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기독교 신앙관련 예화 모음

하나님아들 2023. 4. 23. 21:16

기독교 신앙관련 예화 모음

 
눈동자

사람의 눈동자는 엄청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안과 의사들은 우리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조절된다고 말한다.  가령 사람의 눈에 먼지나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가려고 하면 어느새 눈꺼풀이 감겨 눈동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런 작용이 가능한 것은 눈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람의 눈에는 자그만치 30만 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것을 눈동자가 감지하고 눈꺼풀에게 지시하여 자동으로 감겨 보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열악한 환경과 위기 가운데서도 눈동자처럼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신다. 하나님의 눈은 앉아서 천리를 본다는 신비의 눈보다도 더 뛰어나다. 이 눈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들을 보고 계신다. 특별히 사람들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 깊이 감추어진 동기까지도 다 헤아리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이처럼 위안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절반은 빛, 절반은 어둠

지구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절반은 항상 어두움 가운데에 있는 반면에 다른 절반은 항상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한쪽에서 잠자리에 들 때, 다른 한쪽에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열심히 일하는데, 다른 편에서는 곤히 잠들어 있다. 하나님의 종들이 선교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은 곧 밝아 올 새날을 위해 준비하며 쉬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전달되고 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복음 사역의 태양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이 얼마나 거대한 비전인가? 어떤 곳에서는 일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 일을 위해 준비하는 작업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항상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사실 우리는 해가 지구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지내는 일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해가 항상 있는 것은 해를 지으신 하나님이 항상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임을 입증하는 표적이 된다.


시온(Zion)

‘시온’ 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을 부르던 말이다. ‘시온’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막’ 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그렇게도 사모한 수도 예루살렘에 왜 하필 사막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사막의 노래’ 라고 불리는 이사야 35장 이 해답을 준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인간 구원의 역사를 ‘사막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는 것’으로 노래하고 있다. 환난과 죽음의 사막에 물이 솟아서 생명의 샘이 되듯, 시온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는 장소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막과 같이 황량한 세상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생명의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로 바꾸는 비결은 무엇인가? 부패하고 어두워지는 사회를 밝게 바꾸는 비결이 누구에게 있는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시온의 백성으로 삼아 주실 때 그들의 삶은 변화될 것이다.


당연한 말씀

고든(C.D. Gordon)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길가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성경을 읽곤 하였다.
하루는 한 젊은 신사가 과일을 사려고 그녀 앞에 섰지만, 이 소녀는 책에 열중해 있어 손님이 온 것을 알지 못했다.
“얘야, 너는 무얼 그리 열심히 읽고 있니?”
“네,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 젊은 신사는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소녀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니?”
“하나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신 걸요.”
“뭐, 하나님이 네게 말씀하셨다고? 말도 안돼! 너는 만나 보지도, 함께 이야기하지도 못할텐데!”
소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젊은 신사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누가 아저씨께 하늘에 태양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던가요?”
“그건 당연한 말이 아니니? 난 저 햇살이 좋단다.”
“그래요! 아저씨 말씀이 옳아요. 그렇게 아저씨가 태양을 느끼듯 저는 하나님을 느껴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저를 따뜻하게 해준답니다. 제가 이 성경을 읽어서 얻은 저 햇살과 따스한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제게 줄 분이 없지요!”


현대 과학으로 증명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예수의 부활이 현대 의학으로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발달된 의술은, 얼마든지 인간 복제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유전자를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다가, 백년 또는 천년 후에 꺼내서 복원하면, 그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겠는가? 이제 우리는, 부활 여부에 대한 의문은 깨끗이 버리고, 부활 이후에 있을, 주의 심판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냥 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신 불신(信 不信)간에 모든 사람은 부활하여, 주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 더욱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또한 과학으로 거의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디지털’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정보 처리 방식을 말하는데, 글과 그림, 또는 소리를 0과 1이라고 하는 숫자로 표현하여 계산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사람의 음성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단지 0과 1이라는 숫자만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다. 거꾸로, 숫자로 된 사람의 말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재현할 수가 있다. 
아무튼, 이런 과학적인 이야기는,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사람의 음성을 기계가 알아듣고, 그대로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자 그림을 그려라!’ 하면, 컴퓨터가 사자 그림을 그린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가 부착된 로봇에게 ‘커피를 끓여라!’ 하면 커피를 끓이고, ‘밥을 하라!’ 하면 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꿈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하실 때에, ‘말씀하신 대로 이뤄졌다’고 하는 성경 말씀은 진실이다. 
-자료제공 정수환 목사-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The end of self is begining of God)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


보이지 않는 힘(하나님의 섭리)

경제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마틴 후리드만의 「선택의 자유」라는 저서에 보면 이제 앞으로의 새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했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란 바로 새 시대의 가장 큰 힘이고 이 힘을 갖지 못하고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회는 이 지구상에서 살아 남지 못하고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도대체 이 보이지 않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국의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한스 싱거’ 박사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의 정체를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로 규명한다. 마음의 자세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생산하고 만드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것을 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업을 경영하고 운영하며 관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얼마만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깊고 따뜻한 마음씨를 쓰고 있느냐가 곧 보이지 않는 힘이 된다는 말이다. 결국 새 시대를 이끌어 갈 ‘보이지 않는 힘’이란 기계 과학 문명이 아니라 그 문명을 이끌어 갈 인간의 마음 자세인 것이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이란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자세라고 했는데, 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이란 곧 하나님의 섭리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가능한 인간관계

근세의 유명한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만남을 세 가지로 진단했다. 하나는 “그것과 그것”의 만남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차버린다. 남편과 아내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의 만남으로 전락하고 있다. 
또 하나의 만남은 “나와 그것”의 만남이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으로 대할 때 “나와 그것”의 만남이 성립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 관계는 “나와 너”의 만남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너를 인격으로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 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 주어도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인격적인 만남이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언제나 인간의 만남을 중매하는 하나의 촉매자가 필요합니다.” 부버는 그 촉매자를 “영원자 너”라고 이야기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원자 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인간 대 인간으로 부딪칠 때 상대방에게서 얼마나 많은 단점을 발견하게 되는가?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고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바른 인간관계는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에게 하루는 어떤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주님! 주님이 내 삶의 주인입니다. 주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라고 기도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천지창조]가 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되던 날이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다. 그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좌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입니다. 저분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일제히 일어나 하이든을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말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 이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렇다. 그는 평범한 음악가였지만 믿음의 눈을 열어 자기를 찾아 주시고 불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작곡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알렉산더와 예수
 
B. C. 350년경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리스도와 알렉산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젊은 날에 일을 시작하여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끝마쳤다.

알렉산더는 왕국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자로 태어났고,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좌에서 고귀한 왕으로 죽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조롱받는 왕으로 죽었다.
알렉산더의 일생은 위대한 성공으로 보이고,
예수의 일생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소유를 위해 수십만 명의 피를 흘렸다.
예수는 전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렸다.
알렉산더는 영광의 바벨론에서 죽었고,
예수는 수치의 갈보리에서 죽었다.
알렉산더는 모든 왕국을 정복하였고,
예수는 죽음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고,
예수는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다.
알렉산더는 역사를 만들었고,
예수는 역사를 변화시켰다.


예수님의 자리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미국에서 한 가정의 초청을 받아 가서 재미난 일을 목격하였다. 식탁에 의자가 죽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꼭 비워놓았다. 한 번은 내가 그 의자에 앉으려고 하니 그 집 꼬마가 앉으면 안 된다고 깜짝 놀랐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 의자는 예수님의 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정의 어린이들은 그 의자를 향해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들의 부모가 그렇게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이 집 어린 형제 둘이서 싸우다가 갑자기 형이 동생을 툭 치면서 “야! 조용히 하자. 예수님이 들으신다.”라고 말한다. 이들의 부모는 그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훈련을 잘 시켰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예수님의 얼굴

2차대전 말기 눈에 덮힌 중국의 오지를 의심에 잠긴 한 사나이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그는 말 등에 실려, ‘오오 주여, 주의 얼굴을 한 번 보기만 했으면 저는 믿겠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즉각 그의 마음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그곳은 눈이 녹기 시작하여 이곳 저곳에 검은 땅이 나타나 보기에 흉한 들판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려오는 명령을 따라 그는 말에서 내려 그 장면을 그의 카메라에 담았다.
돌아와 그 필름을 현상하였을 때 거기에는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과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원자탄을 막을 수 있는 무기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견한 이후,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고, 그로 인해 노벨평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지상에 평화는 없었다. 1945년에는 뉴멕시코 사막에서 태양의 천 배가되는 섬광을 발하면서 최초의 원자탄이 폭발되었다. 미국의 의회에서 오펜 하이머 박사가 이 무서운 무기에 대해서 설명했을 때 의원들은 그 것을 막는 무기는 없는가 하고 물었다. 그때 박사는 그 무기는 바로 평화라고 대답했다. 역사가 토인비는 문명이 다시 치료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열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화해가 되고 평안이 되고 평화가 된다.


