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신학

선교에 있어서 복음에 대한 이해

하나님아들 2020. 4. 14. 18:03

선교에 있어서 복음에 대한 이해


- Ron Sider의 이해를 중심으로


1. 요 약

선교에 대한 목표는 복음화인가? 아니면 인간화인가? 복음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의 다른 입장은 각자 지닌 장점에도 단점들을 부각시켜 공격하는 양 진영의 공세에 결국 일치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선교에 대한 이해는 자신이 가진 입장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게 된다. 복음에 대한 이해에 따라 선교를 이해하는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현대 선교의 이해에 있어 복음에 대한 이해를 Transfomation 1999년에 기고한 Ron Sider 교수의 무엇이 복음인가?의 내용을 토대로 양 진영 입장을 보고자 한다. Ron Sider 교수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Eastern 신학교의 신학과 문화를 가르치는 교수이며 사회적 활동을 위한 복음주의들의 회장으로 있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에 대해 ‘죄의 용서’ 또는 ‘이신칭의’라고만 정의함으로 예수님이 해석한 대로 해석하지 않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복음에 대해 말슴하실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말씀하셨고(누가 4:43, 마10-7-8, 누가10:9)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즐겨 사용하시던 개념이다. 이 개념은 마태,마가, 누가복음에서 122번 사용되었고 예수 자신이 92회 사용하셨다. 마가는 예수의 메시지를 요약할 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하였다. 마가 1:14-15 요한이 잡힌 후 에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우리가 복음을 단지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죄의 용서라고 이해하는 것은 구원을 개인적인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내적이고 영적인 관계로 제한하게 되며 또한 신약성경에서 구원을 의미하는 분명한 부분인 사회적인 변혁을 무시하도록 만든다.
누가복음 19장2-10절의 삭개오의 이야기, 이 본문은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이웃들과 더물어 살게 된 새롭고 변형된 경제적인 괸계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복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의미한 것을 주의깊게 살펴보는 일은 우리의 신학과 기독교 제자화를 분명하게 한다. 예수께서는 오셔서 오랫 동안 기대해온 메시야에 대해 주장하시고 자신의 인격과 사역안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역사 안에 하나님의 메시야적 통치가 들어오심에 대해 선언하셨다. 그러나 무엇이 메시야적 기대이었는가? 예언자들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수직적인 구성은 메시야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바른 관계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수평적인 구성은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예언한다. (이사야 11:4)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곳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그 나라의 완성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것이다.

수직적 차원

우리는 오직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예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께로 다가갈 우리 인간적 방법이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방탕한 아들의 아버지와 같아서 돌아온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 열심히 찾고 계신다. 죄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은 바로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오셨다.

수평적 차원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셨다. 그들을 제자로 삼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야적 가르침의 보이는 모델인 방식으로 살기 시작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 예수를 따르면 우리는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 (마6:12, 14-15)

현재 상태에 도전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수평적인 차원에 대해 주목할 만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와 그의 새로운 메사야 공동체는 현재 상태의 잘못된 점들에 대해 도전을 한다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가장자리의 사람들, 여인들,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폭력적인 혁명가들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해보라.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누가6:34-35, 마태 25:31-46, 누가복음 6:20-21 7장 21-22절누가 4장 18절)

가장자리의 사람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관심은 모든 가장자리의 사람들, 약자들과 사회적으로 축출된 사람들에게 까지 확대되었다. 누가7:32-50, 19:1-10 17:12, 마1:41, 누가 14:13, 21절

여인들
예수 시대에는 한 남자가 한 여인과 함께 공공장소에 나타나는 일은 스캔들이었다. 여인의 말은 법정에서 가치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예수는 공공장소에 여인들과 함께 나타나셨다(요4:27) 그들에게 신학을 가르치셨고(눅10:38-42) 누가7:36-50 모든이들이 알고 있는 죄인인 여자가 예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긴 머리로 닦고 입맞추고 향유를 붇는 것을- 그것도 모든 이들 앞에서-허락하셨다. 마리아가 여인의 전통적인 직무인 음식 장만하는 일을 예수의 신학 강의를 듣기위해 져버렸을 때, 마르다는 항의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는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셨다.(누가10:38-42).

