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신학

[스크랩] 논문 <21세기 문화적 요소를 통한 교회 활성화 방안>

하나님아들 2019. 2. 15. 23:16


21세기 문화적 요소를 통한
교회 활성화 방안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신학과 김태홍
목 차

제 1 장 서론······································ 1

1. 연구의 목적과 문제제기······················· 1
2. 연구방법 및 범위···························· 4

제 2 장 21세기 시대적 상황과 문화················· 6

1. 21세기의 시대 상황·························· 6
2. 21세기 문화의 흐름··························· 10
3. 기독교 문화의 의미··························· 12

제 3 장 21세기 교회의 모습························ 14

1. 교회의 정의································· 14
2. 21세기 교회의 모습··························· 15

제 4 장 문화적 요소를 통한 교회의 활성화 방안······ 22

1. 문화적 요소································· 22
2. 교회의 활성화 방안··························· 33

제 5 장 결론······································ 48

* 참 고 문 헌······································ 51












21세기 문화적 요소를 통한
교회 활성화 방안


지도 서 정 운 교수

이 논문을 석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


1998년 12월 일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M.Div.)
김 태 홍
김태홍의 석사 학위논문을 인준함

심사위원_____________________인
심사위원_____________________인
심사위원_____________________인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8년 12월 일

제 1 장 서 론


1. 연구의 목적과 문제제기

"21세기는 언제 시작합니까?"라는 질문은 너무나 자주 들려지는 말이다. 그 질문에 대한 흔한 대답은 "21세기는 2000년 1월 1일 A.M. 토요일 12:00:01에 시작합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는 달력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멜퍼스는 이러한 엄청난 변화를 '메가 체인지'(mega-change)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경험했던 이전의 역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가속화된 변화', '변화의 불안정한 소용돌이', '극적인 변화', '엄청난 변화'라는 단어들로 표현되고 있다.
미래학자이며 세계 미래학회장이었던 코니쉬(Edward Cornish)는 인간의 지능을 수천배로 확대해줄 인공지능의 개발과 유전공학 등의 기술발전으로 미래를 향한 변화는 과거의 산업혁명과 종교개혁을 합친 것의 10배 규모로 한 세대안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격동의 시기이며, 변화의 속도와 양이 과거에는 한 분야의 기술혁신이 달성되는데 25년이 걸렸으나 이제는 24시간에 한 가지씩 기술혁신이 일어날 만큼 대변혁의 시기이다고 하였다.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은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대 변혁 시대의 물결을 간과 할 수 없다. 엘머 타운스(Elmer Towns)는 '성장하는 교회는 무엇이 다른가?'(10 of Today's Most Innovative Churches)에서 "개혁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하며", "진리를 담아내는그 시대상황에 적절한 탄력성을 가지고 개혁해야 됨"을 역설하였다. 교회는 과연 21세기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는가? 최근의 한국 교회는 젊은이들을 잃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신세대들의 사고 전환으로 교회는 더 이상 그들의 흥미의 대상이 아니며 케케묵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 그들은 재미있는 프로그램, 새롭고 낙관적인 예배 분위기, 넓은 주차공간, 부담감이 없는 교회생활을 원하고 있다. 심지어 새로운 세대는 미래 충격 세대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서방의 교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미래 사회를 위해 준비하고 21세기 목회 모범을 제시하였다. 미래 교회 준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아직도 재래의 목회 구조만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성장을 위해 눈앞의 현장만을 위하여 급급해하는 것이 목회 현실이다. "과연 미래의 목회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미래의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당장 준비해야할 질문들이다.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문화를 이끌어 가는 중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일제 시대와 한국 전쟁을 통해서 기독교는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이끌어 왔다. 오랜 역사를 지녀왔던 한국은 건전한 문화보다는 남성 위주의 유교 문화가 중심이 되었던 사회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건전한 문화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되었고 상처 입은 민족에게 기쁨을 주는 문화를 만들어 왔었다.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연극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여러 가지 레크리에이션을 보급해서 사회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칼라 TV가 보급되면서 방송매체에 대한 관심과 경제적으로 풍요한 젊은 세대들이 방송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외국의 여러 문화를 국내에 소개하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오히려 여러 방송 매체를 통해서 교회가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어느새 교회의 예배는 청소년들에게 진부한 행사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21세기는 새로운 문화의 시기이다. 많은 국가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경제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교회 역시 새로운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교회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되어 가는 새로운 문화들을 해석해 주고 판단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21세기의 교회는 기독교적 문화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기독교적인 문화를 가장 잘 표현하고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은 예배를 통해서이다. 예배는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강력한 수단이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과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배를 통해서 삶이 변화될 수 있다. 살아있는 예배가 교회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문화적 요소를 통한 예배가 건전한 문화를 이끌고 문화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 논문은 문화를 이루는 문화적 요소를 통해서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문화적 요소를 이용한 예배가 어떻게 교회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논하려 한다. 또한 21세기를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교회모델을 선정하고 연구함으로써 시대에 낙오자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시대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예언자적 기능과 영성적 기능을 회복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예배의 모습에 대한 대안들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2. 연구 범위와 방법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2장에서는 '21세기의 상황과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처한 상황과 21세기를 통찰력 있게 다룬 책들 즉 엘빈 토플러(Alvin Toffer)의 '미래의 쇼크'(Future Shock),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 허먼 메이너드(Herman B. Maynard Jr)와 수전 머턴스(Susan E. Mehrtens)의 '제 4의 물결', 클라우스 슈왑(Klaus S)의 '21세기 예측',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와 패트리카 오딘(Patrica Aburdene)의 공저인 'Megatrend 2000' 등의 책들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3장에서는 '21세기의 교회의 모습'에 관해서 다루려고 한다. "교회의 외적인 형태와 내적인 모습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갈 수 있을까?"에 대한 교회의 역동적인 모습을 다룰 것이다.
4장에서는 예배의 의미와 역사를 살펴보고 예배를 통해서 사용할 수 있는 문화적 요소가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본 후에 문화적 요소를 이용한 예배가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있는지, 문화적 요소를 통해서 드리는 예배가 교회를 역동성 있게 하고 활성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하려 한다.
5장에서는 결론적으로 위에서 진단하고 제시했던 자료들을 가지고 21세기에 교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 논문은 여러 가지 제약성이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밝힌다. 첫째는 21세기의 모델교회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주관성과 모호성을 배제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고, 둘째는 미래를 예측하는데 있어서 많은 변수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본 논문의 연구자의 역량과 자료들과 시간적인 제약들이다.














제 2 장 21세기 시대적 상황과 문화

1. 21세기의 시대상황

토인비는 21세기는 동아시아가 주도권을 쥐는 시대라고 말했다. 그는 인류의 문명이 아시아 중동에서 시작해서 지중해, 그리스, 로마, 서유럽으로 옮겨 간 데 이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건너갔고, 다시 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럽-태평양 시대가 막을 내리고 아시아-태평양 시대가 막을 올리고 있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이다. 거대한 역사의 문화주도권이 이처럼 아시아-태평양 주변국가로 옮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구조의 변화로는 "산업화 시대로부터 정보화 시대로의 변화"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인류 역사에 다가온 하나의 물결이 지나고 새로운 물결이 다가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첨단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미래를 더 편하게 해줄 것으로 약속하면서도 인간성을 소외시키는 부작용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나이스비트는 '메가트렌드'에서 좀 더 구체적인 시각으로 21세기를 진단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21세기의 현상들은 다음과 같다.

