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신약개론!!

신약성경의 핵심 사상

하나님아들 2023. 9. 5. 23:53

신약성경의 핵심 사상             

 

I. 계몽주의 이전의 신약성경 이해

​중세기 캐톨릭 교회는 성서를 윤리교과서(생활교본)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근거는 교회의 전통과 교리에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성서가 기독교의 근거라고 주장함으로 전통과 교리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성서가 차지하게 하는 대 전환의 드라마를 연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 역시 성서를 교리 텍스트로 인식하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은 로마서의 내용에 맞추어 교리들을 배열했다(Melanchton, Loci Communes Rerum Theologiarum, 신학의 제요, 1521). 칼빈(J. Calvin)은 성서의 논리를 체계화하여 기독교의 강령(Institutio Christianas Religionis, 1536)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칼빈의 성서관 역시 교리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확보해 놓은 성서의 권위는 한 세기도 못 견디고 뿌리채 흔들리게 되었다. 그것은 계몽주의 운동의 합리성에 대한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학이 교리학에서 벗어나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신약성서가 학문의 혹독한 심판대 위에서 남기는 최후의 진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진술 속에 담겨진 진실의 핵심이 무었인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II. 게몽주의와 역사적 예수연구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는 다른 권위나 전통과 더불어 베이컨(Francis Bacon, Novum Organum, 신 기관, 1620)에서 시작해서 칸트(Immanuel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순수이성비판, 1781)에 이르는 17,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계몽주의 운동의 혹독한 도전을 비껴갈 수 없게 되었다.

이성을 절대시하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계몽주의의 공격은 권위와 전통을 타겟으로 삼았다. 따라서 권위의 상징인 성서는 가차 없이 심판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심판의 결과는 합리성을 입증하라는 요구로 나타났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이다. 그는 “예수의 교훈과 사도들이 전달해 준 교훈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음을 정당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은 신약성서의 비 합리적인 요소들을 제자들의 오류로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데 공헌한 셈이 되었다.

라이마루스의 말에서 용기를 얻은 신학자들은 신약성서 안에서 비 합리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합리적인 예수 자신의 교훈을 복원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예수전 신학)라는 이름으로 한 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나 쉬바이처(A. Schweitzer, Geschichte der Leben Jesu Forschung, 1906)가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Wilhelm Wrede, Das Messiasgeheimnis in den Evangelien, 1901)에 이르는 18, 19세기. 18세기 마지막 3반기에서 20세기초반 10년경까지.

에 진행된 모든 예수전기 재건의 노력들을 연구 검토한 다음 가혹할 정도로 비판을 가했다.

쉬바이처. A. Schweitzer, Geschichte der Leben Jesu Forschung, 예수의 생애 연구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6), 583쪽 이하 참고.

에 의하면 19세기 예수전 신학자들은 1세기의 유대인 예수를 19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교사로 현대화 하여 자기들 시대의 한 가운데에 세워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거기에 서 있지 않고 자기 시대로 되 돌아가 버렸다.

III. 묵시문학과 신약성서

​ㄱ. 쉬바이처와 묵시문학

​자기 자리로 되 돌아간 1세기의 유대인 예수를 쉬바이처. 김달수, 신약신학과 묵시문학(서울:나눔사, 1994), 40, 41, 52, 53쪽.

는 묵시문학가로 이해했다. 쉬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는 임박한 종말기대에 심취하여 성급하게 팔레스틴 선교를 위해 제자들을 파송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도록 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의 죽음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쉬바이처는 바이쓰(Weiss)와 소리를 합하여 ‘묵시문학 없이는 예수도 없다’고 소리첬다. 그들의 외침은 묵시문학과 예수 사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의 설교도 묵시문학적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이라고 혹평한다. 그것은 묵시문학과 예수사건을 동시에 평가절하하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콘스탄틴 이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이르기까지 묵시문학 극복을 과제로 삼아온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이 주장한 예수와 신약성서의 묵시문학론은 부정적인 반응 속에서 외면당해 왔다.

ㄴ. 케제만과 묵시문학

​1. 복음서와 묵시주의

그러나 그로부터 반 세기가 경과하면서 신약성서와 묵시문학 문제는 케제만(E. Käsemann)에 의하여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는 묵시문학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어머니라고 규정한다. 케제만의 이런 선언은 일단 쉬바이처의 입장을 평가하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묵시주의자로 해석하는 쉬바이처와 바이쓰의 입장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의사를 밝힌다.

