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國대통령 李承晩박사를 바로 보자!
日帝의 어두운 장막에서 벗어난지 61년, 그리고 대한민국을 건국한지 58년!
국제사회의 무관심속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채 출발했던 초라한 대한민국이 겨우 半世紀만에 아시아의 무역대국이 되어 세계 어느 곳에도 한국인과 한국상품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급성장할 것이라고는 해방의 감격에 눈물흘렸던 당시의 선열들도 미처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비록 반쪽으로 갈라진 강토일망정 저 북쪽의 김일성왕국에서 飢餓(기아)와 桎梏(질곡)으로 신음하는 북녁동포에 비하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국민들은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건국 2 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공산군의 6.25 남침은 대한민국이 사라질 뻔한 최대의 위기였으나 신속한 UN군의 개입과 용감한 국군의 저항으로 조국의 山河를 鮮血로 물들이고 수백만 동포에게 이산의 고통을 안겨주는 상처를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오늘 대한민국은 풍요와 번영을 누리며 북쪽의 김일성왕국에 비하면 천국같은 사회를 건설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무엇이 이렇게 남과 북을 극명하게 다르게 만들었는가를 한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생각해보면 "조선의 독립은 외교력에 의한 국제협력만이 그 달성방법"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이승만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6.25사변의 위기를 과연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휴전성립과 동시에 美國과 韓美동맹을 체결했던 것도 그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오늘 다시 한번 이승만대통령의 업적을 회고해 보게 된다.
이승만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또 6.25의 위기에서 조국을 지켜냈던 분으로 李대통령의 현명함과 혜안으로 오늘의 번영과 풍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 나라를 기습침공했던 저 북쪽의 김일성왕가를 추종하는 세력들에 의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단절과 청산의 역사로 매도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마저 부정되는 위기의 싯점에서 다시 한번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의 혜안과 통찰력을 음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민족끼리"의 허황된 구호를 내걸고 또다시 대한민국을 赤化할려는 김일성왕조와 또 이에 동조하는 친북세력들의 발호를 지켜볼 때 새삼 김일성왕조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했던 이승만대통령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하게 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주의의 터전을 마련했던 건국대통령의 공적을 뒤늦게나마 기리게 된다.
비록 늦었으나 우리는 오늘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탄신 131주년을 맞아 그 분의 필생의 사업이었던 대한민국 건국의 숨결이 배어있는 뜻깊은 이화장에서 건국의 정통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오늘의 현실에 비분강개하여 건국대통령의 위업과 건국이념을 올바로 알리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다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김일성에 유화적이었던 인사를 찬양하고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을 폄하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현정권과 친북세력들에게 더 이상 건국대통령에 대한 모독행위를 加하지 말 것을 경고하면서 국민들에게도 건국대통령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기를 촉구한다.
이제 다시 한번 3.1 만세운동의 정신과 임시정부의 法統을 계승했음을 명시하여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이 잘 들어난 제헌헌법前文을 읽어본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도를 수립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며 우리들과 우리들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 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 개막 대담
• "인물탐구 넘어 현대사재평가 계기로"
• 부정원흉 등 편파시각 팽배
• 비판-정리통한 객관화 절실
•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정치인 통일론등 재조명 사적의의 커
• 거대한 삶 후반 4~5년으로 혹평 "문제"
발행일 : 1995.02.05 / 6 면
기고자 : 정리=이한우-신형준
광복 50년과 조선일보 창간 75주년을 기념, 5일부터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일반공개에 들어가는 특별기획전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는 우리 근현대사의 중심인물 이승만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물꼬를 트는 행사다. 이승만의 생애 전체를 있는 그대로 펼쳐놓음으로써 그의 공과에 대해 본격적인 역사적 조명을 가해보자는 것이 일차적 주안점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이승만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다. 이번 전시를 위해 기획단계에서부터 관여했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택휘소장(서울교대 교수 정치학)과 정진석교수(한국외국어대 언론학)의 대담을 통해 이 문제를 진단해 보았다. <편집자 주>
정 그동안 일반국민은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너무나 소홀했다는 생각입니다. 알고있는 지식도 많지 않고 그나마 불확실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솔직히 이승만이란 인물의 크기에 대해 매우 놀랐습니다. 세기를 대표하는 몇 안되는 세계적 정치인 중의 하나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우리들은 충분한 지식도 없으면서 너무 부정적으로만 그를 봐 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광복 50년인 올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한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대사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서 볼 수 있게 됐다는 점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념적 갈등이나 당파적 수준을 넘어서서 한국근현대사를 보는 작업이 시작돼야 합니다. 이번 전시회는 바로 이런 역사적 인식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다고 봅니다.