세 종류의 인간
 오직 세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신을 이미 발견하고 신에 봉사하고 있는 사람,
아직 신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신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
신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신을 구하려고 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첫 번째 사람들은 도리에 살고 행복하다. 마지막 사람들은 어리석고 불행하다. 그 중간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도리에 맞는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1)

황해도 재령에 정찬욱이라는 장로가 있었다. 자기 집을 지으려고 기도하던 중, 장로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난 후에 내 집을 지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500석을 추수하는 부농이었던 정 장로는 1년 수확 모두를 바쳐서 성전을 지어놓고 자기 집을 지었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자기 교회 목사님의 생활비와 식미와 목화 100근씩 26년간을 드렸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했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 목사님을 존경하며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 장로는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섬기며 충성하는 이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2)

소련이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서 냉전 시대의 양극화 체제를 형성하며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천년을 넘긴 역사적 전통을 가진 러시아 정교회의 뿌리가 쉽사리 뽑힐 리가 없었으나, 그 냉엄한 철의 장막 아래에서도 신실한 기독교인들의 지하 교회가 살아 있었다.
어느 날 교인들이 은밀하고 깊숙한 창고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창고 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겁에 질린 교인들은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체념과 함께 단단히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련군인 두 명이 기관단총을 들이대고 뛰어들었다.
“꼼짝 말고 손을 들어라! 너희들이 이 곳에서 모인다는 소식을 벌써부터 듣고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 끝장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살기를 원한다면 이 곳을 빠져나가라. 나가는 자는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거부한 줄로 알고 살려 주겠다. 그러나 남은 자들은 다 죽을 각오를 하라. 모두 사살하겠다.” 군인들의 이 서슬 푸른 기세에 더러는 일어서서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하지만 많은 교인들이 요동 없이 담담히 앉아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대한 선택이 끝나고 난 다음, 그 군인들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 성도들이여! 용서하십시오. 여러분들이야말로 참 기독교인입니다. 우리 또한 기독교인입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려고 찾아왔는데, 행여 이 안에 비 기독교인이나 첩자가 있을지 몰라서 그들을 내보내기 위해 한 짓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가짜들은 다 나갔으니 안심하며 예배를 드리십시다.”
그리고 그들은 낮은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순교를 각오하고 그 자리에 남았던 참된 신앙의 사람들은, 뜨거운 감사의 기쁨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시험과 환난의 강한 바람 앞에서, 알곡과 쭉정이는 서로 구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한 사건이었다.


현재의 신앙

‘과거에 잘 믿었다’ 는 말이나 ‘미래에 잘 믿을 것’ 이란 말은 모두 가치 없는 말이다. 삼손도 한 때는 하나님의 일을 했고, 사울왕도 한 때는 예언까지 했고, 느부갓네살왕은 간헐적으로 신앙고백도 했고, 가룟 유다는 회계 일을 보면서 전도 사업에 시간과 정력 그리고 관심도 표현했고, 자살한 만한 위신도 알고 철면피를 부끄러워할 줄 알았다. 유대인의 아들로 신학교 1년 중퇴한 스탈린도 성경은 제법 알았고 논리도 정연했다. 과거와 미래가 없는 사람이 현재를 인정할 수도 없고, 미래를 기대할 인물도 못되나 미래에 자기 신앙을 거는 것처럼 자기기만은 없다. 신앙은 현재의 결단이요,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호언장담도 아니다. 신앙이란 오늘이란 순간에 생명을 걸고 금을 구하는 자가 험한 금광으로 돌입하듯 진주를 위해 해저로 다이빙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커스 연기자가 자기의 던진 그네가 반작용으로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 것을 믿고 공중 수십 피트에서 미리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이다.


독실한 믿음만 있으면

시골 교회에 믿음이 독실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군에서 제대하고 시골에 머무르면서 쇠퇴해 가는 농촌과 시골 교회를 위하여 미력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일거리를 찾던 중 야산을 헐값에 매입하여 그것을 개간하였다. 그곳을 개간하는 데 삽이 다섯 자루나 낡아버렸다. 청년은 그 개간지에 콩과 깨를 심었다. 그해 우로혜택(雨露惠澤)이 좋아 가을에 가서 큰 수확을 거두었다. 결국 그는 큰 밑천을 마련했고 그 개간지에 과수 묘목을 심어 수년 후에 큰 부농이 되었다. 청년은 빈약한 농촌 교회를 위하여 큰 몫을 담당하는 인물이 되었다. 청교도인들의 정신만 있으면 어디서나 또 누구나 다 성공을 할 수 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다음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이다. 이분이, 아주 어렵사리 신학을 마치고, 어떤 교회의 전도사로 있을 때였다.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만 갖고서는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따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신학은 했지만, 사명감이 그리 투철하지 못했었노라고, 그 목사님은 말했다.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다가 각혈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가 보니, 폐병 3기였다. 한쪽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병원에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럴 때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알게 된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이런 경우에는 큰소리 칠 수 없다. 주님 앞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고, 주의 심판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에, 사는 것도 주의 뜻이고 죽는 것도 주의 뜻이다. 
그러나, 그 전도사님은, 아내와 세 아이를 그대로 두고 죽을 수가 없었다. 당신 한 몸 죽는 것은 괜찮지만, 처자들의 앞날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기로 했다. 
한얼산 기도원에 올라갔다. 1주일 동안, 금식을 하며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마침, 추석을 앞둔 때이고 얘들도 보고 싶어서,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사모님이 그냥 두지 않았다. 당장 다시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계속하라고 재촉했다.
할 수 없이, 그 다음날, 전도사님은 다시 기도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정말 본격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예, 자리 뜰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기도만 했다.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을 때, 비몽사몽간에, 커다란 불 방망이가 자신을 향하여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그 불 방망이를 맞고 쓰러져 기절한 채, 꼬박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깨어나는 순간에, 시커먼 그 무엇이 자신에게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즉시로, 전도사님은 하산했다. 병이 나았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찍어 보니, 구멍이 사라지고 없었다. 의사도 깜짝 놀랬다. 그 의사가 바로, 그 전도사에게 사망 선언을 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어떤 걱정이나 염려를 하지 않았다. 주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한 까닭이다. 그리고, 주의 말씀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다. 인쇄소도 때려치우고, 목회에만 전념했다. 


신앙은 모험

신앙은 목숨을 건 모험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난관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때는 모험적 신앙이 필요하다. 청교도들은 범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들은 신대륙 아메리카의 건설자가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건너가 탐험하며 복음을 전파한 리빙스톤은 만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미개한 대륙에 폈다. 그는 그의 일생을 아프리카 선교에 바쳤다. 
중국 내지 선교에 담대히 들어가 선교회를 조직하고 복음을 전파한 허드슨 테일러는 아무 후원자도 없이 오직 하나님만 믿고, 그 믿음으로 중국 내지 선교를 성사시켰다. 이것은 모험적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홀로 아프리카 정글 속에 들어가 흑인들의 병을 고쳐 주며 봉사하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백인들의 흑인들에게 저지른 죄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선교와 봉사에 생애를 바친 성자이다. 신앙은 이 같은 모험을 감행할 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생의 험한 길을 무릅쓰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지 않는 신앙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수가 없다.


고문을 극복한 아들

루마니아 공산당들이 목사 한 분을 잡아와서 예수를 부인하고 공산당을 지지하라고 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극심한 고문을 참으면서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다. 
악독해진 공산당들은 그 목사님의 아들인 14살 난 알렉산더라는 아이를 데려왔다. 이 아이를 아버지 앞에 세워 놓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주면서 아버지가 항복할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아이의 참혹한 광경을 본 목사님은 견딜 수 없어서 “내 아이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마시오. 내가 항복하겠소.”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고개를 쳐들고 사력을 다하며 부르짖기를 “아버지, 아버지가 예수를 부인하여 내가 산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부인한 목사 아들이란 말을 듣기는 싫어요. 아버지, 예수를 부인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했다. 이 부르짖음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믿음에 용기를 얻어서 다시 공산당을 욕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화가 치솟는 공산당들은 어린 알렉산더를 더 심하게 매질하여 숨지게 하고 말았다. 이 귀한 어린 심령의 믿음, 얼마나 장한가?


하나님과의 관계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갖가지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던 중 한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도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그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다. 그 말은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다”라고 까지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믿음의 법칙

믿음의 힘은 핵 폭탄과 다를 바가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한다. 믿음으로 불치의 병도 치료되었고, 파도치던 바다도 잠잠해졌고, 죽은 자도 다시 살아났다.
다이너마이트를 건설에 사용하면 1년이 걸릴 난공사도 열흘이나 한 달에 해치울 수 있지만 그것을 잘못 다루어 폭발하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가져오듯이, 믿음의 힘 또한 가공할 만한 파괴력도 엄청난 창조적 능력도 지닐 수 있다. 믿음을 선용하면 개인적으로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인류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다이너마이트를 조심스레 다루어야 하듯이, 믿음의 힘 또한 신중하게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열매를 거둘 욕심에 너무 서두르지 말라.
훈련병에게는 익숙해질 때까지 실탄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빈총만 준다. 괴물처럼 느껴지던 총이 손에 익숙해지고 사용법이 능숙해져야 실탄을 주어 사격 연습을 시킨다. 총과 실탄을 처음부터 동시에 주게 되면 여기저기서 오발 사고가 잇따라 인명 피해가 속출할 것이다.
믿음의 힘을 너무 성급하게 발휘하려 들면 문제가 생긴다. 믿음의 힘 자체는 강하지만, 그 힘을 적용하기까지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힘을 자동차 엔진에 비유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엔진은 동력이다. 힘이 있다. 그러나 엔진만으로는 굴러가지 않는다. 타이어까지 연결되어야 하고, 연료를 넣어야 하고, 누군가가 운전을 해야 한다. 믿음의 힘이 실생활 속에서 금방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엔진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둘째, 이기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이익을 얻은 당사자와 더불어 불이익을 당하는 편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힘의 사용은 이타적일 때 오히려 유익으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는 나누는 자, 베푸는 자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신다고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아무리 아껴도 부족해지고, 충분하게 베풀어도 넉넉해지는 것이 물질 흐름의 원리이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4-25)
궁극적인 목적을 이타적인 데에 두면 믿음의 힘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이기적일 뿐이면 한계에 부디친다. 하나님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셋째, 믿음의 힘을 가두어 두지 말라.
권투 선수가 매일 일정량의 연습을 하지 않으면 금방 체중이 불어나고 둔해져서 선수로서의 수명이 다하게 된다. 
새 집도 사람이 살아야 수명이 길어지고, 비워 두면 빨리 망가진다.
아무리 비싼 기계라도 멈추어 두면 녹슬어 폐물이 된다. 그러나 계속 사용하면 성능이 더욱 좋아진다. 
믿음의 힘, 그것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능력이다. 그러나 간직하고만 있으면 그 힘은 점진적으로 위력을 상실한다. 그릇에 담긴 물도 시간이 가면 사라지고 만다. 
믿음은 활용하면 활용할수록 그 힘이 증폭되고 극대화된다. 군인의 무장이 강화될수록 적을 이길 승산이 높아지듯이, 극대화된 믿음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 원하는 대로 된다고 믿는가?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행동하라. 행동하고 또 행동하라. 믿음은 자란다. 원하는 바가 2배, 4배, 16배, 32배로 기하급수적 증폭을 하는 것을 당신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신앙의 뿌리

