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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하나님아들 2023. 7. 8. 17:16

구속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I. 말씀의 역사

 

현대 해석학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주제를 우리는 살펴보았거니와 우리는 진리 와 역사가 서로 떼어놓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서로 정당한 의미를 갖기 위 해서도 일치되어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와 관련없는 말씀을 생각할 수 없 고 어떤 결정적 말씀 의미를 강조함이 없이 신구약 역사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중 어느 하나을 희생하고 어느 하나를 절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변증법적 사고에서는 진리(곧 케리그마)를 찾는다. 하여 역사를 무시하 였다. 바르트는 우리의 현실 역사가 아닌 초월 역사 차원을 생각하는가 하면 불트만은 역사가 아닌 실존적 내면성, 순간적 결단을 강조했다. 대개 변증법적 신 학에서는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반면에 쿨만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행동 자체는 역사 안에서 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인간에서 나타나는 데가 없다. 역사는 언제나 그 깊은 본질에 따르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즉 역사(이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는 "하나님의 계시 행동들의 모든 (빠짐 없는) 표현이다.

 

모든 기독교 신학은 가장 깊은 본질에 따르면 성경적 역사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일상적 의미의 시간 사건들의 일직선 상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여기에 시간과 역사를 떠난 채 하나님을 생각한 여지가 없다"(O.Cullmann,Christus und die Zeit,Die Urchrist liche Zeit und Geschichtouffasung.1962 P.38).

 

여기서 쿨만은 구원사가 세속사와 같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행동들에 의해 때들 (Kairol)에 미치는 특별한 구속사적 순간들을 말하는 것인데, 시간선 에 있는 특별선택된 점들에서만이 구원사 노선을 구성하려는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좋으나 그가 양식 사학적 결과들을 받아들이므로 이 구속사 노선에 간격을 주는 점과, 어찌보면 역사가 계시의 별칭 (de noemer)처럼 주장하는 것 같다는 점이 문제된다. 여기에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실은 케리그마를 강조하는 자들이나. 아니면 역사를 강조하는 자들이 이상하게도 서고 배타적인 입장에서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판넨베르그는 케리그마와 역사를 연결시켜- 지금까지 말한 역사적 상황에서 나왔음을 우리는 보았거니와-" 구속 사건과 역사"의 첫 시작에서 이렇 게 말한다. "역사는 기독교 신학을 가장 포괄적으로 집약하는 수평선이다."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시야라는 말이다. 모든 신학적인 질문과 대답은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역사와 무관한 신학은 이미 무의미하다. 이 역사란 하나님과 인류가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며, 또 인류를 통하여 신이 자기 모든 피조물과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미래를 향해서 가는 것인 데, 그 미래가 이 세상에는 아직도 가리워져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이 미 명백해진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 전제다"라고 하고 있다. 이런 그의 포괄적인 사상을 입증키 위해 그는 폰 라드의 전승사를 도입하면서 본문 배후의 진리를 찾으려 했으나 거기에서 하나의 구속사도 얻어내지 못하고 단지 보편사를 것을 발견했다. 즉 본문 배후에 있는 것은 한 부분으로서, 사실 과 본문이 함께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학이라고 하는 것은 보편사적 관찰 의 한 부분이다.

 

본문과 독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빛은 위대한 태양 진로에 있는 조그마한 계기로서 인간사가 파악되는 곳이다. 여기에 Gadamer이 말하는 상호 작용이 관계성이 일어나는데, 이것도 역시 판넨베르그에게는 보편사의 한 부분 이라는 것이다.

 

II. 계시사 (Historia Revelationis)의 구조와 특징

 

이제 우리의 입장을 밝힐 차례인 것 같다. 오늘날 해석학이나 문제점들을 우리 가 믿는 성경이나 계시사를 아예 포기하고 시작하는 말들이다. 이런 파격적인 해석 태도가 우리의 신앙을 잠식할수록 우리는 우리 신행의 표준인 말씀이 말하 는 그 내용(구원사)과 그 계시 역사 구조를 알아 두어야 한다.

 

1) 우리가 계시사를 연구해야 할 목적은, 현대적 해석학의 도전에 응수하기 위해서는 물론이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자기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시 는 지식을 알기 위해서다. 계시사를 알려고 할 때 벌써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어 있는 그 자체가 성경에는 역사적 구조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구약자체 의 성격과, 이 구약의 신약과 가지는 관계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 가운데서 선택 받은 것, 율법 받음, 신정국으로서 확립, 예루살렘 성도와 가나안 땅 거주,바벧론 포로로 인한 이스라엘 민족의 단 절,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암흑기 등, 각 시대들이 해석학적 의미를 가진다.

 

이 모든 것을 같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으므로, 계시의 진리를 역사의 옷을 입고 있는 진리이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전체적으로 관련시켜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성경을 연 구할 때 나타나는 사실은 성경에는 진리들이 연속적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 이다.

 

즉 다음 것은 앞에 것에 연관되며, 이것이 또한 더 나아가서는 과정에서 구원 약속이 더욱 개진된다. 그러나 구약의 계시 개진은 어디까지나 예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실제로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계시 진리를 유기적 성장을 나타내면서 그 역사적 형편을 보 여주므로서 그 진리의 신성함을 나누어 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보여 준다. (G.Vos 성경 신학 P.9)

 

2) 그런고로 사건들- 역사의 전진이 대단히 중요하다. 구약에 이 사건들과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는 주의 말씀들은 그의 한 말씀에 속한다. 구약의 사건들은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대해서 말하고, 어제와 오늘과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 만들어지 고 지배당하고 인도되고 해석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는 자아 계시의 점진성으로 인해 계시의 전진이 있는 것이다.

