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부의 주요 삼위일체론
< 차 례 >
Ⅰ.들어가는말 ------------------------------------------------- 1.
Ⅱ.천사론과 로고스론의 관점에서 본 삼위일체 ------------------- 2.
Ⅲ.이레니우스의 삼위일체
Ⅳ.역동적 단일신론와 양태적 단일신론 -------------------------- 3.
Ⅴ.터틀리안의 삼위일체 ---------------------------------------- 4.
Ⅵ.오리겐의 삼위 일체
Ⅶ,아리우스의 삼위일체(이단으로 정죄됨)
Ⅷ.아타나이우스의 삼위 일체 ------------------------------- 8.
Ⅸ.니케아종교회의 ------------------------------------------ 9.
Ⅹ.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ⅩⅠ.콘스타티노플 회의(A.D.381)---------------------------- 12.
ⅩⅡ.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확정된 삼위일체론 ---------------- 13.
A.일반적인 성격과 특색
B.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특징
a)절대 단일자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단일성과 동일성과 동등성)
b) 파견되신 성자가 성부보다 작지 않음
c)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안에서의 '관계 개념'을 통해 설명됨
d)성령의 이중 출원을 강조함
e)성령을 아들과 아버지의 결합시키는 상호간의 사랑으로 표현
f)삼위일체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인간 영혼에서 유비를 찾아 설명함
ⅩⅢ.결론-------------------------------------------------- 16.
참고도서 ------------------------------------------------ 17.
Ⅰ.들어가는말
오늘날의 개혁교회에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세 위격(preson)으로서 한 본체(essence)안에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 교리을 고백한다. 즉 신격의 내적인 인격적인 삶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영원히 공존하는 삼-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확정된 삼위일체가 교리화되고 공식화되기 위해선 많은 논쟁과 회의를 거쳐야만 했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삼위일체의 교리적인 발전은 다섯단계로 구별될 수 있다.
제1단계는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희랍철학의 로고스개념을 차용하여 설명한 단계이다. 두번째단계는 로고스 즉 아들의 영원한 출생(generation)교리가 확립된 단계이다. 오리겐은 그리스도가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신다(begotten)고 말함으로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계기을 마련하였다. 세 번째단계는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 본질의 신성을 가진다는 교리가 니케아회의을 통해 확정된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그 당시 아리우스파를 반박하여 성자가 성부와 유사본질이 아니라 동일 본질의 완전한 하나님임을 강조하였다. 네번째 단계는 한 본질(essence)안에 세 개체(hypostasis)가 있다는 단계이다. 갑바도기아 학파들은 하나님의 본성안에 세 개체가 영원한 구별로 존재함을 주장함으로서 개별성안에서의 통일성을 효과적으로 설명하여 사벨리우스적 오류를 극복해갔다. 다섯 번째 단계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이중적으로 발출(proceed)된다는 교리가 확립된 단계이다. 초대 교회사안에서 이렇게 삼위일체론이 발전되어가면서 구약의 네짝의 성서구절이 각 교리의 핵심적인 근거와 논거의 기반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주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교리의 성서적인 근거와 신학적인 정의를 제공하려는 기독교적 노력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적 존재로 말하는 최소한 네짝의 구약성서 구절들을 구별해낼 수 있다.
먼저 양자채택구절(adoption 시2:7)은 그리스도가 신적 존재가 된 특정한 시점을 말해줌으로써, 세례나 부활시에 인간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지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동일시 구절(identity 사63:9,사9:6,시96:10,시44:6,신6:4등))은 여호와를 주님(lord)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있다. 구별 구절들(distinction 시110:1,마28:19,창1:26-27등))은 한 주님과 또다른 주님을 동시에 말함으로써 양자사이에 약간의 구별을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파생구절(derivation 잠8:22-31)은 성부를 더 위대한 분으로 부르거나 성자를 천사, 로고스,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서 성자가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 논쟁은 이 네가지 핵심구절을 중심으로 해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이네 구절을 기반으로 해서 전개된 신론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교부들을 중심으로 해서 서술해나가고자 한다. 먼저 각 교부들을 역사적으로 배열하여 삼위일체론의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주시하도록 했다.
또한 각 시대의 주요 교부들의 핵심적인 교리와 사상을 알기 쉽게 소개하려고 노력했으며, 동시에 그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장점과 단점을 지적하였다.
신학의 핵심이며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삼위일체론이 이 소고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분명해지기를 기도드리면서, 모든 은혜을 넘치도록 주시는 영원한 말씀이신 주예수그리스도께 감사 와 영광을 돌린다.
Ⅱ.천사론과 로고스론의 관점에서 본 삼위일체
(빗나간 삼위일체론)
A.천사론의 관점에서 본 삼위일체
고대 교회 초기에 히브리적 종교문화속에 익숙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을 이해하는데 구약의 천사론의 모델을 사용했다. 즉 성자 그리스도를 천사장 미가에롤, 성령을 천사장 가브리엘올 비교하여 성자와 성령이 성부보다 낮은 열등한 분으로, 종속된 분으로 묘사했다. '이사야의 승천'(외경)에선 그리스도와 성령이 성부께 경배하는 것을 묘사하고있다.
B.로고스론의 관점에서 본 삼위일체론
희랍 전통의 철학체계에 능숙한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을 이해하는데 로고스의 모델을 사용했다. 즉 성육신이전의 그리스도를 희랍철학에 있는 선재적 로고스(내재하는 신적 이성)과 비교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저스틴은 그리스도를 로고스와 비교하여 이해했는데 , 창조때에 로고스가 하나의 독립적 인격적 존재로 돌출되었다고 했다. 이 돌출된 로고스는 아버지의 첫 창조물로서 신적인 존재이지만, 둘째 계급의 신적 존재로 성령을 셋째계급의 존재로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초월적 신의 개념이 깊이 내재되어있는 이런 종속론적 신론은 안디옥의 데오빌러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우월성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와 하나님의 지혜인 성령을 하나님의 종속적인 도구들로 간주했다. 이런 희랍철학적인 로고스론과는 달리 정통 신관에선 로고스를 신적 이성으로 보지않고 인격적이고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현존하시는 성자로 보고있다.
