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대한 예화 모음
제목: 신앙공동체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봉사에도 단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서로 화합하여 봉사하는 정신과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태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나와너”란 책에서 사람이란 말의 어근이 “서로서로”란 말에서, 곧 나와너와의 조화에서 유래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사람의 의의는 서로서로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서로서로 화합하여 봉사할 때의 기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을 절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스튜어트 아베리가 쓴 책“느헤미야를 통해 본 참 지도자론”에서 “서로”란 용어에 붙은 여러 가지 아름다운 생활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 돕고 서로 지지해주며 함께 모든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 그 중에 몇 가지를 지적하였다.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엡 6:18). 서로를 격려하라(히 10:24, 25). 서로 대화하라(엡5:19). 서로 봉사하라(갈 5:13). 서로 친절을 베풀라(롬 12:13). 서로사랑하라(요일 3:11). 우리는 모두 서로 봉사함은 물론 모든 일상 생활에서 화합을 위해 힘쓸 때 지체로서의 아름다운 사명을 다하게 될 것이다.
제목: 신앙 불감증
여류문학가 Florence Barclay는 자기가 일곱살 때의 이야기를 어머니가 가끔 말씀하셔서, 자기의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간증하였다.
아마도 사순절중 어느 주일이었을 것이다.
프로렌스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예배에 참석했을 때, 목사님은 예수 수난의 기사를 낭독하였다.
예수가 체포되고 끌려 다니고, 드디어 십자가에 못박는 장면을 읽을 때 어린 프로렌스는 훌적훌적 울기를 시작했다.
어른들이 모두 이상한 눈으로 예배가 방해된다는 듯이 이 소녀를 바라보고, 프로렌스의 엄마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왜 이러니" 하고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이때 프로렌스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 (Why did they do it?)하며 울음을 멈추지 못했던 것이다.
철 모르는 소녀의 흐느낌이 고요한 성전에 울려 퍼질 때 처음에는 이상한 눈초리를 했던 예배자들이 모두 고개를 낮추고 여기저기에서 기도 드리는 중얼거림이 들렸다고 한다.
소녀의 순진한 울음이 어른들의 습관적이며 불감증이 된 마음에 각성을 일으키는 울림이 되었던 것이다.
제목: 신앙과 불 신앙의 차이
만일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파도가 우리를 몰아치고 바람이 불며, 영양실조에 걸려 침울해 하다가 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능력도 전혀 역사하지 않으며 우리와는 상관이 없게된다.
그러나 반면 믿기만 한다면, 그 파도는 사랑스럽고 달콤하며 양식도 풍성해진다. 또한 우리의 눈이 열리고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나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거하사 강하게 역사하시며,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제목: 신앙과 삶
알라바마의 쉐필드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젊은이가 철제품 제조 공장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뜨겁게 달은 장갑판 위로 내던져졌다. 그는 동료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의사를 불러야 해" 하고 동료 일꾼들이 외쳤다. 그러나 다친 노동자는 "나는 의사가 필요없어! 이제 나는 하나님을 모른 채 죽을꺼야. 누구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없소?" 하고 외쳤다. 비록 300명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구원을 얻는 길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 사람은 20분간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이 사건을 지켜 보았고 죽어가는 사람의 외침을 들었던 한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는 교회에서 거의 봉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물었을때 그는 "나는 전에 죽어가는 사람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네. 그때 나는 허리를 굽혀 예수님에 관해 말해주고 싶었네. 그러나 나의 생활이 나의 입을 막아버렸네"라고 말했다.
제목: 신앙과윤리적인격변화
어느 소박한 불신자가 진지하게 내게 자기 소감을 말하면서 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교회의 종들이 새벽마다 세상을 향해 울리고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고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짓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비해서 남을 도와주고 양심적으로 살아서 불신자를 인격적으로 감화 감동시키는 일이 적은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변명하기를 교회는 병원같아서 죄인들이 변화되어 가는 곳이며, 성자들도 많은데 부정적인 것이 더 과장 표출되어 있다 했더니, 자기가 아는 오륙명의 모모인사를 예를 들면서 분노해 했다.
한국 교회는 신앙은 좋은데, 윤리성이 약하다는 평이 있다 인간적으로 저질이지만 헌금 많이 내고 새벽기도 하며, 교회사업 열심히 하면 고급 신자로 행세한다. 세상에서 도덕의 쌍놈이 교회의 영적 양반일 수 있을까. 기독교인은 세상사람보다 촉감이 진실하고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겸손해야 한다.
제목: 신앙상실 병
정신분석학자 융은 인생의 고민과 신앙심의 회복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지구상의 모든 문명국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으며 수많은 환자들이 내 손을 거쳐갔다.
생의 후반, 즉 35세가 넘은 환자들은 결국 신앙심과 연관된 근원적인 문제로 생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모든 선조들이 물려 주었던 살아있는 신앙심을 상실하게 됨으로 병을 앓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다시 신앙심을 되찾지 않고서는 결코 치료될 수 없다."
제목: 신앙생활
나는 충북대학의 조교수 시절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일본 규수대학에서 연구한 바 있다. 희망과 꿈에 부풀어 학문에의 의지를 굳게 하고 새로운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나에게 지도 교수인 히타카 교수는 미리 보내진 나의 서류를 뒤적이면서 자신은 기독교인이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왕 왔으니 신앙 생활은 잠시 쉬고 연구에 열중하라는 것이다. 도착 이틀 후인 첫 일요일에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다. 그날 오후에 연구실에 갔더니 지도 교수가 미리 나와 있었고 교회에 갔다 온 것을 마땅치 않게 보는 것 같았다. 이리하여 신앙 생활을 둘러 싸고 지도 교수와 냉전이 벌어졌다. 나는 다른 대학으로 다른 교수를 찾아가는 것이 쉽지 신앙은 잠시도 쉴 수 없다고 하였다. 신앙은 나의 호흡이요 사람들이 잠시도 호흡을 쉴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신앙을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새벽 6시에 나가고 밤 11시에 돌아오면서 연구에 최선을 다했다. 다섯 달이 되던 어느 토요일 아침에 교수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신이 우리 남편에게 어떻게 했기에 나보고 교회에 출석해도 좋다고 하죠?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교수 부인도 기독교 학교 출신인데 결혼 이후 교회에 못 나가게 되었다고한다. 나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나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렇게 완악한 교수의 마음을 돌이키시니 그 감사함을 이루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 뒤 그 교수는 나의 연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내가 학위를 받고 돌아오기까지 많은 도움과 적극적인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살아 계셔서 항상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제목: 신앙생활 일보부터
한 세균학 검사실에 300여 종류의 우유 견본 검사 의뢰가 왔다. 교수가 조수에게 일이 벅차겠다고 걱정했더니 "한번에 하나씩만 하면 힘이 안듭니다."했다.
이 평범한 말 가운데 인생의 중요한 교훈이 있는것 같다. 산더미같이 많은 과제와 인생의 과제를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하니까 심리적으로 지쳐버리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상상보다 해 보면 쉽게 풀리는 일이 많다. 다만 꾸준히 끝까지 열심히 하는 것이 문제다.
하루 한 시간씩 인생을 집중적으로 성서를 공부하면 대학자가 될 수 있다. 하루 한 사람 전도하면 최대의 전도자가 된다. 소처럼 걸어가 보라. 신앙은 인내다.
