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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복신앙, 무엇이 문제인가? (3) 고통과 악에 관하여 (김진오)

하나님아들 2012. 10. 16. 14:33

기복신앙, 무엇이 문제인가?
(3) 고통과 악에 관하여

 


1. 고통을 자각 할 수 있는 사람

    사람이 고통과 행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감각 기관을 가진 존재로 창조된 것이 사람이 가진 특권이라 생각한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미생물이나 나무나 돌이 사람처럼 고통과 행복을 함께 공유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고통지향형이 아니라 행복지향형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제거하고 새로운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을 인하여 고민하며, 그 해결의 해답을 찾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인생이란 바라는 행복은 동산 위에 무지개처럼 잡힐 듯 잡힐 듯 하지만 잡히지 않고, 가까이 오기를 거부하는 수많은 고뇌 와 고통은 마치 울타리처럼 우리의 삶을 둘러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기독교 역사에 성 어거스틴(A.D.354-430)과 아이레니우스(Irenaeus, c.130-c.202)는 고통과 악에 문제에서 그 원인과 목적에 관하여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John Hick, "Evil and the God of Love" 참고)  특히 성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들 가운데 악의 문제에 깊은 고뇌를 한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는 악이 어디에서 왔으며, 언제 어떻게 왔는가의 질문을 통해서 악의 근원을 밝히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악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악은 선의 부재이며 "전도된 의지"라고 하였다.(참회록, 7. 16)

본질적으로 선한 어떤 것이 그것 자체의 기능을 하지 않는 그것을 악이라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선의 부재를 가져오는 악의 원인은 절대 변함 없는 선에 대해여 변할 가능성을 가지 선한 존재의 의지의 결점 때문이라 하였다.  자유의지는 모든 악의 원인이며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은 결과적으로 고통을 가져오는 원인이라 하였다.  이 부분에서 나는 성 어거스틴과 조금 다르게 보고 있다.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바로 채찍을 들고 고통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광포하고 성질이 급한 아버지가 아니라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질서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반할 때 창조질서 안에서 스스로 바른 질서를 회복하려는 법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회복의 수단이 바로 고통이라 생각한다.  고통은 하나님의 창조질서가운데 바로 살아가도록 주신 위험을 알리는 경고판과 같은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악에 대한 심판으로 살인에 합당한 고통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살인자는 살인 당한 자의 가족으로부터, 사회법으로부터, 자신의 양심의 법으로부터 (완전 범죄자들이 당하는 양심의 고통)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있을 절대적 심판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잘못으로 자연환경이 파괴되었다면, 하나님께서 환경파괴자들을 당장 벌을 주시지는 않지만, 자연은 자기 회복을 위하여 환경이나 기상변화나 지각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는 천재지변의 재앙의 대가는 모두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창조질서와 현재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섭리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창조질서 대로 순행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타락이 후에 자연도 사람도 창조질서를 위배하였고 이것으로 인해서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다.  