Ⅲ.이레니우스의 삼위일체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을 대자적인 측면(본질적인 측면)과 대외적인 측면(경륜적인 측면)에 따라 설명하였다. 대자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을 모든 것의 아버지로서 말로 표현할수 없는 분이며, 그분안에는 영원전부터 그의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그분자신을 창조와 구속사역을 통해 나타내실때 아들과 영으로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아들과 영은 하나님의 손과 도구로서 하나님의 자아계시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구속의 경륜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이되시고 이 두위격에 성령이 동참하신다. 이레니우스는 아들론을 전개할 때 성령론과 결부시켜 전개한다. 만일 하나님이 이성적이며 그분의 로고스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분은 또한 영원한 조물주이기 때문에 성령(지혜와 동일시함)을 가진다. 세계가 만들어지기전에 하나님의 지혜인 성령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잠언3장19절, 8장22절을 들어 설명한다. 이 구절을 제시하며 말씀과 성령이 하나님의 손으로서 창조사역에 동참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본래 자신을 나타낼 수 없으나 말씀이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알리셨고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성령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쳐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버지의 지식은 아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지식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다. 아버지의 선하심에 따라 아들이 아버지가 예정하신 사람들을 성령으로 먹으시고 양육하시고 사역하신다. 우리의 성화는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이는 사람을 정결케 하고 그를 하나님의 삶에까지 올라가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지만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구속하실 때 그분의 말씀(아들)과 지혜(성령)으로써 사역하신 것을 강조했다.(경제적인 삼위일체론,ECONOMIC TRINITY)
Ⅳ.역동적 단일신론와 양태적 단일신론
1)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 세례,부활시에 인간예수님이 하나님의 지위를 받았다는 설)
2세기후반과 3세기에 그리스도와 하나님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하나님의 유일성과 통일성에 중점을 둔 연구)이 시도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역동적 단일신론이었다. 이 신론의 창시자는 테오도투스로서 하나님의 전능성과 세상의 창조하심과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까지 받아들인 정통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그리스도가 세레받기 이전에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고결하고 완전한 보통사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세례받을 때 비로소 성령이 예수그리스도에게 내려왔고, 그때로부터 그분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사역을 수행하셨다. 즉 테오도투스는 예수님이 성령이 내주하신 평범한 보통 사람에 불과하지 하나님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에비온주의자들도 예수그리스도를 평범한 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부여 받아 하나님의 사역을 행한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시편2:7("너는내아들이라,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을 언급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따른 후대의 대표자는 사모사타의 바울로서 그는 268년 안디옥회의에서 정죄당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통사람인 인간 예수님의 삶속에 역동적으로 현존하셨고, 하나님 그분안에서 일하셨으나, 그 예수님안에는 하나님의 어떤 참된 신전 본질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하나님의 신이 임한 평범한 사람으로만 받아드렸고 그분이 창조주하나님이셨던 것은 철저히 부인했다. 즉 사모사타의 바울은 인간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을 때 로고스가 성령수여를 통해 인간 예수님안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을 금지시켰고 그분을 아래로부터 온 평범한 인간이라고 가르쳤다.
2)양태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하나님은 한분이나 세형태로 나타난다는 주장)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역동적 단일신론관은 대조적으로 그 당시 상당히 널리 유포된 인기있는 가르침이었다. 이는 그 주장이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고있고 신성의 통일성이 잘 설명된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이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벨리우스로서 가장 완전하고 복잡한 개념으로 양태론을 발전시켰다. 이 사상학파의 본질적인 관념은 한분의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영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이 구분은 삼위격적인 구분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때에 적합하게 적용될 수 있는 이름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위격(PERSON)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 서로 다른 모습과 양태로 나나탄 한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자주쓰는 비유는 한사람이 집에서는 아버지가 되고 직장에선 일꾼이 되고 교회에선 성도가 된다는 것과 물이 고체와 액체와 수증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양태론에서 주장하는 또 다른 개념은 아버지가 실제로 아들안에 임재하였고 위격적으로 아들과 동일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와 구속을 위한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성부 수난설'이라 칭해지는 이 관념은 이단적으로 간주되어 양태론을 거부하도록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양태론은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며, 신성의 통일성이 보존되었다는 신학적인 발전이 인정되나, 몇가지 주요 개념이 결핍되어있다. 특히 성경안에서 세분이 때때로 동시에 나타나신 사실이 계시되고 있다.
예수님이 성령의 오심에 대해 말하거나,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말씀하시고 기도하시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예수님의 세례시에 성령이 아들에게 내려오시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Ⅴ.터틀리안의 삼위일체
터틀리안은 하나님에 대해 두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가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성을 추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창조와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자신을 계시하는 측면이다. 그는 이레니우스의 경세적 삼위일체을 지지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따라 말씀이신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구속을 성취하셨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경륜적인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의 측면을 조명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그분의 구속사역을 수행하실 때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와 구별된 다른 방법으로 사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삼위일체관은 첫째로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그분안에 말씀(또는 지성이라 지칭함)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했다. 즉 그는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 그신성안에 말씀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의 본성적인 존재의 삼중성이 창조와 구속에서 분명히 나타났고 말했다. 그는 세계을 창조하실 때 말씀을 통해 창조하셨고, 구속을 위해 말씀이 성육신했을 때 아버지와 다른 제2위격이 나타났고, 성령이 삼위일체 신관을 완성시켰다고 주장했다. 마치 빛에서 빛이 나타나고 물은 원천에서 나오고 빛은 태양에서 나오는 거처럼 하나님은 말씀을 내셨다. 섯째로 언제부터 하나님아버지가 되었으며 언제부터 말씀이 아들이 되었는가의 문제는 3-4세기 교부들의 어려운 난제였다. 터틀리안은 영원전에는 하나님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성육신 사건후에 말씀이 아들로 탄생되어 2위격이 되었고 아버지의 위치를 공유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영원부터 삼위격으로 존재하는 삼-일 하나님(오늘날의 정통 신관)과 부합되지 못한다고 비판받고 있다. 넷째로 그는 성령이 아들의 대표, 대리인으로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나타신다고 하였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다음에 있는 제 삼의존재로서 가지에 열매가 맺듯 뿌리에서 나온 제삼의 열매와 같다. 영도 한위격(person)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삼위일체(trinity)로 존재한신다. 이 셋(person)은 수적으로 구별되나 분리되는 않는 한 신성(essence)이다.
