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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토라와 신약성서

하나님아들 2023. 8. 25. 00:06

모세의 토라와 신약성서              

 

기독교 성서의 두 부분인 구약과 신약성서와의 관계를 성서 자체로 규정하는 것이 본 강연의 주제다.

여기에서는 토라, 즉 모세의 율법이 중심적 역할을 할 것이다.

율법과 복음이라고 하는 확인되지 않은 애매한 대비가 전통적으로 구약성서에 대해 거리감을 두게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

다.

구약성서에 대하여 비록 긍정적으로 평가를 내리는 데 있어서도 대부분 루터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유대의 율법만큼은 그러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토라라고 하는 주제는 여러 주제들 중에 가장 처음에 다루어져야 한다.

이런 여러 주제들에 대해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성경 자체로 설정되어야 한다.

나는 먼저 신약성서가 구약성서와 맺는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이 근본적인 고찰은 기본 토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각 개별적 고찰들은 이 기본 토대로 언제나 반복적으로 소급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토라에 대한 질문과 맞닿게 될 것이다.

1. 구약성서와 토라에 대한 신약성서의 관계- 근본적인 것.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 성서의 두 번째 부분(신약)은 첫번째 부분(구약), 그리고 토라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1.1. 시종일관 긍정적인 관계

​신약성서는 시종일관, 즉 처음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구약성서와 긍정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를 아무런 의도 없이 단순히 펼쳐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마태복음은 시작한다. 다윗이 누구인지, 신약성서가 아브라함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다시금 그 앞부분을 뒤적거려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신약의 처음 문장부터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첫 시작을 꾸미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간접 인용(창 5:1)이고, 그리스도/메시야/기름부음받은자 라는 단어만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연속된 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것의 시작을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는 계속해서 요한계시록의 끝까지 이어진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 중 어떤 것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1:19). 생명나무와 그에 대한 접근에 대해서는 이미 창세기 2장 이하에 이야기되고 있다. 거룩한 도성은 예루살렘을 말하며, 그것은 구약성서의 색채들로 채색되어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구약성서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다.

이 처음과 마지막 사이의 연결 고리들도 단절 되어 있지 않다. 마태복음의 첫번째 장을 유심히 살펴보면, 마태복음 1장 18절 이하에서 예수의 탄생기사는 글자 그대로, 이사야서 7장 14절(마 1:22f)의 인용인 것을 볼 수 있다. 동방박사의 이야기(마 2:1ff)는 미가서 5장 2절 이하(마 2:5f)의 인용이며, 이집트로 도피한 이야기(마 2:13ff)는 호세아 11장 1절(마 2:15)의 인용이며, 베들레헴의 영아 살해(마 2:16ff)는 예레미야 31장 15절(마 2:17f)에 근거하고 있다. 그 외도 구약의 인용은 수 없이 많다. 예수시험기사(마 4:1ff)는 특히 구약의 인용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세례 요한이나(마 3:1) 예수의 등장(4:14ff)도 구약성서의 말씀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의 “회개하라”(4:17)는 설교와 그의 선포는 예수의 등장 그 오랜 이전에 이미 놓여 있었던 것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시작하고 있는 이런 구약과의 관련은 조금도 약화되지 않고 전체 복음서를 통해 지속되고 있으며, 사도행전과 서신에서도 끝없이 이어진다. 신약성서 서신의 시작인 로마서 1장 1절 이하는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1f).

신약성서는 이렇게 시종일관 구약성서와의 긴밀한 관련성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또한 이 본문들은 강력하고 그 의미가 유효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가 구약과 맺는 연관성은 시종일관 긍정적이지, 구약을 폐지한다거나 또는 무력화하고 이를 극복했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다만, 두 세 곳에서 어떤 의미에서 구약성서가 비판 받고 있는 지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1.2. 기본 원칙의 진술들

​구약과 신약의 구체적인 관련들로 가득 차 있는 것들 중에 몇몇 군데에서 근본적으로 이 둘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마태복음 5장 17-20절이 그렇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상의 진술들은 그 자체로 신구약의 관련성은 완전히 분명하고 확실하다. 나아가 더 풍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이 구절을 복음서 중 가장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구절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은 성서 본문이 아닌 교의학적 이데올로기적 평가가 얼마나 강하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개신교 신학의 어떤 특정한 형태에서는 참일 수가 없다.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가 아브라함을 거론하는 것은 위와 유사한 근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에 따르면 죽은 자의 부활 자체도 이미 토라와 예언자들에게서 이미 말해진 언제나 유효한 것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의미가 오해된 구절로 고린도 전서 4장 6절 이하의 바울의 말을 들 수 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과 아볼로에게 배워야 했던 것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초대교회의 선교사들이 선포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받은 것이며, 성서(Schrift-이는 오늘날 구약을 의미함-역자 주)의 범위 안에 있으며, 결코 기존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에게서 시종일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7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랑할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성서(구약)에 대항할 그 어떤 것도 없다는 말이다.

