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넬리우스 반틸의 [개혁주의 신학 서론] 중에서
제17장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자충족적인 존재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서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와 비교해서 구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숫자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그 자신 안에 구체적이고 숫자적인 존재의 구별(a distinction of specific and numerical existence)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 신성의 본질에 대해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 of the Godhead)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시 될 수 있다고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듯이, 삼위일체의 각 위(各位)가 신성 자체를 다 드러내면서도(exhaustive of divinity itself), 삼위 간의 참된 구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일성(Unity)과 복수성(plurality)이 꼭 같이 궁극적이다. 신성의 각 위는 서로를 다 드러내면서(exhaustive of one another), 따라서 신성의 본질을 다 드러낸다(exhaustive of the essence). 하나님은 하나의 의식을 가지신 존재이시면서, 동시에 세 개의 의식을 가진 존재(a tri-conscious being)이시기도 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친다. 먼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증거를 요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구약에 대해서는 우리가 피하여야 할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이 있어 왔다. 구약에서 완전한 신학의 체계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 분명히 가르쳐졌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성경이 하나의 통일된 교리의 체계를 가리치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어 왔다. 그들은 구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에 대조해서, 우리는 성경이 사람에게 유기적으로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도 가르쳐졌으리라고, 그러나 신약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쳐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창조 기사에서 '엘로힘'(이것은 히브리어 단어로서 복수형임)의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 말한다면 그것이 후에 계시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즉, 그 자체가 삼위일체를 계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대의 계시의 빛에서 볼 때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는 뜻-보역). 그러나 우리가 의존하는 증거는 후대의 계시의 단계에서 나타난 삼위일체 각위 간의 구별에 대한 증거이다.
1.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1) 신성 안의 구별(the differentiation in the Godhead)에 대한 시사로서는 창세기 19:24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늘 여호와께로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여기서는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가 하늘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불과 유황을 비 같이 내리셨다고 한다.
(2) 창세기 16:13에서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를 "당신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신다"(Thou God seest me)라고 부른다.
여호와의 사자가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23:20, 21 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라." 여기서는 사자(the angel)가 여호와의 이름과 동일시 되었다. 한편에 출애굽기 33장에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가 사자를 이스라엘과 함께 보낼 것이나, 그 자신은 가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자는 분명히 하나님과 구별되었다.
(3)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도 삼위일체의 구별이 시사된 듯하다.
1)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the breath of his mouth)으로 이루었도다"
2) 잠언 3:12-31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창조주와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
3) 이사야 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리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이사야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이런 구절들에서는 성령이 구별되는 인격(a distinct person)으로 언급되고 있다.
4) 시편 45:6, 7 :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히 1:8,9에서도 인용됨)
5)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6)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 본문들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이 본문들은, 벌코프 교수가 말하듯이 구약에 나타난 심위일체의 각 위에 대한 시사들일 뿐이다.
2.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신약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인용된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성구들만을 간단히 열거해 보려고 한다.
(1)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2)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3)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엡 2:18)
(4) 요한복음 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라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히 1:2-6; 골 1:15-17)
(5) 요한복음 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6) 갈라디아서 4:6 : "너희가 아들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3. 교리적 진술
이런 구절들과 다른 성경 구절들에 근거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제2장, 제3장): "단일한 신성에 삼위가 계시니, 곧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그 누구에게 속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아니했으며 나오시지 않으시며,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이를 설명하면서 핫지(A.A. Hodge)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계신 한 분의 참된 하나님이 계심을, 그리고 그의 본질적 속성들이 모든 온전성을 포괄함을 밝힌 후에, 이 부분은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성부, 성자, 성령이 똑같이 한 하나님이시고, 나뉘어질 수 없는 신적인 본질과 모든 신적 온전성과 대권들이 그 각각에게 같은 의미와 정도로 속한다.
2.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 명칭들은 각기 다른 관계를 가진 한 분의 다른 이름들이 아니고, 다른 위들의 이름들이다.
3. 이 삼위는 어떤 인격적 특성들(certain personal properties)에 의해서 구별되며, 그 존재와 작용이 일종의 질서를 가진 것으로 계시된다.
여기 언급된 세 가지 요점에 대하여 핫지가 논의하고 있는 부분 전체가 아주 중요하다.