미국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매우 흥미로운 교육자료 하나를 개발한 적이 있다. 그것은 신앙인과 불신앙인이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에 대한 통계 수치였다.
위원회는 이 조사를 위해 두 사람의 표본모델을 선정했다. 한 사람은 프린스턴 대학 설립자이자 보수 신학자 에드워즈 요나단 목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뉴욕에서 살롱 술집을 경영하여 거부가 된 무신론자 마크스 슐츠였다. 위원회에서는 이 두 사람의 후손들을 5대에 이르도록 면밀하게 확인하고, 그 개개의 인적 사항을 컴퓨터에 입력하여 통계를 추출했다. 
에드워즈 요나단의 5대에 걸친 후손들은 모두 896명이었다. 그 중 선교사와 목사가 116명, 교사, 교수, 학장, 총장 등 교육자가 86명이었다. 이들 교육자 중에는 총장이 3명, 학장이 66명이나 되었는데, 그 총장 중에는 찬송가 246장 ‘내 주의 나라와’를 쓴, 예일대학의 총장 티모티 드와이트 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밖에도 부통령이 1명, 상원 의원이 4명, 문학가 및 문필가가 75명, 발명가가 21명, 실업가가 73명 그리고 장로, 집사가 286명이나 되었다. 
마크스 슐츠의 5대 후손들은 모두 1,062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평균 교도소 생활 5년 정도 한 사람이 96명, 정신병자 및 알코올 중독자가 58명, 창녀가 6명, 정부 보조 극빈자가 286명, 불학 무식한 자가 406명이나 되었고, 이들이 사고를 쳐서 연방 정부의 예산을 낭비한 금액이 무려 1억 5천 만 불이나 되었다. 
이 명약관화한 통계는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 사회, 나라가 자손 대대에 이르도록 복 받는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차원에서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도대체 무엇으로...
 
학생은 자신의 실수를 지우개로 지웁니다
의사는 봉합하고 붕대를 감아서 감춥니다 
건축가는 벽을 쌓고 칠을 해서 가립니다
농부는 가래로 흙 속을 묻어 버립니다
하지만 신앙의 실패는 도대체 무엇으로 덮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구원의 밧줄을 붙잡는 것

전에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서 배가 한 척 뒤집혔다. 그 배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을 구하려고 강가에서 밧줄을 던졌다. 그랬더니 한 사람은 그것을 붙잡고 살아 나왔는데 다른 한 사람은 밧줄을 붙잡지 않고 때마침 떠내려오던 큰 통나무를 붙잡았다. 그랬더니 그 나무는 사람을 실은 채 폭포로 떨어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그 나무토막은 강가에 있는 사람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나무가 크기는 했어도, 붙잡기는 좋았어도 구출 받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공로나, 희생이나, 수양이나, 지식은 다 좋아 보이기는 하나 구원을 받게 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의 위대한 손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믿고 행하라

화재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년이 불길을 피해 2층 지붕 위로 올라갔다. 밖으로 급히 피신한 아버지는 “얘야, 내려. 아빠가 받을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연기가 위로 치솟았기 때문에 소년은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 
“아빠. 보이지가 않아요. 아빠가 보이지 않아요.”
겁을 먹은 소년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년의 아버지는 “얘야, 용기를 내어 뛰어 내리렴. 난 너를 볼 수 있단다. 아빠를 믿으렴”하고 소리쳤다.
결국 소년은 아버지를 믿고 연기 속으로 뛰어 내렸고 살아났다. 믿음은 현실을 보지 않고 전능자에게 의탁하는 것이다.


결단하는 믿음

큰 양조장을 경영하는 분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남을 죄짓게 하는 이 사업을 그만둬야겠다 생각하고, 그 수입이 많은 양조장을 그만 두는 것도 보통이 아닌데 그는 은혜 받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도끼로 술이 들어 있는 큰항아리를 다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그 동네 도랑에 그날은 술이 콸콸 흘러내렸다. 동네 사람들은 아깝다고 했으나 그는 과감히 끊을 것을 끊었던 것이다. 후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운명하는 날 밤 동네 사람들이 보니까 그 집 지붕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더라는 것이다. 실제로 타지는 않았으나 물통을 들고 뛰어갈 정도로 불타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가 열심 있게 신앙생활을 하였던지 성령의 불이 크게 그 집에 임하였던 것이다.


믿음은 에너지 원천
 
믿음이란 곧 힘이고 에너지이고 능력이다.
내가 잘 아는 분의 아들은, 키가 170센티인 아버지보다 5센티쯤 더 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들은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165센티였다. 그런데 불과 1년 사이에 아들의 키는 아버지와 같아졌다. 
“두고 보셔요. 앞으로 1년 안에 5센티 저 자랄 테니까요.”
아들의 그 확고한 믿음은 그 아버지의 농담을 통해 나에게 전해졌다. 그때 내가 말했다.
“자네 아들의 믿음이 그렇다면 그렇게 될 테니 두고 보게.”
지금 그 아이의 신장은 175센티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우연의 일치일까? 결코 아니다. 믿음대로 된 것이다.
믿음의 적용은 창조적인 것에든 파괴적인 것에든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안 돼. 운이 없는가 봐. 이번에도 하나마나 실패할걸.” 이런 사람은 그의 믿음대로 실패의 삶을 산다. 그러나 “난 과거에 실패를 거듭했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 그러나 이번만은 꼭 성공할 거야. 성공을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데...” 하는 사람은, 그의 믿음이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면 반드시 적중한다. 
직장인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무능해서 영원히 말단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늘 그 모양 그 꼴로 지내게 된다. 나는 동료들 중에서 가장 먼저 과장이 된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정말 그렇게 되고야 만다. 왜 그럴까?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어떠한 믿음이든 언젠가는 행동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무능을 믿으면 진급할 수 없는 행동을 나타내게 되고, 유능을 믿으면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게 된다. 
뾰족한 처방을 하지 않아도 좋을 가벼운 질병의 환자에게 의사는 때로 증류수를 주사하기도 한다고 한다. 
“주사를 맞았으니 이젠 아프지 않을 것이오.”
의사의 이 말을 믿는 환자는 신통하게도 배앓이나 두통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의사 정말 용해.”
그러나 실상은 의사의 처방이 환자를 낫게 한 것이 아니라 환자의 믿음이 환자를 낫게 한 것이다.

 
깨닫는 그 순간

오랫동안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한 바 있는 허드슨 테일러에게 어느 젊은 중국인 신사가 찾아와서 물었다. “저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으로서 정식으로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아야 하며, 둘째 신앙의 연조가 몇 년이나 되어야 합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테일러 목사는 이렇게 반문했다. 
“램프의 심지가 얼마 동안 타야 빛을 내지요?”
“그야 물론 심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하고 신사가 대답했다. 그때 테일러 목사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이며, 또 몇 해 동안 교회 생활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램프의 심지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빛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연조가 별로 없다고 해도, 그리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시고 필요한 인간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겸손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남녀노소,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벌써 빛이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벌써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다?” 테일러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사는 기쁨이 가득한 채 돌아갔는데 후일 중국의 교회를 위해 크게 공헌하는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할까? 단지 가난한 마음으로 용납해 주심을 감사하며 나아갈 때 주님의 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을 전도한 머슴의 믿음

천원군에 살던 머슴 이씨는 가난한 중에도 열심을 다하는 주님의 성도였다.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예하면서 주의 일을 잘 받들었는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게 되면서 원하는 대로 교회 일을 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게 되었다. 머슴살이 첫 해 맥추 감사절이 되었는데 교회 예배에도 참예치 못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그 날 밤은 한잠도 못 자고 머슴방에서 울면서 기도하였다. “주여 나로 하여금 주일도, 절기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주인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가 되었다. 여름 보리 추수 후에 교회에서 지키는 맥추 감사절에 참예하고 싶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처음에는 거절당했는데 몇 번 부탁한 후에 허락을 받았다. 다음은 예물을 드려야 되겠는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서 다시 주인에게 말했다. 마침내 보리 한 가마를 주어서 그것을 져다가 예물로 바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주일 그 교회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주인과 머슴이 같이 절기를 지키는 주일이 되었고, 머슴 이씨에게는 적은 것으로 바쳤는데,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 주일이었다. 그 후에 이씨 머슴은 주인집을 다 구원했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져 교회를 잘 받들었다.