정 역사를 보는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이제 역사를 단절이 아닌 연속의 과정으로 보자는 것일 겁니다. 지난 년은 끊임없이 과거를 부정해온 역사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역사라고도 할 수 없고,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식민지의 패배주의가 남긴 유산이겠죠.
"역사허무주의 피해자"
이 동감입니다. 그 과정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역시 이승만입니다. 초대대통령인데다가 말년이 불행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매도될 소지가 높았던 것이지요. 사실 일반인이나 학계의 무관심 속에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계속 확대재생산돼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승만을 객관적으로 보자는 주장마저도 그를 미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정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현대사의 비중을 생각해 보죠. 그는 상해임정에서 초대부터 4대까지 국가수반을 지낸 인물입니다.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기도 하구요.이런 인물을 말년의 실정을 꼬투리삼아 독재자 , 친일파의 비호자 , 부정부패의 원흉 등으로 매도하고 긍정적 부분에 대해 외면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정말 우리 근현대사에서 이승만을 빼고나면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가 차지했던 비중은 컸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전까지 이승만은 치열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감옥에까지 갔습니다. 광복 직전까지는 해외에서 항일운동으로 일관했지요. 군정하에서는 나라세우기에 전력했고 대통령이 된 48년 이후부터는 근대국가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의 삶을 보면 마치 국사교과서의 근현대사편을 보는 것같지 않습니까. 이런 거대한 삶을 살아온 역사적 인물을 말년의 4~5년만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인권탄압등 비판대상
정 이승만을 재평가한다고 할 경우 우선 대한민국을 만든 주체였다는 점이 강조돼야겠지요. 그것은 우리의 현대사를 바로잡는 것임과 동시에 국가정통성을 확립하는 작업입니다. 솔직히 우리 학계는 그동안 이 문제를 외면해 온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이 국제적인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사실 이승만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마다 않고 날아가 논쟁을 벌이고 협상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만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울 만큼 출중했던 것이죠.
정 이승만은 정말로 우리 근현대사의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 속에 자리했습니다. 그의 연표를 정리하다보니 사사로운 것은 제외하고서도 1백여쪽의 소책자를 만들고 남을 분량이었습니다. 독립협회 운동때부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외국과의 교섭이나 항일-반공투쟁-건국운동에 공헌했습니다. 이 시기에 이만한 학식과 경륜을 갖춘 인물은 세계사적으로도 드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승만이 살아있을 때도 별로 알려져있지 않았는데 이번 전시회를 통해 충분히 소개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은 한 인물에 대한 탐구일 뿐만 아니라 현대사 다시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렇다고 이번 전시회가 그를 맹목적으로 선양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비판과 정리를 통해 이승만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고 격동의 우리 현대사를 차분히 되살펴 교훈을 얻자는 것이지요. 객관적 평가가 기대되는 행사라고 봅니다.
정 물론 그에게 비판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년대 후반 정권말기에 인권탄압도 많았지요. 대구매일신문에 테러를 가했고 경향신문을 폐간시키지 않았습니까. 이승만은 사안별로 탄압을 가했습니다.