터틀리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면서 어떻게 서로 다른가를 설명하기 위해 본질(substance)과 인격(person)이라는 단어을 처음 사용하였다. 본질과 인격개념에 근거해서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통일성을 주장했다. 즉 세 개체(person)는 나눌 수 없는 하나로 있는 본질(substance)을 소유하면서 서로 방해받지 않고 3개의 위격(person)로서 존재한다. 이 위격은 신분과 실체와 권능에서 셋이지만 신성(godhead)에서는 하나이다.
"이 셋은 지위에 있어서가 아니라 정도에 있어서 구별되는 셋이며, 본질에서가 아니라 형식에서이며, 능력에서가 아니고 그 양상(양태)에서 나뉜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분 하나님으로서 여전히 하나의 본질과 하나의 능력과 하나의 신성(godhead)을 가진다"
다섯째로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따라 구속의 역사를 수행하시는 경세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을 주장하였다. 이 경세적 섭리에 따라 하나님에겐 말씀이 계신다. 하나님자체에서 나온 말씀은 구속을 성취하신 후,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서 보내셨다. 이 경세의 섭리에 따라 한 분 하나님이 셋으로 사역하시는 것이다. 이 셋은 구분되고 배분되나 분리되지 않으며, 한 실체(substance)가 각 위격(preson)에 분배된 것이 아니라 확대되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는 성경구절을 제시하며 이것을 논증한다. 이 하나됨은 수적으로 하나가 아니라, 실체에서 하나란 뜻이다. 아버지는 전체적인 실체(substance)이지만 아들은 그 전체적인 실체에서 유래되고 파생된 전체의 한 부분이다. 이 주장은 종속론적인 오류로서 후대에 비판받게 된다.
터틀리안은 삼위일체(trinity, 셋이면서 한 분)을 한 실체안에 있는 세위격(three preson in substance)이라 정의함으로서 삼위의 구분과 삼위의 연합을 동시에 설명했을 분만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실체(substance)와 함께 한다는 교리를 이끌어내어 후대에 천재적인 교부로 평가받게 된다.. 그러나 아들과 성령을 단지 창조와 계시의 견지에선 본 것과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의 실체(substance)의 파생된 부분(partion)라고 본 종속론적 견해는 그의 신론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있다.
Ⅵ.오리겐의 삼위 일체
오리겐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두 방면에서 고찰해서 이 두방면을 균형있게 유지시키려고 하였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의 후계자들은 둘로 나뉘어서 서로 반대하게 되었다.
첫 번째 방면은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들의 신성과 영원성을 아버지와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다. 아들이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버지로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커다란 오류을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들은 참으로 아버지로부터 낳으셨고, 그로부터 그의 존재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속의 관념이 아닌 영원한 것이며, 우리의 이성으로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시작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영원하실 뿐 아니라, 신성의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성의 본질상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아버지의 신성으로부터 아들이 나뉠수 있다(유출설)것은 신성을 물질적이고 지적으로 이해한 것으로서 큰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방면은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강조하는 방면이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구별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제한이라 하였다. 비록 아들의 본질이 아버지의 본질의 일부분인 것을 반대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강조하면서 제한의 개념을 사용했다. 아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이름과 얼굴이다. 아버지는 절대적인 '통일'이시지만 아들에게는 '다중성'(multiplicity)이 있으므로 피조된 세상과 인간과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는 본래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하면서도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하나님을 피조물과 관계를 가지면서 대화하시는 제한적 초월성을 띤 인격적인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결국 아들의 신성을 위태롭게 하였다. 이런 사상의 틀은 신플라톤주의 의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신학체계(로고스이론)인데 말씀(Word)을 초월해 계시는 한 분 하나님과 세계의 다양성사이에 있는 중간자로 간주하게 된다. 오리겐의 모든 삼위일체신학을 통해서 아들을 아버지보다 약간 열등한 어떤 존재로 보는 이런 종속론적인 경향은 그당시 유행했던 이단인 양태론적 군주신론과 같은 것으로 이해 될수 있었다. 오리겐의 신학이 이렇게 완전하게 이 두방면을 균형잡지 못하고 끝나게되자, 그의 후계자들은 성자와 성부의 동일적 영원성을 강조하는 우파(엘렉산더, 아타나시우스등)와 성부와 성자의 본질의 분리와 구분을 강조하는 좌파(유세비우스, 아리우스등)로 나뉘어 발전되었고 서로 격렬히 반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리겐은 성부을 모든 존재의 근원과 목표로 두었다. 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일과 그 영적 존재의 다양성을 중보하기 위해 아들을 가지신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표현된 형상이고 여러 가지 측면의 다양성이 만나는 곳이다. 이 여러 측면은 말씀이 가지는 영원성(지혜, 진리, 생명)과 성육신한 존재(치유자, 문, 부활)의 구체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시간의 범주밖에서 곧 영원안에서 그분의 영원한 사역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아들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 아들이 신성은 파생적(derivative)이지만 신적인 분으로 제2하나님이시다. 결국 그는 구별 구절들과 파생구절들을 통해서 로고스는 피조된 신적 존재이고 하나님께 종속적으로 계신다고 해석했다. 그는 잠언 8장22-31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전에 파생된 로고스(지혜)가 어떻게 일반적인 피조물과 구별되는 가를 설명했다.
