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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영역과 한계

하나님아들 2024. 2. 26. 20:18

설교의 영역과 한계
 

 <1>
   설교는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말씀 선포(케리그마)의 가장 집약된 대표적 형식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서에서 완전무결하게 계시되었고 교회는 설교자를 통하여 그 말씀을 간단없이 선포하는 사명을 지고 있다. 설교자는 교회의 가르침(교리 신조 등)에 준하여 각층의 정당한 선포에 항상 유의해야 하고 말씀의 선포에 항상 책임을 지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반드시 일정한 신학적 수업을 닦아야 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관장한 기구에서 베푸는 고시과정을 거쳐 설교자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설교자의 설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성경에 계시한 계시의 전 영역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간단없이 들어야 하는 동시에 교회와 설교자가 속한 특정한 시간과 장소, 즉 역사적 정황, 그 말씀을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선포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전 영역이란 역사와 우주의 시종을 포함하고 가시적(可視的)인 세계와 불가시적(不可視的) 세계를 포함한 전 역사 과정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종말의 드라마를 말한다. 즉 인간과 시국과 역사의 현실적 사항에서부터 그 궁극적인 사항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 알파와 오메가를 요약한다. 그러므로 성서 자체가 벌써 기록상으로는 항상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밀착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문화양식에 민감하게 연루되어 있다. 심지어 성서 가운데 가장 비현실적이라고 보이는 묵시문학(默示文學) 등도 그 표피적(表皮的)인 표현양식은 일부러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성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 내면(內面)을 보면 그 어느 경우에서 보아도 더 특정한 역사상황에 밀착되고 있다.
 
   본래 기독교는 물론 기타 고급종교의 기본 진리 등은 현실과 역사적 구체적 인간행위의 사건을 외면하고 논하여지는 경우가 많다. 외면한다기보다도 더 깊이 그리고 민감하게 관심하면서도 그 차원(次元)을 시간과 순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원(永遠)의 차원에서 본다. 때문에 미숙한 사람들은 종교는 항상 타계적(他界的) 관심사에만 몰두하는 것 같이 보고 있으나 실상은 그와 반대다. 종교진리가 가진 다이나미즘은 바로 영원과 시간을 부단히 접속시키는 행위 – 이것을 복음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는 – 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설교는 바로 그 기능을 담당하는 종교행위이다.
 
   구약에서 예언자들과 신약에서 사도들이 항상 고민하고 투쟁한 것은 종교신앙에 대한 반종교(反宗敎)거나 신인식표현(神認識表現)의 무신적(無神的) 반항(反抗)의 박해(迫害)가 아니라 종교신앙의 기능을 하나님의 全 歷史 過程에까지 즉 政治, 經濟, 文化, 個人, 社會, 國家, 人類 그리고 자연 등 영역에 광대함을 방지하여 그것을 제의화(祭儀化) 된 宗敎기구 속에로 몰아넣으려는 데 대한 것이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신앙을 거부하는 가이사에게 있어서는 자기 변론에 그처럼 좋은 구호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그 구호는 많은 가이사들에게 애용되는 구호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땅과 하늘과 그리고 역사의 시작과 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어디 있을 것인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위치에서가 아니었더라면 예수님 스스로도 하나님 편에 서야 할 한 치의 영토도 가이사에게서 허락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이사의 것이란 궁극적으로 본다면 과연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가이사의 기능이 허락된다면 그것은 매우 관대한 의미로서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기능일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담을 넘어 들어온 도적이요 강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의 창조, 구속, 종말완성의 役事를 시종 구체적인 인간역사 행위 속에 그렇게도 집요하게 집중시켰다. 이에 이르러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의 선교가 설교로서 표현되는 경우 그 설교의 영역은 바로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그의 관심을 집중시킨 하나님의 전 역사영역과 일치됨은 자명하여진다.
 
 
<2>
   설교의 영역이 하나님의 전 역사과정의 영역과 일치하지만 그 강조점과 관심의 집약점은 언제나 한결같지 아니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특정한 역사사항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통하여 말하여지며 그것을 향하여 말하여지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의 역사성이 바로 설교의 역사성이다. 그것은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계시성에서 더욱 원천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 계시를 역사적 계시의 평면적 과정으로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형태의 역사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설교는 민감하게 역사성에 있어야 함을 설교의 전제조건으로 한다.
 