욥은 재산, 자녀, 건강, 그리고 아내와 위로를 잃어 친구의 공격을 받고 회의와 절망중에도 믿음의 보행을 중단하지 않았다. 하루 하루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정성껏 살자.
제목: 신앙생활에 힘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힘이 없는 이유는 어느정도는 스스로 해보려고 하면서 또 하나님의 도우심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우리 자신은 철저하게 무능하게 되어하나님으로 역사하시게 해야만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일꾼이 되려면 반드시 이렇게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살펴 봅시다. 모세,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으로 인도하여 나올 때 어떻게 하였으며, 여호수아가 그들을 가나안으로 들일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불가능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전능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지만 우리는 스스로 노력하고 하나님을 '조금 도와 주시는 분'으로만 여길 뿐 하나님께 " 저는 전혀 불가능하오니 하나님께서 마땅히 하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베드로에 대하여 배운것 곧 그의 자신만만함, 자기의 힘, 자기의 의지 그리고 종래에는 주님을 부인한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그러므로 "오 ! 내속에 자아가 있고 육신이 아직도 나르 지배하고 있구나 !" 함을 깨닫고 그러한 깨달음 가운데서만 구함받을 길이 있음을 믿으십시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능히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셔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실 수 있음을 믿으십니까?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회개의 눈물과 깊은 겸비함과 두려움으로 이렇게 외치지 않으시렵니까?
" 오 하나님, 저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찬송 드리옵기는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십니다.."
여기에 구원받을 길이 있음을 확신하십니까?
지금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손에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십시오.
그의 사랑이 무한하시듯이 그의 능력도 무한하셔서 새롭게 이루실 것입니다.
제목: 신앙생활의 생체 리듬
빌 1:27; 눅 22:32
요즘은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바이오 리듬을 많이 활용한다. 바이오 리듬은 사람마다 다르다는데, 기본 이론에 따르면 이것은 사람의 생년월일에 따라 신체.감정.지성에 독특한 리듬의 영향을받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변화를 미리 알면 건강관리와 능률향상 뿐만 아니라 사고 예방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도로교통안전협회'에서는 이 같은 점을 적극 수용하여 운전자들의 바이로 리듬 캘린더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이 캘린더에 위험 도수가 높게 표시되어 있는 날은 아예 차를 놓고 쉬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운전자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기 생활의 리듬이 있으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그 리듬을 포착할 수가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신앙생활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을 때 잘 참고 견디면 어느 새 상승곡선을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목: 신앙생활의 퇴보
잠1:32;벧후1:5, 7;마6:30;8:26;막9:24
신자들의 성경책에는 먼지가 두텁게 앉아 있고 기타 몇 권의 종교서적도 무용지물로 책장 속에 놓여 있다. 또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성경을 읽어 본 후에 잘 아는 듯이 자만심을 갖는 사람도 있다. 또한 처음 개신교가 전해졌을 때 방식을 알든지 모르든지 진심으로 기도했는데 지금은 형식적인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 많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정욕으로 구하는 일이 많다. 처음보다 지식이 늘고 신앙이 진보하였으면 기도하는 것도 점점 더 신령해져야 한다.
전도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러하니 전에는 동포의 영혼을 불쌍히 보아서 전도하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안할 수 없어서 형식적으로 하는 것처럼 하기도 하고, 자기 교회만 위하는 욕심으로 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전도사업도 예수의 참 정신에서 떠났다. 전도회나 부흥회하는 것을 보아도 수십년 전에 하던 것을 그대로 한다. 우리는 전도하는 데도 새 운동이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채필근)
제목:신앙열심(무게)
스코틀랜드의 목사이며 찬송가 작가인 보너(Bonar Horotius 1808-1889)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보너의 신앙열심을 저울질한 후 1백근이 된다고 하면서 그 열심을 분석해 보여주었다. 이기심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 14근 파당적인 열심 15근 명예때문에 나타내는 열심 22근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내는 열심 23근이었고 오직 하나님을 사t랑하는 열심은 26근 뿐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보너는 자신의 열심이 얼마나 인간적인 발상에서 우러난 것인가를 깊이 회개한후 변화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로마서12:11)
제목: 신앙으로 대답하자
60년대 말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올랐던 여배우 가운데 패트리샤니일이라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 패트리샤가 뉴욕에서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길을 건너가고 있었을 때 지나가던 자동차가 그들을 치었습니다. 어린애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고, 2년 뒤에 딸아이 하나는 홍역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1965년 패트리샤 자신도 유출혈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참고 또 참아 마침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우로서의 최고 영예인 오스카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신문 기자가 그녀에게 용기의 열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패트리샤는 방안에 있는 액자를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문을 두드릴 때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대답을 했다. 그러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즉 시험이 올때 신앙으로 대답하면 시험은 도망가고 만다는 말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생애에 놀라운 일을 이룩하십니다. 이 시험을 통하여 우리는 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게 되고, 섬기는 일에 적합한 사람이 됩니다. 이 시험을 통해 온전히 성장하게 되고, 모든 것에 구비하게 되고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제목: 신앙으로 자란 아들의 용기
신앙의 깊이는 고난당할 때 그의 자세를 보고 알 수 있다. 적극적인 자세로 의연히 대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무서워서 피하는 사람이 있다.
루마니아의 푸로레스코 목사가 공산당에게 잡혀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가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자 공산당들은 목사를 회유시키기 위하여 비인도적인 방법을 썼다. 그의 11살짜리 아들을 그의 앞에서 발가벗기고 거꾸로 매달아 끓는 물을 코에 부어 넣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고문을 가하였다. 푸로레스코 목사는 자기가 고문을 당하는 것은 견딜 수 있는데 아들이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은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고문을 당하던 11살짜리 아들이 외쳤다.
“아버지. 조그만 참으세요. 나는 배신자가 된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모시고 싶지 않아요.”
푸로레스코 목사는 아들의 이 말에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힘을 내어 끝까지 공산당에게 항거했다. 평안할 때 예수를 믿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천국가는 문이 좁은 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 처해도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을까?.
제목: 신앙은 범사에 감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순교한 주 기철목사 부인 오정모집사는 임종시에 몸이 괴로와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괴로운 것 때문에 감사했다. 그가 감사한 이유는 그렇게 아파서 잠을 못 이루었기 때문에 깨어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신앙인일수록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바울은 투옥되어서도 감사하고, 또 신자에게 범사에 감사할 것을 말해 주고도 있다.)
제목: 신앙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계룡산 신도안에 가면 천하통일교라는 사이비 종파가 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보면 한 벽면에 할아버지 사진들이 몇개 벽에 붙어 있는데 맨 위에 큰 사진이 하나, 그 밑에 작은 사진 네개가 붙어 있다.
맨 위의 사진은 하나님이고 그 밑에 있는 네개의 사진은 공자, 맹자, 야소(예수), 석가라고 한다.
맹자나 공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고, 석가를 통해서도, 예수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성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리스도를 상대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신앙은 절대적인 것이다. 구원도 절대적인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도 절대적인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천하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얻을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이 때문에 지난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한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스럽고 답답한 일일 것이다. 적당히 넘어가면 살 것인데 귿이 그렇게 죽을 필요가 있겠느냐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을 본 적이 없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신앙을 지켰는가?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고 갖다놓고 그것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과감하게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림이 예수님의 실제 모습도 아닌데도 말이다. 적당히 밟고 지나가도 큰 일은 아닐 테지만 그러나 절대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예삿일이 아닌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이 절대성은 너무 중요하다. 복음의 절대성,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 오직 에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구원을 얻은 길은 없다는 절대성이 바로 믿음이요 신앙이다.