1)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2) 강제적 기술에서 첨단기술로
3) 국가 경제에서 세계 경제로
4) 단기에서 장기로
5) 집중에서 분산으로
6) 제도적 원조에서 참여의 민주주의로
7)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참여의 참여의 민주주의로
8)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서 네트워크형으로
9) 북에서 남으로
10) 양자택일에서 다양한 선택으로

20세기 후반의 전면적이고 구조적이고 급격한 변화는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21세기는 포스트의 시대이다. 포스트 모던(근대 이후), 포스트콜드워(냉전 이후), 포스트소시얼리즘(사회주의 이후), 포스트캐피털리즘(자본주의 이후)을 말한다. 여태까지 서구인들은 과학, 기술, 산업의 발전이 인류의 진보를 약속하리라 믿었고 인류의 발전은 진보의 발전에 따라 흘러갈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이런 생각은 사라지게 되었다. 과학이 많은 것을 만들어 냈으나 동시에 인류를 멸망의 길로 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문명비판가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그의 「21세기 보고서」에서 다가오는 21세기를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진단하고 있다. 정보화 사회는 기업관리, 전문직, 기술 분야의 소수 엘리트가 주도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불안정한 임시 노동자나 영구 실업자로 살아야 한다. 리프킨은 대안적 비전을 제시한다. '제 3부문'의 역할 증대가 그가 제시하는 실체가 있는 대안적 비전이다. '제 3부문'이란 공적 영역(정부)과 사적 영역(기업체)의 중간 부문으로 '자원봉사에 의한 공동체 서비스 조직'이다. 그는 건강, 교육, 예술, 종교, 변호, 구호활동 등에서 자발성에 의한 다양한 조직들이 생겨나야만 디스토피아의 병리현상을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의 경우 제3부문이 총 고용과 총 수익 면에서 정부 부문의 절반밖에 안 되지만 최근에 정부나 사적 부문보다 2배나 급속하게 성장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21세기는 고도의 정보사회가 될 것이다. 미국의 고어 부통령은 21세기를 향하여 '정보고속도로'를 제창하고 있다. 21세기 정보사회에서는 컴퓨터 통신, TV회의, 전자우편, 온라인 정보서비스, 쌍방향 CATV, 온라인 쇼핑 등 대량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정보매체가 필요하게 된다. 일본도 '신 사회자본' 개념을 도입하여 2010년까지 45억 엔을 투입하여 초고속정보망을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정보의 홍수속에서 다양한 목소리와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 전체주의나 독재주의나 공산주의는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다양한 제품과 소비자와 생산자가 생겨나게 된다. 독점이란 있을 수 없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메가도시(megacity)가 더 많이 출현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메가도시란 인구 1천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거대도시를 말한다. 현재 지구상의 메가도시는 서울, 동경, 캘커타, 뉴욕, 로스앤젤레스, 멕시코시티, 상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12개이지만 다가오는 2천년에는 25개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메가도시는 우리의 미래다. 우리의 미래는 도시에 달려 있기 때문에 도시 문제에 적극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국제도시 전문가 모임의 재니스 펄먼 회장은 말하고 있다. 일부 환경 전문가들은 도시지역에 인구를 집중시키는 것이 환경면에서도 사실상 더 좋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메가도시는 빈곤, 범죄, 부랑자, 마약 남용 등 사회 문제와 대기 오염과 환경 오염과 교통체증 등 많은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다.
21세기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하는 시대이다. 미국에서 여성들은 지난 20년간 정보분야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수백만의 직종 중 3분의 2를 얻었고, 앞으로 21세기에는 이러한 추세가 지속될 것이다. 남성이 힘을 가지고 농기구를 다루는 농경사회와 무거운 기계를 다루는 산업사회에서 전형적인 노동자였다고 한다면 여성은 지력과 감성을 가지고 봉사하는 정보사회의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를 중심으로 살아갈 세대를 우리는 신세대라고 부른다. 신세대는 흥미위주의 세대이다. 신세대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신세대는 성의 구분이 모호하다. 정보사회의 신세대는 '사이버 펑크'(cyberpunk)라고 불리운다. 이들은 컴퓨터가 만든 가상현실을 탐닉하여 실제세계를 떠나 가상 현실 속에서 기존 가치와 권위를 부정하면서 살아간다. 신세대들에 대하여 최근에는 '플리퍼(Flipper)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현대사회의 원터치 문화가 플리퍼족을 양산하고 있다. 플리퍼족이란 소파에 누워서 리모콘을 누르고 텔레비젼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는 사람을 일컫는다.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이다. 현대 컴퓨터 문화가 지향하는 특징이다. 이러한 세대의 특징은 편한 것을 좋아하고 게으른 것이 특징이다.
이제 다가올 21세기는 불가예측한 시대요, 고도의 정보시대요, 국제화시대요, 신기술의 시대요, 초국가적 공동체의 시대요, 환경을 중시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21세기는 우리를 향해 새로운 사고와 행동을 요구한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권력과 사상의 이데올로기와 배금주의가 사탄의 영향으로 인간성 파괴와 생태계 파괴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붕괴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21세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며 복음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우리의 중요한 연구과제요 앞으로 21세기 목회에서 끊임없이 변화시켜야 할 문제이다.

2. 21세기 문화의 흐름

21세기는 신기술에 의하여 문화적으로 새로운 발전과 가능성을 인류에게 제공하여 줄 것이다. 우리 인류는 문명사에 있어서 제 1의 그리고 제 2의 기술혁명시대를 거쳐 현재 제 3의 기술혁명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산업혁명인 제 1의 혁명을 거쳐 전기와 화학의 발명으로 인한 제 2의 기술혁명은 낮과 밤의 패턴을 바꾸고 전선을 통해 멀리까지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제 3의 기술혁명은 컴퓨터와 통신의 통합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제 1, 제 2의 기술혁명이 물질적 가치에 근거하였던 것과는 달리 제 3의 기술혁명은 정보라는 관념적인 가치에 근거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시스템의 3가지 변화가 있다. 첫째, 전자식으로의 변화이다. 둘째, 소형화의 개념이다. 셋째, 디지털화의 개념이다. 디지털화란 사물을 숫자로 변환시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종합정보통신망(ISDN)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제 기업들은 새로운 전자식 네트워크를 통하여 그들의 산업 입지를 재조정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시장성격이 장소 개념에서 거대한 네트워크로 바뀌었다. 네트워크를 통해 자본과 화폐와 상품이 이동하고 있다. 전자교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1995년 11월 14일자 'USA Today'에 의하면 인터넷을 통하여 웹(Web)에 페이지를 가지고 있는 하교 밖에 있는 사이버학교(cyber schoolhouse)가 1년 전에 50개 였던 것이 1,200개로 늘었다고 한다.
21세기는 이데올로기가 종식될 것이다. 1960년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그 후 30년간 이 책의 예측은 현실화되었다. 80년대 말 동구권 공산주의의 붕괴, 1989년 동독 공산정권의 서독으로의 합병, 91년 소련 연방의 해체, 중국의 경제개방화와 시장경제의 도입등으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종식되었다.
21세기는 문화적 장벽이 철폐될 것이다. 정보사회로 인해 다양한 새로운 첨단문화의 유입을 통해 전통문화와 각 지역단위의 문화적 장벽이 철폐되며 새로운 통신기술의 발달, 그리고 다양한 소프트웨어 개발에 의한 다양한 프로그램의 공급과 케이블TV의 다양한 전문성으로 인하여 문화적 지역주의나 획일주의는 철폐된다.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결합으로 세계는 하나의 공통 기술언어를 쓰고 공통적 정보를 사용하게 되었다.
문화적 장벽의 철폐와 더불어 아시아의 전통적 종교가 서구사회에 도래하고 서구의 기독교가 아시아인들의 문화 속에 유입되는 종교다원주의가 도래한다. 종교다원주의의 도래는 한편으로는 세속주의에 의해 쇠퇴한 종교의 재생을 말해주고 있다. 정보시대에서 인간들은 통신기술이 제공한 다양한 정보와 기술에 의해서는 정신적, 심리적 안정과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 전통적인 종교의 역할이 재요구된다. 역사상 고등종교는 인류에게 사원과 신전과 위대한 예술품을 창조해 주었다. 그리고 인류를 향하여 기술과 물질 외에 인간의 정신과 내면의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다니엘 벨이 말하는 바와 같이 문화의 비밀이란 고등종교의 지속성이다.

