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주의와 율법주의
1. 현대 교회의 모습 이미 오래전에 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엄 부스는 앞으로 기독교가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예언 하였다. “다가오는 세기의 가장 큰 위험은 성령 없는 신앙,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회개 없는 죄사함, 거듭남 없는 구원, 지옥 없는 천국이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을 잘 드러낸 말 같다. 오늘날 기독교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양만 교인이지 진정한 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값싼 은혜’와 ‘율법주의’ 자들이 아닌가 한다. 2. 은혜의 의미 은혜란 오로지 선택한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 보내 주시고, 그의 보혈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죽어야 할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니 이보다 감격스럽고 귀한 것은 없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말끝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을 한다. 그런데 이 은혜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한국교회에서 신앙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려면 기도원이나 부흥집회에 가면 많이 만날 수 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큰 소리로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열렬한 신자들이다. 그리고 집회가 끝나고 나올 때에는 하나같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받아 구원의 기쁨을 그렇게 몸으로 표현했느냐? 그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중의 일부는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거나, 기복신앙이거나, 은혜를 받은 만큼 생활이 그리 좋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귀한 구원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여길 때가 많다. 한 마디로 이 ‘은혜’는 대가나 노력 없이 얻은 은혜로써 이미 계산이 끝났기 때문에 영수증만 제시하면 언제든지 공짜로 천국입국의 티켓이 주어진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죄 사함을 구하지 않고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죄를 끊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철저한 회개 없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를 믿는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흰 눈보다도 더 깨끗한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값싼 은혜주의자들은 내가 예수를 믿고 있으니 이제는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구원은 그렇게 ‘값싼 은혜’가 아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잘못 믿고 있거나 믿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시고 속죄양으로 죽으셨다는 성경말씀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며, 더욱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베푸신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라는 것이다. 그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①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 위에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시고 인간의 죄 값을 대가로 치르시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②또 그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③또한 그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교회만 가면 다 천국 가고 ‘주여주여’ 부르짖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3. 율법의 의미 율법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주신 삶의 지침서이다.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원리이며 규칙이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항상 거룩하고 완전한 계명을 늘 기준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자복함으로써 죄 씻음을 받고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교인들 중에는 ‘구약은 율법의 시대이고 신약은 은혜의 시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르시기를,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 5:17). 즉,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된다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만 되었다. 그러나 지키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 불가능함을 가능케 하여 천국에 가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완성을 가져오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은혜가 감사해서 주를 위해 율법을 지키며 생활하는 것이다. 최고의 경건은 계명 준수를 즐기는 삶이다. 율법을 무시하고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유도하는 종교는 사이비종교가 분명하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등 많은 언약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다. 그것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이 여러 가지 언약들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는 “약속의 언약들”(Covenants of the Promise)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약속은 단수로 되어 있고 언약은 복수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한 가지를 이루는 여러 가지 언약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가르침(언약)이나 나의 가르침은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준 언약과 모세의 언약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으로 볼 수 없다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 4. 은혜와 율법과의 관계 은혜와 율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은혜만 강조하고 율법을 지키려하지 않거나, 율법만 강조하고 은혜의 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는 볼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은혜는 공짜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에 조건 없는 은혜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씨 뿌림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목적으로 하는 투자다(마13:1-7).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과 철저한 계산이 강조된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적인 투자다. 투자라는 말은 거저 주어지는 공짜 선물이란 개념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물(은혜)을 받은 사람은 자발적인 고마움과 부채 의식을 갖게 된다. 은혜의 조건은 먼저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고(엡 2:9), 다음 조건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10절). 신약성경은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충성스런 삶을 요구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투자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자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이민규, 2014). <갈라디아서>는 신실함과 순종의 삶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갈 5:16).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갈5:21).