그는 전기 예수와 후기 예수를 구분하는듯한 인상을 준다. 전기 예수는 세례요한파에 속한다. 이 때 예수는 세례요한처럼 임박한 종말기대에 사로잡혀 있었고 거기에 대비해서 징표를 받아두려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설교할 때는 묵시문학을 극복하고 세례요한과 결별한 이후이다. 그것은 후기 예수 시대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케제만은 이 때부터 예수와 세례요한의 설교 사이에서 본질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케제만에 의하면 요한의 선포 속에서는 하나님이 심판자로 온다. 그것은 철저하게 묵시문학적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친 아버지처럼 부른다.. ‘아바, 아버지’, 막 14:36 등 참고.

그는 창조자로써의 가까운 하나님과 심판자로써의 먼 하나님의 구별을 거부한다. 그는 하나님을 그렇게 구별할 경우 하나님의 신성이 파괴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자기를 내어주고 용서하고 도와주고 위로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멀리 있는 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설교의 강조점이요 세례요한의 선포를 뒤집어 놓는 점이다.

케제만에 의하면 예수는 회개를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노 때문이 아니고 은혜를 위해서다. 예수는 매일같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호소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형제애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형제 속에는 가장 먼 곳에 있는 사람이나 원수 까지도 포함된다. 케제만은 예수의 이러한 입장을 순종과 사랑만을 요청하는 종말론적인 메씨지로 규정한다. 그리고 바로 이 종말론을 가지고 예수가 묵시문학을 극복한 것으로 본다.

예수는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는 대신 병든자를 치료하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먹을 것을 주고, 죄인들을 용서하고, 고행을 하지 않고, 율법을 사랑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의인공동체를 따로 만들지 않는다.

예수를 묵시문학으로부터 분리시킨 케제만은 그것을 신약성서에 연결시킨다. 그는 신약성서를 예수의 선포에 묵시문학을 첨가한 초대교회의 산물로 본다. 예수의 단순하고 단편적인 민중의 이야기들이 묵시문학의 틀에 의하여 체계화 되었다는 주장이다.

예수와 신약성서를 분리시키는 케제만의 입장은 양식비평의 영향이다. 양식사 연구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예수와 신약성서가 분리되지 않았다. 그것은 쉬바이처의 시대이기도 하다.그러나 양식사는 신약성서를 초대교회의 산물로 보고 역사적 예수는 그 너머에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 불트만은 예수의 선포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는 역사적 예수와 신약성서(케리그마)의 불연속성까지 선언했다. 불트만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케제만은 예수와 케리그마(신약성서)의 차이점을 묵시문학으로 규정한다.

케제만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열광주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쿰란공동체로부터 극단적인 묵시문학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고 그것을 모든 죽은자들이 다 부활하는 일반 부활의 시작으로 이해했다.. 부활절 사건을 예수 일 개인에게 국한시킨 것은 훨씬 후기의 일인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 그들은 임박한 재림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재림할 예수를 사람의 아들의 오심과 동일시 했다.

공관서를 묵시주의와 직결시킨 케제만은 요한복음은 다른 시각에서 본다. 제4복음서의 경우는 약간의 편집에 의한 추가문들만 묵시주의와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제 4복음서 전체를 실현종말론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에 동의한다.

2. 바울과 묵시주의

​케제만은 바울서신과 묵시주의와의 관계를 주시한다. 먼저 그는 바울의 사도로써의 자의식을 묵시주의적으로 이해한다. 묵시주의가 바울을 열광주의와 실현종말론을 둘 다 동시에 극복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케제만에 의하면 바울신학의 핵심 역시 묵시주의적이다. 그의 신학의 핵심은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진술이다. 바울은 여기서 부활을 두 번째 아담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부활이 단순히 죽은자들의 소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부활사건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시작된 다음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가 자기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킬 때 발생한다.

따라서 두 번째 아담과 연결시키는 바울의 부활론은 곧 그리스도의 통치를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그리스도가 통치해야 한다’는 명제는 바울신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통치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예비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이와같이 케제만은 바울이 ‘세상의 주권자가 누구냐?’고 하는 묵시문학의 핵심적인 질문을 바닥에 깔고 자신의 신학사상을 전개한다고 하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케제만은 바울의 인간론도 묵시주의적으로 해석한다. 바울이 사용하는 ‘영(혼)과 육(몸)’의 개념은 인간 개체에 대한 규정이 아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속할 수 없다.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인 두 대결세력간의 쟁탈대상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원론적으로 대립해 있는 이들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두 세력(하나님과 세상) 중에서 어느 세력(주권)을 선택하여 줄서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다음 그 세력에게 복종하고 그것에 종속되어야만 비로서 한 인간으로 규정지워진다고 느낀 당대의 이원론적인 사회적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IV. 묵시문학에 대한 평가

​묵시문학은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독특한 문학 양식이다. 그것은 제 2이사야, 에스겔, 요엘,

즈가리아 등에서 단편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다니엘서에서 완성된 작품으로 나타난다.