3. 기독교 문화의 의미

그리스도란 말이 수많은 이미지를 생각게 하듯 문화란 말도 그렇다. 우리는 흔히 '문화'라는 말을 '개화된다' 또는 '문명인이 된다'는 말과 같이 협의로 사용한다. 흔히 문명인이 된다는 말은 '보기 좋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된다', '좋은 매너를 가진다'등과 같이 개인적 가치로 특징 지워질 수 있는 것들을 함의한다. 다른 말로 하면 문명인이란 음악, 미술, 문학을 감상할 줄 알고 시상에 밝으며,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이런 조건은 때로 종교와 관련해서 혼란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문화적 규범은 종교적인 확신의 외적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기독교인들이란 나쁜 습관을 갖지 않으며 옷을 입는 것이나 대화나 사회적 관습에 있어서 문화적인 표준에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사람들이며, 문화적이고 예절바르며, 지적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일이지만 이런 개념은 '기독교와 문화' 문제의 핵심을 바로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문화'라는 말은 '경작하다' '개간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colore'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땅을 가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 마음, 또는 감정을 도야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넓은 의미에서 문화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도구, 언어, 추상적 사유의 체계를 사용하여 지식을 배우고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에 종속하며, 사고와 언어와 행위와 가공물의 형태로 구체화된 인간의 제반행동 양상과 그 산물이 문화이다." 이렇게 보면 문화란 하나님의 피조계를 '경작한' 결과라고 말해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문화의 의미를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첫째로 문화란 인간의 활동이다. 만일 인간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문화라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정신과 손을 통한 활동의 결과와 관계된다. 둘째로 문화란 피조된 사물의 질서와 관련된 행위이다. 문화는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자연이 없이는 문화라는 것도 없다. 사람은 '경작하고' 변형하여 문화로 발전시킬 소재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적 활동이란 이미 주어져 있는 것 안에서의 조성행위이다. 즉 문화란 인간의 행동이지만 피조된 사물의 질서 안에서 표현되며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종속되는 것이다. 셋째로 문화에는 중립적인 문화행위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이란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그의 활동 역시 비도덕적 일 수 없다. 인간의 문화행위는 그가 가진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부의 축적이라면 그는 정직, 공평, 정의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같은 것을 마땅히 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를 개발하여 모든 문화 영역이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 3 장 21세기 교회의 모습

우리는 앞장에서 21세기에 나타날 현상들과 문화의 흐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연구는 앞으로 교회가 큰 변화의 소용돌이 가운데에서 어떻게 복음의 정체성을 지키며 발전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이며, 21세기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과 복음을 바르게 전하기 위한 21세기의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 볼 것이다.

1. 교회의 정의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교회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곧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했다. 이 루터의 정의는 오늘에 이르기가지 개신교 교회론의 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하는 것은 우선 일차적으로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제도 혹은 조직체와 직접적으로 일치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을 위한 장소 또는 예배당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또한 교회는 교황 혹은 총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제도로서의 교회와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교회를 제도와 일치시키는 경향은 카톨릭 교회론 속에서 매우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 곧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무조건적으로 선택받은 구원의 공동체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언약관계를 통하여 맺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러한 개념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다. 신약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뿌림으로 말미암아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룬 그리스도인 공동체였고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는 부활의 증인 공동체였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교회의 개념을 찾을 수 있으며,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교회의 개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선택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는 영혼의 구원과 이웃 사랑의 정신을 동시에 구현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이 두 가지 책임을 한 가지 책임으로 줄이거나 협소화시켜서는 안된다.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20세기 교회의 위기는 교회의 지상 과제인 전도를 망각하는 데 있다. 교회는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마 28 : 19) 한다.

2. 21세기 교회의 모습

하워드 스나이더는 '21세기 교회의 전망'에서 교회적 관점에서 21세기의 교회의 특징을 10가지로 지적하였다.

1) 지역교회에서 세계교회로 확장할 것이다.
2) 부분적인 성장에서 전반적인 부흥으로 나갈 것이다.
3)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기독교 국가로 바뀔 것이다.
4) 제도적 전통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신학으로 관심이 전환이 이루어 질 것이다.
5)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에서 사역자의 공동체로 나가게 될 것이다.
6) 남성 지도자 제도에서 남녀 동반자 제도로 변화될 것이다.
7) 세속화로부터 종교적 상대주의로 나갈 것이다.
8) 핵가족에서 가족의 다양화로 패턴이 바뀔 것이다.
9) 국교 분리에서 기독교인의 정치적인 행동주의로 사회참여가 활발하게 될 것이다.
10) 위태로운 국가들에서 위태로운 행성으로 우주계의 환경 변화가 이루어 질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고 변화하는 21세기의 교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형교회(Megachurch)

대형교회는 매주일 예배에 2,0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를 말한다. 그런 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대한 쇼핑몰과도 같다. 대형 교회는 많은 직원들과 굉장한 시설을 갖추고 많은 예산을 집행한다. 인상적인 다양한 예배를 제공한다. 종종 뛰어난 설교와 음악이 있다. 어느 누구도 모든 사람을 알지 못하고 대부분 교제를 갖고 있는 교구에 속한 사람들만이 서로를 안다. 이런 교회들은 교단에 소속되어 있을지라도 높은 정도의 자치권을 유지한다. 대형 교회는 소형 교회가 단순히 커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대형교회는 소형교회와는 다른 것을 갖고 있다. 대형교회는 익명성을 보장해 주고 특별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으며 다양한 프로그램과 방법을 찾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고 있다. 대형 교회들은 21세기 문화와 삶의 형태에 대체로 잘 맞기 때문에 점점 더 커질 것이다.

(2) 메타처어지(Metachurch)

메타처어치들은 동화, 훈련, 위로, 전도를 위한 중심으로서 기능하는 조그마한 그룹들의 네트워크에 근거하고 있다. 각 지교회들은 지도자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소규모 그룹을 파생시킬 의도로 또 다른 리더를 훈련시킨다. 메타처어치는 예배를 위해서 모이나 주일 날 아침에 모인 것으로 모든 목회 사역을 성취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정, 직장, 다른 그룹 모임 등으로 분권화 되어 있다. 많은 목회 사역이 평신도 지도자들에 의해서 인도되고 이런 모든 것들이 소규모 모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메타처어치의 전문적인 일꾼들은 매우 작을 수 있다. 메타처어치의 성장 잠재력은 대형교회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메타처어치는 토지나 빌딩, 예산, 스텝진들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메타처어치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 평일에도 매일 모이는 교회가 색다른 교회의 형태가 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런 교회가 21세기에 잘 들어 맞는 교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매일 모이는 교회

매일 모이는 교회의 형태가 어떻게 활동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미국 교회가 20세기에 미국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을 보면 잘 이해될 것이다. 20세기초에 불신자들은 교회로 이끄는 주된 방법은 주일 저녁예배였다. 주일 저녁예배가 종종 복음적인 행사로서 인식되었다.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아침에는 항상 교회에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보통 주일 날 밤에도 교회에 출석을 잘했다. 거의 모든 교회들이 주일 저녁 예배를 드렸다.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전도하고 봉사하고 상당히 잘 출석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주된 전도의 방법이 바뀌어 버렸다.
1950년대에는 주일학교가 불신자들과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주된 방법이 되었다. 그 시대에 주일학교의 출석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정규 예배의 출석수를 능가했다. 새신자들은 처음에 주일학교 시간에 들어와 나중에 대예배로 전이되어 교회의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또 다른 변화가 나타났다. 이때에는 주일 아침예배가 불신자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주된 접촉점이 되었다. 그런 다음에 새신자들이 주일학교, 주일저녁예배, 수요예배, 소그룹 모임과 연결됨으로서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980년대에 후반부에는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나서 주중의 활동이 불신자들은 위한 주된 접촉점이 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의 중요한 첫 번째 경험이 지원 그룹에서 일어났다. 말하자면 주말 프로그램, 어머니 모임, 운동모임, 파티모임, 카운셀링 기간, 결혼, 장례식 등 주중의 여러 활동을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1세기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소화하기 위해 일주일의 일곱 날을 계속해서 문을 열어 놓는다. 우리는 점점 토요일, 수요일, 목요일, 월요일 등 거의 모든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중의 모든 밤 시간에 교제모임이나 배우는 모임이 있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프로그램을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21세기 매일 모이는 교회의 모습이 될 것이다.

(3) 가정교회(제단)

가정교회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정 교회는 교단과 제휴되지 않거나 교인수에도 포함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 교회는 보통 집에서 모이는 작은 단위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다. 때때로 목회자들에 의해 인도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가정교회는 보통 평신도 지도자들이 인도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가정 교회의 수는 거의 무한하다. 가정 교회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 예산의 부족이나 인도자의 사임이 그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4) 텔레비전 교회

텔레비젼 교회는 20세기와 같은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교회의 형태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많은 수의 나이든 사람들이 은퇴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컴퓨터의 모뎀을 통해 집에서 근무한다. 21세기의 텔레비젼 교회는 1990년대에 그냥 설교를 듣는 것과는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케이블 접속을 통한 텔레비젼 프로그램은 서로간에 응답을 시도하고 방송자와 시청자간에 계속되는 의사 소통을 가능케 할 것이다. 또한 케이블을 통해 가상 현실을 이용한 예배에 직접 참여하는 것과 같은 기술적 발전에 이를 것이다.

