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위인 - (Charles G. Finney, 1792-1875) 1.
찰스 지 피니는 사도들 이후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전도자요, 신학자로 여겨지고 있다.
1857년과 1858년 사이에 피니의 수고의 직, 간접적인 결과로 10만 명이나 주께로 인도되었고, 그의 집회로 시작된 대 부흥의 역사에서 50만 명이나 그리스도인으로 회심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른 놀라운 사실은 실제적인 연구 조사에서 나타난 것인데, 피니의 집회에서 그리스도에게로 회심되었다고 고백한 100명 중에 85명 이상이 계속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다.
무디 처럼 유명한 대 전도자의 경우에 그리스도께 회심 되었다고 고백한 사람들 중 70%가 후에 믿음에서 떠난 것으로 나타난 것을 생각할 때 피니의 경우는 놀라운 것이다.
피니는 사람들의 양심에다 성결한 생활에 대한 필요성을 인상 깊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방법이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한 것 같다.
뉴욕의 거버너 같은 곳에서는 그의 집회가 있은 다음 6년간 춤추는 일이나 극장 연극이 공연될 수 없었던 것이다.
찰스 지 피니의 전기는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성령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난 가장 뛰어난 이야기일 것이다.
그의 전기에는 오순절을 연상케 하는 성령 충만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피니의 “조직 신학”은 아마도 성경 다음으로 신학에 대한 최고의 저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우신 기름 부으심과 피니의 탁월한 추리력과 법률에 대한 훈련들이 함께 그로 하여금 초대교회 이후 다른 어떤 신학자 보다 더 분명히 기독교 교리를 밝힐 수 있게 했다고 본다.
속죄와 도덕률의 합리성에 대한 것과 중생과 성결의 본성에 대한 육체의 법과 도덕률의 차이와 육체와 도덕률의 타락의 차이에 관한 그의 견해들은 어떤 저자에게서 보다 더 분명하다.
피니의 가르침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적 책임에 대한 신앙에 많은 공헌을 했다.
찰스 지 피니는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후손으로서 1792년 콘넥티커트에서 출생했다.
그는 그의 양친과 더불어 두 살 때 서 뉴욕으로 이사했다.
뉴욕의 이 지역은 당시 개척지로써 교육이나 신앙의 체계가 서 있지 못했다.
피니는 좋은 초등학교 교육을 받았고 20세에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뉴잉글랜드에 갔다가 곧 뉴저지로 가서 학교에서 가르치며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와 다른 대학 공부에 능통했다.
그는 1818년 서 뉴욕 그의 고향 근처에 있는 아담스의 스콰이어 라이트 사무실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아담스에서 피니는 그 이름에 어울리듯 첫 번째로 신앙적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3년간 그는 뉴저지에 있는 학교에서 가르쳤고, 그가 이웃에서 들을 수 있었던 설교는 독일어뿐 이었으며 뉴잉글랜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있을 동안 그가 들은 설교는 그의 주의를 끌기에 적합지가 못했다.
나이 많은 설교자가 오래 묵은 설교 원고를 단조롭게 읽어가는 설교는 피니의 마음에 심각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피니의 양친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고, 피니가 어려서 서 뉴욕에 있을 때 그가 들었던 설교는 몇 명의 순회 전도자들이 방문했을 때 듣던 것 뿐 이었다.
아담스에서 법률을 공부하는 동안 그는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의 죠지 게일 목사는 많은 교육을 받은 유능한 분이었다.
칼빈주의적인 그의 설교는 피니의 주의를 사로잡았으나 그의 예민하고 논리적인 마음에는 부조리와 모순투성이인 것처럼 보였다.
그가 법률을 공부하고 아담스에 있는 교회에 참석하는 동안 피니는 성경 공부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의 법률 책에서 많은 성구의 참조들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신이 성경을 공부하는 일에 깊이 몰두하게 되었다.