또한 그는 성령을 말씀에 의해서 산츨된 가장 놀라운 존재로 보았다. 즉 성령은 아버지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케 된 것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그이 표현에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표현과 동일하지 않은 요소가 있다.
'파생적'이라든가 '제2하나님'이라든가 '모든 영적 존재의 으뜸' 등의 표현은 삼위하나님안에 등급이 있음을 암시하므로 종속론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오리겐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세 위'라고 하였다. 이 셋은 영원부터 특이한 실체(hypostasis)를 가지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와 구별되는 다른 실체를 가지지만 그들의 뜻에 있어서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의 형상이며 성부의 영광의 반영이라고 했다. 그의 그리스도론의 핵심은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 창조된 것(creation)이 아니라 탄생하셨다(begotten)는 점이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영원토록 낳으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신성(godhead)에 동참한다. 마음이 의지를 낳듯이 아버지는 아들을 산출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분열이 없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본체(substance)의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은 빛과 광도, 물과 증기와 같이 같은 본체에서 나온 다른 양식이다.
오리겐은 성령역시 아버지로부터 나왔고, 시작부터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피조물이 아니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영원하다고 했다.이 성령은 자체적인 존재성(preson)을 가지고 있을 분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것을 가지고 있다. 이 영은 아버지의 능력에 의해 로고스를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다른 모든 존재보다 영광과 위치와 능력과 권세가 높고 탁월하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사역을 위해 성령의 구체적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성령이 로고스를 통해서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말함으로써 경륜적으로 성령이 로고스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나타나게 되어 종속론적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오리겐은 삼위일체의 삼위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서로 다른 기능과 활동여역을 갖는다고 생각했다.(ECONOMIC TRINITY)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아버지로부터 존재를 받았으며, 믿는자들안에는 아들이 활동하시며, 이 합리적인 사람이 성결케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관여가 있어야 한다.
Ⅶ,아리우스의 삼위일체(이단으로 정죄됨)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나오신 것이 아니라, 무(無)로부터 창조된 피조된 신적 존재라고 주장하였고, 성자가 성부와 동일 본질의 하나님이심을 부인했다.그는 성자를 성부에 의해 무시간적으로 출생되었고 만세전에 창조되었고 세움을 받았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로고스가 개념상으로만 로고스로 불리 뿐이지, 그 본성과 진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그도 역시 피조물로서 양자 채택을 통해 단지 아들이라고 불릴 뿐이라고 했다 아리우스에 해석에 따르면 로고스가 만세전에 세움을 입은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즉 자신의 사역들을 위해 자신의 방식의 창조의 원리를 삼기 위해서 로고스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은 것이다. 비록 로고스가 피조물이지만 피조물들중의 하나와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은 로고스를 통해서 창조된 반면, 로고스는 하나님에 의해 직접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로고스는 무로부터 가장먼저 만들어졌던 것이다.
아리우스파들은 파생구절중의하나인 잠언 8장 22-31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피조물이며 만들어진 존재라고 하였다. 즉 아들은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자신의 본성과는 다르며, 그본질에 있어서는 성부와 다른 존재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그들은 동일시 구절중의 하나인 신명기6장 4절을 내세우면서 어떻게 유일한 한 분 하나님에게 성자란 또다른 하나님이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들은 아들은 변하기도하고 심지어 죄도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였다. 즉 아들의 본성이 원칙적으로 범죄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섭리에 따라 아들이 계속적으로 덕행을 행하실 것을 미리 아시고 죄를 범치 못하게 은혜를 부여해 주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해 알렉산더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하나님아버지는 탄생하지도 출원하지도 않으신 지존자이시지만, 아들에게 신적 본성을 전달할수 있고 실제로 영원안에서 전달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낳는 것은 아버지에게 있어 근본적이고 내재적인 성품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상관관계적이기 때문에 신성안에서 아들을 제거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제거하는 것이다. 만일 영원한 아들이 없다면 영원한 아버지도 없게 된다. 성자는 입양에 의해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아들이시며 아버지의 완전한 형상으로서 아버지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Ⅷ.아타나시우스의 삼위 일체
아타나시우스는 이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로고스로서 하나님의 불변적인 형상이라 하였다. 그분만이 유일하시며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우주의 위대한 보존자이며 질서의 근원이라 하였다. 이 말씀은 모든 피조물안에 포함된 본래적인 어떤 속성이 아니며 씨앗원리나 이성과 영혼이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만물의 질서와 보존을 산출하시는 하나님 자신으로서 선하신 성부의 말씀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세라비온이 히브리서1:14절과 아모스4장13절, 스가랴1장9절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된 존재로서 높은 위치에 있는 천사중에 한명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는 다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반박하는글을 쓰게 된다. 이 아타나시우스의 반박 논문을 요약하면 첫째로 성령이 피조물과 공통된 본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성(godhead)과 하나이시며, 피조물처럼 무(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영으로서 생명과 거룩케됨과 영화롭게됨을 성도들에게 부여해주는 영원하며 전능한 하나님이다. 둘째로 성령은 동질적이고 분할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본체(essence)을 가진다. 셋째로 성자가 성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듯 성령은 성자와 밀접한 관계을 가지며 성자의 영으로서 성자의 것을 가지고 증거하며 성자를 나타내며 성자를 영화롭게한다. 넷째로 성령은 우리 모든 사람을 거듭나게하여 하나님의 일에 동참케 하시는데 이런 점에서 성령의 신성을 추측할 수 있다.(고전3:16) 만약 영이 피조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실제적으로 동참할 수 없게 되어 신성과 멀리 떨어지게 된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신성은 영원부터 삼-일적인 상태로 계셨다. 하나의 동일하며 분할할 수 없는 본체을 가지고 있었다. 세 위는 하나이며 동일한 행동력을 가졌다. 