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요아킴의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과 종말론

하나님아들 2023. 4. 22. 14:58

요아킴의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과 종말론

 

 

요아킴(1132-1202) 의 삼위일체는 중세 신학자들이 주로 애용하던 본질의 단일성과 같은 내재적 삼위일체가 아니라 역사와 종말을 연관시켜서 삼위일체를 풀어 가는 것이다. 6-12세기까지 중세의 신학 속에는 종말론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요아킴과 그를 따른 개혁파 프란시스칸들은 순교자 유스티누스와 이레네오스와 같은 고대 초기 교부들의 묵시 전통과 천년왕국 전통을 이어받아 그 바통을 16세기 과격파 종교개혁자들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삼위일체를 종말과 역사로 관련 지은 것은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종말론은 교회개혁과 직결되기에 중세교회에 위협적인 요소로 판단되어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 그의 생애

 

요아킴은 1135년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시실리 법원의 공증인 아들로 태어났다. 예루살렘 성지 순례 이후 하나님 탐구에 자신의 생을 바치기로 하고 고향인 칼라브리아에서 설교자로 활동하다 결국 안수를 받고 코라쪼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가 얼마 후 수도원장이 된다. 교황 루키우스 3세의 눈에 띄어 교황은 그에게 묵시 이론들을 글로 쓰도록 격려한다. 1192년에 피오르의 산 지오반니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고 1202년 3월 30 죽을 때까지 그 곳에 있었다. 그 곳은 상당한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왕들, 왕비들, 교황들 및 왕자들이 그의 자문을 구하러 오곤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 그는 당대에 가장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주께서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신 에스겔 처럼 요야킴은 그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파멸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요아킴은 많은 구약의 에언자들 혹은 계시록의 요한 처럼 곧 닥쳐 올 환난에 관하여 매우 비판적이면서도,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살아 남을 축복 받을 남은 자들을 위한 소망을 선포하고 약속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약속된, 장차 받을 지상적 보상에 대한 낙관적인 비젼을 가지고 있었다.

요아킴는 1183년과 1184년 카사마리의 시토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이때 그는 두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하나는 계시록의 한 구절 (14:6-7)에 관한 의미인 바, 그는 이것의 의미에 대한 기독론적 조명을 얻었고, 이로써 구약과 신약을 완전한 유형론적 상응을 발견했다. 또 하나는 오순절 주일에 받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계시이다. 그가 이런 특별한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에스겔 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영을 받은 계시의 예언자로서가 아니라 이해의 영을 받아 하나님께서 이미 성서에 계시되셨으나 감추어져 있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신 성서 석의(釋義) 자로 이해하였다. 4세기 말 이래로 계시록에 대한 지배적 해석은 개인화하고 도덕화하는 접근이었는데, 요아킴의 역사의 신학 혹은 종말론적 역사이해는 새로운 면모였다. 그는 성서의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구별하고 유형론에 입각한 성서해석을 지향하였다. 요아킴은 구약, 신약, 특히 계시록이 유형론적 이해에 의해서 조명을 받을 때, 역사를 삼위로 일체 되는 하나님의 존재 혹은 이와 같은 신적인 삶의 기본적인 신비에 비추어서 이해할 수 있고, 이 역사 이해에 비추어서 장차 전개될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요아킴은 모든 실재를 역사로 보면서 이 역사를 이 역사와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비추어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묵시적 영성을 대표하는 3권의 책을 썼는데 유형들의 상응과 조화에 대한 책묵시에 대한 해석 10개의 현이 달린 시편노래 등이다.

 

. 당시 상황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

 

요아킴은 그 시대의 위기 앞에서 예언자적인 메시지를 주었다. 요아킴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당시 기독교 전체를 잠에서 깨우고 있다. 하나님이 에스겔로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 세우신 것처럼 자신을 이 시대의 파숫군으로 세우셨다고 믿고 있다. 요아킴은 여러 성서구절을 가지고 당시의 시대가 심판 하에 있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방세계를 일으켜 배교한 기독교 나라를 심판할 것이다. 하지만 요아킴은 심판의 때를 지나, 이 역사의 끝 직전 이 역사의 과정속에서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평화의 나라(천년왕국)을 이룩하여 살 것이라고 소망으로 남은 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요아킴는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퍼붓고 난 다음에 참 믿는 자. 혹은 남은 자들에게 미래지향적인 소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장차 역사의 끝 직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실현될 천년왕국을 말하고 있다.