피니는 게일 목사와 자주 사무실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좀처럼 교리의 어떤 점에서도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이 아마도 피니가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도록 한 것 같다.
피니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만일 이 세상 넘어 생명이 있다면 자신은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것을 그는 느꼈다.
교인들 몇 명이 그를 위해 기도하기를 원했는데,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받아드림이 없이 계속 구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된다고는 보지 않는 다고 했다.
피니는 2, 3년간 마음이 고통스러운 중에 회의자로 남아 있었다.
드디어 성경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결정이 그에게 있게 되었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라들의 잘못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를 받아드려야 할까 아니면 거절해야 할까하는 질문에 직면했다.
“1821년 가을, 한 주일 저녁, 내 영혼의 구원의 문제를 즉시 해결하기로 나는 마음을 먹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사무실에 있어야만 했으므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전적으로 시간을 바칠 수 없었으나, 다음 날인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는 데와 성경 읽는데 쓸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는데 교만이 그에게 최대의 장애물이었다.
그가 구원을 찾고 있는데 대하여 아무도 알기를 원치 아니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기도하기 전 열쇠 구멍을 막았고, 사람들이 들을까 하여 두려움에서 속삭이듯 기도했다.
만일 그가 성경을 읽고 있을 때 누가 들어오게 되면 성경 위에 법률 책을 올려놓아 성경 대신 법률 서적을 읽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주려고 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 자신의 죄에 대한 깨달음이 증가했으나 마음은 더욱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화요일 밤에 매우 불안 했는데 죽어서 꼭 지옥으로 빠져 들어 갈 것 같은 생각에 아침까지 최선을 다해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로 가는 길에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사실이 어느 때 보다도 분명해 졌다.
성령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여 주시는 것 같았다.
그 비전이 너무도 분명했으므로 환상이 있게 됐을 때 수분간 거리의 중앙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서 있게 되었다.
동네의 북쪽에 나무와 숲들이 있는 언덕이 있었으므로 그 곳에 가서 자신의 마음을 기도에 쏟기로 결심했다.
자만심이 너무도 컸으므로 자신이 숲 속으로 기도하러 가는 것을 사람들이 볼까봐 가능한 대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가게 되었다.
그는 큰 나무가 서로 쓰러져 겨우 틈이 나 있는 깊은 숲 속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기도하기 위해 좁은 곳엘 기어 들어갔다.
“내가 기도하려고 했을 때, 나의 마음은 기도하지 않으려는 것을 발견했다”고 그는 말했다.
누가 와서 기도하는 자신을 볼까봐 그는 매우 두려워했다.
그가 절망에 빠질 무렵, 자신의 영혼의 구원 문제를 해결 받을 때 까지는 그 곳을 떠나지 않기로 하나님께 약속을 했으나 그 문제를 해결하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바로 그 순간에 누군가가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되어 보려고 눈을 떴을 때, 내 마음의 교만이 내 길을 막고 있는 큰 장애물임을 분명히 보게 됐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나를 사람들이 보게 되는데 대한 부끄러움이 있는 자신이 얼마나 악했던가를 뼈저리게 알게 됐고, 강한 힘에 붙들려 나는 고성으로 부르짖게 되었으며, 지구의 모든 사람들과 지옥의 모든 마귀들이 에워싼다 할지라도 그 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외치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교만한 생각에서 그는 완전히 자신을 낮추게 되었다.
성경의 최고의 위로의 말씀이 자신의 영에게 부어지는 것 같았다.
믿음은 지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임을 명백히 깨닫고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약속들이 계속적으로 자신에게 들어 왔고 그는 계속 기도했다.
“내 마음에 충만히 채움 받기 까지 나는 기도했고,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마을에 왔을 때는 정오가 되었고, 숲 속에 들어간 때는 이른 조반을 끝낸 직후였다.
