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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삼위일체의 논쟁

하나님아들 2023. 4. 22. 15:04

4세기 삼위일체의 논쟁

서 론


4세기 아리오스의 가르침으로 야기된 논쟁은 급기야 최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325년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게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이제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일뿐 아니라,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삼위일체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곧 제국의 분열을 가져온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황제는 하나의 제국, 하나의 교회, 하나의 신앙이란 신념을 실현 시키고자 친히 교회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의 교회회의 소집자는 주로 황제이다. 여기서 도출된 하나의 신조를 토대로 제국의 통일을 도모하려 했던 황제는 이 신조에 반대하는 자들을 회유, 협박하거나 면직,유배를 보내곤 하였다. 아타나시오스가 다섯번의 면직과 복직을 반복한 것은 비단 아타나시우스뿐 아니라 많은 주교와 사제가 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이 시기는 삼위일체론 신앙이 교회회의를 통해 신조형태로 많은 신조들이 탄생한 "신조들의 시대"일 뿐 아니라, 기독교가 제국에 편입되면서 제국의 정치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고 ,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힘겨루기까지 겹쳐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갔다. 도저히 해결될 것 같이 않던 삼위일체가 381년 두번째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정적인 정의를 마련하는데 성공함으로 삼위일체는 일단락된다 .여기서는 그 과정을 전개하려 한다. 특히 아리오스와 아타나시오스를 주목해야한다.


A. 아리오스논쟁과 니케아 공의회




1.아리오스(280-337)


아리오스의 논쟁은 논쟁의 첫단계인 318-337년에만 적용된다.
그는 280년경 리비아에서 출생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제로서 바우카리스 교회를 지도했다. 아리오스는 성서를 주해하고 설교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변증과 논리에 능한자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의 가르침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와 갈등을 빚게되자 알렉산드로스 주교는 이집트와 리비아의 주교들을 불러 교회회의를 열고 아리오스와 그 추종자를 정죄하고 면직한다. 상황이 불리해진 아리오스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스 주교를 비롯한 여러 주교에 도움을 요청하자 동방교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는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니케아에서 최초의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한다.




2.아리오스의 사상


그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와 아들을 설명했다.
그는 초월적이고 자존적인 하나님과 그로 부터 나온 아들 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강조한다. '아들은 시작은 있지만 아버지는 없다' '아들은 무시간적으로 지어 졌지만 동시에 무로부터 생겼다'. 아들을 '변할수 있는 피조물의 영역에 포함시켰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동일 본질이 아니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파악할 수 없으며, 아버지가 보여주는 분량 많큼 만 보실수 있다. 아들은 고유한 본성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가변적이고 죄를 지을수 있는 존재지만 '행실의 부지런함과 수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순종과 덕행으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3.니케아 공의회와 니케아 신조


아리오스의 가르침으로 인한 교회 분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관심을 끌었다.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코자 제국내 모든 주교를 니케아 황궁으로 불러 325년 6월 19일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는 거의 두달동안 계속되었는데 아리오스 논쟁외에 부수적인 문제 곧 부활절을 춘분이후 첫번 째 만월 후 주일에 지키도록 정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오스에 대한 결정이었다.공의회는 아리오스의 가르침을 배격하고 다음과 같은 신조를 작성한다.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로부터,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ek tes ousias tou patros)나신 홀로 나신분(독생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님, 빛으로 부터 비롯된 빛,참 하나님으로 부터 비롯된 참 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poiethenta),나셨으며(gennethenta)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homoousion to patri),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지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내려오셔서 성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받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오르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또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그분은 나시기 전에는 없었다' '그분은 무로부터 생겼다'라고 말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상이한 실체 혹은 본질로 이루어졌거나, 피조물이고 변할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말하는 자들은 보편적이고 사도적 교회는 파문하노라.


니케아 신조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밝힌는데 초점을 맟추고 있다. 이 신조에 따르면 아들은 무로부터가 아니라 '아버지로 부터',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기원을 가진다. 또한 '나시다'라는 단어와 '지어지다'라는 단어를 구분하여 아들의 기원과 만물의 기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다.
이 신조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아리오스가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본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2명의 주교를 제외한 모든 주교가 이 신조에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확신하는 자는 소수였다고 보이며 , 대다수는 아리오스파의 가르침에 동조하지는 않을 지라도 니케아 신조를 완전히 지지할 수 없었다. 이 동일본질이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논쟁에서 두드러진 역활을 하지 못하다가 아타나시오스가 350-351년 "니케아 공의의 규정"을 저술하고 ,니케아 신조와 이 용어를 변호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4. 니케아 회의 이후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은 주로 동방교회안에서 일어난 분쟁이다.니케아 신조가 확정되었을 때 서방교회는 이 신조를 대체로 찬성하였으나 동방교회는 그렇지 못했다. 325년 니케아 신조가 확정되고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을 때 까지 황제는 이 신조를 극히 신성한 것으로 여겨 수호했지만,아리오스에 가담했다가 유배를 당했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스(후에 콘스틴티노플의 주교가 됨)와 유조니우스 그리고 아리오스와 니케아의 테오그니스를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겠다는 그들의 신앙고백서를 받고 그들을 다시 복직시켜 주었다.추방되었던 아리오스파 지도자들이 돌아오자, 겉으로는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였으나 속으로는 반 니케아파를 구성하고 ,니케아파의 열렬한 지지자들인 안티오키아의 유스타티오스,앙키라의 마르켈로스,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를 파면,추방시키도록 공략하여 결국 니케아 신조를 무력하게 만들려고 했다. 이 시기는 바로 니케아의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1) 안티오키아의 유스타티오스


안티오키아의 주교 유스타티오스는 니케아 신조의 수호자이다.그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했으며, 유세비오파(반 니케아파의 수장)에 맞서 오직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만 가진다고 가르쳤다.하나님과 로고스는 한 위격(hypostasis=ousia) 이지만 서로 구분된다.로고스는 하나님의 아들이며,본성적으로 하나이며, 아버지의 형상이요, 창조되지 않고 나셨으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사들과 세계가 지어졌다. 또한 로고스는 지혜이며 영이며 신적인 능력으로 아버지와 로고스는 공동으로 일하신다. 그가 성령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가 삼위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한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유스타티오스는 특별히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오스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는 카이사이리아의 유세비오스가 니케아 신앙을 변조시키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에 대해 유세비오스는 유스타티오스를 사벨리오스 주의로 공격했다.결국 유스타티오스는 327년 유세비우스가 주재한 안티오키아 교회회의에서 면직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를 트라키아의 크라야누폴리스로 유배했다. 그가 면직된후 그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주교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회를 만듦으로 안티오키아 교회는 수십년 동안 분열이 계속되었다.




2)앙키라의 마르켈로스


니케아 신조의 대변자였던 마르켈로스는 극단주의로 대표된다.
마르켈로스는 삼위나 세 인격등을 언급하지 앟고 오직 한 인격(hen prosopon), 한 위격(mia hypostasis), 한 본질(mia ousia)만 강조했다. 이 하나님은 나뉠수 없는 하나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안에서 구분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 특히 창조와 말씀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존재안에서 분리도 일으키지 않았다.
오직 로고스의 실제적인 활동 안에서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분리가 일어 났을 뿐이다. 하나님은 안식의 영으로 불가분리적으로 존재하는 단일자(monas)이며, 실제적인 활동에서만 삼위(trias)로 확대된다. 마르켈로스는 아버지와 로고스와 성령의 세 경륜을말하기 보다는 로고스-아들의 두 경륜을 주장했다.
첫째 경륜은 성육신 이전의 사역, 즉 하나님 안에서의 로고스의 활동과 관련된다. 둘째 경륜은 성육신의 사역으로 이 기간동안 성령은 아버지와 성육신하신 분으로 부터 나온다. 마르켈로스는 구원론과 교회론을 이 두번째 경륜과 연결시켰다.콘스탄티누스황제는 336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마르켈로스의 문제를 상정했고, 그는사벨리오스파로 몰려 면직되어 유배되었다.
그는 로마로 가서 서방교회의 지지를 받아 340년 50명 이상의 서방주교들이 참석한 교회회의에서 복권이 결정되있으며 이후
그는 동,서방교회의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다가, 345년 밀라노교회회의를 계기로 그에 대한 지지 분위기가 바뀌었다.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죄되었다.