묵시문학은 유대민족이나 그리스도교도들이 집단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 나타난 박해문학이다. 그래서 그것은 항상 박해자에 대한 저주와 박해당하는 자들에 대한 위로(희망)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박해자는 언제나 최 강대국의 정치권력이다. 따라서 묵시문학의 핵심은 항상 ‘세상(역사)의 주권자가 누구냐?’고 하는 저항적 질문이다. 따라서 묵시문학은 철저하게 정치적 저항문학이다. 권력으로 민중들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강대국의 정치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강탈한 악마들의 집단이다. 그러므로 때가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여 파멸시키고 통치권을 회복시킨다. 그런 다음 그 통치권을 ‘사람의 아들’로 대표될 수 있는 민중들에게 위임한다.

그래서 묵시문학의 내용은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1) 박해-강대국의 폭군에 의한 유대민중이나 그리스도인의 죽음.

(2) 일반부활-죽임을 당한자와 죽인자의 동시부활.

(3) 심판과 보상-가해자에게 내려지는 영원한 형벌과 피해자에게 내려지는 영원한 행복.

(4) 위임통치-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민중(남은자나 그리스도인)의 통치.

다니엘서에서는 위임통치가 ‘사람의 아들 같은이’에게 맡겨진다. 그는 시리아 쎌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4세에게 살해당하고 부활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상징하는 집단명사다(다니엘 7:13, 27). 그러나 요한 계시록에서는 위임통치자가 예수믿다가 죽임을 당하고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집단으로 통치한다.

우리는 여기서 묵시문학의 순기능(긍적적인 면)과 역기능(부정적인 면)을 구별해서 평가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묵시문학의 긍정적인 면은 힘없는 민중의 저항정신이다. 그것은 민족적 혹은 집단적 박해 속에서 저항할 힘도 없이 죽음만을 기다려야하는 무력한 민중들에게서 나왔다. 그것은 상징성, 암호, 환상성, 익명성등으로 가해자들을 따돌리며 자신들의 절망감을 극복하고 위로와 희망을 나누기 위해 형성된 민중들의 처절한 공감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묵시문학의 저항정신은 역사를 바꾸고 사회를 개혁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데 이밪이할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민중의 혼의 발로라고 평가할 만하다.

반면에 묵시문학에는 비판받아야 할 부정적인 요소도 분명히 있다. 그것은 이원론적인 우주관에 입각한 복수심과 저주로 일관되는 과격성이다. 묵시주의에서는 회개, 용서, 화해, 사랑, 개혁과 같은 단어들을 발견할 수 없다. 악에 속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 외에 회개의 기회나 용서는 절대로 베풀어지지 않는다. 그들과의 화해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보다 바람직스러운 사회에로의 개혁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미 죄악에 의하여 완전히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도 땅도 예루살렘도 고쳐서 쓸만한 정도가 아니다. 남은자와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천지 만물들에게는 오직 파멸 외에는 아무것도 용납될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악마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 자체가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으로 재창조 되어야 한다.

V. 쉬바이처와 케제만의 입장에 대한 반응

​교회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묵시문학을 극복하는 일을 신학의 과제로 삼고 노력해 왔다.. E. Käsemann, “원시그리스도교 묵시문학의 주제”, 신학사상 30, 1980, 가을호, 488쪽 참고.

그것은 묵시문학이 지닌 과격성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격성만 보았지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현장성(콘텍스트)은 간과해 버리려 했다. 묵시문학을 배출해 낸 유대민족과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민족적으로 집단적으로 생명을 파괴당하는 한을 문학으로 표출해 낸 것이다. 들어내놓고 저항할 힘조차 없는 그들은 천추에 사무친 그 한을 자신들끼리만 통하는 상징성과 익명성을 도입하여 지하문학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다라날 곳이 없으면 쥐도 고양이를 물어뜯는다고 한다. 유대민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하는 그들에게 쌓이는 그토록 억울한 한을 토해내면서 과격한 표현을 썼다고 해서 그들의 후예들마저 그것을 정죄해야 마땅한가? 왜 과격한 표현만 문제삼고 그 과격성의 원인에는 눈을 감아버리는가?

