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통주의와 기독교교육
<칼 바르트>
바르트는 칸트, 슐라이어마허, 하르낙, 빌헬름 헤르만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내재적 신학과 현실적인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빌헬름 헤르만의 말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영성은 현실로 반영되어야 한다.”
바르트는 제1차세계대전(1914-1918) 이후인 1919년에 로마서주석 1판을, 1921년에 로마서주석 2판을 낸다. 이와 같은 ‘로마서 주석’은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종교사회주의자’들 혹은 자유주의자들과는 반대의 노선을 제시하는 것이다.
1934년 ‘바르멘 선언’에서 바르트는 나치스에 대항한다. 당시 바르트는 키에르키에고르와 도스토예프스키, 니체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하여 합리적 변증법(헤겔)에 대항하는 듯한 ‘변증법적 신학’에 의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주장하고, ‘실존적 심판’을 주장함으로 자유주의적 세계관에 대하여 실존적 종말론에 입각하여 긴급한 신학을 주창하였다.
그의 명제는 이러하다. “하나님의 의지는 전적 타자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한다.” 즉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의 올바른 의지의 연장이 아님을 지적한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과 인간이 ‘종교적 감정’으로 연결되어있음을 이야기했다. 이에 바르트는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를 구분하며, 하나님의 의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됨을 이야기한다. 바르트는 종교적 체험을 경계하며, 경건주의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하나님 경험에 대하여는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그 쟁점을 둔다.
또 하나의 명제도 동일하다. “유한은 무한을 포착할 수 없다.” 동일하게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한다. 하나님의 뜻은 오로지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한하심이 되심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러한 신학방법론은 ‘위로부터의 신학’이라 칭할 수 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계시가 우리의 길이 된다. 이러한 계시는 ‘계시, 선포, 기록’으로 이해한다. 즉 계시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선포된 말씀인 설교와 기록된 말씀인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서는 ‘존재양태로서의 예수’를 이야기한다. 삼위일체를 위격이 아닌 ‘양태’즉 한 분 하나님은 세 양태로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이에 필자는 질문이 생긴다. 삼위일체가 아닌 존재양태의 모습으로 존재하신다면 네 번째의 양태모습 또한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험성 말이다. 어쨌든, 바르트는 단순히 양태가 아닌 ‘존재양태’라 함으로 이를 피하는 듯하다.
더불어 기독론적 일원론과 신앙의 유비의 방법론을 사용한다. 신앙의 유비란 스콜라의 ‘존재유비’와는 반대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가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기독론적 일원론을 주창한다.
이렇듯 바르트는 신앙에 있어서는 철저히 그리스도론을 추구한다. 더불어 그리스도적 공동체라면 시대에 침묵하고,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참여의 발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사회참여 ‘바르멘 선언’과 같은 삶을 보면, 세상에 동화되지 않는, 철저히 신앙적인 사회참여로, 세상을 ‘그리스도화’ 하기를 추구하는 사회참여임을 알 수 있다.
<브룬너>
브룬너는 부버의 영향을 받았다. ‘그것진리’와 ‘당신진리’의 신학방법론을 펼친다. 그것진리는 ‘나와 그것’으로 비인격적, 도구적인 관계를 뜻한다. 당신진리는 ‘나와 당신’으로 인격적 관계를 뜻한다.
그래서일까, 부버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나와 너’, ‘나와 그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부룬너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자들의 신은 ‘나와 그것’처럼 느껴진다. 신을 어떠한 객관적 대상으로 놓고, 도구화하는 철학적방법론을 펼쳤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더불어 신과의 관계가 없이 윤리적 잣대로 신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브룬너는 인간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브루너는 ‘최소한의 자연신학’을 이야기한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현상이 ‘일부 남아있음’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접촉지점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주장은 웨슬리와도 닿는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인하여 인간의 의지가 부분적으로 회복되었고, 이것으로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반면에 바르트는 “Nein" 그렇지 않음을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한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주권중심의 신학을 펼쳤다면, 브룬너는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주권에 반응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방법론을 펼쳤음을 볼 수 있다.