3) 아타나시오스


327년 니코메디아 교회회의는 아리오스를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으며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스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스에게 아리오스를 사제로 복권시키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아타나시오스는 세계공의회에 이단으로 정죄된 자를 교회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들은 331년 아타나시오스를 갖은 죄목을 들어 고소했고, 결국 335년 티로스 교회회의에 의해 아타나시오스는 정죄되고 면직되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트리어로 유배되었다.




B. 동,서방교회의 갈등과 다양한 신조들의 탄생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사망 이후 제국은 그의 세아들인 콘스탄티누스2세,콘스탄스,콘스틴티우스2세에 의해 분활통치 되었으며,유배된 아타나시오스의 복귀문제로 동,서방교회의 갈등, 신학적대립, 그리고 340년 이후 콘스탄스와 콘스탄티우스의 권력투쟁으로 삼위일체 논쟁은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된다.




1. 안티오키아 교회회의와 신조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사망이후 삼위일체 논쟁은 동방의 유세비오스파와 서방의 니케아파의 대립구도로 진행되었다.서방의 콘스탄티누스2세와 콘스탄스황제는 서방에 유배된 동방의 주교들 아타나시오스,마르켈로스,파울로스등의 귀환을 허용했지만 유세비오스파와 콘스탄티우스황제는 이 니케아파의 주교들의 귀향을 허용치 않고 다시 추방했다.이들은 다시 로마로 피신하여 교황 율리우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교황 율리우스는 콘스탄스 황제의 지지를 얻어 340년 교회회의 열고 이들의 면직 조치가 부당하다가 선언했다.
동방의 유세비오스파는 341년 1월6일 콘스틴티우스 황제를 대동하고 안티오키아의 "황금예배당" 축성예식에 모여 세를 과시하고 동방교회와 관련된 소송건에 로마가 항소 법원이 될수 없다고 주장하고 세가지 신조를 가결했다. 이 신조들은 단일신론 특히 마르켈로스의 견해를 공격하고, 아리오스파의 가르침과 니케아신조를 모두 거부하는 중도파의 견해를 표현했다.
첫째 신조은 본질이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홀로나신 분으로 모든 시대 이전에 존재하시고 그 분의 낳으신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 아들은 영원히 왕과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함으로 마르켈로스를 경계했다. 마르켈로스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성육신 이후 시작되었으며 ,400년이 안되 종말을 맞을것이며 ,심판이후에는 끝난다고 주장했다.
두번째 신조는" 제2안티오키아 신조"로 불리는데 아들에 대해
" 아버지의 신성과 본질과 의지와 권능과 영광의 불변의 형상" 이라고 규정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니케아 신조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마르켈로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또한 아들의 나라는 무한한 시대까지 영속적으로 존속한다고 규정하여 마르켈로스를 반박했다. 또한 이 신조의 중요한 부분은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세 위격으로 규정한 부분인데 서방측은 위격을 실체로 이해하고 존재론적인 종속론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것은 신학적 갈등의 핵심이 되었다.
이 신조는 아들을 피조물, 생겨난 것, 지어진 것으로 말하는 자들에 대한 정죄를 선언하여 자신들이 아리오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세번째 신조는 아들이 "시대를 이전에 아버지로 부터 나신분,완전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완전한 하나님으로 ,하나님과 함께 위격적으로 존재하신다"고 고백하여 마르켈로스, 사벨리오스,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견해에 동조하는 자의 정죄로 신조를
끝맺는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유세비오스가 죽자 주교직을 빼앗겼던 파울로스가 유배지 폰토스에서 돌아와 주교직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파울로스를 쫓아내고 마케도니우스를 새 주교로 임명했고 파울로스는 트리어로 도피했다.
이에 서방의 황제 콘스탄스는 파울로스와 아타나시오스의 면직된 이유를 묻자 동방의 주교들은 342년 여름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회의를 열고 "제2안티오키아 신조"를 약간 수정한" 제4안티오키아 신조"를 서방황제에게 제시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변호했다.
이 신조는 본질이나 위격 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자신들이 아리오스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2.세르디카 교회회의(343년)와 안티오키아 교회회의(344)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본격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했다.동방교회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스렸던 영토 곧 이집트,그리스,그리고 소아시아(터키)에 있는 교회를 말하며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이에 비해 서방교회는 로마,갈리아(프랑스),스페인 지역에 있는 교회를 말하며 주로 라틴어를 사용했다.동방교회의 분열에 서방교회가 개입하면서 갈등이 커간 것이다. 이에 서방의 콘스탄스 황제는 동방의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동,서방 연합 교회회의를 열 것을 주장했고,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마지못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343년 늦 여름 많은 주교들이 동,서방 제국의 경계지역인 세르디카(소피아)에 모여 들었다.
그러나 서방 주교들은 동방 주교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타나시오스와 마르켈로스의 정죄를 무효화하고 교회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동방 주교들은 회의 참여를 거부하고 동방 황제의 영토인 필리포폴리스로 물러나 장문의 공식 서한을 작성하고, 342년 작성한 '제4 안티오키아 신조'와 동일한 신조를 첨부하여 서방 주교들에게 보냈다.이에 세르디카에 모인 서방 주교들은 동방 주교들의 행태와 그들의 삼위일체를 맹렬히 공격하는 공의회 서한을 작성했다.
이 서한에는 먼저 동방교회에서 면직된 아타나시오스,마르켈로스와 아스클레파스는 무죄이며,그들은 곧 복직되어야 하며,이들을 정죄에 앞장선 테오도로스,나르키오스, 스테파노스, 우르사키오스,발렌스,퀸티아노스등의 주교들은 면직되고 파문되어야한다고 했다.
또한 삼위일체에 관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위격들이 다르며 구별된다는 것을 공격했으며,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본질(ousia)이라고 부르는 위격(hypostasis)은 하나 라고 주장했다.
요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한 것은 위격의 하나됨을 말한다.이 선언은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는 나라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다고 밝혀 마르켈로스의 주장도 반박했다. 또한 성령에 대해 "우리는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을 믿고 인정하며 성령이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고 선언한다. 이는 우르사키오스와 발레스가 말씀과 성령이 모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는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교회일치를 이루려던 세르디카 교회회의는 오히려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서방 주교들은 동방의 세위격론이 아리오스주의로 삼신론을 주장한다고 공격했고, 동방 주교들은 서방의 일체론이 단일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380-450)는 양편이 서로 상대를 놀랍게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상대방을 헐뜯고 악평하던 그 근거에
대해 캄캄했다고 한다.그 가운데는 그리스어의 위격(hypostasis)을 라틴어의 실체(substantia)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혼란도 한목했다.그 단어는 persona로 번역했어야 했다.
세르디카에서 작성된 서방 주교들의 서한은 344년 년 카푸아의 빈켄티우스와 콜로뉴의 에우프라테스 두 주교에 의해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이에 동방 주교들은 344년 안티오키아에 모여 교회회을 열고 "장문 신앙고백"을 작성했는데, 이문서에는 제4안티오키아신조,세르디카 교회회의에서 파문된 자들의 명단,삼위일체에 대한 일곱항의 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선언에 의하면, 아들은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 나셨다.알수없고 이해할 수없는 방식으로 아들을 나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원이 없으되 아들은 기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실재와 인격을 고백하는 것은 세 신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요 홀로 나시지 않으신 분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시대들 이전에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아들의 신성을 명시적으로 주장했다. 본성상 시대들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완전한 참 하나님이시다. 시대들 이전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과 중보자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으며, 동정녀로 부터 태어 났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거부했다. 교리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 있는데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완전하며,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비숫하다'고 했다. 아들의 출생은 필연에 의하지 않고 아버지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나셨다고 하는 니케아신조의 가르침을 논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연합과 구별에 대해 말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은 직접적이며,뗄 수 없이 연합되며 나뉠 수 없게 존재하며 지극히 거룩한 삼위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믿으며,아버지를 하나님이라 부르며, 아들을 하나님이라 부르면서도 이들이 두 신이 아니라 한 신성의 존귀, 정확한 단일통치의 조화를 고백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선언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면서도 성령에 대해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344년 안티오키아 교회회의는 4명의 주교를 서방에 보내 서한을 전했으며 345년 콘스탄스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밀라노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의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방의 선언이 서방과 신학적 타협을 추구하려고 했기 때문에 서방교회가 어느정도 동방의 삼위일체를 이해한 듯 보인다.


