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사도 바울의 십자가신학

하나님아들 2023. 10. 1. 23:57

사도 바울의 십자가신학

 

 

사도 바울의 십자가신학

➜ 십자가신학의 개념과 논를 정립하여 성서로 기록한 사람을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을 빼고 우리는 십자가신학을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십자가를 승리로 보았지 패배로 보지 않았다. 거기에는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8: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요19: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사도 바울이나 초기의 전도자들도 이 십자가형을 어둠의 권세에 대한 승리로서 선포하였다.

골2: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행2:2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공개적 십자가 처형, 깨끗하고 순수하신 분이 굴욕을 참아야 하는 고뇌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냈다.

“단번에 십자가”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인간을 자기와 화해시키기 위해 택하신 구속의 방법이었다.

나아가 십자가는 서로 나뉘고 소외된 인류에게 공동의 형제애를 창조하는 사단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란 말은 구원의 복음을 의미하였고, 그의 메시지와 선교에 있어서의 시금석(試金石)이었다.

- 7 -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지혜보다 더 낳은 것으로 입증되는 곳도 마로 이 십자가에서였다. (고전1:24)

그리스도는 의롭고 죄없으신 분으로서 죄에 굴복함이 없이 죄를 멸하셨고 그리하여 인간의 죽음과 사멸성(mortality)을 이기셨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원한 희생제물로서 인간에게 부과된 저주를 자취하심으로서 그 저주를 파괴해 버리셨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인간을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하사 새롭고 영원한 참 자유로 인도하셨다.

사도 바울은 영원한 자유의 우주적 영광을 이해하고 믿는 자를 그 불멸로 인도하는 십자가신학을 정립했다.

● 루터의 십자가신학

➜ 루터가 스콜라주의에서 손을 끊고 자기의 복음주의적 신학으로 돌아선 것도 엄밀히 말하면 바로 이 십자가신학에서였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의 어거스틴수도회에 참석한 루터는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공격하면서 성서적 신학을 내세웠다.

루터는 자기시대의 영광의 신학을 반대하면서 십자가신학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십자가신학이란 용어가 사용된 효시였다.

영광의 신학이란 하나님께 대한 참다운 지식은 자연의 연구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신성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이러한 영광의 신학의 주장을 뒤집었다. 하나님께 대한 고유한 지식은 오직 성육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알려지는 대신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 순수성 안에 숨어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그 이후 독일신학에 심원한 영향을 끼쳤고 나아가 칼 바르트의 신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루터가 성육신을 말할 때는 그리스도의 크신 위엄과 권능 대신 그분의 자기비하와 성부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숨어계심에 대한 표현은 십자가가 계시한 그 가치의 전도(顚倒)안에 보여지는데 ➊ 죽음을 통한 생명, ➋ 희생을 통한

승리, ➌ 어둠을 통한 빛, ➍ 연약함을 통한 강함, 그리고 ➎ 하나님의 미련함이 인간의 지혜로움보다 현명하다는 논리이다.

● 십자가신학의 중요성

➜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신비요 불가사의이다. 너무 크고 너무 값지기 때문이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살리는 것은 우주창조의 원리요 근본이자 불가해한 하나님 사랑의 법칙이다.

하나님 사랑의 일부가 인간에게 심어진 것이 모성애이자 부모의 심정이다.

하나님의 통일성은 선이 아니라 그 선을 초월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그분의 계시를 따르기를 원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속성인 아가페 사랑이 인간에 의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은 이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가해한 절대적 인격의 하나님 자신에 의해 그 사랑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인생을 사랑하시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으며 이 우주 전체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다.

영생불멸이란 무한 가치의 축복이 그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도 불쌍히 여기시고 건지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어떤 죄인도 영원히 멸하도록 요구한다. 죄를 멸하고 나서야 우주를 영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하나님의 거룩한 두 속성은 죄인을 만날 때 풀 수 없는 모순이 되어버린다. 이것을 우주적 모순이라 한다.