믿기만 하면

어느 전도 집회에서 전도자가 모든 집회를 끝내고 있을 때, 한 젊은이가 급히 달려와서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내가 구원받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에 그 전도자는 대답하기를 “젊은 친구, 너무 늦었어. 이미 늦었어, 이미 늦었다니까”라고 했다. 그 젊은이는 또 물었다. “이 전도 집회가 끝난 뒤에 왔기 때문에 늦었다는 말씀인가요?” 그 전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젊은이, 자네는 구원받고 싶으면 무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수천 년 전에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네. 지금 자네가 구원받기 위해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다만 무릎 꿇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이미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렸다. 그때 밝은 빛을 보았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


믿음의 대상은 나 자신

갑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하늘의 구름이 돈으로 바뀌어서 내 앞에 떨어졌으면 좋겠다. 만 원짜리로 바뀌면 적어도 1천억 원은 될 거야.”
그 앞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을이 갑의 말을 받았다. 
“일 천억? 와! 그걸 다 뭐해? 나에게 반만 주겠니?”
그러자 코웃음치는 갑.
“웃기지 말아. 왜 네게 반을 주니?”
“그럼 10분의 1만 줘.”
“안 돼.”
“야. 그럼 백 분의 1만 주겠니?”
“백 분의 1이라도 10억인데, 10억을 왜 그냥 주니?”
“그래 그럼 1억은 주겠니?”
“야 임마, 1억은커녕 땡전 한푼 못 준다.”
“넌 애가 왜 그리 인색하냐? 1천억이 공짜로 생기는데 1억 원도 못 줘?”
“이 벼엉신아, 너도 저쪽 구름을 차지하면 1천억이 될 수 있는데 왜 내 것만 가지고 그러니?”
우스개 소리 같지만 하나도 우습지 않다. 오히려 바짝 긴장된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갑처럼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을처럼 소극적이고 구걸형인 사람도 있다. 갑은 1천억을 꿈꾸는데 을을 고작 1억 원을 구걸하고 있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뜬구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같은 뜬구름이라도 두 사람의 입장은 대조적이다. 
갑은 구름 속에서 1천억을 잡을 수 있다고 상상할 만큼 꿈이 크다. 그는 구름이 1천억으로 변해서 자기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상상이 아니라 실감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니 출생의 순간부터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살기 위해서는 숨쉬는 일부터 내가 해야 한다. 누가 내 대신 숨쉬지 못하고 먹어 주지 못한다. 살고 싶은 한 내가 숨쉬고, 내가 먹어야 한다.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건강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를 믿어야 한다. 삶의 가치를 믿고, 내 앞에 닥칠 모든 일을 척결해 나 갈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존재 의의에 회의가 생긴다면 행복도 성공도 등을 돌린다.
사람에게 우연히 닥쳐오는 일이 있을까. 당신의 현재 상황은 당신의 지식, 감정, 성격, 믿음, 그리고 당신이 과거에 쌓아온 일들에 대한 총집계일 뿐이다. 또한 과거의 결과인 현재에 대해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 여하에 따라 1천억의 인생도, 구걸하는 인생도 될 수 있다. 성취의 인생으로 올라설 수도 있으며,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달콤한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쓰디쓴 인생이 될 수도 있다. 믿음 여하에 따라 능력있는 사람도 되고 무능한 사람도 되며, 성공인이 되는가 하면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당신의 친구가 1천억을 가졌어도 당신의 것은 아니다. 설령 1천 분의 1을 나눠준다 할지라도 그건 당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친구의 자선 여하에 따라 당신의 삶의 질이 달라질 수는 없지 않은가?. 
믿음의 대상은 당신의 부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다.

  

워너 메이커의 성공담

백화점 왕 워너 메이커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인터뷰하며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으로 하여금 오늘날 성공에 이르게 한 어떤 비결이 있었습니까?”
그때 워너 메이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11살 때 시골에서 올라와 작은 주일학교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이 성경을 사라고 해서 2불 75센트를 주고 붉은 가죽으로 장정된 성경을 샀다. 그것이 오늘날 나를 구원에 이르게 했고 오늘의 복을 받도록 했다.”


효과적인 성경 읽기를 위한 방법

① 기도로 시작하라.
성경을 읽을 때 당신의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② 그 날의 잠언을 선택하라.
매달 그 날짜에 해당하는 잠언을 읽어라. 예를 들어 그 달의 첫    날에는 잠언1장을 읽어라. 
③ 성경을 읽을 때는 연필을 이용하라. 
그 날의 잠언을 읽을 때 당신의 눈에 띠는 구절에 밑줄을 그어    라. 
당신에게 와 닿는다고 생각되는 구절에 동그라미를 표시하라.
④ 깊이 있게 읽어라. 
당신이 표시한 구절과 관련된 관주를 찾아 읽어라. 주석이나 해    설서 읽기는 자제하라. 
이렇게 성경 말씀을 찾으며 읽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말    씀으로 당신에게 이야기하실 것이다.
⑤ 당신이 읽은 구절에 관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기도로 하     나님께 아뢰어라.
  ♠ 이 질문이 어떻게 나에게 연관되어 있는가?
  ♠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바뀌길 원하시는 부분이 있는가? 
  ♠ 이 구절에서 내가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⑥ 성경 말씀 중 한 구절을 암기하라.   
⑦ 당신이 암기한 구절을 놓고 기도하라.
암송한 구절을 가지고 당신과 타인을 위해 기도하라.
⑧ 기록하라.
공책이나 성경에 있는 여백에 당신이 한 기도를 짤막하게 써 넣    어라. 그것 옆에는 날짜를 써라.
나중에 보더라도 당신이 기도한 것이 무엇인지 기억할 수 있도    록 쓰는 것이 좋다.
⑨ 응답을 기록하라.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 당신의 기도 옆에 메모를 하라.
하나님의 응답은 당신이 매일 기도하는 것을 도와 줄 것이다. 
잠언을 주제로 기도하는 것을 마친다면 시편이나 서신서를 같은    방법으로 읽도록 하라.


뽀나 목사의 ‘성경 예찬 詩’

내가 피곤할 때 성경이 나의 침대가 되고, 
내가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성경이 나의 빛이 되고,
내가 굶주릴 때에 성경이 나의 떡이 되고,
내가 무서울 때에 성경이 나의 갑옷이요, 
내가 병들었을 때에 성경이 나를 고쳐주는 양약이 되며, 
적막할 때에 성경에서 내가 많은 친구를 찾는도다.

만일 내가 일하려면 성경의 나의 기구요,
놀 때에는 성경이 나의 즐거운 풍류로다.
만일 내가 무식하면 성경이 나의 학교요,
만일 내가 빠지게 되면 성경이 나의 굳은 땅이로다.
만일 내가 추우면 성경이 나에게 열이 되며,
만일 내가 떠오르면 성경이 나의 날개로다.
성경은 나의 지도자, 의복, 피난처, 꽃동산, 태양, 샘물, 신선한 공기로다.
 
위대한 책이여! 
위대한 책이여!


성경을 생활 이념으로 삼는 미국의 대통령들

미국 사우스다코다주에는 러시모어라는 유명한 산이 있다. 이 산의 정상에 있는 화강암 벽에는 미국 대통령들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네 명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톤, 토마스 제퍼슨, 데오도르 루즈벨트 및 에이브라함 링컨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상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도 더 큰 것으로 워싱톤 대통령의 머리만 해도 건물의 5층 높이인 18미터이며, 그 전체 높이는 42미터나 되는 것이다. 이는 1927년에 시작하여 14년 이상 걸려 조각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조각상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 조각된 인물들의 위대한 점은 하나같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들의 생활 이념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조지 워싱톤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자리에서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면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서 “미합중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 있다”고 강조하였다. 링컨은 가난하여 제대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 성경을 그의 곁에 두고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을 썼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는 집무하는 책상 위에 늘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다. 루즈벨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 연소자로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말하기를 “어떠한 방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든지를 막론하고 그가 자기의 생을 참되게 살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연구하라고 권하겠다.”고 했다.


말씀(생수)의 기갈

21세기의 전쟁은 석유도 정치도 아닌 물을 둘러싼 전쟁이 될 것이라고 세계 은행은 벌써부터 으름장이다. 몇몇 통계가 그 심각성을 예고한다. 세계를 통 털어 물의 수요는 21년마다 배로 늘고 있다. 물 부족으로 국민 건강과 경제가 위협받고 있는 나라는 현재 80개국에 이른다. 세계 인구의 40%인 20억 인구가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다. 중동ㆍ북아프리카ㆍ중국 북부ㆍ인도 남부ㆍ멕시코 등지에서 물 부족이 날로 심각해지고 2025년까지 1인당 공급 가능량은 80%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식량 생산에 경작지 부족보다 농업용수 부족이 더 큰 위협으로 등장하고 있다. 세계 인구의 40%가 2백 50개 강 유역에 맞대 살고 있다. 흐르는 강물에 국경이 분명치 않고 상류가 하류 지역 국가간에 물을 둘러싼 긴장과 적대감은 갈수록 고조된다. 나일ㆍ니제르ㆍ티그리스ㆍ메콩ㆍ브라마푸트라ㆍ갠지즈ㆍ인더스 강의 유역에 국가들은 서로 많은 물을 끌어쓰기 위해 쟁탈전을 벌인다. 
물의 부족 상태는 우리에게 앞으로 많은 어려움을 안겨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갈함이 있으니 말씀의 부족이다. 성경은 이미 예언하고 있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

 

영혼의 생수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는 시원한 생수 한잔은 아침 기분을 특히 상쾌하게 해 준다. 아침 약수터에서 갓 받아 온 생수는 먼 수원지로부터 끌어와 수도국에서 처리를 거친 후 수도관을 통해 집까지 오느라고 많은 시간을 소비한 늙은 수돗물에 비해 얼마나 젊고 싱싱한가!
우리는 일생 동안 대략 물을 3만 리터 정도 마신다. 인체에 있는 동맥과 정맥의 총 길이는 10만km나 되며 그 속을 흐르는 피의 대부분(70∼80%)도 물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몸에 갖고 있는 물의 2%만 잃어도 갈증을 크게 느끼게 되며 갑자기 7%정도를 잃으면 혈액순환이 멎고 죽게 된다. 
물이 없으면 동물이나 식물의 그 어느 것이라도 살 수 없다. 물은 모든 호흡 있는 것들의 생명이다. 예수님은 영혼의 생수이시다. 일생 동안 마시고 마셔야 할 생수는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일생 동안 예수라는 생수의 물을 길어야 한다.
목마르고 목마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인이다. 그들은 과학과 학문과 이성의 노예가 되어 있다. 우리를 진정으로 채울 수 없는 것들에 목을 매고 가르치고 배운 바 대로 예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만약 이 땅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끝은 공허한 무덤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라를 일으키는 길

“나라는 망하고 민족은 분산되어 가는 이때 누구든지 이제는 방법이 없다. 이제는 왜나라의 정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부르짖는 사람이 있게 되고 본즉 모든 점에서 낙망하게 되었다. 선생은 분연히 우리가 낙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는 우선 정신상의 수양을 쌓아야 하고, 그 수양을 쌓으려면 예수교를 믿어야 한다 하여 동네에 예수 교회당을 짓고 목사를 모셔다가 설교를 듣고 교도를 모집한 지 얼마 아니 되어 수백 명의 교도가 모이게 되었다.”
위의 글은 남강 이승훈 선생과 함께 오산에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김도태의 증언이다.        
민족과 인간의 진정한 성숙과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다. 남강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다년간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거의 모든 시간을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로 보내었다. 신약 성경만 일 백 번 이상 읽었다. 남강 이승훈의 민족 역사에의 공헌은 이런 개인적 신앙의 성숙과 무관치 않으며, 이는 역시 말씀으로 변화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짜로 들을 수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가 모처럼 야구 구경을 갔다. 몸에 감기 기운이 있어 잘 아는 의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오렌지 쥬스를 많이 마시고 집에서 쉬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으로 식사를 하라”고 일러주었다. 이 사람은 돌아와 그대로 했는데 며칠 후 그 의사에게서 계산서가 날아왔다. 집에서 혼자 조치를 했는데, 계산서를 보낼 수 있느냐 하며 화가 나서 잘 아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다. 처방은 의사가 했으니 그 값을 지불해야 마땅하다는 말을 듣고 결국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런 후 얼마 있다가 또 계산서가 날아왔는데, 그것은 변호사로부터 온 것이었다. 전화로 상담을 했으니 그 값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모든 문제와 일은 돈으로만 해결되는 시대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새삼스러워진다.