3. 아타나이시오스의 복귀와 유배, 시르미움의 신학선언


345년 알랙산드리아 주교 사망으로 아타나시오스에게는 유리한상황이 만들어 졌다. 콘스탄스 황제는 즉각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아타나시오스를 복귀시키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346년 아타나시오스는 알랙산드리아로 복귀했다. 그러나 350년 찬탈자 마그넨티우스에 의해 콘스탄스 황제가 살해 되자 동방 주교들은 351년 시르미움 교회회의를 열고 아타나시오스를 면직시키고 342년 작성했던 "제4안티오키아 신조"를 다시 확인했다.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콘스탄스 황제의 죽음으로 자신이 면직되자 "니케아 공의회의 규정"을 저술하고 동일본질(homoousios)이란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351년 시르미움 교회회의를 이단적인 견해라 공격했다. 이러한 아타나시오스의 문제 제기로 인해 니케아 신조에서 나타난 '동일본질'이란 용어가 다시 신학적인 논쟁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35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찬탈자 마그넨티우스를 물리치고 제국의 단독 통치자 된다.그는 군대를 동원해 아타나시오스를 주교에서 몰아내자 그는 이집트 광야로 은신한다.
황제는 357년 교황 리베리우스를 강요하여 351년 시르미움 공의회의 신조를 받아 들이게 할뿐 아니라 코르도바의 호시우스도 황제의 압력으로 여러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니케아 신조를 정면으로 거부한 이 신학선언에 서명했다. 흔히 "시르미움의 신성모독"이라고 알려진 이 선언은 주교회의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인정되고 서명된 신조라기 보다는 이론적인 진술이며 따라서 정죄문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이 선언은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왔던 '동일본질'이란 용어를 언급하거나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동시에 이 선언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버지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한다. 아버지는 영예, 존귀, 영광과 엄위에서 아들보다 크시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한다.




4. 급진파의 등장과 성령론 논쟁


1) 성령론 논쟁


삼위일체 논쟁은 350년 대 말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된다.이집트에 아들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성령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나타났다. 아타나시오스는 그들을 '에둘러 말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방식', '비유'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오스는 아들뿐만 아니라 성령도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성령론에 대한 논쟁은 아타나시오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고 완전한 삼위일체 신학을 펼치도록 도왔다.


2) 급진파 아에티오스와 유노미오스


아에티오스는 "하나님의 나시지 않음과 나심에 대한 가르침"에서 '상이본질'을 변호하며 나시지 않은 아버지와 나신 아들과의 본질적 차이를 설명했다. 그의 제자가 유노미오스인데 그는 아에티오스의 사망 이후 상이본질파의 주요한 지도자가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유노미오스파로 불리운다.유노미오스의 가르침은 이러하다.아버지의 본질은 '나시지 않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출생은 본성에 따르면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는다.그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의해 나셨다는 이른바 의지출생을 강조하고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고 말하는 본질출생을 가르치는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오스를 비판했다. 그는 본질과 행위를 분명히 구분한다. 본질과 행위를 하나로 묶어서는 안된다. 본질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단순하지만, 행위는 시작과 끝이 있다.아들은 아버지의 자유로운 의지의 행위로 존재하게 되었고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과 뜻에 복종하며 아버지와 동일본질도 유사본질도 아니다.
그는 아들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성령의 신성도 부인한다.아버지의 피조물은 아들이며,아들의 피조물은 성령이다.성령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아들의 행위로 지어졌으며 만물중에 으뜸이요 가장 크신 분으로 홀로 나신 분의 유일한 피조물로 신성과 창조의 능력은 없지만 거룩하게 하며 가르치는 능력으로 존경받아야한다. 이러한 급격한 주장은 삼위일체의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5.유사본질파와 유사파의 등장


아에티오스와 유노미오스의 급진적 가르침은 니케아 신앙을 반대하는 데 일치를 보였던 동방 주교들을 분열시켰다.안티오키아의 주교 유독시오스는 아에티오스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주교들을 중심으로 안티오키아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357년"시르미움 신학선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결의했다. 유독시오스의 이러한 행보는 라오디키아의 게오르기오스와 앙키라의 바실리오스를 비롯한 소아시아 주교들을 경악시켰다. 그들은 앙키라 교회회의를 열고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에서 유사하며 '아들이 본질에서 다르다는 것은 그분이 아들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고 하면서 긴 선언문을 발표했다.
바로 유사 본질파가 출현한 것이다.
앙키라의 바실리오스는 콘스탄티우스 황제를 설득하여 상이 본질파인 유노미오스와 아에티오스를 비롯한 70명의 반대파를 유배시키고 유독시오스를 아르메니아로 보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동방과 서방에서 2개의 회의를 열어 교회일치를 이루려고 했다. 서방은 359년 7월에 아리미눔에서 모여 회의를 열고, 동방은 359년 9월에 셀레우키아에서 모임을 열었다. 이에 앞서 황제는 아리미눔과 셀레우키아 교회회의에서 인준을 받게될 신조의 초안을 359년 5월22일 시르미움에서 승인한다. 바로 이 신조를 가지고 동,서방교회는 회의를 열게된다.
이 신조는 그리스도의 음부로의 내리심에 대해 언급하는 최초의 신조이기도 하다.이 신조는 전문적인 용어를 배제하고 아들이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유사파의 생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신조는 다음과 같다.


'본질'이라는 용어가 충분한 숙고없이 (니케아 공의회의)교부들에 의해 채택되었고 성서가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는 가운데 실족거리가 되므로, 이 용어를 제거하고 앞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결코 본질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결의했다. 성서는 어디서도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본질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성서가 선포하고 가르치는 대로 아들은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유사하다(homoion)고 선언한다.


이 신조는 각 정파의 입장을 중재하고 모두가 인장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만들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이제 이 신조의 초안을 가지고 서방 주교들은 아리미눔에서 359년 7월에 모여 숙의했다. 그들의 결론은 이러하다. 그둘중 다수파는 357년 시르미움 신학선언을 니케아 신조의 폐기로 보고 니케아 신조의 고수를 주장했다. 그리고 니케아 신조를 폐기하고 새로운 신조를 만드려 했다는 이유로 소수파를 정죄했다.
다수파와 소수파는 각각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지만 황제가 준비한 유사파 신조가 다수파 주교들에게 거부당한 것을 달갑게 생각지 않은 황제는 그들을 니케로 보내졌고 결국 황제의 위협과 압력에 굴복하여 359년 10월 10일에 새 신조(니케의 신조)에 서명했다. 새 신조가 초안과 다른점은 아버지와 유사하다는 말 다음에 "모든면에서"가 생략되었으며 삼위일체 신학에서 본질뿐아니라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 했다는 것이다.
359년 9월 셀레우키아에서 개최된 동방 주교들의 회의도 초안으로 제시된 유사파 신조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다수파는 동일 본질이라는 용어만 제거하고 거의 수정없이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이기를 주장했지만( 이때 힐라리우스는 서방주교로 동방교회 회의에 참여하여 새로운 신조를 거부하게했다)
소수파는 니케아 신조를 대체하고 새로운 신조를 만들자고 하면서 초안과 비슷한 유사파 신조를 제시했다. 결국 다수파는 소수파의 주교 아카키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게오르기오스, 안티오키아의 유독시오스 주교를 면직시겼다. 다수파와 소수파는 각각 황제에게 사절을 보냈는데 황제는 소수파를 환영하고 다수파에게는 위협과 회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 결국 359년 12월31일 동,서방 교회 회의의 사절이 황제의 유사파적 신조를 인정하게 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회의 대표가 유사파적 신조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360년 1월 72명의 주교가 콘스탄티노플에 모여 니케에서 기초된 신조에 기초하여 새로운 신조를 만들고 이후에는 어떠한 신조도 만드는 것을 금했다.
 이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마케도니오스, 키지코스의 엘레우시오스, 앙키라의 바실리오스,셀레우키아의 네오나스, 폼페이오폴리스의 소프로니오스,예루살렘의 키릴로스등 아카키오스의 정적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결국 유사파가 승리하게 되었고 이것은 제롬으로 하여금 '전세계가 온통 아리우스파인것을 발견하고 신음하고 놀랐다'고 쓰게 만든 상황이다. 이시기는 아리오스파와 사벨리오스파 사이의 일대혼전이었다고 볼수있다. 두파는 서로 그런 별명을 붙여 욕설을 하였으나 그 별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실수한다.
이 신학적 논쟁에서 특히 주목할 인물이 힐라리우스다.
그는 서방의 주교로 유배생활중 동방의 삼위일체 신학을 면밀히 조사하고는 유사본질이 동일본질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가서 니케아 신조를 굳이 바꿀 필요가 없고 니케아 신조를 고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황제는 니케의 신조를 확정하고 힐라리우스와 뜻을 같이 하는 주교들을 탄압했다.그는 『콘스탄티우스 논박』을 저술하고 황제를 폭군이요 적그리스도라 지칭했다. 이러한 힐라리우스의 주장은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주교들의 인식이 좋지 않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회를 타 부황제 율리아누스는 갈리아에서 자신이 황제라고 선포하고 콘스탄티우스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6.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와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362)