 

. 역사와 함께 계시고 역사 속에서 역사를 심판하시고 구속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요아킴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형론으로 풀고 있다. 요아킴은 하나님의 영적 이해가 구약과 신약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넘어서는 제3의 영적 이해를 암시하고 있다. 구약의 유형들이 신약에서 성취되는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그것이 성령의 시대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구약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뿐 아니라 종말 지향적인 제3의 성령의 시기를 바라본다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요아킴은 성부 시대는 이미 성자 시대가 포함되고, 성자시대에 이미 성령 시대가 포함된다는 점을 세례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 사이의 중첩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항상 현재적으로 중첩되면서 미래 지향적으로 전진하는 하나님의 운동에 근거한 논리이다. 한 여행자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그리고 제3시대로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 한 시대는 아담으로 시작되어 그리스도에 이르는 시기로서 육체를 따라 살던 사람들의 시간 토막이다. 두 번째 시대는 예언자 엘리사 혹은 유다 왕인 요시아로 시작되어 현재(요아킴 시대)에 이르는 시기로서 이 시기에는 사람들은 두 막대기 곧 육체와 영 사이에 살았었다. 세 번째 시대는 성 베네딕트에서 시작되어 세상 끝까지 이르는 시기 로써 이 시기의 사람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할 것이다.  요아킴은 이 세 시대가 하나이지만 세 시기로 구분되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이지만 선민의 세 질서가 있다고 한다. 첫째 사람들은 결혼한 사람들이고, 둘째 사람들은 성직들이며 셋째 사람들은 수도승들이다 요아킴은 수도승 신분의 사람들을 최고의 가치의 자리에 놓았다.

요아킴은 결혼 질서가 아담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나, 아브라함에와서 그 열매르 맺기 시작했고, 성직 질서는 요시아와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참 왕이시요 참 제사장인 그리스도에게 와서 열매를 맺었으며, 수도승 질서가 베네딕트에게서 시작되었으나. 이질서는 마지막 말세때에 그 열매를 거둘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요아킴은 위에서 기술한 세 시대의 각각의 시작이 동시적으로 성부의 시대, 성자의 시대, 그리고 성령의 시대이기도 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불가분리성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항상 현재적으로 중첩되면서 미래 지향적으로 전진하는 하나님 자신의 운동을 말한다. 요아킴은 구약의 문자는 유대인들에게, 신약의 문자는 로마인들에게, 그리고 이구약과 신약에서 나오는 영적 이해는 영적인 사람들에게 맡겨졌다고 하면서 역사를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성령의 시대를 강조하고 있다. 요아킴은 수도승 신분이 성부시대의 사람인 엘리사에게서 시작했다는 것은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신 것을 뜻하고 둘째로 그것이 베네딕트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것은 성령께서 아들에게서 나오심을 뜻한다. 요아킴은 성자를 성부로부터 그리고 성령을 성부와 성자로부터 구별은 하지만 결코 분리시키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출생되지 않으신 분 이시고, 성자는출생된 분 이신 것처럼 구약에서 신약이 나왔고,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듯이 구약과 신약으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이해는 특히 성령에 관련된 것이다. 첫 번째 신분은 아담에서 그리스도에게 두 번째 신분은 요시아 왕으로부터 현재까지(요아킴 시대) 그리고 세 번째 신분은 베네딕트로부터(529년) 이 세상의 완성의 때까지의 해당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삼위의 모습의 예증을 발견할 수 있다. 요아킴은 삼위일체를 성부 시대, 성자 시대, 그리고 성령 시대로 구분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와 함께하시고 역사 속에서 역사를 심판도 하시고 구속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아담에서 그리스도까지를 63세대로 그리고 요시아 왕으로부터 둘째 신분의 시대까지를 63세대로 계산한다. 그리고 요아킴은 장차 일어날 수도원적 삶의 보다 완전한 실현에 있어서 두 단계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역사의 임박한 위기의 때에 두 개의 승단이 일어나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세력을 대면할 것인바, 하나는 엘리야의 정신을 따르는 설교자들의 승단이요, 다른 하나는 모세의 정신을 따르는 은둔자들의 승단이라고 하였다.