   우리는 구약에서 초기 민족형성과정에서 보여진 하나님 말씀의 관심은 얼마나 혈연중심의 민족공동체에 있었던가를 쉽게 알 수 있고, 또 그 후 동일한 민족이면서도 南北王國으로 나누어져 오히려 적대시하면서 살아왔고, 또 급기야 민족공동체가 가진 종교적이요 윤리적인 유대가 개인의 이익추구에 항상 뒤지게 되는, 유대왕국들의 멸망과 포로시대 등에서 보여진 예언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관심은 우국적이요 개인적이며 좀 더 내면적인 도덕적 지표에 집중되었음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다시 또 구약역사의 후기에 계속된 이 민족의 침략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 의식이 요청된 기원전 3,4세기에 있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 즉 묵시문학 중에서 보인 열렬한 민족주의 의식의 강조 등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표현의 역사사항의 대응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점은 신약의 경우에서도 그대로 선명하게 밝혀진다. 오늘날 성서학자들이 네 복음서의 원초저작을 케리그마란 의식전제 하에서였다고 보는바 대로라면 우리는 바로 네 복음서가 각각 저자가 다를 뿐만 아니라 독자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쉽게 수긍되는 바며 또 그랬어야만 당연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설교역사를 개관하여 보아도 그것은 명백하다. 한국 기독교 초기의 교회와 설교자들의 모든 관심은 허물어지는 반봉건 구세대의 탈을 벗고 신문화를 수입하며 개화 계몽 등 시대사조에 있었으므로 그 설교의 강조점이 이에 매우 긴밀히 연관되었으며 일제탄압 하에서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더불어 군국 철권적 식민통치 하에서 민주 자유정신의 희구를 최대의 관심으로 하여 모든 유명무명의 설교자는 이에 연결되지 않음이 별로 없었다고 보아 무방하다. 선교사들의 설교가 도저히 대중들에게 어필되지 못하고 마는 까닭이, 하나님의 말씀선포의 설교가 현실 역사와의 만남에서만 있을 수 있는 다이나미즘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매우 범위를 좁혀서 볼 때 교회의 설교자의 설교가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상황을 멀리하고서는 설교의 다이나미즘을 경우로서도 알 수 있다. 더욱 쉽게 말하여 심방이 없는 설교, 교인의 정황을 알지 못하는 설교, 교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일반적 정황을 바로 보고 알지 못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그 설교가 비록 신학적으로 조리 있고 사색적으로 깊이 있게 탐구되고 수사학적으로 충분히 미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설교를 통하여 있어야만 될 다이나미즘은 쉽게 있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의 표현을 통하여 주어지는 경우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 그 장소와 시간이 주는 특정한 상황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현실과의 만남에서 대결의 형태를 갖는다. 즉 부딪히게 된다. 영접 하는가 거부하는가, 믿는가 안 믿는가, 예 하는가 아니오 하는가의 결판을 요구하는 순간적 결단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심판과 구원을, 저주와 축복을, 공의와 사랑을 그 내용 속에 항상 동반하면서 현실적 정황에 육박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설교를 통한 긴박성이 촉구되려고 하면 현실파악의 세분화가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은 특히 최근 근대화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다원화 현상에서 더욱 그러하다. 설교자와 교회의 관심의 초점은 경향성으로 보아서 단일화될 수 있으나 설교의 현실적 내용 표현에 있어서는 세분화가 요청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설교의 영역은 평면적인 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입체적이오 내면적인 영역의 심화, 확대가 문제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설교는 그 선교 영역의 다원적인 확대와 마찬가지로 설교도 다원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표현의 설정한 방식으로서의 설교로만 고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게 되었다.
 