361-381년에는 삼위일체 대한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361년 콘스틴티우스 황제의 사망으로 율리아누스가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면서 그는 이교정책을 펼쳐 개혁을 돌이키고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유배된 주교들을 복귀시키면서 362년 아타나시오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362년 아타나시오스 지도하에 니케아파는 362년 알렉산드리아에 모여 역사적인 전환점을 가져다 준 교회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교회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니케아 신조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는 하나의 본질과 세위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받아들였다.그들은 거룩한 삼위가 실재로 존재하며 하나의 신성,하나의 원리를 알고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며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오스는 이들의 주장이 니케아 신조와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또한 한 위격만 주장하는 자들도 받아 들였는데 이는 '자기들은 사벨리오스처럼 생각지 않으며 위격과 본질은 같은 것이며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나오신다는 사실과 본성이 동일하다는것 때문에 하나의 위격이라고 주장한다'는 답변을 듣고 이들도 니케아 신조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타나시오스와 함께 이 회의를 주도했던 베르켈라이의 유세비오스는 서방지역으로 가서 푸아티의 힐라이우스와 로마의 리베리우스와 손잡고 3년전 아리미움에서 지어진 유사파 신조 때문에 생긴 모든일을 처음으로 되돌려 놓았다.
율리아누스의사망으로 요비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아타나시오는황제에게 니케아 신조만이 정통이라 강조했다. 메레티오스 주재아래 안티오키아에서 회의가 열려 주교들은 교회일치를 위해 니케아 신조를 받아 들인다고 결의했지만 니케아 신조에서 동일본질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와 '본질에서 아버지와 비슷하다'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7. 발렌스 황제의 박해


요비아누스 황제의 사망으로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그는 자기의 동생 발렌스를 동방의 황제로 임명했다.발렌틴아누스는 니케아 신앙의 추종자 였지만 발렌스 황제는 360년 유사파 신조를 동방의 공식적 신조로 삼았다.370년 발렌스 황제는 니케아파를 비롯한 비유사파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다.
378-379년에는 새로운 정치적 상황으로 삼위일체 논쟁은 결정적 전환점을 맞게된다. 고트족이 다시 쳐들어 오자 발렌스 황제는 정통파 주교들을 다시 복권하고 전쟁터로 나가 378년 8월 아드리아노플 근처에서 목숨을 잃는다. 379년1월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를 동방 황제로 선출하고 두 황제는 모두 니케아 신조를 고백한다. 동,서방 황제가 모두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면서 니케아파는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맞이 하였고 동방과 서방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하였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사본질파가 동일본질을 받아 들이는 쪽으로 점차로 전환했다
는 것을 보여준다




C.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와 신조


1.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381)와 성령대적파


379년 1월 동,서방 두 황제가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379년 3월 두 황제의 이름으로 모든 이단을 금하고 정통 교회에 유리한 법령만을 인정하는 칙령이 발표되었다.379년 가을에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오스의 주도하에 153명의 주교가 안티오키아에 모여 로마 교회와의 신앙의 일치를 밝혔다.380년2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유명한 Cunctus populos 란 칙령을 발표하여 교황 다마수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로스 주교가 고백하는 신앙을 따르는 자들만이 공교회의 교인 될 수 있으며 이 신앙은 "동일한 권세와 거룩한 삼위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고 밝혔다. 381년 1월의 칙령은 이단들이 교회당을 소유하고 도시에 머무르는 것을 금하며 교회당을 공교회측에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성령론 문제와 안티오키아 교회의 분열 문제로 381년5월 150명의 주교가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플에서 역사적 공의회를 개최했다.공의회의 가장 중심적인 신학적인 문제는 성령론 문제였다.350년대 말 이집트에 "에둘러 말하느 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아들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성령의 신성은 인정하지
않고 '피조물,섬기는 영,더 나은 천사' 라고 주장했다.그러다 375년경에 성령의 신성을 반대하는 자들이 유노미오스의 제자들로부터 유사본질파의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380년경
성령대적파는 뚜렷한 집단을 형성하여 공동전선을 폈다.
그래서 이 문제도 공의회에서 시급히 다루어야 했다. 이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해설하기 위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작성하였으며 교회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규정은 콘스탄티노플을 '새 로마'로 규정하고 로마에 다음가는 영예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2. 니케아-콘스탄노플 신조(381)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니케아 신조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아들에 대해 몇가지 중요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본질로 부터'란 말이 빠졌지만 '동일 본질'이란 말을 분명히 했으며 '그 분의 나라는 끝이 없다'란 것을 붙여
마르켈로스의 가르침을 경계했다. 성령에 대해 성령을 '아버지로 부터 나오신 분'(발출)이라하여 성령의 출처를 명시하여 성령의 신성을 보여주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분으로 영광송에 포함시켰다. 성령에 대해 동일본질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는 자들을 끌어 들이려는 정통파의 노력을 반영한 것이며,4세기 신조에 많이 나타나는
보혜사란 말이사용되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381년 7월30일 황제는 칙령을 선포하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정된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위엄과 권능, 동일한영예와 통치를 지닌다고 고백하는 주교들에게 모든 교회를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신조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며 삼위일체 신학논쟁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킨 공의회다.이후에는 어떤 형태의 아리오스주의도 교회에 근본적인 위협을 줄 수 없었다.


D. 결 론


아리오스의 가르침으로 인한 삼위일체 논쟁은 급기야 325년
최초의 니케아 공의회를 열리게 했다. 거기서 결정된 니케아
신조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리기 까지 반세기를 넘게 치열하게 싸우게된다. 325-381년까지 수많은 교회회의가 열렸지만 정식으로 공의회로 인정된 것은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도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 하기 어렵다.
서방 주교들은 초대되지 않았으며 대표자도 파견되지 않았다.
공의회에 참여한 주교들도 이 회의를 동방지역 주교들의 회의로 생각했고 황제는 공의회 법령을 동방지역에만 공포했으며 공의회도 결정사항을 로마나 서방 주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열리기까지 431년 에베소 공의회를 두번째
공의회로 알려졌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두번째 공의회로
인정된 것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다.
545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칙령을 반포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431년 에베소 공의회,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성경의 4복음서에 비유하여 '거룩한 네 공의회'라고 선포했다.
325-381년까지 삼위일체를 두고 치열하게 싸운 것이 이제 막을내리게 되었다. 수많은 교회회의가 열렸고 수많은 신조가 탄생했다. 황제가 누가 되는냐에 따라 삼위일체가 결정이 되고 동방에서 벌여진 일에 서방교회가 개입하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되던 것이 극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우리는 4세기 삼위일체 논쟁은 단순히 추상적 사변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론의 핵심 주제를 다루는 논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출처] 4세기 삼위일체의 논쟁|작성자 kaistq




서 론


4세기 아리오스의 가르침으로 야기된 논쟁은 급기야 최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325년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게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이제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일뿐 아니라,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삼위일체로 인한 교회의 분열은 ,곧 제국의 분열을 가져온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황제는 하나의 제국, 하나의 교회, 하나의 신앙이란 신념을 실현 시키고자 친히 교회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그래서 이 시기의 교회회의 소집자는 주로 황제이다. 여기서 도출된 하나의 신조를 토대로 제국의 통일을 도모하려 했던 황제는 이 신조에 반대하는 자들을 회유, 협박하거나 면직,유배를 보내곤 하였다. 아타나시오스가 다섯번의 면직과 복직을 반복한 것은 비단 아타나시우스뿐 아니라 많은 주교와 사제가 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이 시기는 삼위일체론 신앙이 교회회의를 통해 신조형태로 많은 신조들이 탄생한 "신조들의 시대"일 뿐 아니라, 기독교가 제국에 편입되면서 제국의 정치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고 ,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힘겨루기까지 겹쳐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갔다. 도저히 해결될 것 같이 않던 삼위일체가 381년 두번째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정적인 정의를 마련하는데 성공함으로 삼위일체는 일단락된다 .여기서는 그 과정을 전개하려 한다. 특히 아리오스와 아타나시오스를 주목해야한다.


