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

하나님아들 2022. 11. 8. 12:34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


 


그리스도의 신분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해서 다룰 때, 주로 비하와 승귀라는 두 가지로 나누어 다루게 된다. 이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1) 그리스도의 비하(낮아지심)

①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 화육(化肉), 수육(受肉), 도성인신(道成人身)
- 구약성경에서 -
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몸 속에서 10개월을 보내시고 아기로 탄생하셨다는 것부터 그리스도의 비하는 시작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다. 신성은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시던 성품이었지만, 인성은 처녀에게서 나심으로써 취하신 것이었다. 이렇게 살과 피와 그것에 필요한 모든 것을 취하신 것을 일컬어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하며, 이는 단순히 "육체를 입음"을 뜻한다.


⑵ 죄인을 구원하고 그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드님은 겸손히 자기를 낮추셔서 인간이 되셨다. 사랑을 받은 사도 요한은 우리가 믿는 숭고한 가르침을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⑶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실이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도 장차 오실 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신 분으로 나와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하나님은 어느 날 한 구원자, 왕,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셔야 했지만 또한 약속도 주셔서 "여자의 후손"(=이것 자체만으로도 최소한 동정녀 탄생을 암시하고 있다)이 원수를 파하리라고 하셨다(창 3:15). 구원자는 사람인 어머니에게서 사람으로 나게 될 것이었다.


⑷ 하나님은 창 22:18에서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약속을 해주셨다. 모든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 줄 구원자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한 사람이 되리란 것이었다. 이 약속은 이삭에게도 계승되었고(창 26:4), 야곱에게도 계승되었다(창 28:14). 또한 하나님은 유다에게 약속하셔서 왕이 그의 지파에서 나실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창 49:10). 그리고 다른 약속들을 통해 오실 자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일 것이며(신 18:15),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이며(시 110:4), 다윗의 혈통에서 난 왕(삼하 7:16)일 것이라고 증거하셨다. 이런 약속의 말씀들로부터 우리는 오실 구원자는 천사나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⑸ 한편 다른 많은 약속들에서는 분명히 밝히기를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실 것이라고 했다.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9).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광야에 우리 하나님을 위해 대로를 평탄케 하기로 되어 있었다(사 40:3, 요 1:23 비교). 말라기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라"고 했다(말 3:1).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왕의 이름을 몇 가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7). 메시야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며 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그분은 동정녀에게서 나시도록 되어 있었다(사 7:14, 마 1:23 비교).


- 신약성경에서 -

⑴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읽게 된다. 바울의 서신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말씀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가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 9:5).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그는 육신으로 나타내신 바 되시고"(딤전 3:16).
갈 4:4, 빌 2:6-8, 히 2:14 등의 구절들을 읽고 주의 깊게 상고해보자.


⑵ 하나님의 전능하신 아드님은 원하시면 사람이 되실 수 있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그분이 사람이 되고자 원하셨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준다. 또한 그분의 전능하심은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을 때 이제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은 전혀 있을 수도 없으며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셨을 때 그분이 자신의 속성 중 일부를 버리셔야 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는가?
기독론 신대원 강의안


⑶ 케노시스(Kenosis)이론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빌립보서2:7에 근거한 것이다(=자기를 비어 -“케노어”에서 차용). 이 이론은 그리스도께서 외적으로 드러난 그분의 영광과, 자기 속성을 독립적으로 쓰실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셨으며, 마땅히 경배 받으실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은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시는 한 지니고 계신 본질의 일부이지, 없어지거나 하는 권세나 능력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전능하지도 않고 전지하지도 않은 하나님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케노시스 이론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실 때 자기 육신의 필요를 채우고자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사용치 않으셨다. 그때 그분은 인성과 신성을 지니셨지만 오직 한 분이신 인격체이셨다.


⑷ 유한한 인간의 지성은 신인(God-Man)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르겠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심오한 주제에 대해 생각할 때 기억해야 될 좋은 원칙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갈라놓지도 말고 신성과 인성을 모호하게 흐려놓지도 말라는 것이다. 우리를 경외심으로 감동시킬 영광스러운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우편에 영광 중에 계신 한 사람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대제사장이시며, 인간으로서 이 죄악 된 세상을 살아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또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오해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신 분이시다. 우리와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이보다 더 격려가 되는 진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진리이다.


② 율법 아래 놓이심

⑴ 율법이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뜻한다. 따라서 율법을 어기는 것을 죄, 불법,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셨고 불순종 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이 뒤따를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온 인류는 아담과 더불어서 율법을 어긴 나머지 죄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롬 5:12). 다시는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수할 수 없게 되었다.
갈 4:4-5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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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지켜야 할 모든 형태의 율법을 다 지키셨다. 즉, 사람이 창조 때부터서 부여받았던 자연법과 도덕법(양심)을 지키셨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었던 행위언약의 요구들도 지키셨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법인 십계명과 의식법과 시민법을 지키셨다. 문자적으로 뿐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도 철저하게 지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어느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순전한 어린양이셨다. 율법사들이나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허물도 발견해내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도 "다 이루었다" 하시기에 충분했다.


⑶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죄인을 위한 대리적인 순종에만 머물지 않았다. 속으로는 싫은데, 중보자이기에 마지못해서 억지로 율법을 지키신 것이 아니었다. 그의 순종은 자원적인 순종이었다. 그 결과로, 그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 되어졌다(=롬 5:19).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셔야 할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그는 율법 위에 계셔야 할 분이셨다. 그는 사람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율법 아래 놓이셨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신 비하였다.