주권자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예수 시대의 주권자들은 국민들을 지배하기를 즐겨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려하고 자신을 많은이들을 위한 속제물로 주기위해 오셨다.(마가10:41-44).

폭력적인 혁명가들
하나님 나라의 방법은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이었다(마5:44).

예수에 따르면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다. 이 복음의 수직적인 차원은 무조건적인 거룩한 용서이다. 수평적인 차원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보이는, 구체적인 모양을 갖추고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새 공동체는 실제로 예수의 나라의 규범에 따라 사는 것을 시작하였기에.


그러면 어떻게 나라의 복음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

차이점
자 이제 우리는 보다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예수께서 하신 대로 복음을 정의할 때 어떤 차이가 만들어지는지. 즉 복음이란 단지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그것 이상이라는. 예수님의 복음은 메시야적 통치가 사실 시작되었고 이제 화해된 그리고 화해되는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다.
1. 만일 복음이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이라면 하나님과의 화해된 관계와 형제와 자매 이웃과 화해된 관계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2. 복음이 죄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화해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관계가 구원의 한 부분임을 더 잘 알게 된다.
3. 사람들의 육체적이고 영적인 욕구를 섬기는 일이 선택 가능한 일들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임을 분명히 알게 된다.
4. 복음을 나누는 어떠한 일이라도 가난한 자들을 향한 드러나는 관심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5. 언제나 지금의 현상에서 잘못된 것에 도전하는 신실한 기독교 공동체를 보게 될 것이다.
6. 교회와 세계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거리)가 항상 있음을 알게된다.
7. 우리는 단지 설교함으로만 복음을 적절히 나눌 수가 없고 우리는 말씀과 행동이 같이 나아가야 한다.

2. 평 가

Ron Sider 교수는 복음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말함으로 십자가를 연상시키고 있는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죄의 용서의 강조는 비록 복음주의자들이 이것에 한정하여 복음의 내용을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을지라도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며, 동시에 이 구원이 개인적이고 내적인 차원을 넘어 이웃, 사회,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하여져야 한다.
Ron Sider 교수는 복음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말함으로 마치 복음주의 선교관과 에큐메니칼 선교관을 십자가의 틀 안에서 일치점을 찾으려는 듯이 보인다.

동의하는 점 : 복음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이 같이 할 때 예수님께서 생각한 복음의 정의에 가깝다는 점에 동의

동의하기 어려운 점 :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을 수직적 차원에만 대입함으로 마치 복음주의자들은 수평적 차원은 무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한다.

David J. Bosch는 「세계를 향한 증거」에서 선교형태를 비교할 때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이 두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이 두 파로 명백하게 기술하는 것이 두 파의 근본적 차이의 심각성, 범위 그리고 성격을 좀 더 분명하게 노출시키는데 도움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실제로 선교에 관란 모든 견해가 이 두 입장의 어느 한 편에 좀 더 적합하다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다 반 에큐메니칼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 모든 ‘에큐메니칼주의자들’이 바 복음주의자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교회의 직접적 참여문제에 이르러서는 주춤한다. 복음주의자들은 구조적 변화를 사실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전도의 결과로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인간 성숙에 곧 사회구조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p. 48)

따라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말하자면 인종차별, 불규칙적 날품팔이 노동, 정치적 및 경제적 착취 등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발언하는 영역에서는 그들의 과묵 때문에 흔히 복음주의자들은 현 사회 정치적 질서를 두둔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David J. Bosch 세계를 향한 증거 두란노 p. 49)

이런 면에서 Ron Sider 는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선교에 대한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접근방법은 최근 수 십년 동안 선교의 이론과 실제를 크게 좌우했다. 실제에 있어 이와 같은 양극화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선포는 ‘현존’에 대립되어 있고, 속죄자인 예수는 이웃을 위한 인간 예수와, 속죄는 인간화와, 영혼 구원은 혁명 및 해방과 대립되어 있다.
보쉬의 지적처럼 참으로 비극적인 것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주의의 가장 과격한 대변인들이 서로 대화하려는 의향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이다(p.55). 이 점에서 Sider 교수가 보이는 태도는 복음에 대한 통합적인 제안은 에큐메니칼주의의 과격한 입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복음주의 입장에 대한 충분한 반영 보다는 일반적인 입장을 다룬 듯이 보인다. 이것은 스스로 복음주의라고 부르는 여러 다양한 흐름에 대한 정의를 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총칭하여 복음주의라고 지칭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흑백논리로 단순하지는 않음을 Alister Mcgrath는 지적한다(Evagelicalism & the Future of Christianity,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신상길․정성욱 옮김, p.55 이하).