(5) 가상교회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가상교회를 가속화하여 교회의 유형적 가시성은 사라지고 컴퓨터와 연결된 화상 예배를 통하여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기존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웅장한 건물과 첨탑은 더 이상 교회의 상징이 아니며 목사의 설교 장면도 예배의 중심은 아니다. 가상교회는 예배당에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교통이나 사업 등 미래 사회의 제반 여건에 따라서 집이나 차에서 화상으로 드리는 예배일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예배는 선택적이 될 것이고 교회는 자연히 선택의 대상이 되기 위하여 경쟁적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상교회는 공간을 초월한 예배를 드리게 된다.

(6) 전통적인 교회

전통적인 교회들은 놀랍게도 21세기에 성장할 주요한 그룹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전통을 무시하는 비전통 교회들에 대해서 아주 많이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변화에 역반응하고 통제의 상실에 상당히 놀라워하고 있으며 미래의 결과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다. 즉 과거에 되어져왔던 방식들에 대한 상당한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전통교회는 많은 현대의 요소들을 병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적절한 예배와 현대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성공적인 전통교회는 보다 뛰어난 전통들을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과거에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그 과거를 좋게 기억할 것이다. 과거가 미래를 위한 자리를 얻게 된다면 오늘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 될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대로 미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교회는 그 패러다임의 상당한 변화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교회는 분명히 교회의 내향성보다는 외향성을 요구받게 될 것이고 이러한 사회의 요청은 결국 교회로 하여금 사회성에 관심을 가지게 할 것이다. 교회의 사회성은 여러 가지를 요구받게 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 스스로가 그러한 요구에 스스로 준비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요구에 가장 잘 응답할 수 있는 교회는 바로 교회의 교회됨에 있어야 한다. 교회의 교회됨은 케리그마,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에서 완성된다. 이러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21세기를 주도할 문화를 잘 이해함으로써 더욱 잘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제 4 장 문화적 요소를 통한 교회의 활성화 방안

우리는 앞장에서 21세기 문화가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며 교회가 어떠한 형태와 형식을 가지고 나타날 것인가에 대해서 연구해 보았다. 이러한 21세기의를 이끌어나갈 사회의 현상들은 매우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사회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의 문화도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현상은 여러 곳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복음을 어떠한 방법으로 전해야 하겠는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그 당시를 이끌어가는 문화적인 요소들을 적절히 잘 활용을 해서 복음을 전하는 데 그 도움을 받았다.
제 4 장에서는 21세기를 이끌어갈 문화적 요소를 살펴보고 그러한 문화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어떻게 복음을 올바로 전할 수 있으며 복음을 가장 바람직하게 올바르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연구하려고 한다.

1. 문화적 요소

어떤 의미에서 21세기의 교회는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최대의 황금 시대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21세기는 정보화 사회 그리고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 속에서 공간적인 거리감이 거의 없어지는 과학의 시대가 되었고 앞으로 어떤 통신기기가 더욱 발전할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특히 '매스 미디어'는 온 지구를 하나의 안방처럼 만들었다. 지배적인 매체의 변화를 통해 문명의 변화를 말하는 맥루한은 인쇄매체 시대가 인간의 다섯 감각 중 시각을 비대화시켜 직선적 사고와 합리주의,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텔레비젼등 전자매체 시대에는 음성과 청각, 만짐과 촉각 등 옛날 부족 시대의 중요했던 감각이 부활하면서 감각이 총체적으로 복원되어 재부족화가 진행되리라고 예견했다. 맥루한의 견해에 의하면 인쇄문화의 '핫 미디어(hot media)'는 정보를 축적하고, 자료를 분류하고, 논리적으로 종합한다. 그러나 21세기의 전자문화는 '쿨 미디어(cool media)'로서 특징 지워진다.이 미디어는 개인적인 탐여, 깊은 의식, 전체 감각, 직접성, 전율에 찬 발견을 가져옴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미디어이다.
교역자들과 교회의 어른들은 교인 수가 줄고 참여가 줄어드는 현상을 에이즈, 음란 비디오, 오렌지족, 노래방, 뉴에이지 등과 연계시키면서 '악마'와 '타락'이라는 단어 사용하기를 서슴지 않아 왔었다. 설교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교회의 집안 단속이 강화되면서 헤비 메탈 등의 대중 음악이나 '사랑과 영혼(Ghost)' 혹은 조지 윈스턴 등 뉴 에이지로 치부된 영화와 음악에 대한 경계 강좌를 연이어 개최했다. 그러나 구역장의 단속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사랑과 영혼'은 그해 최대 흥행을 기록했으며 뉴 에이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소리에 맞춰 흥얼거리는 것이 현실이다.
종교만이 소외, 긴장, 박탈감의 사회심리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비록 종교가 심리적 안정과 통합, 안전의 느낌과 보상 심리, 정신 치유적 효과를 제공한다고 해도 그러한 해결을 해주는 기제가 종교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종교의 '기능적 대행물'이라 부른다. 이 기능적 대행물 중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가 산업이다. 여가 산업의 발달은 여러 가지 취미, 오락, 유흥을 위한 편리하고 다양한 시설들과 도구들, 방법들과 수단들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것들이 이제는 복잡하고 지쳐있는 현대적 삶의 리듬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여가 산업의 산물들에 몰입하면서 많은 현대인들은 긴장을 풀고 고독을 달래며 좌절감을 잊거나 극복하려고 한다. 텔레비전, 영화, 연극, 스포츠, 위락 시설, 유흥 시설 등의 발달이 여기서 큰 몫을 차지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기능적 대행물들의 출현으로 인하여 인간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심리적인 위기의 문제들의 해결에 종교가 미치는 영향은 약화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위기 극복을 위해 종교나 수많은 기능적 대행물들 가운데 하나를 또는 여러 가지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것을 비이거는 '소비자 선호'로, 루크만은 '소비자 성향'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제 종교에 관한 한 '운명의 시대'에서 '선택의 시대'로 바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영상 시대에 자라난 새로운 세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그 복음에 의하면 변화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요소를 이용한 방법인 것이다. 문화를 이루는 문화적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결정적인 문화는 함께 느끼고 호흡하고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문화 바로 영상 문화인 것이다.
기독교가 신세대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 준다는 것은 기독교의 절대적 가치관을 신세대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신세대에게 절대적 가치관을 형성해 주기 위해서는 가치관 교육의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고 이를 전달하기 위한 풍부한 종교 경험을 전달하며, 절대적인 관계 형성의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상 문화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게 될 21세기에 복음을 이러한 문화로 재해석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21세기는 영상의 매체가 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21세기를 대표할 만한 영상 문화가 교회에서 어떻게 복음을 올바로 전하는 데 사용되어질 수 있는지 그 문화적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복음을 위하여 사용되어질 수 있는 문화적 요소들로는 영화와 연극을 생각할 수 있다. 이제 그 하나 하나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영화

