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구원의 과학--이것은 우리가 배울수 있는 최고의 과학이다. 갈바리의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참된 철학과 순결하고 순수한 종교가 된다.” “구속의 과학은 모든 과학 중의 과학이 된다. 이 과학은...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들이 끝없는 세월동안 연구해야 할 학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복음의 요체가 된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십자가의 종교, 즉 구속의 종교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다. 어떤 교리나 신조를 수긍하느냐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한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인격에 헌신하며 사랑의 순종을 바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 된다. 그분의 말씀이라면 아무 조건없이 “예”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갈바리 십자가는 기독교의 “위대한 중심(the great center)”이며 그 안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가 나타나 있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가 가능한 것이다. 마틴 쾰러(Martin Kähler)는 복음서가 십자가 수난 기사에 대한 장문의 서론이라고 말했다. 이 십자가상의 속죄 사역의 장엄성과 비의는 인간의 필설로 다 묘사하기에 벅찬 깊이와 신비가 담겨 있어서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성도들이 장차 오는 세상에서 영원히 탐구하며 음미하는 학문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안셈의 1098년 작품인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의 출판으로 속죄론이 기독교 신학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속죄론이 기독교 신학상 핵심 위치에 있다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속죄의 해석에 있어서는 다양한 이론들이 제기되어 왔다.
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인간의 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그의 성육신과 삶, 그리고 그의 부활 사건에서 분리시켜 이해하는 것은 소망스럽지 못하다. 그것은 부분적이거나 빈약한 이해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건들을 통전적으로 보면서 십자가의 사건을 음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A.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그리스도
이삭이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라고 질문한 것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이었다. 이삭의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이 신약 성경에서 최초로 실체화된 것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는 침례 요한의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과 삶 그 자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며 희생당할 어린양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어린양은 성소의식에서 희생제물로 드려졌다. 하나님께서 이 희생제물을 준비하셨다.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죽음을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라 하시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가 맺힌다(요 12:20-24)고 하셨다. 많은 열매를 바라서 한 알의 밀알도 죽는 것이 영광이 된다는 역설적 말씀을 하신 것이다. 침례 요한의 선포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도 똑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예견된 것이다.
B.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주요 국면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는 사단의 사주를 받은 인간의 활동, 하나님의 활동, 그리고 예수님의 활동이 들어있다.
1. 십자가에의 길을 닦은 인간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생명의 주)를 죽도록 내어 주었고 또 십자가에서 처형하였다고 설교했다(행 2:23,36; 3:15; 4:10; 5:30; 10:39). 스데반도 그들에게 의인을 살해했다고 지적하였다(7:52). 즉 인간들이 십자가에의 길을 닦은 것이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길을 가능케 하였지만, 그는 이미 인간의 살해 음모 계획의 불법적 행위와 회의들을 알고 계셨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능욕을 당하며 죽임을 당할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막 8:31; 9:31; 10:33,34). 심지어 그분은 누가 자기를 넘겨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다(요 19:11). 이 엄청난 십자가로 넘기는 인간의 책임과 죄성이 사도들의 설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 인간의 활동 배후에는 사단이 활동하고 있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2. 십자가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활동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통박한 베드로의 설교에는 십자가 사건이 단순히 인간의 행위라고만 못박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행 2:23) 것이며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미리 알게 하신 것”(행 3;18)이요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것이었다. 여기에 십자가 사건의 역설이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인간의 활동으로만은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살해 음모 계획 및 활동은 속죄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도들은 계시의 빛에 따라서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행보 하나 하나에서 이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의 현현을 명확하게 분별해 낸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우신 산 돌”(벧전 2:4)이라고 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면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십자가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활동에 관하여는 이미 십자가 사건이 있기 700여 년 전에 이사야가 이미 “비애의 사람” 메시야에 관한 예언에서(사 53장) 지적하였다. 물론 이사야도 이 여호와의 고난 당하는 종의 노래에서 인간의 행위도 예견되어 있지만(사 53:7,12; 눅 22:37 참조), 강조점은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절)와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 즉”(10절)에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에 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이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라고 하였다.
