해석은 영적 해석 안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문자적해석

이러한 해석들 가운데 저자는 문자적 해석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문법적 해석을 포함하는 문자적 해석). 가능한 한 성경이 말씀하는 그대로 해석하려는 자세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경향을 보면 문자적 해석을 고지식한 해석으로 터부(Taboo) 하는 이들이 있다. 문자적 해석이란 언어의 통상적이고 관습적인 용법들에 따라 성경 원래 의미한 바를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종교개혁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좋은 해석이란 성경에서 통상적인 것을 사용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며 문자적 해석을 강조했다. 현존하는 학자 중 몇 안 되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자 중 대표적인 분이 한정건 박사이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영해하는 현재의 세태를 비판하며 "칼빈은 성경을 철저하게 문자적-역사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선지서들의 예언을 영해하는 것조차 극히 경계하였다."62)고 역설하였다.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칼빈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만큼은 의도적으로 문자 해석을 배제하려는 습성이 강한 것 같다.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들고 있지만 영적 상징적인 방법만을 취하려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특히 무천년주의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성경 1권에서 65권까지 개혁주의 입장에서 문자적·역사적으로 해석하다가 66권 째에 와서는 대부분을 상징적·영적인 것으로 덮어버린다. 창세기부터 유다서까지는 개혁주의 신학과 관련이 있고 요한계시록만은 예외라면 요한계시록은 성경이 아니라는 것인가?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의 총본산으로 종말 계시가 집중적으로 기록되었다는 특징이 있을 뿐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문자적 해석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킨 무천년설은 칼빈주의(Calvinism) 곧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의 성경 해석으로 보아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자가 속한 교단이 자유주의자들로 부터 근본주의자라고 공격 받는 것은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축자영감설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만큼은 성경을 기록하고 편집하는 데에 인간의 의도가 개입되었다고 보는 진보주의(진보적성경관=동력적영감설(Dynamic Inspiration))나, 성경을 아예 처음부터 인간이 만든 허구로 보는 자유주의(자유적성경관=성서비평학(Bible Critisism)) 견해인 해석학적 입장에서 영적 상징적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총회63)차원에서도 이러한 선언이 있었다. 베리칩이 짐승의 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에 대한 신학부(부장유웅상목사)의 연구 결과를 발표에서였다(2013.9.24.).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과 베리칩을 동일한 것으로 연관 짓는 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인 것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666과 베리칩을 연관 지어 활동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배격하기로 한다. 한 마디로 짐승의 표가 베리칩이라는 주장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허황된 주장"64)이라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바람직한 것이고 성경적인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는 베리칩과 같은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를 구원에서 떨어지게 하는 유혹과 시험의 본질은 물질적 원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원리"65)라고 한 것은 짐승표를 실제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해석과 동일하다.

 

이는 무천년설에 입각하여 알렉산드리리아 학파(School of Alexandria)66)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대다수 무천년설은 따르는 목회자들과는 별개로 교단 신학으로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마저 달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결국 알레고리(Allegory) 성서해석 방법인데 이는 우의적 해석을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이 지향하는바와 일맥 노선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큰 염려를 더하게 된다. 비록 요한계시록 13장 16절에 등장하는 짐승의 표에 국한시키고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짐승표를 장차 종말의 때 등장할 한 인격체인 적그리스도에 의해 주도될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인류 역사가운데 항상 존재했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에 대한 상징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합동의 공식 입장이라니 심각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총회 소속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앞으로 역사 가운데 출현할 적그리스도를 거짓메시아로 보지 않고, 그가 배포할 생체이식 장치 등을 짐승표가 아니라고 하여도, 교단 안에서 공적으로는 아무런 제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개혁주의 안에서 문자?문법?역사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변을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한다. 저자는 본서 발간 기준으로 10여 년 동안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에 나타난 종말 계시를 연구하였다. 그 과정에서 관련된 많은 저서들을 탐독하였고, 인터넷을 통한 다양한 자료들도 수렴하였다. 이 분야 실력 있는 분들의 세미나에도 참석했었다. 그 중 한 목회자의 강의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종말론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개혁주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장로교중 5위권의 교단에 소속되어있다. 개혁주의신학을 표방하고 있는 신학대학원 출신이다. 그에게 수백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말씀을 배우고 있다. 그런데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이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어떤 기준으로 해석하고 있는가? 여기 저기 좋은 것들을 모아 잘 포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결국 잡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목회자이고 종말론을 연구하고 싶다면 꼭 당부하고 싶다. 정통 신학은 바른 종말론을 정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잣대로도 흠잡을 수 없는 성경적인 것이 된다. 그렇다고 신학이 성경을 앞선다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깊이 보고 그 기반위에 세워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신학으로 검증하여도 이탈되지 말아야 한다. 그 신학은 저자 입장에서 말할 때 성경의 신앙적이요, 신학적 최대 표현인 개혁주의 신학이다.