쉬바이처와 바이쓰는 1900년 동안 금기시하고 외면당해온 묵시문학을 토론의 장으로 끌어 올려 공론화를 시도했다. 그들은 예수를 묵시주의자로 규정하고 신약성서를 묵시문학으로 해석했다. 그들의 용기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 역시 묵시문학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장님 코끼리 만지는 정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와 신약성서까지 묵시문학에 대한 편견에 휘말려 동반추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을 쉬바이처는 ‘묵시문학적인 예수의 설교와 신약성서가 현대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고 하는 선언으로 요약한다.. C. E. Braaten, "묵시문학과 조직신학", 신학사상 30, 1980,가을호, 521, 522쪽 참고.

그래서 그는 케제만등으로부터 묵시문학적 토론을 통해 신약성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더 모호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김달수, 신약신학과 묵시문학(서울: 나눔사, 1994), 53쪽

케제만은 묵시문학을 신약성서에만 연결시키고 예수와는 분리시킴으로 해결책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예수를 묵시문학가로부터 분리해내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는 신약성서(케리그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기자들이 예수의 단순하고 단편적인 선포를 묵시문학의 틀 속에 넣어 체계화 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것은 묵시문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임에 틀림 없다. 우리는 여기서 케제만에게 몇가지 비판적인 반론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첫째 그는 예수와 묵시문학과의 관계를 시기별로 구분한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과 결별하면서 묵시주의를 완전히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설교 속에서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게제(H. Gese)는 ‘하나남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의 핵심 메씨지 속에서 묵시문학 전승의 핵심을 발견한다.. H. Gese, "즈가리아서에 나타난 묵시문학의 시작과 끝", 신학사상 30, 1980년 가을호, 419쪽.

예수에게서 묵시주의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둘째 케제만은 역사적 예수와 신약성서(케리그마)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불트만의 입장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예수사건을 초대교회와 기자들의 삶의 자리에서 신앙고백적으로 해석된 케리그마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 없는 신약성서는 있을 수 없다. 반대로 신약성서 없는 역사적 예수 재건도 안전히 불가능하다. 예수와 신약성서는 하나다. 단지 해석자의 삶의 자리가 요구하는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뿐이다.

세째 신약성서에 활용된 묵시문학의 틀을 부정적으로만 보아야 할 것인가? 신약성서는 묵시주의 중에서 부정적인 요소 보다는 긍정적인 요소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VI. 신약성서의 핵심 메시지

​ㄱ. 하나님의 나라 선포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주장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빼았긴 주권에 대한 회복의 선언이요 세상 권력(죽음의 지배력)에 대한 심판이다. 묵시문학에서는 불법적으로 통치권을 강탈해 간 사탄의 지배자들을 스핑크스적인 괴물들. 단 7: 1-8; 계 13:1-18 참고.

로 상징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묵시주의의 한 축인 최악의 저주가 퍼부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이원론적이고 부정적인 과격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선포에서는 이러한 적대적인 전제조건이 생략되고 없다. 복수심의 표출이나 저주 대신 귀신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킴으로 강탈당한 통치권에 대한 심판을 대신한다.

따라서 신약성서에서는 묵시문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인 심판사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예수의 부활 선포에서도 묵시문학의 일반부활에서 나타나는 심판 사상은 찾아볼 수 없다. 베드로후서 기자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b)라고 선언한다.

신약성서는 저주와 심판 대신 회개와 용서를 말한다. 묵시주의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회개는 세리와 죄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 용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조건적인 용서다. 그것은 알지 못하고 짓는 죄나 되풀이될 가능성이 없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회개를 전제로 한 용서다. 알고 범하는 죄의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이런 경우에는 절대로 회개 없이 용서해서는 않된다.

이렇게 해서 일우어지는 회개와 용서는 화해를 가져온다. 이것은 이원론의 극복이다.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원수가 되었던 사탄까지도 회개하면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모든 만물은 한 가족처럼 하나님의 품안에 머물게 된다. 그것은 곧 사랑의 공동체로 나타나게 된다.

ㄴ.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성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성장한다. 겨자씨비유(막 4:30-32; 마 13:31-32; 눅 13:18-19)가 그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씨들 중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가 싹이나서 성장하면 세상에 어떤 풀 보다도 크게 자라 새들에게 깃들일 장소까지 제공할 정도가 된다.