21세기를 준비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영상의 문화이다. 21세기 뿐만 아니라 현재의 세대를 중추적이로 이끌어가는 대다수의 30-40대의 세대들도 칼라 TV와 영화에 의해서 커다란 영향을 받고 살아왔던 세대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문화의 방향은 더욱더 강력한 영상 문화에 의해서 지배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많은 정보를 빠르게 그리고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영상의 문화이다.
많은 젊은 세대들은 빠르게 전개되는 영상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느린 템포의 이야기와 화면은 젊은 세대의 눈을 사로잡지 못한채 그들의 집중력을 흐리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세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러한 영상의 문화를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어떻게 활용하고 더욱더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21세기를 준비하고 복음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21세기의 영상문화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화이다.
영화란 '필름(film)의 예술로서 광선에 의해 영사막(screen)에 투사된 필름의 영상이 관객에게 전달되어 미적 반응을 일으키는 예술형태'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필름, 영사막, 관객을 각각 독립된 요소로 보면서 이것들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볼 때 필름을 통한 메시지가 영사막이라는 기재를 통하여 관객에게 전달되어 작품의 목적 대상인 관객으로 하여금 미적 반응을 일으키는 커뮤니케이션의 수신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 형태로서의 영화는 여타의 예술매체와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영화는 다른 예술의 기본적인 특성을 자신의 풍부한 조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회화나 조각과 마찬가지로 선, 질감, 색채, 형식, 질량 등을 사용하며, 또한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상호작용에도 의존한다. 음악이나 시처럼 복잡하면서도 섬세한 운율과 이미지, 은유, 상징을 사용하기도 하고, 무용이나 무언극에서처럼 움직이는 이미지를 통해 일련의 운율적 재질을 창조하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처럼 시간과 공간을 이용하여 무한히 넓고 깊은 차원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무수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지속적인 영상의 역동성에 있어서는 어떤 예술과도 다르다. 영화는 소설이나 시처럼 인쇄된 지면의 추상적인 상징이 독자의 두뇌작용을 통해 시각영상과 음향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시각 영상과 음향을 통해 의사 소통하는 예술인 것이다.
문학작품은 한 사람의 작가가 그의 상상력과 언어나 문자의 표현능력을 가지고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개개인의 독자에게 전달하지만,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표현방법을 동원하여 제작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전달된다. 영화는 한 개인의 감상과 미적 체험의 매개체인 동시에, 방대한 관객을 가지고 있는 예술작품이며, 대중의 생활에 변화를 주고 영향을 끼치는 매스 미디어이다. 영화는 인간을 탐구하는 좋은 매체로서 훌륭한 영화는 인간에 관한 깊은 통찰력을 기르게 해주며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시 말해, 영화는 현대의 주제를 현대인 특유의 강조점을 가지고 호소력 있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예전의 어떤 문자기록이나 유물도 '이미지(image)'만큼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절히 증언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미지들이란 문학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풍부한 증언이 된다. 물론 이 말이 예술을 단순한 기록으로만 간주함으로써 예술이 가지는 표현력과 상상력을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선 안된다. 작품의 상상력이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그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예술가 자신의 체험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누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발달된 인간사회에는 두 가지 종류의 언어가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손으로 쓴 것이나 인쇄된 것을 눈으로 읽는 언어이다. 말하고 듣는 언어는 음성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사상, 감정을 전달하는 매우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는 소리는 시간적으로 계속 생성되고, 생성된 소리는 발음이 형성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 음성이 특징이다. 한편 또 하나의 언어인 눈으로 읽는 언어는 돌에 새기던가 종이에 그려서 나타내기도 했는데 여기에서 발견된 것이 글로 나타낸 쓰여진 문자다. 문자란 음성을 시각적으로 표시한 기호에 불과한 것으로 근본은 역시 음성인 것이다.
말하는 언어와 쓰여진 언어는 우리가 그 뜻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언어지만 말하는 언어는 단어 하나 하나를 끊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연속해서 말이 이어져 나가게 되고, 이렇게 하여 이어져 나가는 말 속에는 자연히 희로애락의 감정이나, 말하는 사람의 개성이 포함되어 전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입으로 말하는 언어를 문자로 써서 나타낼 경우에는 막힘이 없어 이어져 나가던 말이 끊겨진 단어로 눈에 보이게 나열이 된다. 즉 쓰여진 언어란 시각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말하는 언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보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문자언어와 다르다. 니체(F. Nietsze)에 의하면 낱말은 실재를 지시하거나 그 실재에 부착된 표지가 아니라 세상의 실재를 대신하는 '은유의 무리(an army of metaphors)'라고 했다. 그러나 영화 화면 상의 실재는 낱말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달된다. 영화 구문법은 '실재에 대한 비은유적 질서(nonmetaphoric order of things)'를 창조하며 그 결과는 문자언어가 지배하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지적, 미적 경험이다.
영화는 의사전달의 심오한 형식이다. 특히 자유로우면서도 지속적인 영상의 역동성에 있어서는 어떤 예술과도 다르다. 영화는 시각, 음향, 움직임에 의한 동시적인 의사소통이 수월하므로 회화나 조각에 비해 한결 복잡한 감각적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는 제한적인 물질적 토대를 가지고서도 종교경험이 문자로 되어질때에 나타나는 축소, 보존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특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인간의 지적, 감각적, 감정적 감수성을 통하여 보다 깊이 있고 폭넓은 삶의 인식과 방식을 깨닫도록 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대리 경험으로 실감나게 만들어 주는 미디어이다. 영화에서 얻어지는 대리 경험은 문학작품과 같이 긴 기간에 걸쳐 읽는 중에 서서히 맛보는 것이 아니라 상영하는 짧은 시간 속에서 강렬하고 인상깊게 일어나기 때문에 그 심리적 영향도 다른 어떤 미디어보다 깊고 강하다. 영화는 영사막에 커다란 화면을 투사함으로 많은 관객에게 동시에 전달한다.
그리고 영화는 어떠한 것이든지 극화성을 지니고 있다. 자연을 그대로 재현한 기록영화, 혹은 현실을 재구성한 만화영화나 극영화 속에는 문학이나 연극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극화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흥미가 유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내용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복음의 내용을 더욱더 가깝게 다가가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영화의 장점이다. 영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신앙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복음의 의미를 지니는 영화의 특성은 인간에 대한 설득을 시도하면서 숭고한 진리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장 단순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2) 연극

한국의 기독교 상황에서 연극은 어떻게 보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적 요소였다. 적어도 194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 전국 교회에서 연극을 하지 않는 교회는 없을 정도로 그 활동은 깊고 넓었다. 그러나 교인들과 주민들에게 아낌을 받던 연극이 오늘날에 와서는 그들의 관심 밖에 존재하게 되었다. 현대 교회에서는 거의 연극을 공연하지 않고 있다. 한다고 해도 청년회나 학생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유년 주일 학교 학생들이 할 정도로 한국 교회의 연극 활동의 현실은 비참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연극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문화적 요소이다. 현대의 많은 기술적 발전으로 인하여 또한 교회들의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발전에 의해서 연극의 기술도 우리에게는 그렇게 멀리만 있지는 않다.
예술의 모든 장르가 다 각기 지닌 개성이 있고 그 개성은 그 예술의 생명을 존속시키고 있다. 연극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연극이 다른 점과 구별되어야 할 점은 '인간주체'의 에술이라는 것이다. 다른 어떠한 예술보다도 연극의 주체는 인간이고 그 인간에 의해서 연극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음악도 인간이 작곡하고 인간이 연주한다. 소설도, 시도, 미술도, 영화도 만약 그것을 예술이라고 인정한다면 그 주체는 인간이다. 그러나 연극과 다른 점은 그것에는 매개체가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인쇄물, 음악은 악기, 영화는 필름, 이러한 매개체에 의하여 인간에게 전해진다. 연극은 다르다 연극에는 어떠한 매개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연극은 문학, 미술, 음악, 연기 등이 모여서 이루어진 종합 예술로 취급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시대 작가나 동시대 연극인들의 연극에 대한 개념과는 관계 없이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여극을 단순한 순수 예술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예술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역사 속에서 잠시 자취를 감춘 때를 제외하고는 2,300여 년 동안 서양 연극의 이론서로서 절대적인 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회의를 품고 있는 데오도로 생크가 지적한 대로 전통적 입장에서의 극예술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포함하고 있다.

1) 연극이란 결합 예술, 혼합 예술 또는 종합예술이다.
2)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생명이 짧다는 이유에서 부차적인 예술이다.
3) 그것은 창조적인 예술과는 구별되는 해석적인 예술이다.
4) 그것은 가식적인 세계를 만들어 낸다.
5) 극본은 문학 장르상의 완전한 예술 작품이다.
6) 연극 예술은 극작, 연출, 연기 그리고 무대 예술 등 제각기 분리된 여러 가지 예술로 이루어진다.
7) 연극이란 무엇에 관한 것으로서 도덕 철학과 같이 당연히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8) 연극 비평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는 극작가가 의미하는 것을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해 주는 것이다.
9) 작품을 극작가가 마음 속에 그린 꼭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연출자, 연기자, 무대 장치가의 기능이다.
10) 연기에는 꾸밈이 포함되게 마련이다.
11) 관중이 무대상에서의 연기를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믿게 될 때 그 연극 작품은 성공을 거둔 것이다.