3. 그리스도의 자원하신 선택
그리스도의 수난은 피동태 개념, 즉 비자발적 희생이 아니다. 그는 능동적으로 자신을 드렸다. “인자의 온 것은…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의 말씀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에서 이같은 적극적 선택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요 10:18).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보냄을 받으신 것과 구속의 경륜을 수행하시고자 십자가 단계가 꼭 있어야 함을 알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 18:11)고 하셨다. 이렇게 십자가의 의미는 인간의 배척 활동(사단의 활동)과 하나님의 섭리적 활동,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자원한 선택 활동이란 3중주에서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C.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요성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속죄가 아니어서 필요 없었다는 주장(Socinians 및 자유주의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정하신 것이 될 만큼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1.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셔야 하였다.
그리스도는 고난의 화신이 되었다.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 버린 바 되어야”(눅 17:25) 할 존재가 되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고난의 필요성의 직접적 이유는 성경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고난을 운명론적으로 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한 자원하는 굴복을 하셨다. 이러한 고난 예언의 성취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모두 실족하게 될 예언까지라도 성취되어야 하였다(미 26:31; 슥 13:7). 이 고통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중보 외에는 아무 것도 그 값을 지불하고 절망적인 슬픔과 불행으로부터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해 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EW 127).
2.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다.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구속적 사랑의 현현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회고하면서 얻은 결론이 이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속죄의 원동력이 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섭리와 충돌하는 개념인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호 충돌이란 고찰은 피상적인 탐구의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위에 인용한 로마서 5:8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이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라고 하였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비교 평가하여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진하다는 평가적 태도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 중심으로 구원을 이해하고자 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이미 거리끼는 것이 되었다(고전 1:23).
바울은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란 말씀에서 하나님의 십자가의 주도성을 지적하고 있다.
3. 하나님의 거룩성과 의는 속죄를 필요로 하였다.
속죄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롭기 때문에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율법을 짓밟고 더럽히는 것을 간과하실 수 없다. 속죄는 하나님의 이 거룩성과 의 때문에 필요하였다(롬 3:25,26). 또한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선포하셨다(창 2:17; 렘 18:4; 롬 6:23). 하나님은 이 말씀을 지키시는 일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대리적 희생을 요구한다. 죄는 단지 도덕적 약함이 아닌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이 되고 그것은 곧 죄책으로 연결된다(요일 3:4; 롬 2:25,27), 범죄와 그 죄책을 다루지 않고는 정결과 정화가 있을수 없다(출 34:7; 민 14:18). 여기에서 생명이 회복될 수 있도록 생명을 주신 거룩한 인격을 통한 속죄가 필요하다(요 10:10).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희생 그 자체가 속죄의 필요성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다른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토록 참혹한 죽음을 당하도록 방치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성과 의가 압축된 율법 / 계명(롬 7:13 참조)의 불변성을 옹호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Ⅱ.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
십자가가 어떤 의미를 지녔느냐에 관하여는 수많은 논란과 논쟁이 있어 왔다. 여기에서는 이 모든 논쟁을 다룰 여유도 없거니와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한 성서적 이해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계시의 빛에 따라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소망스러운 것이다.
A. 바울의 증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 신약 기자들 중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시사하는 구속적 목적에 가장 집중한 제자는 바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빌3:10)고자 한 바울이었다. 다메섹에서의 회심(행 9:1-19; 22:3-16; 26:9-18 참고) 사건 후 그는 “그리스도의 종”(롬 1:1)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심성을 체득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윤리교사나 모본을 넘어서 구세주이시며 구속자가 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것”이 되나, “구원 얻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고전 1;18).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죽으셨다(롬 4:25).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고전 15:3) “위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 1:4). 또한 그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롬 5:6) 또는 “죄인을 위하여”(롬 5:8)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살전 5:10) 또,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고후 5:14) 죽으셨다.
이같은 바울의 천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눅 22:19)이란 말씀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대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너희를 위하여”에서 “위하여(ὕπερ)”와 “대신에(ἀντι)”의 두 전치사는 아주 상이한 의미를 지녀 구분하여야 하는 단어들이 아니다. “위하여”와 “대신하여”는 상호 배타적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하여” 있었다. 그것은 우리 “대신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진실로 대속사가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희생(제물)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희생으로 보았다. “그(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느니라”(엡 5:2).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이러한 성경절들은 (히 9:14)과 함께 제사의식에 관련된 언어들로, 죄를 다루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희생으로 언급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제물이시면서 동시에 제사장이 되신다. 이 희생의 시각에서 십자가 속죄를 이해할 때 구약성경의 성소봉사, 공의의 만족, 형벌 대속, 부활․승천 이후의 하늘성소에서의 제사장으로 봉사 및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 등과 조화되고 통전적 이해를 할 수 있어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까지라도 기할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피
바울은 “하나님이 그(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라고 하고 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롬 5:9) 또,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엡 1:7)라고 하였다.