그래서 아버지는 성령안에서 아들을 통해서 모든 것을 완성한다. 아버지는 창조와 구속을 말씀을 통해서 하셨고 말씀은 그영을 통해 실제적으로 수행되어졌다. 거룩한 삼-일 하나님은 분할될 수 없는 한분으로서 성령안에서 아들을 통해 아버지에 의해서 창조와 구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여섯째로 성서는 아버지를 수원이라 하고 아들을 강이라 하며, 우리는 성령으로 비유되는 물을 마심으로 적용한다. 또한 아버지는 태양으로, 아들은 빛으로 영에 의해 우리가 조명된다. 성령안에서 우리가 새 생명을 받을 때 주예수님자신이 우리안에 임재하시며, 우리안에서 사역할 때 아버지가 추진하신다. 일곱째로 성령은 아들의 참 형상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왔고 로고스(성자)에 의해 보냄받았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왔기 때문에(generation) 아들은 아버지와 본성이 같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아들과 아버지의 본성과 같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당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성자를 단지 하나님에게서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면서 아들이 창조되었다면 그분은 참 하나님이 아니며 우리의 구속주로서 자격을 갖출수 없다고 하였다. 아들은 창조된 것(creation)이 아니라 성부로부터 나오셨다.(begotten) 예를 들면 항아리는 그것을 만든 토기장이의 성분을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다(begotten)는 말은 아이가 부모의 실체(substance)로부터 ,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났다(begotten)고 말하는 것은 그분으로 성부와 동일 본질의 하나님이 되게 하는 것이지,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아들이 났다(begotten)는 말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실체(헬:homoousios)을 의미한다. 이런 아들의 나심은 인간의 생산(창조자 하나님의 존재후에야 그 존재의 생산이 가능한 피조물의 생산)과 같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의 속성은 무한하고 영원하므로 그의 생산역시 반드시 무한하고 영원해야 한다. 아들이 시간속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영원하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그리스도는 낳아진 것(begotten)이지 창조되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로 되어있다고 선포한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었고, 그 회의에서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당한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신학이 갖는 약점은 삼위일체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설명할수 있는 확정된 용어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 작업은 3명의 갑바도가아 교부들에 의해서 시도되어 완전케 되었다.
Ⅸ.니케아종교회의
이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우스파의 논쟁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가 어버지와 동일 본질인가, 아니면 아버지와 유사 본질인가에 있었다.
이것들의 차이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인가 , 아니면 피조물인가의 커다란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신조에서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상 하나라는 교리가 확정되었다. 즉 이 신조는 예수님의 본체와 하나님의 본체가 동일하다고 함으로써 삼위일체론의 교리 형성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어 주었다. 즉 이 신조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피조물이 아니라 성부하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동일 본질'임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전능한 아버지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드신 창조자이다. 그리고 한분 주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버지로부터 나신자이시며 독생자(only-begotten son)이시다. 즉 그는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오신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고 빛으로부터 나오신 빛이며, 낳으신자이고 만들어진 자가 아니다.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를 통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존재케 되었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아들이 무에서 지음받았다고 말하는자들이나, 아들이 아버지와 다른 본질이나 본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자들이나 아들이 피조되었다거나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는자들을 교회는 저주한다"
이 신조의 핵심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인 아들의 신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령에 관해서는 여기에 상당한 표현방식이 없었다.
니케아 결정이 교회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다음 두가지로 말해질 수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단이 극복되어졌다는 점이다. 주예수그리스도는 이단자가 말하는 반신반인(half-god)이거나 중간적 존재이거나 피조물이 아니다. 주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적 본질을 가지고 역사안으로 성육신하신 전능한 하나님자신이다. 두번째로 이 신조는 유사 본질(homoousios)의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들을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며 한 실체라고 한 표현에 있다.
이 신조는 아들의 신성과 신성의 통일성을 주장하려고 했으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에 대해서는 침묵을 유지하고있다는 사실로 사벨리우스적 양태론이라고 비난받기도했다.
Ⅹ.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A.바실의 삼위일체
바실은 삼위일체을 한 본질과 세 본체(one essence three hypostasis)이라고 정의 함으로서 통일성안에서 개별성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질이라고 선포한 니케아 신앙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위격이라는 오리겐 주의자의 신앙을 함께 융합시킨 것이었다.
바실은 본체와 실재(위격)의 차이를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간의 차이(인류와 개인등)로 이해했다. 각개인은 그들자신을 독특한 객개인으로 구별지어 주는 독특한 용모 또는 개성을 가지지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인류 공동체안에 포함된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도 각각의 개체(hypostasis)는 개체간 구별되는 고유 특징을 가지면서 세 개체 모두가 신성의 본체(essence)와 동일하다. 달리 말하면 '스미스'라는 사람의 본성은 '스미스다움'의 독특한 특성들로 나타나 보편적인 인류과 구분된다. 이처럼 성부하나님의 신성은 '아버지다움'의 독특한 특성들로 나타나지만 똑같은 한 본체(essence)을 가진다.
"본질과 본체를 구별하는 것은 유(general)와 종(particular)을 구별하는 것과 같다. 신격이란 하나의 실재(essence), 혹은 본질(substance)이라 할수있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각각의 고유 특성에 따라 구분되는 본체(hypostasis)을 가지고 있다.여기서 신격은 공통이며 아버지되심은 개별적이다. 즉 삼위일체은 개별성을 공통성에 덧 붙여 설명해야한다. 동일한 한 본질과 구분되는 세본체라고 고백하므로서 한분의 유일한 신격을 고백하게되고 통일성안에서 각자의 개체적인 고유성을 설명할수있게 된다. 반면에 본질(essence)을 본체(hypostasis)을 같게 취급하면 사벨리우스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
바실은 또한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consubstantiality)이라고 하였다.
한분이신 성령은 한분이신 성부와 아들을 통해서 연결되어있다.
