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세 가지 용도'의 발견과 그 발전 역사
권호덕 교수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보는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어떤 인물을 평가할 때 유물론적인 시각을 지닌 자가 그를 본다면, 이 인물의 정신 세계의 위대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단지 재물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할 것이다. 그 보는 시각은 그 사람의 인격을 좌우하는 것이다.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율법과 복음'이라는 構圖(구도) 안에서 율법을 복음과 대립되는 그 무엇으로 이해했다. 이 시각은 매우 단조롭고 흑백논리에 흡사한 시각인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는 성경이 가르치는 율법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율법이 인간과 관계하여 세 가지 차원에서 그 기능을 발휘함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것을 triplex usus legis(율법의 3 용도 또는 직분)이라 불렀다. 율법의 세 가지 용도에 대한 이해는 낙하산이 떨어지듯이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이 이단집단과 논쟁을 하면서 정리되었다. 즉 이 가르침은 그 만큼 견고하게 정착된 것이다. 따라서 율법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율법의 3용도'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제 II부에서 살펴볼 것이다. 우선 여기서는 먼저 이 율법의 3용도가 어떻게 발전하여 개신교의 가르침으로 정착되어 왔는지 그 역사를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평신도들도 이젠 성경을 깊이있게 연구하면서 나름대로 신학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교회에서 설교나 듣고 얄팍한 성경공부만으로는 진리에로 나아가기가 힘들 것이다. 깊이 있는 성경연구를 통한 이런 신학정립은 결국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을 정립할 것이고 나아가 이 세상 문화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기독교 교육 내지 목회의 목적은 모든 기독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을 정립하는데 까지 가는 것이다. 율법의 용도에 대한 지식은 이 일을 도울 것이다.
그러면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또 발전했을까?
A. 멜란히톤의 발견
대부분의 전문가들의 말대로 '율법의 3용도'(triplex usus legis)에 대한 가르침은 맨 먼저, 마르틴 루터의 그림자와 같던 동료였던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그늘에 가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신학은 루터에 방불한 것이다. 앞으로 그에 대한 글들이 등장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멜란히톤은 처음부터 triplex usus legis(율법 3용도)라는 말은 사용한 것은 아니다. 여기 triplex는 3을 의미하며 usus는 용도 또는 사용, legis는 lex(법)의 소유격 표현이다.
⑴ 그는 심지어 이미 1521년에 나온 저서인 '첫 Loci Communes'(교의학)에서 usus legis(율법의 용도)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율법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여기서는 나중에 정립된 usus legis론의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가 없다. 멜란히톤은 여기서 vis legis(율법의 힘), secundus usus legis(율법의 다음 용도), opus legis(율법의 행위) officium legis(율법의 직분), sententia legis(율법의 의도) 등의 용어르 사용했다. 그는 이 교의학에서 단지 carnalis intellectus legis(율법의 육신적인 의미)와 spiritualis intellectus legis(율법의 영적인 의미) 사이의 차이점을 언급함으로써 '율법의 3용도' 쪽으로 방향을 가리켰을 뿐이다. 물론 '율법의 육신적인 의미'(carnalis intellectus legis)가 나중에 '율법의 첫 용도'인 politicus usus legis(율법의 정치적 용도)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멜란히톤은 1521년의 초판 Loci Communes에서는 율법의 그런 의미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매우 주목할만 것은 초판 이 책에서는 나중에 율법의 첫 용도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두 구절 곧 갈 3:24(lex pedagogus noster 율법은 우리의 교육자, 우리말 번역은 몽학선생임)과 딤전 1:9(lex iniustis posita 율법은 불의한 자를 위해 세워졌다)이 인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갈 3장 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 1장 8절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9절 알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멜란히톤은 이 책에서 딤전 1:9을 인용할 때 단지 부정적인 의미로 인용했다: Iusto non est lex posita.(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그럼에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여기서 "신자들은 육신을 죽일 때 그들을 도울 십계명의 용도를 지닌다"라고 말하여 율법의 셋째 용도(tertius usus legis)에 대한 씨앗을 뿌려 놓았던 것이다.