아내를 맞이한 남편이 이 여자도 괜찮고 저 여자도 괜찮고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상대성을 가지고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닌 것이다.
사랑의 욕구중 하나는 절대성이다. 네가 아니면 안된다는 절대적인 마음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절대적인 신앙이 있어야 한다. 점점 그러한 절대적 신앙이 희석되어지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절대적인 말씀이다.
제목: 신앙을 다듬는 조각가
18세기 독일의 조각가 요한 하인릭 본 다네커는 신앙을 승화시켜 많은 명작을 남겼다.
그가 2년 동안 대리석을 다듬어 그리스도상을 완성했을 때 제일 먼저 보여주며 평가받으려 했던 '비평가'는 예술에 대해 무지한 소녀였다.
이 순수한 소녀가 가장 정직하게 말해줄 것으로 그는 믿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상을 본 소녀는 "이 사람이 누구죠? 좋은 분 같은데…"라고 말했다.
다네커는 '실패'를 직감, 다시 6년에 걸쳐 그리스도상을 완성한 후 그 소녀로부터 "아, 예수 그리스도이시군요"라는 말을 들었다.
제목: 신앙을 이기지 못하는
감리교피의 창시자인 영국의 웨슬리목사는 박사는 신앙을 멸시할 수는 있어도 이기지 못한다고 다음과 같이 그의 일기에 기록한바 있다. "1768년 1월 11일 (월요일)-이번 주간은 여가를 이용하여, 우드로우씨의 [스코틀런드 교회 수난사]를 읽었다. 박해는 신앙을 능욕하는 일이 있으나, 사실은 어떠한 예외도 허락하는 일 없이, 신앙의 승리는 명백하고, 부동의 것이다"가 그것이다.
실로 로마의 박해도, 스코틀랜드나 홀런드 및 프랑스의 박해도, 그리고 일본의 박해도, 기독교 신앙에 이기지는 못했다.
제목: 신앙을 통해 만족을 얻은 톨스토이
렘 31:25; 빌 4:11-13; 고후 3:5
대문호 톨스토이는 제정 러시아의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백작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그는 소년시절 가족들로부터 "너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었어."라는 말을들었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 상태로는 자기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년기로 접어들면서 불행과 죄와 절망 중에 깊이 침전되었는데 자기뿐이 아니라 주변의 교양있는 인사들 모두가 불행한 상태에 있음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와 같은 귀족들이 멸시하는 교양도 없고 투박스러우며 빈궁에 빠져 허덕이는 농노들 중에 만족과 단순한 고상함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불쌍한 농노들이 갖고 있는 것은 신앙이었다. 그들은 어려움중에서도 신앙이 있기에 만족을 느끼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귀족들이 불행해하는 것은 이 농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을 갖지 못한 까닭에서였다.
톨스토이는 이를 깊이 깨닫고 신앙을 가지면서 만족을 느끼게되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때부터 이전의 즐거움을 훨씬 능가하는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목: 신앙의ABC
어느 목사님 두 분이 심각한 문제 투성이의 교회에 각각 부임하였읍니다. 그런데 한 분은 아주 놀라운 승리를 했고 한 분은 거기에서 주저앉고 말았읍니다. 두 분의 목회 방법이 아주 달랐기 때문입니다. 한 분은 굉장히똑똑한 분이라 교회에 부임한 그날부터 문제를 발생시킨 사람들의 잘잘못을 심사하기 시작했읍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자기의 언변과 지식으로 따져서. 철저하게 사건 규명을 했읍니다. 그 사건이 분명하게 규명되자 아무도 목사님에게 대항하지 않았읍니다. 목사님의 조리있는 말씨와 논리가 분명한 그의 지혜를 당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다 해결되었을 때는 그 교회의 교인들이 다 떠나버리고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읍니다. 한편. 또 다른 한 분은 시끄러운 문제들에 대해 전혀 따지지 않았읍니다. 그 분은 모두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할 따름이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셔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셨읍니다. 그리하여 그 교회에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읍니다. 당신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느헤미야처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그분께 나아가 모든 문제를 쏟아 놓으십시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다 이야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기도의 성자. 죠지 뮬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를 했읍니다. “무릎으로 인생의 싸움을 싸우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기독교 신앙의 ABC를 모르는 사람이다.”
제목: 신앙의 결단
옛날에 기찻길 주변의 개구장이들이 별생각없이 던지는 돌멩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가 깨지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기차가 지나갈 때 돌멩이를 던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습관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국민학교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기차가 지나갈 때 손을 흔들어주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이 손을 흔드니까 기차 안의 사람들도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기차 안의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는 것에 재미가 들어서 기차가 지나갈 때 돌멩이 던지는 버릇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무조건 돌멩이를 던지지 말라고 하면 근본적인 해결이 안됩니다. 돌멩이를 던지던 손으로 흔들며 사랑을 표현할 때 참으로 아름답고 기쁨이 넘치는 인사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믿고 그릇된 일 안하는 것만 잘해서는 안됩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것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결단은 안하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해야 될 것을 더욱 온전하게 행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에게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악에게 지지 않는 인생은 참 훌륭한 인생입니다. 유혹이라는 것이 얼마나 끈질기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유혹에 지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나를 향해서 가해하는 사람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찰 때가 있습니다. 보복하지 않는 인생은 대단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적극적인 것을 요구합니다.
제목: 신앙의 고백보다 더한 그 어떤 것
예루살렘이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갖가지 분분하던 때였습니다. 이때 실로 위대한 고백을 수제자 베드로는 할 수 있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제껏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실로 위대한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큰 놀라움을 가지시며 베드로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2000여년의 기독교의 역사를 흘러 내려오면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 위에서만 가장 순수한 신앙의 탑이 이루어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 고등 학생의 연령에서 아니 그보다도 더 일찍이 주님을 바로 알게 하심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출발선에서 출발한 후 수많은 나날을 그냥 허송세월 하는 이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새 생명의 씨앗이 우리의 영혼 한복판에 뿌리워진 그날 이후 우리는 너무도 어처구니 없이도 유혹의 사탄에 이끌려 시험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런 우리의 안타까움을 위하여 주님은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베드로가 주님을 연거퍼 세차례씩 부인하고 난 그 뒤의 일입니다. 부활 후 잠시 이 세상에 계시던 주님께서 베드로를 지목하여 이렇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씩이나 주님은 다짐하셨던 것입니다. 세번씩이나 부인함과 세번씩이나 다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 미음의 고백 그것보다 더 차원 높은 것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만이 수고의 어려움을 기쁨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순교의 자리에 까지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이 고백 뒤에 베드로의 모습을 압니까? 그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그를 통하여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해요"
이 가슴 뜨거운 고백을 당신도 할 수 있나요? ........