공격당하는 성경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
세계 역사에서 성경만큼 많은 사람에게 애독되고 있는 책은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만큼 박해를 받아 온 책도 또한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와도 관련되어 있다. 성경은 전세계 사람들의 영혼에 활력과 위로를 주어 왔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쓰여진 성경에는 분명히 사람을 돕고 구원할 능력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이 성경을 부정하고, 추방하거나 소각 처분해 왔다. 성경은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이나 중국, 북한 그리고 기타 사회주의 제국에서는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성경이 소각되고 공격을 받아 왔다. 그리고 현재도 성경을 인쇄하거나 공개적으로 매매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자국 내에서 인쇄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서방측으로부터 많은 성경이 반입되어 전달되었다.


당신에게 성경은?

어떤 이는 “성경은 여행자의 지도요 순례자의 지침서이며 비행사의 나침판이요 병사의 칼이며 그리스도인의 헌장”이라고 했다. 조지 뮬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의 활력은 우리의 삶과 생각 속에 말씀이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와 비율이 꼭 같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할 때 섬기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빈혈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이다. 반면에 말씀을 보는데는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면 소화 불량증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이 양자 간에는 항상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관리 책임서이다. 위로, 힘, 훈계, 교훈의 말이 없는 곳이 없다. 무디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관하여,
“만일 인내가 필요하면 조용히 앉아서 욥기를 상고하라. 강경한 사람이면 모세와 베드로에 대해 읽어라. 무릎을 끓고 기도하지 못하면 엘리야를 보라. 당신의 마음에 찬양이 없으면 다윗에게 귀를 기울이라. 정치가라면 다니엘서를 읽고,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소망은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하고,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한다. 믿음, 소망, 사랑의 영양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성경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 5:39)


2000년간 베스트 셀러-성경

인류 역사상 무수한 책들이 쓰여지고 읽혀졌지만,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많이 번역되고, 가장 많이 읽혀지는 것은 역시 성경이다.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번역이 나오고 있고, 많은 경우에는 성경 번역을 위해서 새로운 문자가 만들어지기조차 한다. 많은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성경 배포를 금지했지만 실패했고, 심지어 북한 같은 사회에서도 성경이 새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물론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힌다 하여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다. 외설 잡지는 많이 팔리고 많이 읽혀진다. 그리고 오늘날 성경이 계속해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되고 있지만 팔린 만큼 읽혀지는지는 의문이며 읽혀진다고 하여 믿어지고 순종되어지는가는 더 더욱 의심스럽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이 많이 팔리는 것과 외설 잡지가 많이 팔리는 것은 그 성격이 다르다. 근 20세기를 두고 계속해서 팔리는 외설 책은 없으며, 성경처럼 떳떳하게 팔리고 경건스럽게 읽혀지는 책은 없었다. 많이 팔리고 읽힌다고 하여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라는 논리는 성경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성경은 단순히 읽혀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되어지고 명상되어지고 순종되어진다.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땅 위의 어느 다른 책이 성경만큼 많은 사람의 일생을 바꾼 것은 없었고 지금도 없다. 성경은 지금도 계속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새 사람이 되게 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나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마세요

아프리카 선교사인 로버트 마횃(Robert Moffat)은 이렇게 자신의 경험담을 말했다.
한번은 15마일이나 되는 먼 거리를 걸어서 한 여인이 나를 찾아왔다. 그 여인은 나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얻기 위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부인 죄송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책이 없으니 말입니다.”
“무어라고요! 그럼 나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예, 안됐습니다만....”
“오! 저는 며칠 전 친구에게서 한 권의 책을 빌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와서 다시 가져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나와 내 가족은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참다운 삶의 행복을 주는 책이 지금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장이 있는 시골 저편,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곳에 우리 가족만이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삶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 주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읽는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 가서 우리를 위해 제발 책을 가져다 주세요. 분명히 어디엔가 한 권의 책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마세요. 제발 한 번 찾아봐 주세요.”
나는 매우 깊은 감명을 그의 얼굴과 이야기 속에서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잠깐 기다려 주세요. 다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여기저기를 뒤져 한 권의 책을 찾게 되었고 그것을 그녀에게 가져다 줄 수 있었다. 만일 여러분이 그때 그 여인의 얼굴을 지금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여인의 얼굴은 광채가 번뜩였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녀는 나의 손을 꽉 잡고 거기에 쉴 사이 없이 입을 맞추고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그 한 권의 책 「신약성경」을 가슴에 꼭 안고는 기쁨을 누리며 돌아갔다.


말씀을 사모하는 자의 행복

오래 전 옛날엔 성경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꿈만 같은 일이었다.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고 종이가 없었던 때라 양피지나 혹은 파피루스에 기록을 했기 때문에 옮겨 적기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성경이 대중화되고 널리 퍼진 것은 사실 위클리프의 순교자적인 번역을 위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인데 14세기 말에 위클리프가 처음 영역 성경을 펴내었을 때, 그때 역시 아직도 인쇄술이 발명되어 있지 않았었던 시기였다. 1454년경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소개되고 드디어 성경은 대중에게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인 1563년에도 조지 폭스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에 들어 있는 한 편의 글을 사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5마르크(대체로 지금의 5-6만원)를 지불하였다. 다소의 높낮이는 있었으나 그 당시에는 이 정도가 적당한 값이었다. 영어로 옮긴 야곱의 글이나 바울의 편지 몇 장을 사기 위해 건초를 산더미같이 준비한 사람도 있었다.”
성경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소중히 여겨졌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글이다.
1540년에 “그레이트 바이블”이 나왔을 때, “보너”라는 사람은 그 여섯 권의 책을 교회에 두었다. 그런데, 모두가 골똘히 그것을 일거나, 읽어 달라거나 하여 예배도 못 드리고, 군중들이 밀어 닥쳐 교통마저 혼란하게 되었으므로 보너는 무질서한 열광을 멈추지 않으면 성경을 가져가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지 폭스는 사람들이 위클리프의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 또한 성경을 손에 넣기 위하여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에 대해 말한 뒤에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의 노고, 구도에 대한 노력, 타는 듯한 열성, 성경을 읽는 열심, 밤을 새우는 기도, 마음 따뜻한 집회...를 보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오늘을 사는 우리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진다.”


세계 공통어

미국 어느 교회의 교인인 훌톤씨가 한국에서 기차 여행을 할 때의 경험담이다.
기차 여행 중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국 노인이 훌톤씨에게 뭐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모르는 훌톤씨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 ‘예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훌톤씨도 그 노인에게 ‘예수’라고 하였더니, 그 노인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노인은 주머니에서 성경을 꺼내더니 한 곳을 찾아서 훌톤씨에게 건네주었다. 훌톤씨는 한국어 성경의 목차 순서를 보고, 자신의 성경의 어느 곳인가를 확인하고, 같은 방법으로 장과 절을 조사해 보니, 그 구절은 요한일서 3장 14절이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훌톤씨는 대단히 기뻐하며 자신도 성서의 한 구절을 펴서 그 노인에게 보여 주었다. 노인도 같은 방법으로 성서를 찾았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두 사람은 이렇게 성서를 통해 대화를 나눔으로써 서로 아주 친해졌다. 
성경은 나라와 민족을 넘어 형제의 사랑을 교류시키는 사랑의 언어 역할을 한 것이다.