 
<3>
   오늘의 역사적 현실정황이 농경 사회에서 급격히 산업사회로 이행됨으로 하여 사회의 기능이 기계화되었다. 인간 개인의 행위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에 있어서까지도 사회공동체의 일반적 보편성의 추이에 깊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개인의 독자적 행동이나 사고의 영역이 심히 위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윤리적 행위의 판단기준도 개인이 독자적으로 책임을 지거나 해결을 짓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가령 한 개인이 그 지은 죄를 회개하고 과거를 청산한 후 그 순결한 마음과 믿음을 지켜 살려고 할 때 그것을 가능케 할 요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보다도 오히려 그가 처한 사회여건에 더 크게 달려있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세계의 근 반을 지배하고 있는 공산독재 체제하에서는 최소한도 개인적 신앙만도 유지할 수 없는 외적 여건이 작용함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더욱 강조할 죄악의 콘텍스트는 사회구조적 죄악에 있으며 오늘 교회가 더욱 힘을 기울여 강조할 신앙윤리는 기독자의 사회적 책임성에 있게 된다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오늘 같은 상황에서도 개인의 윤리적 책임성이 약화되어선 안 되며 또 오늘이 아닌 다른 어느 경우라 해서 기독자의 사회적 책임성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나 일반적인 강조점의 주제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 강단의 설교는 그 강조점이 어디에 있게 된다 함이 자명하여진다. 그것은 오늘 어느 주일날 서울 거리를 지나면서 눈에 쉽게 띄는 교회 게시판들에 붙어있는 설교제목을 훑어보아도 잘 입증이 된다.
 
   특히 우리나라 교회 강단의 설교는 민족적 운명에 대한 의식과 공산주의 독재에 적대의식 등이 일반적으로 그 체질이 되다시피 강조되어 있고 거기에 따라 민족의 선민의식, 자유와 평화, 정의의 실현 등이 새로운 소망을 설교하는 설교의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음이 일반적 상태이다. 물론 설교자가 인간구원의 궁극적 실상을 항상 설교하고 그를 위한 구원의 과정 즉 회개와 순종, 믿음과 선한 생활을 설교하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할 생활의 실천을 위해선 무엇을 설교하며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가를 더욱 오늘 이 시점에 있는 설교자의 관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고민이 결국 우리와는 그 환경 조건이 다르고 자유스러운 처지에 있는 나라 교회들에서까지도 정치신학이란 듣기에도 이상스러운 신학적 표현으로 까지 번져 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기독교가 어느 정치운동 집단 마냥 정치적 집권의 야망이 있어서 하는 정치 차원적 발언은 결코 아닌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정황으로 보아서도 표현적으로나 혹시 음유적으로나 현실의 상황 즉 정치, 경제, 문화적 사항을 완전히 외면한 설교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현실적 증언이며 궁극적 진리에 대한 일깨움이며 오늘이란 이 역사현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이끌어다 세우는 일이며 회개와 자복을 촉구하는 전혀 신앙적 차원에서의 일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자들의 역할이었고 신약에서 사도들의 설교들이었다.
 
   이러한 일은 벌써 한국교회의 경우에서도 시도된 것들이다. 사회의 각계 영역, 말하자면 정치인들의 집합체 속에서의 설교, 산업인들 속에서의 설교, 관공리들 속에서의 설교, 군인들 속에서의 설교, 학생들 속에서의 설교는 불가불 그 설교의 콘택스트가 그 특정한 영역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증언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교의 평면적인 영역이란 설교를 들어야 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어느 영역도 제외될 수 없으며 또 하나님 말씀이 필요치 않은 어떤 사건이나 기관이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현실적 상황 하에서는 실상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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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의 설교가 아무리 현실적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궁극적 진리의 표현이요 그 방향의 제시이지 구체적 방법의 제시나 지시까지는 될 수 없는 제한성을 가진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성서의 원초적 설교가 벌써 기본적 증언의 반복으로서 설교자의 설교의 스스로의 제약성을 내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보다 더 현실적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데 그 경우에 있어서도 설교의 내용을 절대화 할 수 있는가는 설교자 자신이나 그 설교자를 세우는 교회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신약성서에서는 윤리적인 교훈에 있어서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응답의 촉구인 경우에는 명령적인 표현을 썼으나 상대적 윤리의 경우에는 항상 암시적이고 권고적인 표현을 쓴 바 있다. 이것이 소위 상황윤리란 표현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기독교의 상황윤리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현실적 응답을 회피하자는 구실로서가 아니라면 우리들은 이러한 경우에서는 의당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좁혀서 말하자면 어떠한 구체적인 문제는 보다 나은 것은 있으되 이 시점에서 절대로 옳은 것은 아닌 경우, 또 그것이 어느 시간의 경과를 요하는 문제 등은 그 어느 시점에서라도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으되 그렇다고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식의 절대적 단정을 반드시 요구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저절로 설교의 차원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설교가 상대적인 윤리성을 지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경우 그것은 저절로 교육적이고 권고적인 의표로서의 접근이 요구된다.
 