제목: 신앙의 그릇
한 구두 수선공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자기와 다른 종교관을 지닌 이웃 사람들에게 거칠고 매정하게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이 버릇을 고쳐주려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하루는 “죤. 구두 한 켤레를 맞추려고 하는데 치수 좀 재주게”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좋습니다. 목사님께서 신고 계신 구두를 벗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가 치수를 재고 나자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죤. 내 아들도 구두 한 켤레가 필요한데..” “기꺼이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아드님 치수도 재야되겠는데요.” “아니. 그럴 필요없네. 그애는 14이지만 내 것과 똑같은 모양. 똑같은 치수로 하면 된다네.” 그러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목사님. 아드님의 발은 목사님보다 훨씬 작은데 치수를 똑같이 하면 어떻게 신고 다니겠어요.” “분명히 말하지만 내 것과 내 아들 것을 똑같이 만들게나.” 이에 그는 늙은 목사가 정신이 나갔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목사님. 그것은 도대체 불가능합니다. 구두가 발에 맞아야 하니까요.” “죤. 구두가 제대로 맞으려면 구두 한 켤레마다 고유한 형으로 만들어져야 하지.
그런데 자네는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만드실 때 자네 자신의 형과 똑같이 만드신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 생각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나.”그제서야 그는 얼굴이 붉어지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목사님. 그리스도의 관용으로 이웃 사람들의 생각도 나쁘게 여기질 말아야겠군요.”
제목: 신앙의 기준
제가 남양만에 내려갔을 때 초기에는 대단히 성공했습니다.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농사가 3년 동안 풍년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한국선교 100년에 내가농촌선교의 권위자다. 누가 단기간에 일곱 개 마을을 세워서 자립시킬 수 있겠느냐고 자부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다녔습니다. 그런데 전도사 한 분이 제게 “목사님. 조심하셔야겠습니다”고 해서 왜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남양만 주민들이 예수님을 믿는 줄 아십니까. 천만에요. 그들은 김진홍 목사를 믿고 있습니다. 활빈교회 교인들은 심지어 예수님은 못해도 김진홍 목사는 해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반문했지만 지나고 보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제가 실패를 하지 않았더라면 새마을 운동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새마을 운동 성공사례를 발표하느라고 바빴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제게 뭔가 투자를 하셨는데 제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엉뚱한 길로 빠졌을 것입니다. 남양만에 사는 어떤 주민이 저희 마을에 와서 보고는 “별거 없네요”라고 해서 웃었습니다. 사실 별거 없어야 합니다. 벌거 있으면 바벨탑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준은 사업이 잘되고 못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 이루어놓은 업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 삶의 자리.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무엇이 가슴 속에 남았느냐. 무슨 고백이 그 피와 뼛속에 남아 있느냐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목: 신앙의길
2차대전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뉴튼 베이커가 직접 목격했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읍니다. 그는 전쟁중 유럽의 어느 야전병원을 방문하였는데 그곳에서 매우 끔찍한 부상을 입은 미국인 병사 한 사람을 만났읍니다. 그병사는 두 다리와 한 팔. 그리고 한쪽 눈까지 잃어 버린 처참한 상태로 누워 있었읍니다. 얼마 후 베이커씨가 두번째로 그 병원을 방문했을 때 그 병사의 모습은 눈에 띄질 않았읍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원장에게 물어 보았더니 간호원과 결혼하여 퇴원했다는 것이었읍니다. 베이커씨는 그 병사가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을 구하고 결혼까지 한 것을 퍽 잘된 일로 생각하며 귀국하였읍니다. 그 후 몇년의 세월이 흘러 베이커씨는 국방장관직에서 퇴임하였으며 존 홉킨스 대학 재단이사장으로 봉직케 되었읍니다. 그러던 어느 해 봄. 재단이사장으로서 졸업식을 주관. 박사학위를 수여하던 중 베이커씨는 휠체어에 앉아 박사학위를 받으러 나오는 그 병사를 발견케 되었읍니다. 5년 동안 집념을 불태운 결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 그 병사를 보자 그는 너무도 놀랍고 반가와서 그 학생의 남은 한 손을 붙잡고 격려해 주었읍니다. 그때 그 청년이 베이커씨에게 이렇게 말했읍니다. “베이커 장관님. 은퇴하셨다는 것을 신문 지상을 통해 알았읍니다. 그러나 아직도 보람 있는 일이 많이 있으니 조금도 낙심치 마시고 더 힘차게 사십시오. 베이커씨에게 그 상이 용사의 음성은 마치 주님의 목소리처럼 들려왔읍니다. “더 힘차게 사십시오.” 이것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참고 견디고 이겨 나가는 것이 곧 신앙의 길입니다.
제목: 신앙의길
데이빗이라는 젊은이가 무더운 여름 시골에서 보스톤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한낮이 되자 그는 매우 지쳤고 갈증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길가 숲 속에 있는 샘물을 마시고 그늘에 가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이 숲길에 중년부인이 휴식을 위해 들어왔다가 젊은 청년이 멋지게 자고 있는 것을 보자 얼굴을 붉히고 그냥 되돌아갑니다. 조금 후 노부부가 마침 마차가 고장나서 수리하는 동안 숲 속으로 쉬러왔다가 청년을 보고 그 얼굴이 죽은 자기 아들과 같다고 양자를 삼았으면 하는 말을 주고 받다가 마부가 부르는 소리에 허둥지둥 되돌아갑니다. 이번에는 이곳 시골 농장의 주인딸이 꽃을 꺾으러 다니다가 숲 속까지 와서 청년을 보고는 수줍어 망설이며 깨울까 말까 하다가 부친이 찾는 소리에 종종걸음으로 가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도둑이 지나다가 청년의 보따리를 보고 칼을 꺼내들고 가까이 갑니다. 이때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나자 부리나케 도망을 갑니다. 두어 시간 지나자 이윽고 청년은 기지개를 크게 켜고 일어납니다. 마침 멀리서 마차소리가 납니다. 청년은 그 두 시간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고 마차를 타고 보스톤을 향해서 떠납니다. 숲 속은 다시금 정적이 흐릅니다. 이 젊은이에게는 어쩌면 부자집 양자로, 시골 농장주인의 사위로, 아니면 죽음으로 끝날 수 있는 여러 운명속에 있었지만 결국 그의 운명은 보스톤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길은 운명도 숙명도 그리고 과거의 체험이 그 인간의 개인적 인격으로 규정되는 것도 아니라 지금 내가 결정하는 결단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제목: 신앙의 눈
유대인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꼭 들려주는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훌륭한 학자. 아끼바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가서 일하는 중에 주인집 딸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그 집 주인 딸과 같이 쫓겨나와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끼바의 부인은 남편의 무식을 한탄하면서 지금부터라도 학교에 다니도록 권하였으나 아끼바는 이미 나이 40이 넘어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계속 양을 치는 일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중에 어느 날 목이 말라 개울에 가서 엎드려 물을 마시는데 눈앞에 있는 바위를 바라보니 물이 흘러 떨어진 곳이 움푹 패여 있었습니다. 아끼바는 깨달았습니다. 물 한 방울은 약하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흐르니 바위도 뚫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나도 오랫동안 꾸준히 노력하고 배우면 된다”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어서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여서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신앙의 눈을 가지십시오. 신앙의 눈은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매사에 의욕을 가지고 “하면 된다”라는 믿음으로 땀과 눈물을 흘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여러분 앞에 반드시 가능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제목: 신앙의 눈으로 바라봄
요일 3:2; 창 1:26; 계 4:3
영국 런던에 살고 있는 엘리자 커크 부인이 101살이 되는 생일을 맞았다. 그 뜻깊은 날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녀는 방안에 있는 모든 거울을 치워 버렸는데 이 기이한 행동의 이유를 그녀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지금의 나 자신이 아니라 지난날의 나를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믿는 자들은 그 노파가 이렇게 거울을 치워 버리면서까지 하고자 했던것 보다 훨씬 뛰어난 일을 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무시하거나 잊어 버리려고 애쓰지 않고서도, 신앙의 눈으로 예언이라는 망원경을 들여다 봄으로써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제목: 신앙의 단계
신학자 넬즈 훼레 (Nels Ferre) 는 자신의 신앙 순례를 통하여, 신앙의 깊이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하였다. 첫째 단계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신앙이 좀더 깊이 들어가면 둘째 단계로서 정직해지는 단계이다. 자기의 자랑, 자신의 공포, 위선 등을 내던지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단계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기를 그 앞에 벌거숭이로 승복하는 단계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즉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신앙의 깊이는 여기에서 한 단계를 더 들어간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단계, 즉 아버지로 부르는 단계이다. 그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하고 아들의 의무를 다하는 단계이다.