 

역사적해석

그리고 역사적 해석을 견지한다. 예수 재림 전 7년을 지구의 마지막 시간으로 보고 그 안과 후,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벌어질 사실적 사건으로 요한계시록을 본다.

 

신학적해석

또한 신학적 해석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신학적 해석이란 성경에서 핵심 되는 주제를 발췌하여 하나의 신학 체계를 구성한 다음 이 체계에 따라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데, 종말 계시 총론의 개론과 각론 및 세론을 정립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이다. 신학적 해석을 사용한다고 해서 기존 조직신학 틀 안에서 또는 신학자들의 이론에 따라 해석한다는 말이 아니다. 개혁주의 전 전 천년설이라는 골격과 구조를 세워가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장적해석

요한계시록에는 중복해서 계시해 주신 사건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건들이 짧은 7년 환난 중에 일어나기 때문에 이 기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처럼 질서정연하게 진열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록에 흐르고 있는 문장을 잘 파악해야 한다. 어느 한 가지 계시만 보고 그 사건에 대한 결론을 쉽게 내리지 말고 여러 곳에 다른 모습으로 계시된 동일한 사건을 찾아내어 서로 연결시켜 하나의 완전한 문장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러한 해석 방법을 문장적 해석(文章的解釋, Sentential Interpretation)67)이라 칭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런 해석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한 사건이 이중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게 되고 동일 사건인데도 다른 사건으로 해석하게 되는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부연하면 요한계시록은 한 사건에 대한 상징과 실제가 한 모습으로 한 곳에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 사건인 계시들이 다른 형태로 장절(章節)을 뛰어 넘기도 하고 성경 각 권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한 사건이지만 여러 곳에 다르게 기록된 상징과 실제 계시의 단면들을 입체적으로 완성시켜야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이것을 문장적 해석이라 부르며 이 해석에는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에 중점을 두고 조화 있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2) 종말론 해석에 유의해야 할 점

 

종말론을 해석하는데 유의해야 할 점은 어느 한 주의를 한 해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역사주의에도 문자적 상징적 영적으로 각각 해석을 한다. 대부분 과거주의로 상징적 해석을 하는 무천년주의자들도 있지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문자적인 해석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고 역사주의와 미래주의를 수용하는 관점을 가진 이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일(G. K. Beale)은 이러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시록은 이와 같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동시에 재림 직전과 직후의 미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주의와 미래주의가 혼합된 원근통신의 원리로 해석되어야 한다. … 역사주의와 상징주의 장점들도 계시록 해석에 고려되어야 할 점이다."68)

 