이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이승만은 강한 구세주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일생동안의 항일운동을 뒷받침한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유아독존식의 정치행태를 가져온 부정적 동기도 됩니다. 장개석, 수카르노, 네루, 나세르등과 비슷했다고 할까요.
정 개인적 면모 중에서 귀감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 검약한 생활입니다. 축재도 전혀 없었고요. 아마도 유교의 선비정신과 기독교의 청교도정신이 묘하게 결합돼 체질화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문광고 쪽지에 메모를 하고, 심지어 한국전쟁때는 정일권씨를 3군참모총장에 임명하면서, 물론 사정이 급해서 그랬겠지만, 쓰다 남은 종이에 친필로 써서 임명장을 준 적도 있습니다.
이 흔히 하는 얘기중에 이승만을 부정부패의 원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평가는 분명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정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도 이승만이 가장 부패한 대통령으로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결과입니다. 당시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부패했을지는 몰라도 이승만 자신은 깨끗했습니다.
이 물론 지도자로서 당시의 부패에 대해 책임은 져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도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 이라는 말도 나온 것이겠지요. 그러나 개인을 평가할 때 이승만을 부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정 이승만은 워낙 거대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앞으로 많은 연구를 해야 그의 삶과 사상의 실체를 어느 정도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학계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연구가 촉진되기를 기대합니다.
이 광복 50주년이라는 시점에서 이승만이 남긴 역사적 과제는 무얼까 생각해 볼 때 역시 으뜸인 것은 남북통일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가 오랜 독립운동을 하면서 꿈꾸었던 것이 분단된 조국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의 북진통일론이 단순히 수사학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그의 일관된 생각을 돌아볼 때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분단은 그 자신이 남긴 유산이면서 현세대가 풀어가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학계연구 촉진 기대
정 동감입니다. 이승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중에서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무래도 통일문제와 관련해서이겠지요. 과연 그의 남한단독정부론이 분단의 1차적 원인이었는가도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그가 분단의 원인제공자처럼 인식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무시한 견해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의 놀라운 국제감각은 세계화가 강조되는 오늘의 시점에서는 더욱 절실합니다. 반공포로석방, 평화선 선포, 북진통일론등은 그가 당시의 세계정세를 손바닥처럼 읽으면서 취한 조치임이 분명합니다.
이 끝으로 이번 행사와 관련해 꼭 한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번 특별전을 개인기업인 언론사에서 주최했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물론이고 학계에도 큰 자극이 될 것입니다. 솔직히 학계의 일원으로 부끄럽기도 합니다.
정 앞으로 이승만의 전모를 밝히는 연구가 학계에서 활성화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정리=이한우-신형준기자
李承晩은 毛택동이 제일 두려워한 인물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2) 프란체스카 도너 리 著 / 도서출판 촛불 刊 (2006)
◇프린스턴대 신학부 학생들과 함께(1909년). 셋째줄 맨 왼쪽 앉아 있는 이가 이승만. 이승만은 신학부의 기숙사인 하지홀(Hodge Hall)에 머물면서 신학과 정치학 강의를 듣고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은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1900~1992)가 1985년부터 ‘일요건강’에 연재한 글을 모아 간행한 회고록이다.
1933년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결혼한 후 1965년 이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할 때까지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에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 6·25전쟁 등 현대사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다. 주요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6월 27일 서울 떠나며 “내 평생 처음 잘못 판단”
李 대통령의 장수 비결은 自由통일에 대한 의지와 신념
6·25 전쟁 때 나는 대통령의 구술을 받아 매일 매일 겪었던 일들을 타이프해 놓았다.