4. 이 교리의 역사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성경적 진리의 온전한 진술은 오래고 힘든 성경 해석의 열매이다. 이 역사에 대한 지식은 그에 반하여 이 교리가 진술된 여러 형태의 이단을 살펴 보는 일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이 교리의 역사의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여기서 언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아주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다양한 속성들을 논의한 후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좀더 친근한 지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지칭하는 다른 특별한 마크가 있다. 즉, 그분은 당신 자신의 일체성을 선포하시면서도, 우리 앞에 삼위로(in three persons) 존재하심을 분명히 제시하신다. 신성의 이름이 아니면, 이것들은 아무런 참된 지식도 없이 우리의 두뇌 안에서 펄럭거리고 다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Institute, 1. Xiii, 2) 이 때 칼빈은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며, 또한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방식외에 달리 존재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워필드(Warfield)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러면, 칼빈에 의하면, 단일론적 하나님(a monadistic God)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듯하다. 다양성(multiformity)의 개념이 하나님의 개념 안에 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단순하다고 하고, 삼위가 그 신성에서는 서로 동등하다고 말함으로써 교회는 모든 형태의 비기독교적 사상과 대립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형태의 이단은 삼위일체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 성령 안에서의 그 근거와 원리를 가질 때에야 주장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바빙크는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모든 비기독교적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모든 이단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 공간적 실존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다른 측면으로 도입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현대 이단의 특성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에 고대의 이단과 현대의 이단의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본체론적 삼위일체(the ontological Trinity), 즉 피조된 우주와의 관계를 떠나서 그 자체 안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the Trinity as it exists in itself)가 그 스스로 온전하며, 그 안에 단일성과 복수성의 동등한 궁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삼위일체의 이 높고 고귀한 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오래고도 힘든 노정을 통해서였다.
삼위일체 교리사의 첫 시기, A.D. 1-325은 역사의 그리스도가 신성의 제2위이심을 밝히려는 노력의 시기였다고 특징지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하였을 때, 그들은 다신론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의 로고스와 동일시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여기려고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원과 시간의 통일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희랍 사상은 하나님을 말없는 심연으로, 이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기어 그렇게 말했고, 로고스에 대해서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말하였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의 사변은 하나님이 자충족적 존재되심에 반하는 것이었다.
제1세기와 2세기의 교부들은 이미 에비온주의와 가현론과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유일하게 변호할 수 있는 철학적 진리의 체계를 가졌음을 밝히기에는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철저히 무장되었었다고 하기 어렵다.
제2세기에 변증가들, 특히 저스틴 마터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 사이의 내재적 관계는 저스틴 마터의 경우에서는 아직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마치 성자가 이 세상의 창조를 위해서 낳아진 듯이 여겨진 듯하다. 여전히 하나님 그 자신(God in himself)은 감취어진 하나님(숨어계신 하나님)이고, 성자는 계시된 하나님인 듯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저스틴 마터에게는 성령의 신성과 성부나 성자와의 본체론적 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이다.
(1) 아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아리레니우스는 영지주의적 신 개념과 로고스 개념에 대립하여 상당한 진보를 나타내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로고스가 이중적 성격(his twofold nature-의미상 중간적 성격)을 벗어버리고 신성을 가진 것으로 진술되었다". 비록 언제나 일관성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레니우스는 성자와 대립되는 '숨어계신 하나님' 개념에 대립하였다. 이것은 아주 큰 진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서 우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로 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미) 삼위일체 안에서 자기 표현적이셨음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터툴리안은, 비록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하나(a unit)이기는 하지만, 신성에는 통일성(unity)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성(trinity)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리레니우스를 보충하고 있다. 터툴리안에 대해서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종속설을 언제나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본체론적인 삼위일체와 우주론적인 삼위일체, 그리고 구원론적 삼위일체를 충분히 구별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위일체론의 진술을 위한 개념과 단어들을 제공하였다. 그는 '로고스' 사변을 아들됨의 관계(filiation)로 대치하였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우주론적 사변에서 분리시켰다. 그리고 그는 각 위의 삼위일체성을 성부의 인격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오리겐 역시도 종속설의 오류에 빠졌다. 그는 성자의 성부와의 하나됨(the unity)을 강조하였으나, 그가 필요하다고 느낀 그 안에서의 다양성을 강조하기 시위해서 성부의 본질과 성자의 본질을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성부는 다시 한번 희랍적인 방식으로 가장 궁극적인 존재이며, 성자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로 생각되었고, 성자는 세상보다는 더 높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아리우스주의