1985년부터 종말론세미나를 개최하여 다수의 무천년주의자들에 의해 묻혀있던 역사적 전 천년주의를 공론화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이광복 목사는 자신의 천년설에 대해 "역사적 전 천년설의 입장에 굳건히 서서 다른 여타의 견해를 성경적으로 검증하고 통합하는 입장에 서 있음을 반영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이러한 '통합적-역사적 전 천년주의'(수정 전 천년주의) … 이 같은 해석만이 이 시대 종말 신앙의 확고한 대안이라고 확신한다."69)고 하였다. 이러한 이목사의 연구 방법에 대해 한정건 박사는 "세대주의자들의 지나친 문자주의도 배격하지만, 특히 무천년설의 지나친 영해를 경계한다."고 논찬했다.70)

 

앞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세대주의 해석이라도 성경적이면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이 견해에는 저자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원리와도 구별되는 것이 문장적 해석이다. 요한계시록을 하나의 문학작품과 같이 보고 전체를 한 문장으로 일관성 있게 해석하는 방법이다. 문장적 해석에는 확고한 원칙과 기조가 있다.

 

3) 문장적 해석의 지향점

 

그렇다고 상징적 영적인 해석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해석 방법은 전통적으로 종말론을 연구하는데 큰 틀(Framework)을 제공해 주었다. 저자도 이러한 해석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은 물론 상징적, 영적 해석들도 사용한다.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석방법으로는 풀 수 없는 계시가 있다. 어떤 면에서 요한계시록을 바로 해석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들 해석들을 보면 한 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많이 드러난다. 또 장절에 얽매여 계시의 본뜻을 찾아내지 못하고 엉뚱한 해석을 낳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같은 사건을 장절이 다르다는 것만을 보고 다른 사건으로 본다. 혹은 그와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문장적 해석을 강조하는 것이다.

 

저자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을 우선시한다고 하여, 영적, 상징적 해석을 외면한다는 것이 결코 아님을 다시금 밝힌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성경 자체가 지닌 중대한 특징 가운데 일부가 이탈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임과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상징적 해석을 우선하고 문자적, 역사적 해석을 도외시한다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측면 자체가 간과됨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문자적, 역사적 의미 내지 신학적 이해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종말 계시를 바르게 정립하는 해석 과정에서 필수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거듭 강조하건데 영적, 상징적 해석을 단절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해석들을 보완하고 성경이 본래 전하고자하는 사실적 진리를 깨닫고 나아가 실제적 보화의 깊은 의미로 연결하고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적 해석은 문자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과 뚜렷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외 해석들을 보완하거나 완성해주는 의미를 가진다.

 

다른 연구가들도 문장적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 그와 유사한 해석을 하는 분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흐르고 있는 맥들을 찾아내어 성경적으로 입증시키고 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 문장적해석이다.

 

문장적 해석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만(Dogmatic)의 해석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결코 바른 태도가 아니다. 다만 문장적 해석은 극히 성경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문장적 해석은 모든 해석 가운데 정수(精髓)라 말하고 싶다.

 

문장적 해석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민병석 목사는 종말 계시를 연구하는 원칙과 기조 가운데 이를 정립하였는데 그는 이 해석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문장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읽을 수 있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글이 곧 하나의 문장이다. 문장은 하나의 작문, 곧 문학작품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되어질 징조와 사건에 대하여 미리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문학작품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계시 문학"이라고 부른다. 문장은 언제나 전체적으로 맥(脈)이 이어져야 한다. 맥이 통하지 않는 문장은 횡설수설일 뿐 글로서의 아무런 가치도 없다. 다음에 이해(理解)가 되어야 한다. 특별한 교리에 발이 묶인 신학자들만 이해하는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 문장에는 일관성(一貫性)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이 합리적(合理的)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그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해서 이 같은 관점에서 기록하게 하셨다. 그러나 과거적 해석 방법이나 상징적 해석 방법이나 세대주의적 해석은 이 모든 것들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신학적으로가 아니라 문장적으로 이해해야 바른 해석이 나온다."71)

 

4) 문장적 해석의 미래주의

 

문장적 해석을 통해 요한계시록을 종말에 나타날 미래적 사건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해석임을 입증하게 된다.