수많은 탱크를 앞세우고 불법남침했던 공산군을 맨 손으로 막아야 했던 긴박한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을 전화로 불러내어 호통 치던 대통령을 만류하던 일, 6월 27일 새벽 남하하는 기차 안에서 침통한 얼굴로 “내 평생 처음 잘못 판단했다”고 괴로워하던 대통령의 모습, 단돈 5만 원을 가지고 떠났던 피난길, 회고하기 조차 끔찍한 고통과 슬픔 속에서 1·4후퇴를 했던 1951년 설날은 경황 중에서도 서울 경무대에서 안남미(길고 맛 없는 수입쌀)로 떡국을 끓여 먹던 일로 기억이 된다.
대통령이 “설날인 오늘 우리 국민 모두가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순간, 나는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났다.
6·25 전쟁 때는 일선장병 위문을 가거나 피난민 수용소에 갔다가 끼니를 놓쳐서 종종 굶는 경우가 있었다. 1950년 여름 우리가 경북지사 관저에 있을 때, 대통령은 이기붕 씨네 어린 두 아들에게 갖다 주도록 참외를 사기 위해 대구 거리로 나갔다.
대통령은 1,000원 어치 참외를 산 후 참외장수에게 “덤으로 하나만 더 주시오”하며 한 개를 집으려 하자 참외장수는 “할아버지라 싸게 드렸는데 덤까지 가져가면 순사가 잡아가요”하며 대통령의 손에서 참외를 뺏더라는 것이다.
파장이 된 저자거리에서 시골참외장수에게 덤 한 개 얻으려다 뺏기고 온 대통령이었지만, 바로 그 대통령을 중공의 모택동 주석이 가장 무서워했다고 한다.
우리와 개인적인 친분이 깊었던 미국 국회의 프레드릭 부라운 해리스 목사(미국 상원 원목)는 “이승만 대통령은 가장 선량하고 성실한 한국신사”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백발의 대통령을 ‘무서운 할아버지’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마크 클라크 대장은 한국전쟁을 회고하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도 한국의 애국자 이승만 대통령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지도자로 존경하고 있다”고 증언하는 모습을 보고 감개가 무량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의 후임자로 와서 대통령이 반대했던 휴전회담을 추진하느라고 애꿎게 대통령으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날벼락을 맞았던 사람이었다.
한국의 老대통령에게 그토록 혼이 났던 미국의 장군들이 그렇게 당당하게 증언한 데 대해 마음속으로 고마웠고, 또한 그들의 훌륭한 인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일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던 워커 중장이 의정부 근방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한 뒤 후임으로 온 릿지웨이 장군이 대통령에게 첫 인사를 왔을 때였다. 대통령은 중공군을 맞아 싸우기보다는 후퇴만 하는 유엔군의 전략을 의심하고 있던 때였다.
릿지웨이 장군은 “대통령 각하, 저는 한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주둔하려고 온 것입니다. 기어이 적을 박살내고야 말겠습니다”하고 군인답게 말했다.
릿지웨이 장군은 전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8군을 재정비 하여 공세를 취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후 곧바로 중공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때문에 대통령은 그를 아들처럼 사랑하며 믿었다.
72세 때(1948) 대통령직을 맡았던 남편이었지만, 대통령의 주치의는 따로 없었다. 정의의 하나님을 믿고 조국을 구하겠다는 강한 투지와 집념 그리고 고통 받는 동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편은 언제나 자신의 건강을 돌보거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장수 비결은 우리민족의 소원인 남북통일을 기어이 이룩하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불철주야 쉬지 않고 노력한 데 있었다.