이러한 악은 고통을 통해서 본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기를 원한다.  세상에 죄와 악이 결코 없어 질 수 없으므로 고통은 계속해서 창조법칙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자동화된 기계장치에 이상이 발생하면 빨간 신호가 들어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고통의 신호가 울리게 하셨다.  고통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유용한 자동장치이며, 죄와 악에 대한 경고장치이다.  고통 그 자체는 절대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우리가 악의 기원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게 되면 결국 그 화살이 창조주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하던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던지 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다.  어거스틴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는 내 영혼은 더욱 불행하여 졌고 진리를 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죽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으로 더욱 괴로웠습니다"(참회록, 7. 5)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하나님은 최고의 선이므로 결코 악의 근원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리옹의 교부 아이레니우스는 고통의 목적에 대해서 밝히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을 구별하여 사용하였다.  사람에게 육체적 모형으로 거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주와 교재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적인 피조물로서 사람의 본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양은 성령으로 완전하게된 완전한 사람의 모양을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도덕적 발달과 성장을 위해서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존재로 창조하셨지만, 마지막에 창조주께서 의도하신 완전한 존재가 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악은 악이다.  이 말은 악으로부터 어떠한 유용한 목적이나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악이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 라는 질문으로 논쟁할 어리석은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악은 존재 자체가 악한 것이다.  그러나 고통의 문제 있어서는 존재 목적을 찾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통이 모든 사람에게 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부 아이레니우스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영혼을 만드는 고통의 골짜기인 인생을 자나면 모든 사람이 완전한 자가 될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물론 완전한 자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너무 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지난 삼월에 한 2개월 정도 우리 교회에 출석한 고씨 형제를 인천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였다.  고씨 형제는 어릴 때 부모를 잃어버리고 5남매에 맏이로 동생들을 양육하였다.  20대에 건축노동자로 전국을 다니며 현장에서 노동을 하였는데, 술을 하게 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무너져 갔다.  2년 전에 우리 교회 앞으로 이사를 오셨는데 처음에는 열심히 일을 다니시는 것 같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콜 중독으로 인사불성이 된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내가 전도했을 때 고씨의 삶은 말 그대로 고통스러운 생활이었다.  교회를 나오면서 조차 술을 끊지 못하고 결국 어느 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주 집을 찾아갔었는데 그 날도 술 먹으면 있는 모습대로 그런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 그 모습으로 있는 것이었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몸을 일으켜 보았는데, 벌써 몸은 싸늘하게 식어서 굳어 있었다.  나이 44세가 되도록 가족도 없고 가까운 형제들  조차 알콜 중독자라고 가까이 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그가 남긴 조그만 한 수첩 어디에도 가족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경찰서에서 신원조회를 통해서 형제들을 찾았는데 죽은 지 2주 후에 그들이 찾아왔다.  지금도 화장하며 돌아오는 영구차에서 한 살 아래 여동생이 울부짖으며 소리치는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 바보야 나이 44살 먹도록 아버지라고 불러줄 자식새끼 하나 두지 못했나 세상에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서 여보라고 부르며 울어줄 사람도 없느냐.  이 병신아 이 병신아...    목회자로서 그가 완전한 자가 되어 죽었다면 나에게 큰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참혹한 죽음은 지금까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고씨뿐이겠는가 세상에 참으로 고통스럽게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고통이 악한 세상에 유익한 것이지만 고통 그 자체를 미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통은 사람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와 같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고통을 바라보는 4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부류는 고통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모르지만, 고통에 대해서 부정적이며 무관심하다.  고통은 생각해볼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 가운데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 대표적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신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  

지혜자의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14:13)는 말과 같이 인생의 행복과 기쁨이란 것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의미로 생각한다.  마치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처럼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 것"(눅16:19)에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다.  편안함과 안일함과 호화롭고 고급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고통자체를 혐오  하는지 모른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고통에 대한 소극적인 수용자들이다.  세상에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고통이 주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하므로 세상에 살만한 아무런 가치도 없고, 인생이란 것은 그 자체가 불행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염세주의자들이 대표적이라 생각한다.  프랑스 철학자 카뮈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고통의 울타리로 둘러 쌓여 어디를 보아도 출구를 발견할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한다.  고통 앞에선 인간은 절망적이다.

셋째 부류의 사람들은 고통에 대한 적극적 수용자들이다.  고통의 실체를 인정하며 고통을 통해서 인생의 성공을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고통을 수용하기도 하고 이용하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인생에 성공하려면 그 정도는 고생하야지, 그 정도는 희생을 시켜야지 라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수단으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현실주의자들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사회발달에 상당히 기여하고, 그리고 그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가는 초인들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에 더 많은 고통과 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넷째는 고통에 대한 창조적 수용자들이다.  고통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의 인격의 성숙을 위해서, 사회의 완전한 발전을 위해서 고통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보다 행복한 사회, 선한 사람들의 세상을 위해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이타적인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고통과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희망과 행복을 주었다.  테레사 수녀, 간디, 불타, 그리고 이름 없이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다가 간 사람들이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의 열쇠를 가지시고 역사의 중심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2. 고통의 문제의 출발점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악과 죄에 대해서 정통교회는 그 근원을 인간의 전적타락에서 찾고 있다.  나 개인으로서는 인간의 전적타락에 대한 교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이 교리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아직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고 생각하기에는 이른 인간의 내면에 자신의 부패를 깨달을 수 있는 작은 양심의 불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도 세상에 많은 선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의 생각으로 바라본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인간의 전적타락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첫째 인간의 전적타락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된다.  둘째는 성령교리는 인간의 전적타락으로 영적인 죽음을 인정할 때 성령과 물로 거듭남의 비밀을 받아들이게 된다.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인 됨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없다.  