한편 보쉬는 흔히 보수적이라 알려진 연역적 방법과 에큐메니칼 측의 귀납적 방법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연역적 방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행할 수 가 없다. 왜냐하면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로 철저한 연구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지난 1900년 동안의 자료와 가장 최근의 성서문헌을 동시에 다 얻을 수 없다. ...

... 귀납적 방법은 실천가능성이 있으나 정당화될 수 없다.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과 집단 경험이 어떤 성서 본문을 해석하기 위한 열쇠로서 사용되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하다. (p.61)

이어 보쉬는 간단명료하게 설명된 ‘처방’으로 세 번째의 방법이 따로 있지 않음을 지적하며,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연역적’ 그리고 ‘귀납적’ 방법의 상대성과 제한성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두 가지를 다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Ron Sider의 수직적 수평적 차원의 조화는 이런 점에서 양 입장을 공정하게 다루려는 그의 중립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제 삼의 방법을 제시한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Ron Sider 교수는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닌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근거하여 복음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성경에 입각한 선교관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 부분 뒤에 선교의 성경적 기초를 다루어야한다. 삭개오 이야기에 대한 Ron Sider 교수의 해석 등)


3. 적 용

복음주의 대 에큐메니칼 논쟁은 대체로 성서를 선택적으로 사용한 것에 기인한다. 해방신학계에서는 출애굽 이야기나 또는 나사렛 회당에서의 예수의 메시지(눅4:16-20)가, 반면에 복음주의 선교사들 측에서는 지상위임령(마28:18-20)이 선교에 대한 핵심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한가?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한국교회 역시 복음주의 입장에 서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과 에큐메니칼 입장에 서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로 나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NCC 회원교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에큐메니칼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상은 바뀌었다. 복음주의 측에서는 사회활동에 많은 참여를 보이며, KNCC 내에는 복음전파에 대해서는 일치와 협력국 또는 국제위원회만 있던 것이 최근 세계선교위원회가 설립되어 전도와 선교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였다.

얼마전(99년 4월 12일) 한국기독교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계선교정책협의회가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열림으로 NCCK는 인권과 해방의 문제에만 관심갖는 단체로 보인 것에서 앞으로 NCC를 선교에도 관심이 있는 단체로 보아달라는 한 관계자의 말처럼 한국교회 내에는 두 입장이 하나가 되어가는 듯이 보인다.

이 모임에서 여러 교단의 세계선교 현황과 현지교단과의 협력에 대한 보고가 있었는데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모 교단의 경우 선교사의 대부분이 현지교회와의 협력관계 속에서 활동함으로 선교지에서 여타 교회와는 달리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한 편 다른 입장에 서 있는 모 교단의 관계자는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세운 학교를 졸업한 현지인을 자신의 교단의 목사로 안수하여 그 현지교단과 협력을 해나간다고 보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에큐메니칼 측이나 복음주의 측 모두 현지인 교회를 설립하고 협력하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말한다. 복음주의 측에서는 주로 현지 교회를 설립하는 선교를, 에큐메니칼 측에서는 주로 현지 교회를 돕는 선교를 강조하지만 교단의 신학적 배경에 따라 협력 선교에 대한 모습이 다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큐메니칼주의의 한국교회들은 현지교회와 갈등 없이 선교한다 할지라도 이미 복음화 된 곳에서만 사역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복음주의 입장에 서 있는 교회는 교파이식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채 현지교회(단)와는 별도의 사역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른 양 진영은 실제 선교사역에 있어 매우 다른 형태의 선교전략과 형태를 보인다. 그렇지만 선교사역이 반드시 복음이 이미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곳에서만 협력선교의 형태를 띄는 것도, 또한 현지 교단이 있는대도 독자적으로 선교하는 것도 고려해보아야 할 선교 형태라 생각한다. Ron Sider 교수의 지적 대로 복음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이 통합된 선교형태가 실제 선교사역에 반영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