 

최후 심판 이전, 역사의 끝 직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전개될 성령의 시기, 평화의 시기 혹은 제3의시기 또는 천년왕국의 시기

 

요아킴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 혹은 택함을 받은 자들이 평화를 누리게 될 시기 직전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큰 박해를 내다보고 있다. 요아킴은 기독교의 큰 박해의 역사 속에서 역사의 의미를 해석하고, 특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마지막 때에 받을 일곱 번째 박해를 말한다. 그는 이 일곱 번째 박해를 통과한 후, 평화를 약속하는 성령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역사를 내다보았다. 물론 이 평화의 시기, 성령의 시기 혹은 제3의 시기 다음에 티코니우스 및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전통적인 종말론에 입각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최후 심판이 있을 것이고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천국으로 유기를 당한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는 이중적 결과가 암시되어 있다.

요아킴은 요한계시록 17:9-10에 나오는 일곱 왕 , 다섯은 죽었고, 하나는 그 당시에 현존하였으며, 마지막 왕은 속히 올 것인데, 그가 임하면 짧은 기간 동안 머무를 것이라고 한다. 첫째는 사도시대로서 유대인들에 의한 박해요, 둘째는 순교자들의 시대로 이교도들에 의한 박해요, 셋째는 신학자들의 시대로 콘스탄틴 2세 때의 이단들에 의한 박해요, 넷째는 마호메트를 따르는 사라센에 의한 박해요, 다섯째는 수도원 시대로 영적인 의미로 바벨론의 아들에 의한 박해요, 여섯째는 지금 진행되고 , 이 모든 박해보다 더 심한 박해는 일곱 번째 박해인데 (7:24), 그는 최종적인 적그리스도로서 그가 장차 비상하게 파괴를 행할 것(8:23-24)이라고 하였다. 이 적그리스도는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그와 함께할 것이다. 이 마지막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4:21-22) 그는  이 적그리스도가 멸망 받은 다음에 이 땅 위에 정의와 풍성한 평화가 주어질 것이다라고 한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다스리시니(72:8)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2:4) 다른 한편 유대인들과 이방 족속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평화의 아름다움을 기뻐할 것이고 큰 붉은 용의 머리들이 파괴되고 이 붉은 용이 무저갱에 갇히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시기가 성령의 시기요 황금시기요 평화의 시대며, 3의 시대이고, 천년왕국의 시대이다. 이러한 제3의 시기는 사단이 옥에서 잠시 풀려나 곡과 마곡의 군대를 대동하고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막을 내린다. 이때 예수님은 그의 군대들과 하늘에서 강림하여 저들을 불과 유황으로 진멸할 것이고 그리고 최후의 심판과 더불어 천국으로 갈 사람들과 지옥으로 갈 사람들이 갈라질 것이다.

 

. 성령의 시기, 평화의 시기 혹은 제3 시기에 형성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혹은 종말론적 공동체의 모습

 

첫째로 요아킴은 이 시기의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모습을 바울이 고전12:14-20에서 제시한 몸과 지체들의 조화로운 관계로 설명한다. 둘째로 계4:2-11로 설명한다. 셋째로 에베소서4:7-12로 묘사한다. 요아킴은 당시의 계층질서적 성직체제가 아니라 사도적 공동체의 직제를 장차 실현될 천년왕국의 백성들을 섬길 일꾼들로 본다. 그리고 이어서 요아킴은 이 종말론적 공동체가 일곱 성자들의 일곱 소 예배당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첫째, 하나님의 거룩한 어머니인 마리아와 새 예루살렘의 소 예배당:

이 집은 모든 소 예배당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를 다스리시는 영적인 아버지(영성이 충만한 새로운

지도자)가 그 집안에 있어, 모두가 그의 지시와 권위에

순종할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의 형제들은 모두 금식을

비롯한 수도원적인 삶의 이상을 추구한다.