   여기서 설교는 선교의 자세와 깊이 관계된다. 선교의 자세란 예수에게서 보이신 바 그대로 어느 대상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그를 기어이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도록 하는 목회적 고려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에 있어서도 자기의 설교가 어느만큼 신학적이고 성서적이고 조직적인가? 혹은 올바른 말씀의 전달자가 하는 제1차적인 문제에 뒤이어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과연 진정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이 말씀을 과연 바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까지 그 폭을 넓히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설교자가 목양적인 배려와 교육적인 노력까지를 아울러 하지 않으면 바른 설교를 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설교는 그 자세에서 보는 때 독백이 아니고 대화이기도 하다. 설교를 듣는 이들이 말이 없는 말로 서로 나누는 대화로서 답하는 설교가 되어져야 한다. 이 점에서 오늘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자들의 자세를 재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 사회, 이 나라, 이 민족을 향하여 진리의 말씀을 외친다 하는 경우 과연 그 응답까지를 고려하는가, 그 설교를 듣고 있을 그가, 그 민족, 그 사회가 과연 그 말씀에 수긍할 수 있기까지 친절과 사랑과 이해를 가지고 설교를 하고 있었는가를 재고하자는 것이다.
 
   어느 집단이거나 그 사회나 민족 속에서 소수집단으로 있을 때는 그 사회를 향하여 항상 반항적이고 투쟁적이고 반발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도 하나의 사회구성체로만 보는 때 그 사회를 향한 투쟁적이고 반발적인 자세로 서게 된다. 더구나 교회가 그 설교자의 설교를 통하여 그 사회의 불의와 부정에 대항할 때 더욱 투쟁적이게 된다. 이러한 투쟁적 자세로만 일관하면 그 사회를 구원하는 효과보다도 그 사회를 평면적으로 파괴하는 사회동력체가 되고 그와 동시에 또 자기 스스로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대체세력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 평면적인 승리와 동시에 신령상으로 타락을 자초하고 만다.
 
   교회의 선교는 그 사회구성 속에서 소수이든 다수이든 간에 그 사회구성원 전부를 차별 없는 구원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일단은 그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차원에다 교회의 위치를 세워 놓을 때 설교자의 설교는 내가 할 말을 했으니 잘 듣든 못 듣든, 망하든 흥하든 네 될대로 되라는 식의 표현이 될 수가 없다.
 