⑵ 그의 최종판 교의학 Loci Communes(1543)이 나오기까지 그 이전에 나온 Loci Communes 중에 1523년도 판과 1525년도 판은 이 문제와 관련해 거의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
⑶ 멜란히톤은 1527년의 "골로새서 주석"에서 율법의 두 가지 직분 또는 용도에 대해 말했다. 같은 해에 나온 그의 글 Visitation Articles(방문 글)에서는 분명히 duplex usus legis(율법의 2용도)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usus legis개념은 사용되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 effectus legis(율법의 효과)를 말했을 뿐이었다.
(4) 멜란히톤의 변증서인 Apologie에도 usus legis(율법의 용도)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나중의 '율법의 3용도'의 primus usus legis(율법의 제 1용도)와 secundus usus legis(율법의 제2용도)의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tertius usus legis(율법의 제 3용도)를 암시한다(p.197.18ff.). 하여튼 멜란히톤의 로마서 주석이 등장하기까지는 이 용어가 정식으로 나오지 않는다.
⑸ 로마서 주석의 전신: 이 로마서 주석의 전신은 Annotationes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unam et ad Corinthios duas(바울의 로마서서와 고린도 전후서의 각주들)에 나온다. 이 책은 학생들의 필기노트에 근거하여 루터가 1522년에 멜란히톤이 모르게 출판한 것이다. 여기서는 1521년의 '첫 Loci Communes'(1521)의 신학내용을 반영하며 usus legis 개념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독일의 루터전문가 중에 한 사람인 게하르트 에벌링에 의하면 1523년도 와 1525년에 스트라부르크에서 출판된 책을 비교해 보니 멜란히톤의 나중 해석과는 달리 usus theolgicus(신학적 용도, 제 2용도)의 의미로 율법의 사역을 증명하려고 노력한 점이다.
⑹ Dispositio orationis in epistola Pauli ad Romanos(1529)(로마서의 표현 양식): 멜란히톤은 여기서 Agricola의 디도서 주석과 루터의 시편 82편 Enarratio(해설서)가 첨가된 Haganoae apud Johannem Secerium Anno MDXXX를 사용했다. 여기에는 usus legis개념이 가끔 나온다. 또한 율법의 2용도(duplex usus)의미의 두 가지 율법의 직분(officia legis)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⑺ 로마서 주석(1532)(Commentarii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이것은 멜란히톤이 메모지에 유사한 그의 저서 '바울의 로마서와 고린도 전후서의 각주들'(Annotationes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unam et ad Corinthios duas)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쓴 로마서 주석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전집Corpus Reformatorum에 포함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율법의 2용도'(duplex usus legis)에 대한 가르침이 두 곳에 나온다. 멜란히톤은 여기서(1532주석) 롬 3:20을 주석하면서 '율법의 2용도'를 논하고 롬 5:12이하에 대한 주석에서는 그 내용만 말한다.
⑻ 그의 교의학인 Loci Communes의 1533년 판과 1535년도 판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에 율법의 용도에 대해 여기서 언급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파편조각으로 남아 있는 각주들을(1535) 모아 정리해보면 usus legis개념이 더러 나온다. 또 이것은 로마서 주석이 나온 이후이므로 적어도 '율법의 2용도'에 대해 알 것이다. 율법의 용도를 처음으로 두 가지에서 세 가지로 증가시킨 것은 1534년에 발간된 골로새서 주석 제 3판이므로 Loci Communes(1535)는 율법의 3 용도를 포함함이 틀림없다. 멜란히톤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비록 용어 그 자체는 사용하지 않지만 usus politicus(정치적 용도)에 대한 내용을 말한다. 또 그는 이 문맥에서 딤전 1:9과 갈 3:24을 인용한다(pp.279f.). 그리고 동시에 tertius usus legis(율법의 제 3용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1535년도 판 Loci Communes에서 처음으로 '율법의 3용도'를 처음으로 발전시켰다는 A. Peters의 말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또 이때 기독인의 삶이 선행이 필요함을 확립하기 위한 근저로서 칭의의 법정적 성격을 사용한 것을 보아도 그가 '율법의 제 3용도'로 향해 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⑼ Catechesis puerilis(유년부 요리문답 교육서(1540), Loci Communes(1543): 멜란히톤은 이 두 책을 통해 '율법의 3용도'를 완성시킨다. 그는 제 7부 하나님의 율법을 다루면서 십계명을 해석한 다음 부록으로서 '율법의 3용도'를 다룬다. 멜란히톤이 '율법의 제 3의 용도'에 이른 것은 그 당시 매우 위협적이던 방탕한 자유사상가인 율법 폐기론자 대항해서 싸움을 통해서였다. 이런 생각은 이미 그가 1527년에 Instruction to Parish Visitors에서 율법을 설교하는 것을 강조한 때 이미 싹텄는데 루터도 여기에 완전히 일치했다.