제목: 신앙의 대상
어떤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공처가 선발대회가 열렸습니다. “누가 진정한 공처가인가!”진정한 공처가를 가려내기 위해서 빨간색 깃발과 노란색 깃발을 꽂아 놓고 수없이 몰려든 공처가들에게 심판관이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당신들이 정말 공처가라고 생각하면 노란 깃발 앞으로 모이시오.”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노란 깃발 앞으로 가는데 한 사람만 빨간색 깃발 앞에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심판관이 그 사람에게 왜 그렇게 혼자 그 쪽에 서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내 아내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아합도 아마 그와 같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에 대한 증거는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의 그 모든 요구와 그들의 도전을 어떻게 어떻게 물리치셨으며 얼마나 능력있는 분이셨던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아합의 입술에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 없었던 것입니다. 표적이 부족해서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신앙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표적을 목격했읍니까? 그러고도 그들이 철저한 불신앙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보십시오. 아합에게 표적이 부족했읍니까? 그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을 자기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고도 아직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표적이나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도 어디까지나 자기의 주관적인 체험에 불과합니다. 자기의 지식이나 생각, 판단도 주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역사가 증명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한 그 그리스도만은 우리의 진정한 신앙의 대상입니다.
제목: 신앙의 모순
언젠가 우리 졸업생 중 한 명이 목회하는 교회에서 한 일주일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내가 그 남편이 가방을 꺼내러 들어간 사이 나를 황급히 구석으로 데려가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헨드릭스 교수님, 당신이라면 제 남편을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언제나 너무 활동적이에요. 전혀 쉬지도 않고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요. 저는 그가 쓰러지지나 않을까 하여 겁이 나요. 잠도 평균 너댓 시간 밖에 자지 않아요.” 며칠이 지난 후에 우리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말했습니다.
“왜 담배를 피우지 않지.”
“제가 담배 피우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글쎄. 내가 일주일 내내 여기 머물면서 자네가 담배불 붙이는 것을 한 번도 못봤기 때문이지.”
“헨드릭스 교수님. 제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그래. 그거 굉장하군. 무척 좋은 생각이지. 하지만 그것이 자네가 매일 너댓 시간만 잠을 자서 자네 몸을 혹사시키는 이유도 되는가 보지.”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구멍 투성이의 생각인가. 우리는 흡연에 관해서는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몸은 성령님이 거하는 전이야. 왜 내가 다 때가 되기도 전에 무덤에 들어가야 하지.”
하지만 마찬가지 논리로 사람들은 도처에서 정력과 돈을 낭비함으로써 아직 다 때가 되기도 전에 무덤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제목: 신앙의 바다
절망의 자유와 희망의 자유, 이 두 가지 자유는 사람이면 누구나 향유하는 자유이다. 긍정할 자유와 부정할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두 가지 자유와 그 선택 다음에 오는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절망과 부정의 자유는 전락이며 희망과 긍정의 자유는 발전으로 통한다. 그것은 신앙과 불신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결과는 구원에로 통하고 불신의 결과는 죽음에로 통한다. 역사의 기선을 잡았던 사람들. 위대한 지도 자들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지혜로운 길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밝은 곳도 있고 어두운 곳도 있다. 그리고 웃을 만한 곳도 있고 슬퍼할 만한 곳도 있다. 어느 곳을 향하여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날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도 해녀는 바다에 뛰어들어 해물을 캐어내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물어보았다. “이렇게 바람이 불고 풍랑이 거센 날도 바다에 들어갑니까?” 이때 그 해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풍랑이 바다 위에 있지. 바다 속에도 있나요.”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면 삶의 껍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나 문제들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유는 해녀처럼 깊은 신앙의 바다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고난의 언덕 너머에 있을 영광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은 오늘의 격랑과 시련을 견디어낼 수 있다.
제목: 신앙의 성년과 어린아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놀라운 은사인 병을 고치고, 천사의 방언을 하고 예언과 기적을 행하는 일들에 대해 말하다가 고린도 전서 13장에 와서는 전재산을 팔아 구제하고 종교적 열심 때문에 월남의 중들처럼 자신을 화형시키고, 지상 최고의 신학자와 설교가가 되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수천명의 병을 고치고 수백만명을 상대로 설교를 하고 총회장이 되고 신학교 교장이 되고, 200권의 신앙저서를 내고 수천억 예산의 종교사업을 한다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어서 하나님의 책에는 영점이하의 점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이 깨닫고 보니 사랑이 장성하지 못한 사람은 생각이나 말이나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다(고전13:11). 기독교의 어린아이들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제목: 신앙의 승리
모 회사의 젊은 생산과장 한 분을 내가 안다. 그는 근래에 와서 자기 회사제품이 규격 미달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선전하며 판매되고 있는 것이 양심에 걸렸다. 신앙적인 견지에서 도저히 그대로 묵인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사업도 신앙적으로 일치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고민하던 끝에 그가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규격 미달품을 완전한 물건이라고 계속 선전하며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회사 운영자에게 그 사실을 진언하면 분명히 자기는 파면되고 말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순종하겠다는 기도를 드렸다. 머칠 후, 그는 용기를 내어서 회사 지배인에게 더 이상 그 상품을 제조판매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신앙 양심에 위배되기 때문에 시정되지 않는 한 자기는 더 이상 생산과장의 직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에서 파멸될 줄 알고 며칠동안 출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웁게도 그 상품의 생산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왔다. 그리고 그의 양심적인 결단력이 회사 중역들에게 인정되어 파면대신 도리어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그의 신앙은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반드시 항상 좋은 결과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의 결과는 반드시 신앙인에게 현실적으로 유리하게만 된다는 보증은 없다. 반드시 현실적으로 유리한 결과 뿐이라면 신앙이란 필요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알지 못할 미래이기에 신앙인은 앞날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는 기독교 신앙을 실생활에 실천해 나가는 사람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 시대이다. 앞날을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힘있게 의를 실천해 나가야 할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신다.