이상의 것과 또 다른 근본적인 말씀들은 특정 주제들의 맥락에서 다시금 받아들여진다. 신약성서의 우월성이 폭 넓게 퍼지게 된 이론에 있어서 뛰어난 역할을 하는 몇몇 달리 말하는 구절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히브리서 1장 1절 이하. “1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하신 어떤 특별한 것에 대한 것인데, 여기서도 분명한 것은, 이전의 말씀들이 제거되거나 상대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관계가 어떤 의미인지는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 살펴보아야 한다. 곧 히브리서 전체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구약성서의 말씀과 본문으로 꾸며져 있다. 뛰어난 영광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것 때문에도 바울이 말한 것이 유효한 것이다. 곧, 성서(구약)에 기록된 것을 넘어가지 말라는 말이다.

누가복음 16장 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이 본문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듯 한데, 곧 이것이 곧 다양하게 또 많은 사람들에게 신약성서를 통해 구약성서가 이제 말소되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뒤따를 뿐 아니라, 17절,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는 말씀이 뒤따라 나오고 있다는 점으로 보면, 16절이 의미하는 바는 토라의 폐지나 극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장 17절도 이와 유사하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같은 장, 1장에 있는 45절 말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이것은 바로 은혜와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은 이미 토라에 쓰여져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서는 토라에 대해 평가 절하할 수 있는 근거 있는 실제적인 예가 제공되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복음 8장 1절 이하의 간음한 여인의 보도가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율법과 나아가 그에 종사하는 유대 추종자들은 간음에 대해 잔혹한 징벌이 있으리라 여기고 있다. 그에 대해서 예수는 다른 것을 내세우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율법에 의하면 그녀는 아무런 법적 절차도 은혜도 없이 그저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이 본문은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서 발견되지 않을 뿐 아니라 , 4세기의 중요한 사본들과 다른 많은 고대번역본들, 예컨대, 오리게네스의 번역서와 그 외의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5세기 이후에서야 비로서 이 본문이 등장한다. 토라와 그것의 법은 한 눈에 알 수 있게 평가절하되고 예수와 대립되는 것이 되었다. 구약과 유대의 법에 대해서는 분명 더 이상 알지도 못하면서 의식적으로 비방하게 되었다. 율법에 대한 전통적인 부정적 평가가 여기서 매우 인상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신약성서 이후의 문서에서 말이다.

토라나 구약성서와 상반된 것은 신약성서 본문 자체가 아니라, 성서이후의 기독교적인 해석이라는 말이다.

1. 3. 용어

​짧게나마 여기서 성서의 두 부분을 지칭하는 이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문제점을 안고 있는 ‘옛 계약’과 ‘새 계약’이라는 용어 곧 여기서 나온 ‘구약’과 ‘신약’이라는 용어에 대한 것이다. 이는 예레미야서 31장 31절 이하에서, 나아가 고린도후서 3장에서 나온 것인데 , 신약성서 시대에 이는 정경에 대한 용어로 아직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주후 2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했다. 위에서 인용된 예들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들을 알게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성서”(Schrift) 또는 “성서들”(Schriften)이라는 언급이 로마서 1장 2절, 고린도 전서 15장 3절 이하, 로마서 15장 4절에 나온다. 또는 율법/토라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17절 또는 누가복음 16장 31절에 언급되고 있다. 많은 곳에서 후대 유대의 삼분법인, 토라, 예언서, 성문서가 전제되어 있다(눅 24:27,44). 만약 성서적인, 이 경우에 신약성서의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구약성서’라는 전통적인 언급은 “성서”(Schrift)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신약성서도 “성서”(Schrift)로 여기고자 한다면, 구약성서는 “성서 중의 성서”가 되는 셈이다.

1. 4. 계속되는 질문들

​신학적으로 근본을 이루고 있고 방법론적인 질문들에 대한 것인데, 이들은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곳에서 그 밑바탕에 깔려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에 대해 여기서는 다만 아주 짧게나마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 신약성서에서 인용된 70인역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가치는 매우 뛰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전반적으로 중요한 변형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발견은 오늘날 다양하게 다음과 같은 것들로 이끌어 가고 있는데, 70인역은 “기독교 성경”을 위하여 받아들여졌고, 이는 모두가 단지 유대교의 헬라적 형태만이 각인되었고 신학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하려는 필요에 의한 것으로 비치어졌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 전통은 그렇지 못했다. 문화적으로 영향력 있는 형태와 본래적인 신학적 지평과의 관계는 방법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구분되어야만 한다. 예수의 모습조차도 제외된다. 곧 바울이 로마서 9장 4절 이하에서 이스라엘의 여전한 특권을 이야기할 때, 성서와 관련된 증거가 빠져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달리 중요하게 언급된 것들, 즉 계약체결, 율법수여, 예배, 약속들은 없어지지 않고 성서 안에 그리고 성서와 함께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신학적으로 그 처음부터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연결되어 있으며 유대백성 전체를 이야기 한다. 이들 중에 헬라적 모습은 단지 한 부분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오늘날 구약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학의 논의는 유대교에 대해 달라진 신학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심지어 구약에서 시작해 신약으로 가는 순차적인 문제, 곧 기독교 정경을 이루고 있는 그 모습에 따라 읽어가는 신학적인 독서방향을 근본적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것이 오늘 강연의 단초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통행은 타낙(히브리 성서)에서 신약에로 나아가야 하는데도, 이 방향이 바뀌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읽기 시작해서 타낙으로 거꾸로 읽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기독교 구약성서로 나가는 식이다. 도멘(Dohmen), 쩽어(Zenger), 야노브스키(Janowski), 제바스(Seebass)등과 그 외 오늘날 많은 이들의 목소리들에서도 비록 강하게 상대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방식으로 전통적인 기독교식의 읽기가 다시금 시도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진행되어가는 것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상대화된 형태 안에서도 그렇게 뒤바꾸어 버리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결국엔 구약의 신학적인 고유성을 질문 하게 된다. 나는 신약성서 자체는 신구약의 관계를 다르게 보고 있다고 본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들이 결정적으로 단지 성서(Schrift-구약)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된 질문들은 다음 강의에서 주제별로 상세하게 토론되어질 것이다.