성경상 “피”란 말은 “죽음”보다는 “생명”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피에 관한 성경절들을 일별해 보면 “피”가 “잔혹한 죽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상용되고 있어 죽음을 당하는 생명의 의미가 그 핵심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생명을 분리시키는 것은 비성서적이며 무용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원은 복음의 핵심적 주제가 되어 있다(롬 3:25; 5:9; 엡 1:7; 골 1:20; 히 9:22; 계 1:5 등).
B.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곧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런데 바울은 이 십자가를 저주와 연관시키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바울이 여기서 신명기 21:22,23을 인용함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기로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모습이라고 한 점이다. 이 저주는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 따라서 그의 저주받은 심판의 죽음은 놀라운 근원적 변화를 야기시켰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 위에 내린 저주, 즉 사형선고가 이제 속량된 것이다. 또한 여기서의 이 속량한다(éksēgorasen)는 말에는 값의 개념이 담겨 있다. “아고라”(agora, 시장)란 말은 산다(to buy)를 뜻하고 있다. 이 “아고라”와 동족어로서 동사인 eksagorazō)(속량하다)는 모든 것을 다 지불하고 사는 일로 노예시장에서 노예 매매에 사용된 시장언어다.
저주 상태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자기의 행위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저주에서 속량하고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조건적인 용서는 의의 원칙으로 된 하나님의 통치에 큰 지장이 되기에 우리의 저주와 심판이 그에게 전가되어 그가 짊어지셨다. 그리고 노예상태에서 속량된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갈 3:8, 11; 롬 3:24 참조). 이러한 의에 관련된 용어들은 법정의 언어에 속한다. 이 법정 언어들은 죄의 본질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어긴 것으로 죄에서의 구제책은 공의의 만족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의롭게 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며(갈 3:14; 4:6),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갈 4:5-7).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이 속박의 정죄에서 구출시키는 것이 된다. 베드로도 이러한 원리를 지적하여 조상이 물려준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속량)된 것은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9)고 지적하였다.
C. 화목의 범주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희생의 종국적 목적은 인간을 하나님께 화목시키는데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사역을 화목이란 개념으로도 파악하고 있다.
1. 하나님과의 화목(καταλλαγη)
신약성경에는 katalassō(to reconcile)가 6회(롬 5;10; 고전 7:10; 고후 5:18-20), 명사형 katallagē(reconciliation)로는 4회(롬 5:11; 11:15; 고후 5:18f) 나온다. 여기서 화목(katallagē)이란 말의 중심적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외가 끝나고 평화와 신뢰의 관계가 회복된 것에 있다. 전에 지은 죄로 인하여 야기된 장애물인 적대관계, 즉 원수된 상태에서 평화와 신뢰의 친교관계의 회복, 즉 언약관계의 갱신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고 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라고 하므로 이 적대관계의 해소인 화목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고 지적하였다(골 1:21 참고). 이 화목은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온다(롬 5:10).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존재가 되었다(고후 5:21). “죄로 삼으신 것”이란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 곧 죄인으로 취급 받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할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고후 5:14 참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의 죽음을 대신 당하신 것이다.
장애물이 제거되어 하늘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 상태인 이 화목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인간 밖에서 하나님의 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화해에는 인간적 차원의 의미도 부각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화해를 받아들여(롬 5:11) 체험하여야 한다(엡 2:12-19). 그리고 우리에게 이 화목의 메시지를 부탁하신 것(고후 5:19)에 유념하여 다른 사람에게 화목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 인간적 국면이 된다.
2. 속죄물(贖償, expiation)과 화목제(propitiation)
한국어 신약 성경에서는 화목(katallage)과 화목제(물)의 뜻이 표기상 혼란이 있어서 구분을 위해 후자를 유화(宥和)란 말로도 표기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의 의미를 hilasmos 어족을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 말은 바울과 요한의 글들에서 “화목제물”(요일 2:2; 롬 3:25), “화목제”(요일 4:10), “구속”(히 2:17)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바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hilasterion)로 세우셨으니…”(롬 3:25)라고 하여 죄가 제거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hilasterion(expiation / propitiation) 개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한 화목 수단이 되어 화목을 초래케 한다. 이 화목제물로 인하여 새로운 친교와 새로운 관계의 구축이 형성된다. 하나님께서 전에 우리가 지은 죄를 간과하시고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롬 3:25 하단).