통일만 되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서, 한가한 ‘시인 우남’ 선생으로 죽장에 삿갓 쓰고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삼천리 방방곡곡을 유람하겠다고 하던 남편의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그리고 국제정치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나라가 흔들리게 되면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고 늘 걱정하던 남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리/김정은 기자 hyciel@
김정은기자 2006-08-31 오후 5:58:00
이승만 대통령 와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인터뷰
• "한국번영 보니 이박사 옳았다"
• 42년 첫대면 억제된위엄 느껴
• 교육-안정-독립 업적 인정해야
• 그동안 50권 저술 인세-연금으로 편안한 생활
• "미에 당당히 맞서 친미 비판 안될말"
발행일 : 1995.02.26 / 17 면
기고자 : 정리=이한우
대담 서희건 편집부국장
이승만초대대통령의 외교고문으로 일했던 로버트 올리버박사(86)가 22일 내한,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을 관람했다. 그는 국립묘지에 있는 이승만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국사편찬위원회방문 등 바쁜 일정을 마치고 26일오전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건국과 제1공화국의 산증인이기도 한 올리버박사를 서희건부국장이 만났다. <편집자주>
서희건=23일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을 돌아보신 소감은 어떠셨습니까.
올리버=압도될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설득력 있게 이승만박사의 전생애를 재창조해놓았더군요. 그의 삶전체가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이런 준비를 해온 조선일보사의 통찰력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서희건=올리버박사께서 이승만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언제 어디서입니까.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올리버=42년 9월 중순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펜실베이니아주 버크넬대에서 수사학(수사학)을 가르치다가 전쟁때문에 휴직을 하고 식량관리계획처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만난 것은 워싱턴 dc의 라파예트공원광장에서 약간 떨어진 코네티컷가에 있던 콜로니얼 카페테리아에서입니다. 그곳은 중급관리들이 의견교환과 정책비교를 위해 즐겨 이용하던 곳이었는데, 한국에서 태어난 펜실베이니아주 루이스 버그시 장로교회 에드워드 장킨목사의 소개로 이박사를 만났습니다.
금속활자-한글 자랑
서희건=이박사는 처음 만나 주로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올리버=주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내가 한국에 관해 거의 무지상태였기 때문에 한국은 유럽보다 훨씬 앞서 금속활자-나침반, 4절지 1백12권에 달하는 백과사전 등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또 중국이나 일본의 문자와는 전혀 다른 26개의 고유한 문자 한글과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게 된 사정 등을 상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서희건=이박사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습니까.
올리버=단어를 잘 선택하고 흠잡을 수 없이 매끄럽게 말을 잘 이어나갔습니다. 그는 표정이 풍부했고 유머도 넘쳤습니다. 자기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내가 받은 가장 강한 인상은 억제된 위엄 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서희건=그때부터 친해지셨군요.
올리버=이박사는 나에게 한국을 이해시킨 다음, 한국을 위한 일을 해달라고 간청했어요. 그래서 나는 43년 3월 7일 워싱턴 포스트지에 일본의 숙적-한국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했습니다. 그 후에도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글을 여러 개 썼고, 44년 9월에는 퍼블릭어페어즈출판사에서 잊혀진 나라 한국 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서희건=한국에 처음 오신 것은 언제입니까.
올리버=46년 6월 3일입니다. 그리고 이박사는 나를 김성수씨에게 소개해 보성전문에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습니다. 그때 미국사와 민주주의에 관해 강의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서희건=그러면 외교고문으로 정식 임명된 것은 언제입니까.
올리버=47년 1월입니다. 그러나 이박사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미국의 국무부나 국방부와 마찰을 빚고 있었기 때문에 정식 임명되기 전부터 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로 했던 일은 정식정부가 출범하기 전 캐나다나 un에서 한국을 대리해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대사를 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고집불통 별칭얻어
서희건=광복후 미국정부와 이승만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올리버=미국은 이박사가 미국생활을 오래했고 고령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정책에 고분고분 따라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게다가 한국에는 이박사의 정치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명목상의 지도자정도로 생각하고 그의 귀국도 순순히 허용했던 거지요. 그러나 이미 이박사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자기조국은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귀국한 이박사와 미군정 하지장군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지요. 그때부터 이박사를 싫어하는 미국인들은 그의 이름 앞에 고집불통(stubborn)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했어요.