얼굴이 빛나는 이유

얼마 전에 나는 오랜 소원이던 나병 요양원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오게 되었다. 나로서는 위문을 한답시고 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위문을 받고 온 꼴이 되었다. 
그 중에도 A씨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아마 50이 넘은 것 같았다. 두 눈이 안 보이고, 손가락 끝도 마비되어 혀로 점자(點字)를 읽는 것이었다. 그는 일어서는 것도 돌아눕는 것도 혼자서는 할 수가 없는 몸이었다. 물론 식사도 남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그 분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호흡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저 호흡하는 것밖에 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A씨의 얼굴은 빛나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호흡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 혼자서는 호흡하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왜 이렇게 빛나고 있을까? 그 비밀의 열쇠는 그의 머리맡에 있는 점자로 된 성경이었다.
(삼포능자)


나를 붙드신 이 말씀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요한일서 2:27)

다음은 시인 송명희의 간증이다.
나는 어느 의사의 실수로 소뇌를 손상 당한 채 태어나 뇌성마비로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신앙심 좋으셨던 어머니는 그런 나를 고치시기 위해 기도회란 기도회는 모두 쫓아다니며 안수기도를 받게 하셨다. 온몸이 멍 투성이가 될 때까지 안수 기도를 받고 있노라면 그 고통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신비주의적인 예언 기도와 아줌마들의 그 극성스런 찬송 소리에 나는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내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나에게 수모와 아픔을 당하게 만드신 하나님,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급기야는 거부 반응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미칠 것 같았으나 미쳐지지도 않았고, 고통은 커 가기만 했다. 그렇게 힘든 가운데서도 나는 하나님께 한 번 더 의지해 보자는 생각에 교회를 찾았다.
“하나님! 제발 저와 만나 주세요! 제 모든 걸 다 드릴께요!”
이렇게 혼신을 다해 기도를 드렸을 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한 빛이 나타나 두루마리처럼 펼쳐지더니 한글도 영어도 아닌 생전 처음 보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하나님을 믿으라!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죽으리라!”
이런 이상한 경험을 하고 난 뒤 나는 이 이상한 경험들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위해 기도를 작정했다.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하나님은 나의 교사가 되어 주셨다. 성경을 읽다가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님에게 물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알려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물어 본다 해도 너무나 난해한 질문이라 대답해 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진리의 비밀을 풀어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읽기 시작해 성경을 열 번 이상 읽고 나니 성경의 실체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며, 성경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복음의 비밀 이외에도, 주님은 일기장 한 장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문학에 소질이 없었던 나에게 문학을 가르치셨고, 예술성을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시를 불러 주셨고, 그 시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힘들 때, 의심에 사로잡힐 때, 주님은 언제나 나를 부르시고 주님의 말씀들로 채워 주셨다. 그렇게 해서 불러 주시는 대로 써 모은 것이 이 노트로 몇 권이 되어 갔다. 이 노트에 적힌 시가 우연한 기회에 책으로 나오게 되자 나는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책이 출판되고 시로 만든 찬양이 나오자 방송국과 잡지사 기자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각종 집회에서 간증을 해 달라는 부탁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유명세를 타게 되자 한 번은 수술로 내 장애를 치료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하나님께
“할 말을 인도해 주소서, 주님”이라고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뜻밖에 새어 나온 소리는
“난 이대로가 좋아요,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대로 그냥 살겠어요!”였다.
주님께서는 내 모습 이대로 나를 써 주셨고 많은 집회와 간증을 통해 전도하게 하셨다.
때로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집회와 간증으로 인해 지치기도 했지만 주님께서는
“너는 가라, 너는 가서 그들에게 네 몸만 보여도 된다!”라고 말씀하셨기에 더 이상 핑계를 대거나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주님께서 내게 그 사랑의 비밀을 알려주셨을 때, 그 비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도 전할 사람이 없어서 그 안타까움에 목이 메이도록 울었던 그때......
그때의 소원을 생각하면 모든 피곤이 잊혀진다.
때로는 육체적 장애를 가진 몸으로 많은 인터뷰와 집회를 다니는 것을 보고 세상은 나를 단순히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어찌 지금 내 모습이 내 스스로의 의지로 내 삶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표본이겠는가? 나의 모든 생활은 인간 승리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이 늘 나와 동행하시고, 주님께서는 내게 말씀하여 주시고 나는 그분의 모습을 보여서 그분과 함께 기쁘게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인 것이다.


사형수가 남긴 성경책

1994년 9월 21일. 신문 기사를 읽던 ‘으뜸사랑교회’의 김영석 목사(42세)는 심호흡을 했다. 지존파 5명 구속, 농촌 마을 단독 가옥 아지트에 시체 소각장까지 만들어 놓고 1년여 동안 전국을 무대로 납치, 살인극을 벌여 5명을 살해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암매장하거나 불태운 엽기적 살인 범죄단 6명이 경찰에 검거됐다. 감히 상상도 못할 그들의 엽기적 살인 행각에 경악한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그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김목사가 20년 가깝도록 대해 오던 여느 사형수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부분 전과가 없었고, 외모나 체격 또한 곱상하고 왜소해 언뜻 보면 도저히 그 범행의 주인공들이란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빨리 죽고 싶어요.” 그들은 푹 숙인 고개를 들려고도 하지 않고 대뜸 그 말부터 내뱉었다. 그 후에도 몇 번 그들을 찾았지만 대답은 매한가지였다. “아무 것도 필요없어요. 그냥 죽여주세요.” 안타까왔다. 가장 빠른 방법은 자신을 먼저 그들에게 열어 보이는 것 뿐이었다. 
강문섭. 얼굴이 온통 끔직한 흉터 투성이던 그가 김목사에게 가장 먼저 마음을 열었다. 
1995년 11월 2일. 강문섭은 창 밖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맑아 보였다. ‘바깥은 참 아름답겠구나.’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문섭!”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누가 면회 오거나 병에 걸려 치료받으러 나가거나 아니면... 그는 나가는 방향을 보고서야 오늘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를 확연히 깨달았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김목사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오히려 떨리고 있었다. “왜 떠세요? 하늘나라 가는데.” 강문섭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물었다.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시리게 느껴질 정도로 맑고 고요했다. 이윽고 그의 머리에 용수(두건)가 씌워지고 손발은 오랏줄로 묶였다. 집행인들이 스위치가 여럿 달린 곳으로 다가갔다. 그를 죽음으로 인도할 스위치는 그 중 하나만 작동될 것이다. “철컥!” 차가운 소리와 함께 사형대 밑바닥이 열리고, 그의 몸뚱이는 몸무게에 끌려 대롱대롱 매달렸다. 약 3분 후 그의 숨이 끊겼다. 사형이 집행되기 며칠 전, 정기 예배를 위해 구치소에 들른 김목사에게 강문섭이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왔다. 풀어보니 돈 72만원과 성경책이 들어 있었다. “목사님, 그 동안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돈을 모았어요. 이걸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이건 감옥 안에서 읽던 성경책인데, 제가 죽으면 친 형님께 꼭 좀 전해주세요. 이게 없었다면 전 아무 것도 모르고 죽었을꺼예요. 제 가족들도 이걸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목사는 그가 죽은 다음, 그가 부탁한 것들을 실행에 옮겼다. 장례비와 화장비로 쓰고 남은 돈 34만원으로 다른 재소자들을 위한 성경책들을 사 나눠줬다.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강문섭의 성경책은 가족들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남긴 돈은 이미 다 써 버렸지만, 김 목사는 아직도 성경책 나눠주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있다. ‘지존파 강문섭’은 이미 죽고 없지만 서울구치소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많은 사형수들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받은 성경책, 사형수 강문섭이 남기고 간 그 책들이 다시금 새로운 사랑을 낳을 것임을, 김목사는 굳게 믿고 있다.

 
신앙적 관점에서 본 미국의 위대성

(1)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취임식을 할 때 성경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취임 선서’를 한다.
(2) 미국 건국 초에 나라 최고의 법인 헌법을 만들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헌법 기초 위원회’가 열렸을 때 ‘제퍼슨’위원이 일어나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 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하는 시 127편을 낭독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가 아무리 우리 마음대로 헌법을 만들어도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워주시지 아니 하시면 그것은 헛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그 헌법의 근본되는 뜻과 건국의 참 정신을 밝혔다고 한다.
(3) 미국 역사상 국회가 제일 처음으로 개원되어 개회식을 할 때에도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시작했다. 
(4) 미국의 지폐인 달러화에는 1달러에서부터 100달러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글귀가 들어가 있다.


전도지 같은 돈

1851년 11월 미국 매릴랜드주에 사는 한 농부가 미국 재무성에 다음과 같은 청원서를 냈다. 그것은 미국이 만들어 내는 모든 화폐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말을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1864년 미국 의회에서 정식으로 이를 결정하고 오늘까지 모든 미국 화폐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말을 넣고 있다.
미국 돈은 단순한 미국의 돈만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계의 돈이다.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미국 돈은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미국의 국력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보다 더 깊은 원인을 찾는다면 “In God We Trust"라는 그 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본인들은 알든 모르든, 본인들이 알고 쓰든, 모르고 쓰든 전세계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전도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우연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개인과, 가정과, 국가가 번영하고 복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면서 기도해야 응답받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전도인의 자녀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의 아내인 송미령 여사의 아버지 송전도 선생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했던지 그의 이름은 잘 몰라도 송전도사라고 하면 다 알려진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이 좋던 그가 딸만 셋을 낳고서 젊은 나이로 죽어 버렸다. 그때에 동리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보고 조소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하나님을 향해 회의를 가졌을는지 모르나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했다. 훗날 그의 세 딸이 자라나서 한 사람은 중국의 재무부장관의 아내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중국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손문 선생의 아내가 되었고 셋 째 딸은 장개석 총통의 아내가 되어 한 때는 그 송전도의 세 딸들이 중국 전토를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일점 일획이라도 오류가 없는 성경

서울 구로제일침례교회 강풍일 목사는 청년 시에 술을 먹고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을 때린 후 정신이상이 되었으나, 그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로 치유되어 곧 바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가 전도사 시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는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땀이 피가 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해서 이 구절은 잘못 번역된 것이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쳤다. 그후 사모가 첫 출산을 하게 되었는데, 난산으로 출산이 불가능하여 산모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산모를 구할 것이냐 아기를 살릴 것이냐  양자택일을 15분 안에 결정하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러나 강전도사는 계속 연장하여 2시간을 지연했다. 결국 아기를 포기했지만, 연장 이유는 산모와 아기, 둘 다 구하기 위함이었다. 의사가 진작 그렇게 결정할 것이지 하고 나무라고, 산모를 살리기 위해 가위와 칼로 아기를 잘라 꺼내려 할 때, 강 전도사가 만류했다. 그것은 아이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니 그냥 자르지 않고 꺼낼 수 없느냐고 부탁하니, 의사가 집게로 머리 부분을 잡고 간신히 꺼내자 2시간 이상 됐음으로 아기는 파랗게 질식해 죽었다. 아기는 딸이었는데 말아서 옆에 두었다. 그때 강전도사가 산모를 보니까 몇 시간을 얼마나 기진맥진했는지 피부는 빨갛게 되었고, 땀구멍마다 땀이 배어 나왔는데, 그때의 땀방울이 핏방울이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강전도사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흘리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는 말씀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때 강 전도사는 마루 바닥에서 울부짖으며 회계하고, 自己의 불신앙을 철저하게 자복했다. 그리고 의사에게 아기를 다시 한 번 보여 달라고 부탁하니까, 의사가 죽은 딸아기를 보여주는데, 머리 부분이 길게 늘어나 있었다. 그런데 강 전도사에게 그 아이가 다시 살수 있다는 어떤 확신을 갖게되었다. 그래서 의사에게 사정해서 인공호흡을 한 번 시켜 달라고 사정을 하니까, 의사가 그 전도사를 정신이상자로 생각하고 당신 대학을 나오긴 했느냐고 의심스럽게 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 전도사가 하도 간곡하게 사정을 하니까 마지못해서 인공호흡을 시키고,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한 번 팍 때리니까, 그때까지 죽었던 아이가 그만 ‘응아!’ 하고 울었다. 이 광경을 본 의사가 그만 부들부들 떨었고, 강전도사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의사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살기는 했어도 병신이 되거나 아니면 정신박약아 즉, 저능아가 될 것이니,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이고, 목회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니, 지금 차라리 안락사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으나 적극 反對하여 살렸다. 그후 이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름은 강 지혜로 잘 자라서 지금 숙대 3학년으로 음악을 전공하여  유학까지 갈 계획이고, 운전 면허까지 취득했으며 어려서부터 교회 반주로 아버지 강풍일 목사의 목회를 돕고 있다.