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고 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신자의 특징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싫어하게 되고, 죄에 대해서 저항하게 되는 새로운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에게서는 죄와 투쟁하는 거룩한 삶의 새 질서가 시작된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아직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존 웨슬리가 가르친 것처럼 ‘완전성화’란 신자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그 어떤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완전하게 자신의 죄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전처럼 죄를 즐거워하거나, 무방비 상태로 죄에 끌려가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즐기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요 16:8).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알려져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과 상관이 없다거나 율법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과 그 도덕적 요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도덕 폐기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율법에 작별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존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를 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늘 회개가 따른다. 회개와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 한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신자는 그 결과로 삶 가운데 선한 행위를 보이게 되어 있다. 선행을 해서 좋은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 결과로 선행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선행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새롭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곧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생활인 것이다. 그런데, 선한 일에는 거창한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중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은 영역은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세속적인 일’과 ‘신성한 일’(거룩한 일)이 따로 있지 않다. 루터도,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아니라 설거지와 빨래하기, 낙엽치우기, 기저귀 갈기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정동섭 교수 : 기독교포털뉴스 http://www.kportalnews.co.kr에서 일부 인용) 그런데 문제는 오직 ‘은혜’만을 강조하다 보니 죄사함을 구하는 철저한 ‘회개’와 구원에 절대적 필수요소인 성령으로 거듭남과 거룩함을 등한시 하는 경향을 낳게 한 것이다. 그래서 노래 부르는 것이 ‘참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런데 입으로만 ‘참 좋으신 하나님’이시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실은 없고 입이로만 참 좋으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참 좋으신 하나님” “예수는 나의 친구”가 나오는 것이다. 성령 없는 신앙,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회개 없는 죄사함, 거듭남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말로만 성도이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장로 목사들이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5. 구원은 철저한 회개와 동시에 죄의 용서함이 따른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자는 구원은 반드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로움과 노력을 거룩의 중심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자리를 찬탈한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그들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순종한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다. 복음은 우리들에게 명쾌하고 분명하게도 가르치기를 "믿음이란 바로 거룩한 삶을 사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좋기 때문에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이다.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것은 ‘율법주의자’들 ‘형식주의자’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은혜를 부르짖든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닌 것이다. 자기의 감성이나 의지로 행한 것이다. 구원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다. 성령께서는 거룩하신 분으로 죄와는 절대로 함께 하실 수 없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제일 먼저 우리들의 죄를 철저히 회개시켜 주신다. 즉, 우리들의 본성이 추악하고도 더러운 죄로 오염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면서 철저히 회개시켜 주신다. 나는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마땅한 죄인임을 인식시키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깨우쳐 주신다. 이처럼 구원은 철저한 회개와 동시에 죄의 용서함이 따른다. 이것이 바로 ‘칭의’이다. 회개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성령으로 철저히 회개한 영혼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시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신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그리고 성령님이 내주하신 영혼은 이때부터 거룩한 길로 나아가게 변화시키신다. 여기서 칭의와 거듭남은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거룩함은 우리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계속되며 성장한다. 즉, 성령으로 거듭남은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거룩함은 우리가 천국에 입성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발전해 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 거룩의 정도가 차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거듭나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회개하고 죄를 단지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를 증오하고 혐오한다. 그리고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이 온전히 예수님만 생각하게 된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까지도 용서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 분만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면,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순간 순간 짓는 죄까지도 회개시키고 거듭나서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신다. 성령으로 철저히 회개한 자는 죄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킨다. 작은 죄든, 또는 부정한 생각이 떠올라도 금방 괴로워하며 주님 앞에 통회하고 자복하게 된다. 날마다 죄와 피터지게 싸우며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겨나가게 한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들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매 삶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능력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만을 사랑하고 그 분의 계명을 지키며 순종하고 그분 뜻대로 살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한국교회 장로 목사들 가운데 많은 비리와 부정과 불의와 다툼이 있다는 것은 바른 믿음의 소유자라고는 볼 수 없다. 6. 오늘날 기독교인의 모습 그런데 우리는 늘 ‘참 좋으신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좋으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활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신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아니라, 좋은 것만 주시는 하나님, 모든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으로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지나친 요구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부정을 저지르고 나서 탄로가 나지 않고 아무 일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공부를 못하는데 합격시켜달라고 기도 한다. 