- 성서신학의 모든 질문과 주제들을 위해 나타난 결과들을 지금까지 얘기한 순서대로 요약하고자 한다. 아래에서 말하는 것들은 언제든지 또 다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1. 구약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은 - 기독교 경전 읽기의 방향과 신약성서에 이미 구약의 지위를 분명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것에 따르는 것이다 -그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전개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들릴 수 있다.

2. 신약 성서를 보는 관점은 “성서”(Schrift-구약)와의 연관성 안에서 그 자신의 독특성이 펼쳐질 수 있고 들릴 수 있다.

3. 성서 이후의 유대교에 대한 관점은 바울이 말한 “백성(열방)의 풍요함”(롬 11:12)에 기대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해를 바꾸는 자극으로써 비판적 상대로 우리 곁에 둘 수 있다는 것이다.

4. 전통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특히 고백적이며 교리적으로 각인된 것은 한편으론 실제 해석학적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론 비판적인 수정이 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음이 주목되어져야 할 것이다.

2. 토라의 기본 특징들

​이미 마태 시대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공공연히 생각했던, 예수가 율법을 폐하려고 왔다고 본 그 율법(die Größe)은 무엇인가(마 5:17)?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굳게 세우려고 했던, 즉 효력 있게끔 만들려고 했던 그 율법(die Größe)은 무엇인가(롬 3:31)? 단지 몇 가지 윤곽만 여기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토라의 발생은 다양한 법문서들로부터 성장해 오면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과 나란히 생겨난 것이다.정확히 말해서, 토라는 유일신론으로 걸어갔던 이스라엘의 여정에서 하나의 중심 된 부분이다. 비록 학문적으로는 이 토라와 유일신론의 두 과정을 재구성하려는 것이 개별 사항에서는 논쟁 중이지만, 단지 신학적 질문과 연관되어선 가장 중요한 틀임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2.1. 한 분 하나님과 현실의 충만

​가장 오래된 성서의 법전은 출애굽기 20:22-23:33의 소위 계약법전이다. 이는 시나이 산 이야기 안에 있으며, 십계명 이후에 첫번째로 언급되는 내용이다. 이를 토대로 하여 출애굽기 24장에서는 계약체결이 뒤따른다. 그 안의 계명들을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하나의 다양한 전역사를 가지고 있는데,이들은 한 분 하나님의 동일한 뜻에 따라 하나의 단일한 문서로 묶여진 것이다.이는 고대근동의 법문서나 법 역사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 나는 이를 토라의 구조(Torastruktur)라고 부른다.

- 첫번째 부분은 신학적 종교적 중심 문장들이다. 무엇보다 우상숭배 금지조항들이며, 이것이 전체 구성을 특징 지우고 있다(출 20:23; 22:19; 23:13,24,32이하).이 부분에서 그 다음의 중요한 주제들은 신과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형상금지(20:23)와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이웃 문화들과의 차이를 나타내는 종교적인 시간구조이다. 여기에 해마다 치르는 축제(23:14이하)가 포함되고,특히 각각 일곱번째 날에는 쉬어야 한다는 조항, 곧 안식일과 또한 안식년(23, 10이하)이 속해 있다.