A. 아리오스논쟁과 니케아 공의회




1.아리오스(280-337)


아리오스의 논쟁은 논쟁의 첫단계인 318-337년에만 적용된다.
그는 280년경 리비아에서 출생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사제로서 바우카리스 교회를 지도했다. 아리오스는 성서를 주해하고 설교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변증과 논리에 능한자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의 가르침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와 갈등을 빚게되자 알렉산드로스 주교는 이집트와 리비아의 주교들을 불러 교회회의를 열고 아리오스와 그 추종자를 정죄하고 면직한다. 상황이 불리해진 아리오스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스 주교를 비롯한 여러 주교에 도움을 요청하자 동방교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는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니케아에서 최초의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소집한다.




2.아리오스의 사상


그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와 아들을 설명했다.
그는 초월적이고 자존적인 하나님과 그로 부터 나온 아들 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강조한다. '아들은 시작은 있지만 아버지는 없다' '아들은 무시간적으로 지어 졌지만 동시에 무로부터 생겼다'. 아들을 '변할수 있는 피조물의 영역에 포함시켰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동일 본질이 아니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파악할 수 없으며, 아버지가 보여주는 분량 많큼 만 보실수 있다. 아들은 고유한 본성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가변적이고 죄를 지을수 있는 존재지만 '행실의 부지런함과 수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순종과 덕행으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3.니케아 공의회와 니케아 신조


아리오스의 가르침으로 인한 교회 분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관심을 끌었다. 황제는 이 문제를 해결코자 제국내 모든 주교를 니케아 황궁으로 불러 325년 6월 19일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는 거의 두달동안 계속되었는데 아리오스 논쟁외에 부수적인 문제 곧 부활절을 춘분이후 첫번 째 만월 후 주일에 지키도록 정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오스에 대한 결정이었다.공의회는 아리오스의 가르침을 배격하고 다음과 같은 신조를 작성한다.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로부터,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ek tes ousias tou patros)나신 홀로 나신분(독생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님, 빛으로 부터 비롯된 빛,참 하나님으로 부터 비롯된 참 하나님이시며 ,지어지지 않고(poiethenta),나셨으며(gennethenta)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며(homoousion to patri),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지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내려오셔서 성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받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오르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또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하지만 '그분이 없었던 적이 있었다','그분은 나시기 전에는 없었다' '그분은 무로부터 생겼다'라고 말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상이한 실체 혹은 본질로 이루어졌거나, 피조물이고 변할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말하는 자들은 보편적이고 사도적 교회는 파문하노라.


니케아 신조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밝힌는데 초점을 맟추고 있다. 이 신조에 따르면 아들은 무로부터가 아니라 '아버지로 부터',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기원을 가진다. 또한 '나시다'라는 단어와 '지어지다'라는 단어를 구분하여 아들의 기원과 만물의 기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다.
이 신조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아리오스가 처음 사용했는데 그는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본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2명의 주교를 제외한 모든 주교가 이 신조에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확신하는 자는 소수였다고 보이며 , 대다수는 아리오스파의 가르침에 동조하지는 않을 지라도 니케아 신조를 완전히 지지할 수 없었다. 이 동일본질이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논쟁에서 두드러진 역활을 하지 못하다가 아타나시오스가 350-351년 "니케아 공의의 규정"을 저술하고 ,니케아 신조와 이 용어를 변호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4. 니케아 회의 이후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은 주로 동방교회안에서 일어난 분쟁이다.니케아 신조가 확정되었을 때 서방교회는 이 신조를 대체로 찬성하였으나 동방교회는 그렇지 못했다. 325년 니케아 신조가 확정되고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을 때 까지 황제는 이 신조를 극히 신성한 것으로 여겨 수호했지만,아리오스에 가담했다가 유배를 당했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스(후에 콘스틴티노플의 주교가 됨)와 유조니우스 그리고 아리오스와 니케아의 테오그니스를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겠다는 그들의 신앙고백서를 받고 그들을 다시 복직시켜 주었다.추방되었던 아리오스파 지도자들이 돌아오자, 겉으로는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였으나 속으로는 반 니케아파를 구성하고 ,니케아파의 열렬한 지지자들인 안티오키아의 유스타티오스,앙키라의 마르켈로스,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를 파면,추방시키도록 공략하여 결국 니케아 신조를 무력하게 만들려고 했다. 이 시기는 바로 니케아의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1) 안티오키아의 유스타티오스


안티오키아의 주교 유스타티오스는 니케아 신조의 수호자이다.그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했으며, 유세비오파(반 니케아파의 수장)에 맞서 오직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만 가진다고 가르쳤다.하나님과 로고스는 한 위격(hypostasis=ousia) 이지만 서로 구분된다.로고스는 하나님의 아들이며,본성적으로 하나이며, 아버지의 형상이요, 창조되지 않고 나셨으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사들과 세계가 지어졌다. 또한 로고스는 지혜이며 영이며 신적인 능력으로 아버지와 로고스는 공동으로 일하신다. 그가 성령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가 삼위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한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유스타티오스는 특별히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오스를 맹렬히 공격했다. 그는 카이사이리아의 유세비오스가 니케아 신앙을 변조시키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에 대해 유세비오스는 유스타티오스를 사벨리오스 주의로 공격했다.결국 유스타티오스는 327년 유세비우스가 주재한 안티오키아 교회회의에서 면직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를 트라키아의 크라야누폴리스로 유배했다. 그가 면직된후 그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주교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회를 만듦으로 안티오키아 교회는 수십년 동안 분열이 계속되었다.




2)앙키라의 마르켈로스


니케아 신조의 대변자였던 마르켈로스는 극단주의로 대표된다.
마르켈로스는 삼위나 세 인격등을 언급하지 앟고 오직 한 인격(hen prosopon), 한 위격(mia hypostasis), 한 본질(mia ousia)만 강조했다. 이 하나님은 나뉠수 없는 하나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안에서 구분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 특히 창조와 말씀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존재안에서 분리도 일으키지 않았다.
오직 로고스의 실제적인 활동 안에서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분리가 일어 났을 뿐이다. 하나님은 안식의 영으로 불가분리적으로 존재하는 단일자(monas)이며, 실제적인 활동에서만 삼위(trias)로 확대된다. 마르켈로스는 아버지와 로고스와 성령의 세 경륜을말하기 보다는 로고스-아들의 두 경륜을 주장했다.
첫째 경륜은 성육신 이전의 사역, 즉 하나님 안에서의 로고스의 활동과 관련된다. 둘째 경륜은 성육신의 사역으로 이 기간동안 성령은 아버지와 성육신하신 분으로 부터 나온다. 마르켈로스는 구원론과 교회론을 이 두번째 경륜과 연결시켰다.콘스탄티누스황제는 336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마르켈로스의 문제를 상정했고, 그는사벨리오스파로 몰려 면직되어 유배되었다.
그는 로마로 가서 서방교회의 지지를 받아 340년 50명 이상의 서방주교들이 참석한 교회회의에서 복권이 결정되있으며 이후
그는 동,서방교회의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다가, 345년 밀라노교회회의를 계기로 그에 대한 지지 분위기가 바뀌었다.그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죄되었다.