서희건=6 25전쟁 당시 올리버박사는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올리버=이박사와 미국이 전쟁을 보는 시각은 크게 달랐지요. 미국으로서는 소련이나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소극적이었고, 이박사는 차제에 한국을 통일시켜야 공산세력을 견제하는 데도 유리하다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었지요. 둘사이를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서희건=이박사의 남한단독정부론에 대해 한국내 학자들의 시각은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당시 미국의 생각은 어땠나요.
올리버=상당히 좋은 생각(good idea)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적당히 절충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북한도 사실상 정권이 수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좋아했고, 소련도 마찬가지 입장이었습니다.
서희건=박사님은 이승만전기를 쓰셨습니다. 그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올리버=오랫동안 가까이 지내면서 그분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적어도 루스벨트나 처칠에 못지 않은 인물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사실 세계정치인중에서 그처럼 동양과 서양의 고등학문을 동시에 몸에 익힌 인물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을 대충 속국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승만박사는 당당한 논리를 전개하며 이에 맞서 국가간의 동등한 지위를 강조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박사가 아니고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겁니다.
미언론서 많은 비난
서희건=한국학계에서는 이승만박사를 친미주의자라고 해서 비판하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올리버=( never 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휴전협상이 한창 진행중일 때도 이박사는 미국에 대해 "전쟁에서 얻지 못한 것을 협상테이블에서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냐"며 대항했습니다. 내가 보더라도 그는 미국에 협조를 하지 않아 미국정계나 언론계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것이 한국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서희건=이승만박사의 반공노선은 동구권이 몰락한 지금에 와서 새삼 국제적으로도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 무슨 특별한 배경이라도 있다고 보십니까.
올리버=글쎄요. 중국이나 소련의 현실정치에서 나타난 독재를 보고 싫어하게 된 것같습니다. 무슨 특별한 동기는 없었던 것 같고 미국정치제도를 좋아한 것도 한 이유는 되겠지요. 그러나 반공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서희건=현재의 시점에서 이승만박사의 업적을 정리한다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올리버=그는 교육 대통령입니다. 어려운 가운데도 교육에 대한 그의 열의가 없었다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우수한 인력은 양성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또 그는 민주주의의 기초는 교육에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55년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 이라는 교재의 집필을 저에게 부탁해 쓴 적도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도 널리 읽혔습니다. 또 하나는 안정 대통령입니다. 물론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탄압했다는 점에서 그 분에게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에도 2차대전때 미국내 일본인들을 억압한 경우가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야겠지요. 끝으로 그는 독립 대통령이었습니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그러했습니다. 미국과의 우호를 유지하면서도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던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였습니다.
서희건=미국의 경우 건국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에 대해 비난을 합니까.
올리버=물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워싱턴-링컨 등 훌륭한 대통령들이 욕도 많이 먹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강한 대통령이 훌륭한 대통령입니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워싱턴-링컨-루스벨트 등이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의 전기와 자료들이 나와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욕만 하는 경우는 없지요. 또 학교에서는 그분들을 존경하게끔 가르칩니다.
"당시 언론자유 보장"
서희건=이박사의 말씀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올리버= 절대 포기하지 마라(never give up) 입니다. 그 분은 자신이 한번 목표를 정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형입니다. 서재필박사의 경우, 한국에 왔다가 결국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이승만박사는 감옥을 나와서도 계속 자신의 길을 갔지 않습니까.
서희건=이승만박사에 대해 독재자라고 하는 의견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올리버=세상에 그만큼 언론자유를 보장한 독재자가 있습니까. 당시 ap통신이 꼽은 몇 안되는 언론자유가 보장된 나라가 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4 19이후 하와이에 왔을 때 조그만 가방 몇 개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길 바랍니다.
서희건=올리버박사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올리버=그동안 저술한 책이 50여권 됩니다. 그중 한국에 관한 것은 8권입니다. 여기서 나온 인세로 주식에 약간 투자를 한 것이 약간의 돈을 벌게 해주었고 재직했던 대학에서도 연금이 나와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서희건=오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은.