- 두 번째 부분은 이러한 종교적인 기본 계명들이 개별적인 법조항들의 모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형식과 내용에서 우리가 고대근동의 법전에서, 특히 함무라비 법전에서 알고 있는 것과 유사한다. 이는 실제 일어나고 있는 법에 관한 것으로,사법절차 시에 적용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긍정적으로 여기는 법과도 상응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형법과 노예법 그리고 그 외에도 특히 상해와 자산피해와 관련된 규정들이 속해 있다. 한 예로는 출애굽기 21장 18절 이하인데, 여기에는 심각한 신체피해로 인한 피해자의 재정적 손실에 대한 규정과 관련해서 성서의 형법에 시종일관되는 근본적인 원칙들을 볼 수가 있다: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가해자로부터 보상을 받아야만 하며, 이는 이러한 보상을 통해 앞으로 서로가 평화롭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게끔 하려는 것이다. "형벌"은 피해자와의 재화해를 이루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며,이는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형벌”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이해하도록 해 준다.아울러 이는 오늘날의 형사처벌법에 대한 토론과 관련해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 근본원칙으로부터 탈리온법, 즉 21장 24절 이하의 “눈에는 눈”은 유대적 해석의 의미에서 피해보상의 적합성의 요구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결코 실제로 실행되어야만 하는 처벌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 세 번째 부분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보호규정들의 모음이다. 여기에서는 나그네(외국인)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이와 관련해서 레위기 19장 33절 이하와 24장 22절을 참고). 이는 출애굽기 22장 20절과 23장 9절 안의 부분인데, 거기에는 과부와 고아(22:21-23) 그리고 가난한 자(22:24이하, 23:3,6) 그리고 또한 동물 보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비법은 아모스 이래로 예언자들의 비판이 겨냥하고 요구했던 것을 법적 문서로 확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장들은 전체 긍정적인 법률을 위해 실행될 원칙들로서 법적으로 공개적으로 이행되어야 했다. 이들은 내용에 있어서 뿐 아니라 법리적으로도 근대의 인권이나 기본권의 틀 안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종교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이 세 개의 서로 다른 테마들이 한 분 하나님의 공통된 요구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한 분 하나님의 영향은,단지 좁은 종교적 입장에서만 신과의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동시에 동일한 무게로 모든 영역에서의 법과 정의를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단순한 종교적 잘못, 즉 다른 신들을 숭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그네(외국인)와 가난한 자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이로부터 구약과 신약에 공통적인 성서의 하나님의 근본적인 특징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토라구조는 후대의 법문서,즉 십계명과 특히 신명기법전(신12-26)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토라구조는 그러나 여기에서 아주 넓게 확대되어지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거대한 현실의 영역들이 한 분 하나님의 빛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 이는 한편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영역과도 관계한다. 신명기 17장 14절 이하의 왕의 등극과 그의 권력의 한계에 대한 규정을 통해 당시의 국가가 이 법 아래 있음을 알리고 있는 왕의 법외에도, 법관의 임명과 중앙법정의 과제(16:18이하; 17:8), 또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18) 그리고 전쟁과 군사(20)에 대한 규정들을 가진 법 체제에 대한 모든 중요한 사회적 제도들에 대한 규정들이 나온다. 이러한 정치적 법률들은 헌법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근세의 헌법에 와서야 비로소 이와 유사한 평행구를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자유를 정치적으로 구성한다든가, 법적으로 확정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여기엔 전 사회구조에 걸쳐 가난한 자의 권리에 대한 옛 규정들이 보다 강력하게 확장되어 나온다. 정기적인 부채탕감(15:1 이하), 고리대금금지(23:20 이하) 그리고 전통적으로 성전이나 왕에게 바쳤던 십일조를 이스라엘 내에서 토지를 갖고 있지 못했던 변방으로 밀려있던 이들의 생존을 위한 사회조세로 변화시키는 것(14:22이하, 26:12이하)이 속해 있다. 모든 이런 사회법들은 항상 반복적으로 언급되던 문구-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4:29; 15:18; 16,15; 23:21; 24:19)-와 이스라엘의 지주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통해 땅의 풍요로움에 가난한 자들과 땅을 소유하지 못했던 자들도 참여하는 것에 곧 하나님의 축복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진 축복과 노동의 순환은 오늘날 노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매우 높은 연관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계약법전에 거의 언급이 없는 새로운 영역은 혼인법과 성에 관한 법 그리고 가족의 범위, 여성의 역할 등이다. 한편에서는 그 당시의 가부장적 가족구조가 분명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특히 페미니스트의 입장으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아온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까지 도전을 주는 규정들, 즉 성폭력(22:23 이하와 26절)이 법적으로 마치 살인과 같이 취급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발견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영혼, 즉 네페쉬를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적인” 영역이 부모와 자녀사이의 논쟁을 포함해서 공개적으로 열리는 장로들의 법정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며(예컨대, 21,18 이하), 이전처럼 가부장의 힘으로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예컨대 창세기 38장에는 여전하다).

- 마지막으로 자연과 동물에 대한 윤리도 언급되어 있다. 한편에서는 일상에서 도살이 이루어졌지만 실제 동물보호규정이 유효해지기까지는 모든 동물살육은 동시에 희생제물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고정된 규정들은 감추어졌다.그 대신에 신명기에서는 자연을 깨끗이 보존하기 위하여(신 23:14 이하) 또는 어미새의 보존(22:6 이하)을 위해 막중한 법적 보호규정들을 두고 있다.

내용적으로 새로운 것들 외에 무엇보다도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신명기에 형성된 것이며, 오늘날까지도 성서신학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계약, 선택,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여기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사랑 등이다(신 7:6-11).

특히 레위기 안에 들어있는 시내산법의 대부분은 제사장문헌에 속한다. 여기에는 신명기문헌보다 더 분명하게 포로기의 상황, 곧 땅과 왕국을 잃어버린 상황이 나타난다. 땅 소유에 대한 이전 계명들이 말소됨으로써 디아스포라 윤리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는 특히 창세기에 나오는 제사장계열의 계명들, 즉, 창 9장과 17장 그리고 출애굽기 12장에서 나온다. 일상적인 평가들과는 달리, 이 윤리는 특히 제사장문헌을 통해 하나의 강력한 자기 내면화를 가능케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용서의 힘을 통해서 그리고 이와 함께 인간의 죄와의 관련 안에서, 그 다음으론 고의로 저질러진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레 4:2 이하).다만 의도하지 않았는데 저질러진 죄들은 용서 받을 수 있다. 예컨대 사형이 실행되는 경우는,후대 유대법에 명시화 된 것처럼, 이미 살인 행위가 있고 난 이후이다.그러나 이는 사전에 그에 따른 강력한 경고와 처벌이 있었음에도 저질러졌을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그 대표적인 것이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다(창 4:7).신명기 19장 15절 이하의 두 명의 증인제도와 함께, 이것은 성서적으로 정리된 유대법 안에서 실질적인 사형실행의 폐지를 가져오게 되었다.