둘째, 전도자 성 요한과 모든 거룩한 사람들과 수녀들의 소 예배당:

이곳에는 영적 갈망으로 불타오르고 명상적인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 살게 될 것인데, 이들 각자는 모두 자기 자신의 독방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라도 필요할 때는 거기에 들어가서 기도를 올릴 수 있다.

셋째, 성 바울과 모든 거룩한 신학자들의 소 예배당

학식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사람들이 이 소 예배당에 있을 것이다.

넷째, 성 스데반과 모든 거룩한 순교자들의 소 예배당:

여기에는 육체노동에는 강하나 영적인 훈련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다. 이들은 겨울에 3일 그리고 여름에는 금요일에 금식 할 것이다.

다섯째, 성 베드로와 모든 거룩한 순교자들의 소 예배당:

여기에서는 위장이 약하여 금식에 있어서 수도원의 규율만큼 감당할 수 없지만 그래도 힘닿는 대로 수도원의 규칙을 따라 살고 싶어함에 따라서 이들의 단순성과 근엄성에 있어서 존경을 자아내는 노약자들이 살 것이다.

여섯째: 성 세례 요한과 모든 거룩한 예언자들의 소 예배당:

여기에는 금욕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고기 먹기와 따뜻한 옷 입기를 완전히 절제하지 못하는 사제들과 성직자들이 있게 될 것이다. 이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할 것이다. 어깨 망토를 사용하여 자신들과 평신도를 구별할 것이다.

일곱째, 성 아브라함 족장과 모든 거룩한 족장들의 소 예배당:

여기에서는 결혼한 부부들이 아들, 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요아킴은 이상에서 구상하고 있는 바, 역사의 지평 속에 나타날 미래적 종말 직전의 제 3의 시대, 혹은 성령의 시대, 혹은 평화의 시대(천년왕국 시대)에는 제도권 교회의 계층적인 성직 체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7성례전도 더 이상 소용없는 그런 시대이다.

이 종말론적 공동체의 특징들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보좌에 않으신 이를 중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고(4:2-11), 머리와 몸의 지체들 그리고 몸의 지체들 상호 간의 조화를 만끽하는 공동체 생활(고전12:14-20)을 누리며, 계층질서적 사제 체제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 전체의 교역활성화(4:7-13)를 말한다.

요아킴의 천년 왕국은 이사야가 이미 내다본 나라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앞당겨 보여진 나라인, 더 이상 눈물이 없는 나라, 경제적 부정으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가 더 이상 없는 나라, 정치적 억압이나 교권에 의한 약자의 억압이 결코 없는 나라, 어린 양과 사자가 함께 노니는 나라, 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그런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1. 요아킴 종말론의 역사적 자리매김

 

요아킴은 역사적으로 바로 안셀름과 아퀴나스 사이에 위치한 사람으로서 종말론을 거의 상실한 중세기에, 초기 기독교의 미래 종말론적 비전을 다시 부활시켰다. 중세 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공식적인 신학이 전적으로 신약성서적인 종말론을 아랑곳 하지 않고, 철학적인 신학만을 일삼는 가운데서도 가물에 콩 나듯 락탄티우스 이래로 아조와 요아킴 그리고 13세기의 프란시스칸 영성주의자들 및 사보나롤라로 이어지는 묵시적 신학전통이 그래도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토마스 뮌처와 멜오키로 호프만 등 16세기 좌파 종교개혁자들의 종말론으로 이어지고, 나가서 18-19세기 복음주의부흥 운동 전통의 천년왕국으로 이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이래로 700년 동안 주장해온 묵시적 해석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시작되는 교회가 주님의 재림하실 때까지 천년 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았다. 이것이 교회의 천년왕국이다.(숫자상 천년이 아님)

 

2. 요아킴과 몰트만 비교 : 삼위일체론적 역사이해와

종말론이해

 