요컨대 멜란히톤의 경우 '율법의 3용도'는 대적들과의 논쟁, 기독인들의 교육, 그리고 진지하고 정직한 성경주석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자세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1) 자기들이 처한 상황속에서 부딪치는 문제와 고민하고 또
(2) 자기들이 정립한 신학으로 교인들을 교육하면서 그 효력을 통해 그 신학의 진위를 가늠하며
(3) 나아가 성경을 매우 치밀하고 세심한 살피는 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어떤 시대이든 신학이 바로 정립하려면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데올로기 신학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함께 반성해야 할 것이다. 지금 교회가 처한 위기를 고민하면서 그 원인을 규명하며, 지금까지 옳다고 주장하던 자신의 신학이 과연 교회를 살리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기득층을 위한 궤변이었는지 그리고 성경을 참으로 세심하게 살피고 연구했는지 아니면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변명하기 위해서만 노력을 한 것인지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인 누가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눅 1장 1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절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절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4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말하자면 성경을 자세히 살피는 자세 말이다.
참고: 평신도들은 신학의 역사적인 내용을 언급하면 지루하게 느낄 것이다. 어서 빨리 은혜롭고 달콤한 내용이 나왔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어 인간을 위해(pro nobis) 하신 내용이 바로 성경의 내용이며 동시에 자기의 백성들의 삶에 개입하시어 이루어 놓으신 것이 바로 신학작업이기 때문이다. 무속종교는 역사적인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관심은 현재 나에게 유익이 무엇인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실중심적인 삶을 살고 잇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말하며 동시에 미래의 중요한 사건에로 관심을 가질 것을 말하고 이를 위해 현재의 일에 충실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신학의 중요한 발언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과 고민 속에서 형성되었나를 기억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시고 이런 고난을 통해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을 깊이 있게 깨닫도록 만드신 것이다. 율법의 세 가지 용도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이다. 시간 속에서 참고 인내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B. 루터의 관심
이제 우리는 루터가 율법의 3용도를 발전시킨 과정을 살펴본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의 저서를 저술된 연대적인 순서로 분석해 본다.
루터 전집의 카탈로그(목록)는 라틴어로 쓴 시편주석이 제일 먼저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디모데 주석이 제일 먼저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런데 G. Ebeling은 루터가 첫 번 째 시편과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딤전 1:8을 인용하여 율법의 용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디모데전서 주석이 먼저 나온 것처럼 보이게 한다. 짐작컨대 루터는 이미 부분적으로 해석을 시도한 딤전 1:8을 시편주석 첫판에 언급했을 것이다. 루터가 디모데전서 주석을 정식으로 강의한 것은 1527-28년이다.
그러면 딤전 1:8은 어떤 내용을 말하는가? "그러나 사람이 律法을 法있게 쓰면 律法은 善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루터는 이 나중 책에서 '율법의 용도'라는 용어는 사용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율법의 용도가 무엇인지 아직 구체적으로 열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율법은 거룩한 것으로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면 유익이 있는 것이나 바르지 못하게 사용하면 매우 해로움을 지적했다. 루터는 여기서 두 가지 적 곧 율법주의자들과 율법 폐기론자인 재세례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율법의 남용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자는 율법에 너무 비중을 많 둔 나머지 율법주의로 변해 율법을 남용했고 후자는 율법을 너무 무시해 버림으로써 율법을 남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한국교회도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음을 지적했다.