인간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
 10세에는 과자에 움직이고,
20세에는 연인에 움직이고,
30세에는 쾌락에 움직이고,
40세에는 야심에 움직이고,
50세에는 탐욕에 움직인다.
인간은 언제, 오직 예지만을 추구하게 될 것인가?
-루소-

진실을 배우며, 진실을 사랑하며, 진실을 말하며, 진실을 양보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진실을 지키라.
-후스-

세상에는 도를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 여덟 가지가 있다. 그것은 여행, 여자, 부, 일, 술, 잠, 약, 향료이다.

나는 인간을 칭찬하는 사람들과 인간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인생을 향락하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옳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옳게 여기는 사람은 끙끙거리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뿐이다. 
오늘날 진리는 너무도 모호하고 허위는 너무도 잘 정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리를 알아보기조차 못할 것이다. 
-파스칼의 팡세-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빅톨 프랭클- 


복음의 힘

이동식이라는 청년은 기독교인인 친구를 만나면 언제나 “힘이 없으면 내 힘을 의지하라”고 조롱하면서 어깨를 올려 보이며 힘 자랑을 했다. 그러다가 이 청년도 다른 청년들처럼 군에 입대하여 간단한 훈련을 받은 후 전방 부대에 배속되었다. 가보니 그 부대에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더군다나 신병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내무반 한 구석에서 공포에 질려 고민하고 있는 그에게 “왜 걱정되는 것이 있으시오?”하고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옆에 앉는 사람이 있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하니 “편히 앉으시오”라고 말하는 그는 바로 그 부대의 군목이었다. 처음 군목을 대하게 되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는 그에게 입대하기 전에 교회 생활을 했느냐고 물었다. 전에 친구를 조롱하던 생각이 떠올라 “아뇨”라고 대답을 하면서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군목의 친절한 말에 감동되어 전해 주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군대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늦게 시작한 신앙생활이었으나 그의 신앙은 열렬하면서도 확실했다. 그래서 군목을 도와 전도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청년은 집에 계신 부모님께 전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편지에 전도지를 넣어 보내면서 부모님께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시라고 했다. 이 편지를 받은 부모는 집에 있을 때 교인을 조롱하던 아들이 군대에 가더니 정신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면서 믿겠으면 너나 믿으라는 답장을 보냈다. 
부모의 답장을 받은 청년은 “내가 일선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아십니까? 부모님이 교회에 나가지 않으시면 저는 전사할지도 모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다시 보냈다. 부모는 아들의 생명이 걸렸다는 말에 교회에 나가 마침내 착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군목이 청년의 부모를 방문했을 때 주님을 믿게 됨을 감사하면서 아들에게 늘 기도를 드리라고 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위대한 희망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해롤드 럿셀’이라는 청년이 공수부대 요원으로 참전하였다가 불행하게도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은 불구자가 되었다. 그는 이제 ‘나는 쓸모 없는 고기 덩이가 되었구나’하고 절망하던 중에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어느 날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는 설교를 듣고 그의 마음에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그후에 그는 무엇인가를 하여야 하겠다는 계획을 하던 중에 그를 돕고자 하는 의사로부터 쇠붙이로 된 손(의수)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 손으로 글씨도 쓰고, 나중에는 타자까지 칠 수 있었다. 심지어 ‘우리 생애 최고’라는 영화에 출연하여 영화계 최고상인 ‘아카데미’ 주연 상까지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 쓸모 없는 인생에게 희망을 주어 쓸모 있는 삶을 살게 하셨다.


똑똑한 나무꾼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갔다. 한 사람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다. 그는 친구에게 지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가면서 일했다. 어느덧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결과를 비교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점잖게 설명했다. “나는 10분씩 쉴 때마다 도끼 날을 갈았다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자신의 삶의 날을 갈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사람이 마지막 날에 승리의 개가를 부를 사람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묵상하며 그 분의 뜻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않아 하나님의 크고 깊은 생각을 접할 수 없을 때 우리의 삶은 보잘것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맡김
 
어떤 남자와 그의 부인이 오래 전에 약속한 대로 약 4-5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상쾌한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섰다. 그 착한 부인은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들고 갔다. 그런데 집을 나선 지 얼마 안되어 그녀는 갑자기 그들이 건너야만 하는 매우 오래 되고 낡은 다리를 생각해 내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 다리 어떻게 건너지요? 나는 결코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할꺼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그 강을 건널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부인은 “그보다 당신이 썩은 널 판지를 밟고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봐요. 그러면 나와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하고 또다시 걱정했다. 이에 남편은 “몰라. 우리 중에 누가 어떻게 될지 몰라.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는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우리는 당연히 굶어 죽게 될꺼야.”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들은 계속해서 걱정을 하며 애를 태우고 불길한 것을 생각하면서 마침내 다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난번에 거기 갔다 온 이후 그 자리엔 훌륭하고 견고한 새 돌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무사히 다리를 건넌 그들은 부질없는 걱정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신다. 미래에 대하여 막연한 염려나 걱정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카타콤

지금도 로마의 카타콤에 1,400만 개의 뼈가 있는데 그들은 모두 순교자들이다. 초대 교회 당시 로마에는 두 개의 도시가 있었다. 하나는 땅 위에 화려하지만 도덕적으로 퇴폐한 도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땅 속에 있는 어둡고 처절했지만 신앙과 사랑이 넘치는 도시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카타콤의 길이는 약 560km이상이 된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토굴 속에서 고난당하며 죽었는가를 헤아리게 된다. 그들은 이 세상의 무엇보다 신앙이 더 가치가 있었으므로 햇빛을 보지 못하고 땅 속에 숨어살다 죽어야 하는 카타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인간은 재물이나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압받아서는 안되며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목사와 노학자

한 번은 유석홍 목사가 황해도 금촌마을에 가서, 그 마을에서 제일 유세가 센 노학자를 찾았다. 머리를 깎은 자는 당장 쫓겨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고 그때 유행인 남바위를 얻어 쓰고, 과객으로 가장하고 노학자의 집을 방문하였다. 주인은 유 목사를 방으로 모시고 “방이 더우니 남바위를 벗으라”고 말하였다. 유 목사는 남바위를 벗기가 곤란했다. 만약 깎은 머리가 드러나면, 지금까지 애써 접근한 것이 무효가 되고 만다는 생각이 들어 머뭇거리기만 하고 벗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은 계속해서 벗으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 모처럼의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 주십사고 간절히 구했다. 막 기도를 마치니 목사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눈물이 옷고름에 떨어지자 놀란 것은 노학자였다. “뉘시기에 그토록 우시면서까지 남바위를 벗기를 두려워하는지요? 나도 별 것 아닌 인간이외다. 자, 염려말고 남바위를 벗으시오.”
“저는 머리를 깎은 사람으로 소문을 듣자 하니, 주인께서는 일절 머리 깎은 사람은 문안에 들이지 말라고 한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주인께서 저의 머리 깎은 것을 보시고 노하실까 두려워서 차마 벗지를 못했소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목사요.” 노학자는 깜짝 놀랐다. 과객이 목사라는 말도 금시초문이지만,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 남바위를 쓰고 찾아와 눈물까지 흘린 정경에는, 비록 완고한 그였지만, 자연 감화되고 말았다. 노학자는 유목사에게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그 순간부터 정다운 대화로 밤을 새웠다. 노학자는 언제가 길을 가다가 “구주강생(救主降生)OO년”이란 글이 적힌 쪽지를 주웠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한문에 밝은 노학자는 “도대체 세상에 구세주(救世主)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하고 물었다. 유 목사는 즉석에서 한문으로 된 창세기 한 권을 건네주고, “여기에 구세주의 의미가 있으니 읽어 보라”고 하였다. 노학자는 한눈에 읽어 내려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탁 쳤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 사람들이 너무 음란하였다는 대목에서였다. “이제껏 <맹자>, <공자>를 읽어봤지만 무엇이나 잘못된 것은 고치는 것이 보통인데, 성경은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조금도 가식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서(天書)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 나서 그는, 롯을 구원한 하나님이야말로 구세주라고 하면서 자기도 이제는 예수 믿고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였다. 이후 노학자는 물론, 가족까지도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참을성을 잃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화가 났을 때라도 건설적인 길을 모색합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행운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좋은 예법의 선지자입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느낄 때조차도 쉽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가장 나쁜 점보다는 가장 좋은 점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과 생활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주일을 무시한 결과

거리의 신호등을 보면 파랑 불은 가라는 신호, 빨강 불은 정지하라는 신호이다.
달력을 보면 주일을 표시하는 숫자는 모두가 빨강 색이다. 그것은 하던 일을 멈추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적신호인 것이다. 운전자라면 적신호를 무시하고 주행했을 때 오는 비극이 얼마나 큰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1813년 10월 17일 영국을 침략했다가 웰링턴 장군에게 망했다. 그 날은 주일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을 침공했다가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고 망했다. 그 날도 주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도 주일이었는데, 그 날 김일성이 남침을 했다가 북한은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이사야 58:13-14)


