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신학

[스크랩] 도마의 한국(가야국)선교 논의 어떻게 볼 것인가?/ 박용규 (총신대 교수)

하나님아들 2019. 2. 9. 11:59

<본고는 지난 2017년 예장 합동 총회에 보고된 원고임을 알려드립니다.>


도마의 한국 (가야국) 선교 논의 어떻게 볼 것인가

박용규(총신대 신대원 교수,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


서론

한국교회 일각에서 고대 한국 기독교 전래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지난 30년 동안 진행되었다. 그 본래의 시작은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 연구에서 출발했다. 주후 635년 알로페를 단장으로 한 경교 사절단이 페르시아로부터 당에 와 시작된 경교가 당에서만 아니라 당시 중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던 통일신라에 전래되었다는 것이 논의의 그 핵심이다. 경교의 한국 전래의 가능성에 대해 불을 지핀 학자는 고든 여사였다. 중국에 전래된 경교를 수 년 동안 연구한 고든 여사는 한국을 방문하여 둘러본 후 한국에도 경교가 전래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대진사에서 발견된 경교비를 금강산에 모조품을 만들어 설치했다. 경교의 한국전래 가능성은 김양선, 오윤태, 이장식 등에 의해 강하게 그 가능성이 주창되었다.

경교전래가 논의된 후에 한국에서는 재야학자들에 의해 가야에 도마가 와서 복음을 전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아마도 가장 먼저 이 주장을 제기한 사람은 아동문학가 이종기이다. 그는 삼국유사 기이편 가락국기에 언급된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의 출신지 아유타국이 인도의 아요디야국으로 갠지스 강 내륙지방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1987년 관악고등학교 역사 교사 유우식이 영주시 평은면 왕유리에서 한 상을 발견하고 이것이 사도 도마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발견과 연구물을 “1900년 전 한반도에 사도 도마가라는 제목으로 19889월호신앙계에 발표했다. 이후 이장식이 자신의아시아고대기독교사부록에 가야문화와 그리스도교 전래의 흔적 추적이라는 글을 실어 가야의 도마 전래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후 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논고가 한국에서 발표되거나 간행되었다. 황정욱 교수는 2006가야는 사도 도마에 의해 복음화 되었는가라는 제목의 논고를 발표해 가야의 복음전래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본고에서는 도마의 인도 복음전래 가능성과 그의 가야국 선교 여부에 대한 #최근 논의의 핵심주장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며 고찰하려고 한다.


I. 도마의 인도 복음전래 문제

도마의 인도 복음전래와 관련하여 주님이 부활하신 후 도마의 리더십이 눈에 띠게 부상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심 많은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눈으로 확인하고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도마의 신앙고백은 이전의 모든 제자들의 고백을 능가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주님을 직접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는 않았다.

요한복음은 의도적일만큼 도마의 신앙고백을 부각하고 있고, 의사 누가도 사도행전 1장 제자들의 명단에서 사도요한과 도마의 순서를 두 세 단계 상향시켜 기록했다. 제자들의 순서가 제자들의 리더십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주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의 리더십에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준다. 이후 도마가 어떻게 선교활동을 했는지 초대교회 문헌들이 증언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도마가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다.

도마를 통한 인도의 기독교 접촉 가능성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도마와 바돌로매가 동방으로 진출하여 도마는 인도에, 바돌로매는 중국에 복음을 전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초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도 그의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3권에서, 전승에 따르면 주님의 제자 도마가 지금의 이란과 인도에 해당하는 팔티아(Partia, 安息國)를 선교 지역으로 할당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도마의 선교행적은 초대교회 나지안주스 그레고리, 제롬, 유세비우스, 클레멘트, 루피누스, 오리겐 등 여러 교부들이 기록했다. “오리겐은 소년 시절 알렉산드리아의 Panthaenus의 인도 선교보고회에 참석하여 흥미 있게 들었다고 말한다.”(이장식, 172-173)