이 ‘속죄물 / 화목제’ 란 말은 히브리서 9:5에서 hilasterion을 속죄소(mercy seat)의 의미로 사용한데서 온 것이다. 이는 지성소의 법궤 뚜껑 Kaphar(cover, 레 16:2 참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거기 죄용서를 상징하는 속죄소 위에 피뿌림을 통하여 속죄가 일어난 것이다. 이 속죄소 위의 행사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을 통한 속죄(용서)의 표상이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상 원형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덮어졌고 속상되었다.
3. 하나님의 의의 소여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어떻게 임하여 우리가 참된 삶을 향한 칭의를 받고 사망 선고를 받은 죄가 제거되는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 즉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율법의 사형 선고 아래 있었다. 심판과 진노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롬 1;18; 2:1,2,8,12; 3:5-6). 바울은 이러한 문맥 구조 때문에 믿음의 의에 관한 진술을 하고 있다(롬 3:21-26). 여기의 진술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율법의 지배 아래에서는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수 없다. 전 인간은 징벌 아래 있다. 의는 믿음으로 받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약 시대의 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선물이 되는 이 의를 받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3:22)에서의 믿음이다. 이 믿음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께서는 자유 해방을 주시는 분이며 구속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징벌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의를 부여하는 칭의는 자유해방이며 구속(apolutrosis)이 된다(롬 3:24). 이와 같은 일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으심을 통하여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그 피로 인하여 속죄의 수단으로 삼으셨다. 여기서 “화목제물”(3:25)이란 말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뜻하는 피와 연결되므로 인하여 희생제물의 뜻을 함축하게 된 것이다. 즉 예수의 구속 사역은 속죄의 희생제물(NIV, a sacrifice of atonement)이 된 것이다.
이 희생제물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과 하늘 성소까지라도 포괄하고 있다. 속죄의 수단으로 흘려진 피는 속죄소 위에 뿌려지므로 하나님 앞에 바쳐졌던 것이다. 따라서 피를 흘린다는 것은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일이 상정되어야 한다.
신자들은 이 속죄하는 희생제물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납되는 의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새로운 의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진입하게 된다.
4. 성부 하나님의 사랑
위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화목제물(hilasterion) 개념이 영문 번역에서 다양성을 띠고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진노와 심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이 용어가 사랑의 하나님 사상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희생하는 죽으심으로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렸다는 차원의 이해를 평가 절하하거나 배격한다. 그러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가 다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사랑은 상호간 반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눈에는 이 두 가지가 조화되기 어려운 것이 될지 모르나 하나님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다. 비합리적 정서의 분출이 있고 자제력의 상실이 수반되는 특징인 인간의 분노를 하나님의 분노에 대입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을 1%도 용납치 않는 의를 위한 불타는 열심이며, 사악한 것을 단 1%까지라도 제거하고자 하는 악에 대한 그의 적개심을 감안하면 진노란 말 자체가 완전한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단지 더 이상 좋은 표현이 없어서 통용하고 있을 뿐이다.
악에 대한 이러한 거룩한 적대적 태도가 있기에 죄인이 하나님께 나가 그분에게 용납되자면 이 적대감이 선행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이 해결 방책이 하나님에 의하여 준비된 화목제물 / 속죄제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준비는 죄인을 향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발로이다. 즉 화목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출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는 상호 긴장 관계나 모순 관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흔히 한국의 전래 종교에서나 다른 나라의 이교도들이 자기들의 신의 불쾌나 분노를 유화시키고자 돼지머리나 기타의 제수를 사용하므로 신의 마음을 바꾸고자 진력하고 있으나 그 제물들은 신에게 바치는 뇌물의 성격을 지닌 것들에 불과하다. 성경에는 이러한 뇌물 공여 사상이 나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을 바치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들거나 유화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화목제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전에 품었던 마음이 바뀌어 이제 인간과 화해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라고 하였고 바울도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도성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참고 롬 5:8; 8:32). 엘렌 G. 화잇 여사도 이 점을 간파하여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큰 화목제물 때문이 아니고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그 화목제물을 준비하신 것이다.”