3) 아타나시오스


327년 니코메디아 교회회의는 아리오스를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으며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스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스에게 아리오스를 사제로 복권시키도록 압력을 가했지만, 아타나시오스는 세계공의회에 이단으로 정죄된 자를 교회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들은 331년 아타나시오스를 갖은 죄목을 들어 고소했고, 결국 335년 티로스 교회회의에 의해 아타나시오스는 정죄되고 면직되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트리어로 유배되었다.




B. 동,서방교회의 갈등과 다양한 신조들의 탄생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사망 이후 제국은 그의 세아들인 콘스탄티누스2세,콘스탄스,콘스틴티우스2세에 의해 분활통치 되었으며,유배된 아타나시오스의 복귀문제로 동,서방교회의 갈등, 신학적대립, 그리고 340년 이후 콘스탄스와 콘스탄티우스의 권력투쟁으로 삼위일체 논쟁은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된다.




1. 안티오키아 교회회의와 신조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사망이후 삼위일체 논쟁은 동방의 유세비오스파와 서방의 니케아파의 대립구도로 진행되었다.서방의 콘스탄티누스2세와 콘스탄스황제는 서방에 유배된 동방의 주교들 아타나시오스,마르켈로스,파울로스등의 귀환을 허용했지만 유세비오스파와 콘스탄티우스황제는 이 니케아파의 주교들의 귀향을 허용치 않고 다시 추방했다.이들은 다시 로마로 피신하여 교황 율리우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교황 율리우스는 콘스탄스 황제의 지지를 얻어 340년 교회회의 열고 이들의 면직 조치가 부당하다가 선언했다.
동방의 유세비오스파는 341년 1월6일 콘스틴티우스 황제를 대동하고 안티오키아의 "황금예배당" 축성예식에 모여 세를 과시하고 동방교회와 관련된 소송건에 로마가 항소 법원이 될수 없다고 주장하고 세가지 신조를 가결했다. 이 신조들은 단일신론 특히 마르켈로스의 견해를 공격하고, 아리오스파의 가르침과 니케아신조를 모두 거부하는 중도파의 견해를 표현했다.
첫째 신조은 본질이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홀로나신 분으로 모든 시대 이전에 존재하시고 그 분의 낳으신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 아들은 영원히 왕과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함으로 마르켈로스를 경계했다. 마르켈로스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성육신 이후 시작되었으며 ,400년이 안되 종말을 맞을것이며 ,심판이후에는 끝난다고 주장했다.
두번째 신조는" 제2안티오키아 신조"로 불리는데 아들에 대해
" 아버지의 신성과 본질과 의지와 권능과 영광의 불변의 형상" 이라고 규정하여,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니케아 신조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마르켈로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또한 아들의 나라는 무한한 시대까지 영속적으로 존속한다고 규정하여 마르켈로스를 반박했다. 또한 이 신조의 중요한 부분은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세 위격으로 규정한 부분인데 서방측은 위격을 실체로 이해하고 존재론적인 종속론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것은 신학적 갈등의 핵심이 되었다.
이 신조는 아들을 피조물, 생겨난 것, 지어진 것으로 말하는 자들에 대한 정죄를 선언하여 자신들이 아리오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세번째 신조는 아들이 "시대를 이전에 아버지로 부터 나신분,완전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완전한 하나님으로 ,하나님과 함께 위격적으로 존재하신다"고 고백하여 마르켈로스, 사벨리오스,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견해에 동조하는 자의 정죄로 신조를
끝맺는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유세비오스가 죽자 주교직을 빼앗겼던 파울로스가 유배지 폰토스에서 돌아와 주교직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파울로스를 쫓아내고 마케도니우스를 새 주교로 임명했고 파울로스는 트리어로 도피했다.
이에 서방의 황제 콘스탄스는 파울로스와 아타나시오스의 면직된 이유를 묻자 동방의 주교들은 342년 여름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회의를 열고 "제2안티오키아 신조"를 약간 수정한" 제4안티오키아 신조"를 서방황제에게 제시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변호했다.
이 신조는 본질이나 위격 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자신들이 아리오스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2.세르디카 교회회의(343년)와 안티오키아 교회회의(344)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본격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했다.동방교회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스렸던 영토 곧 이집트,그리스,그리고 소아시아(터키)에 있는 교회를 말하며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이에 비해 서방교회는 로마,갈리아(프랑스),스페인 지역에 있는 교회를 말하며 주로 라틴어를 사용했다.동방교회의 분열에 서방교회가 개입하면서 갈등이 커간 것이다. 이에 서방의 콘스탄스 황제는 동방의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동,서방 연합 교회회의를 열 것을 주장했고,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마지못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343년 늦 여름 많은 주교들이 동,서방 제국의 경계지역인 세르디카(소피아)에 모여 들었다.
그러나 서방 주교들은 동방 주교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타나시오스와 마르켈로스의 정죄를 무효화하고 교회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동방 주교들은 회의 참여를 거부하고 동방 황제의 영토인 필리포폴리스로 물러나 장문의 공식 서한을 작성하고, 342년 작성한 '제4 안티오키아 신조'와 동일한 신조를 첨부하여 서방 주교들에게 보냈다.이에 세르디카에 모인 서방 주교들은 동방 주교들의 행태와 그들의 삼위일체를 맹렬히 공격하는 공의회 서한을 작성했다.
이 서한에는 먼저 동방교회에서 면직된 아타나시오스,마르켈로스와 아스클레파스는 무죄이며,그들은 곧 복직되어야 하며,이들을 정죄에 앞장선 테오도로스,나르키오스, 스테파노스, 우르사키오스,발렌스,퀸티아노스등의 주교들은 면직되고 파문되어야한다고 했다.
또한 삼위일체에 관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위격들이 다르며 구별된다는 것을 공격했으며,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본질(ousia)이라고 부르는 위격(hypostasis)은 하나 라고 주장했다.
요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한 것은 위격의 하나됨을 말한다.이 선언은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는 나라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다고 밝혀 마르켈로스의 주장도 반박했다. 또한 성령에 대해 "우리는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을 믿고 인정하며 성령이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고 선언한다. 이는 우르사키오스와 발레스가 말씀과 성령이 모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다는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교회일치를 이루려던 세르디카 교회회의는 오히려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서방 주교들은 동방의 세위격론이 아리오스주의로 삼신론을 주장한다고 공격했고, 동방 주교들은 서방의 일체론이 단일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역사가인 소크라테스(380-450)는 양편이 서로 상대를 놀랍게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상대방을 헐뜯고 악평하던 그 근거에
대해 캄캄했다고 한다.그 가운데는 그리스어의 위격(hypostasis)을 라틴어의 실체(substantia)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혼란도 한목했다.그 단어는 persona로 번역했어야 했다.
세르디카에서 작성된 서방 주교들의 서한은 344년 년 카푸아의 빈켄티우스와 콜로뉴의 에우프라테스 두 주교에 의해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이에 동방 주교들은 344년 안티오키아에 모여 교회회을 열고 "장문 신앙고백"을 작성했는데, 이문서에는 제4안티오키아신조,세르디카 교회회의에서 파문된 자들의 명단,삼위일체에 대한 일곱항의 선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선언에 의하면, 아들은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 나셨다.알수없고 이해할 수없는 방식으로 아들을 나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원이 없으되 아들은 기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실재와 인격을 고백하는 것은 세 신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요 홀로 나시지 않으신 분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시대들 이전에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아들의 신성을 명시적으로 주장했다. 본성상 시대들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완전한 참 하나님이시다. 시대들 이전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과 중보자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으며, 동정녀로 부터 태어 났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거부했다. 교리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 있는데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완전하며,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비숫하다'고 했다. 아들의 출생은 필연에 의하지 않고 아버지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나셨다고 하는 니케아신조의 가르침을 논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연합과 구별에 대해 말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은 직접적이며,뗄 수 없이 연합되며 나뉠 수 없게 존재하며 지극히 거룩한 삼위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믿으며,아버지를 하나님이라 부르며, 아들을 하나님이라 부르면서도 이들이 두 신이 아니라 한 신성의 존귀, 정확한 단일통치의 조화를 고백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선언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면서도 성령에 대해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다.
344년 안티오키아 교회회의는 4명의 주교를 서방에 보내 서한을 전했으며 345년 콘스탄스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밀라노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의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방의 선언이 서방과 신학적 타협을 추구하려고 했기 때문에 서방교회가 어느정도 동방의 삼위일체를 이해한 듯 보인다.