우리가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루터가 매우 이른 시기에 율법의 용도의 유익과 피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⑴ 시편강의(1513/1515)
루터는 시편 1편을 주석하면서 두 종류의 사람(복있는 자, 악인)이 율법에 대한 태도가 다름을 언급하면서 복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열매를 맺게하는 매개임을 암시하여 율법의 제 3용도의 내용을 반영한다. 루터는 여기서 복있는 자를 은혜와 자유의 영 안에 있는 자라고 말하여 성령의 추진으로 율법을 묵상하고 지키는 자임을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목표로 가도록 만든다는 것보다는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그렇게 되는 느낌을 준다. 율법을 총망라하며 특히 제 3용도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시편 119:155에서 루터는 멜란히톤적인 개념은 아니라 제 3용도를 지적한다. "율법은 영적이고 영 안에서 칭의를 그리고 육신에 심판을 수행한다." 또 루터는 시편 16:3에서 "그리스도의 소원은 육신을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며 가시적인 것들을 멸시하고 영의 성화와 불가시적인 것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한 다음, 이 일을 성도 안에 이루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이것 역시 루터의 경우 율법의 제 3용도와 통하는 내용이다. 시편 16:4를 주석하면서 율법이 죄를 인식케 하는 도구임을 지적한다. 말하자면 율법의 제 2용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요컨대 루터가 시편을 저술했을 때 이미 율법의 세 가지 용도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 내용은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⑵ 갈라디아서 주석(1519)
에벌링에 의하면 루터는 갈라디아서 첫 주석에서는 usus legis(율법의 용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율법론을 발전시켰다. 루터는 갈 2:19을 주석하면서 usus legis의 전신으로서 legis uti를 한 번 언급하는데 그 의미는 "여기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우리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도록 만들며 은혜를 구하게 만든다"이다. 두 번째는 갈 3:22f을 주석하면서 언급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율법주의자들을 비판하여 이들이 율법을 사용하여 죄를 깨닫고 값없이 주어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실행하지 않고 자기 의를 자랑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여기서 율법의 제 2용도가 의미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보는 것이다. 갈 3:23 주석에서는 율법의 제 2용도의 내용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믿음을 의롭다함을 입기 전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율법 그 자체는 하나의 감옥이다. 그들은 이 감옥에 갇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율법의 힘과 두려움에 의해 자유롭게 범죄하는 일로부터 어거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정욕은 마음 내키지 않고 싫어한다. 그 이유는 정욕은 그 감옥인 율법에 대해 분노하고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참함을 인식한 자들은 진심으로 겸손해지며 은혜를 갈구하고 율법의 의를 신뢰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는 율법에 반대되는 일만하고 죄에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갈 1:11f. 주석에서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함에도 불구하고 삶의 법규를 제시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 내용은 율법의 제 3 용도의 내용을 언급한 것이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신자들을 진리 가운데 인도하고 양육하고 완전해 지도록 만들기 위함에 대한 것이다. 루터는 여기서 신자들에게 계명이 필요한 것은 육신을 죽이고 바른 삶으로 나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함으로써 제 3의 용도를 암시한다.
⑶ Kirchenpostille 교회설교집(1522)
루터는 갈 3:23-29을 해석하면서 율법의 3용도를 언급한다. 그는 여기서 "das dreyery brauch des Gesetzs"(율법의 세 가지 용도)라고 표현한다. 루터가 여기서 표현한 정의에 의하면 첫째 용도는 채찍과 같이 사회적인 차원에서 우리로 바른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고, 둘째 용도는 율법이 몽학선생으로서 인간으로 내적인 순종은 아닐지라도 죽음과 지옥을 두려워하여 외적으로나마 율법을 지키도록 만든다. 셋째 용도는 율법을 외적으로 그리고 내적으로 지키게 만든다. 루터는 여기서 율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교할 것을 말했으나 그 설명하는 내용은 아직 애매한 것들이다.
⑷ 십계명 강의(1523)
루터는 이 해 2월부터 십계명을 강의했다. 이때 그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매우 기뻐했는데 그것이 바로 duplex usus(율법의 두 가지 용도)이다. 에벌링에 의하면 이 시점이 내용적으로 볼 때 duplex usus의 가장 초기 단계이다. 루터는 십계명 가운데 제 1계명을 설교하면서 '율법의 2용도'를 설명한 것이다. 그 첫째는 육체적인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용도이며 둘째는 영적인 용도로 주어진 것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완전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루터가 이 단계에서 율법의 용도와 연관하여 상당히 정리된 견해를 지니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루터는 "소요리문답서"(1529)에서는 '율법의 3용도'를 직접 논하지는 않는다. 루터가 이 요리문답서의 앞 부분에서 십계명을 열거한 것은 율법폐기론자들과 논쟁하면서 신자들의 삶을 위한 규범이 필요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바로 율법의 3용도와 통하는 것이다. 사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루터는 1528년에 디모데전서 주석을 쓰면서 율법의 3용도를 정리했다. 요컨데 루터는 이 시점엔 1529) '율법의 3용도'가 정립되었음을 뜻한다.