 

상징주의자들 가운데는 칠십 이레를 상징으로 보고 마지막 '한 이레'(단 9:27)을 교회시대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절반(전3년반)은 예수님 승천이후 로마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 초토화까지, 나머지(후3년반)는 예수님 재림까지라고 한다. 그러면 전자는 40여년, 후자는 현재 2,000여년이 훌쩍 넘었다. 숫자를 상징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어 놓고 이렇게 얼토당토않게 해석해도 무방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다니엘서 9장 24~27절 사이에 아무 이유 없이 70이레를 7이레, 62이레, 1이레를 나열하였을까? 70이레는 성건 중건령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7이레가 지난 후 완성된 다음 62이레가 경관된 69이레에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 인지 모르지만 장차 한 왕(적그리스도)이 등장할 때부터 1이레가 시작된다고 구분하고 있다. 1이레 7년이 지나면 종말이다. 이 기간을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한 때 두 때 반 때'(단7:25;계12:14), '이레의 절반'(단9:27), '1260일'(계11:3,12:6)을 문장적 해석을 통해 연결하면 '7년 환난'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단 9:24~27) ;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 11:3) ;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6) ;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계 12:14)

 

이렇게 문장적으로 해석하면 다니엘서 '한 이레'를 요한계시록의 '한 때 두 때 반 때', '1260일' 한 계시임을 파악할 수 있고 종말에 있을 7년의 기간임을 정립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혹독한 핍박을 받던 초대교회 시대로 보는 '과거주의'(Preterist), 사도 요한 이후에 전개되는 역사의 청사진으로 보는 '역사주의'(Historicist), 상징적 해석으로 전 교회시대에 주신 것으로 보는 '상징주의'(Idealist)에 반(反)해, '미래주의'(Futurist)로 보는 것이 가장 성경적임을 발견할 수 있다. 문장적 해석으로 종말 계시를 종말 전과 시점 그리고 이후 역사까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다.

 

정성욱 박사는 미래주의에 대해 저자와 동일한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목적은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미래의 일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가장 근본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언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은 요한계시록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미래에 대한 기록임을 확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요한계시록은 과거에 대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현재에 대한 것도 아닌 미래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미래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서라는 사실에 기초해서 읽어야 한다. …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사건을 예고하는 성격을 가진다.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은 잠언서와 같이 삶의 지혜를 교훈하는 책이 아니며, 서신서와 같이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다루는 책도 아니고, 복음서나 사도행전과 같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즉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적 기록의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 '사건'이란 말이 매우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사건적 측면을 무시하고, 요한계시록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신앙적·신학적 의미에만 초점을 맞춰 왔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근본적인 성격에 부합하는 바른 독법이 아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의 근본 성격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독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요한계시록의 독법으로 제시된 전통적인 방식 중에서 '과거주의적', '역사주의적', '이상주의적' 해석보다는, '미래적' 혹은 '미래주의적' 해석이 요한계시록 본문의 성격에 가장부합하는 방식이라고 확신한다."72)

 