   특히 오늘날 설교 영역의 관심도가 사회적이요 역사적인 데에 더욱 집중되어 있는 경우에서는 그 사회와 그 역사를 사랑하고 아끼는, 그리고 그 역사와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을 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목회적인 배려가 없이는 설교 자체의 내용까지도 바른 설교로 구성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오늘 설교자가 알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5>
   나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에 있어서는 설교영역의 문제보다도 설교의 차원과 설교자세의 문제가 오히려 더 중요한 문제점으로 보인다. 우선 우리가 명백한 점은 비록 교회의 설교자가 정치적 부조리를 통렬히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해서 그것으로 그 설교자가 정치적 이득을 얻거나 정권의 장악을 위한 수단은 아니라 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책임을 진 개인이나 집단에게 바르게 들려지지 못했다면 그 일부의 책임은 설교자의 목회적 배려와 교육적 친절을 다하지 못한 점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이 경우에서 볼 때 오늘날 교회의 설교는 강단에서와 독백적 설교보다 못지않게 사회 각계각층에서 대화를 나누는 선교적 노력이 더욱 효과적인 설교가 아니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이렇게 친절한 노력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설교를 거역한다면 그것은 더 할 수 없는 최후적인 일이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모두 그렇게 하여 진정한 설교를 그 목숨으로 입증하였던 것이다. 교회가 왜 그 나라와 그 사회와 그 속에 있는 인간을 외면할 수 있으며 설교자가 그것을 외면한 채 할 수 있는 설교가 어디에 있겠는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의 관원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잡았다가 훈방하면서 제발 예수의 이름만 전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했던 것처럼 이 세상은 죄를 범한 자들은 그 죄를 규탄하는 설교에 대해 너희는 이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법이며, 그래도 더욱 외치면 귀를 틀어막고 들으려하지 않고, 또 그래도 더욱 외치면 돌을 들어 그 설교자를 치는 것이 바로 목이 굳고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완악한 자들과 이 패역한 세대가 보이는 반응인 것이다.
 
   설교자가 만일 이것이 두려워서 설교의 영역을 스스로 좁히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절대한 창조와 통치권과 영원한 승리와 완성을 믿지 아니하는 거짓 설교자요 구약시대에 제왕의 비위를 거스를까 두려워 거짓예언을 하던 거짓 예언자들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설교에 대한 설교자의 진실성
 

      개신교회의 예배는 설교가 중심을 이룬다. 특히 선교 초기의 예배는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 다른 종교 혹은 미신을 섬기던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고 가르침으로써 신앙을 그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 심고 익히게 해야 했다. 그래서 예배에서 설교가 복음전파의 한 교육과정 같이 중요시 될 수밖에 없었다.
 
예배와 설교
     우리나라의 교회는 바로 이런 전통을 받았고, 오늘날 우리의 강단도 그 흐름을 짙게 지니고 있다. 마치 설교를 위해 모든 예배순서가 짜여지는 느낌이요, 또 실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보다 설교하는 목사가 더 중시되고, 예배순서 중에 많은 횟수와 시간을 차지하는 찬양이 설교를 방조(幇助)하는 내용으로 짜여지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그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초기 미국선교사들에게서도 유래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선교 초기의 소박한 기독교 계몽운동 성격과 전도집회와 그 뒤를 잇고 있는 부흥집회 등으로 토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예배에서 설교 외의 순서는 설교를 위해 보조적 기능을 하는 순서가 아니다. 예배는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최후의 승리 등 하나님의 전역사(全歷史), 즉 구속사의 전사역(全使役)을 포함하고 요약한 거룩한 드라마이다. 찬양과 간구와 봉헌과 사명의 다짐으로 요약되는 하늘나라의 축배다. 예배의 순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전파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설교 자체가 예배인 것처럼 이해되거나, 인식되거나, 수용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단 한 시간 안에 요약되는 예배에서 비록 설교가 차지하는 시간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다른 순서는 지극히 짧다고 해서 다른 순서가 설교에 부속되거나 하위에 있어야 할 정도로 가벼운 것은 아니다. 짧은 순서는 시간이 짧은 만큼 그 내용과 표현의 중량이 더 무거워야 한다. 예배를 주관하는 목사는 일단 그의 설교에 모든 예배순서를 부속화, 방조 기능화 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설교 전통
     한국교회의 설교 전통이 ‘단순하고 소박한 성경강화’라는 점은 매우 축복받은 전통이다. 강단의 설교로서도 그러했지만 그것으로 미흡한 점은 소위 사경회 등으로 보충했다. 부흥회의 시초는 사경회였고, 사경회는 성경공부였다. 이 점은 매우 흥미로운 전통이다. 그런데 이 성경공부가 공부로서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간에 지적 축적과 지식전달의 영역을 넘어서 새로운 기적을 경험하게 했던 것이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다함께 그 ‘말씀을 받은 자의 자리’에 서게 되고, 그 말씀을 주시는 분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치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성경토론을 하던 중에 또 한 분의 동행자를 만나게 되고, 그 두 사람의 성경토론은 세 사람의 대화로 깊어지고, 급기야 그 동행인이 다른 이가 아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이셨다는 점, 그리고 그 사실이 두 제자에게 알려지는 순간 잠시 몸으로 동행하셨던 그분은 그 두 사람 앞에서 몸의 존재는 감추어버리셨던 바로 그 사건이 성경공부 과정에서 재현되어 체험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빌립이 가사로 가는 길에서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와 성경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을 때와도 똑같은 경험이었다. 즉 성경강화가 부흥회로 이어지는 경험이다. 이러한 체험을 반복해온 한국교회의 강단은 성경을 성경으로 고집스럽게 붙잡아 온 것이다. 성경은 학문의 대상, 배움의 매체로서만이 아니라 그 책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할 만큼 성경 중심적이었다.
 