⑸ 갈라디아 주석(1531/1535)
루터는 1531/35년 판 갈라디아 3:19-29 주석에서는 usus legis를 특별히 자주 사용한다. 이 주석3:12에서는 usus civilis(시민적 용도)라는 말과 usus theologicus(신학적 용도)라는 말을 설명한다. 전자는 이 세상 권세에 순복하는 것의 의미를 말하고 후자는 믿음으로 의로와지는데 율법의 용도를 말한다. 1535년 판과 1538년 판은 civilis를 politicus로 대치했다. 그가 나중에 율법 폐기론자들과 논쟁을 하면서 제 3용도도 주장하게 되었다. 그가 이들과 정식으로 논쟁을 한 것은 1537-40년이다. 그는 율법 페기론자들과 두 번 째 논쟁에서(1538 1.13) 율법의 세 가지 용도를 다 말했다. "왜 율법을 가르쳐야 하는가? 율법은 치리를 위해 가르쳐져야 한다. 이런 교육에 의해 인간은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것이다. 둘째 율법은 죄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 가르쳐야 한다. 셋째 성도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보존되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잇는 것은 루터도 율법의 세 가지 용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명확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루터는 율법의 세 가지 용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히 일찍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그것을 공식적인 표현하는 것을 나중에 했을 뿐이다. 이것은 자기의 선입관을 극복하고 정직한 주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율법론을 정립한 것도 정직한 성경 주석작업과 대적들과 진지한 논쟁 그리고 참된 친구와의 결실있는 대화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제 3용도에 대한 그의 발언은 아직 피어나지 않는 꽃망울 같은 수준이다.
이로 보건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종교개혁자들이 율법 그 자체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방적인 '율법주의적인 삶'에 대항하여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엎에서(서론) 율법주의적인 삶이 무엇이지 언급했다.
C. 칼빈의 정리
프랑스인으로서 스위스 제네바에서 일한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의 제 2세대에 속한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제 1세대의 개혁자들(루터, 멜란히톤, 부쳐)의 신학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그가 누구의 영향으로 '율법의 세 가지 용도론'(triplex usus legis)을 정립했는가 하는 것이다.
?) 루터의 영향: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1536)은 그가 1534년 Angouleme에서 저술하기 시작하여 1535년에 Basel에서 마쳤다. 그리고 1536년에 출판되었다. 그 목차 내지 형태와 내용으로 보아 루터의 '소요리 문답서'와 일치한다. 이것은 이 초판은 루터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여기서 '율법의 3용도'에 대해 설명한다. 이것은 아마 루터가 소요리문답서를 저술할 때 이미 직접적으로 '율법의 3용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율법에 대해 상당히 정립된 상태이기 때문에 칼빈이 이 율법의 3용도를 여기에 나열한 것은 루터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 멜란히톤의 영향: 칼빈의 초판 기독교강요는 멜란히톤의 Loci Communes(1535)의 영향을 받았을까? 시기적으로 볼 때는 그 가능성이 엿보인다. 칼빈이 프랑스의 왕인 Francis I에 보낸 이 책의 서문이자 기독교 변증서인 인사문을 1535년 8월 23일에 보내었기 때문에 그 해 4월 25일에 출판된 교의학 Loci Communes를 읽고 참고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이 막바로 완전히 참고했다는 당위성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초판 기독교 강요에서 1521년도 판 Loci Communes를 18번 혹은 19번 언급하는 반면 1535년도 Loci Communes는 단지 한 번 언급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한 번 언급하는 것이 '율법의 3용도'에 대한 구절이다. 이 때문에 A. Peters는 칼빈이 멜란히톤의 Loci Communes(1535)의 영향으로 '율법의 3용도'를 여기에 열거했다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만일 우리가 칼빈이 루터의 소요리문답서를 참고하여 기독교강요를 완성한 후에 십계명 해설 내용 뒤에 멜란히톤의 용어를 빌려 그 내용을 정리했다고 추리한다면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 강요 첫 두 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이는 칼빈이 초판에서는 "마지막으로 신자들 곧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이 이미 살아 있고 통치하는 이들에게 율법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표현한 반면에 둘째 판에서는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보다 더 가까운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용도"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triplex usus라는 용어가 칼빈 자신이 창안 것인가 아니면 멜란히톤으로부터 힌트를 받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역사적인 문제는 추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는 루터가 멜란히톤보다 칼빈에게 더 가까이 서 있다는 것이다.