이상근 박사는 요한계시록의 다양한 해석법 중 문화적 해석법(The Literay-Critical Method)은 "계시의 성격을 무시하는 것으로"73), 심리학적 방법(The Psychological Method)는 "신적 기원을 부정하는 것으로"74), 영적 해석법(The Spiritual or Idealist Method)는 고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화적 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tion)에서 시작된 학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제하는 편도 있으나 이를 부정하고 역사는 상선벌악의 끝없는 반복으로 규정하는 편도 있다. 하여튼, 여기에 우화적 학파의 약점이 뚜렷하다. 그것은 본서 자체가 강조하는 예언적 성격(1:3, 10:11, 22:7, 10, 18, 19)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75), 과거적 해석법(The Preterist Method)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그 중에는 유력한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그 응용에는 구구한 바 있어 의견의 일치는 기할 수 없다. 또한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을 포함한 종말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므로"76), 역사적 해석법(The Historical or Continuous-Historical Method)또한 "구구한 견해들로 혼란을 극하고 있다. 아마 이와 같은 혼란상 자체가 이 학설의 부적당을 입증할 것이다(Henry C. Thiessen)"77)며 배격과 비판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미래적 해석법(The Futurist Method)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종국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는 학설로서 "본서의 예언적이며 종말적인 성격에 비추어 보아 가장 타당한 것이다"78)고 하였다. 그러면서 타 해석법의 유용과 적용에 대하여 "역사적 또는 영적 해석법에도 일리가 있는 것은 아울러 시인하여야 할 것이다. 본서의 환상 중에 분명히 당시의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점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조화는 용이하다. 즉, 가까이 그 시대적 사건을 들어 그것을 메시야 예언귀들이 그 시대적 배경 아래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납득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예루살렘 박해가 종말적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된 사실(마 24:15,계13장)도 참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서인 본서는 그 당시의 사건을 가리키면서 이를 통해 종말적인 사실을 예언한다고 볼 것이다."79)고 하였다. 이는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가 강조하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적원근통신법'과 동일한 견해이다.80) 이광복 목사도 "요한계시록은 현시대에 응용은 할 수 있지만 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81)며 "계시록은 기본적으로 재림에 대한 예언적 의미, 미래적 의미를 갖고 있다"82)고 강조하고 있다.

 

5) 문장적 해석의 중요성

 

거시적과 미시적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성경 전체에 나타난 종말론을 문장적 해석으로 연구하면서, 말씀을 보는 시각이 거시적(Microscopic)이면서 미시적(Microscopic)이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쓰신 한 문장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총론이라면 그 구원의 완전성을 설명하시기 위해 여러 각론이 있다. "'사랑', '공의', '죽음', '보혈', '부활', '심판', '회개', '믿음', '칭의', '충성', '상급', '영생', '천국'…" 등등이다. 이것은 소주제들로 하나하나가 독립된 한 문장이면서, 각 문장들과 유기적 관계에 있으며 강들과 같아서 전체를 묶으면 구원이라는 바다로 모이게 되는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각론들은 성경 중 특정한 한 권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다. 각 권에 넓게 산재해 있다. 그 각론 중 하나이면서 최종적인 소주제는 '종말'이다.

 

성경적인 인류사는 구원사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가 역사를 이끈다는 사관을 믿는다. 이 섭리사관(攝理史觀)의 최종은 예수님의 재림이다. 즉 구원의 완성은 종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말이 계시된 성경 각 권들을 연결하여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종말론을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인 문장적 해석이다.

 

그리고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성경 각 권에 나타난 종말 계시는 요한계시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하면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우리는 성령시대 은혜시대를 사는 성도들로서 교회시대에 주신 종말 계시는 요한계시록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에 펼쳐져 있는 종말에 관한 계시를 요한계시록의 계시된 체계를 따라 종합적으로 맥을 따라 연결시켰다. 특히 다니엘서와의 연계를 철저히 했다."83)

 

문장적 해석으로 정립한 종말 계시라는 강이 구원의 완전성이라는 바다에 합류할 때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노선에 비추어 문제없고 성경적으로도 지지 받으면 올바른 해석인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을 위해 문장적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적 해석을 통해 정립한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믿는다.

 

이와 같이 문장적 해석은 요한계시록만을 위한 해석방법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바로 보고 분명한 뜻을 깨닫고 목양에 적용할 수 있는 열쇠이다.

 

사역계승의 마지막 주자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믿는 개혁주의 전 천년설은 문장적 해석이라는 진수(眞髓)로 세워진 거봉(巨峰)과 같다. 문장적 해석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종말론 연구를 바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목회자들은 문장적 해석에 대한 훈련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래야만 능숙하게 정상을 등정(登頂)할 수 있다. 그리고 적용과 응용을 통해 가장 높은 곳에서 '열려진 종말 계시'라는 천상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통찰과 예견이 겸비된 하나님의 사자가 될 수 있다.