핫지는 오리겐의 여러 추종자들이, 예를 들어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와 특히 아리우스가 오리겐보다 훨씬 더 낮은 교리를 가르쳤음을 지적한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ek ouk ontoon) 창조되었고, 따라서 성부와 동일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
(3) 사벨리우스주의
삼위일체에 대한 또 하나의 불만족스러운 형태의 진술은 흔히 사벨리우스주의라고 언급되는 것이다. 아리우스주의가 삼위의 본질적 통일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고서 삼위의 다양성을 가르쳤는데 비해서, 사벨리우스주의는 삼위의 다양성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서 본질의 통일성(단일성)을 가르쳤다고 일반적으로 대조되어 설명된다. 이것은 옳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를 분명히 파헤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범신론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이신론(理神論)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데, 유신론은 그 모두를 강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구별이다. 요점음 교회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단순히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를 연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는 둘 다가 그 근저에서는 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과 동리한 수준에서 연합시키는 같은 이단에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그 둘을 다 거부해야만 한다. 이것이 ‘아리우스주의’의 이름으로 요약된 모든 종속론적 사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벨리우스주의 역시도 전체로서의 실재의 통일성을 제공해 주는 영원 세계에 대한 보충으로 시간 세계가 복수성을 제공하도록 해 보려고 한 것이다.
(4) 나이신 신조(혹 니케아 신조)
니케아 공의회가 삼위일체에 대한 바르 교리를 진술하고 변증하려 모였을 때,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n to patri)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아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고, 삼위들이 단순히 세상과 관련한 경륜적 표현일 뿐 아니라,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삼위들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다. 그것들은 전혀 그 종류가 다른 것(allo kai allo)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이단을 거부함에서 니케아 공의회는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를 거부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삼위일체에 대한 한 가지 기본적인 이단은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궁극적 연합으로 혼합시키는 것이다. 이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에 대립하기 위해서는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 언급한 두 요점을 주장하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신성 안의 각 위의 내적인 관계가 피조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선행하며, 독자적임을 강조해야 한다. 찰스 핫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성의 본질이 각위에게 공통적이므로, 그들은 공통적 지성과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 안에는 세 지성과, 세 의지와 세 작용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위가 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한 정신과 한 의지를 가지신다. 이 밀접한 엽합을 희랍교회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이를 라틴어 'inexistentia', 'inhabitatio' 또는 'intercommunio'(상호 연합, 침투) 등의 말로 설명하였다.
(5)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나이신(니케아) 신조에는 참된 성경적 교리의 모든 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참된 교리가 주장되려면, 그것은 계속적으로 재진술되고, 세련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들만이 아니라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이심이 더 분명하게 진술되어야만 했다. 아다나시우스와 어거스틴은 삼위 모두가 동등함을 더 분명히 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령이 성부로부터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나오심을 밝히는 일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나오셔야만 삼위일체 삼위의 내적 교통이 영원히 온전한 것이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보다 삼위의 동등성을 더 분명히 보았고, 그들의 배타적인 내적 교통은 '아들로부터'(filioque)라는 어귀 없이는 표현될 수 없음을 더 분명히 보았다. 성부에 의한 성자의 출생(낳아지심)이 영원한 출생이므로, 성령의 나오심도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영원한 나오심이어야만 한다. 핫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신 신조의 가장 분명한 결함은 성령에 대한 어떤 분명한 진술이 없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나이신 신조의 '우리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말에 "주님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이시고, 아버자와 아들과 함꼐 경배를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던" (성령을) 이란 말을 덧붙였다" ('아들로 부터도, filioque'라는 말은 최종적으로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수납되었다.
(6) 칼케돈(451)
삼위일체에 관한 모든 이단들은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는 하나의 커다란 이단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칼케톤 공의회에서 거부되어진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유티케스주의도 교회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반대의 변형된 형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칼케돈 신조에 대해 필립 샤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니케아의 첫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하며, 선재하시는 신성을 수립하였으나, 제4차 공의회의 신조(칼케돈 신조)는 땅 위에서 걸으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성육신하신 로고스와 관련하였다. 칼케돈 신조는, 아리우스주의에 반해서 나이신 신조에 동의하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잘못 생각한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의 오류에 반하는 것이었다.