3. 아타나이시오스의 복귀와 유배, 시르미움의 신학선언


345년 알랙산드리아 주교 사망으로 아타나시오스에게는 유리한상황이 만들어 졌다. 콘스탄스 황제는 즉각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아타나시오스를 복귀시키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346년 아타나시오스는 알랙산드리아로 복귀했다. 그러나 350년 찬탈자 마그넨티우스에 의해 콘스탄스 황제가 살해 되자 동방 주교들은 351년 시르미움 교회회의를 열고 아타나시오스를 면직시키고 342년 작성했던 "제4안티오키아 신조"를 다시 확인했다.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콘스탄스 황제의 죽음으로 자신이 면직되자 "니케아 공의회의 규정"을 저술하고 동일본질(homoousios)이란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351년 시르미움 교회회의를 이단적인 견해라 공격했다. 이러한 아타나시오스의 문제 제기로 인해 니케아 신조에서 나타난 '동일본질'이란 용어가 다시 신학적인 논쟁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35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찬탈자 마그넨티우스를 물리치고 제국의 단독 통치자 된다.그는 군대를 동원해 아타나시오스를 주교에서 몰아내자 그는 이집트 광야로 은신한다.
황제는 357년 교황 리베리우스를 강요하여 351년 시르미움 공의회의 신조를 받아 들이게 할뿐 아니라 코르도바의 호시우스도 황제의 압력으로 여러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니케아 신조를 정면으로 거부한 이 신학선언에 서명했다. 흔히 "시르미움의 신성모독"이라고 알려진 이 선언은 주교회의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인정되고 서명된 신조라기 보다는 이론적인 진술이며 따라서 정죄문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이 선언은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왔던 '동일본질'이란 용어를 언급하거나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동시에 이 선언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버지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한다. 아버지는 영예, 존귀, 영광과 엄위에서 아들보다 크시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한다.




4. 급진파의 등장과 성령론 논쟁


1) 성령론 논쟁


삼위일체 논쟁은 350년 대 말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된다.이집트에 아들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성령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나타났다. 아타나시오스는 그들을 '에둘러 말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방식', '비유'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오스는 아들뿐만 아니라 성령도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성령론에 대한 논쟁은 아타나시오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고 완전한 삼위일체 신학을 펼치도록 도왔다.


2) 급진파 아에티오스와 유노미오스


아에티오스는 "하나님의 나시지 않음과 나심에 대한 가르침"에서 '상이본질'을 변호하며 나시지 않은 아버지와 나신 아들과의 본질적 차이를 설명했다. 그의 제자가 유노미오스인데 그는 아에티오스의 사망 이후 상이본질파의 주요한 지도자가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유노미오스파로 불리운다.유노미오스의 가르침은 이러하다.아버지의 본질은 '나시지 않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출생은 본성에 따르면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는다.그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의해 나셨다는 이른바 의지출생을 강조하고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고 말하는 본질출생을 가르치는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오스를 비판했다. 그는 본질과 행위를 분명히 구분한다. 본질과 행위를 하나로 묶어서는 안된다. 본질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단순하지만, 행위는 시작과 끝이 있다.아들은 아버지의 자유로운 의지의 행위로 존재하게 되었고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과 뜻에 복종하며 아버지와 동일본질도 유사본질도 아니다.
그는 아들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성령의 신성도 부인한다.아버지의 피조물은 아들이며,아들의 피조물은 성령이다.성령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아들의 행위로 지어졌으며 만물중에 으뜸이요 가장 크신 분으로 홀로 나신 분의 유일한 피조물로 신성과 창조의 능력은 없지만 거룩하게 하며 가르치는 능력으로 존경받아야한다. 이러한 급격한 주장은 삼위일체의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5.유사본질파와 유사파의 등장


아에티오스와 유노미오스의 급진적 가르침은 니케아 신앙을 반대하는 데 일치를 보였던 동방 주교들을 분열시켰다.안티오키아의 주교 유독시오스는 아에티오스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주교들을 중심으로 안티오키아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357년"시르미움 신학선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결의했다. 유독시오스의 이러한 행보는 라오디키아의 게오르기오스와 앙키라의 바실리오스를 비롯한 소아시아 주교들을 경악시켰다. 그들은 앙키라 교회회의를 열고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에서 유사하며 '아들이 본질에서 다르다는 것은 그분이 아들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고 하면서 긴 선언문을 발표했다.
바로 유사 본질파가 출현한 것이다.
앙키라의 바실리오스는 콘스탄티우스 황제를 설득하여 상이 본질파인 유노미오스와 아에티오스를 비롯한 70명의 반대파를 유배시키고 유독시오스를 아르메니아로 보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동방과 서방에서 2개의 회의를 열어 교회일치를 이루려고 했다. 서방은 359년 7월에 아리미눔에서 모여 회의를 열고, 동방은 359년 9월에 셀레우키아에서 모임을 열었다. 이에 앞서 황제는 아리미눔과 셀레우키아 교회회의에서 인준을 받게될 신조의 초안을 359년 5월22일 시르미움에서 승인한다. 바로 이 신조를 가지고 동,서방교회는 회의를 열게된다.
이 신조는 그리스도의 음부로의 내리심에 대해 언급하는 최초의 신조이기도 하다.이 신조는 전문적인 용어를 배제하고 아들이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유사파의 생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신조는 다음과 같다.


'본질'이라는 용어가 충분한 숙고없이 (니케아 공의회의)교부들에 의해 채택되었고 성서가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는 가운데 실족거리가 되므로, 이 용어를 제거하고 앞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결코 본질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결의했다. 성서는 어디서도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본질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성서가 선포하고 가르치는 대로 아들은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유사하다(homoion)고 선언한다.


이 신조는 각 정파의 입장을 중재하고 모두가 인장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만들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이제 이 신조의 초안을 가지고 서방 주교들은 아리미눔에서 359년 7월에 모여 숙의했다. 그들의 결론은 이러하다. 그둘중 다수파는 357년 시르미움 신학선언을 니케아 신조의 폐기로 보고 니케아 신조의 고수를 주장했다. 그리고 니케아 신조를 폐기하고 새로운 신조를 만드려 했다는 이유로 소수파를 정죄했다.
다수파와 소수파는 각각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지만 황제가 준비한 유사파 신조가 다수파 주교들에게 거부당한 것을 달갑게 생각지 않은 황제는 그들을 니케로 보내졌고 결국 황제의 위협과 압력에 굴복하여 359년 10월 10일에 새 신조(니케의 신조)에 서명했다. 새 신조가 초안과 다른점은 아버지와 유사하다는 말 다음에 "모든면에서"가 생략되었으며 삼위일체 신학에서 본질뿐아니라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 했다는 것이다.
359년 9월 셀레우키아에서 개최된 동방 주교들의 회의도 초안으로 제시된 유사파 신조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다수파는 동일 본질이라는 용어만 제거하고 거의 수정없이 니케아 신조를 받아들이기를 주장했지만( 이때 힐라리우스는 서방주교로 동방교회 회의에 참여하여 새로운 신조를 거부하게했다)
소수파는 니케아 신조를 대체하고 새로운 신조를 만들자고 하면서 초안과 비슷한 유사파 신조를 제시했다. 결국 다수파는 소수파의 주교 아카키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게오르기오스, 안티오키아의 유독시오스 주교를 면직시겼다. 다수파와 소수파는 각각 황제에게 사절을 보냈는데 황제는 소수파를 환영하고 다수파에게는 위협과 회유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 결국 359년 12월31일 동,서방 교회 회의의 사절이 황제의 유사파적 신조를 인정하게 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회의 대표가 유사파적 신조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360년 1월 72명의 주교가 콘스탄티노플에 모여 니케에서 기초된 신조에 기초하여 새로운 신조를 만들고 이후에는 어떠한 신조도 만드는 것을 금했다.
 이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마케도니오스, 키지코스의 엘레우시오스, 앙키라의 바실리오스,셀레우키아의 네오나스, 폼페이오폴리스의 소프로니오스,예루살렘의 키릴로스등 아카키오스의 정적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결국 유사파가 승리하게 되었고 이것은 제롬으로 하여금 '전세계가 온통 아리우스파인것을 발견하고 신음하고 놀랐다'고 쓰게 만든 상황이다. 이시기는 아리오스파와 사벨리오스파 사이의 일대혼전이었다고 볼수있다. 두파는 서로 그런 별명을 붙여 욕설을 하였으나 그 별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실수한다.
이 신학적 논쟁에서 특히 주목할 인물이 힐라리우스다.
그는 서방의 주교로 유배생활중 동방의 삼위일체 신학을 면밀히 조사하고는 유사본질이 동일본질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가서 니케아 신조를 굳이 바꿀 필요가 없고 니케아 신조를 고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황제는 니케의 신조를 확정하고 힐라리우스와 뜻을 같이 하는 주교들을 탄압했다.그는 『콘스탄티우스 논박』을 저술하고 황제를 폭군이요 적그리스도라 지칭했다. 이러한 힐라리우스의 주장은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주교들의 인식이 좋지 않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회를 타 부황제 율리아누스는 갈리아에서 자신이 황제라고 선포하고 콘스탄티우스에게 도전할 수 있었다.