제목: 신앙의 안목
제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제가 머물렀던 기숙사 바로 옆에 아인슈타인 박사가 살던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 앞을 함께 지나가던 미국 친구가 제게 아인슈타인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공부를 잘하지 못해 늘 낙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적부에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성적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이 성적표가 우리네 아들의 것이었다면 부모들은 울고불고 하면서 이제 망했다는 식으로 마치 다 끝난 것처럼 초상집 분위기를 연출하고 야단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그런 성적표를 들고 온 자식을 붙들고는“너는 다른 아이들과 같으려고 하면 열등생이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과 다르려고 하면 너는 우등생이다.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라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한 면을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그 격려에 힘입어 그는 훗날에 아인슈타인 이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유명한 박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성적표가 뭐 그리 대단합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살아갑니까? 보다 깊게 보다 멀리 보며, 그리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제목: 신앙의 양육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신앙의 힘으로 19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운 여성이다. 다음은 그녀의 자녀교육 원칙.
△불필요한 간식엄금
△저녁 8시 취침
△아이들의 말을 먼저 경청하고 판단을 내려 준다
△전원신앙인으로 양육시킨다
△말하기 시작하면 기도부터 가르친다
△가정예배 절대정숙△떠들 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잘못을 고백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고백하지 않은 잘못은 필히 벌한다 △약속이행
△채찍을 두려워하고 훈계를 고맙게 여기게 한다
제목: 신앙의 원리
아말고사 사막 한 복판 메마를대로 메마른 곳에 펌프 하나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 펌프 손잡이에 깡통이 하나 매어달려 있었고 그 속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가 있었다. 이 편지는 그 메마른 사막 한 복판을 헤맬 목마른 나그네에게 시원한 물을 계속 공급하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펌프는 1932년 6월 현재로 물을 낼 수 있는 완전제품입니다. 지하의 물도 충분합니다. 나는 금후 5년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도록 완전히 수리하여 놓았읍니다. 그러나 누구나 사용하려 하실 때에는 이것이 바짝 말라 있기 때문에 먼저 펌프를 적셔야만 물을 빨아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펌프를 가동할 수 있을만큼의 물을 준비해 놓았읍니다. 펌프 곁 흰바위돌 밑을 들치시면 물이 들어 있는 병이 있을 것입니다. 물이 증발하지 않도록 마개를 잘 해 놓았읍니다. 그 물은 겨우 이 펌프를 적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먼저 4분의 1만 부어 넣어 안에 있는 가죽을 적시도록 하십시오. 그 후 나머지 물을 조금씩 다 부어넣으며 힘있게 펌프질을 하십시오. 내 말을 믿고 이대로만 하면 당신이 필요한대로 물을 얻을 수 있읍니다. 물을 다 길은 후에는 내가 했던 것과 같이 다시 병에 물을 넣고 잘 봉한 뒤 처음 놓였던 바위 밑에 넣고 편지와 깡통도 다시 손잡이에 달아 놓으십시오.” 추신/만일 목마르다고 병의 물을 먼저 마셔버리면 펌프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편지만큼 신앙에 관한 원리를 잘 가르쳐주고 있는 글이 없을 것 같다.
제목: 신앙의 유산
그 자녀의 행복과 안전한 삶을 위하여 부모들은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기도 하고 지위나 권력이나 기술 혹은 교육을 물려주기도 한다. 돈을 많이 남겨주면 동서고금의 통계로 보아 나태와 나약, 이기주의 주색, 재산싸움, 냉혈성, 정신질환등도 함께 상속한다. 건강, 투지, 학문기술, 높은 인격을 물려줄 수 있다면 재산보다 귀한 유산이 될 것이다. 미국을 개척한 청교도가 그 후손에게 물려 준것 가운데 가장 값진것이 있다면 서부 개척 정신과 화각 정신, 그리고 청교도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쓰레기에서 장미가 피게 하며 죽음에서 부활하는 잠재적 창조력이다. 내 사랑하는 우리 후손들에게 석유보다 우라늄 보다 귀한 신앙 유산을 물려주어야 하겠다.
제목: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
외신이 전하는 한 작은 교회의 모습이 있다. 1978년 6월 27일. 모스크바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소련의 크리스챤 7명이 저지를 무릅쓰고 뛰어 들었다.
이들을 길거리에 내 보내기에는 인권을 말하는 미국 양심에 저해되고, 서방으로 이주시키자니 소련과 묘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 불청객들은 그동안 미국 대사관의 지하실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믿음을 굳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의 자유를 위한 생명의 투쟁이다. 이들의 신앙은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신비를 증언한다. 그것은 탄압과 박해가 신앙을 죽일 수 없다는 산 증인이다.
바로 이 교회가 처음 교회의 신앙의 맥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인 것이다.
제목: 신앙의 전투
눅 14:16-24; 엡 6:10-20
신앙의 전투는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병자나 어려운 자를 위문하는 일, 예배에 초청하는 일,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 전도 비용을 헌금하거나 간증하는 일, 문서전도하는 일 등 신앙의 전투는 각자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달라진다.
한 도시에 600만 인구가 있다고 가정하자. 혼자서 한 영혼에 불을 붙이는 데 1분이 걸린다면 그 도시의 영혼에 모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주야 불휴로 해도 11년 5개월 11일 16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 불을 가진 자가 즉시 남에게 불을 옮겨 붙이면 불과 24분만에 그 도시의 600만 전영혼에게 불을 붙일 수 있다.
작은 힘들이 모여서 큰 일을 이룬다.
제목: 신앙의 절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일생을 바쳤던 존 낙스는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신앙인이었다. 그는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19개월 동안 죽을 고생을 하기도 했으며, 영국 여왕 메리 1세의 극심한 박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싱앙의 절개를 한번도 굽힌 일이 없었다. 오히려 핍박과 고난을 받을수록 기도와 신앙의 열기를 더해 갔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추모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그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도가 이곳에 잠들다."
제목: 신앙의 절개
한 중국 청년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자 미국의 좋은 관리의 자리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사양하고 목사의 길을 택하여 갔다.
루이스 감독이 그에게 묻기를, 어떻게 그처럼 좋은 자리를 거절하고 목사가 되었는가고 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
"나는 의화단 사건이 었었을때에 중국의 내륙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동리에는 우상을 섬기는 절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많은 크리스찬들이 마적떼 같은 군인들에게 끌려서 그 절간으로 왔습니다. 위협하는 군인들은 크리스찬들로 하여금 그 우상에게 절을 하고 신앙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크리스찬들을 한 줄로 세우고 우상 앞을 지나갈때에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끌려 온 163명의 신자들은 절을 하기는 커녕 고개도 숙이지 않고 그 우상의 앞을 걸어 지나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군인의 앞에서 목이 땅에 떨어져 굴르며 순교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절만 한번 하면 사는데 163명의 크리스찬들은 모두 신앙을 지키며 순교의 길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 163명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내가 어렸을 때였지만, 그 사건은 나의 일생을 새롭게 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똑바로 가르쳐준 것이었습니다."
제목: 신앙의 증인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12:1) 우리는 관객으로 꽉 메운 올림픽 경기장에 결승점을 향해서 달리는 주자들과 같다.
동서고금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 히브리 11장의 신앙의 용사들과 순교자들이 우리의 신앙생활 현장을 지켜보며 격려해주고 있다.
사자굴과 풀무불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우리의 증인이다.
한 마디만 부인하면 살려줄텐데 86년간 나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는 일이 없는 주님을 어찌 부인할 수 있느냐고 화형을 받은 폴리캅, 모두 우리와 동주자다.