칼케돈 신조의 진술 형태에 대해서도 샤프의 말을 인용해 볼 수 있다. "정통 교리는, 유티케스주의에 반해서 성육신 이후에도 혼동이나, 변화없이(asygchytoos, inconfuse 그리고 atreptoos, immutabiliter), 또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반해서)구분이나 나뉘어짐없이(adiariretoos, indivise 그리고 achoristoos, inseparabiliter) 있는 각 성질의 구별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신성은 영원히 신성이고, 인성은 영원히 인성인데, 그들이 계속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삶을 가지고, 삼위일체의 각 위와 같이 서로 침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여기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말을 덧붙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제2위이시요, 참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요.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때가 찾을 때에 인간성(man's nature)을 취하셨는바, 그 본질적 속성들과 그 일반적 약점을 모두 같이 취하였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사, 그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 따라서 두 가지 온전하고 구별되는 본성인 신성과 인성의 변화됨이나 혼합이나 혼동없이 함께 한 인격 안에 나눌 수 없게 연합되어졌다. 그 인격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인격이며, 한 그리스도이시고, 그는 사람과 사람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제8장, 2항)
이 진술로부터 우리는 교회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혼동이나 혼합없이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깨닫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삼위 일체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온전하신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세상은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자기 온전성에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온전성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이 하나님은 피조된 우주의 토대이시고, 이 우주를 초월하시는 것이다. 그가 이 우주의 토대라고 먼저 생각되지 않고, 이 우주와는 다른 분이라고만 정의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타자성'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절대적 타자성'이 결국, 시간적 우주와 연관되게 되면, 전체로서의 실재의 한 측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이신론[理神論]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든지, (희랍 사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창조와 섭리를 모두 부인하는 교리는 결국 영원과 시간을 혼합시키고야 만다. 이신론과 범신론은 이렇게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고 혼동하는 근본적 오류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면) 죄가 세상에 들어 왔을 때나, 삼위일체의 제2위가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을 때에도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은 혼합되거나 혼동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역시 참된 교리에 대한 이신론적 형태의 대립이며, 유티케스주의는 명백히 범신론적 형태의 대립인 것이다.
(8) 현대의 반삼위일체주의
한 마디로 말해서 현대의 신학적 이단들은 그 기원을 거짓된 삼위일체론에 두고 있다고 하든지, 그런 왜곡된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시사할 수밖에 없다. 고대에서와 같이 현대에도 사람들은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을 한데 섞었던 것이다.
그런 한 가지 대표적인 예는 칼빈이 정리한 삼위일체 교리에 개한 반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s of the Godhead)의 동일 본질성(the consubstantiality)을 주장하는데 아주 관심이 있었다. 워필드의 말을 인용해 본다: "성자의 '스스로 신적이심'(the autotheotes)에 대한 그의 주장에 있어서, 칼빈은 결코 자신이 새로운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 자신들이 '아주 많은 말로' 이를 주장하고 있다고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주장에서 삼위일체 교리사에서 획기적인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성자의 하나님으로의 자기 존재와 주장을 믿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진술하는 현대의 양식이 성자의 신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결함있는 양식의 도입을 넓게 열었으므로,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되심'(autotheotes)에 대한 날카로운 주장이 필요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의 진술을 위해 교회가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는 세 사람을 든다면 터툴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칼빈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진술이 굉장한 반대를 받은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 내에서 칼빈의 교리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 천주교 사상이나 자세한 몇 부분에서 반대하는 루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알미니안적 반론을 간단히 주목해 보기로 한다. 루터파에 반대해서 알미나안주의자들은 오리겐주의자들의 종속설적 성향을 매우 분명히 가지고 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지만 "그의 정통성을 어느 정도는 견지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의 무게의 중심은 하향적이 되었다. 그래서 에피스코피우스의 가르침에서는 벌써 '영원한 출생'과 '나오심'에 대한 니케아 신조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삼위 간의 질서상(in order) 종속이 아니라, 삼위 간의 본성상(in nature)의 종속을 위한 출생과 나오심이 언급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켈셀레우스는 삼위 간의 '특정한 통일성'(asoecific unity) 이상을 가르치지 않았다". 조오지 벌 은 컬셀레우스보다는 덜 극단적이었다. 그러나 벌 이후에는 사무엘 클락이 오는바, 그는 "성자가 무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동등하게 있음을 허용하기를 하였으나,"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낳아졌음을 인정하려고 한다.