올리버=번영된 한국의 모습을 보며 역시 이승만박사의 선택이 옳았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박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것을 보니 한국을 위해 일했던 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집니다. <정리=이한우 기자>
[도서]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발행일 : 2004.06.05 / Books D16 면
고정휴 지음
연세대 출판부
564쪽 | 3만원
포항공대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일제하 이승만의 독립운동 활동을 비판적 시각에서 연구해온 대표적인 학자이다. 91년 고려대 강만길 교수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연구’로 학위를 받은 고 교수는 그 후 재미한인사회, 한성정부, 워싱턴회의(1921~22), 미국의 임정 불승인정책 등 이승만과 관련된 주요 사건이나 활동들을 연구해왔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독립운동 전반을 비판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적임자다.
이 책은 이승만에 대한 전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중요한 독립운동 과정에서 이승만이 어떻게 관련을 맺고 누구와 대립했으며 어떤 단체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연구서다. 그런 점에서 민족운동사와 개인 이승만의 접합지점을 모자이크식으로 추적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그는 어떻게 이승만이 상하이 임정의 초대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1925년 탄핵을 받게 되는지를 민족운동 내부의 갈등구조 속에서 해명한다.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했던 이승만이 마침내 상하이의 통합임정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던 데는 안창호의 역할이 컸다. 고 교수는 안창호의 역할은 “자신이 주도하는 상하이 임정을 보존하고 동시에 미국에서 이승만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안창호의 국민회는 이승만과 철저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이승만을 상하이로 불러들임으로써 미국 내 교민들에 대한 이승만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안창호와의 이런 갈등은 결국 이승만이 탄핵당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작용을 했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면모를 살피는 데 가장 중요한 기구는 구미위원부, 오늘날의 주미대사다. 이승만은 탄핵 후에는 계속 구미위원부를 유지시키며 미국 정부와 의회, 언론을 대상으로 한 독립 ‘로비’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고 교수는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초창기(1919~1922), 침체기(1922~1939), 재건기(1939~1945)로 나눠 분석한다. 묘하게도 이런 3단계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성격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상하이에서 쫓겨난 후 태평양전쟁이 터질 때까지 이승만의 활동은 딱히 두드러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이승만과 임시정부와의 관계와도 대략 겹친다. 갈등기(1919~1925), 단절기(1925~1941), 협력기(1941~1945)가 그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독립운동사의 굴곡과도 중첩되는 것인지 모른다.
저자는 이승만이 맺고 있었던 지지단체 및 반대단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독립운동사에서 이승만이 차지했던 위상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내에서는 대한인동지회, 대한인교민단, 대한부인구제회 등 하와이 중심의 교민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낸 반면 대한민국민회, 중한민중동맹단,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등은 골수 반대단체들이었다.
더불어 고 교수는 국내에 있었던 조선기독교청년회, 범태평양조선협회, 흥업구락부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국내에도 이승만노선을 지지하는 단체들이 만만찮게 조직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영역이다. 그러나 이런 연구가 진행됨으로써 오랜 망명생활 끝에 돌아온 노정객이 단기간에 주도권을 장악하고 건국사업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조직적 기반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게 된다.
이어 저자는 이승만이 구체적으로 전개했던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즉 파리강화회의 참석시도, 구미위원부를 통한 활동, 워싱턴회의에서의 실패한 활동, 태평양전쟁기 미국정부를 상대로 한 임정승인 로비 등을 분석한다. 구체적 성과를 얻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승만이 지향하게 될 정치노선을 미리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근거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승만은 ‘조숙한 냉전주의자’였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섣부른 평가를 철저하게 억제하면서 사실에 의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는 데 있다. 더불어 연세대 유영익 교수의 ‘젊은 날의 이승만’에 이어지는 우리 역사학계의 본격적인 이승만연구의 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도 받을 수 있다.
이한우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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