안티오커스 애피파네스가 BC170년경 유대종교를 말살하려고 대 박해가 일어났을때 일곱형제가 순교한 이야기는 너무도 감동적이다. 7형제를 목전에서 차례차례 차바퀴에 매달아 돌려 쇠못에 찢겨 죽이고 철못손으로 찢어서 죽이고 달군가마에 볶아 죽이고 쇠갈구리로 가슴통을 꿰어 매달아 죽이고 점점이 자르고 돌방아로 깨고 끓는 가마에 끓여 죽여도 오히려 여호와를 찬송했던 그런 사람들이 우리 선배들이다.
제목: 신앙의 진리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은 일년 내내 세계의 피서객들이 모여서 해수욕을 하는 유명한 휴양지입니다.
그런데 하와이 해변가에서 많은 사람이 해수욕을 하면서 수영을 즐기다 보면 모래밭에 귀중품들을 떨어뜨려 잃어 버리곤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가버리고 난 다음에 금속 탐지기를 가지고 그 모래 사장 위를 왔다갔다하면 그 속에 감춰졌던 다이아몬드 반지가 발견되고 롤렉스 시계가 발견이 됩니다. 그건 찾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주인이 없습니다.
신앙도 보화와 같이 찾는 자만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도 구하는 자만 얻지 우연히 잠을 자다 보니까 찾아지거나 솟아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구하고 찾을 때 발견됩니다.
제목: 신앙의회의 주님께
성서속의 여러 명령들이 어느 것이나 청수창공같이 투명하고 수학이나 화학공식같이 설명되는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 변증이니 성서변증에는 아무리 완벽하게 설명이 된 경우도 반론의 여지는 남기고 있다.
그래서 세상 끝날까지 성서에 돌을 던지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성서를 맹목과 독단의 수락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 앞에서, 시간적인 것이 영원앞에서, 피조물이 창조자 앞에서 이성과 지식과 경험의 불완전함을 자인하고 좀더 겸손히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어린이가 부모님의 말씀을 믿듯이 제자가 스승의 말씀을 믿듯이 아내가 남편의 말을 믿듯이 그 말씀을 믿는 것이다.
나는 내가 천국에서 지옥에 가 있는 분들의 영원한 고통을 보고 차라리 자살이나 멸절되기를 원할 것이라는 회의가 있었는데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가고 만물을 새롭게 하며 모든 아픔과 회의의 구름이 걷히게 하사(계21) 아멘과 찬송을 받으실 주님께 그런 염려를 맡기기로 했다. 사람아 네가 누구 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냐? (롬9:20)
제목: 신앙이란
우리가 잘 아는 작가로 “쿠오바디스”를 쓴 센키비치의 작품 중 “흑암속에 비치는 빛”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읍니다. 주인공 “카미옹카”라는 조각가는 자기 직업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능력 또한 대단했던 사람이었읍니다 그는 자기 작품만 최고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남과 타협할 줄을 몰랐읍니다. 그에게는 친구도 없었고 친척도 없었읍니다. 그런 그가 노년에 병이 들어 쇠약해진 몸으로 어두침침한 작업실에 누워 있게되었읍니다. 아무도 간호해 주러 오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그런 중에 카미옹카는 갑자기 놀라운 경험에 휩싸이게 되었읍니다. 병약한 몸으로 누워있는데 창 밖에서 강렬한 광채가 비춰 오더니 그의 조각품들을 모두 녹여버리는 것이었읍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물까지 다 녹여 버리고는 그의 몸을 허공에 띄우는 것이었읍니다. 한참을 빛의 힘에 의해 떠있다 정신을 차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 찌그러진 오두막집 어두컴컴한 방에 굳어진 시체 한 구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읍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시체는 바로 자기의 모습이었읍니다. 그 때 카미옹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보며 많은 것을 배웠읍니다. 자기를 객관화시켜 보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기를 객관화시켜서 자기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제목: 신앙이란 자기 밖으로 나오는 것
롬 9:3; 엡 3:16
복음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을 믿어서 보다 크고 귀중하며 쓰임새 많은 것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신앙은 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너무나 주관화되고 너무도 개인화 되어 있다. 신앙에 주관성, 개인성이 없다는 말은 아니나, 너무나 주관적이요 개인적인 것은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 구원의 위대성을 살해한다. 형제들의 신앙상태를 그의 기도와 설교를 통하여 살펴보면,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이요 개인적 입장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영적 만족을 얻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기쁨을 얻을까.
그럼으로써 결국 신앙은 내 문제에 제한되어 있고, 내 사실에 갇혀있고, 나를 넘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실에 대하여 눈이 감겨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로서 기독교, 그리스도의 사실, 계시의 종교, 은혜의 종교를 모르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모르는 것이 된다.
우리는 너무도 내 안만을 들여다 보기에 급급하고 내 경험, 내 사정의 여부를 생각하고 내 발전을 주시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 그리스도의 사실을 쳐다보지 않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은혜란 사실에만 어두워져 있다. 내 문제, 내 발전만을 생각하니 우리는 왜소한자가 되고 시들고 마른 자가 될 수 밖에 없다.(최태용)
제목: 신앙인
미국의 유명한 정치인이요, 학자요, 언론인이었던 다니엘 웹스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워싱턴의 쟁쟁한 큰 교회에는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저 구석의, 버지니아 구석이나 메릴랜드 구석의 작은 시골 교회들만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웹스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시내의 내 얼굴을 아는 교회에 나가면 목사들이 정치인 웹스터한테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곳에 가면 내가 들어야 할 소리를 해 주거든요. 내게 필요한 소리는 '웹스터, 죄인 웹스터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입니다. 그것이 내가 듣고 싶은 설교입니다.”영국에 유명한 크롬웰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훌륭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루는 교회에 나갔더니 그 옆에 아주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 행색의 젊은이 한 사람이 와서 앉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크롬웰을 호위하는 사람들이 이 젊은이를 쫓아내려고 했더니 크롬웰이 제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한 종류의 인간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한 종류의 인간은 죄인이요,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해결에 관심을 집중해야지, 내 신분에 대한 인정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제목: 신앙인격
아들에게 공부 잘할 것을 극성스럽게 강조해오던 어머니가 있었다. 3년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뒷바라지 하는 것에 생의 전체의미를 부여한채 살아가는 이 여인은 남달리 아들의 공부에 신경을 썼다. 콩 심으면 콩나고 열심히 가꾸면 많은 수확이 따르는 법이다. 아들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안았다. 자랑스러운 수석 졸업생의 어머니가 된 여인은 하늘이라도 나를 듯이 기뻤다. 그녀는 이것이야말로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 날, 아들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졸업생을 대표하여 연설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영광의 날이다. 바로 그날 이른 새벽에 여인은 아들의 여자친구 문제로 아들과 심한 언쟁을 벌이다가 아들이 휘두른 야구 방망이에 얻어 맞아 비참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공부 잘하는 아들이 성이 나서 휘두른 방망이에 오뉴월 개꼴이 되어서 숨을 거두던 그 순간에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그 아들은 엄마를 죽여놓고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자신의 행위를 무죄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공부만 잘하면 그만이다”라고 말하며 닥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보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신앙을 바탕으로 한 건전한 인격형성이 그것이다. 옳고 바른 신앙인격이 형성된 사람이라면 범사에 자기가 해야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생활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비록 부모들이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먼저인지를 망각한 부모들 때문에 청소년들이 잘못되어가고, 그들의 잘못을 결국에는 부모 자신들이 수확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제목: 신앙인의 온도
음식에는 종류에 따라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온도라는 것이 있다. 예컨대 물맛은 수돗물이나 약수터 물의 경우 섭씨 13도 일 때가 가장맛있다고 한다.깊은 우물의 물이 시원하고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 역시 그 온도가 13도에서 15도 사이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은 땅 속의 물을 정화시키고 나서 그 온도까지 인간이 먹기 알맞도록 신경을 씌 신것이다.또한 이 온도 이외 물에는 또 하나의 맛의 온도가 있다. 70도가 그것이다.지금은 아깝게도 사라진 풍경이지만 옛날 우리 조상들이 식후에 즐겨서 마시던 숭늉의 온도가 바로 그 온도이다. 이런 것들을 볼 때에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얼마나 특출했는가를 알 수 있다.그러나 현대의 지혜자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그러한 좋은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며 안타까운 일이다.그리고 물이 가장 맛이 없는 온도가 바로 35도에서 40도 사이이다.즉 우리의 체온(37도)을 중심으로 하는 온도일 때가장 맛이 없는 것이다.