바른 삼위일체론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대립은 좀더 급진적인 일탈의 길을 준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관념론 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전체로서의 실재 안의 정.반.합 원리와 동일시하였다. 이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많은 신학자들이 신앙에서 벗어나 나아갔다. 결국 유니테리안주의도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섞는 옛 오류의 새로운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현대주의(modernism)는 이 모든 이단들의 행복한 상속자들인바, 그 모든 이단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 본질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는 그 오류가 좀더 깊이 나타나서 현대주의에 있어서는 성부 자신이 실재의 한 국면에 불과한 것이다. 참된 삼위일체론을 재확인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는 때가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때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그의 개념에 대해서 만큼이나 많은 오해가 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바르트의 칸트주의적인 원리는 자충족적인 본체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 교리와 같은 것이 있을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정통주의의 용어들은 사용하나 그 의미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비공유적 속성들은 바르트에 의해서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의 역동주의는 그로 하여금 그리하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도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세우기 위해서 교회는 세상과 생사의 투쟁을 하기 위해 준비한 듯하다. 그 삼위일체론을 진술함에서 교회는 자충족적이고, 신비하신 하나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확언하였다. 이 자충족적이시고 신비하신 존재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려 낮추신 것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이 그러하시듯 반드시 존재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이 어떤 사역을 특히 성부께 돌리고, 어떤 사역을 성자께 돌리며, 어떤 사역을 특별히 성령께 돌릴 때, 우리는 그렇게 돌리는 것(ascription) 배후에 신성 안에 참된 구별이 있음을 전제하게끔 된다. 반면, 각 위에게 돌려진 사역은 절대적인 한 분의 사역이다.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을 찾을 수 있다고도 지적한다. 우리는 언제나 신성 안에 있는 참된 위격적 구별(personal distinctions)을 무시하여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허용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무시하도록 신성 안의 삼위의 구별을 허용하므로써 아리우스주의로 나아갈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우리가 다음과 같이 하면 이 위험을 가장 잘 피할 수 있을 듯이 보인다: (a) 이 교리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안에서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의 교리와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신론을 발견하여 보는 것이고, (b)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언급 가능한 전제라고 아무런 변명없이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의 주된 난제는 우리가 우리의 사고를 잘못된 데서 시작하기가 너무나도 쉽다는 사실에 있는 듯하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해서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시작할 수도 있고, 유비적(analogically)으로 추론하기보다는 일의적(univocally)으로 추론을 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류 중의 하나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삼위일체가 자연인의 전제에서 합리적인 교리로 비그리스도인에게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삼위일체는 비합리적이라는 의미에서 신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오류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요, 그 위(person)에 있어서는 셋이라고 말하는 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통일성(unity)과 삼위성(trinity)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 다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즉 전체로서의 하나님(the whole Godhead)이 한 분(one person)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각 속성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연적(同延的, co-extensive)이라는 것을 살펴 본 바 있다. 어떤 종류의 해석되지 않은 존재 개념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소위 '순수 사실'의 망령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 존재의 일치성을 주장하게끔 된다. 또 비슷하게 우리는 신학자들이 신성의 각위가 신성의 존재와 동연적이라는 주장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위격적 특성의 구별이 단지 이름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 속성과 각 위의 하나님의 전체 존재와의 절대적 동연성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 속성들과 위격의 참된 구별(distinctions)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각 위는 하나님의 전체 본질(the whole essence of God)과 동등하며, 다른 두 위와도 동연적이고, 삼위 모두와도 동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다른 존재들, 즉 피조된 존재들에 반해서,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인 숫자적 단일성을 제시하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본체론적 삼위일체 안에서도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하나이심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는 한 분(one person)이시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인격성'(personality)란 수식어구가 그에게 대해 붙여질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성을 가지신 본질이신 것(an essence that has personality)이 아니라, 그는 절대 인격체(absolute personality)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분의 존재 안에서 존재의 구체적인 형태나 유형(a specific or generic type of being), 그리고 삼위의 위격적 존재 방식(three personal subsistences) 사이의 구별을 알 수 있다는 허용과 강요를 성경에 의해 받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이런 삼위일체가 우리의 철저한 파악을 넘어선 신비라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신비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존재의 전체성 가운데서, 우리의 파악을 넘어 서신다. 동시에 이 신비하신 하나님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전적으로 합리적이시므로 신비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합리성이 있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먼저 규정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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