B.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그레고리는 성령이 단지 하나님의 힘이나 어떤 중간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본체가 아버지의 본체와 동등함을 주장하므로 그들을 반박했다. 그는 성령이 하나님의 근원적인 영원성과 동등성에 있어서 다른 두위격과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성령없이는 신성은 완결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은 틀림없이 신이어야하며 아버지와 같은 본체를 가지신다.
그레고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의 교류을 세위격 상호간의 '관계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면 아들도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 아들이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면 성령도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한분이라도 시작부터 계셨다면 세분은 마찬가지로 똑같이 계셨다." 여기서 만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속성에 따라 아버지는 절대적으로 초월해 계시고 아들(말씀)은 이세상과 관계를 갖는 분이라고 구별지어 설명한다면 결국 아들이 아버지에게 열등하게 귀속되는 '종속론'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레고리는 삼위일체의 세위격의 상호간의 내적관계을 설명함으로서 이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삼위일체은 개별성 혹은 본체(hypostasis), 위격(person)에 있어서는 셋이지만 본질(essence) 혹은 신격(godhead)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이 신격은 초과되거나 결핍됨이나 혼돈됨이 없이 연합되어있고, 각 객체로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겐 한분 하나님, 즉 그분으로부터(of Whom) 만물이 기원된 아버지가 계시며, 한분 주, 그분에 의해서(by Whom) 만물이 존재하게 된 예수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리고 한분, 그분안에( in Whom) 만물이 존재하고 있는 성령이 계신다. 여기서 어디로부터(of), 의해서(by), 안에서(in)등은 본성의 상이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되거나 분리되지 않는 한분의 본성(essence)의 개체적인 위격들(hypostasis)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의 아버지로서, 기원이 없으신 분으로 다른 누구을 통하지 낳고 홀로 존재하신다. 아들은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나오셨다. 그러나 이 기원(origin)이란 단어가 시간적 의미로 해석되어진다면 아들 또한 시작이 없는 영원한 분이다. 왜냐하면 아들도 시간의 조성자이며 시간에 매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참된 하나님의 영으로서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데 아들의 출생(generation)과는 달리 발출(procession)에 의해 나오신다. "
각각의 인격은 언제나 다른 위격과의 관계안에서 정의 되고, 모든 신성의 원천과 근거인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의 특별한 특성은 비발생적이며(to be ungenerated)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발생되어지며, 아버지로부터 그분의 모든 본질적인 실재를 받는다. 성령은 아들안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과는 다른방법으로 나온신다. 그레고리의 이와 같은 삼위의 3가지 특성은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 모두로부터 널리 받아들여졌고 인정받았다. 즉 아버지의 특성은 탄생되지 않은자, 아들은 낳으신자(begotten), 성령은 발출(proceed)된 분이다.
C. 닛사의 그레고리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할 때 위격은 개별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이 세가지 표현은 세 양태또는 세 관계를 의미한다,
"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하고했을 때에도 각개인의 활동은 그들 각자의 독특한 환경과 이름이 방식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일을 하시든지 신성(GODHEAD) 이 함께 행하신다. 성부께선 성자와 협동하지 않고 독단으로 일을 하시지 않는다. 또 아들이 성령과 별도로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시지 않는다. 모든 사역은 성부로부터 기원되며, 성자를 통해 진행되고, 성령에 의해 완성된다. 이렇게 삼위일체은 각 위격에 따른 분리된 행위에 의해서 행동하지 않고 성부에게서 나와 성자를 통해 성령에게 이르는 선한 의지의 한 동작에 의해서 모든 사역은 이루어진다.
그레고리가 강조하고자한 것은 세위격이 절대적으로 동등한 영원성과 동등한 능력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인과 관계의 개념을 삼위일체에 적용한 것은 존재의 세가지 양태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원인이 되고 아들은 그 원인의 결과이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라는 관계와 '아들을 통해서'라는 관계의 결과로서 존재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삼위간에 능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어떤 등급이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ⅩⅠ.콘스타티노플 회의(A.D.381)
니케아 신조에서 성령에 대해서 성자만큼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자, 이 신조에 대한 결함을 완전케 하고자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그 회의에서 성령은 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ESSENCE)이심을 결의하였다. 또한 성부에 의한 성자의 출생(BEGOTTEN)이 영원한 출생이듯이 성령의 나오심(발출,PROCCED)도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ⅩⅡ.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확정된 삼위일체론
A.일반적인 성격과 특색