 

이런 계시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덕들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논구하는 바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피조성과 타락성, 회개 와 여호와 경외에 대하여 알게 된다. 특별히 하나님 언약의 전지하는 계시 속에 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독특한 시대들이 있음도 보게 된다. (창3:9:12:17: 출3:19:34: 등 후시대에는 렘31: 등).

 

3) 우리가 계시 전진을 말할 때에 여러 면에서 역사 진전에 따라 발전적 면을 보여 주는 것을 참고로 한다. 예컨대 언어 개념들의 발전을 살펴야 한다. 언약, 죄, 인애, 영 등 언어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 오늘날 언어 개념 탐구의 기능성 과 방법론이 많이 제시되는 데 우리는 그 탐구가 어떤 특호한 신학적 전제와 연 관됨이 없다고 할 찐대, 그 언어의 의미들이 변천을 보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 여 James Barr의 The Samantic of Biblical Language (Oxford,1961)를 참고함이 좋다. 그리고 계시사 구분에 계시 수단들이 많이 참조된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씀 하심, 꿈과 환상 ,상징적 취급,문학 형식의 기능 (시,산문)지혜 문학적 성격 등 이런 구분들은 계시사의 발전이나 전진이라 할 때 이 말은 헤겔 철학적 진화론 적 발전 개념과 다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4)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생긴 사실들 - 구약의 세기들을 통해 그 사실들이 진 전되아온 그 역사를 우리를 계시사 (Hisoria revelatonis)라고 하며 계시된 역 사 (Historia revelata)또는 성경 역사 (Hisoria revelata) 또는 성경 역사 ( Hisoria biblica)라고 한다.

 

사실상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혹은 인간의 수단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분이시며, 자기 본질이 무엇인진를 자기 백성에게 알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과 진노와 심판을 과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은 혜와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 백성을 대항하여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시는 하나님과 자기 아들과 그리스도 영을 통해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전진하는 구원사에 대해서 말살 수 있지만 전진하는 계시사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되게 되었다. 우리 시대에 "전진하는 계시" 사상에 반대하여 규정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보통 말하기를 성경은 하나의 문서로서 이전 세대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경험하였는지를 확정해 주고 있고, 오늘날 우 리 역시 이웃과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같은 경험 범주에 속하면서 소위 "깊은 경험"을 한다고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사회적 변혁, 정치적 혁명을 치룬다고 한다. 소위 이 깊은 경험을 "계시 경험"이라고 한다. 이렇게 될 대에 우리는 계 시사란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왕국이 말과 행위 역사 속에 나타나는 분명한 통일성이 있 음을 천명하며, 그 통일성은 유기적 통일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유기적"이 란 말이 마침 꽃봉우리가 활짝 피어나듯이 어떤 생의 법칙처럼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작용은 계획적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척 척 이루어지는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 사이에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초인적 구원 작용이 역 사하며 태양이 어두워지고, 땅이 갈라지고 바위가 깨어지고 무덤이 열리는 하나님의 손이 있다. 우리가 구원사의 통일성을 말한다면 역사의 모든 계시들이 자기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는, 같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더우기 이 통일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과 죽음의 과정속에 수렴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다윗의 보좌, 성부의 오른편에 있는 (엡1:10, 20) 그리스도 안에 구원 사의 통일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명을 위임받았다.(행2:33-36). 이 성령을 통해서 이 새상의 길따라 역사하고, 인간의 시대를 통해 그의 영광스러운 출연의 날, 구원 사가 완성될 때까지 역사한다. 그런고로 구원사의 통일성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수없이 많은 어떤 때는 종잡을 수 없는 사건들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규제 되는 역사의 목적 지점에로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사의 통일성은 우리 인간의 이해나 컴퓨터 계산에 의해 기록될 성격이 아니라, 오로지 구원사의 조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백 안에서 찾아진 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적 신앙고백은 구원사의 파노라마를 어김없이 펼쳐 놓 고 있는 것이다.

 

계시사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 또는 원수에게 자기 자신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면, 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면을 인간과의 관계방도에서 자기 구원을 보내시는 사실을 강조할 때 이것을 "언약사"라고 한다. 여기에는 신앙과 불신앙, 사랑과 사랑의 배신, 희망과 절망의 역사를 보게 되 며, 시험, 의심, 유혹, 감사치 않음,좁은 소견, 우매, 자기 지혜, 하나님 계명에 반대하는 죄악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이 비참한 장애들 을 극복하는 길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모든 우여 곡절, 인간 사회의 굴곡의 불신앙에서도 자기 백성을 그 목적대로유지, 지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구원사를 언약사로 볼 때에 언약을 강조함으로 구원사 속에 있는 인간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구원사에 인간을 간과할 때에는 구원을 객관화시켜 버리는 결과가 된다.

 

인간 역사의 구체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는 분은 아니다. 구속사에서 우리는 많은 사실들을 말하게 된다. 사실 없는 역사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들을 추상적 개념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사실 그 자체 소위 순수 사실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실에 안에서 행동하며, 사실을 설정한다. 또한 사실을 간으로 부터 유리시킬 수 없다. 인간과의 교섭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말한다.

 

구속사에 는 인간존재의 복잡성에 하나님 자신이 개입하셔서 끝없는 인간의 이성 작용에 맞서서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우상 숭배, 형상 숭배나 주의가 되 못하도록 하여 주의 봉사에 헌신하도록 한다. 하나님 자신이 주의 백성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고 (히11:16) 높고 높으신 분, 영원히 좌정하신 분, 그 이름이 거룩하다. 하는 자 가 인간계에 내려 오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주하신다.(히11:16). 그리고 의 인을 위해서 한성을 예비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만큼 구원사를 근원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도 없다.

-최경복 희망광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