토라에서는 전체 현실, 특히 인간의 일상적 삶과 관련된 모든 영역들이 한 분 하나님과 연결되어있다. 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는 이 연결 안에서 드러나며, 분명한 밑그림을 보여준다. 물론 이 본문들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이 본문들이 그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근세 이전의 농경세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과의 연관성과 유효성에 대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의심할 필요도 없고 나아가 근본주의자들처럼 그저 과거로 되돌아 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성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천오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제대로 해석해야 하는지는 오늘날 신학이 당면한 과제이며,그렇기 때문에 여기 사회사적 해석이 요구되는 것이다. 성서의 본문은 우선 그 당시의 사회적 정황에서 이해되어야 하고,그리고 그것은 오늘의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2. 한 분 하나님과 정의와 자비의 일치

한편에서는 신약성서와의 관계를 위해서, 다른 한편에서는 토라의 한 부분인 죄용서와 관련해서 그것의 신학적 전제에 대한 질문이 특별히 중요한다.

출애굽, 억압 받는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사건이야 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요구를 위한 결정적인 전제이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이야기 맥락에서 그리고 율법에 대한 많은 지시에서 특히, 이방인과 다른 사회적 약자의 보호와 같은 주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이스라엘의 행위나 특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백성에 대해,특히 아브라함 계약에서 구체화된 것처럼,조상들에게 약속한 그 신실함에 근거한 것이다.이러한 맥락은 십계명의 시작에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1f).여기서 “너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서로의 연관성을 위한 근거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이 기초에 뒤따르는 것이며, 내용적으로는 이렇게 거저 주어진 자유의 보존을 위한 것이다. 여기에 내용적인 관련들이 덧붙여지는데, 즉 중요한 계명들은 직, 간접적으로 자유에 기여하며, 안식일은 종일 일만 하던 노동자들을 위한 자유에 그리고 부채탕감은 사회,경제적으로 묶여 있던 자들의 해방에 기여하는 것이다.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심은 토라를 위한 전제일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이상의 것들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한 표현이다. 이는 특히 금송아지를 만든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출애굽기 32장의 이러한 배반에 대한 형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계명을 적어놓은 돌 판의 파괴이다. 그리하여 그 안에 적혀있었던 것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못하게 되었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는 돌 판을 다시 만드는 것에서 그 내용들이 다시 발견된 것이다(출 34). 다른 한편, 이 법률위반은 저주와 축복에 대해 말하는 곳들(레 26, 신 27이하)에서 표현되었듯이 형벌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가 그리고 있는 역사의 모습 안에 비쳐진 토라의 장소가 기본적이다. 특히 신명기에서는 항상 반복적으로 강조하기를, 이 계명들은 이집트에서의 해방에 기초해서, 그러나 이 땅에서의 생명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땅으로 오면...” (17:14; 18:9과 6:1; 7:1 등을 비교하라) “이미 그러나 아직은 아니”라는 형태의 첫번째 모양이 여기에 등장한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관심은 아무 이유도 없으며, 어떤 것을 통해서도 의심할 수 없는 한편, 그것의 현실화는 땅을 차지한 때에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철저히 의심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포로기 땅을 잃어버린 경험들은 신학적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기초를 넘어서 이제 결정적인 것은 속죄와 용서 자체가 토라의 통전적인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특히 제사장문헌의 율법에서 인지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속죄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한편에서 이는 속죄제물(레 4)로, 또 무엇보다 속죄일(레 16)이라고 불려 진다. 이 본문들은 대부분이 수동형으로 되어 있어서, 소위 신적 수동형(passivum divinum)으로 형성되어 있다. 예컨대 “그에게 용서 받을 것이다”로. 여기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기 위한 철저한 준비에 대한 예전적 표현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여기서 마치 스스로 속죄 받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늘날 교회 예배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죄사함을 선포하는 동일한 어조로 바라보아야 한다. 기독교적 측면에서 강하게 받아들인 참회의 시편(시 51편과 130편), 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용서에 대한 다양한 언급(시 103편)이 예배용 본문으로 그 내적인 면을 중시했다면, 제사장문헌에서는 제의 예식의 바깥 측면을 내다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토라는 한편으론 하나님의 약속과 요구의 말씀이 하나이고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론 공의와 자비가 곧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왜 히브리어 ‘토라’가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되었는지를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토라’는 성서시대의 일상적인 용어의 하나로서, 특히 어머니(잠 1:8; 6:20), 또한 아버지(4:1이하) 역시도 그 자녀들에게 쏟는 관심과 사랑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나오는 아이에 대한 관심, 어린자녀를 생명의 위험에서 보호하고, 바른 삶으로 이끌기 위해 하는 말씀들을 토라라고 한다. 이 말은 알 수 있는 대로, 그 사용의 모든 범위에서 약속과 요구가 곧 하나임을 말해주고 있다. 토라란 전통적인 신학적 용어에서는 율법과 복음의 통일성을 의미하며, 이는 시종일관하나님의 말씀 안에 놓여있다. 토라를 “율법”으로 표기하고, ‘율법’이라는 신학적 암호 아래서 구약의 계명들을 신학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성서가 묶어놓은 것을 서로 가르고 찢는 일이다. 바울의 말 가운데 복음이 언제 토라에 대립했던 적이 있는가, 오히려 이는 서로 팽팽하게 맞서 있는 율법과 약속을 하나로 묶어가고 있었기에 토라는 곧 복음의 한 형식이며, 한 형태이다.