     이러한 설교 전통의 극단화가 성경을 통하여 언제나 살아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役事)를 극단적 성경숭배자들의 성경관이란 틀 속에 가두어버린 결과를 낳아서 오히려 과오를 범하기는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성경중심의 강단으로 지켜가게 했던 기본 동기만은 높이 인정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고 성전을 세웠으나 오히려 율법과 성전 극단주의에 매여 버렸던 것과 같은 과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역사를 율법과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의 의도대로 살게 하신 것, 그리고 그 민족의 신앙 전통을 통해서만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사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도 같다. 한국교회의 설교 전통은 성경말씀 중심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중심의 설교
     설교자가 교회의 강단에 섰을 때 갖는 권위는 절대적이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하나님밖에 가지지 않는 권위라는 뜻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절대적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성경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강단에 설 때, 그는 그의 권위를 절대화한다. 왜냐하면 그가 전파하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권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인간 자신의 존재는 완전히 부인되어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설교자는 그가 강단에 서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외에는 그 무엇도 전파하거나 표현할 아무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자는 자기 사상과 주장을 펴는 사상가나 웅변가나 선동가일 수 없다. 만일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정직하게 선포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과 사상을 편다든지 혹은 다른 것을 말하는 경우에는 당장 그 자리에서 쫓겨나야 할 존재다. 사람이 내어 쫓지 못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 강단에 선 설교자들 가운데는 이것을 잘 알지 못해 잘못된 죄악을 범하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그 권위를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설교자로 위장하는 시몬(행8:18-20) 같은 복술사도 있는 것이 걱정된다. 스스로 알지 못해 잘못 설교한다 하는 경우는 한국교회 강단설교의 양쪽 극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때 극히 보수적인 강단설교 중에는 성경말씀에 관한 자기 주관적 해석으로 인하여 성경이 성경말씀 자체로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왜곡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과 구절을 자기의 개인적 체험신앙을 반증하는 정형적(定形的) 자료로서 주관화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극단적 보수주의 경향의 설교들은 성경말씀을 사물화(私物化)한다. 그 극단적인 예를 기독교적 사이비 종교집단들의 성경풀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위험은 오늘날 우리나라 설교자들에게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복음을 전파하게 된 초기부터 복음의 이질성이 있었다. 즉 사도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의 출현이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위험을 정리하기 위해 복음 선포의 정도(正道) 혹은 정론(正論)이라 할 수 있는 신앙교리체계가 확립된 것이다. 그 원형이 ‘니케아 신조’로 알려진 교회의 공동신앙고백이다.
 
     한편 극단적인 진보주의적 경향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최근 어느 교회의 목사의 설교는 그것이 교회 강단에서 말해진다는 것 외에 그 내용이나 표현양식 면에서 정치선동이나 사회시평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닌 설교다. 또 다른 유형으로서 성경 또는 기독교에 대한 종교적 해설 강의 같은 설교를 듣게 된다. 설교자는 그야말로 핵심이 없는 전달자가 된다. 자기가 전하는 말씀의 내용을 믿고 안 믿고는 아무 상관이 없이 오직 방관자나 다름없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게 된다.
 