③ 고 난
⑴ 십자가만이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었다. 그의 전 생애가 수난의 생애였다. 성경은 공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처음부터 사단의 공격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피조물이며 자기 백성들이었던 유대인들의 비웃음과 불신, 박해를 통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 가운데에서 범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인류를 위한 중보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셨다.


⑵ 그리스도께서는 찔림을 당하셨다. 상함을 입으셨다. 채찍에 맞으셨다. 멸시를 받으셨다. 많은 질고를 겪으셨다. 주리고 목마름을 겪으셨다. 슬픔을 당하셨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셨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함이었다. 우리의 나음과 평화를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경건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 묵상하기를 즐겨한다. 그리고 그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도 갖는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열망으로 고백했다. 골 1:24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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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를 지셨던 날이나, 그 한 주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고난은 이 땅에 태어나신 순간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생애는 점점 더 가중되는 고난으로 이어졌다. 사람들 중에는 간혹, 육체로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희열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정신적으로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육체적으로는 만족을 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혼과 육체의 고난을 겪으셨다. 단순히 부족함이나 실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죄인에게 쏟아지는 저주에서 비롯된 처절한 고난을 겪으셨다.


⑷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셨다. 또 앞으로 일어날 일이나, 사람의 속마음까지라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당하신 고난은 어느 누구의 고난보다도 더 큰 것이었다. 고난 주간이 되면, 간혹 십자가 지기를 재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단한 열심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들이 십자가를 한 번 져보는 것으로는 도저히 비교할 수도 없는 고난이었다.


⑸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경의 예언들과 정확히 일치가 된다. 특히 시편 22편의 예언은 현장에서 목격을 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도 생생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난을 가리켜서 예언을 완성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 26:53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여기서 "그렇게 하면"은 열두 영도 더되는 천사를 보내게 하여서 자기를 붙잡으러 온 자들을 막아내는 것, 즉 고난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④ 십자가에서 죽으심
⑴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당시의 정치적 권력에 의한 죽음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 세력에 의한 죽음이었다. 또한 유대인 전체의 정죄를 받으심으로 민족(사회)적 세력에 의한 죽음이기도 하였다. 그 죽음의 참혹함도 커다란 비하의 요소이겠지만,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죽음임을 선포하는 것을 통해,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죽음이기도 하였다(=신 21:23, 갈 3:13).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당시의 정치, 종교, 사회(민족)들로부터 버림받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서도 버림을 받은 죽음을 당하셨다. 결국 십자가는 그리스도 비하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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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의 결과인 죽음을 당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 값은 다 지불이 되어졌다.
롬 5: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히 9: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⑶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형태는 사고, 질병, 전쟁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우 특이했다, 그는 로마법에 의해 심문을 받은 결과, 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형언도를 받고, 유대인들의 방식에 따른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다(=갈 3:13).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은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해서 법적인 책임을 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⑷ 수많은 성경적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다. 죽었던 사람이 부활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부활을 하신 것이 아니라, 기절을 했다가 깨어났다고 하는 생각을 고안해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어서 조금도 의심이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성육신의 목적 자체가 대속의 죽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물과 피를 일정량 이상 흘리면 죽게 되는 데, 그도 물과 피를 다 쏟으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이 전문가들인 로마군인들에 의해서 확인이 되어졌다는 사실과, 그가 매장이 되었다는 사실도 그의 죽음이 분명한 사실이었음을 입증해준다.


④ 장사(裝事)되심
⑴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하나님의 첫 저주가 예수께 임하였다. 이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로부터 무덤의 공포를 제거하셨다. 거기에 주께서도 가셨으므로, 그를 믿는 제자들이 무덤에 내려갈지라도 거기에 함께 하실 것임을 보여주셨다. 무덤은 몸을 가진 사람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위치이다. 그리스도는 무덤에 묻히심으로서, 사람의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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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셨다. 이보다 더 낮아질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의 가장 낮은 위치에까지 낮아지는 겸손의 본을 보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말씀하셨다.
마 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⑶ 무덤이 엡 4:9에서는 땅 아래의 곳으로 표현되었다. 시 16:10에서는 음부로 불려졌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무덤뿐만 아니라, 지옥까지 내려가셨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지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셨다. 이 사실은 그가 음부에서 썩지 않으셨다는 말씀에서 입증이 된다. 썩음이 있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무덤이다. 지옥에서 썩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새삼스레 언급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무덤에는 썩음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무덤에 있으면서도 썩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가 썩지 않으심은 주목할 만한 일로 예언이 되고(=시 16:10), 증거 될 필요가 있었다(=행 2:27, 31).




⑤ 음부(=지옥)강하 문제
영문 사도신경에는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은 이 말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구약성도들이 갇혀 있는 선조림보(Limbus Patrum)에 내려가셔서 그들을 해방하여 천국으로 데려가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도신경에도 사본학의 문제가 있다. 실제로 이 구절은 주후 390년 루피누스(Rufinus)의 수정본 중 하나에 나타나기 전의 초기 문서들 가운데에는(로마나 다른 이탈리아 지역과 아프리카에서 사용되었던 사본들 가운데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굳이 이 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음부, 즉 무덤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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