6.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와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362)


361-381년에는 삼위일체 대한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361년 콘스틴티우스 황제의 사망으로 율리아누스가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면서 그는 이교정책을 펼쳐 개혁을 돌이키고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유배된 주교들을 복귀시키면서 362년 아타나시오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362년 아타나시오스 지도하에 니케아파는 362년 알렉산드리아에 모여 역사적인 전환점을 가져다 준 교회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는 교회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니케아 신조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이 회의는 하나의 본질과 세위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받아들였다.그들은 거룩한 삼위가 실재로 존재하며 하나의 신성,하나의 원리를 알고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며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오스는 이들의 주장이 니케아 신조와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또한 한 위격만 주장하는 자들도 받아 들였는데 이는 '자기들은 사벨리오스처럼 생각지 않으며 위격과 본질은 같은 것이며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 부터 나오신다는 사실과 본성이 동일하다는것 때문에 하나의 위격이라고 주장한다'는 답변을 듣고 이들도 니케아 신조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타나시오스와 함께 이 회의를 주도했던 베르켈라이의 유세비오스는 서방지역으로 가서 푸아티의 힐라이우스와 로마의 리베리우스와 손잡고 3년전 아리미움에서 지어진 유사파 신조 때문에 생긴 모든일을 처음으로 되돌려 놓았다.
율리아누스의사망으로 요비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아타나시오는황제에게 니케아 신조만이 정통이라 강조했다. 메레티오스 주재아래 안티오키아에서 회의가 열려 주교들은 교회일치를 위해 니케아 신조를 받아 들인다고 결의했지만 니케아 신조에서 동일본질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와 '본질에서 아버지와 비슷하다'것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7. 발렌스 황제의 박해


요비아누스 황제의 사망으로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그는 자기의 동생 발렌스를 동방의 황제로 임명했다.발렌틴아누스는 니케아 신앙의 추종자 였지만 발렌스 황제는 360년 유사파 신조를 동방의 공식적 신조로 삼았다.370년 발렌스 황제는 니케아파를 비롯한 비유사파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다.
378-379년에는 새로운 정치적 상황으로 삼위일체 논쟁은 결정적 전환점을 맞게된다. 고트족이 다시 쳐들어 오자 발렌스 황제는 정통파 주교들을 다시 복권하고 전쟁터로 나가 378년 8월 아드리아노플 근처에서 목숨을 잃는다. 379년1월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를 동방 황제로 선출하고 두 황제는 모두 니케아 신조를 고백한다. 동,서방 황제가 모두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면서 니케아파는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맞이 하였고 동방과 서방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하였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사본질파가 동일본질을 받아 들이는 쪽으로 점차로 전환했다
는 것을 보여준다




C.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와 신조


1.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381)와 성령대적파


379년 1월 동,서방 두 황제가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379년 3월 두 황제의 이름으로 모든 이단을 금하고 정통 교회에 유리한 법령만을 인정하는 칙령이 발표되었다.379년 가을에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오스의 주도하에 153명의 주교가 안티오키아에 모여 로마 교회와의 신앙의 일치를 밝혔다.380년2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유명한 Cunctus populos 란 칙령을 발표하여 교황 다마수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페트로스 주교가 고백하는 신앙을 따르는 자들만이 공교회의 교인 될 수 있으며 이 신앙은 "동일한 권세와 거룩한 삼위 가운데 계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고 밝혔다. 381년 1월의 칙령은 이단들이 교회당을 소유하고 도시에 머무르는 것을 금하며 교회당을 공교회측에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성령론 문제와 안티오키아 교회의 분열 문제로 381년5월 150명의 주교가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플에서 역사적 공의회를 개최했다.공의회의 가장 중심적인 신학적인 문제는 성령론 문제였다.350년대 말 이집트에 "에둘러 말하느 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아들의 신성은 인정하지만 성령의 신성은 인정하지
않고 '피조물,섬기는 영,더 나은 천사' 라고 주장했다.그러다 375년경에 성령의 신성을 반대하는 자들이 유노미오스의 제자들로부터 유사본질파의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380년경
성령대적파는 뚜렷한 집단을 형성하여 공동전선을 폈다.
그래서 이 문제도 공의회에서 시급히 다루어야 했다. 이 공의회는 니케아 신조를 해설하기 위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작성하였으며 교회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규정은 콘스탄티노플을 '새 로마'로 규정하고 로마에 다음가는 영예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2. 니케아-콘스탄노플 신조(381)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니케아 신조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아들에 대해 몇가지 중요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본질로 부터'란 말이 빠졌지만 '동일 본질'이란 말을 분명히 했으며 '그 분의 나라는 끝이 없다'란 것을 붙여
마르켈로스의 가르침을 경계했다. 성령에 대해 성령을 '아버지로 부터 나오신 분'(발출)이라하여 성령의 출처를 명시하여 성령의 신성을 보여주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분으로 영광송에 포함시켰다. 성령에 대해 동일본질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는 자들을 끌어 들이려는 정통파의 노력을 반영한 것이며,4세기 신조에 많이 나타나는
보혜사란 말이사용되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381년 7월30일 황제는 칙령을 선포하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정된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위엄과 권능, 동일한영예와 통치를 지닌다고 고백하는 주교들에게 모든 교회를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신조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며 삼위일체 신학논쟁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킨 공의회다.이후에는 어떤 형태의 아리오스주의도 교회에 근본적인 위협을 줄 수 없었다.


D. 결 론


아리오스의 가르침으로 인한 삼위일체 논쟁은 급기야 325년
최초의 니케아 공의회를 열리게 했다. 거기서 결정된 니케아
신조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리기 까지 반세기를 넘게 치열하게 싸우게된다. 325-381년까지 수많은 교회회의가 열렸지만 정식으로 공의회로 인정된 것은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도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 하기 어렵다.
서방 주교들은 초대되지 않았으며 대표자도 파견되지 않았다.
공의회에 참여한 주교들도 이 회의를 동방지역 주교들의 회의로 생각했고 황제는 공의회 법령을 동방지역에만 공포했으며 공의회도 결정사항을 로마나 서방 주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열리기까지 431년 에베소 공의회를 두번째
공의회로 알려졌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두번째 공의회로
인정된 것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다.
545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칙령을 반포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431년 에베소 공의회,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성경의 4복음서에 비유하여 '거룩한 네 공의회'라고 선포했다.
325-381년까지 삼위일체를 두고 치열하게 싸운 것이 이제 막을내리게 되었다. 수많은 교회회의가 열렸고 수많은 신조가 탄생했다. 황제가 누가 되는냐에 따라 삼위일체가 결정이 되고 동방에서 벌여진 일에 서방교회가 개입하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되던 것이 극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우리는 4세기 삼위일체 논쟁은 단순히 추상적 사변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론의 핵심 주제를 다루는 논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