 

다니엘서 12장 9절에 종말의 계시를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하였고. 10절에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요한계시록 22장 10절에는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하였다. 종말의 계시가 지금은 지혜 있는 자를 통해 활짝 열린 계시가 되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것을 확실히 믿고 '전하는 자는 거룩한 자요 그는 믿는 그대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계 22:11). 또한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며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게 될 것이다'(단 12:3).

 

성경에 담겨 있는 교리는 사도 바울로부터 '어거스틴'(Augustin,354∼430)을 거쳐 '칼빈'(John Calvin,1509∼1564)에 의해 '개혁주의 신학'(The Reformed Doctrine of Theology)으로 체계화 되었다. 이것은 '루터'(Martin. Luther,1483∼1546)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의 완성이기 하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연속성으로 지켜 내려온 정통 칼빈주의 개혁신학은 '구 프린스턴 신학'(Old Princeton)의 마지막 주자인 '메이천'(John Gresham Machen,1881∼1937)에 의해 주장되었고 교수되었다. 이 분에게 사사(師事) 받은 박형룡, 박윤선 박사는 한국개혁파장로교 나아가 한국개신교 신학의 뿌리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를 통해 빚어진 그릇 안에 정통 보수 신앙이 담겨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두 분에게 직·간접적으로 지도를 받고 배출된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목회하고 지구 땅 끝까지 선교를 감당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에 비추어 문장적 해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성경 속 종말론의 정점은 요한계시록이다. 그 후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이와 관련된 연구서들은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과연 어떤 것이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일까? 감춰진 계시가 아니라 사도 요한에 의해 이미 '해석된 계시'*를 본문을 중심으로 장절과 성경 각 권을 연결하여 모순 없이 정립한 것이어야 한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문장적 해석의 체계화이다. 말세지말에 부름 받은 종들로 요한계시록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연 문장적 해석을 통한 개혁주의 전 천년설 사역을 계승하여 전해야 할 마지막 주자와 같다 하겠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다양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먼저 요한계시록은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다. 요한계시록을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이 상징을 사용해서 기록됐고,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점에서 특히 더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쉽게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는 아예 접근조차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그야말로 근거 없는 선입견에 불과하다. 만약 요한계시록이 정말 어려운 책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은 어려우니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을 남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한계시록 초두에서 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말씀하신다."84)

 

"요한계시록은 결코 어려운 계시가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계시록의 내용이 어렵다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결코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읽는 자는 알 수 있습니다. 듣는 자는 알 수 있습니다. 읽는 자와 듣는 자는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85)

 

상기의 논조에 대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신약학 교수로 바울신학의 권위자인 이한수 박사는 성경에 담긴 신적 진리의 아름다움과 장언함에 대한 이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다양한 계층들을 대상으로 저술된 책이다. 그것은 수사학적 기술을 익힌 전문가들에 의해서만 섭렵될 수 있는 책도 아니고, 지식층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책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 빈부귀천과 지식 유무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기를 바라셨다. 모든 사회계층을 포괄한다. 일반 대중이 그것을 믿고 준수하여 영적 유익을 얻어야 한다. 때문에 성경은 당시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상 언어를 사용하셨으며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친숙한 그림언어들로 기록되었다."86)

 

그렇다면 이 해설 안에 성경 중 요한계시록만 제외 인가? 그럴 수 없다. 요한계시록은 다른 정경과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단 벤쟈민 키취(Benjamin Keach, 1640~1704)가 "'하늘의 언어'나 '하늘의 화법'이라고 표현한 '예표, 환유, 반어, 상징, 비유, 제유'"87)등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상징적 장면들을 어떤 식의 언어로, 즉 문자적의미의 언어로 변환해야 하는지 아니면 상징적 의미의 언어로 변환해야 하는지에 대해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인들은 추론적이고 분석적인 언어에 익숙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상징(이미지 언어)들이 기껏해야 진리를 표현하는데 사용된 문학적 기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징에는 상징 자체로 볼 것이 있고 실제 내용을 찾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해석 방법이 문장적 해석인 것이다.