칼빈이 1539년도 판(2판) 기독교 강요에서 Loci Communes(1535)를 5번 언급하고 최종판에서 2번을 추가하여 언급한 것을 보면 칼빈이 멜란히톤의 Loci Communes(1535)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초판 기독교 강요가 나온 시기와 2판이 나온 시기 사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2판(1539)부터는 자기 나름대로 신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해 갔다.
?) 마르틴 부쳐: 부쳐는 루터의 1522년 성탄절 이후에 출간한 갈 3:23-29 주석에서 표현한 "dreyerley brauch des gesetzs"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1525년) triplex usus라고 번역한 것을 보면 그도 일찍 '율법의 3용도'와 접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부쳐는 율법이 육신을 죽이는데 특별한 역할을 함을 지적하거나 율법이 새롭게 하는 영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저주와 죽음을 가져오지만 성령으로 구비된 자들에게는 구원을 가져온다고 말한 내용은 그가 율법의 제 3용도를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확실한 것은 칼빈이 부쳐의 주석을 통해 '율법의 3용도'에 더욱 익숙해져 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쳐가 '율법의 3용도'와 연관하여 어떻게 칼빈에게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기독교 강요 초판이 나오기 전에 부쳐의 주석을 통해 triplex usus라는 용어는 물론 멜란히톤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자료들을 부쳐(Bucer)에게서 얻었을 것이다. 칼빈이 부쳐로부터 배운 것은 부쳐가 신자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진실로 해방시키기를(liberasse)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풀어버리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나 "율법은 결코 폐쇄되지 않고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다 더 풍성히 구비될수록 각자 속에 더 많은 잠재력이 있게 된다"라고 한 말 등인 것으로 짐작된다. Wendel은 부쳐가 여기서 율법이 소생시키는 성령이 없는 자들에게는 정죄와 사망을 가져오지만 성령으로 구비된 자들에게는 구원과 생명을 가져옴을 지적한 것을 인용했다(ibid.). 사실 이 내용은 율법의 셋째 용도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 말로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언급했다.
요컨대 칼빈은 한편으로는 선배 개혁자들의 서적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당시 매우 심각하게 대두된 재세례파 내지 율법폐기론자들을 대항하면서 성경 내지 율법을 더 깊이 연구하여 율법의 3용도에 대해 자기의 주장을 정립했을 것이다.
D. 요약정리
우리는 위의 내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경우 율법의 3용도는 점진적으로 정립되었다. 이것이 정립될 때 한편으로는 성경을 정직하게 해석하려는 노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적들과 진지한 논쟁을 통해 정립되었다. 기독교 신학의 발전은 바로 논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당시에 가장 두드러진 대적은 로마 카톨릭의 율법주의과 율법폐기론자들이었다. 이런 대적들은 우리 세대에는 옷을 다르게 입고 등장할 수 있는데 신학자들의 임무는 이런 적들을 잘 규명해 내는 일이다. 따라서 개혁신학은 항상 교회가 처한 주위 상황을 분석하는 일에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회가 우와좌왕하는 것은 동키호테 같은 과거 지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로 인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또 종교개혁자들은 자기들이 처한 정황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했다. 이를테면, 칼빈은 멜란히톤의 견해를 따른다. 그런데 결정적인 포인트 곧 멜란히톤이 끝까지 루터의 견해를 따라가게 된 그 싯점에서 그로부터 벗어나 다른 길을 갔다. 이제 우리는 이 세 가지 용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차례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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