성 어거스틴의 입장은 전체적으로 니케아신조와 일치한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내의 위격들의 본질이 하나라는 것(consubstantiality)을 더 역설하며,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을 명확히 주장한다. 그는 위격(preson)의 관계(realationship)에서는 종속을 가르치면서 본질(substance,essence)과 각 위격자체에 대해서 고찰했을때는 종속을 부인함으로서 기존의 종속론적 오류를 일소한다. 그는 위격이 다른 위격과 동등하며 동일하지만 위격간의 관계에서는 성자가 둘째이며, 성부의 지위에 종속된다고 말한다. 이런 위격간의 관계의 측면을 고려할 때 성부는 신성 전체의 처음이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기 때문에 성부는 성자의 처음이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므로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처음이 된다. 그는 '처음'이라는 말을 '위격간의 관계'에 관해서만 쓰고 본질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이는 본질자체에는 처음이나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성부가 영원전부터 아버지되시는 것은 아들과 관계하에서이다. 아들이 없다면 아버지도 없으므로 영원한 아버지(성부)라고 할 때는 영원한 아들(성자)을 함께 의미한다. 아버지를 첫 번째 위격이라하는 것은 그분이 스스로 나셨기 때문이며(beget능동태) 아들을 둘째 위격이라 하는 것은 그분이 낳으신분(begotten 수동태)이기 때문이며, 성령을 셋째 위격이라 지칭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의 불어내심(spiration)으로 말미암아 나오신분(proceed)이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본질안에서 영원하며 필연적이고 구조적인 역사와 활동(본질적 삼위일체론, essenail trinity)을 설명하려면 태양에서 태양광선이, 빛에서 빛이, 샘에서 강물이, 마음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말이 나오는 것을 예를 들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위격성(personality)은 하나님의 본질의 삼일성에 의존하고 있다. 즉 만일 무한자의 내부에 구별이 없다면 그분은 자기를 정관(contemplate)하거나 자기를 알거나 자기와 교제할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격적이시라면 그분은 자기를 의식하고(self-conscious) 주체로서 객체를 정관하거나 사랑하거나 교제할수 있게 된다.하나님은 영원히 복된신으로서 자기 자신안에서 행복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영원전부터 자기의 자기 정관과 자기 소통과 자기 교제함으로서 행복하다. 그분은 사랑하고 알고 기뻐할 수 있는 객체를 우주안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안에서 위격간의 구별로 주체와 객체를 가지신다. 영원전부터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아셨으며(마11:27), 영원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셨고(요3:35), 영원전부터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요17:5). 창세전에 영원한 지혜는 하나님곁에 있어서 양육받는 아이같이 날마다 그분의 기뻐하신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8:3)) 영원한 말씀이 테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2) 독생자가 아버지 품속에 영원히 있었다.(요1:18) 이와 같이 신적 내부에는 교제가 있었으며, 그교제는 우주와 피조물에서 완전히 독립적이고 초월적인 소통과 행복이다. 이 삼위일체은 자의식에 필요한 모든 수단과 조건을 신적 본질의 내부에 가지고 있어 하나님자기를 자기와 구별하신다. 영원한 아버지는 영원한 아들안에서 자기를 보시며, 그 아들은 하나님의 다른 자아이며, 하나님의 본채의 형상이시다.(히1:3) 성경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서로 의식적으로 구별되며 서로 객체가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해준다. 한 신적 위격이 다른 위격을 사랑하며(요3:35), 다른 위격안에 거하며(요14:10,1), 다른 분을 알며(마11:27), 다른 분을 보내며(창16:7) 다른 분에게서 고통을 받으며(슥13:7), 다른 분에게 말을 건네며(히1:8), 다른 분에게로 가는 길과 방법이며(요14:6), 다른 분에 대해서 말하며(눅3:22), 다른 분을 영화롭게 하며(요17:5), 다른 분과 의논하며(창1:26, 11:7), 함께 계획하며(사9:6), 다른분에게 상을 주신다.(빌2:5-11,히2:9)
그는 신국론 11장에서 삼위일체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기술한다.
"아버지는 말씀을 낳았다. 그 말씀은 지헤이며 이 지혜를 통해서 만물이 만들어졌다. 그분은 독생자(only-begotten son)이다. 아버지가 한 분인 것같이 아들도 한 분이며 아버지와 동등하다. 성령은 아버비와 아들처럼 영이시고 동등한 능력과 힘과 권위를 가진다. 이 성령자체가 다른 두 분과 함께 실체를 같이하고 영원토록 함께 존재한다. 이 전체가 위격의 개별성안에서 한 분 하나님을 형성한다.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은 분할될 수 없는 한 신적 실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같이 전능하다는 것은 그 전능하심이 분할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각 위(preson)을 개별적으로 말할 때 그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각각 전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세분을 함께 말할 때 세 분의 하나님과 세분의 전능자가 계신 것이 아니라, 한 분의 하나님이 계신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것으로서 두 분의 거룩한 본성이다. 성령은 단지 신적 속성이 아니라 신적 실체로서 삼위 일체안에서 제삼의 위격(porson)이시다. 그는 또한 이사야 45장1절을 인용하면서 성부와 성자는 분할하거나 분리될 수 없는 분으로서 위격에서가 하나가 아니라 실체(substance, essence)에서 하나이심을 말한다. 이 삼위는 하나의 실체와 하나의 신성(godhead)과 하나의 뜻과 하나의 사역을 가짐으로써 하나이다.
B.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특징
a)절대 단일자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단일성과 동일성과 동등성)
그의 신관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절대자, 단일자, 분할될수 없는자, 모든 범주를 초월한 자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있다. 그는 삼위일체하나님의 통일성을 부각시킴으로서 기존의 종속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아버지가 선하고 아들이 선하고 성령이 선하다. 그러나 선이 셋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善)만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외에 선한 분이 없기 때문이다. 세위격의 실체는 하나이다. 각 위격을 구성하는 실체는 다른 위의 실체와 동일하며 하나이다. "신성에 의하면 아버지가 아들보다 더 큰 것이 없는 것같이 아버지와 아들의 실체를 종합해도 성령의 실체보다 크지 않다. 또한 삼위중 한 위가 다른 위격보다 작거나 크지 않다. 하나님안에서는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을 합친것보다 작거나 크지 않다."