 

종교개혁 패러다임Paradigm의 완성은 종말 계시 팩트Fact의 완성이다.

 

저자는「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에 참석했었다.88) 마치 칼빈이 살아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온통 칼빈에 대한 존경과 칭송이 가득한 자리였다. 이종성, 한철하, 신복윤, 이수영, 이종윤, 정성구 박사 등 대표적인 칼빈 신학자들과 국내 유수의 신학대 총장 및 교수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날 주제 발표 논문인 「칼빈과 한국장로교회의 성장과 과제」(이종윤)를 비롯하여 7개 분과별로 무려 70여 편이 쏟아졌다. 칼빈의 '구원론', '칭의론', '기독론', '삼위일체론', '성화론', '자본주의', '민주의의', '사회복지', '정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칼빈의 종말론 등을 다룬 논문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칼빈이 요한계시록 주해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논문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것이 하나도 없다니 어쩌면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개회 예배에서부터 마지막 '패널'(panel) 토의까지 7시간 동안 이에 대해 단 한 명의 발제자도 없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인가!'하는 두려운 위기의식이 엄습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종말의 징조가 열리지 않았던 시대 칼빈이 주석을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그 해석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다른 해석들은 아예 시도조차 해보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다.

 

칼빈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전 천년설을 비교한 이유이다.

 

칼빈이 '종교개혁의 패러다임'(Paradigm)을 완성한 것처럼. 이제는 문장적 해석을 통해 쌓아올린 개혁주의 전 천년설을 '종말 계시의 팩트'(Fact)로 완성할 책임이 마지막 시대 주의 종들에게 있다. 종교개혁 패러다임 완성은 종말 계시 팩트인 개혁주의 전 천년설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정신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위한 책이다. 인류 구원의 최종은 종말이이다. 재림이야말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는 일이며 성도들에게 가장 놀라운 복을 안겨 주시는 복음 성취의 최종적인 최대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사명자들은 종말의 때 한국과 세계교회를 건질 두 증인들로 훈련되어지고 훈련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칼빈의 신앙과 신학이 세계 각국의 종교와 문화에 뿌리를 내린 것과 같은 위대한 성역을 감당할 수 있어야하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

 

 

62) 진해신학강좌 기념 고신포럼에서 주관자인 고려신학대학원장 한정건 박사가 '우리의 종말론' 주제 강의 중. "진해신학강좌 기념 고신포럼, 창원한빛교회에서 열려"(2009.6.19, 창원한빛교회(윤희구 목사)), 허난세. 2009.7.2.

http://www.christiantoday.co.kr) 

63)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8회 총회(총회장안명환목사). 2013.9.23.(월)~27(금). 수원과학대 라비돌리조트 신텍 스컨벤션(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세자로 286).  

64) "예장 (합동) 총회장에 안명환 목사 추대". 크리스챤월드모니터. 크리스챤월드모니터. 2013.10.1. 

65) Ibid. 

66) 알렉산드리아 학파(School of Alexandria):고도의 학문 연구를 위해 2세기 중엽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최초 의 그리스도교 학파. 최초의 유명한 지도자들(판타이누스·클레멘스·오리게네스) 아래서 이 학파는 알레고리 적 성서해석 방법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절충하는 사상을 따랐으며, 교리의 변화가 심한 시기에 이단적인 주장들에 맞서 정통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확립하려고 애썼다. 알렉산드리아 학 파에 대해 반대입장을 취한 학파는 안티오크 학파(School of Antioch)로서 이 학파는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주장했다(COPYRIGHT(C)한국브리태니커회사, 1999). 

67) "'문장적 해석'이라는 용어는 신학사전에도 없습니다. 민 목사님께서 성경에 나타난 종말 계시의 흐름을 연구하시면서 명명한 것입니다.". 「민병석목사의 문장작 해석에 관한 고찰 」, 이재현, 서울:신생, 2010.1.8. p19. 