1945년 이후 한국에서 공연된 기독교 연극은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위의 연극론에 입각해서 공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 연극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연극에서 탈피, 연극의 본영인 제의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할 때 연극은 특히 기독교 연극은 예배이어야 한다고 스웨덴의 목회자이며 극작가인 올로프 하르트만은 주장하면서 이른바 예배극론을 전개하고 있다. 하르트만은 예배극은 연극이기 이전에 예배에 가깝게 공연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예배극은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극중 장소에 와 있다는 환각에 젖게 하는 속임수 연극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르트만은 기독교 예배극의 경우 기본이 되는 극본은 성경이어야 하고 그 외의 문학적인 여러 요소들은 성서의 뜻을 돕는 입장에서 가미될 뿐 전자와 후자의 관계는 바뀔 수 없다고 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연극은 관객이나 연기하는 사람들 사이에 구별이 없이 다같이 예배드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연극은 궁극적인 실재와 인간과의 만남을 의도하는 예술이다. 즉 거룩한 실재나 그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객에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과의 만남의 마당을 마련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에게 알리고, 인간의 소망을 하나님에게 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예배극의 클라이막스는 성찬 예식이어야 된다는 것이 하르트만의 주장이다. 그는 예배극에서 교인들은 찬송가나 교독문으로 극에 참여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찬 예식으로 극에 참여하고 그 성례가 극의 클라이막스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르트만의 예배극론을 일반화시키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는 비교적 예배에서 의식이 강조되고 있는 루터교 목사라는 점과 의식에 있어서 보수적인 북구 스웨덴인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모든 기독교 연극이 그의 이론에 따라야 될 필요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예배극론이 현재 공연되고 있는 가식적인 연극, 오락성으로 가득찬 브로드웨이의 상업극들보다 더 연극의 본질에 가깝다는 사실은 인지해야 한다.
연극은 만남의 예술이다. 연기자와 관객, 관객과 관객, 거룩한 실재와 인간과의 만남이다. 우리의 올바른 만남에 대하여 마르틴 부버는 모든 만남은 '나'와 '그것'과의 만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와 '그것'과의 만남은 순수한 만남이 아니고 이용 관계의 만남일 수 밖에 없다. 만남은 '나'와 '너'의 만남이어야 하고 그때에 비로소 순수한 대화가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했다. '나'와 '너'의 만남은 서로가 상대에 대하여 예비하거나 계산하지 않는다. 만남 그 순간에 '나'의 전 존재를 '너'에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는 연극은 바로 '나'와 '너'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가장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직접적인 만남의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를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연극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교회의 활성화 방안

한국교회의 성장은 1960년대 말기부터 1980년대 중반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러한 교회의 외적 성장은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외부로부터의 도전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은 교회를 외면하게 되었다. 1987년 한국 교회의 성장은 최고도를 이루었고 그 이후 1992년 까지는 거의 수평을 유지하는 증감이 드러나지 않은 시기였다. 그러나 1992년 이후로는 소폭의 감소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교인수의 감소는 교회수의 감소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한국 교회가 왕성한 성장을 경험하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창기의 한국의 제의 형식은 일반 세속과 분리된 교회 내부, 혹은 깊은 산중에서의 종교적 경험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1980년대 중반기를 지나며 교회의 집단 이기주의로까지 발전하게 됨은 물론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이기주의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 수와 교인 수의 감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원인들을 분석해 보면 첫째 전반적인 출생률의 감소를 들 수 있고 둘째로 이동성과 임시성이 출석교인의 감소요인으로 들 수 있다. 셋째로 교회가 수행하던 여러 가지 위로, 도움, 안정, 긴장해소의 기능을 대신해 주는 기능적 대행물의 발달, 넷째로 한국 사회의 교육 현실을 문제로 들 수 있다. 다섯째로 한국 교회의 사회성 결여를 문제로 꼽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와 교인수의 정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로는 예배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성장 제일 주의에 의해서 그동안 전도와 기도는 힘썼지만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를 드림으로 인생의 본질의 변화를 가지게 되지 못함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발전함으로써 교회와 교인들의 성장은 제자리에 머물게 된 것이다.
이 장에서는 바른 예배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문화적 요소를 통해서 과연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문화적 요소를 이용한 예배가 교회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예배의 어원적 의미

1) 구약성경에서의 의미
창세기 24장 52절, 역대하 7장 3절, 29장 29절 등에 나오는 shahah( )라는 단어는 엎드린다는 의미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부복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왕이시며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히브리인들이 취하여야 할 자세였다. 70인역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shahah를 헬라어 proskunein( )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말은 순종하는 겸손함과 깊은 존경심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aboda( )라는 말은 service로 번역되는데 이 말은 노예, 종이라는 말과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 것으로 히브리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참석할 때 자신을 지칭하는 최고의 호칭이었다(시 116 : 16). 종이라는 이 말은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찬양 기도로서 표현되었고 존중과 속박이라는 헬라의 노예 개념과는 달리 ebed( )라는 말 속에는 종과 자비로운 주인과의 관계를 알 수 있게 하는 히브리적인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사람들이 예배적 의미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신들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광스럽고 절친한 관계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ebed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latreia( )이다.

2) 신약성경에서의 의미
신약성경에서는 '예배하다(worship)'으로 가장 자주 번역된 헬라어 proskuneo( )이다. leitourgia라는 말은 성소에서의 예배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예전의식과 관련이 있으며 본래의 뜻은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는 의미이다. 소도시 국가였던 아테네를 위하여 일해야하는 의무에 사용된 단어였다. 그 후 이 말은 기독교 예전 특히 성례전 의식이나 그 외의 특수한 의식을 집례할 때 활용되어 졌으며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순종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의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2)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의 기본적인 임무 중의 최우선적인 것은 예배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느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설정해야 하는 까닭은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부름받은 무리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깨닫고 거기에 감격적인 응답을 보내고 있기에 그러하다. 이 감격과 응답은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받게 되며 말씀을 통하여 또 하나의 은혜와 만남을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예배의 의식은 날이 갈수록 모든 교회로 하여금 공동체 의식을 더욱 깊게 해주고 있다. 개혁 교회의 중심적인 신앙 지침서였던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에 보면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대답으로서 "교회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은혜의 동참자들이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며 예배하는 무리들의 공동체"라고 명시하고 있다.
예배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드리는 예배가 "나"라는 개인보다는 "우리"라는 전체성을 언제나 내포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오늘의 교회가 대형화됨으로써 우선적으로 발생되는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소외 또는 격리된 개체들이다. 이들은 예배의 현장에 그저 나타났다가 돌아가는 존재들인데 그 속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일 교회의 규모가 커가면 커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있다. 나와 하나님과의 연관만으로 모든 것을 단수적 개념에서 만족해 버리는 오늘의 경향은 교회 내의 새로운 고립주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예배 복고 운동의 주역들은 초대 교회의 기본 성격을 예배라는 차원에서 분석 연구하면서 예배란 경건한 개체들의 모임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두의 공동적 행위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교회가 예배의 공동체로서 존속하고 계속적으로 발전해 가는 데 필요한 요소들은 주로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기독교의 교단적 배경에 따라서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성경에서 어떤 요소만은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는 강제적인 규정이 없는 한 다양한 형태의 예배 요소를 큰 문제로 삼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기독교의 공통성을 찾는 데 절대로 필요한 것이기에 그 활동도 대단히 열심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1937년 에딘버러에서 개최되었던 신앙과 직제 연구를 위한 "제 2 차 모임"이라고 하겠다. 그들은 1939년까지 연구를 계속했고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여기에서 연구팀은 그 문제를 크게 셋으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성만찬 중심의 예배를 통하여 예배하는 교회의 공동체가 존속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동방 교회이며 성례전 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이들에게는 다른 의식들은 모두 부가적이고 또 이 성례전을 위한 준비라고 규정짓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아직까지도 동방 교회 속에 건재해 오고 있다.
둘째는 설교 중심의 예배를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로 인정하고 있는 교회의 형태이다. 성경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언어로 증거하고 선포하는 일이 예배의 공동체를 살찌게 하고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고 설명한다.
셋째는 성령을 모시는 것을 예배 공동체의 구심점으로 여기는 교회이다. 여기에서는 예배의 전통적인 예전이나 준비된 기도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오늘의 현장에 임재하셔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만족하면서 심령이 새로워지기를 원하는 예배의 형태이다.
궁극적으로 교회란 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동일한 자녀로서 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며 경배한다는 것은 "우리"라는 개념의 공동체가 곧 교회임을 충분히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깨어질 때 교회는 그 호흡을 잃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호흡을 되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예배를 통해서이다. 예배는 잃어버린 공동체의식을 살리는 데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길이된다.