필자는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과 브루너의 ‘인간의 반응과 접촉’을 웨슬리식으로 같이 병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때로는 바르트와 칼빈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브룬너와 웨슬리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하여 살아가는 인간들의 책임과 반응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불트만>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의 종결을 선포했다. 역사적이라 함은 사실적 역사와 의미적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은 ‘사실적인 역사’로서의 예수를 파악하기란 어려움을 주장한다. 역사에 대한 모든 해석자는 ‘자신의 선이해’로부터 예수를 파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에 사람들은 ‘고고학, 양식적, 문학적, 사회학적 비평“으로 신약을 파헤쳤고,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대상에서 불트만은 신화적 세계관을 과학적인 세계관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며, 케리그마를 강조한다. 즉 예수의 고난과 부활사건이 중요하며, 신화적 껍데기를 통하여 그 알맹이인 신앙적 의미를 파악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비신화화’를 외쳤으며 신화적 세계관에 과학적 접근을 회피하고, 해석의 문제로 사안을 돌이킨다. 그리하여 양식비평과 해석학이 그의 주된 관심사가 된다. 본문에는 장르가 있고, 장르를 통하여 본문을 이해하여야 한다. 불트만의 저서 공관복음 전승사는 1세기 이야기로 가득차있다. 즉 성서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의 열심을 알 수 있다. 더불어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시작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심리적 해석학’ 즉 문법 뒤에 감추인 성서저자의 심리를 파악하여야 한다는 텍스트와 저자의 심리 간의 ‘해석학적 순환’을 이야기했다. 더 나아가 불트만은 ‘존재적 해석학’ 즉 성경이 저술된 당시의 역사적인 세계관 이해와 오늘날 실존하는 실존적 인간이해가 병행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이를 필자는 역사―실존론적 해석학(불트만)이라고 부르고 싶다.
<기독교 교육>
자유주의의 극단은 ‘교육에 의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까지 흘러갔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민주주의로 해석되고, 윤리와 원칙에 따르게 만드는 것이 곧 교육이라 보았고, 기독교의 역할로 보았다. 이러한 흐름에 니버도 있다.
쉘튼 스미스는 ‘신앙과 양육’이라는 책을 저술한다. 바르트의 ‘주어지는 신앙’과 자유주의의 ‘길러지는 윤리’를 종합한 것이다. 그럼에도 쉘튼 스미스는 인간의 경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경험을 계발하는 것보다 회개를 앞세우는 공헌을 한다.
랜돌프 밀러는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교육을 이야기했다. 교육을 ‘하나님의 오심’과 ‘인간의 응답’을 돕는 것으로 명료화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돕는 것이 교회교육이다.
루이스 쉐릴은 마틴 부버와 브룬너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선상에서 그는 인간존재를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이해하였다. 존재하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존재로 탈바꿈된다. 이러한 긴장감이 감도는 만남은 바로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바르트는 신앙과 문화를 조화롭게 해석하지 못했다. 정통주의도 그렇고 신정통주의도 동일하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학, 말씀과 계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에게 집중을 한다. 반대로 사회학적인 관점, 문화나 윤리,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는 관심이 적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정통주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와 문화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말해주지 못했다. 종교개혁 이후에 살아야 하는 삶을 말하지 못했던 것과 동일하다. 복음과 계시와 하나님, 이와 인간이 인간과 가지는 관계와 문화와 윤리, 삶들을 설명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과 목표가 될 수 있다.
<생각해보기>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은 교육양태에서도 그 내용과 형식을 좌지우지한다. 더불어 삶의 양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절대의지를 강조한다. 동시에 사회참여를 적극 주장한다. 그는 “시대적 사건에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그리스도적 공동체가 아님”을 이야기했다. 그는 신앙에 있어서는 비교적 보수적인 편에 속하지만 사회에 있어서는 시대적 선구자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했다. 실제로 바르멘 선언을 통하여 나치스에 대항하기도 했다.
나는 바르트의 말을 기억하고자 한다. “시대적 사건에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그리스도적 공동체가 아니다” 바르트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펼치고, 하나님의 의지와 초월성을 강조하였다고 해서, 이 시대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를 잃어가는 시대를 직면하였기에 ‘그리스도론적 중심의 신학방법론’을 펼쳤으리라 생각을 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가져야할 태도를 올바르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정통주의적인 인간의 유한함과 전적인 타락을 충분히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전적으로 타락한 사회에 참여하심을 뜻한다. 악을 토로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십자가로 로마와 악의 세력에게 대항하셨다. 유한한 인간으로 하여금 타락한 세계에서 거룩한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셨다. 이에 반해 바르트의 거대담론은 이러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삶에 대하여 무관심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의 저서 교회 교의학만 보아도 교리적인 이야기로 가득함을 볼 수 있다.
어쩌면 나 또한 교리에 갇혀, 세상을 돌아보지 못하는 삶. 세상과 동화되지 못하기 위해 발버둥친 삶의 노고에는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그로인해 다가오는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피폐함, 문화에 대한 정죄, 세상에 대한 무관심, 말로만 사회참여 등등의 단점은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개입하심이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인간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 신학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교육을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교회교육을 시행할 때 초월적인 하나님을 인간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저 멀리 그것진리로, 객관적 서술대상으로, 나와는 관계없는 신적 개념으로 치부되는 것은 아닐까. 오, 주님. 주님을 사랑하는 내용과 방법을 더더욱 알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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