그는 기도에 어찌나 몰두해 있었던지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이제 매우 고요했고, 죄 짐은 완전히 없어졌으나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지 못한 것으로 믿어야 하겠다는 유혹이 있었다.
그는 점심을 먹으러 갔으나 입맛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에 가 비올라를 가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 없이는 찬송을 부를 수가 없었다.
피니가 자신의 죄의 용서를 받던 그날 저녁 이미 말한 대로 성령의 압도적인 능력의 세례를 받았으므로 그는 즉시 복음을 전하게 됐다.
성령 충만을 어떻게 받았는가에 대하여 자신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자.
자신의 회심에 대한 말에 이어 계속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들(피니와 스콰이아 라이트)은 기물들과 책들을 다른 사무실로 옮기게 되었다. 이 일에 우리들은 매우 바빴으므로 그 오후에 거의 대화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매우 평온했고, 나의 생각과 느낌에는 대단한 부드러움과 달콤함이 있었다. 모든 것이 잘 되었으며, 조금도 내게 걸림이 없었다. 저녁이 되기 전 한 생각이 내 마음에 떠올랐는데 새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되자마자 다시 기도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내 영혼에 대한 어떤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저 계속 기도하려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어 우리들은 기물들과 책들을 정돈했다. 나는 벽난로 곁에서 혼자 온 저녁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어두워지자 스콰이어 라이트는 모든 것이 정돈된 것을 보고 인사를 나눈 후 집으로 가 버렸다. 문까지 배웅을 하고는 문을 닫고 돌아서서 둘러보는데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나의 모든 느낌이 일어나서는 넘쳐흐르는 것 같았고, 내 마음의 소원은 내 마음의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내 마음의 북받침이 강렬했으므로 앞 사무실의 뒷방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그 방에는 불도 없었고, 등도 없었으나 온전히 밝은 것처럼 여겨졌다. 내가 들어가서 뒤로 문을 닫았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한 것 같았다. 그 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 일은 정신적인(의식) 상태에서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내가 보듯 내가 주를 뵌 것 같았다. 예수님은 내게 아무 말씀도 안하셨으나 그가 나를 바라보실 때 나는 그 발 앞에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주께서 내 앞에 서셨고, 나는 그 발 앞에 엎드려 나의 마음 전체를 그에게 쏟아 드렸다. 나는 어린 아이처럼 크게 울었고, 목메인 소리로 모든 고백을 드렸다.”
내 눈물로 주님의 발을 목욕시킨 셈이었으나 내가 주님을 만졌다는 분명한 인상은 기억에 없었다.
이런 상태가 한 동안 지속된 것 같았으나 내 마음은 너무 주님과의 대면에 몰두했던 까닭에 무엇이라 말했는지 조차 회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가라앉자 곧 나는 앞 사무실에 돌아 왔는데, 많은 나무를 넣어 타게 했던 불이 거의 꺼질려고 했던 것을 알았다.
내가 돌이켜 불 곁에 앉으려고 할 때 성령의 강한 세례를 받았다.
성령세례에 대한 기대도 없었고, 그런 일이 내게 있으리라는 생각도 전혀 한 적이 없었으며 어떤 사람도 그런 경험을 내게 말한 경우를 회상할 수 없었음에도 나의 몸과 영혼을 통과하시는 것처럼 임하셨다.
전류가 흐르듯 나의 몸을 통하는 성령의 그 인상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성령께서는 파도처럼 , 액체 사랑의 물결처럼 들어 왔는데, 다른 방도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하나님의 바로 그 호흡 같았다.
내게 거대한 날개를 달아 주는 것 같았던 것을 분명히 회상할 수 있다.
내 마음 속 넓게 스며드는 놀라운 사랑을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사랑과 기쁨으로 나는 크게 울었다.