     전자는 성경말씀의 구절들을 자기 주장을 펴기 위한 예문으로 인용한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의 인용과 어느 성현이나 철학자의 경구와 논증을 혼합하고 엮어서 자기 나름의 논리와 주장을 합리화시킨다. 이들은 말하자면 저자의 동의도 묻지 않고, 인세도 지불하지 않고 해적판을 찍어 팔아먹는 악덕 장사꾼 같은 모양으로도 비춰진다.
 
     이러한 경향은 신학에서까지도 나타나 그것을 정당화할 논리를 전개하려 했던 신학자가 있었다. 성경의 이야기를 하나의 전거(典據)로서 보태려 하는 주장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노동투쟁을 하다가 죽은 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자들의 죽음과 동일시하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교회의 설교와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의 유일적 권위로서만 주어진다. 어느 박사, 어느 사상가, 어느 작가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건, 성경과 성경이야기들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풀이하고, 무엇으로 표현하는가와 설교는 내용과 질에 있어서 전혀 다르다. 교회의 강단과 그 강단에 선 설교자의 설교는 예수님과 성경을 자기의 취향에 따라 희극화하거나 만화화하는 자유사상가나 작가의 입장과는 전혀 다르다. 설교자는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 속에 다양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사건들의 ‘현재적 증인’이다.
 
성경에 대한 주제파악
     설교의 제목이란 다만 한 시간 안에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총괄 요약한 표식과도 같다. 그러나 설교가 성경 중심에 서 있다 해도 그 성경의 중심 주제를 언제나 이탈하지 않는 설교여야 한다. 이 문제를 신학교육에서는 편의상 ‘성경신학’이란 과목 안에서 다루게 된다. 구약의 창세기로부터 신약의 계시록까지 그 내용을 포함한 시간은 무한과 무한 사이에서 진행하는 모든 시간이고,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공간을 완전히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 역사의 시초와 종말까지의 과정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이 쓰여진 시간만 해도 천년 하고도 수백 년의 기간을 가져왔고, 그 필자들도 수없이 많다. 그러한 성경이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종합되고 공인되고 수용된 까닭이 무엇이며,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이 성경책에 기록된 말씀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명백한 대답이 있어야만 한다. 이 대답이 곧 성경에 대한 주제파악이다.
 
     성경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 여러 종류의 사람들, 상이한 역사적 사건과 그 배경, 문화 등이 쓰여져 있는데, 이것은 왜 이 책이 성경이라고 이름 붙여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주제파악이다. 주제의 바른 파악이 없으면 바른 설교를 할 수 없다. 어느 경우에는 구약에 있는 유대인들의 제사법을 텍스트로 하여 설교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는 삶의 지혜를 풀은 잠언의 성구로 설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잠언의 삶의 지혜를 신도에게 전달하기 위해 설교한다면 그 잠언 이야기 못지않은 더 많은 인생지혜서들을 성경 이외의 책에서 찾아 설교의 본문을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나 석가의 지혜의 글을 설교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의 설교이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와 매우 비슷한 설교 아닌 설교를 듣는 때가 있다. 성경의 주제는 삶의 지혜나 권선징악이 아니다. 그것들도 물론 성경의 주제와 연관되어 있으나 종속적 관계뿐이다. 그러면 그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설교의 제목과 성경의 주제
     설교의 제목은 항상 성경의 주제 안에 있어야 한다. 그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가 곧 말씀이요 생명이요 진리이다. 전부의 전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오, 또 육신이셨던 그분이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영존하신다. 예수님의 나심과 삶과 가르치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 전부가 말씀의 주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심이요 전부다.
 