만일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고통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각도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질병, 가난, 저주, 고통이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보는 것이 전체적이 경향이다.  만일 우리가 고통의 문제의 출발점을 인간의 타락에 초점을 맞춘다면 의로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그런 모욕적인 고난을 겪었다고 하던지,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왜 그가 그런 종류의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의로운 욥의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오던 생각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철학자들이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선이 신데, 왜 악이 존재하는가?'의 질문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라는 질문은 그것 자체가 모순이다.  일부 철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의인의 고난에 대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질문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철학자들은 무한히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받아들인다.  그 대표적으로 Alvin Plantinga와 Nelson Pike과 몇몇 학자들이 있다(John Hick, "Evil and the God of Love", 365).  

악인들이 자신들의 악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고통은 충분히 교육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고통의 문제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의인이 악인들의 악을 인해서 고통을 당할 때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이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고난의 이해에 있어서 그 출발점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서 시작하여야 한다.  나는 고통의 문제에 관해서 논리적으로 이분법적인 접근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현실적으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똑같은 고통이지만 잘못을 하고 매를 맞는 사람과 아무 잘못이 없이 매를 맞는 사람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죄를 범하고 매를 맞는 것은 징계하는 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다.  전적으로 죄를 범한 죄인이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범하지 않은 거룩한 자가 매를 맞는다면 징계하는 자의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되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라고 생각한다.  징계자이신 하나님이 스스로 고난과 고통을 자처하신 것이다.

여기서 심판자로서 인간의 교만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상에 일어나는 고통과 처참함의 대부분은 같은 종족인 인간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적어도 동물의 세계에서는 같은 종족간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인간사회에서만이 참으로 말로표현 할 수 없는 악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 여긴다.  교만한 인간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타인과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는 고통도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홍수, 태풍, 기근과 같은 재난이 그 원인이 인간에게 있는지, 자연적 현상인지 우리는 밝힐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 과학도 이 모든 것에 대해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요즘 환경파괴로 일어나는 엘리뇨 현상, 지구온난화, 오존층파괴, 공기수질 오염과 같은 것은 인간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고통과 악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수용하지 못하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분노하며, 자신은 전혀 책임이 없는 악운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악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인 사랑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 주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하신 말씀의 뜻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자리에게 온갖 악을 자행하는 죄인들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그들의 모든 악을 포용하시고 용서하신다.  이것이 십자가상에서 자신에게 온갖 고통과 악을 자행하는 자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라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시다.  이것만이 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평화의 길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사소한 죄악도 포악한 죄악도 모두가 자신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주의(Iism - 오직 자기중심을 의미하는 말로 내가 만들어 낸 단어이다)는 모든 악의 근원이다.  사람은 하나님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선한 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심의 사람은 온갖 죄악을 분출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사단이 끊임없이 그들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는 교만의 발상이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아오고 있다.  공산주의 사상이 우리에게 가장 근접하고 확실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본주의 사상(인간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상)에서 나온 자기만의 공상이 바로 공산주의 이론이다.  이제 우리는 인류가 맞이할 대종말에 대해서도 어는 정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역사를 인간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팽배해 있는 사상이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인간의 수명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줄기세포 배양을 통해서 인간의 기관들을 자동차 부품교환 하듯이 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안락과 행복을 보장하는 주거환경과 온갖 종류의 의약품들,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까지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 오늘의 인간들이 맞이할 세상은 유토피아이던지 아니면 고통을 안겨줄 대재앙의 순간을 예고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악한 욕망을 자극할 뿐이다.  그래도 지구의 운명의 순간을 연장하는 것은 선한 의지를 인간의 마음에 불어넣는 것뿐이다.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의인이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고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  이제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환경에서 오는 수동적인 고난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시키려고 하는데서 오는 적극적인 고난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악과 죄를 제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고 선언하였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만 존재한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과  악을 행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다.  앞으로 심판은 이 두 부류의 사람을 악인과 선인,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갈라놓을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3. 자기의 고통을 과대포장하지 말라.