2.3. 이스라엘의 한 분 하나님은 온 인류와 열방의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오직 한 분 뿐인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기 보다는 이 하나님은 온 인류와 열방의 하나님으로 이해되었다. 언젠가 한 백성과 일회적으로 관계를 가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열방과 만민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만이라는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과제로 놓여졌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 지에 대한 물음을 위해서는 놀랍게도 서로 다른 신학적 모델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는 다른 자리에서 다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짧게 토라와 관련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 창세기 9장에 홍수이후에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두 계명은, 동물의 생명을 보호하는 상징으로서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과 살인금지 계명이다.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에서는 7개의 계명체계를 발전시켰다(bSan 56). 이스라엘이 전체 토라를 짊어져야 하는 반면, 나머지 인류, 즉 노아의 후손들에게는 다만 이 7개의 중요계명, 즉 이른바 노아계명만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신약성서에서는 이러한 착상이 소위 사도회의에서 수용되었다(행 15:19 이하, 28 이하).

- 해석학적 근본문제와 여기서 주장된 이론을 위해서는 신명기 4장 5-8절에 쓰여진 상황이 중요하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것을(법과 규례)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chuqqim)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들을 가진 나라 중에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영원하신 하나님처럼 너희에게 가까이 하는 그런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tora)과 같이 공의로운 규례와 법도(chuqqim umischpatim)를 가진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본문에 놓여 있는 상황은 하나님, 이스라엘, 토라가 함께 묶여져 있으며, 다른 민족들과 함께 “우리”가 구경꾼의 역할로 놓여 있음을 확정하고 있다. 열방은 한편으론 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에 특별히 가까이 하심에 놀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론 토라에 기록된 법도와 규례의 정의로움으로 인해 놀라고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뗄 수 없는, 마치 토라와도 뗄 수 없이 엮어진 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혜와 통찰, 이성과 정의에 대한 경탄이 먼저 그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에 발전된 모델은 이처럼 계시와 경험을, 그리고 실험 가능한 성서적 전통을 서로 연결짓고 있고, 바로 이 경험을 통해 얻은 길들을 터주고 있다: 그래서 “다른 어디에서보다도 올바르게” 시험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놀라운 토라가 이방민족은 물론이고. 그들의 생명과 권리를 위한 척도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은 물론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이미 언급했던 것의 흐름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 마지막으로 이사야 2장과 그 평행 본문인 미가서 4장에 영향력 있고 힘있게 표현된 것처럼 열방이 시온으로 오는 표상에 대해 잠시 언급하려고 한다. 토라는 시온에서 나오며, 모든 열방은 여기서 지시를 받는다. 그 결과로 전 세계에 평화의 왕국이 이루어 진다. 근본적으로 이사야 42장 1절-5절의 말씀은 이러한 모델과는 달리, 여기서는 하나님의 종이 먼저 와서, 하나님의 토라를 기다리는 섬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전해준다.

3. 신약성서의 토라의 수용

제1장에서 우리는 이미 신약성서의 토라에 대한 긍정적인 기본적 언급들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렇게 구속 받지 않는 긍정적인 시각은 세부적으로는 아주 다양한 양상을 띄고 있다. 나는 특히 신약성서의 세 가지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모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 가지 모델은 두 가지의 기본적인 측면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 토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선물로서 그 어떤 제약 없이 전제되고 있으며, 논리적으로는 논증되어야 하고, 신학적으로는 전제되고 지속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유효하다.

- 토라는 예수의 사역과 하나님의 가까이하심을 통해서 예수께서 몸소 구체화하신, 그리고 그가 보낼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새롭고 힘있게 된다. 이전에 현실화되지 못했던 정의가 드디어 행해지고, 가난한 자의 보호, 예컨대, 폭력이 그치고 잘못된 신들 즉 맘몬과 욕심이 그쳐지는 것이 현실화 되었다. 요약하면, 토라가 드디어 성취되었다.

다만 세 번째 점에서 이들은 서로 차이를 드러낸다. 이러한 차이점은 다음의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즉, 우선 이스라엘에만 주어졌고 신뢰 받던 토라, 곧 한 분 하나님의 하나의 의지인 토라가 부활한 자의 경험들을 통해서 지금 이스라엘의 한 분 하나님 신앙에 이르게 되는 열방과 온 인류에게 지금 어느 정도로 유효한가 하는 것이다. 구약의 모델들에서 미래를 위한 희망의 표현이었던 것이, 지금은 실재적 현재로서 경험되고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델들은 성격상 구체적인 부분들에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것들은 이제 아주 구체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양한 해결책들이 전개되었지만, 그 중에서 단지 하나만 실제로 실행되었다.