기복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분, 그저 좋기만 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 네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어. 장하구나! 천국에 들여보내주지” 이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 하나니”(말3:6)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신 말씀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며,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신다”(시편9:8).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셨다. 이로써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진리의 편에 서시는 분이시라, 대상이 누구든 간에 잘한 것은 칭찬하시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가리시지 않고 똑같이 응징하신다. 성도라고 더 봐주시거나 편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더 엄격하시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는 채찍질하고 징계를 하신다. 오늘날 교회 내에 주의 강단에서 들려오는 설교도 온통 세상적인 복, 축복, 성공 등 번영신학이 주류를 이루면서 듣기 좋은 설교, 귀에 거슬리지 않는 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가슴을 찢고 애통해 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라” 하신다. 값싼 은혜 주의자들은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행위는 단지 상급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구원받은 그 은혜만을 찬양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엄히 경고하시기를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으리라”(요한계시록 20 :13) 그리고 우리들에게 “좁은 문” “좁은 길”을 제시하시고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마22:14) 즉, 구원받은 자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우리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망하리라” (눅13:5)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 하셨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다. 이는 믿음보다 행함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소유자는 그 믿음의 열매가 행위로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역으로 말하면 믿음이 적은 자들은 그 행위 역시 좋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요한계시록에서도 “구원받아 입혀지는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19:8)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고 했다. 7. 한국교회의 문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잘못 믿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교회에서 목사 장로들이 교육을 잘못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합주의 신앙, 종교다원주의, 신비주의, 기복신앙, 이기주의 신앙이 판을 치고 있다. 사이비 종교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짜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기독교와 연관된 불미스런 사건들이 일 년이 멀다 하고 일어나 TV에서 수시로 방영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신앙으로 예수 믿으라고 설치고 다니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 일부는 도저히 기독교인이라고 보기에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시한부 종말론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기도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병이 들었는데 기도로만 고치려다가 죽고 만다. 안찰기도 하다가 사람들을 때려죽이는 일도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심지어 죽었는데도 하나님이 살려주실 거라고 시신을 며칠 방에 놔둔 목사도 있었다. 소금물로 병을 고친다고 떠들면서 돈을 버는 목사도 있었다. 물론 가짜 목사이다. 그런가하면, 방언을 가르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엉터리 예언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령하다고 해서 돈을 가지고 모여든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면 건강의 복과 물질적인 복을 받는다고 설교하는 목사들도 있다. 헌금을 많이 내면 그만큼 하늘의 복을 많이 받는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잘못된 설교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세상적인 복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이 정말 이런 세상적인 것이라면 아마 안 믿을 사람 하나 없고, 병들어 죽을 사람 하나 없고, 가난하게 살 사람도 하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맞지만,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의 믿음이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만 부르짖고 하나님 말씀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이들은 진정한 교인이 아닐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회개하고 거듭나(중생) 거룩하게 변화된 믿음을 인정하시고 구원해 주시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는 사람은 예수를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 신자거나 그저 아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 : 21)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 : 14 ) 8. 믿고 거듭나야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값없이 은혜로 주신 것이므로 우리들의 도덕적 책임을 면제 받는 것으로 단순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은혜를 입는 것이 건강하고 소원하는 자가 다 이루어지고 자녀들이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곤란하다. 물론 그런 것이 은혜일 수 있지만 그러나 은혜를 입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최고의 가치는 위엣 것, 신령한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물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신 것을 믿는다면서 속죄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럼 은혜를 은혜답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구원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롬 6:5-9) ‘참 좋으신 하나님’을 찾는다고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르짖는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산 자 같이 속죄하고 거듭나야 한다. 죄에 대하여 죽어야 된다. 불의의 병기를 죽여야 의의 병기에 대하여 바칠 수 있게 된다. 무덤에서 들어갔다 나와야 부활이 된다. 속죄의 영어 ‘atonement’는 ‘하나 되게 하다’ 또는 ‘화목시키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 흠정역(1611)을 비롯한 여러 영역 성서에서 화해와 보상이라는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또 속죄는 지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앤다는 뜻으로 희생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기독교에서의 속죄는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을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속죄는 죄를 뉘우침으로 하나님의 총애를 다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데 장애가 되는 죄를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이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완성시키시었다. 즉 그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 대속이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였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속죄를 강요하시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대사로 임명하시고 개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신 것이다. 속죄가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은 귀하고 귀한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드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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