     부언하자면, 그것은 복음서의 편성사를 공부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가복음 이전에는 예수님의 언행록이 단편적으로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독일 말로 켈레(Qulle)라고 하여 영어의 Q로 부호를 삼는다. 이 단편적 언행록과 복음서 저자들이 저마다 보고 듣고 또 전수받은 내용들을 묶어서 복음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편성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제일 처음 쓰여졌다는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나 자라시던 시절의 이야기는 완전히 생략되고 공생애를 출발할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최후 3년간의 행적만 기록되었다. 그중에서도 전 16장의 내용 중 예수님의 최후 일주간, 즉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주된 내용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의 제자나 문도들이 목도한 예수님의 사건에서 기상천외한 사건이 부활이요, 부활이 있게 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사도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다”라고 했다. 부활사건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으로 계실 때에는 그렇게 확실히 알지 못했던 사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유일 독자성을 확실히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활사건으로 이것이 입증되었다. 이 사실을 목도한 제자들은 이 사건의 증인으로 나선 것이다. 사복음서의 편성사는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부활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그의 생애와 탄생이 기록되었다. 마태는 그들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며, 누가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인류의 조상인 아담까지, 그리고 그 위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 역사적 배경과 이어지게 하여 예수님을 전역사의 중심과 초점에 두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예수님 중심에서 재해석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경우 구약은 신약에 연계됨으로써 성경이요,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서간들, 여러 책들은 제각기 제 목적이 특출해서 성경인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실과 진상의 의미를 충분히 나타내려는 데 완전무결하게 연계됨으로써 신약성경이 성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않은 성경이해와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십자가의 부활이 증거 되지 않는 설교는 비록 성경 전체에서 모든 성구들을 뽑아 나열해서 말한다 해도 설교가 될 수 없다. 기독교 복음진리의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데 매여 있고 인간과 역사와 만물, 즉 지어진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에 두고 부단히 거듭나고 구원을 받음으로써 그 주변에 응집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설교다.
 
설교와 설교자의 진실성
     사도들은 자기들을 설교자라 하지 않고 복음의 증인, 즉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라 했다. 표현은 다르나 내용은 같아야 한다. 설교자는 복음의 증인 즉 예수님의 사건의 ‘현재적 증인’이어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성경은 인용하면서 성경에 그렇게 써 있다고 표현한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성경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만 나는 그것에 책임질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이는 도피구를 만드는 것이요, 무책임한 표현이다. 더군다나 예수님께 목숨은 내어 맡기고 나서는 신도들, ‘예수님을 내 주로’ 고백하고 나온 교우들 앞에서 설교자가 이렇게 불확실한 제3자적 표현을 쓰는 것은 하나님께는 물론, 청중에 대해서도 큰 모독이 된다. 설교자는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전파하려는 말씀에 생명을 걸고 고백하고 나서는 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자신이 믿고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목에 힘을 주어 가면서 남에게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연극이요 기만이다. 설교의 진실성 문제다. 설교에 대한 설교자의 진실성만 보장된다면 한국교회 강단은 영적인 은혜의 열매로 채워질 것이다.
 
     성경말씀 그대로를 설교자의 믿음의 진실, 삶의 진실로서 진실 되게 증거 하게 되면 그의 설교는 이미 합격점을 넘어선 것이다. 한국교회에 백여 년 역사의 짧은 기간 동안 한민족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설교들은 바로 소박하고 수식이 별로 없는 설교들, 그 설교의 진실과 설교자의 진실에서 온 열매들이다.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의 지식과 기교에서 오지 않고 설교자의 진실과 그 복음의 진실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은, 설교자는 성경책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사명을 진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말씀 자체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의 내용이 충실한지는 성경본문의 바른 이해와 해석, 그리고 그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의 참뜻을 바르게 전달하려는 가에 달려 있다. 예화와 자기 체험담, 또는 기타 상황설명을 위한 지적, 사회적 예증들은 필요한 방증(傍證)이 되기는 하나 그것이 설교의 내용을 결정짓는 요건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본문의 바른 이해를 얻기 위해 많은 주석서를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어떤 설교자들은 그 주석서들의 내용을 전시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오히려 성경의 진실을 혼란시키는 경우도 있다. 성경공부가 지식의 충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와의 만남에 연결되는 과정으로 체험되어야 한다. 바로 그 까닭에 설교자의 성경본문에의 접근이 기도와 연계되지 않을 수 없다. 설교자는 성경에 능통하고 그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에 포로가 되면, 그 입에서 설교로 표현되기 전에 벌써 설교자 자신이 은혜의 감격에 녹아진다. 말씀선포는 깨달아진 은총의 감격의 외면현상일 뿐 그 다음 발생하는 결과들은 성령님 자신이 사역하시는 기적의 체험뿐이다. 설교는 수사학이나 웅변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