인간이 자기들의 죄를 그리스도 대속제물 안에 피한 결과 그 누구도 죄의 결과로 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구주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의 구체적 결과를 받으셨다는 의미가 된다.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 뿐만 아니라 그 죄에 수반되는 하나님의 진노까지라도 지신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차대한 시간에 그리스도께서는 홀로 죄가 가져온 종국적 문제를 두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 15:34)라고 외치셨다. 저항할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는 죄가 초래한 이슈는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신다는데 있다. 죄의 기원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에 있다. 그리고 죄는 버려짐(유기)을 거둔다. 인간이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을 때에 죄를 짓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죄악의 추수를 거두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죄의 근본적 문제이다. 죄의 종국적 형벌이란 인간이 선택한 하나님과의 소외와 분리이다.
Ⅲ.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그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께서 외치신 이 말씀대로 금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존재, 내동댕이쳐진 존재로 전락된 일이 없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위로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간을 결코 떠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한없이 참으시며 이 죄된 인간을 껴안으신다. 그리고 인류 역사가 시작하기 훨씬 전에 하나님의 예지와 그 심원하신 의지로 마련하신 갈바리를 통하여 그 인간을 타락하는 바로 그 순간 복원하고자 하신다. 고독한 외침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보다 더 깊은 절망을 의미한다. 그분은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을 맛보셨다. 3년 전 선구자 침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하신 말씀이 시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죄로 삼으셨다. 죄의 책임을 받으셨다. 이 일을 사도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고후 5:21)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상에서 그는 죄가 되셨고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셨다. 죄가 불러오는 저 나락의 구렁텅이로 내려가신 것이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죄가 되셔서 하나님의 버리신 바가 되셨다. 누구의 죄를 위하여 그는 죄가 되셨고 누구를 위하여 대신 버리심을 당하였는가? 그것은 내 죄 때문이다. 각 사람의 죄를 위하여 그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벧전 2:24)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이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을 받는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Ⅳ. 객관적 속죄․주관적 속죄․승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참 뜻과 목적을 보다 더 잘 포착하기 위해 속죄의 객관적 면과 주관적 면을 고찰하여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이루셨”(행 3:18)기 때문이다. 비록 빌라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합동하였다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예정하신 것이었다(행 2:23; 4:4, 27, 28 참고). 동시에 이 일은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서 행하여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렇게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영원한 하나님의 측면과 역사적 인간적 측면을 지닌 것이 되었다. 이 그리스도의 속죄는 객관적인 한 실재로서 인간의 죄를 속하려 하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그리스도께서 받들어 이행하신 것으로 인간은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죄에 대한 심판, 죄에 대한 지불에 역점을 둔 것이 객관적 속죄론이다. 반면에 속죄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으로 죄된 인간의 마음을 부수고 사랑의 불을 켜도록 고안되었다는 것이 주관적 속죄론이다. 속죄는 주관적인 과정으로서 아무런 장해도 없는 인간의 심령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인식하는 신념이라는 것이다. 즉, 객관적 속죄 중심으로 십자가를 볼 것인가 아니면 주관적 속죄 중심으로 십자가를 볼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A. 객관적 속죄
영원하고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루살렘 성 밖에서 모든 인간을 위하여 단회적으로 일어난 객관적 사실에 속한다.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단번에(ephapax - once for all) 자기를 드려 이루셨”(히 7:27)다고 하고 베드로는 “한 번(hapax) 죄를 위하여 죽으사”(벧전 3:18) 라고 하여 그 객관적 역사적 사실성을 확언하고 있다.
안셈(Anselm)에 의해 시작된 객관적 속죄론이 칼빈(Calvin)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흔히 이 객관적 속죄론이 신을 달래고자 하여 제물을 드린다는 이교적 요인이 잠재되어 있다고 하여 비판하고 있으나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친히 제물을 준비하였다는 점에서 이해될 성질의 것이다.