주일에 취임하기를 거부한 미국의 대통령

미국 제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자카리 테일러(Zachary Taylor) 장군이 헌법에 의해 1849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날이 주일이었다. 신앙이 독실한 테일러 장군은 이 날의 취임을 거부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행사이므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설득하고 간청했지만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헌법은 임기가 만료된 제 11대 대통령 제임스 폭스 폴크가 대통령직에 하루 더 머물러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하루 동안 국가 원수의 자리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하는 수없이 테일러가 취임을 거부한 그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까지 24시간 동안 자리를 메울 임시 대통령을 상원에서 선출해야 했다.
상원은 상원 의장인 애치슨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애치슨은 그로서의 금도를 발휘하여, 어떤 이유로도 깨우지 말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당부해 놓고 토요일 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는 월요일까지 그의 임기 24시간을 모두 잠으로 채워 버렸다.
하나님의 법도가 인위적인 법률보다 위에 있음을 믿고 주일날 취임을 거부한 대통령이나 24시간 국가 원수의 직위를 위임받고도 의도적으로 아무런 권한도 행사하지 아니한 임시 대통령은, 미국 국민들의 신앙과 도의심과 절제력과 준법정신을 극명하게 대변하고 있다. 그러기에 미국은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발전했고, 하나님이 돌보시는 역사를 이루었다. 
주일에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선수

1924년 올림픽 경기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다. 여기에 참가한 선수 중에 스코틀랜드의 육상 스타인 에릭 리델(Eric Liddel)이 있었다. 그는 1백 미터 육상경기의 우승 후보로서 세인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으며, 이 경기를 위해 여러 달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쌓아 온 터였다. 
그런데 그의 경기 일정이 공교롭게도 주일날 짜여져 있었다. 그는 믿음 좋은 기독교인이었으므로 마음에 심한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는 주일을 범하고 경기에 참가해야 옳으나, 그의 신앙 양심은 이를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주일에 운동장을 달린다고 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고 믿은 그는 경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팬들은 크게 실망했고 그를 격찬하던 사람들이 모두 바보로 취급했으나 그의 마음을 충일하게 채운 기쁨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주간에 출전하게 되어 있던 스코틀랜드의 4백 미터 경기 선수가 부득이한 일로 뛸 수 없게 되었다. 리델은 자기가 훈련한 종목의 4배나 되는 힘든 경기였지만 그 자리를 메꾸겠노라고 신청했다. 1백 미터 경기 선수인 리델이 4백 미터 경기에서 47.6초의 기록을 세우며 당당히 우승했다. 
후에 리델은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되어 평생 주님의 일을 하다가 1945년 중국의 군인 캠프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한 그를 하나님은 끝날까지 사랑해 주셨다.


안식일을 잃어버린 사람

여러 기업체를 갖고 있는 50대 중반의 권사가 있었다. 이 분은 주로 주일 아침 일찍 있는 1부 예배에 참석한다. 왜냐하면 주일에도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담임 목사는 ‘권사님 저녁 예배에도 나오세요’ 그러나 그의 대답은 ‘죄송스럽지만 일이 너무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담임 목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주일 날 빠질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친구들과 모임에 가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말았다. 상복을 입고 애곡하는 그 부인은 ‘목사님 말씀대로 쉬었어야 했는데...’라고 울부짖었다.


주일 성수는 하늘을 오르는 사닥다리

어떤 할머니가 꿈을 꾸었다. 여러 개의 사닥다리가 각각 자기 앞에 놓여 있었다. 자기 옆에 있는 김집사의 사닥다리는 온전하여 한 발 한 발 잘 올라갔다. 그런데 자기 것은 중간 중간에 다리가 없어 오르기가 힘이 들었다. 천사에게 묻기를 왜 내 사닥다리는 이렇게 생겼느냐고 물으니, 자매가 주일마다 결석한 대로 그 다리가 빠졌노라고 했다. 그런데 중간쯤 오르니 디디고 서야 할 다리가 네 개나 빠져서 도저히 오를 수 없어서 힘쓰다가 떨어져 죽는구나 하고 깨어 보니 꿈이라, 식은땀을 흘리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주일 범한 것을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마침 구역장과 사소한 일로 다툰 것이 시험이 들어 네 주일이나 결석하던 참이라 크게 회개했다는 것이다.


끝까지 주일을 지킨 학생

몇 년 전에 모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가을 운동회 준비를 위해 일요일인 내일도 전교생이 등교하라고 체육 선생이 지시하였다. 월요일이 되었다. 운동회 연습 시간에 체육 선생은 어제 결석한 학생들을 조사하여 기합을 주기 시작했다. 마침 전교 회장도 그 학생들 틈에 끼어 있었다. 그 학생은 모 교회 장로의 아들로 성실하며 주일을 성수하고 교회에서는 고등부 회장을 맡고 있었다. 체육 선생은 전교 회장이 어제 결석한 것에 더욱 화가났다. 전교 회장을 전교생 앞에 불러 세우고 물었다.
“어제 왜 결석했나!”
“교회에 가야 하기 때문에 결석했습니다.”
“학교가 중요한가? 교회가 중요한가?”
“학교는 학교대로 중요하고, 교회는 교회대로 중요합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둘 다 중요합니다.”
체육 선생은 그 학생을 몹시 때렸다. 그 입에서 학교가 더 중요하다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 심하게 때렸다.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둘 다 선택하겠습니다.”
“아니,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한다면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꼭 하나만을 택하라면 교회를 택하겠습니다.”
체육 선생은 다음 주일(일요일)에 그 학생을 등교시키기 위하여 심한 기합을 주었으나 그 학생은 끝가지 주일 성수를 양보하지 않았다. 전교생들은 숨을 죽여 가면서 체육 선생과 전교 회장의 대립을 지켜보았다. 이 사건은 다음날 큰 문제로 비약되었다. 교회로서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목사는 교장을 찾아 엄중히 항의하고, 교육장에게도 엄중히 항의하여, 체육 선생을 다른 학교로 전출시키고 교장이 전교생 앞에서 잘못된 것을 사과함으로써 사건을 수습시켰다.
오늘 이런 학생이 얼마나 될까? 정말 이런 학생이 부럽다. 진학 공부 때문에 고 3만 되면 교회 출석이 저조하고 학원 공부 때문에 교회 출석이 저조한 현실에서 이런 학생은 우리의 귀감이 된다.


항해하는 배 안에서도 주일을 지킨 청교도인들

영국의 청교도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화란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지 못하자 아메리카 대륙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들이 67일 동안 항해하는 대서양 바다 위에서도 주일을 성수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땅에 입을 맞추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고 찬양을 드린 일이었다. 이들은 먼저 교회를 세웠고, 그 다음에는 학교를 세웠고, 그 다음에는 공회당을 지었다.
바다 가운데서도 닻을 내리고 주일을 지키는 신앙이 청교도의 신앙이요, 오늘의 미국의 번영을 가져온 것이다.


주일은?
 참 안식과 평안을 얻는 날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식이 필요하다. 정신 건강이나 육신 건강을 위하여 안식은 절대로 필요하다. 
피쳐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였다.
“안식일이 없는 세계는 웃음이 없는 세계요, 꽃이 없는 여름이요, 뜰이 없는 주택이다. 안식일은 일주일 중 가장 기쁜 날이다.”
영국의 대 정치가인 클레도스틴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의 길고 바쁜 일생에 있어서 나의 생명과 용기를 유지한 것은 오직 안식일을 지킴에 있었다.”

  

십일조의 성경적 의미
십일조의 관습은 셈족 이외의 다른 종교나 문화 가운데 흔히 나타나는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십일조의 성경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보다도 성경 본문 그 자체를 숙고해 봄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는 십일조의 첫 언급은 창세기 14장 19-20절에 나타난다. 
성경 계시의 유기적 발전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이 본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비록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말하지만, 아브라함 시대 이후의 모든 십일조에 대한 기본적 원리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소위 십일조라는 나무의 씨앗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십일조 안에 담긴 기본적 원리들 또는 사상들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1) 바치는 자가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이다.
(2) 바치는 자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 드리는 예물이다.
(3) 바치는 자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God's ownership)임을 인정함의 표시로 드리는 예물이다.


다시 회복한 십일조 생활

미국의 플로리다주에 나울린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가 있었다. 그의 교회에 교회 학교 총무 일을 보는 믿음이 훌륭한 청년이 있었다. 이 사람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점점 번창하더니 여러 도시에 많은 상점들을 내게 되었고 일주에 일만 불을 십일조로 바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 그는 수입이 몇 배로 늘어도 십일조는 매주 일만 불이었다. 그리고 교회 출석도 점점 빠지더니 나중엔 아예 교회를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근심이 되어 그 청년을 찾아가서 “죤, 자네를 걱정하고 있네. 자네는 교회의 예배에 계속 불참하고 있어. 자네는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해져 가고 있어. 십일조도 온전히 못하고 있네” 그랬더니 그 청년 하는 말이 “목사님 사실 일주일에 100불 헌금도 많다고 봅니다. 또 제가 바빠서 교회 갈 시간이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목사님이 너무 안타까워서 “죤, 우리 기도 드리십시다”하고는 기도를 하는데 그의 기도가 이런 기도였다.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죤에게 지나친 번영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너무 많은 사업을 주셨습니다. 죤은 지나치게 성공했습니다. 죤은 당신께 너무 많은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죤을 위하시사 그의 상점 몇 개는 불태워 주옵소서. 상점 몇 개는 실패를 보게 해 주옵소서. 죤으로 하여금 그렇게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충실하게 일하던 그 옛날의 사람으로 되돌아오도록 그의 사업의 얼마를 빼앗아 주옵소서” 그랬더니 그만 죤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고 그후 새 출발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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