68) G. K. Beale, The Book of Revelation :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Eerdmans, 1999, p.48-49. (그는 이러한 입장을 '절충주의'(eclecticism)로 보고 Caird, Johnson, Sweet, Hendriksen, Wilcox 등 무천년설 주석가들을 이 그룹으로 분류했다.) 

69) 이광복, 『계시록종말론신학의통합을위한역사적전천년주의국제학술대회논문집』, 도서출판 흰돌, 2012.5.30. p.183. 

70) Ibid, p.269. 

71) 민병석. 「쉽게 배우는 요한계시록」. 서울 : 신생. 2006. p270 

72) 정성욱,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 논문, 2013.8.20. www.bamjoongsori.org. 

73) 이상근, 『신약주해요한계시록』, 도서출판 성등사, 1998.10.30. pp.31 

74) Ibid.

75) Ibid, pp.32-33

76) Ibid. 

77) Ibid. 

78) Ibid. 

79) Ibid. 

80)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예언적 원근 통신법'(Preophetic Foreshorten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시간적으로 장소적으로 다른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적 원근통시법… 구약의 선지자들이 종종 그랬듯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가까운 미래의 사건과 머나먼 미래의 사건을 함께 매우 인접해 있는 사건들로 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을 통시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소망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이해한다면 근접한 미래에 있게 될 핍박은 머나먼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핍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Hoekema Anthony A. The Bible and The Future; 「개혁주의 종말론」 류호준 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8,p.171~172). 조지 E. 래드(George E. Ladd)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원근통신(遠近通信)이란 예언자의 현재 및 근접 미래와 궁극적 종말 사건이라는 두 개의 초점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을 말한다. 예언의 목적인 미래의 프로그램이나 차트를 만드는 것은 두 완성을 통해서 현재를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언 당시와 궁극적 미래가 연대기적인 구분이 없이 역동적인 긴장이 존재하는 것이다."(George E. Ladd, A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Grabd Rapids:Eerdmas, 1972),p.13). 성경은 기록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동시에 재림 직전과 직후의 미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가 혼합된 원근통신의 원리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감람산의 강화문'(Olivet Discourse, 마 24:3~51; 막 13:3~37; 눅 21:5~36)으로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끝날 에 관한 예언을 예수님께서 함께 말씀하신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더 응용하여 적용한다면, 요한계시록 17장 8절 '짐승은 전에 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는 말씀에 등장하는 자를. 다니엘 8, 11장 등에 등장하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요한계시록 13, 17장 등에 등장하는 '일곱 머리 열 뿔 짐승' 즉, 적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것이다.  

81) 이광복, 『성경종말론특별세미나』, 서울목양교회, 2014.7.7.~9.  

82) 이광복, 『성경종말론계시록통합전집 성경종말론』, 서울:도서출판흰돌, 2014.7.7. p.176. 

83) 민병석, 「요한계시록음성설교」, ppt, "2. 1. 천년왕국과 흰 보좌 심판(계 20:1-50)". (1) 본 강해의 신학 적 체계. 2) 본 강해는 어떤 방법을 취했나? 中에서, http://www.bamjoongsori.org 

84) 정성욱, 『요한계시록의 목회적 독법』, 논문, 2013.8.20. 

85) 민병석, 『재림의 메시지 101(요한계시록 심층 설교)』, "요한계시록 연구(1)" 중(中)에서, 서울:도서출판 신생, 1995. 

86) 이한수, "성경적 상징주의해석 이론의 연구". 「상징해석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학술대회 대회사. 서울: 도서출판흰돌, 2013.5.27. p.78. 

87) Benjamin Keach,「성경의 환유,은유,예표,비유,제유 해설 대사전」, 김경선역. 서울:도서출판여운사, 1994. 

88) 2009.6.22. 서울교회(담임 이종윤 목사).

 

민병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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