ㄷ.하나님의 나라의 자동성

복음서 기자들은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4:26-29)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자동성’이 강조된다. 농부가 씨를 뿌려놓으면 그 씨는 자동으로(αυτοματε) 싹이 나고 자라서 결실한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같이 하나님이 분배해준 메시야 기능을 가진 그리스도의 지체들에 의하여 싹이나고 성장하고 결실한다.

ㄹ.자동성과 윤리성

자동으로 성장하여 결실하는 모든 것은 평가(심판)를 거쳐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적절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식별하기 위하여 진 위를 가리는 단순한 평가 과정이다. 가라지비유에서는 ‘밀과 가라지’를 구별해 내는 평가다(마 13:24-30). 그물비유에서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가리는 작업이다(마 13:47-49). 열처녀비유에서는 기름을 준비한 처녀와 준비하지 않은 사람을 분리하는 일이다(마 25:1-12).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비유도 평가작업에 관한 것이다(마 25 31-46). 혼인잔치 비유에서는 예복을 준비한 사람과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는 평가다(마 22:11-14). 세례요한의 설교에서는 이 평가가 알곡과 죽정이의 구별로 나타난다(마 3:12; 눅 3:17).

ㅁ. 메시야기대에 대한 새로운 이해

​1. 예수의 자의식

예수는 “선생님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Συ ει ο Χριστος, 막 8:29b.

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자기를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호통을 친다(επιτιμαειν).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에게 기대하는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제왕 메시야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할 ‘사람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자 베드로가 심하게 항의하다(επιτιμαειν)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당한다(επιτιμαειν). 우리는 여기서 예수와 제자들의 메시야 기대가 서로 일치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가 생각하는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제왕 메시야가 아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가복음 12장 35-37절에서 정확하게 확인 할 수 있다. 거기서 예수는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율법교사들의 다윗메시야 교리를 반박한다.

예수가 생각하는 메시야는 ‘사람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이 다니엘서에서는 시리아 쎌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4세에게 살해당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가리킨다.. 다니엘서 7: 13, 27 참고.

요한계시 록에서는 예수믿다가 순교당한 후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계시록 20: 4 참고.

우리는 여기서 1인 군주로서의 그리스도 대신 집단그리스도론을 발견하게 된다.

2. 메시야직의 분배

최후의 만찬(막 14:22-26)에서 예수는 전무 후무한 만찬사를 한다. 그는 빵을 자기 몸과 일치시킨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다음에는 포도주를 자신의 피와 일치시킨다음 제자들에게 마시게 한다. 그 결과 예수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신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야 직을 나누어 가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지체로서의 메시야

바울은 지체론을 전개한다(고전 12:12-27; 비교 12:4, 5). 그는 동양인을 대표하는 유대인이든, 서양사람을 대표하는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회개하고 세례받으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의 지체가 된다고 한다. 교회 안에서 직책을 맡고 은사를 받은 자들(사도, 예언자, 교사, 기적행하는자, 병고치는자, 자선가, 관리자, 방언하는자)도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지체라는 것이다.

4. 메시야직의 위임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자신의 사명을 세 번씩이나 위임하는 내용을 보도한다(21:15-17).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예수가 자신의 메시야직을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위임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VII. 맺는 말

​신약성서는 묵시문학의 긍정적인 핵심을 이어 받았다고 말 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의 통치자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그런 다음 집단메시야론과 그 나라의 성장론 및 자동성의 논리로 통치론을 완성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그리스도에게 위임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 이해는 집단개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그는 ‘몸과 지체론’으로 구성하여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다.

공관서는 1인지배체제의 제왕적 다윗메시야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상징하는 ‘사람의 아들’로 교체한다. 다음엔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상징을 통해 메시야 사명의 분배를 암시한다. 제사복음서는 위임론으로 모든 사람이 메시야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 이렇게 해서 신약성서는 역사의 통치자를 만민이 참여하는 집단 메시야로 제시한다.

공관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에 대하여 비유들을 통해 보다 상세하게 알려준다. 첫째는 시기문제다. 그것은 실현종말론이나 미래종말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는 아주 작게 시작하여 가장 크고 완전하게 성장한다. 둘 째는 그 나라가 완성되는 방법이다. 그것은 군국주의적인 1인 지배체제에 의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제 각각 메시야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참여하여 이룩해 가게 된다. 그러나 자율적인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것은 알곡과 죽정이를 가리는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윤리적 평가(심판)를 전제로 한다.

끝으로 우리는 신약성서의 핵심 메씨지를 ‘역사의 통치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