속죄는 인간의 상황과 운명을 영원히 바꾸는 하나님의 깊은 뜻에서 왔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자애로운 뜻은 과거, 현재, 미래를 걸쳐 영원토록 동일하나 그분의 우리를 향한 실제적 관계와 우리를 취급하시는 태도에는 변화가 있으시다. 이른바 하나님의 변화(Umstimmung Gottes) 개념이 변화를 싫어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개입으로 마지못하여 온다는 것이 아니다. 의로운 분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재벌들이 거액의 뇌물 또는 상납금으로 통치자의 마음을 회유시키듯이 하나님을 회유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래 형성된 관계를 항구적으로 수정, 변경시키는 행위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죄되고 반역적 세상에 자신의 선하심을 행사하실 수도 없으시고 각 인간과의 교제 관계를 복구하실 수도 없으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외에 그 어떤 것도 죄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속죄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이다(롬 5:9-10). 바울은 이 사실을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란 말로 묘사하고 있다.
구원은 심판을 통해 거중 조정된다. 죄에 대한 심판이 선행되어야 죄용서가 가능하다. 십자가에서 죄의 본성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심판과 정죄를 하셨다. 바울은 위 성경절에서 이 원리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갈바리에서 그리스도를 버리심으로 죄를 격퇴하셨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대속적으로 죽으심을 당하고 하나님의 율법의 의로운 요구인 공의를 만족시키고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그 하나님은 동시에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분이시다(롬 3:26).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모두 죄에 대한 심판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함께 융화되어 있다.
2.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되지만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의 죄의 사악성에 대한 심판도 된다. 예수께서는 지상 생애의 전 봉사 기간 중 죄악에 대하여 적대적 메시지를 주셨다. 이것은 공생애 출발점에서 회개의 호소를 한 것에서 단적으로 나타났다(막 1:15). 시험 받으시는 중에서도 죄와의 타협을 완강하게 거절하셨다(마 4:4-10). 그는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셨다(히 12:4). 그는 온 마음을 다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에 드리셨다. 즉,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엡 5:2). 예수께서는 죄를 반대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으실 것으로 말씀하셨다(막 8:31; 눅 22:39-4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계셨다(요 5:30; 8:28-29; 12:24, 27 참조).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십자가상에서 단번에(once for all) 옹호받지 않고는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계셨다. 십자가에서 그는 하나님의 이 사랑의 거룩성을 드러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란 말씀에서 시사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는 이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3. 죄인을 위한 대리적 희생
이 죄인을 위한 대리적 희생은 죄인을 대신하여 희생 동물에게 죄가 전가된 고대 성소의 제사 제도에서 십자가의 전영(前影)으로 나타나 있다(레 17:11; 히 9:22 참조). 신약성경도 이 십자가를 대리적 희생의 원리로 보고 있다(요 1:29; 고전 5:7; 벧전 1:19). 무엇보다도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의 대속적 희생제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으로 성취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히 9:26; 10:12,14). 이 대리적 희생에는 우리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사 53:6,12; 고후 5:21; 히 9:28; 벧전 2:24; 3:18), 우리를 처벌하는 법적 의무를 지신 것이다. 전가된 것은 주관적인 죄성이나 죄책이 아니다. 객관적인 죄에 대한 처벌, 즉 처벌이라는 법적 결과가 전가된 것이다. 대리적 희생은 이미 언급한 전치사 huper(for)와 anti(in place of)의 용례에도 나와있다(고후 5:14; 요 15:13). 디모데후서 2:6에는 두 전치사가 같은 본문에 나오고 있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모든 사람을 대신한, 그리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희생으로 나와있다.
4.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
그리스도의 희생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이 범한 율법의 형벌을 지불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만족 기능을 강조하는 용어들이 속상(expiation), 속전(ransom), 구속(redemption) 등에 나와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지불된 값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을 하나님의 공의로부터 속량한다.
B. 주관적 속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다(롬 5:8; 요일 4:10; 요 3:16; 15:9; 고후 5:18,19). 그리고 그리스도의 삶, 고난과 죽으심을 통한 이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는 죄인의 마음에 구속과 화해와 사랑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반응을 촉구한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역사적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 객관적 역사적 사건이 나의 것으로(주관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 속죄의 의미가 살아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시인하든지 않든지 간에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십자가에서 비취는 빛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그의 사랑은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준다.” 주관적 속죄 국면은 십자가의 도덕적 기능으로 속죄의 기본적 원인이라기 보다도 그 결과가 된다.
1. 죄인의 회개 반응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책의 짐을 지셨다.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하여 죄의 실재성, 반역성, 하나님과의 적대성에 관한 바람직한 이해를 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의 정당성을 시인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대신 죄책 담당을 위해 순종하신 일에 감명을 받고 그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회개가 일어난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회개하도록 이끄신다.”