마태복음

마태복음은 첫번째 복음서로 분명히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마치 신약성서에 이르는 현관처럼 무언가를 제시하고 있다.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예수의 첫번째 계획적인 연설의 시작에서 마태복음 5장 17절 이하에서 이미 위에 인용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인용은 신약성서가 토라에게 말하는, 첫번째 것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전체 복음서는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특히 마태복음 23장 1절 이하는 중요하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 이 본문은 놀랍게도 실제로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말씀이다. 이에 따르면 예수의 추종자들은 문서적인 토라, 즉 유대의 경전(타낙)에 쓰여진 것을 따를 뿐 아니라, 구전적인 토라, 즉 유대교에서 시대를 거쳐 전해지고 확장된 것도 지켜야만 했다. 율법교사와 바리새인들이 가르쳤던 것을 예외 없이 예수의 제자들도 행해야 했다는 것이다. 마태의 예수는 분명히 행함과 행치 않음을 비판한다.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2절) 그러나 그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 미쉬나에 기록된 것이다. 열방들과 관련해서는 28장 19절 이하가 복음서의 핵심을 쥐고 있는 결정적인 본문이다. 부활하신 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들 삼아 세례를 주며...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한다. 이 명령은 토라와 유대의 해석을 다시금 반복해서 지시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토라 없이는 읽혀질 수 없으며, 마태복음에 의해 전체 토라는 무제약적으로 모든 민족들에게도 유효한 것이다.

소위 안티테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면, 복음의 이해 안에서 토라의 유효성이 본질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최소화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진정 우리가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시려고 오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즉 토라를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진정으로 그것들 중 작은 것 하나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오늘 우리도 가르치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7절 이하가 진정으로 나머지 뒤따라 나오는 것들의 근본 토대라고 한다면,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48절까지의 언급들은 지금까지 생각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즉 예수는 안티테제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랍비적 원칙에 따라, 토라에 울타리를 치는(Abot I,1), 즉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을 이미 서두에서부터 막기 위해 울타리를 치는 작업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에게 이미 말했던 것처럼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그 전면에 이를 야기시킬 수 있는 화를 내거나 파괴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가인에게 던져졌던 질문이 여기서 다시금 수용되고 있다. “왜 너는 화를 내고 있느냐?” 분노가 격한 말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화해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립하는 것이다. 이혼금지명령에 대한 시각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남성의 성적 시각이 그 전면에 놓여 있다.

만약 예수가 인용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온법을 출애굽기 21장의 원래의 맥락에서, 그리고 당시의 유대적 해석이 오랫동안 자명하게 생각하고 행했던 대로, 즉 전체 토라에 유용한 권리 안에서 정당하고 합당한 보상에 대한 것이었음을 환기시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다른 쪽 뺨을 내미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어떤 경우에서든지 법적 수단을 통해 행사하겠다는 것의 포기를 의미한다. 만약 토라의 유용성이 전제되어 있다면, 다만 사소한 일상적인 상처에 대한 의미로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살인이나 폭력에서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다툼에 대해 융통성 있게 다룰 수 있는 가능한 범주에서 일상에서 서로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토라와 성서의 근본원칙 위에 악에 동일한 수단으로 맞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는 일상의 작은 법적 침해들에 태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시민 상호간의 교류에 더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마태복음 외에 다른 어떤 복음도 누가복음만큼 오해의 소지 없이, 명백하고 분명하게 토라가 예수의 등장의 토대이며, 그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힘과 유용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부정 할 수 없다. 이는 극빈자들과 빚진 자들에 대해서만 다루는 게 아니다. 이는 4장 18절 이하의 예수가 처음으로 등장해 행한 설교(Antrittspredigt) 에서 시작되는데, 여기에는 이사야 61장과 58장의 인용과 함께 간접적으로 신명기 15장 1절 이하의 면제년에 이루어지는 토라의 빚 탕감과 또한 레위기 25장의 희년이 언급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이제 “성취되기” 시작했으며 모든 빚의 탕감과 가난한 자와 빚진 자의 해방이라는 이미 언급된 주제가 이 복음서 전체에 뒤따르고 있다(11:4; 6:30,34; 12:33; 19:8; 6:24).

이제 누가는 공공연히 복음의 지속을 기록하고 있다. 곧 사도행전은 열방에게 전해지는 복음의 길이 로마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 열방선교(Völkermission)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급하게 제기될 필요가 있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게 된 열방의 사람들은 전체 토라를 무조건 다 지켜야만 되는가? 이 질문은 음식규정에서 아주 실제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사도행전 10장은 이런 규정이 어긋났음을 실례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특히 새로 생겨난 혼합된 공동체 안에서 공통성(Gemeinsamkeit)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범위의 한계는 어디까진가? 원칙상의 문제는 소위 사도회의에서 다루어진다(행 15, 특히 5절 이하, 7-11절). 해당되는 사람들은 19절과 28절 이하에 언급된 규정에 따른 이들이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은,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 피를 흘려서는 안됨,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해야 하는 것 등이다. 이것은 “필수적인 것(Notwendige)”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이러한 규정들은 멀리 보면 이른바 노아계약에 해당하는 것이고, 유대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해결책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는 분명히 초대교회에서 오랫동안 공공연하게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가가 단지 토라의 한쪽만 유효하고 다른 한쪽은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언급되지 않은 살해금지나 예수께서 누가복음 4장과 16장에서 토라를 갖고 가르치신 것처럼,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의 모든 가르침이 의심스러울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정한 것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공동체 안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이 서로 유익한 공동생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다루어 지고 있다. 여기에 공동식탁의 문제가 하나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규정들이 교회에 의해 포기되어졌을 때, 더 이상 그런 공동체는 없었으며,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공동체도 없었다.