요아킴은 역사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역사는 성부의 시대가 있고 성자의 시대가 있고, 성령의 시대가 있다고 하였다.성부의 나라라 할지라도 성자와 성령이 함께 했으며 성자의 나라일지라도 성부와 성령이 함께 하였다. 그는 각 시대가 성부,성자, 성령이 중첩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아직도 다분히 연대기적 삼분법에 머물려 있는 경향이 있다. 몰트만은 성부의 나라와 성자의 나라와 성령의 나라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현존하는 다층(多層)이요 이월(移越)이라고 주장한다. 요아킴은 성부의 시기와 성자의 시기를 거쳐서 궁극적으로 성령의 시기로 간다고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가 성령의 시기요 장차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 성령이 지배하는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요 그것이 제3시대, 성령의 나라라 하며 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 보았다. 요아킴은 그의 역사 해석을 성령의 나라, 천년왕국에 초점을 맞추고 잇는 것으로 보이지만 몰트만에 의하면 엄격히 말하면 요아킴은 네 나라 사상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요아킴은 세 왕국을 역사 속에 있는 세 시기와 세 단계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성령의 나라는 마지막 역사적 시기이다. , 그것은 세계사의 안식일이다. 때문에 그것은 역사의 완성이지, 그것의 끝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나라는 자기를 초월하여 이 역사를 대치할 영광의 나라를 가리킨다. 요아킴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삼위일체 개념으로 해석하였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종말론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실상 네 나라 사상을 펼친 것이다. , 아버지의 나라와 아들의 나라와 성령의 나라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서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이 사실을 놓치고 있다

어쩌면 몰트만은 요아킴이 놓친 네 번째 나라 곧 영광의 나라를 보충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요아킴이나 몰트만이 펼치는 삼위일체는 중세 신학과는 다르다. 중세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한 본질에서 삼위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삼위를 먼저 내재적이 아니라 역사로 설명한다. 성부의 나라, 성자의 나라, 성령의 나라로 설명한다. 그리고 나서 이 셋을 모두 완성하는 삼위일체의 영광의 나라를 말하고 있다. 먼저 삼위를 말하고 그리고 하나를 말한다.

 

3. 요아킴 종말론의 문제

 

첫째, 그는 구약의 종말론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안경을 통해서 다시 보지 않았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신 것을 간과하고 있다.

둘째로 요아킴은 부활을 통해서 계시되고 약속된 새 창조의 세계를 말하지 않고 최후 심판 이전에 실현될 성령의 시기 혹은 제 3의 시기 만을 주장한다. 부활은 개인의 종말인 몸의 부할(영생), 역사의 종말인 하나님의 나라(천년 왕국), 그리고 우주와 만유의 종말인 새 하늘 새 땅을 계시하고 약속한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요아킴은 부활을 통해서 보여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계시가 약하고 역사의 종말인 하나님의 나라만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요아킴은 미래에 펼쳐질 제3의시기, 천년 왕국의 시기를 내다보면서 지금의 교회를 개혁 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고, 몰트만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미래를 바라보고 역사와 창조 세계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4. 뢰비트의 요아킴에 대한 평가

 

첫째 요아킴의 주장은 그 동안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종말론데 대한 수정이다. 그 동안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왕국 사상을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최후 심판 후 전개되는 이중적 결과(천국과 지옥)만이 있을 뿐, 궁극적 종말이전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실현될 성령의 나라는 없었다.

둘째, 구속사의 새로운 개념정리 이다. 그 동안 교회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로 나누었고 제3의 시대는 제외되었다. 곧 구약은 구속의 약속으로, 신약은 구속의 성취로 보며 그리고 마지막 때 에 새로운 세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당시 교회는 완성이란 종말 이후에 오는 것이지 현재를 뒤잇는 시대에 온다는 것을 거부했다.

셋째, 요아킴은 앞으로 실현될 성령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지금의 역사를 보려고 했다. 이것은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의 신학과 충돌되는 것이다. 요아킴은 역사의 단계를 거쳐 종말 이전에 실현될 성령의 시대를 기대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의 종말을 기대했다. 역사를 보는 관점도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지금의 역사를 보려고 하고, 요아킴은 미래에 전개될 성령의 나라에서 지금의 역사를 보려고 한다

넷째, 당시 중세 교회가 가졌던 역사 의식과 종말론에 대한 도전이다. 교회는 종말론을 흡수해 버렸다. 교회 시대가 끝나는 것이 세상의 종말이다. 그러니 역사 의식도 종말론도 없었다. 요아킴은 기성 교회 안에서 역사 의식과 종말론적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