또한 그는 삼위격이 상호 의존관계(interdepending)와 상호 침투관계(interpenetrating)와 상호 내주관계(interdwelling)에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세 위격이 동일한 한 본질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의 단일성을 분명히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사람이 한 인류에 속하면서 세 개인으로 나눌 수 있는 것같이 셋으로 나눌수 없다. 신적 위격의 각자는 실체에서 본다면 다른 위격과 동일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세 위격을 삼중적(triplex)이라 말해서는 안되며 삼위일체(trinity)라고 말해야한다. 하나님의 본성과 실체에 대해 말할때는 언제나 단수로 이야기해야한다. 삼위의 각 위격은 비창조적이고 무한하며, 영원하고, 전능하시지만, 그런 위격에 의해 형성된 하나님이 세분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분만 계신다. 삼위일체하나님은 단일적이고 분할할 수 없는 한 행동과 의지를 가지며, 그의 사역은 분할될 수 없다. 즉 삼위는 분리되거나 구분되지 않은 행동으로서 사역한다. 그러나 이런 삼위의 단일성을 강조한 나머지 세 위격의 고유한 기능이 부인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음과 같이 보충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이땅에 성육신하셨고 고난당하시고 죽고 부활하셨으며, 아버지는 아들이 그런 구속을 위한 고통을 당하도록 함께 역사하셨다.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인간으로서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합당했다. 이는 각 위격이 특유하고 구분되는 고유한 위격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각 위격이 개별적으로 사역하는 것 같으나, 근원적으로는 한 행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role of appropriation 위격의 전용 기능이라고 함)
b) 파견되신 성자가 성부보다 작지 않음
성자는 하나님의 형체로서는 성부와 동등하지만 종의 형체(성육신)에서는 성부가 더 크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형체이며 만물을 지은 말씀이며(요1:3) 아버지 하나님과 본성이 동등한 하나님(빌2:6-8)이지만 종의 형체를 취한 모양안에서는 성부보다는 작다. 성자는 자기를 스스로 비우셨기 때문에 인성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신성의 성자)보다 작으며, 성령보다 작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용서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마12:32) 하나님의 본체로는 성자가 성부와 하나이며 동등하지만(요10:30) 종의 형체로서 성자가 인성을 입고 오신 것은 그 자신의 뜻을 행하기위함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자의 뜻을 행하시기 위함이었다.(요6:38-39) 하나님의 본체에 따라서는 성부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분의 것이었지만(요16:15 내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 종의 형체(인성안의 그리스도)에 따라서는 그분이 말한 교훈과 말씀마저도 그분의 것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성부의 것이다.(요7:16).
c)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안에서의 '관계 개념'을 통해 설명됨
영원전부터 실체(essence)의 측면에서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이시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게 했기 때문에 아버지로서 구별되며,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탄생했기 때문에(generation) 아들로 구별되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의해 나오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 선물로 존재하신다. 또 그 성령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며 교제한다.
한실체가 세위격으로 구분되는 것은 오직 위격간의 관계안에서이다. 즉 셋이라는 것은 서로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신성은 영원전부터 낳는자, 낳으신자, 출원된 자로서의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셨다.
d)성령의 이중 출원을 강조함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왔으며 성령도 아버지로부터 왔으나, 아들은 탄생했고(begotten) 성령은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출원(proceed)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었을 때 성령을 출원케 하는 권능도 주었다. 그렇지만 성령이 두 근원이나 두 원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삼위가 다같이 아버지의 창조사역에 동참한 것같이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출원(PROCEED)케 할 때 같이 하셨다. 아버지가 최초의 근원이 되었고 그 근원에서 아들이 능력을 받아 성령에게 주었다.
e)성령을 아들과 아버지의 결합시키는 상호간의 사랑으로 표현
그는 삼위가 독자적인 위격을 갖는다고 하면서도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적인 사랑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하나의 기능체(bond)로 변경시켰다. 성령이 비록 이런 기능을 수행해도 그의 위격의 고유성이 흐리게 되거나 약화되면 현대신학자들이 말하는 이위일체론에 빠지게 될 수 있다.
f)삼위일체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인간 영혼에서 유비를 찾아 설명함
그는 삼위일체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에게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는다. 즉 그는 마음과 자아의식과 자기 사랑을 첫번째 조로 기억과 지식과 의지(의지는 기억과 지식을 결합시킴)를 두번째조로 사랑 하는자과 사랑 받는자와 사랑자체를 서번째조로 언급하면서 삼위일체을 유비적으로 설명한다. 이 삼자는 존재와 행위의 완전한 동시성안에 있는 계속적인 삶과 행동인 인간의 영혼을 형성한다.
이러한 유비는 각 각 그것이 세가지의 중심으로부터 조정을 받는 한 조화된 정신적 실체라는 관념을 나타내며, 또한 이 셋은 하나와 동등하다는 사상을 나타내다.
ⅩⅢ.결론
우리는 이제 아버지 하나님, 아들하나님, 성령하나님은 삼위이신 신격의 멤버라는 것을 보게되었다. 이것은 각 사람이 몸과 혼과 영을 갖고 있는 하나의 인간과 같다. 즉 성경은 아버지하나님은 사람의 혼으로 예표되고 아들하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예표되며, 성령 하나님은 사람의 영으로 예표되는 삼위일체의 신격이 존재하심을 보여준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보다 월등하시고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며 시작과 마지막이시며 세위격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전능자이시며 영원한 성령으로 우주를 붙들고 계시며 영광 가운데 거하시는 영원한 영으로서 모든 창조세계를 지탱하시며, 사람의 모든 생각을 다 이시고 모든 곳에서 선악을 감찰하시며, 육체로서 자기자신을 보이는 인간의 모양을 입고 나타나실 수 있고 우리와 같이 고통을 당하실 수 있으며 우리처럼 시험당하셨으며 우리처럼 피흘리셨던 이 위대한 창조주를 경배하며 찬양하며 기뻐하자. 그분은 이땅에서 고통을 받으셨고 더러운 우리 죄를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맛보시고 부활하시어 오늘날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하시고 거룩케하시고 의롭게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운행하시는 삼위일체되신 영원한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와 영광과 존귀을 돌린다.
참고도서
기독교 대백과 사전, 기독교문사
위클리프 신학사전, 지평서원
고대 교회 교리사(1), 자로 슬라브 펠리칸, 크리스찬다이제스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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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사, J. L. 니브, O. W. 헤이크, 기독교 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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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역사, 월리암 플래처, 기독교 문서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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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 이종성, 기독교 서회
조직신학(1), 김광식, 대한기독교서회
복음주의 조직신학(1), 에릭슨, 크리스찬다이제스트사
개혁주의 신학서론, 코넬리우스 반틸, 기독교 문서 선교회
바른 신학, 라보라박사, 웨스터 민스터출판사
예수와 삼위일체 하나님, 김영선, 기독교 문서 선교회
삼위일체론, 아우구스티누스, 크리스찬다이제스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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