또 커피에도 맛의 온도가 있다.63도에서 64도 사이다.미국의 경우 커다란 커피잔에 펄펄 꿇는 커피를 붓고 설탕 한스픈을 넣고 밀크를 한두 방울 떨어 뜨린후 휘저으면 바로 64도가 된다고 한다.커피잔 하나만드는 데도 기가 막히게 과학의 지혜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적당한 온도가 있다.그것은 바로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라고 요한 사도가 지적하는 것처럼 분명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토해 버리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신앙적인 바른 온도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100도로 뜨거워야 한다.차거운 것도 문제이다.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차거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계3:15-16 보면 신앙인의 온도를 잘 알수있다.
제목: 신앙인의 재산목록
어떤 회계사가 비록 가난하지만 아주 진실한 교인의 세금보고서를 대신 작성해주려고 찾아갔습니다. 그 회계사는 “소유하고 계신 재산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하고 부탁했습니다. “글쎄요. 나는 긁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첫째, 나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둘째, 크고 아름다운 집이 천국에 있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들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평화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넷째,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고요, 다섯째, 영원히 변하지 솥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여섯째, 현숙하고 신실한 아내가 있고 일곱째, 건강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여덟째, 진실하고 변함없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아홉째, 캄캄한 밤중에도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열번째,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열한번째, 나의 텝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자 그 회계사는 장부를 조용히 덮으면서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재산이 무엇인지, 또한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회계할 때 보고해야 할 내용들이 무엇인지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재산목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귀중한 하늘 나라 재산목록이 풍성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목: 신앙인의 처소
예쁜 새 한쌍이 한적한 곳, 낮은 나뭇가지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집이 거의 완성되어 갈 때 마차에 볏짚을 가득 싣고 농부가 그 밑을 지나가면서 다 되어 가는 둥우리를 망가뜨렸습니다.
새들은 다시 집을 짓기 시작하여 그날 오후에는 거의 완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황혼 때 농부 한 사람이 지게에 나무를 가득 지고 그 밑을 지나갔습니다. 위로 뻗은 나뭇가지에 새 둥우리가 걸려 무너졌습니다. 새들은 다음 날 또 집을 지었습니다. 낮에 개구장이들이 그 밑을 지나다가 매미채로 새집을 무너뜨렸습니다.
한동안 숲속이 조용한 틈에 새들은 그곳에 둥우리를 만들고 알을 낳아 새끼를 부화시켰습니다. 귀여운 새끼 네 마리가 예쁜 주둥이를 벌리고 먹이를 받아 먹는 모습은 평화롭고 행복했습니다.
이 행복한 가정에 무서운 침입자가 찾아 왔습니다.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숲속을 지나가다 낮은 곳에 있는 둥우리를 보고 나무에 기어올라 새끼 네 마리를 모두 잡아 먹었습니다.
몇 차례 무너지는 것을 보았으면 낮은 곳에 짓는 것이 위험한 줄 알고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깨닫지 못했기에 엄청난 비극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말 못하는 새들만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위험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낮은 곳에 집을 짓고 죄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은 더욱 미련하다 할 것입니다.
높은 곳을 보지 못했던 새 둥지가 불행의 온상인 것처럼 땅만을 생각하는 신앙인의 처세는 심판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집은 높은 곳으로 옮겨 지어야 하고 신앙인의 처소는 하나님 보좌 앞이어야 합니다 (창22:1)
제목: 십일조
박 용묵 목사님이 대구 문화촌교회를 시무할 때 심방을 가려고 대문을 나서는데 코가 문드러지고 손이 꼬부라진 문둥이가 가마니 한장을 끼고 깡통을 들고 문 앞에 와서 기다리다가“목사님 계십니까?”하고 물어“왜 그러시냐고”물었더니“제가 좀 만나뵙고 싶어 그렇습니다”하더랍니다.
“예 제가 이 교회 목사입니다.”했더니“예 저는 상주에서 사는데 저도 예수 믿습니다. 참 반갑습니다”하고 하는 말이“내가 목사님께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다름이 아니라. 십일조를 바치러 왔습니다.”하면서 35원을 깡통에서 꺼내 주는데 5원짜리 3매와 1원짜리 20매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박 목사님은 전기줄 만진 것과 같이 짜릿하였답니다. 눈물이 핑돌며 어찌할 수 없이 얻어 맞은 것과 같이 되어서 엉겁결에“여보세요. 부형님 십일조는 본교회에 바치지 않고 이곳에다 바치렵니까?”하였더니“저는 보시다시피 거지인고로 본교회에서 주일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니다가 아무 교회나 십일조를 드립니다.”“그러면 십일조를 제게 드렸으니 돌려 받으세요. 그러면 제가 주일날 십일조를 대신 드리겠습니다.”하였더니“아닙니다. 목사님께 1전 한푼이라도 얻어가면 저의 정성이 아닙니다”하면서 굳이 사양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돌아선 모습을 볼 때 천사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 후 본교회에 광고를 하고 십일조를 냈는데 전교인들이 큰 감동을 받아 십일조를 못내던 사람들이 많이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목: 십일조 훈련
어떤 젊은이가 자기 목사님께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옆에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만일 하나님이 저를 번영케 해 주신다면 제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 젊은이 옆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그를 번영케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하였고, 그 젊은이가 받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하나님께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젊은이를 축복하셨고 그는 번영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 젊은이가 돌아와서는
“목사님, 저와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제가 더 이상 서약에 매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이 너무 많아서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좋다. 네가 십분의 일을 드릴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너를 번영케 하셨다고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서는 젊은이가 한 서약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십일조를 시작한 날의 수입으로 되돌리셔서 십일조를 계속하고 그 서약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기도를 중단시켰습니다.
“아니오.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내가 시작했을 때로 나를 돌아가게 해 달라고 구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일을 계속하나에게 계속해서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말씀해 주십시오.”
존 록펠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가난한 소년이었을 때에 내가 십일조 드리는 일을 배우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수백만 달러의 십일조를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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