13세기 교회사가 바르 헤브라에우스(Bar Hebraeus)우리 주 승천 2년 후, 사도 도마가 동방에 복음을 선포하고 또한 인도에 이 복음을 가지고 왔다고 했으며, 중국 경교 연구가 트리골트(Trigault) 역시 성 도마로 인하여 중국에서도 천국복음이 전해져 많은 교회가 설립된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주후 46년경 도마는 인도로 가던 중 유프라테스 강 동쪽에 위치한 에뎃사(Edessa)에 들려 에뎃사 교회를 설립하였고, 여기를 거점으로 도마와 바돌로매가 동방으로 진출하여 인도와 중국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이들 기록이 다 인도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도로 향하는 여정에서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박트리아 등지를 거쳐 선교를 진행했다고 하여 둘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사무엘 마펫에 따르면 도마의 인도 복음전래는 가능성(possible)을 넘어 현실성(probable)에 가깝다. 마펫이 지적한 것처럼 남서부 인도의 기독교 공동체는 수세기 동안 자신들을 도마 기독교인들로 인식하고 있었다. 케랄라(Kerala) 결혼 축가 도마의 노래(Thomas Rabban Pattu)에는 도마가 인도에 도착한 시기를 주후 50년으로 밝히고 있다. 도마는 50-52년 사이에 말라바 해안에 도착하여 일곱 교회를 설립하였다.


II. 도마의 가야복음전래 가능성 주장 근거 여부검토

도마가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현실성에 가깝다(probable)는 연구 동향이 있지만 그가 가야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주장과 논의를 뒷받침하는 역사 사료는 너무도 빈약하다. 가야국의 도마 선교를 지지하는 이들은 김수로왕과 허황옥 두 사람의 결혼을 연결해준 사람이 도마라고 주장한다. 도마의 가락국 선교와 관련하여서는 서방 문헌 가운데는 전무하다.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한 한국교회사 학계의 반응은 상당히 미온적이다.

하지만 교계 일각에서 도마의 한국선교에 대해 연표까지 만들어 도마의 한국선교를 기정사실로 단정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도마는 주후 2-27년에 갈릴리 티베리아에서 출생해 목수와 석수 일을 배우며 성장했다. 주후 28-30년 전반까지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제자 활동을 했고, 주후 30-33년 사이에 데데사(터키의 우르파)에서 전도 및 설교를 했으며, 주후 34-40년 사이에 인도에 와서 군다파르 왕궁을 건축했다. 땅 끝으로 인식되던 당시 한국 가야국에 와서 주후 41-49년까지 전도를 하다 주후 50-51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는 홍해 입구 소코드라 섬에서 전도를 하고 주후 52-72년 사이에 인도에서 전도를 하다 인도 첸나이에서 순교를 하였다.

도마의 가야국 선교를 지지하는 이들은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마태복음 105-8절을 따라 도마가 한 선교 내용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 가서 부족 단위로 전도를 했다고 주장한다. 천국이 가까웠다고 주님이 복음 선포를 하셨던 것처럼 도마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도마행전에 근거하여 도마가 기도, 치유, 귀신 쫓아냄, 구제, 청빈생활 등을 했으며, 주후 42315()에 부활절 날 가야국을 기독교 국가로 건국하도록 도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도마가 실크로드를 따라 바다와 강에서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목수와 석공의 기술을 갖고 있어 초청을 받으며 다녔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울이 사도행전 166-10절에서 했던 대로 도마도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전도했다고 주장한다. 도마가 그렇게 한 것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도마가 한국(가야국)에 와서 전도를 한 것이 100% 확실하다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마의 한국전래 가능성을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도마가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고 다시 가야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 근거의 일부로 영주시 평은면 강동 2리 왕유리 분처 바위에 있는 도마석상과 김수로 왕 분묘 앞에 있는 오병이어 문양을 제시한다. 도마석상은 여의도 순복음교회 집사 유우식이 처음 발견한 것이다. 도마의 가야 복음전래서를 주장하는 이들은 도마석상을 도마가 가야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주후 41-47년에 도마가 한반도에 도착해서 김해부터 영주에 이르는 낙동강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48년에는 김수로 왕과 인도에서 온 허왕후와의 혼인을 주선하였다고 주장한다. 이후 김수로왕은 가야국 국호를 가야로 바꾸었고 가야가 물고기를 뜻한다고 말한다.

