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신학

해외선교의 성경적 이해

하나님아들 2020. 8. 15. 09:13

해외선교의 성경적 이해

 

 

 

M.Div. 2차 김진용

 

 

Ⅰ. 서론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 구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셋째 하늘로 올라가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다. 많은 교회들은 이 구절과 더불어 마태복음 28:19-20을 근거로 하여 "선교"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알고 시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지만, 선교라는 미명하에 많은 변칙과 속임수가 횡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선교를 하려면 능력 있는 일꾼을 선정하여야 하는데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없는 사람을 선교지에 보내고 지원한다. 둘째, 교회의 돈은 성도들의 하나님께 바친 헌금이다. 하나님께 바친 헌금을 선교라는 명목으로 헛되이 낭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셋째, 교회들은 해외 선교를 해야 교회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얼굴 치례를 하기 위해서 선교에 참여하기도 한다. 넷째, 선교사라는 명칭은 그 사람을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인데, 아무에게나 선교사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진짜 선교사들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있다.

이 기회에 우리는 교회의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고 필요한 자격자를 필요한 지역에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 하나님과 화목하고 교제하며 다시 만날 영광의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게 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효과적인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를 점검해 보기로 하자.

 

Ⅱ 본론

 

1. 선교의 의의

교통과 통신 및 다른 열악한 문화적 환경으로 인하여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종족이 살고 있는 지역을 선교지로 선정했다면 우선 지역을 잘 선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복음의 중요성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을 자인하지만 직접 그곳에 선교사로 갈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하여 선교의 짐을 지고 그곳으로 떠나는 선교사를 지원하는 것이 선교이다.

이때 유의할 일은 다른 사람이 먼저 가서 닦아 놓은 기초 위에다 집을 짓는 얌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도 이점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였다. "또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이는 다른 사람의 기초 위에다 짓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와 같이 '그에 관한 소식을 접하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닫게 되리라.'고 하였느니라"(롬 15:20,21).

 

(1) 누구를 보낼 것인가?

주님 편에서는 그런 지역에 보낼 유자격자를 찾으신다. 그분께서 누가 나를 위하여 가겠느냐고 물으실 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첫째,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개인 구령할 수 있으며,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바른 성경으로 정통 신학을 공부하여 교리에 편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단 교리로 무장하여 교단의 교세를 확장시키려는 사람은 선교사로는 부적격자이다.

극단적 칼빈주의, 극단적 세대주의, 알미니안주의, 은사주의, 무 천년주의, 후 천년주의, 침례로 구원받는다는 교리, 유아세례, 성직자 제도, 시험보고 만들어지는 목사 등은 모두 합당치 않은데, 이는 그런 것들은 성경에서 가르쳐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허드슨 테일러, 아도니람 져드슨, 데이비드 리빙스톤, 윌리엄 케리, 카리브의 한 섬에서 굶어 죽은 선교사, 파푸아뉴기니아와 남태평양의 섬에서 원주민에게 잡혀 먹힌 선교사들과 시베리아 감옥, 루마니아의 감옥, 중공의 감옥에서 죽어 간 선교사들 중에는 교단 교리를 가르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그 교단의 종이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갈 1:10).

사탄은 가짜 교회, 가짜 목사만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가짜 선교사도 많이 양산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추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집을 지으려 하는 것은 도둑이며 이리이지, 양 우리를 짓는 자가 아니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감언이설과 거짓말로 사람을 꾀어내어 그 교회와는 교제를 단절케 만들어서 다른 교회를 세우는 자는 목자가 아니라 도둑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 세운 교회들이 얼마나 많으며,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한다고 얼마나 설치는지 아는가? 선교사도 마찬가지이다.

 

(2) 어디로 갈 것인가?

앞서 언급한 대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가 최적지요, 그 다음은 전통 종교로 인하여 복음이 막힌 곳을 들 수 있다. 모슬렘 지역은 유대교를 증오하고 거부하기에 그와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까지도 거부한다. 또한 개종할 수 없는 그들의 율례 때문에 어떤 곳에서는 강하게 복음을 거부하여 선교사들을 투옥하거나, 고문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그 다음은 불교, 힌두교 지역이며, 그 다음은 공산주의에 의해서 오랫동안 복음이 시들어진 곳이다.