우주안의 어느 피조물도 하나님의 모순을 풀 수 없다. 이 우주적 모순을 풀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뿐이다. ➜ 이 하나님의 우주적 모순을 풀어 완전한 영원세계를 이루기 위해 성육신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려면 죄 없는 자가 죄인의 죄를 지고 대신 죽어 그 죄를 대속해야만 한다.

율법을 지켜 죄를 전혀 안 짓는다 해도 이미 지은 죄는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불가해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하나님의 공의가 더 이상 인간의 죄를 벌하도록 요구할 수 없게 한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을 의롭다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공의답게 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답게 했다.

그 처절한 십자가에서 하늘 공의와 하늘 사랑은 영원히 만났다. 거기서 칭의와 영생의 길이 열렸던 것이다. 그 십자가의 죽음은 우주가 영존할 수 있는 당위성을 제공했고 인간이 영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거가 되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를 본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를 철저히 주장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 8 -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가차 없이 폭로했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무서운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셨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공의는 극한으로 대립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진동한 것이 그 표징이다.

그러나 땅이 진동할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았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의 공의의 요구는 하나님 자신의 사랑으로 충족시키셨던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원흉인 사탄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으시고 전혀 무죄한 예수를 매달았다.

죄인의 자리에서 죄인 대신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하늘공의와 하늘사랑은 한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이다.

공의를 요구하는 하늘의 아버지와 죽음으로 응답하는 십자가의 예수는 그래서 한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다. 십자가는 사랑만으로 세워진 것도 아니고 공의만으로 세워진 것도 아니다.

죄인을 구하려는 하늘 사랑과 죄인을 멸하려는 하늘 공의가 대립할 때 유일한 해답으로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진 것이다.

사랑과 공의라는 이율배반이 하나님 자신의 죽음을 요구했을 때 그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사랑이다.

사랑은 타산적 정의를 창조적 정의로 바꾼다. 사랑만이 정의를 정의답게 만들며 정의만이 사랑을 사랑답게 만든다.

사랑이 결여된 정의는 언제나 불의하다. 그것은 선악과의 법이기 때문이다.

하늘 사랑을 모르는 사회정의는 언제나 인간을 정죄하고 살해한다. 이 법칙을 극렬하게 보여주는 것이 공산주의 역사이다.

사랑은 정의에 무엇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어 정의를 정의가 되게 한다.

➜ 십자가는 인간고에 대한 하나님의 해명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시는 인간고이다.

하나님이 고난 받으실 수 없다면 하나님은 사랑하실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 사랑은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사랑이요 자기를 무한히 제한하는 사랑이다.

자기를 죽음에까지 낮추시고 자기를 버리는 사랑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셨고 우리와 함께 사셨고 우리와 함께 죽으신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고난이 되어버린 나의 고난, 하나님의 고통이 되어버린 나의 고통, 하나님의 죽음이 되어버린 나의 죽음이다. 나 혼자 죽으면 누구든지 영원히 멸망한다. 하나님이 죽으신 거기에 내가 함께 죽으면 하나님과 함께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영원히 죽지 않는 우주적 생명의 하나님의 의이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이제 하늘 우편에 나타나시어 스스로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사랑의 모습을 입으신 하나님이시오 참 지혜이다.

예수를 얻은 자만을 하나님은 영원히 의롭다 하신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자를 하나님은 영원히 살리시고 지키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는 우리의 부활이 없고 우리의 십자가가 없이는 그 영광의 날의 면류관이 없다.

십자가의 승리는 자기를 비어 전폭적으로 예수께 의지하는 자에게 돌아간다. 십자가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최종 국면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 울 신 학 2  (0) 2023.10.04
바울 신학  (0) 2023.10.01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차이점  (0) 2023.09.16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0) 2023.09.16
기독교 신학 분류표  (0) 202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