(3) 예배의 역사

1) 초대교회 예배
기독교 예배가 계시에 근거한 것이라 볼 때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의 성육신,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에 기초하여 새로이 형성되기 시작한 예배의 내용이나 형식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원형으로 보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는 마틴(Ralph P. Martin), 언더힐(Evelyn Underhill), 쿨만(Oscar Cullman)등이다. 쿨만과 언더힐은 성례전적인 접근을 하고 있으며, 마틴은 삼차원 종합적 접근을 하고 있다.
언더힐은 그의 저서 Worship에서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가지 종류의 예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즉 예수가 가르친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선하고 직접적이고 충성스럽고 현실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응답인 예배와 공관복음서에 쓰여진 새 공동체로 표현되는 예배이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예배는 공관복음서와 주의 기도, 바울서신 등에 나타나는 것이며, 새 공동체로 표현되는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언더힐은 초대교회는 은사적이며 성찬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며 떡을 떼는 일과 기도하기를 계속하는 것은 초기교회의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비가시적이지만 생생하게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틴은 Worship in the Early Church에서 쿨만이나 언더힐의 주관심사였던 영적 은사 차원과 성례전적 차원을 포괄하는 제 3차원으로서 교육적 차원까지 포함시켜 말씀의 증언으로서의 설교와 교육을 포착함으로써 신앙과 교육의 공동체성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에 초대교회 연구 중에서 그 권위가 인정되고 있다.
삼차원에서 첫째 차원은 신앙고백, 기도, 찬송을 포괄하는 '카리스마적 (Charismatic)차원'이며, 둘째 차원은 설교와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뜻에 응답하도록 하는 차원으로서 '디닥틱(Didactic) 차원', 그리고 셋째 차원은 공동 식사, 세례, 성만찬을 포함하는 '세크라멘탈(Sacramental)차원'이다.

2) 중세시대 교회예배
초대 교회에서는 은사적인 측면, 성례전적인 측면, 교육적인 측면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었으나 중세시대 교회에서는 미사라는 성례전적인 예배행위가 집행되면서 예배형식에 대한 이해와 경험에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예배에 대한 신비적 이해의 주요결과는 바로 미사였다. 미사 속에 하나님의 현현이 이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의식을 강조하게 되어 예배는 의미 변질과 더불어 형식이 강조되었고 은사적인 측면은 무시되었으며 말씀사역은 고정된 책자에 의존하여 생명력이 없는 단순한 기록을 읽는 데 치중되어 강론없는 예배로 전환되어 간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모습은 상실되고 면죄부 판매와 같은 계속되는 모순 속에서 허덕이는 교회로 변질되어 갔다.

3) 종교개혁시대 교회예배
종교개혁은 단순히 예전에 대한 불만과 그 시정을 쟁점으로 하여 발생된 것은 아니며 교황제도와 지나친 의식주의, 그리고 비성경적인 모든 사실들에 대한 인식 속에서 성경중심적 예배로 재형성하려는 시도였다. 루터(Martin Luther)와 깔뱅(John Calvin)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주의 만찬 식탁에서 이루어진 예배자들의 교제 속에서 말씀의 강론이 절정을 이룬 최초의 성만찬을 표준으로 하여 매주 성찬식을 진행하려고 했다.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례예식에서 말씀 사역을 실제로 배제할 만큼 의식적 요소에 치중한 반면에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형성시키고 말씀 사역을 신앙과 예배의 기초로서 강조점을 두게 했다. 그럼으로써 말씀사역이 기본적 중심주제로 간주됨으로 예배는 마땅히 합리적이며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의 조성이 가능하게 되어 알아 들을 수 없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성찬예식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있었으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여러 교파들이 생성되면서 말씀 사역이 성찬 예식과 병행되지 못하고 말씀 사역에만 강조점이 두어지게 되었다.

4) 현대 교회예배
종교개혁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성경중심, 말씀중심의 예배에 치중하게 되면서 성례전적 측면과 카리스마적인 측면이 극히 약화된다. 이러한 침체를 회복하기 위하여 18세기에 영국을 중심으로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난다. 부흥운동의 결과로 성만찬 예식은 더욱 그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성령운동을 오순절주의 운동이라고 하는데 이 운동의 특색은 은사적(Charismatic)이라는 것이다.
카톨릭 내에서도 자성운동의 일환으로 19세기 후반부터 예전운동이 일어난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도 파급된 예배이다. 이 운동은 주로 의식적 경향을 띠지만 카톨릭 교회로 하여금 예배에 있어서 성경낭독과 설교의 재인식, 그리고 미사에서의 회중의 참여라는 결과를 낳게 했다. 그 성과는 제 2 회 바티칸 공의회의 예전운동에도 삽입됐다. 카톨릭교회가 이와 같이 말씀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자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성찬 예식을 강조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18세기 이성주의의 영향으로 예배가 이지적이며 논리적인 경향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경향에서 탈피하여 초대 교회의 예배 원형에 가까운 예배 의식으로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4) 한국 교회 예배의 문제점

우리는 앞에서 교회가 살아 숨쉬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예배임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교회와 교인수가 정체되어 있는 것은 예배가 살아 숨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과연 우리의 예배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로 한국 교회 예배의 문제점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주관주의이다. 예배는 처음부터 공동체적인 행동이며 초대 기독교 예배에서는 "그리스도의 몸", 즉 부활하신 분의 영적 몸으로서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목표를 두고 있다. 공동체성을 띤 성례전의 제단이 설교 중심의 강단으로 바뀌어짐에 따라 기독교는 점진적으로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경건주의적인 모습으로 바뀌어간 것이다.
둘째로 목회자 중심의 예배이다. 예배에 함께 참여하는 회중은 단지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있다. 자칫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으로서 혹은 듣는 사람으로서 예배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예배는 회중과 함께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기복 신앙적인 예배이다. 진정한 예배는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도록 하는데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헌신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헌신하도록 변화되는 삶을 나누는데 예배의 진정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에서는 먼저 복을 받기 위해 예배드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예배의 진정한 본질을 왜곡한 결과이다.

(5) 21세기 문화적 요소를 통한 교회의 활성화 방안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배에 있다. 교회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가 살아 숨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살아 숨쉬는 예배는 예배를 준비하는 몇 사람만이 준비하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를 함께 드리는 회중들도 함께 예배와 호흡해야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예배를 위해서 우리는 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신학적인 판단을 해 주어야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세대는 문화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을 세대임이 틀림없다. 교회가 세상의 문화에 의해서 이끌려 간다면 교회는 본래의 기능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살아있는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교회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은 것이다. 교회는 세속 문화에 이끌려 가는 존재일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훌륭한 문화를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그 문화가 시대를 이끌어 가는 주류의 문화라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문화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신학적 바탕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적인 예배가 지금까지 훌륭하게 그 역할을 다해왔음을 알고 있다. 한국 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는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어 왔다. 하지만 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부작용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예배는 교회를 살리고 조국을 살리고 나아가서 온 민족을 살리는 힘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21세기는 한가지의 방법과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다. 다가오고 있는 21세기는 여러 가지 가치관과 삶의 방식들이 뒤섞여 있는 매우 다양한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결코 한가지 방법만을 고집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형식도 결코 한 가지로 만족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우리의 교회는 다양한 형식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르게 예배를 드리느냐이다. 우리의 교회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 있는 것은 교회 스스로가 가장 중요한 온전한 예배를 드림에 게을리 해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예배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숨쉬는 교회, 삶의 변화가 있는 교회, 그리고 공동체로서 함께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이 있고 섬김이 있고 교제가 있는 교회여야 한다. 이러한 3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 교회를 우리는 활성화되어진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이다. 교회의 이러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예배이다.
초대 교회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올바른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서로 섬기는 교회, 교제가 있는 교회로서 예배가 드려졌기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000년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전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올바로 전파되고 있는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예배 속에는 얼마나 큰 기쁨과 감사가 있는가? 우리가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21세기는 엄청난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특히 영상 문화의 빠른 발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큰 선물이다. 우리는 이런 때에 더욱더 예배를 올바르게 드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연 예배를 올바르게 드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들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많은 문화적 요소들 가운데 예배를 통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문화적 요소는 바로 영화와 연극이다. 예배에서 사용하는 영화나 연극은 일반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과 같은 2시간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배를 돕는 도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예배의 순서 중에, 예배의 말씀 중에, 예배의 교제 중에, 예배의 성례전 중에, 예배의 기도 중에, 예배의 찬양 중에 우리는 이러한 영화나 연극의 극적인 기술들을 이용하여 온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 21세기는 규모가 큰 교회뿐만이 아니라 규모가 작은 교회도 함께 하는 시기이다. 21세기의 교회는 살아 호흡하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는 기도와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온 회중이 함께 살아 호흡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준비해야 한다.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영화와 연극과 같은 문화적 요소들은 예배를 준비하고 드리는데 있어서 훌륭한 도구들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역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된 스텝진들이 있어야 한다. 그 모습은 팀 사역의 모습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준비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각 분야에 재능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헌신하고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신세대를 포함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인제사장직과 같은 소명운동에 참여토록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면서, 이제 문화적, 예술적 내용물이 가져야할 형식, 양식상의 제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한 태도와 연구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더불어 영상 세대를 위한 철저한 선교상의 연구와, 기량 훈련, 창작 훈련이 요구된다. 이 세상에 나가 있는 사람이 직업을 선택할 때, 단순히 그 직업이 생존을 위한 수단이 아닌 소명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하여 자신의 직책을 통하여 이 세계를 재창조하려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동참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이러한 준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는 21세기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21세기를 맞이하며 기대에 찬 모습으로 우리의 예배를 준비하여야 한다. 진정 살아 숨쉬는 교회의 활성화된 모습을 기대하며...