그 다음은 카톨릭이 강세인 지역을 들 수 있다. 이런 지역들을 고려해 본다면 참으로 복음을 전할 곳은 많아도 일꾼이 적은 것을 실감할 수 있다(마 9:37,38).

그러나 그 지역(나라)에 바른 성경이 있고,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이 있다면 굳이 다른 나라에서 그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별로 의의가 없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선교사들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유교와 불교로 그 문화권이 형성된 미개한 나라로 알았기에 미국 선교사들이 왔다. 그들이 사회복음이 아닌 순수한 복음을 전했더라면 지금쯤 많은 열매를 거두었겠지만 그들은 변개된 성경을 번역했고, 교단 교리를 전파하여 그들의 교세를 확장하였다.

언더우드와 린튼(장로교), 아펜젤러(감리교) 등이 그러했다. 지금도 남침례교, 일부 장로교 선교사들은 그들 교세 확장을 위해서 이 나라에 와서는 수백 개씩 교회들을 세워지만, 이같은 그들의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의 교회에서 이 땅에 선교사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직도 이 땅에 순수한 복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카톨릭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기에 그 자격이 의심스럽다.

미국의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은 세계 도처(영국, 독일, 프랑스, 그리이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스페인,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하이티, 푸에르토리코 등)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나라에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없거나 그 수가 적기 때문이다.

 

2. 선교의 방해요소

선교사가 일차적으로 할 일은 그 나라 사람들을 구령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다. 그런데 그 나라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르면 어떻게 이 일들이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선교사는 그 나라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첫째 요건이다. 말을 해야 들을 것이 아닌가? 듣지 못하는데 무슨 믿음이 생기겠는가?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겠는가?

선교사는 교회를 세우되, 그 주민을 양성하여 그 사람으로 목자가 되게 해야 한다. 자신은 일꾼을 양성하는데 주력하고, 그 일꾼들로 그들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게 하고, 그에 따른 뒷일들을 맡아 줘야 한다. 절대로 그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선교사도 그리스도의 종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선교사는 통역을 쓰고 있지만 통역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복음 전하는 것을 중단하겠는가?

 

(1) 언어와 문화는 선교사의 가장 큰 방해요소이다.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는 선교의 큰 방해요소가 될 수 있다. 일본인들 같은 경우 언어를 조심스럽게 구사하기로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NO라고 말 할수 없는 일본"이라는 책도 있었지만 거의 직설화법이 없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미숙한 언어구사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일본 뿐 만이 아니다. 선교를 나감에 있어서 그 나라 언어가 준비되어지지 못한 체 나가는 것은 목사가 성경책 없이 설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또한 문화적인 성향도 우리가 미리 숙지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같은 단일민족 국가에서는 오직 한 가지 문화의 전통아래서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문화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다른 문화를 접하게 되었을 때 그 문화를 배척하고 멀리하려는 경향이 많이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문화에 적응해 있다가 타 문화권에 적응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그 아이에게 호감의 표현이 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그 표현이 가장 큰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 선교지가 생활의 도피처는 아니다.

일부 선교사들 중에는 국내목회에서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차라리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여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선교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선교비로 자신의 학업비를 충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부를 더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올바른 선택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공부가 선교지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이것은 선교를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내에서 신학교를 대강 마친 어느 목사가 있었다. 필자가 알기로는 필리핀에 약 6-7년쯤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한 산간에서 주민 몇을 모아 사진도 찍어 보내고 선교 편지도 보내왔다. 거기에 보면 돼지를 길러 소득 증대를 꾀해야 한다는 설명도 있었다. 우리는 그런 선교도 있으려니 하고 1년간 그를 지원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서울에 왔는데 서울에서 약사 고시를 보러 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들은 파송된 선교사가 아니라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대학에 다닐 목적으로 필리핀에 갔었고 선교는 생활의 방편으로 택한 것이었다. 머리를 교묘히 썼던 것이다.

이 사람 뿐만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있는 사역자들은 그저 지금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선교사라는 직업을 잠깐 가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에게 구령의 열정이 얼마나 있겠는가? 선교의 열정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사람만큼이나 불쌍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사역이 아닌 직업으로 생각하는 이런 사람은 차라리 하나님의 일을 안 하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욱더 불쌍한 사람이다.