잘 모르지만 말할 수없는 마음의 북받침으로 엉엉 울었다고 문자적으로 쓸 도리 밖에 없다. 사랑의 파도가 계속 내게 밀려들어오는 까닭에 “이 물결이 계속 내게 들어온다면 죽을 것 같습니다. 주님,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생각이 날 때까지 계속 됐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피니에게는 이 성령의 능력의 엄청난 임재의 역사가 한 동안 계속 되었다.
성령의 능력의 계속적인 파도가 그에게 덮쳤고, 그를 통과했으며, 그의 전체를 전율케 했다. 저녁 늦게 찬양 대원 한 사람이 찬양대 대장인 피니를 만나러 사무실에 왔었다. 그는 피니가 성령의 능력 아래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몇 가지를 묻고는 그 교회의 매우 엄숙한 한 장로를 모셔 오게 되었는데, 성령의 능력 아래 울고 있는 피니를 보고는 기쁘게 웃었던 것이다.
피니가 자기의 경험을 그 장로와 찬양 대원에게 말하는 동안 피니를 잘 아는 한 청년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피니의 말에 놀라움을 가지고 그는 듣고 있다가 갑자기 마루 바닥에 쓰러져서는 고통 중에 외치기를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다.
놀라운 성령의 세례를 경험했으면서도 피니는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요, 다른 경험으로 믿어야 한다는 시험에 빠지게 되었다.
피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곧 잠들자마자 나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엄청난 흐름 때문에 곧 잠이 깨었다. 사랑으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곧 잠이 들었으나 또 같은 방법으로 다시 깨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위에서와 같은 시험이 또 있게 되었다. 내 속에 있는 사랑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이 들자 또 나의 마음은 너무 뜨거웠으므로 곧 깨게 되었다. 밤늦게 까지 이 일이 계속되었고, 드디어 좋은 안식을 얻게 되었다. 내가 아침에 깨었을 때 태양이 솟아올랐고, 밝은 빛이 내 방을 비추게 되었다. 태양 빛이 내게 준 인상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전날에 받았던 성령세례가 같은 방법을 따라 즉각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침대에서 나는 무릎으로 일어나 기쁨으로 크게 울었다. 성령세례가 넘쳤으므로 그저 내 자신을 주께 쏟아드렸다. 이 아침의 성령세례는 ‘네가 의심 하겠느냐’ 하시는 부드러운 책망 같이 여겨졌다. ‘네가 의심 하겠느냐’ ‘아니요,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의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마음을 소유하신 때문에 의심이 일어나는 일이 불가능하게 하심으로 확정시켜 주셨다.”
위에 언급한 바로 그날 아침 피니가 사무실에 갔는데 능력의 파도는 계속 그의 영혼에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스콰이어 라이트가 사무실에 들어 왔을 때 피니는 그에게 자신의 영혼 구원에 관해서 말을 했다. 그는 머리를 떨구고는 아무 대답 없이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피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음에는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아니하리라 생각했으나 후에도 내가 한 말이 창처럼 그를 꿰뚫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회심할 때 까지는 그 상태에 계속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중에 피니가 만나 말을 하게 된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마음이 녹았으며 후에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었다.
피니의 말은 화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는 것 같았다.
피니는 법률을 무척 좋아했으나 그 흥미를 잃어버렸고, 모든 세상적인 다른 일들에도 그러했다.
그의 전적인 소원은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그에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사무실을 나와 개인들을 만나서는 그들의 영혼의 구원에 관해서 말하게 되었다.
그날 그가 주께로 인도한 사람들 중에는 만인 구원설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고, 주류 제조업자도 있었다.
종일 마을 사람들은 피니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와 흥분이 있게 되었는데, 저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정도 없었으나 교회에 모이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피니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으므로 그가 일어나 주께서 자신의 영혼에 이루신 일을 말하게 되었다.
Mr.C 라는 사람은 죄를 깊이 깨닫고는 모자도 잊은 채 일어나 집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많은 다른 사람들도 깊이 죄를 깨닫게 되었다.