바울

바울은 현대기독교를 토라와 분리시킨 주요 증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새로운 연구들이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오해의 산물이다. 바울의 토라에 대한 언급은 복잡한 질문에 대한 복잡한 대답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는 로마서에서 보는 대로, 최종적인 그리고 철저히 사고했던 포괄적인 대답을 따르고자 한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아는 대로 모든 인간은 죄인(1:18ff)이라는 것으로 시작한다. 곧 세상은 죄와 폭력의 통치 아래 내버려져 있다. 이것은 3장 14절 이하에서 구약성서의 인용구들의 고리들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으로 그와 대립하게 된 것이다: “21이제는 토라와 예언자들에게서 증거된, 토라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22곧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의 신실함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의니 아무런 차별이 없다. 23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에 빠져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빠져 있다. 24그러나 하나님의 친밀하심과, 속량함을 통해, 심지어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 안에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노라.” 이는 온 세계에 관철되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정치적 폭력의 세계 안에 있는 것처럼 개인의 마음 안에 있다. 비록 토라를 통해서는 아니지만, 드디어 정의가 지배하게 되리라는, 이러한 변화의 힘을 토라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는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진 새로운 시작을 통해서 왔으며, 이 변화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이 토라 없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그것이 토라를 극복했다거나 혹은 완전히 폐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31절을 보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토라)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토라)을 굳게 세우느니라.”

이상의 토라를 굳게 세우는 유형과 방식에 대해서는 로마서 8장 3절 이하의 구절이 특별히 중요하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토라의 의의 요구들을 우리를 통해 이루려 하심이라.” “우리”, 즉 메시야적 공동체를 통해 dikaiomata tou nomou 곧 토라의 의들이 드디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토라 안에 공의와 정의에 관련된 모든 것은 이제 드디어 실행될 수 있으며, 실행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목적이며 의도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의 구체적인 윤리적 강령들 안에서 골고루 펼쳐져 있으며, 이것들은 토라의 의미에서 결정되어진다. 이 표현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싸워나갔던 것들을 동시에 확고히 해 주고 있다. 즉 메시야 예수를 믿는 신앙이 이방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유대민족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남자들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게 아니다. 이에 따르면 창세기 17장의 berit milla (할례계약)은 여기서 말하는 dikaioma(의)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의를 관철하시려는 하나님의 길이며 결코 이를 포기하게 하는 구실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음식규정은 어떤가? 여기에 로마서 14장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진 질문들에서 보듯이 흥미로운 부분들이 등장한다. 바울은 이 질문들을 의의 척도로 판단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에 있느니라”(17절). 이것은 첫째로 공동체 안에 차별이 있으나(2절), 이로 인해 정죄해서는 안 된다(3절)는 것을 의미한다. 상호간의 인정, 친교, 서로간의 배려가 모든 것에 우선시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서로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다(13절). 음식규정의 질문에는 많은 것 만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이 걸려 있다. “음식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망치지 마십시오”(20절). 하나님의 사역과 그 외 다른 것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말한다. 그리고 이 일은 한 편을 위해서 다른 한 편을 희생하면서 실행할 때 파괴되고 만다. 성령과 그를 통해 역사하는 정의로움은 모든 것을 규정한다. 그러나 이 길은 분명히 언제나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균열은 로마서 9~11장을 보면 분명히 인지될 수 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전체 역사가 위태롭게 되었다.

토라와 기독교 신앙

모세와 이스라엘의 율법으로 맺어진 이방 백성들에 대한 관계와 연관된 세 가지 중요한 신약성서의 모델들 중 어떤 것도 기독교사에서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소위 율법에서 해방된 이방기독교라는 착상은 바울을 따르는 것처럼 믿어지고 있으나, 이는 그의 신학을 지나치게 짧게 이해했거나 곡해하여 상호간의 배려라고 하는 높은 덕목은 무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역을 의심스럽게 하는 것인데, 종종 너무도 dikaioma tou nomou(토라의 요구)를 무시해 왔다.

여기에서 토라에 대한 시각과 관련해 제시된 모델들이 공통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단지 아주 부차적인 질문에서만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유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이 모든 입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할라카는 실제적으로 바울을 따르고 있다. 나아가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된 바울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정으로부터 우리는 아무런 진척도 없이 분명 그 무엇도 이끌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를 오랫동안 실제 따르지 않았다.

이미 말한 대로 토라의 절대적인 유효성만이 기독교 토라와의 관계가 기본토대가 될 수 있다. 이는 세 모델들 모두에 신학적인 토대가 되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우선 토라가 정경의 기본토대라는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우선은 구약성서 예언서의 처음과 마지막인 여호수아 1장 8절과 말라기 3장 22절 이하(한글성경 4:4ff-역자주)가 토라를 지시하고 있으며, 정경의 두 번째 부분의 시작인 시편 1편도 그렇다. 그런데 이는 신약성서의 정경의 윤곽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신약의 첫 시작 마태복음은 예수의 삶과 사역이 토라와 분명히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서신서의 시작 로마서는 그와 연관된 분명한 구절들로 이루어져 있다(예컨대, 로마서 1:2; 3:21,31). 토라를 경원시 하는 모든 신학적인 길은 동시에 신약성서를 떠나게 될 것이다.

프랑크 크뤼제만 (독일 빌레벨트 베텔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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