 

(3) 스스로 임명한 대사

선교사를 어떤 선교지에 파송하는 권한은 지역교회에 있다. 이는 주 예수님께서 지상에 그분의 권위를 실행할 기구로 지역교회만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선교 단체가 아무리 강성해도, 신학교가 아무리 거대해도, 그것들은 모두 지역교회 사역의 일환이 되어야만 한다. 지역교회 없이는 신학교도, 선교단체도, 문서사역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탄생도 마찬가지이다. 지역교회가 지역교회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라. 아무 근거도 없는 자들이 교회들을 세우고 있다. 반석이 아닌 속임수와 거짓말과 도둑질로, 얼굴을 철판으로 가리고 교회들을 세우고 교회놀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수의 자칭 선교사들은 심지어 파송하는 교회도 없이 스스로를 파송하고 있다. 한 사람은 그 교회에서 파송한 사람도 아니면서 누굴 만나면 재정지원을 요청한다.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영어도 못하고 그 나라 언어도 모르는 그가 어떻게 사역지에서 선교를 하겠는가? 그도 생활의 방편으로 선교를 택한 것이다. 그는 심지어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자신을 자칭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복음의 신비를 알릴 수 있으며(엡 6:19),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마 16:24)

 

3. 해외 선교의 오해

전염병이 만연해서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고 하자. 그 나라의 의사들이 누구를 먼저 치료해야 되겠는가? 자기 나라의 환자는 모르는 체 하면서 외국에 나가서 외국 사람들을 먼저 치유하겠다면 그것이 온당한 일이겠는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더 의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자기 민족을 복음화 시키기 위해서 다른 나라에서 선교사가 들어오고 있는데, 그는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선교를 나간다면 그것은 가장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일일 것이다. 그 순서가 사도행전 1:8대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보다 그 나라의 언어도 익숙하고, 선교 열정도 투철하고, 성경도 잘 알고, 인격도 잘 다듬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를 지원하는 것이 자신이 가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무런 자격요건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민족을 위한 선교사로 불렀다는 아무런 증거도 갖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 선교사가 되어 나간다면 그가 어떻게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겠는가?

사역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터전을 해치지 않겠는가? 선교지의 민족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던 중 주님이 인도하신 것을 여러 가지 증거로 확신하고 주님이 마련해 주신 지원을 받아 오로지 복음과 진리의 전파에 매진한 참 선교사들의 헌신된 삶의 발자취에 이들 스스로 임명한 대사들이 얼마나 큰 누를 끼칠 것인가를 상상해 보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부르지 않은 사람에게 그분의 영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권위 위에 군림하여 인간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선교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가 선행요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부르신 사람에게 어떤 과업을 맡기실 때 먼저 영적 은사를 주신다는 사실만 봐도 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 "각 사람이 받은 은사대로"(벧전 4:10).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 일어나게 하려 함이라"(딤후 1:6). "네 안에 있는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딤전 4:14).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곧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스스로 판단해도 선교사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자신을 선교사로 자처해서는 안 된다. 교회들도 해외 선교라는 명목으로 그런 자들에게 귀한 헌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선교사를 선임하고 파송하는 데 성도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얼굴도 모르고 간증도 없고 증거도 없는 사람이 선교라는 명목으로 밖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찍어 보낸 사진이나 보고 지원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정실이나 인맥이나 학연이 개입되어서도 안 되며 오직 영적 안목을 가진 하나님의 종들이 성경적 근거 위에서 합당한 사람을 뽑아 일을 맡겨야 한다. 그래야 많은 신실하고 헌신된 선교사들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게 된다.

 

Ⅲ. 결론

선교는 사치가 아니다. 선교는 언어와 풍습과 문화와 사상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한 알의 죽은 밀알이 되지 않고서야 누가 이 무거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자신을 위해 죽으심으로 자신의 죄가 씻음을 받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이 주님을 따를 수 있겠는가?

스스로의 믿음으로 자기 자신도 세울 수 없는 사람이 말도 안 통하는 외국 사람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는가?

선교사, 이것은 외국인들에게 자기를 소개하는 칭호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희생적인 이름인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파송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와 같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과,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느니라.(롬 10: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