 

 

영주 분처바위 모습(박진호 연구원 제공)

 

 

III. 도마의 가야복음전래 평가

도마가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초대교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믿었다. 그리고 초대교회 유세비우스 교회사 3권이나 도마행전은 도마가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고, 마포삼락 교수는 자신의아시아기독교회사에서 도마의 인도 복음전래에 대해 현실성(probable)이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도마의 인도 복음전래는 학계의 지지를 점점 더 받고 있다. 그러나 도마의 가야국 선교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이 충실하게 검증되기 전까지는 학계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첫째, 영주의 석상이 도마의 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영주 석상의 제작 시기는 언제 인가? 영주의 석상이 도마의 가야 복음전래와 관련이 있는가? 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장식 교수는 영주의 석상이 도마상이라는 개연성은 언급했지만 단정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도마가 주님의 상이 아닌 자신의 상을 만들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주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주님의 형상이 아닌 자신의 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둘째, 김수로왕 분묘 앞 오병이어가 성경의 오병이어를 의미하는 것인지, 이것이 주후 41-49년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 도마의 가야 복음 전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사료적으로 검증해야 할 것이다. 도마의 인도 복음전래를 주장하는 이들은 도마가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 주후 40년대 말이라고 주장한다. 도마가 에뎃사에 도착한 것은 주후 46년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도마가 주후 41-49년 사이에 가야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도마의 가야 선교를 주장하는 이들은 도마가 주후 34-40년 사이에 인도에 와서 군다파르 왕궁을 건축하고 41-49년 도마가 가야에서 사역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서방의 기록이나 연구와 상치된다. 추측과 개연성을 가지고 도마의 가야 복음전래를 단정하는 것은 교회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한계가 있다. 충분한 사료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가운데 도마의 가야 복음전래를 단정하고, 41-49년 사이에 가야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문제가 있다.

셋째, 도마가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유세비우스나 도마행전에 분명히 나와 있는 반면에 도마가 한국(가야)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은 초대교회의 어떤 문헌에도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만약 도마가 가야에까지 와서 그것도 9년간이나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면 또한 그가 50-51년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해서 선교사실을 보고했다면 성경이나 초대교회 문헌들에 도마의 가야국 선교 내용이 분명히 나타났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러나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필자가 볼 때 충분한 사료가 뒷받침되지 않는 가운데 도마가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서 가야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이라고 판단된다.




 

맺는 말

지금까지 간단하게 도마의 가야 복음전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욱 더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며 현재까지의 논의가 이에 대한 많은 진전을 가져다 준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몇 가지로 결론을 맺으려고 한다.

첫째, 도마의 인도 전래 가능성은 학계에서 점점 더 인정을 받고 있고, 이를 뒷받침할 사료도 발굴되고 있다. 그러나 도마의 가야 선교는 서양의 어떤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둘째, 도마가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은 유세비우스 교회사 3권과 도마행전을 비롯한 초대교회 문헌에 분명히 나타나지만 가야에 와서 그것도 9년간이나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은 서구의 초대교회 어떤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셋째, 도마의 가야국 복음전래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충분한 사료가 발굴되지 않는다면 현재 영주의 도마상과 김수로왕 분묘의 오병이어와 같은 사료만으로 도마의 가야 복음전래를 단정하기 힘들다. 역사는 정확한 사료에 근거할 때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지할 수 있다.

 

 

<아래는 관련 자료-본 연구소 조덕영 박사 글>

https://blog.naver.com/davidycho/220587235275

[출처] 도마의 한국(가야국) 선교 논의 어떻게 볼 것인가|작성자 창조의 작은 언덕

출처 : 요르단(Jordan) 강
글쓴이 : 갈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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