피니는 이전에 공중 앞에서 기도를 해본 적이 없었지만 자유롭게 말하고 기도했다.
그 집회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날부터 한 동안 매일 밤 집회가 열렸다.
부흥이 그 마을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피니가 지나간 날 사귀던 친구들 중 단 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 그리스도에게로 인도 되었다.
피니는 뉴욕 헨더슨에 있는 자기 집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그의 양친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다.
아담스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계속 집회를 가졌으며 금식과 기도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번은 그가 집회 장소로 가고 있을 때에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한 빛”이 그의 마음속에 비취게 되었는데, 그 빛은 그를 길바닥에 거의 넘어뜨릴 뻔 했다.
다메섹 도상의 사울을 꺼꾸러뜨린 빛이 그러했듯이 그 빛은 정오의 태양 빛 보다 더 강렬했던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 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피니의 기도 응답으로 병 고침을 받게도 되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영적으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는 일이 무엇인 가를 피니는 이제 와서 배우게 됐다.
“시온이 구로한 후에 해산하리라”는 귀중한 약속이 피니에게도 적중하게 됐다.
성령 세례를 받은 후 피니는 자기 교회의 목사인 게일씨와 장시간 대화했는데, 그것은 성직을 맡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유리한 방책일 것이라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게일 목사는 프린스턴 대학 출신으로 캘빈 교리의 고전적 학설을 굳게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피니에게는 그것이 불합리하고도 모순된 것으로 보였다.
교리 상 어떤 한 가지 점만을 겨우 합의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게일 목사는 제한된 구속을 믿거나 혹은 피택된 자들만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와는 반대로 피니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하신 것임이었다.
인간은 본래 너무나 타락한지라 도덕적인 자유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 게일 목사의 소신이었다.
그러나 피니가 믿은 바는 누구나 선택권을 가지고 구원(구속)을 받아 들일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게일 목사가 믿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형벌의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셨다는 것이고, 피니가 믿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형벌의 대가를 완전히 담당하신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기에 넉넉한 형벌의 대가를 지불하신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니는 1822년에 성직을 지원하는 자로서 자기를 돌보아 달라고 장로회에 자기를 부탁했었다.
어떤 성직자들은 피니에게 프린스턴 대학에 가기를 권면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게일 목사를 지명하여 피니가 연구하는 일을 감독하도록 했다.
게일 목사가 관여하는 한 피니의 연구에는 논쟁이 연속될 뿐이었다.
그러나 피니는 게일목사의 도서실을 잘 활용 하곤 했다.
게일 목사가 지지하는 교리를 피니는 가르치기도 원치 않았고, 설교하기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 교회에 피니와 같은 견해를 가진 좋은 장로 한 분이 있었는데 그는 피니를 격려해 주었으며 자주 함께 기도하곤 했다.
게일 목사 밑에서 피니가 연구하는 수개월 동안에 만인구원설을 믿고 주장하는 목사 한 사람이 아담스에 와서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크게 혼란 시켰다.
피니는 그의 이론을 반박해서 그 주장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드디어 1824년에 그 장로회는 아담스 시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피니에게 설교하는 일을 허락했다.
장로회원들을 위해서 피니가 준비한 두 제목의 원고 설교는 다른 두 경우와 함께 유일한 원고 설교들이었다.
다른 한번은 원고 설교를 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를 시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그는 믿게 되었다.
뉴욕 오네이다 카운티에 있는 에반스밀스에서 피니는 처음으로 정규 집회를 가졌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칭찬했으나 2-3주간 동안에 단 한 사람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다.
그 때에 피니는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원하는 자들은 다 기립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원치 않는 자들은 다 그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촉구했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에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었으므로 청중들은 몹시 분개해서 떼를 지어 피니를 야유할 정도였다.
그 다음날 그는 금식과 기도로 하루를 지냈으며 저녁 설교 시간에는 성령과 능력이 매우 충만했으므로 온 회중들은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밤새도록 그들은 피니에게 사람을 보내어, 와서 기도해 주기를 청원했던 것이다.