믿음 좋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당한 지난날의 고통을 마치 영웅들이 무용담을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접하게 된다.  자신이 당한 고통과 자신이 가진 능력을 과대 포장하여 신화화(myth)하려는 것은 영적 교만에서 나온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미혹에 현혹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신비주의 신앙에 깊이 물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자들에게 쉽게 유혹되어 이단으로 떨어지게 된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시대와 환경과 처지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각각 다른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하며 인내하는 것을 보게 된다. 고난이후에 무슨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라 고난 그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감사하므로 받아 들였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고 권면하고 있다.  왜(why)와 어떻게(how)을 사용하지 말라. 왜 나에게 이러한 고통이 왔는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실 수 있는가?   무심코 던진 왜(why)와 어떻게(how)의 질문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인류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고통과 아픔을 당한 자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고통과 아픔이 자기만의 세계이므로 자신이 당한 고통과 아픔을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이 사람의 연약함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C. S. 루이스는 "누구도 2인 분의 고통을 당한 이는 없다"라고 하여 사람이 감당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고통을 당하였다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였다.(고통의 문제, 크리스챤서적, 170)  이러한 생각은 고통이 주는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리게 하고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지만 고통은 고통 당하는 자의 몫이므로 그 만이 고통과 아픔을 느낄 뿐이다.  

고통은 신사적이어서 병이 병을 전염하고, 악이 악을 전염하는 것처럼 고통은 그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전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에는 그 원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완전한 자연의 법칙과 하나님의 뜻)를 위반할 때 오는 결과이다.  손을 불 가까이 가져가면 고통의 경고가 온다.  경고를 무시하면 손은 불에 타버리게 되는 것이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할지라도 고통 그 자체는 위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에 경고 이상의 참혹한 고통이 있는 것이다.  9. 11테러로 죽은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이 영문도 모르고 죽음의 고통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러한 참혹한 고통에 대해서 인간이 줄 수 있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고요히 침묵할 뿐이다.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만이 그 해답을 주실 것이다.  이것만이 오직 고통 당하는 자의 소망이다.  그리고 참혹한 고통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생의 교훈을 남길 뿐이다.

4.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한계점

왜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고통의 역할이 무엇인가? 에 관해서 이제까지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논증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통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찾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신학자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다.  단지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로서 누구보다 고통의 문제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악의 문제에 대해서 처음 눈을 열어 준 분은 예일대학교의 은사이신 마릴린 아담스 교수 부부(Marilyn McCord Adams and Robert Merrihew Adams)이다.  

그녀에게 첫 학기에 구속(Atonement)에 관한 강의를 수강하였다.  그리고 둘째 학기에 악의 문제(The Problem of Evil)을 수강하게 되었다.  생소한 과목에 대한 호기심으로 신청하였다가 이슈의 난해함으로 수강한 과목들 가운데 가장 어렵고 힘든 코스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목은 나에게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고, 나의 신앙의 깊이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한다.

목회현장에서 접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겸손케 하시려고 주셨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도 고통을 주신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인간과 마귀의 무지함과 악함이라 생각한다.  욥의 시험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예지를 통해서 욥의 신앙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러나 사단은 끊임없이 자신의 불확실한 추측과 고집으로 욥을 시험하였다.  

고통의 문제는 고통 그 자체에서는 결코 해답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고통을 알게 되면 고통의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자동차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것은 한가지 고장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 내부에 있는 수많은 부품가운데 어느 부분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만일 배가 아프다고 말하면 병의 증상이 한가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수십 수백 가지의 병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배가 아프다는 것은 분명히 배에 있는 기관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배가 아픈 것이 꼭 배 부분이 아파야 배가 아픈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서 검진하니까 감기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감기에 걸리면 열이 나고 기침 콧물이 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왜 배가 아픈 것일까!  아프다는 것은 몸의 어느 부분이던지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악은 무엇인가에 이상이 발생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김 진오 목사
교회 하나됨을 위한 연구모임 청지기
CORI: (Church Oneness Research Institute)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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