회개란 새 마음 갖는 것을 뜻한다. 이 새마음은 인간 자신에게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죄의 적대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변명한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나 자신의 죄의 추악성과 사악성을 보게 될 때, 그리고 그토록 죄스러운 나를 위하여 한 점의 죄도 없으신 분이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겸손히 수용하시는 순종을 깨닫게 될 때, 십자가상의 회개한 강도처럼 깊은 회개를 하게 된다.
용서받는다고 해서 형벌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죄는 고통을 수반하고 그 삯은 사망이다. 이 하나님의 법도는 정당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하나님의 명을 수용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감지하고 감격한 사람은 회개한 강도처럼 새 마음을 받아 “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고 탄원한다.
진실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을 받으신 것처럼 이제 나는 그분을 위하여 고통을 받을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간에 그분을 자기 안에 모시며 신뢰한다. 즉, 참된 믿음을 갖는다. 그리하여 죄로 인해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재구축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용서가 된다. 즉, 참된 용서란 죄에 수반되는 결과를 면제받는 것이 아니고 망가진 사랑의 관계가 복원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용서란 죄인 되는 내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정죄 가운데서만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아들과 딸로 붙잡고 계신다는 점에 용서의 패러독스가 있다.
2. 믿음의 “아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 그리고 그 넓이를 말해주고 있다. 내 자신이 죄를 범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 된다. 나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죄값의 무서운 심판을 당하게 한 것을 깨닫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행위를 두고 마음으로부터 “아멘”하는 믿음이 있게 된다.
이 굴복, 즉 아멘이 믿음이다. 이 일은 한편으로는 성령의 역사인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 된다. 인간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심판 받고 용서받은 것을 이해하게 되고 믿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란 말씀의 축복에 환호하는 자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갈 2:16) 된다. 이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는 자들의 아멘이 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 아멘을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이 사람은 용서와 구속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가 된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새롭게 하셨다. 그 인간은 하나님의 승리의 결정체가 되었다.
C. 승리의 새 생활 선물
사도 바울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고 하고 또 “그도 또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히 2:14,15)고 하여 십자가의 승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는 원복음(protoevangelism)인 창세기 3:15에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에서 사단에게 가한 “결정타”(death stroke)가 된다. 십자가는 사단, 죄, 죽음에 대한 승리가 된다(요 16:33; 요일 3:8; 롬 6:9; 딤후 1:10 등).
그리스도의 이 승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자들의 승리가 된다(롬 8:35-37; 요일 5:4-5, 계 5:9-1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새 생활의 선물도 된다. 구속받은 자는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는 고백을 하게 된다. 거듭난 것은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벧전 1:23) 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라나는 과정을 거친다. 이 성장 과정에는 아직 그의 안에 존재하는 악한 성향과 매일의 투쟁이 있다(롬 6:12-14; 12:1-2).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죽게 함에 있다. 그가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은 우리로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도록 함에 있다(막 8:34-35).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은 우리로 완전히 순종케 함에 있다.
그분이 우리를 죄의 정죄로부터 구속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구속하신다. 바울은 이에 관하여 로마서 6장에서 감동적인 말씀을 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절).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라”(6-7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12절)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14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3절).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죄는 더 이상 두려워할 어떤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를 무너뜨려 그리스도인은 그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의 이 해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승리, 그리스도의 승리, 그리고 성령의 승리를 보게 된다. 그의 십자가상의 죄와 악에 대한 승리는 실재적이며 동시에 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already)와 “아직도 아니”(not yet)의 어간에 있는 긴장 중에 살고있지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할 수 있다(롬 5:17). 그러나 매일같이 정욕과 육욕에 쌓인 육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마귀가 종국적으로 멸망받는 마지막(eschaton)이 올 때까지(고전 15:24-25; 계 20:10) 우리는 이 십자가에 못박는, 즉 죽음의 경험을 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오늘날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주 되심을 기뻐하며 인정하는 친 백성들의 삶에서 자신의 주권을 확고히 세우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언약 백성을 삼으신 권능의 행위에서 그 전영으로 나타나 있다.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새 언약 백성, 즉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는 이 세상에 화해와 증거를 하도록 위탁받은 하나님의 기관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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