심지어 마음이 완악한 무신론자들 까지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었다. 뻗어 나아가는 능력과 배가하는 성과를 가지고 피니는 복음 전파를 계속했으며, 미국과 대영제국의 주요 도시들 중에 여러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집회에 너무도 강력하게 나타남으로 모든 청중들이 거의 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됐으며 마루 위에 엎드러지게도 되었다.
그가 강단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때때로 자신의 발이 공중에 떠오르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도덕적인 역사는 어떠한 눈에 보이는 현상을 동반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됐던 당시나 피니의 집회 때에는 도덕적인 성령의 역사가 힘 있게 나타날 때에 놀랄만한 눈에 보이는 현상이 따랐던 것이다.
피니가 설교하는 동안 어떤 경우는 성령의 능력이 영광의 구름과 같이 피니 위에 내려 덮이는 듯 했다.
종종 불신자 까지도 현저하게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신성함이 그가 집회하는 도시들 위에 임하 곤 했다.
피니의 전도 팀들이 어떤 도시에 들어가게 되자마자 죄인들은 흔히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피니는 그처럼 성령이 충만했으므로 그를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들은 자주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유티카에서 집회를 열었을 때에 그는 한 큰 공장을 방문해서 그 기계 장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술자등 여러 사람이 피니를 쳐다보고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상한 마음으로 울게 되었다.
드디어 너무 많은 사람이 소리 높여 울게 되었으므로 피니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동안 기계들을 정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뉴욕 주에 있는 소돔이라 불리는 곳에서 피니는 하나님께서 소돔 성을 멸망시키기 전 소돔 성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설교했다.
“나는 15분 이상을 그와 같은 긴장 속에서 말하지 못했다.”라고 피니는 말했다.
“무서운 정적이 그들 위에 머무는 것 같았고, 회중들은 그들이 앉았던 의자에서 사방으로 넘어져서는 긍휼을 구하게 되었다. 만일 내가 양손에 칼을 가지고 사람들을 친다 할지라도 그들이 쓰러졌던 것처럼 빠르게 칠 수는 없었다.”
거의 모든 회중들이 무릎을 꿇었거나 쓰러져 있었다.
그렇게 된 시간이 2분이 채 안된 것으로 생각됐다.
입을 벌려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도했다.
비슷한 장면들이 다른 많은 곳에서도 목격 되었던 것이다.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피니의 집회에서 하루 동안에 1500명에서 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
뉴욕, 보스턴, 로체스타 등 다른 많은 미국인의 중요한 도시들에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피니의 집회를 통해 구원의 길을 찾게 되었다.
1858년에서 1859년에 걸쳐 있었던 위대한 부흥은 세계 역사에 남아 있는 대 부흥 중에 하나였는데, 이것은 피니의 집회의 직접적인 결과로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였고, 세상이 볼 수 있었던 가장 놀라운 부흥이었다” 라고 라이만 비쳐 박사가 말했다.
이 부흥을 통해 60만 명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왔다고 집계 되어 있다.
1833년 피니는 회중 교회의 일원이었으며 그 후 오하이오 주에 있는 오버린 대학의 창립자와 초대 학장이 되었다.
이 대학의 설립 목적은 학생들을 복음 사역자로 양성하는데 있었다.
피니의 여생은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오버린 대학에서의 일과 다른 곳에서의 집회 인도였다.
피니의 저술은 널리 읽혀졌고,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피니의 자서전”, “부흥에 대한 강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강의”, “피니의 조직신학” 등이 특히 세계적으로 많이 읽히고 있다.
피니는 83세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의의 길로 인도한 자”에게 주어질 보상을 누리기 위해 천국으로 부름받기 2주 전 까지도 오버린에서 학생들에게 설교하는 것과 강의 하는 것을 계속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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