제 6 장 결 론

교회와 문화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사람들에게 문화적 위임과 복음적 위임을 명령하셨다.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문화를 이루면서 살아왔으며 그 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해 왔다. 문화는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고정된 유형의 것이라기 보다는 부단히 유동하는 것이다. 문화란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삶과 생활 양식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문화는 고립된 어떤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한 문화가 스스로 개선하고 승화되기도 하지만 다른 문화와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크든 작든 언제나 변형되고 수정된다. 따라서 교회는 복음의 말씀을 문화를 이용해서 나누고 실천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21세기는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힘들 정도의 빠른 기술적 발전과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21세기는 토마스 모어가 말하는 이상향인 '유토피아'이고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말한 온통 황금과 금은주옥으로 깔려 있는 '아틀란티스'이며, 캄파넬라가 태양 에너지를 완벽하게 활용하게 되는 '태양의 나라'이며, 고통이 없는 희망과 환상의 섬 '이어도'인가? 인간의 기술과 산업은 극도로 발전하고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시대가 될 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기술의 발달과 풍요만으로는 이상향에 살 수 없다. 오히려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부정적인 미래가 될 수 밖에 없고 인간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반대개념인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질 것이다. 이런 미래라는 시간은 예윽 불허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며 탈냉전과 함께 국가 분열로 세계는 점점 자국의 이기주의와 민족 분리주의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원심적 분리와 더불어 구심적 통합이 불가피하며 세계를 하나의 단위로 묶는 여러 경제 불럭을 위시한 집단체제들이 많이 형성되고 있다. 탈냉전과 미래 세계는 21세기의 세계가 향하여야 할 방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분열과 통합의 이중구조, 이데올로기의 종식과 세계 방향성의 상실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21세기의 미래 사회이다.
이러한 불확실한 사회를 붙잡아 줄 힘을 교회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그 본연의 임무를 게을리 할 때 교회는 흔들리는 사회속에서 함께 표류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그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예배를 통해서이다. 문화적 요소들을 이용한 예배를 기획하고 드림으로 회중들이 예배를 함께 느끼고 그 안에서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배의 준비자체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는 미래가 불확실한 21세기를 이끌어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위에서 살펴본 연구를 통해서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문화적 요소와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교회는 분명 제 역할을 다할 때에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힘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예배가 바르게 드려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예배를 바르게 드리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문화적 요소들을 통해서 회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잘못드려지고 있는 예배를 보면서 바른 신학과 신앙이 신학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느낀다.
21세기의 교회는 영상의 문화 속에서 자라온 세대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주어야 할 신앙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모두 맡고 있다. 이들은 점점 신앙을 구태의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때에 교회는 올바른 신앙을 예배를 통해서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세대들의 신앙 교육에 있어서 문화적 요소를 이용한 예배는 분명 21세기의 새로운 예배 모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요소를 이용한 예배가 단순한 흥미 거리가 되지 않도록 신학적으로, 기술적으로 준비해야할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이러한 준비가 제대로 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것은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인 것이다. 교회가 활성화 할 수 있는 데에 가장 중요하고 보완되어져야 할 것은 바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참 고 문 헌

Elmer L. Towns, 성장하는 교회는 무엇이 다른가?, 김홍기 역, 서울 : 요 단출판사, 1994.
이성희, 미래사회와 미래교회,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96.
김영한, 21세기와 개혁신학I, 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John Naisbitt, Megatrends, Ten New Directions Transforming Our Lives, 서문호 역, 서울 : 원음사, 1992.
존 나이스비트 & 패트리셔 애버딘, 메가트렌드 2000, 김홍기 역, 서울 : 한국경제신문사, 1996.
제레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이영호 역, 서울 : 민음사, 1996.
Daniel Bell, 제 3의 기술혁명, 서울 : 한국통신출판부, 1992.
로버트 E. 웨버, 기독교 문화관, 이승구 역, 서울 : 도서출판엠마오, 1984.
김명용, 열린 신학 바른 목회론, 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7.
하워드 A. 스나이더, 21세기의 교회의 전망, 박이경&김기찬역, 서울 : 아 가페출판사, 1994.
리드 앤더슨, 21세기를 위한 교회, 황서철 역, 서울 : 솔로몬, 1997.
최창섭, 교회커뮤니케이션, 서울 : 성바오로출판사, 1993.
David Bordwell & Kristin Thomson, FILM ART : AN INTRODUCTION, 주진숙 & 이용관 공역, 영화예술, 서 울 : 이론과 실천, 1993.
이원규, 한국 교회의 현실과 전망, 서울 : 성서연구사, 1984.
Francis Brown,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with an Appendix Contaning the Biblical Aramic, Oxford : Clarendon Press, 1907.
Ralph P. Martin, Worship in the Early Church, Grand Rapids :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4.
A. S. Herbert, Worship in Ancient Israel, Virgina : Richmond, 1954.
Frank Segler, Worship - Its Theology and Practice, Tennesse : Broadman Press, 1967.
Pehr Edwell (ed), Ways of Worship, New York : Harper and Brothers Publishers, 1951.
J. G. Davies (ed.), A Dictionary of Liturgy and Worship, London : SCM, 1972.
Walter M. Abbott, S. J. (ed.), The Dictionary of Vatican II - In a New and Definitive Translative with Commantaries and Notes By Catholic, Protestant and Orthodox Authorities, NY : Herder and Herder Association Press, 1966.
Oscar Cullman, The Early Christian Worship, 이선희 역, 원시기독교예 배,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4.
Horton Davis, Christian Worship, Oxford : Church Army Press, 1916.
Robert E. Webber, Worship - Old & New, 정장복 역, 예배의 역사와 신 학, 서울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부, 1988.
은준관, 기독교교육현장론,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정장복, 예배학개론, 서울 : 종로서적, 1985.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2.


논문 및 정기 간행물

김명호, "문명의 전환과 종교의 새로운 가능성", 기독교 사상, 1993년 4월
이원규, "종교성과 삶이 만족성에 대한 경험적 연구", 신학과 세계 1988년 가을.
장종철, "한국의 신세대와 기독교", 기독교 사상, 1990년 2월.
이반, "선교와 예배 형식으로서의 연극", 기독교사상, 1970년 10월.
이반, "현대연극과 기독교", 기독교 사상, 1986년 11월.
이요한, "한국 교회는 왜 성장 둔화의 침체에 부딪혔는가", 월간목회, 1992 년 10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소요리문답.
제 2 스위스 신앙 고백.
국정신문 특집, "고속정보와 앞당겨 국가 경쟁력 높인다", 1994년 4월 26 일.
Newsweek, "Megacities", 한글판, June 26, 1996.
USA Today, November 14, 1995.
일간스포츠, "원터치 문화 '플리퍼 족' 양산", 1996년 9월 9일.









출처 : 완기네
글쓴이 : 완기짱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